『세계윤리구상』 - 한스 큉
제1부 세계 윤리 없이 생존 없다 : 전지구적 윤리가 필요한 이유 제1장 근대로부터 후기 근대에로 제2장 무엇을 위한 윤리인가? 제3장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제휴 제4장 자율과 종교 사이의 긴장에 직면한 윤리 제5장 세계 종교들과 세계 윤리 제6장 그리스도교의 구체화
제2부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 : 진리 광신과 진리 망각 사이를 걷는 일치의 길 제1장 종교들의 두 얼굴 제2장 진리의 물음 제3장 일치를 위한 진리 기준의 탐색 제4장 일치 운동의 근본 기준으로서의 인간적인 것 제5장 대화 역량과 입장 고수 – 대립이 아니다
제3부 종교 대화 없이 종교 평화 없다 : 종교적 시대 상황의 분석 서설 제1장 기초 연구 없이 종교 대화 없다 제2장 역사는 더 이상 기록될 수 없다 제3장 종교의 흐름 체계에 대한 징후 이론의 적용 제4장 평화를 위한 일치신학 제5장 후기 근대에 있어서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요청
제1부 세계 윤리 없이 생존 없다 : 전지구적 윤리(세계 윤리)가 필요한 이유 -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다. (인류의) 생존은 세계 윤리를 기반으로 한 세계 평화가 보장될 때에 가능하다. * 1부에서 생략된 문장 : 세계 평화
제2부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 : 진리 광신과 진리 망각 사이를 걷는 일치의 길 – ‘종교 평화’ 성취를 위한 선결 요건
제3부 종교 대화 없이 종교 평화 없다 : 종교적 시대 상황의 분석 서설 – ‘종교 대화’를 위한 선행 작업
제3장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제휴 1. 왜 종교가 없이는 윤리가 없는가? 가. 종교들 : 양면적 현상 나. 인간은 종교 없이도 윤리적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다. 종교를 위한 또는 거부하는 선택의 자유 2. 상호 존중의 공동 책임 가. 제휴의 불가피성 나. 제휴의 실현 가능성
제4장 자율과 종교 사이의 긴장에 직면한 윤리 1. 윤리와 부딪치는 이성의 어려움 가. 계몽주의의 변증법 나. 구속력은 어디로부터? 2. 종교의 저항 가. 후기 형이상학적 시대? 나. 종교의 종말? 다. 종교는 투사일 뿐? 3. 윤리와 부딪치는 종교의 어려움 가. 하늘에서 떨어진 고정된 윤리적 해결? 나. 땅에는 서로 다른 해결책들이 다. 학문적 방법론 라. 우선 규칙과 안전 규칙 4. 윤리의 가능한 토대로서의 종교들 가. 인간 조건이 절대 의무를 지울 수 있는가? 나. 절대적인 것만이 절대적 의무를 지울 수 있다 다. 종교의 기본 기능
제3장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제휴 모든 세기를 통해 종교가 일정한 윤리를 위한 기본 토대를 제공하고 윤리를 정당화시키며, 윤리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가끔은 처벌로써 제재를 가해 왔다. 하지만 오늘날 세속화된 사회 안에서도 종교는 여전히 그래야만 하는가?
1. 왜 종교가 없이는 윤리가 없는가? 가. 종교들 : 양면적 현상 종교들은 옳음과 그름을 인식하는 윤리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옳음 그리고 그름에 있어 고등 종교들이 인류의 정신적 ‧ 윤리적 진보에 많이 기여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선입견에 사로잡힌 성급한 판단의 결과이며, 아울러 종교들이 이러한 진보를 가끔 방해하고 저지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이기도 하다. 가끔은 종교들이 자신들의 진실성을 진보의 추진력보다 더 적게 보여주었고, 그 대신 반종교개혁 그리고 반계몽주의의 요새로서 자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스도교는 물론 유태교와 이슬람교,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중국의 유교와 도교 역시 긍정적인 모습 그리고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다. 세계의 대 종교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승리에 찬 성공의 역사 이외에도 비밀로 남아 있었으면 하는 추문록도 소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은 ‘왜 종교를 배제한 윤리는 불가능한가?’라고 자문한다. -> 종교를 배제한 윤리가 불가능하지 않다.?
나. 인간은 종교 없이도 윤리적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종교를 배제하고서도 윤리적으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① 전기적 ‧ 심리학적 근거 : 계몽된 지성인들이 반계몽주의, 미신, 대중의 우민화 그리고 “아편”으로 타락해 버린 종교를 포기하기를 원하는가를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 ② 경험적 근거 : 종교를 신앙하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실제로 종교 없이도 윤리적인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윤리적인 삶을 영위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데 앞장서고, 가끔은 신앙인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인간의 성숙과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그리고 기타 인권을 위해 투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③ 인간학적 근거 : 종교를 신앙하지 아니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근본적인 목적과 우선권, 가치와 규범, 이상과 모델, 진실과 허위를 판단하는 기준을 발전시켜 왔고 그리고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④ 철학적 근거 :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인 자율성을 지니고 있고, 이 자율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에 대한 신앙 없이도 자아책임과 세계 책임을 인식하도록 해준다는 사실.
다. 종교를 위한 또는 거부하는 선택의 자유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물론 종교를 신앙하지 않는 사람들도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주장하고, 하나의 인간적인 윤리를 주장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신앙인이든 아니면 비신앙인이든 국제연합의 인권선언 1항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 존엄성,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모든 인간은 이성과 양심을 천부적으로 타고났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 안에서 처신해야 한다”는 내용을 인정할 것이며, 이로부터 종교 자유의 권리도 발생한다. 그러나 종교 자유의 권리는 한편으로는 ‘종교를 위한 자유’와 다른 편으로는 ‘’종교로부터의 자유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 자유의 권리는 필연적으로 ‘무종교의 권리’도 포함한다. 오늘날 많은 윤리신학자와 윤리철학자들도 인간의 모든 실천적인 결단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자율성, 즉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파기시키지 아니하는 윤리적 자율성을 주장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상호 존중, 즉,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상호 존중’이 요청된다.
2. 상호 존중의 공동 책임 가. 제휴의 불가피성 상호 존중을 통해 공동의 세계 윤리를 건설하기 위한 신앙인과 비신앙인 사이의 제휴가 불가피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의미 부재, 가치 부재, 규범 부재라는 위험이 신앙인은 물론 비신앙인도 위협하고 있다. ② 입법 이전의 동의가 없는 민주주의는 정당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윤리적인 근본 동의가 없이는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공존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③ 윤리가 없이는 인간 사회의 생존도 없다는 결과가 파생된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의견 일치가 없이는 어떠한 내적 평화도 사회적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 일정한 질서와 법률을 준수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이는 경제 질서와 법 질서도 없으며, 당사자들의 적어도 묵시적인 동의가 없이는 제도의 성립도 없다.”
나. 제휴의 실현 가능성 세계 윤리를 건설한다는 관심사와 관련해서, 신앙인과 비신앙인 사이의 제휴가 불가피하다면 이 제휴는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까? 그렇다. 왜냐하면 신앙인들과 비신앙인들은 함께 모든 진부한 허무주의, 불확실한 견유주의 그리고 사회적인 냉대를 반대하여 저항할 수 있으며,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이러한 저항을 위해 자신들을 투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전근대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유럽으로 귀환할 수 없는 새로운 유럽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정면 대결을 회피할 수 있다면, 신앙인과 비신앙인 사이의 제휴는 대단한 비중을 얻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제휴가 모든 문제점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제4장 자율과 종교 사이의 긴장에 직면한 윤리 신앙인과 비신앙인 사이의 제휴가 불가피하고 그리고 이 제휴가 정치적으로 시의적절한 것이라면, ‘우리를 이끌어가고 필요한 곳에서 장벽을 제거해 줄 수 있는 척도를 어디로부터 취할 것인가’라는 하나의 반문이 제기된다. 저명한 자연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이며, 독일 연구 협의회 총재인 마르클(Hebert Markl)은, 자연과학은 우리에게 이러한 척도와 규범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마르클은 오로지 반과학적인 근본 구조에 대해 경고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가치로부터 해방된 가치중립적인 과학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과학은, 그것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를 우리가 왜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 더 이상 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1. 윤리와 부딪치는 이성의 어려움 가. 계몽주의의 변증법 사회 ‧ 문화적인 거대한 힘, 근대의 징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징후들을 급속하게 몰아붙이면서 세계를 이끌어가는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인 힘의 지배는 오늘날 의문시되고 있다. 이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인 힘의 지배는, 윤리로부터 해방된 자연과학, 전지전능한 공학, 환경을 파괴하는 산업, 순전히 형식적이고 법적인 민주주의의 지배이다. - ‘근대의 이성이 쉽게 비이성에로 탈바꿈했다’는 것은 합리적 계몽주의의 본질이다. - 과학이 성취한 모든 진보가 반드시 인간성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뿌리에까지 미치는 철저한 이성비판은 필연적으로 이성의 뿌리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그 결과 진리와 정의에 대한 모든 이성적인 정당성을 쉽게 파괴시켜 버린다. 바로 이 점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통찰한 ‘제어할 수 없는 자기 파괴의 과정에 사로잡혀 있는 계몽주의’의 실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초월하는 계몽주의’를 요청하게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자연과학과 공학에 의하여 양산된 질병은 단순히 더 많은 자연과학 그리고 기술공학을 통해서 치유될 수 없다. 자연과학적 그리고 기술공학적 사고는 윤리를 파괴해 버린다. 근대에서 비윤리를 확산시킨 수많은 것들은 단지 악한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그보다는 오히려 산업화, 도시화, 세속화 그리고 구조적인 무책임의 “부산물”이라는 사실을 현대의 자연과학자 그리고 공학자들이 스스로 강조하고 있다. 근대의 자연과학적 사고와 기술공학적 사고는 당초부터 보편적인 가치, 인간의 권리 그리고 윤리적 척도의 근거를 제시하는 데에 있어서 무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하지만 그 사이 자연과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아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그리고 괴델의 “결정 불능 명제”를 통하여 스스로를 상대화시켰는데, 이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나. 구속력은 어디로부터? 특히 80년대 이래 독일의 철학자들이 언어분석철학(에펠 Karl-Otto Ape), 프랑크푸르트 비판이론(하버마스 Jürgen Habermas), 역사이론(부브너 Rüdiger Bubner ), 다시금 실천과 그 결과인 구속력을 요구하는 윤리에 관한 합리적인 근거 제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이들 철학자들은 폭넓은 민중 계층을 위해 적용될 수 있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구속력을 요구하는 윤리에 대한 근거의 제시와 관련해서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킨타이어 (Alastair Maclntyre) 와 로어티(Richard Rorty를 비롯하여 푸코(Michel Foucault) 와 부브너에 이르기까지 적지 아니한 철학자들은 보편적인 규범에 대한 근거의 제시를 기꺼이 포기하고 그 대신 다양한 삶의 설계와 삶의 양식이라는 관습의 문제에로 귀환하고 있다.
아울러 합리적인 논증과 동의를 강조하는 이른바 “논증윤리”(Apel, Habermas)도 문제점을 안고 있다. 논증윤리에 대한 철학적인 근거 제시는 자신이 주장하는 초월적인 “최종 구속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편적인 구속력과 절대적인 구속력을 입증해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철학은 “이성에 대한 호소”와 더불어, 윤리적인 자아 책임이 실존적으로 고뇌하는 곳에 너무 쉽게 무너져 버린다. 문제는 순수한 이성으로써 정신적인 방황과 윤리적인 임의성이 안고 있는 온갖 위험을 대적할 수 있을는지 하는 데 있다. 이 문제에 직면하여 오로지 개인적인 결단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경제적 기술공학적인 어려움은 항상 정치적 윤리적인 어려움으로 대두되고 있으며, 이러한 어려움은 온갖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철학의 개입까지도 요구하고 있다. 우리에게 허용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오늘의 시대에 누가 감히 나서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말해 줄 것인가? 아마도 많이 칭찬을 받고 또 많이 비방을 들어 온 종교가 말해 줄 수 있을까? 자신의 실존 권리가 철학적으로 철저하게 의문시되고 있는 종교가 과연 말해 줄 수 있을까? 스스로 신학적 윤리와의 문제점들을 노출시키고 있는 종교가 말해 줄 수 있을까?
2. 종교의 저항 가. 후기 형이상학적 시대? 많은 철학자들은 다시금 “후기 형이상학적 시대”를 강조하고 윤리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후기 형이상학적 사고”를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철학자들은 종교를 “투사”, “소외”(Feuerbach), 사회적 “억압” 또는 “민중의 아편”(Marx), “퇴보” 아니면 “심리적 미성숙”(Freud)과 동일하게 여기고, 이미 끝장난 문제로 여기는 시대와 정신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자신들의 독특한 “후기 형이상학적 사고”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경험적이고 학문 이론적인 전제 조건들을 너무 쉽게 간과해 버린다. 종교는 자연과학, 기술, 산업 그리고 민주주의(인권)와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근대에서는 무시되거나 억압받았고 끝내는 박해받았으나 후기 근대에 이르러서는, ‘종교는 어떤 미래를 지니고 있는가’하는 물음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이 물음에 대한 필자의 입장인즉, ‘종교적 차원을 배제하는 시대 분석은 무능하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칭적 ‧ 통시적으로 관찰할 경우, 예술 또는 법률과 마찬가지로 ‘종교는 하나의 보편적 현상’이기 때문이며, ‘종교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가장 강력한, 가장 절실한 갈망의 충족’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지니고 있는 “환상적” 특성은 결코 표출되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가 지니고 있는 핵심적인 내용은 일종의 이성적인 신뢰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현상을 무관심, 무지 또는 원한으로 인해 그것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등한히 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과 역사가 내포하고 있는 본질적인 차원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의미하게 “고도를 기다리는 것”에 앞서, 모든 것을 포괄하고 모든 것에 침투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실재로 이해되는 하느님에 대한 이성적인 신뢰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 종교의 종말? 독일이 통일되기 이전의 동독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소련 남아프리카 이란 필리핀 남한 북미 남미에로 시선을 돌려보면 종교의 종말 또는 고사(枯死)를 주장하는 종교 역사적인 명제는 오늘날 허위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무신론의 색채를 띤 인문주의(Feuerbach)는 물론, 무신론의 색채를 띠고 있는 사회주의(Marx) 그리고 과학(Freud 또는 Russel)도 종교를 대체하는 데 있어서 실패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이념들 그리고 세속화된 근대의 신념들이 확실성을 상실하면 할수록 종교는 새로운 종교적 신앙의 확신을 부양시켰다. 오늘날 우리는 후기 이념의 시대에 대해 언급하지만 그러나 후기 종교시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서구도 이른바 “대중의 무신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있다. 미국의 경우 1987년의 갤럽 설문조사에 의하면 94%가 신의 존재를 믿고 있으며, 독일의 경우 1989년 알렌스바허(Allensbacher) 설문조사에 의하면 70%가 신의 존재를 믿고 있으며, 단지 13%만이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있다. 영국의 경우 Sunday Times 지나 Sunday Telegraph 지에 의하면 1990년 초 3/4이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고 있다고 한다. 물론 현대 서구의 모든 종교가 세속화의 문제와 철저하게 씨름하고 있지만 세속화된 서구사회가 결코 무종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제도화된 종교들이 존재하며, 종교의 종말 또는 고사에 대해서는 아직도 전혀 언급이 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종교가 인간을 억압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심리적 ‧ 정신요법적으로 뿐 아니라 정치 ‧ 사회적으로 인간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기도 했다. 종교는 이제 사회 ‧ 심리적으로 자유의 신장, 인권의 존중, 민주주의의 출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다. 물론 종교는 권위적이고 독재적이며, 반동적일 수 있으며, 실제로 가끔 그러해 왔다. 종교는 불안, 공포, 편협, 불의, 좌절 그리고 사회와의 단절을 야기시킬 수 있으며 비윤리, 사회적 병폐 그리고 동족의 전쟁, 민족 사이의 전쟁을 정당화시키고 또 유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을 해방시키고 미래 지향적이며, 박애적인 힘을 행사하기도 하며, 실제로 가끔 행사하기도 했다. 종교는 삶의 신뢰, 관대함, 관용, 연대성, 창조성 그리고 사회적 투신을 확산시킬 수 있으며 정신적 쇄신, 사회개혁 그리고 세계 평화를 증진시킬 수 있다. 최근의 진행 과정은 종교에 의해, ‘비폭력의 윤리가 지니고 있는 혁명적인 힘’의 형태로 하나의 윤리가 신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폭력을 사용하지 아니하는 혁명 물결의 선두에는 경직된 교회의 보수적인 교계제도와 기존의 질서 안에 안주하는 많은 “교회의 회색 쥐”들이 앞장선 것이 아니다. 혁명의 결정적인 요인은 역동적이고 강한 책임의식을 소유한 그리고 관대하게 개방된, 아울러 시종일관하는 태도를 취한 종교의 지도자들과 단체들이었고, 이들은 새로운 지도 양식 을 발전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교의 종말’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다. 종교는 투사일 뿐? 종교 문제에 있어서 투사 논증은 인식이론적으로 이미 충분하게 검증이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심리적으로 볼 때 신에 대한 신앙은 항상 자명하게도 투사의 구조 그리고 내용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종교는 언제나 투사의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오로지 투사라는 요인 하나만이 투사 대상의 존재 여부에 대해 결정하지 않는다. 신에 대한 신앙 또는 신에 대한 갈망에 신은 전적으로 일치할 수 있다. 종교를 ‘유치한 위로’ 또는 ‘유아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비난하는 사태가 계속되도록 방임해서는 안된다. 종교는 ‘심리적 자아 정체성’, ‘인간적 성숙’ 그리고 ‘건전한 자아의식’의 토대를 제공할 수 있음은 물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자극제 또는 추진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오늘날 종교는 – 이 점은 한 번은 언급되어야 한다 – 헤겔 이래 근대의 절정에서 종교보다 훨씬 더 많이 “구상의 추진”(Jürgen Habermas)이라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철학 그 이상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유럽인으로서의 우리가 유태교와 그리스도교로부터 유래하는 구원사적인 사고의 본질을 우리의 것으로 동화시키지 않고서는 윤리성, 도덕성, 인격, 개체성, 자유 그리고 해방 등과 ... 같은 개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는 하버마스의 의견에 동의하고자 한다. 하지만 하버마스가 대답하지 아니한 물음이 있다. 그 물음은, 왜 나는 유태교와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지니고 있는 본질을 “후기 형이상학적”으로, 즉 합리적 ‧ 비신앙적으로 나에게 동화시켜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종교는 아직은 한물 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심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해방시키는 방법 안에 살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왜 새로운 방법으로 합리적 ‧ 신앙적이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지만 종교는 하나의 윤리를 위한 근거를 제시하는 데 있어서 나름대로의 엄청난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3. 윤리와 부딪치는 종교의 어려움 가. 하늘에서 떨어진 고정된 윤리적 해결? 아마도 이슬람교 또는 힌두교가 오늘날 문제점으로 여기고 있는 내용들이 많은 신앙인에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명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을 것이다. 첫째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우리는 하늘이나 도(道) 또는 성서나 기타 다른 경전에서 ‘확고한 윤리적 해결을 도출해내는 작업’을 예전에 비해 게을리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서, 코란, 토라 또는 힌두교나 이슬람교의 경전이 포함하고 있는 초월적인 근거에 토대를 두고 있는 윤리적 계명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우선 시인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대 종교들이 지니고 있는 구체적인 윤리 규범, 가치, 통찰 그리고 주요 개념들은, 역사적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매우 복잡한 사회의 역동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삶의 요구 그리고 인간적으로 해결해야 할 절박한 문제 또는 필요성이 제기되는 곳에서는 우선권 ‧ 계약 ‧ 법률 ‧ 계명 ‧ 지침 ‧ 관습 등 일정한 윤리규범 등이 대두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 결과 성서가 하느님의 계명으로서 선포하는 것 가운데에는 많은 것들이 기원전 17세기 또는 18세기의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Hammurabi Codex)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은 항상 새롭게 윤리의 규범과 모델 또는 구상으로서의 윤리적 해결책을 시험해 보아야 하고, 세대를 거쳐 실천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천과 유지의 기간이 지난 다음에는 이러한 규범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시대가 완전히 변화되었다면 가끔은 규범의 폐지가 따른다. 아마도 우리는 바로 이러한 시대들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 땅에는 서로 다른 해결책들이 두 번째의 문제점을 오늘의 신앙인들은 주목해야 한다. 즉, “땅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점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이한 해결책들이 모색되어야 한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윤리가 지니고 있는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자신들의 체험과 삶의 다양성으로부터 출발하면서 진실을 고집해야 하는 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는 비록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구체적인 문제 영역을 위해 확실한 정보와 인식들을 창조해 내는 데 있어서, 그리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발견해 내는 데 있어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양심 안에는 우리의 자아 실현과 세계 책임을 위한 윤리적인 자아 입법 그리고 자아 책임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칸트의 말이 적용된다.
다. 학문적 방법론 신앙인들은 세 번째의 문제점을 주시해야 한다. 기술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하고 변화가 심하며, 헤아릴 길 없이 복잡한 실재에 직면하여 종교들 역시 가능한 한 선판단 없이 이러한 실재들이 지니고 있는 객관적인 법칙 또는 미래 가능성을 파헤치기 위해 학문적인 방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고심해야 할 것이다. 일정한 윤리 규범에 대한 학문 이전의 의식은, 오늘날 대다수의 신앙인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어떤 일정한 상황 안에서 윤리 철학 또는 윤리 신학에 관한 논문이나 저서를 읽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올바른 처신을 한다. 근대의 윤리는 자연과학 그리고 인문과학과의 접촉에 의지하고 있다. 인문과학은 이들에게 확실히 보장된 풍부한 인간학적 인식과 행동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정보들을 제공한다. 이러한 인식과 정보들은, 비록 인간의 윤리를 위한 최종 규범과 근거의 위치를 대신할 수 없다 하더라도 심사숙고하는 결단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매우 복잡한 많은 문제점들에 직면하여 모든 윤리는 항상 그것이 개인적인 영역이든 아니면 사회적인 영역이든 갈등의 상황 그리고 의무의 알력과 대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라. 우선 규칙과 안전 규칙 개별적인 인간을 위해서는 물론 제도를 위해서도 오늘의 윤리는 일련의 우선과 안전 규칙을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규칙 가운데 몇 가지 중요한 규칙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①문제 해결 규칙 ②증명규칙 ③공동선 규칙 ④긴급성 규칙 ⑤생태학 규칙 ⑥가역성 규칙 물론 몇 가지 일정한 규칙으로써 합리적인 윤리는 일정한 삶의 태도 그리고 삶의 양식을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와 삶의 양식들이 구체화되면 될수록 윤리적 동기, 의무의 정도, 보편적 타당성 그리고 규범 일반이 지니고 있는 마지막 의미 등에 대한 물음이 더 많이 제기된다. 바로 여기에 종교는 자신만이 소유하고 있는 고유한 무엇을 제공해야 한다.
4. 윤리의 가능한 토대로서의 종교들 가. 인간 조건이 절대 의무를 지울 수 있는가? 종교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역시 진정한 의미의 인간다운 삶, 즉 윤리적인 삶을 영위할 수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인간의 내재적인 자율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실제로 절대적인 윤리규범을 인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배제하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윤리적 요구의 절대성과 보편성의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 나는 왜 절대적으로, 즉 어떤 경우이든 어디서든지 (나의 개인적인 관심사에 역행한다 할지라도) 윤리규범을 준수해야만 하는가? - 만일 모든 사람들이 윤리규범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윤리는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 만일 윤리규범이 조건과 핑계를 허용한다면 윤리규범은 조건이 없어야 하며 “가정적”이어서는 안되고 그 대신 “정언적”이어야 한다. (Kant) 도대체 윤리는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확실한 대답을 제공할 수 없다.
인간 현존의 유한한 조건으로부터는 그리고 인간적인 절박성과 필요성으로부터는 하나의 절대적인 요구, 즉 “정언적” 당위를 단순하게 도출해 낼 수 없다. 아울러 독자적이고 추상적인 “인간의 본성” 또는 “인간의 이념” 역시 (윤리규범의 근거 제시를 위한 주무 부처로서) 절대적인 의무를 요구할 수 없다. “인류의 생존 의무”도 마찬가지로 윤리적 요구의 근거를 합리적으로 제시하는 데 있어서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경우 왜 정언적 당위가 요구되어야만 하는가? 비록 자신의 관심사를 관철시킬 필요성에 직면하고 절대적으로 모든 이에게 적용되어야 할 초월적인 권위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약 이성의 도움으로 가끔 윤리적 요구와 그에 상반되는 요구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이성에 대한 호소” 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나. 절대적인 것만이 절대적 의무를 지울 수 있다 모든 인간에게 거의 천부적으로 주어져 있는, 모든 인간의 복지를 자기 행위의 척도로 삼아야 한다는 “정언적 명령” 만으로는 오늘날 더 이상 계산이 여의치 못하다. 윤리적 요구 그리고 당위의 절대성이 지니고 있는 정언적 특성은 한계와 제약에 부딪치고 있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대신 절대에 의해 그 근거가 제시된다. 즉, 개별적인 인간은 물론 인간의 본성 그리고 인간의 사회 전체를 포함하고 관통하는 포괄적인 의미를 중재해 줄 수 있는 절대에 의해서만 그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이 절대는 오로지 최종적이고 최고의 실재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실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실재는 다양한 종교들에 의해 이해되고 해석되는 것처럼 이성적 신뢰만으로 수용될 수 있다. 적어도 유태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와 같은 예언종교에는 모든 조건과 제한 안에 유일한 절대가 존재하며, 이 절대는 윤리적 요구의 절대성과 보편성의 근거를 제시한다. 이 절대는 인간과 세계의 근원, 근저 그리고 근본 목표로서 우리가 신 또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이 근원, 근저 그리고 근본 목표는 인간을 위해서는 타율적인 외부 간섭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러한 근거, 희망 그리고 방향은 인간의 참된 ‘자아-존재’와 ‘자아-행위’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인간의 ‘자아-입법’과 ‘자아-책임’을 가능케 해준다. 그러므로 신율은 타율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근원, 약속 그리고 결코 인간의 임의성을 타락시켜서는 안될 인간적 자율의 한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오로지 무한한 것에 대한 결속만이 모든 유한한 것에 대한 자유를 선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나치 시대의 비인간성 이후 제정된 독일연방공화국 헌법의 전문이 책임의 두 가지 측면인 ‘누구 앞에 그리고 누구를 위한 책임’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즉 “하느님과 인간 앞에서 져야 할 책임”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 요구의 절대성이 지니고 있는 근거가 종교에 따라 다양하듯이, 종교가 윤리적 요구의 근거를 직접적으로 신비스러운 절대자 또는 계시의 내용으로부터 제시하든, 아니면 옛 전통이나 성서 또는 경전으로부터 도출해 내든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즉, 종교는 자신의 윤리적 요구의 근거를 인간의 권위가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권위로부터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 종교의 기본 기능 종교는 절대적인 권위로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권위는 말과 개념, 가르침과 교의뿐만 아니라 동시에 상징과 기도, 예식과 축제를 통해 이성적 그리고 감정적으로 표현된다. 왜냐하면 종교는 단지 지성적인 엘리트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동시에 폭넓은 민중 계층을 위해서도 인간의 전 실존을 형성하는 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는 이러한 수단을 역사적으로 시험하고, 문화적으로 적응시키고 그리고 개별적으로 구체화시킨다. 하지만 종교가 모든 것을 선사할 수는 없다. 단지 인간의 삶 안에서 어떤 “더 많은 것”을 열어놓고 선사할 뿐이다. ⚬종교는 고통과 불의, 죄와 무의미에 직면하여 독특한 심층의 차원과 포괄적인 해석의 지평을 중재해 줄 수 있고, 아울러 죽음에 직면하여 삶의 마지막 의미를 중재해 중 수 있다. 즉 우리 현존의 ‘어디로부터’와 ‘어디에로’를 중재해 줄 수 있다. ⚬종교는 최고의 가치, 절대적 규범, 깊은 동기 그리고 높은 이상을 약속할 수 있다. 즉, 우리 책임의 ‘왜와 무엇을 위해서’에 대해서를 약속해 줄 수 있다. ⚬종교는 공동의 상징, 예식, 체험 그리고 목표를 통해 신뢰, 믿음 확실성의 고향을 창조하고, 자아-강화, 안정 그리고 희망을 창조해 낼 수 있다. 즉, 정신적인 공동체성과 고향을 창조해 낼 수 있다. ⚬종교는 불의한 상황에 대한 항의와 저항의 근거를 제시해 줄 수 있다. 즉, 지금 벌써 부단하게 작용하는 “전적인 타자”에 대한 갈망의 근거를 제시해 줄 수 있다.
하나의 절대자(신)에게 자신을 연계시키는 참된 종교는, 그것이 무신론적인 “이성의 여신”이든 아니면 근대의 판테온 신전에 있는 모든 신들을, 즉 과학(자연과학), 기술(하이테크), 산업(자본)이라는 신들을 동반하는 “진보의 신”이든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시키고 우상화시키는 유사 종교나 사이비 종교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이 모든 신들은 후기 근대에 들어와서는 탈신화화 되었고 탈이념화 되었다. 즉, 상대화되어 버렸다. 우리는 이러한 신들을 새로운 세계 상황 안에서 새로운 우상, 예를 들어 모든 가치를 종속시키는 “세계 시장”으로 대체시켜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한 분이신 참된 하느님에 대한 쇄신된 믿음을 통해 대체되어야 한다. 자신을 하나이고 유일한 신에게 연계시키는 참된 종교는 후기 근대에서 다시금 더 많이도 더 적지도 아니한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종교에 대해 언급하는 곳에는, 항상 종교 서로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절대자에 관한 종교의 진술뿐만 아니라, 인간의 윤리에 관한 진술 역시 상이하고, 심지어는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반론에 부딪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