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튼연구원 종교인 모임
일시: 2025 6 14 토요일
장소: 논산 씨튼영성의 집
발표주제: 영화 사도와 다큐 의궤-8일간의 축제에 대하여
발제자: 최복희 교수
최복희교수님 : 정조가 다산 정약용에 대해 잘 아셔서 화성을 다산이랑 체제공이랑 같이 주도해서 하셨던 것 같은데, 그때 화성을 건축하는 과정이나 그런 걸 보면 그때 이 일을 했던 정권이 얼마나 합리적이었나라는 것이 되게 느껴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평천하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수신제가 치고 평천하까지 세종과 정조는 다 해낸 되게 보편 도덕적인 제왕이었다고 하지만 저는 글쎄,,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너무 성리학적인 것에 물론 그때 그걸 좀 밝혀야 되기도 했었지만 부채반정 같은 게 저는 약간 아쉬움이 있긴 하거든요. 부채반정이라고 해서 고문으로 돌아가요. 그래서 박지원이나 이런 사람들한테 반성문 쓰게 하고 새로운 문체를 쓰는 걸 반대했어요. 굉장히 성리학적인 그것에 굉장히 신념이 강했던 그런 군주였기 때문에 저는 살짝 그게 이제 노론 강경파의 보여주기식의 약간 액션이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소이교수님 : 예 요즘 근데 문체 반성이 갑자기 이제 문체를 갖고 사실 그 이때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과거 문체가 아니라 좀 자유로운 그런 문체를 갑자기 이제 제도가 갖췄던 거는 당시 이제 성역이 이제 천주교가 들어와 가지고 이렇게 너무 활성화가 되니까. 맨 처음에는 정조는 거기에 대해서 조금 옹호적이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옹호적이었을 때 계속 노론이 뭐 이렇게 제일 많고 그 다음에 뭐 남인 소론 이렇게 탕평책을 썼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오히려 형평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그런 여러 가지 해석이 있더라고요.
최복희교수님 : 저는 정조에 잘 모르지만 정조가 이제 20년 된 다음에 갈 때는 어느 정도 좀 안정됐을 때고 그래서 실제 정조의 신념이 드러난 사건이다라고 많이 이야기를 하는데요. 좀 많은 걸 했지만, 성리학적인 통치 국가보다 사실은 그때가 그 1800년 되기 큰 직전이니까. 엄청 바뀌었고 청나라도 이제 막 건륭제 막 이럴 때고 막 이런 때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아쉬움이 있긴 한데 그거는 결과적으로 봤을 때 아쉬움이 있지 사실은 그때로서는 엄청 이상에 가까운 군주였던 것 같습니다.
신익상교수님 : 여기서 말하는 그 이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교의 기본 정지입니다.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교우를 통해서 충 이러한 것들에 대한 이미지 이런 사상들이 가장 응축되어 있는 사상이 정조 사상 정조한테 드러나 있다는 걸 얘기하는 거죠.
최복희 교수님 : 네 정조가 좀 그런 걸 잘 실천하고 그리고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보통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를 수양하고 또 사회적인 실천을 해내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그 자기를 수양하는 과정, 그 사도부터 봤을 때 어렸을 때 그런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서술법을 조정해서 자신이 어떤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그 비전을 세운 거잖아요.
자기 수양의 과정도 대단했지만, 또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도 되게 보이는 그런 면이 있어서 또 세종도 좀 부러워하고 그래서 두 사람이 많이 언급이 되는 것 같기는 해요.
최현민수녀님 : 이걸 보면서정조 이전의 상황과 정조 이후의 변혁의 과정들이 지금 현재 한국의 상황과 너무 오버랩이 되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뭔가 새로운 대한민국, 진짜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는 여정의 지금 초입에 있는데, 정조 같은 그런 부분들이 우리 지금 현재 한국 땅에서도 계속 좀 일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희망들이 불러일으켜지면서 우리 한국 조선시대에 이렇게 위세한 그런 임금이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고...
최복희 교수님 : 정조가 너무 빨리 돌아가셨어요. 되게 금방으로 돌아가셨잖아요. 보고 끝나자마자 오래되지 않을까요? 결국 왕의 몸에 이렇게 큰 무슨 종기 같은 거 이렇게 났는데 암이 안 생길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거를 도려낼 수가 없으니까 통증만 계속 있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계속 사실은 종양을 더 키워가지고 그게 확 퍼졌구나 굉장히 많은 암이 확 퍼져서...
최현민수녀님 : 참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일을 하셨네요,,
최복희교수님 : 영조는 탕평을 할 때 극단적인 사람들을 쳐내는 방식으로 했고 정조는 다 살려두는 방식으로 했어요.
그게 어떤 사람들은 되게 자신감의 표현이었다고도 하는데 정조가 그렇게 정치에 뛰어났던 거지요.
처음 즉위식 때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첫 마디 딱 하니까 다들 눈을 번쩍 뜬 다음에 하지만 나는 그것은 나의 사적인 것이고. 나는 이제 공적인 삶을 살겠다는 식의 워딩을 했었다고 하는데.... 쥐락펴락도 잘하고 엄청 정치력이 뛰어났다고 하더라고요.
최현민수녀님 : 정조의 정책의 핵심은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쳐내면 다시 그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고...이런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 그들도 수용하는 정책이 중요했다고 봐요
바로 이 점이 지금 현대 사회, 우리 한국 사회가 정말 지향해야 되는 점도 거기에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통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말이죠
최복희교수님 : 근데 유교에서 생각하는 이상적이고 훌륭한 상황 정조 그러니까 왕후 왕후를 얘기하니까 정조나 성조 세종만 얘기하지만 사실 많은 지식인들 중에 다산이나 율곡이나 얘기 많이 하잖아요. 근데 그 사람들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 너무 고독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약간 한 마음이 약간 좀 짠한 거 좀 들긴하더라구요.
박태식신부님 : 이런 영화가 있어요. 나중에 한번 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 거기 딱 첫 장면에 정조가 등장해요. 정조가 정약전과 한 얘기, 그는 서학에 대해서 굉장히 긍정적이었어요. 그런데 정약전에게 정조가 한 얘기가 “너는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어라 중요한 건 뭐냐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그걸 보고서 와 정조가 굉장히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산스님 : 그래서 정조가 서원에 대사성을 만들고 호사성을 설치했을 때 이제 이렇게 통합적인 그 마인드를 갖고 있는 분은 그때 아주 불교를 탄압했지만, 불교를 대립해서 수용을 했었고요. 세종이 아주 대표적인 것으로 정조가 사실은 수원에 용주사를 원래 창건돼 있었지만 이름을 갖고 옵니다. 용하고 여의주 주자로써 용주사라고. 용주사 본사죠. 용주사에는 불설부모은중경판 (佛說父母恩重經板)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불교 경전이예요. 그러니까 불교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거기에 용주사라고 해서 나라에서 인제 효 사상을 선양하는 사람이 센터로 만들어 준 거예요. 용주사가 그런 사찰이에요.
정소이교수님 : 아 <부모인중경>이라고 그게 대표적으로 유불 융합 얘기할 때 항상 나오는 책이거든요. 용주사에 원본이 있어요. 진짜 그 본사거든요.
미산스님 : 실제 유교를 근단하고 있지만 실천 세계로 우리 국민들을 균형감 있게 다 접수하면서 통합하는..
신익상교수님 : 지금 스님 말씀하시는 그런 부분이 나와야 돼요. 제가 보기에는 특히 이야기하는 거는 중립적이에요.
성리학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났다고 얘기를 하지만 성리학은 중립적인데 결국 성리학을 어떻게 운용하는가는 사람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문제는 그걸 운용하는 사람인데 제가 지금 궁금한 게 효라든가 충 이런 거 혹은 박정희 때 그랬잖아요. 이게 어떻게 정치 이데올로기화 되는지가 궁금했구요. 유교적인 사고방식에서 그게 가능합니다. 성리학 자체는 훌륭한 법은 똑같죠. 어떻게 법을 운용하느냐가 문제인 것처럼 그걸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가? 그게 궁금해요.
최복희교수님 : 제가 알기로는 논어에서 충(忠)은 마음의 중심이라고 하면 또 내면적인 도덕 수양을 의미하는 말이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충(忠)이 한나라 때 통치 철학이 되면서 이 통치 철학에서 선천적인 베이스를 해준 사람이 동중서(董仲舒)라고 하는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 동중서가 이 충효를 비롯한 상당히 좀 성치 이데올로기의 결말이라는 그런 방식으로 굉장히 많이 변형시켰거든요.
예를 들면 오륜은 되게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 간의 상호적인 동등한 그런 윤리고 그건 모자의 말인 거지만 삼강은 되게 종속적인 거잖아요. 아버지가 중심이 되는 거고, 부모가 중심이 되는 거고, 아버지는요 아버지가 된 거고, 임금이 중심이 되는 거고, 남편, 지아비가 이제 중심이 되는 그런 식으로 약간 서열을 맞춰주는 거거든요. 삼강오륜(三綱五倫) 앞에 삼강을 딱 넣어줘서 이 오륜을 지키는데 이 덕목을 지키는데 일단 종적으로는 이런 서열이다. 그러니까 이 통치 이데올로기화를 시키면서 그런 사회적인 윤리나 이런 것까지도 동중서가 상당히 좀 위계질서 약간 종적으로 많이 만들어 놨어요.
이게 워낙에 유교가 종적 윤리가 없진 않았지만 세대와 세대 간의 종적인 관계를 중시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꼭 서열이라고는 안 하고 되게 상호적인 상호성이 있었는데, 그때 충이라고 하는 것도 그랬고, 그때 사실은 그게 그때 충자가 그렇게 강하지 않았었는데 제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서 충효를 이렇게 얘기한 것은 제가 알기로는 그 군부독재 박정희의 이데올로기였죠.
신익상교수님 : 어릴 때 계속 또 해서 나라의 충성상 부모의 효도에서 마치 나라의 충성이 부모의 효도를 나라에 충성하는 것처럼 그렇게 일치시켰죠.
정소이교수님 : 중국에서 유교 공자 맹자까지는 수평적인 덕목이었다가 동중서 바로 전에 한비자 법가에서요 법가 거기서 처음으로 인제 위에 제일 첫 번째 덕목이 효였는데 극히 충으로 바뀌면서 충효열이 그때 갑자기 생겨서 동중서가 나중에 그 법가적인 structure 위에 포장은 유교로 하는 거죠.
그런데 그게 사실 오륜이 먼저고 삼강 나중이었는데. 그게 쭉 가면서 삼강오륜이 안향 때부터 조선 초기부터 삼강오륜으로 이렇게 세트로 가져왔는데 제가 영조 정조 충과 효가 충돌할 때는 어느 편이었는가 그걸 다 조사를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근데 정조나 영조나 불과 이게 한국 어쨌든 한국은 황이 아니라 왕이어서 그런지 효가 항상 먼저였어요.
항상 충돌되는 그런 역사적 인물들 얘기를 했을 때도 효가 아무래도 훨씬 더 계속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되게 효경이나 이런 걸 갖다가 일본 당시에 일본의 오규소라이나 이런 경전을 보잖아요. 그러면 그 모든 효의 덕목 그런 걸 다 충으로 해석을 해요.
정말 군국주의로 그래서 유교가 일본에서 나타난 방식이랑 한국에서 나타나는 방식이 조선에 너무 다른데 말씀대로 일제시기를 겪으면서 전체주의적인 유교가 다시 한 번 또 왜곡이 되고 그 다음에 충이 초점이 맞춰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또 잔존하는 유교 전통 있잖아요. 거기는 또 효가 훨씬 더 굉장히 강하거든요. 그래서 아무리 정부랑 민간이랑 유교에서는 이 충이 사실 한국 정서에는 잘 안 맞아 들어가는 거예요.
최현민수녀님 :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나라 전체가 하나의 국가가족주의죠. 천황이 모든 백성의 아버지이고 백성은 모두 그의 자식들이라는 ....
정소이교수님 : 그러니까 신체발부수지부모도 저희는 진짜 이 머리카락을 살 이렇게 막 고이 막 거기에 하는데 일본 효경은 다르게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 훼손이 신체가 다 형벌로.. 국가의 신형 그다음에 머리 껍데기 벗기는 형벌, 이 사지 잘리는 형벌 뭐 이런 거를 받지를 않는 게 효의 시작이다. 이렇게 완전히 국가 중심적으로 충으로 완전히 통합을 탁 시켜버리니까 저희는 오히려 파운데이셔널하게 이 손톱 발톱 이런 거 다 이렇게 모아놓고 이런 식으로 발전을 한 거죠. 그래서 정조가 봤을 때 그 효를 갖다가 강조를 하는 것이 굉장히 한국적인 것 같아요.
최복희교수님 : 제가 발제를 하긴 했는데 사실은 정조가 그걸 꼭 그렇게 강조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 행사 자체가 여기서는 혜경궁씨에 포커스를 맞췄는데 사실은 이 행사 자체가 정치적인 의미가 너무 효 행사에 포커스를 맞췄더라고요.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에서 해석한 거 이외에 다른 정치적인 의미가 상당히 함유되어 있습니다.
박태식신부 : 그러면 정조 뒤의 왕들은 그걸 계승하려고 노력을 했나요 안 했나요?
최복희 교수님 : 물론 그 이후에 순조 때 공노비가 없어진다거나 이런 게 있었는데, 사실은 그것 자체에 기본적인 것은 정조가 다 해놨고 나중에 그게 무르익어서 한 거지 그 이후의 왕들이 그럴 여력은 없었던 것 같아요.
미산스님 : 다큐를 보면서 정말 조선 후기의 과학 기술이 참 대단했다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화성이 그렇게 건축물이라고 하는 게 놀랍고 그 다음에 그게 그림과 글로 다 조개판으로 남겨있다는 게 우리가 정말 훈민정음 금속활자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를 갖고 있는 문화 민족이라고 하는 게 진짜 그런 데서 다 나타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유교가 잘 정립을 해놨고 용주사의 《불설부모은중경판》 그림이 진짜 좋아요. 그림 보면 설명이 필요 없어요.
심원스님 : 그림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좀 전문적으로 말하면 변상도라고 얘기를 하죠.
미산스님 : 효가 우리나라에는 아주 독특한 정신문화로 자리할 수 있었던 게 그런 문화적인 도구들을 잘 활용했던 거죠. 그 다음에 화성의 굉장히 과학적인 기중기 가지고 그런 것들이 다 기록이 돼 있고....
박태식신부님 : 아까운 얘기인 거야. 나는 그 시대가 계승하지 못해서. 너무 아까워요.
최복희교수님 : 이런 얘기를 하는 거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르네상스의 기초를 딱 다져놨는데 인류라고 하는 사상도 근현대화를 못 거치는데 거기서 딱 막힌 거 보니까 그게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그리고 정조 때가 그만큼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탕평도 그런 식으로 해서.. 그때 안동 김씨가 그때부터 안동 김씨 세력을 가지기 시작했거든요. 안동 김씨가 그때 이제 김조순이라고 하는 사람을 정조가 되게 반성문을 잘 써 가지고 ..
신익상교수님 : 그런데 안동에 가보니까 거기는 정신문화의 본고장이라 자부심들이 있고 사실은 우리가 한류 K- 문화라고 해서... 이제 문화 한류가 크게 3가지로 줄이더라구요. 첫 번째는 대중문화, 그게 케이팝 케이 드라마 등등 이게 가장 먼저 떴죠. 두 번째가 음식 문화예요. 음식이 코로나 이후에 엄청나게 세계화되고 있는데, 아직 뜨지 않은 게 뭐냐면 정신문화예요. 정신문화 한류는 이제 유교 불교 또 인제 천주교도 들어와 가지고 또 문화적인 상당히 중요한 역량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앞으로 나올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고 있고....
사실 지금 현 정부가 그걸 알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k-문화에 굉장히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는 이 문화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 이런 이야기를 한번 해보는 있는 역량들을 거기에 이제 직접 해주는... 그런데 이제 자기의 종교성을 빼면 이게 그래서 인제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이런 역량이 이미 있기 때문에 그냥 한류가 그렇게 쭉 나온 게 아니라고 봐요. 우리 민족 자체에 녹아들어 있어요. 특히 금속활자나 이게 팔만대장경이나 이런 걸 문화적으로 문헌적으로 이걸 기록해서 전승할 수 있는 파가드에 있는 어떤 교수가 진짜 행복을 그런 점에서 세계 어디 유래를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문화를 가지고 있다. 특히 훈민정음을 분석해보면...
송용민신부님 : 이제 서양파 실학자 중에 아시겠지만, 폴트기시 같은 사람이 문화, 신학을 얘기하는 사람이 종교와 문화라고 하는 개념의 컬처라는 데 컬트가 사실 종교를 경신되니까. 이제 문화와 종교를 비교 해보면 항상 그 문화는 종교의 본질을 표현하는 거고, 종교는 문화의 본질이다. 이렇게 해서 결합시켰어요. 정신문화에 꽂힌 문화라는 그러니까 이런 우리나라의 유, 불교 이런 모든 종류들은 문화와 함께 꽂혀져 있지 그 종교 자체가 그 왜 문화와 상관없이 성장한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문화에 대한 가치가 우리 한국 정신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했는데 저도 영정조 시대가 그렇게 화려했고 아름다운데 왜 그게 우리 이후에 이렇게 됐고 또 가톨릭 같은 경우 천주교가 1784년에 들어와서 막 정조 시대 때 막 꽃을 피해서 남인 중심으로 다산 이쪽으로 탁 펼치다가 이제 그렇게 이 정순왕후 뭐 이런 사람들 노론 여파에 의해서 무너지면서 사실 그 우리 한국 정신문화가 꽃을 피울 수 있는 그 중요한 시기에 무너진 거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재명 대통령은 정조 이후에 최고의 희망이라는 말도....
최현민수녀님 : K 문화에 대한 굉장한 센스가 있으신 것 같아요.
신익상교수님 : 사실 이제 이미 AI의 문명이 큰 변곡점 그런 게 딱 들어와 있거든요. 근데 저번에 유발 하라리가 왔을 때 이재명 대통령이 유발 하라리하고 대화가 되더라구요. 공부를 엄청 하신 거예요. 6개월부터 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