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 코로나 바이러스 사람에게 묻다
- 일시 : 2022. 3 .24(목) 오후6시
- 방법 : Zoom화상회의
- 참 석 자: 최현민 수녀님, 이정배 목사님, 미산 스님, 박태식 신부님, 이공현 교무님, 송용민 신부님, 박소이 교수님
-이정배 목사님: 이렇게 부족한 책을 가지고 이런 자리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 드리고요
이 책은 아까 과찬의 말씀을 주셨지만 사실 그때그때 여기저기에서 1년 반에 걸쳐서 강연을 요청 받아서 강연한 자리에 가서 발표한 글들을 모은 것입니다. 사실 부끄러운 책이고요 아무래도 책 1권을 읽으시기가 어려울 거 같아서 짧은 논문 한편 드린 것은 씨알의 소리 올 1월호에 마침 이 책을 갖고 글을 써 달라고 해서 썼던 글을 요약해서 드린 것이니 아마 이 글을 보시면 대략 어떤 책인지 아실 거 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 교무님 계시지만 고마웠던 것은 그 익산에 있는 중앙교육원인가요? 거기에 계신 원장, 부원장 교무님들이 거기에 저를 다섯 번이나 오라고 하셨어요. 이 코로나 주제를 가지고 교무님들과 더불어 만나는 시간을 다섯 번이나 주셔서 익산을 다섯 번이나 오가는, 잊지 않고 그렇게 대화했던 그런 경험이 있어서 이 책에다 헌사를 썼는데 그런 좋은 경험도 나눴고 기독교 계에서도 여기 저기서 강의한 글도 있기 때문에 쉽게 풀었습니다. 깊은 맛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이미 대략 어떤 내용인지 아시고 오늘 중요한 것은 스님들 나가시기 전에 의견들을 나누는 시간이 중요하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하지 않고 중요한 화두 정도 언사만 조금 말씀 드리고 더 많은 시간 이야기들 나눌 수 있게 하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끝날 줄 알았는데 자꾸 변종에 변종을 거듭하면서 앞으로 또 더 많은 확진 자들이 생겨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책을 쓸 때만 하더라도 결국 5백만 명, 3천만의 감염자에서 5백만 명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썼거든요. 그런데 이제 뭐 우리나라도 이미 천만 명을 넘겼으니 5명중의 1명꼴로 감염이 돼있고 각각 저희 식구들도 걸렸었고 주변에 걸린 것이 너무나 자명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 일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하는 문제에 고민을 했습니다.
아셨듯이 제가 이제 그 대화의 파트너 삼았던, 지금 유럽에서의 가장 HOT한 철학자 Zizek 같은 사람이 이제 왜 사람들은 코로나를 불편해하고 그 극복을 원하긴 하지만 코로나를, 바이러스를 철학적으로 사유하지 않는가? 하는 그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 거에 대한 저 나름대로의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답변을 해야 되겠기에 이런 생각을 해보았는데 어쨌든 저는 결론적인 이야기지만 어떤 신학자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악마적인 것이다 악의다 이렇게 규정하는 극단의 신학적인 경향도 있습니다만 저는 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어떤 우리 문명의 교정자로서 우리에게 다가섰다. 하는 생각을 먼저 이렇게 해봤습니다.
이제 문명의 교정자로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왔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New Normal, 어떤 새로운 방식의 삶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라고 하는 것이죠. 이 코로나가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그렇게 정말 이별도 제대로 못하는 그런 안타까운 현실에서 코로나가 고통스럽긴 하지만 단순히 이 코로나를 극복해서 우리가 코로나를 극복한다고 하는 것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도래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코로나의 극복이고 코로나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 이라고 믿는다면 이것은 코로나로 인해서 희생당한 뭐 지금 500만 명 이었지만 더 많은 인원이겠죠.
더 많은 인원이 졸지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희생을 너무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보다 곱절의 몇 곱절의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고 죽음도 제대로, 작별의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그렇게 죽음을 경험했는데 과연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고 마스크를 벗는 것 만으로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는 것으로 우리의 코로나 바이러스가 해결됐다고 그렇게 믿는 것이 해결책인가. 그렇지는 않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죠. 그래서 이제 어떤 가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중세의 흑사병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이제 중세에서 이제 흑사병을 통해서 엄청나게 많은 유럽의 사람들이 죽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흑사병으로 인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흑사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흑사병으로 인해서 중세에 봉건 체재가 무너지고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어떤 발돋움을 이루었다. 어떤 체제 변화를 이루었다. 그렇게 마구 부리던 농노들 종들이 그렇게 죽고 더 이상 이제는 그들을 통해서 유지되던 봉건체재는 더 이상 유효 할 수 없게 되죠. 봉건질서가 흑사병을 통해서 무너져서 근대국가로 개인의 주체성 개인의 개체성이 강조되는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하나의 발판이 되었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한번 해보면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제는 뭔가 새로운 체재로 나아가는 그런 발판이 되어야 이걸 겪은 인류가 그래도 그 고통과 죽음이 의미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저는 성서에 나와있는 예수의 탄생, 예수의 도래라도 하는 것도 한번 New Normal의 탄생이라는 순간에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를 생각해봤습니다. 성서에 보면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역사적인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성서에 보면 예수의 탄생을, 예수의 탄생 때문에 어린아이들 예수와 동년배인 갓난아이들 2만 명이 학살 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Harrods 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동방박사들이 왕을 경배하러 오니까 자기의 권위, 자기의 체재, 자기의 위상이 위태롭게 되자 그 왕이라고 왕으로 태어난 어린아이를 누군지는 모르니까 2만 명을 죽였다 라고 하는 기사가 나오거든요.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아마 사실이 아닐 것 입니다만 그러나 성서 기자들이 그 2만 명의 어린아이들이 죽었다라고 기록한 이면에는 그만큼 예수라고 하는 새로운 가치, New Normal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며 이 세상에 도래. 우리 기독교는 그것을 구세주, 메시아라 부르고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결국은 이전시대와는 다른 삶의 규범을 New Normal을 주기 위해 오셨는데 기존 규범이 기존체제가 그것을 저항하느라고 그것을 거부하느라고 그렇게 많은 어린아이들을 희생시킨 것이 아닌가? 그만큼 새로운 New Normal이 탄생하려면 그만한 희생과 그만한 고통이 일게 따르는 법이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흑사병도 그랬고 그리고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도 오늘 우리들에게 그렇게 많은 희생을 통해서 무언가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가자 라고 하는 그 가르침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가는 게 아닌가 거기에 초점을 두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이제 유럽의 철학자 Zizek이 말 한대로 왜 사람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철학적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의 본질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 이번 우리가 절망했던 대선도 사실은 정권교체가 아니라 이런 체재변화를 이루는 어떤 하나의 시발점이 되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랬던 것이고 한 사람의 지도자를 통해서 그러기를 우리가 예상하고 그러기를 바래왔는데 그만 우리의 역사를 퇴임시킬 사람이 당선이 된 거 같아서 우리 모두는 절망하고 그러고 있는 줄 압니다. 이제 이런 기본의식을 갖고서 이제 저희가 2020년이라고 하는 이 시점에(2년 전이죠), 코로나 바이러스가 생겼는데 2020년이라고 하는 이 시점이 왜 중요한가 하면 가장 기후문제를 보수적으로 가두고 있는 IPCC라고 하는 그 단체에서조차 이제 지구온도가 2도 올라서도 안 된다.
지구온도가 1.5도 이상 오르면 2050년경에는 지구는 거주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 거다 라고 이제는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모든 경제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에 가까운 전망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서 이 과제를 해결하려면 2020년을 기점으로 해서 우리가 2000년도에 에너지 사용량 탄소배출량의 40%정도는 감축하는 노력을 2020년부터는 시작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이 공론화된 이야기였기 때문에 2020년! 바로 그 시점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어났다고 하는 것, 이것 또한 우리가 의미 있게 살펴봐야 되겠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실은 이미 1.5도도 1.2도는 이미 올라있고 우리에게 남아있는 기후상승의 여력은 0.3도밖에는 안된 다는 게 환경학자들의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사실 지금 우리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하나님 이젠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살아야 되겠습니다’ 라고 하는 절박한 기도를 드려야 할 때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기후상승 여력이 0.3도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는 그런 점 에서 볼 때 두 가지를 우리들에게 폭로했다.
기후붕괴가 얼마나 위험한 지금 얼마나 긴박하게 기후붕괴 상태가 이르렀는가 코로나 바이러스는 예를 들어 이제 기후붕괴로 인해서 시베리아 동토에 수억 년 동안 동토에 갇혀있던 바이러스들이 기후붕괴로 인해서 거기서부터 해마다 40만종 이상이 동토로부터 바이러스가 살아서 대기 중으로 방출된다고 그럽니다.
어떤 바이러스가 어떻게 인간을 만나서 거듭 새롭게 우리들을 바이러스 공포로 이끌어 갈는지 알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은 원자핵보다 사실은 바이러스가 더욱 무서운 시대가 되었다는 말들이 회자되고 있죠. 또 이 바이러스가 이 백신을 통해서 치유되는 속도보다 변종 속도가 더욱 빨라서 과연 인간이 바이러스를 과학기술로 해결 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도 이젠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될 때가 된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금번 바이러스, 코로나바이러스는 기후붕괴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우리에게 알려주었고 동시에 Zizek같은 철학자가 강조한 것이지만 이 세계가 얼마나 불평등한가 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었다. 기후붕괴 현실과 이 세계의 불평등한 것, 우리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지금 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프랑스의 경제학자 PIKETTY의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텐데 자본주의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붕괴를 막기 위해서도 수정되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만든 경제지수 중에 베타지수라고 있습니다. 이 베타지수 설명은 베타지수를 가지고 불평등을 설명하는데 프랑스의 혁명이 일어났던 그시기에 불평등 지수보다 전세계적으로 한국도 그렇고 불평등 지수가 더 높다는 것이 지금 현실입니다.
그래서 지금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인 상황에 이르렀다. 우리가 프랑스 대혁명이 얼마나 많은 새로운 것을 가져왔습니까? 자유, 평등, 박애라고 하는 세 가치를 우리에게 준 것인데 그 불평등 구조 때문에 생긴 것 인데 그때에 불평등 지수보다 전세계에 불평등 지수가 훨씬 높고 대한민국도 그때보다 높은 지수를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게 그가 창안한 베타지수에 근거 할 때 보여지는 사실적 객관적인 근거입니다. 불평등 지수가 높고 코로나바이러스 4차 이야기까지 나오지만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이제1차 맞거나 1차도 못 맞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이러한 불평등의 문제도 나오게 되죠. 서구에서 아무리 4,5차를 맞아도 세계화된 현실에서 1차 접종도 안된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있는 한 변종 더 이런 정도는 거듭거듭 발생할 수밖에 없다. 불평등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 바이러스 문제가 해결 될 수 없다라고 하는 게 우리의 당면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서 우리 이제 언젠가는 이 안에 있는 저희들의 각 종교의 입장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어떻게 이해하고 다루고 극복하고 우리들 나름대로 New Normal 을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 필요가 있겠다. 지난번에 코모데우스를 갖고 우리가 고민했듯이 그런 생각들을 해보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제가 시간을 많이 쓰면 안되니까 제가 이제 내놓았던 그런 주제가 있는데 그 4개의 탈 개념입니다. 탈, 어떤 사람은 탈, 탈, 탈, 탈 다 털어라 농담 삼아 이야기를 하는데 탈이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포스트라는 말이죠. 포스트란 말은 이제 이후라는 뜻도 있잖습니까? 탈은 완전히 벗어난다라는 그런 의미, 조금 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탈, 탈, 탈, 탈 썼지만 사실은 영어로 말하면 포스트고 이 포스트를 후기라는 말로 번역하느냐 탈이라는 말로 번역하느냐에 따라서 뉘앙스가 좀 다르죠. 보통 후기라고 말하면 조금 느슨한 표현이고 탈로 말하면 좀더 강력한 그런 표현을 어감을 주기 때문에 저는 이제 탈이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이 탈속에는 포스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4개의 탈 개념을 가지고 이것이 우리들에게 새로운 New Normal 로서 역할에 쓰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포스트 그로스 탈 성장이라는 말, 사실은 성장이라는 말속에는 지금까지 인류는 한쪽은 굉장히 불평등한데 한쪽은 탈 결핍, 탈 결핍 결핍이라고 하는 것은 요만큼도 모르는 탈 결핍사회에 인류가 살고 있다 라고 하는 것 이죠. 한쪽은 탈 결핍 사회를 살고 있고 한쪽은 한없이 불평등한 삶을 살고 있는 이런 현실 그리고 PIKETTY가 말하는 그 지수를 보면 인류는 한없이 성장했지만 불평등 지수는 더 높아지는 이러한 현실이 지속 되는 한 그리고 그 성장을 위해서 계속 환경이 파괴되는 한 그리고 탄소 감축이 탄소제로사회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인류의 미래가 없다라고 하는 거죠. 탈 성장 그런데 이 성장에 탈 성장을 이야기하면서 탄소 제로사회를 말하고 에너지 재생산업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화석연료가 종언이 되고 또 부분적으로는 핵 산업이 축소되면서 재생 에너지가 바꿔지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재 에너지를 가지고 여전히 성장을 추구한다면 지구가 과연 이것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해마다 우리는 2%내지 3%의 성장을 하지 않으면 죽는 줄 알고 있지만 복리로 계산하면 20년 만에 지구의 총 생산량이 2배로 증가하는 경향을 우리는 맞이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재생에너지를 가지고 그렇게 산다 한들 재생에너지도 결국은 남쪽지역에 있는 그런 원자재를 통해서 재생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여전히 똑 같은 성장을 계속하겠다 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두 배로 늘어난 GDP를 지구가 감당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제는 이 포스트 그로스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이 탈 결핍 시대를 살고 있는 이 세계적인 차원의 불평등을 거듭 강조시키는 이 체제 이후의 세계는 어떤 세계가 되어야 하는지 그래서 우리의 노동시간도 줄이고 그리고 일자리도 나누고 성장보다는 돌봄의 가치를 중요시 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다른 세상을 만들 것 이며 이 일을 위해서 종교자체는 어떻게 스스로 변해야 할까라고 하는 이런 물음들이 탈 성장이라고 하는 화두 속에 담겨져 있겠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공생하려면 공빈의 길을 우리가 생각해야 될 때가 되지 않았는가? 공생 공빈의 시대 일본사람이 했던 말이죠. 누군가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공빈의 리얼리티를 우리가 생각하면서 우리가 이 탈 성장의 시대를 맞이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가 물질적으로는 과거 같은 성향을 이룰 수도 없지만 그러나 정신적으로라도 인간의 삶의 질적 가치로서는 굉장히 많은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될 것이다. 종래와 같은 불평등을 가중시키고 종래처럼 환경에게 큰 부담이 되는 이런 현실은 더 이상 만들어 내면 안 된다. 그게 아무리 재생사업을 가지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 가지고 성장을 추구할 수는 없다.
이런 맥락들이 여기에 깔려있고 종교가 어떤 가치를 우리 세상 속에 제안 할 것이며 종교자체는 어떻게 변해야 될까 지금 종교의 이런 모습 가지고는 서양사람들이 콧방귀도 안 뀐다. 절대로 종교를 보고 사람들이 새로운 가치를 갖겠다? 종교가 New Normal 을 제시하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이런 심각한 고민이 우리에게 종교인인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 두 번째로 탈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Zizek같은 경우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 서는 별로 동의하지 않아요. 서양철학자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러나 포스트휴면 이 포스 하는 것은 지금처럼 이렇게 불평등의 불평등을 양산하는 인간의 삶은 이제 끝내야 한다. 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측면에서의 포스트휴면이 인간이 지금처럼 불평등을 계속 악순환으로 만들어내는 인간이 아니라 불평등을 극복하는 인간 그래서 이 사람은 지금 코로나바이러스 시대를 예외적인 상태다 비상적인 상태다. 전시적 공산 체재 속에 우리가 들어가야 된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가 말하는 용어가 전시적 공산체재의 우리가 들어가서 살 정도의 예외상태, 비상사태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게 Zizek의 생각입니다.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죠.
그게 포스트 휴면의 Zizek이 말하는 본질인데 저는 그것과 함께 우리 동양적인 관점에서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그런 근본적인 변화와 함께 그런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런 것을 낭만적인 퇴행이라고 보는 Zizek하고는 조금 전 결이 다른 그런 생각을 좀 하고 있는데 여하튼 이 포스트 휴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자본주의 이후를 상상하라는 거에 한마디로 말하자면 종교가 할 일은 자본주의 이후를 상상하라는 거에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런 자본주의 시대 속에 편입된 종교를 가지고서는 절대로 종교는 세상을 구원 할 수 없고 New Normal 될 수 없다. 종교가 말하는 해탈이니 구원이니 뭐니 뭐 이건 한마디로 말하면 이세상이 New Normal 을 주자고 하는 건데 종교가 이 자본주의에 편입되어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서 사회주의에 대한 갈망 그 필요한 사회주의적인 요소에 등장시키고 심지어는 전시적 공산주의 상태 이걸 만들어서 이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 라고 하는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걸 종교인들이 받을 때 에는 어떻게 받을 거냐? 이런 문제가 포스트 휴면의 과제이다. 세 번째는 탈 서구죠 한마디로 우리는 지금까지 이 서구가 프로테스크의 침대인줄 알았잖아요. 그들이 기준이었고 그들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구원인줄 알았고 세상사는 길 인줄 알았잖아요. 그래서 서양이 동양에 프로테스크 침대가 되었고 남자가 여성에 기준이 되었고 기독교가 여러 종교들의 기준이 되었고 그런 기준으로 살아왔는데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니까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자신의 얼굴을 끝까지 가리지 않겠다고 그게 인권이라고 이렇게 내달리면서 끝까지 코로나 바이러스와 협조하지 않는 우리 기독교인 같은 경우는 왜 예배가 더 중요하지 서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기독교 같은 경우는 예배가 더 중요하지 하면서 절대주의를 표현한다거나 개인의 인권을 내세워서 절대로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고 하는 것 이거나 그리고 기껏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책임을 중국혐오로 치부하는 서양의 모습을 본다거나 우리 같으면 사실 마스크를 안 쓰고 싶지만 안 쓰고 있다가 사람이 오면 쓰는게 우리들의 마스크 쓰는 습성 아니겠습니까? 남을 위해서 얼의 골짜기인 우리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것이 동양적인 정서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중국 같은 경우는 인권보다 생존권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국가전체, 도시전체를 봉쇄할 수 있습니다. 이 중국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논쟁을 보면 미국의 공격에 대해서 중국인들이 의소 하는 것은 너희들이 말하는 인권보다 생존권이 더 중요하지 않으냐 그래서 우리는 생존권을 위해서 도시도 봉쇄 할 수 있다.
이런 중국과도 또 다르게 우리가 경험했던 코로나 이후의 우리들의 정서는 또 서양과도 다르고 중국과도 다르고 뭔가 우리의 한국적인 정서는 굉장히 특별한 것이었고 사람들이 그래서 많이 주목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오미크론 확산이 마구 확장이 돼서 다소 걱정스럽긴 했지만 한때 우리는 그런 주목을 받았던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서양에서 오지 않는가 어떻게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우리도 충분히 Normal을 제시할 수 있다.
우리만이 아니라 서양에도 소통되는 그런 Normal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그런 자신감 생각도 해볼 때가 되었다. 그래서 세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문화적인 K팝 K컬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적인 구원을 위해서도 New Normal 같은 것도 이제 우리가 한번 담대하게 더 정밀하게 힘을 합쳐서 세계에 공헌 할 때가 되지 않겠는가라는 그런 생각도 한번 가져봤습니다. 마지막으로 탈 종교라고 하는 것은 아, 그전에 그러면서 탈 서구를 생각하면서 누구를 생각했는가 하면 Albert 슈바이처를 생각했어요. 1,2차 세계대전을 아프리카의 람바르네 에서 경험하면서 서구문명의 몰락과 종언을 말한 사람이 Albert 슈바이처에요. 저의 스위스 Basel대학의 지도선생님의 스승이죠. 제 신학의 뿌리가 Albert 슈바이처에게 다 닿아있는 그런 부분인데 사실 Albert 슈바이처를 전통신학자들은 굉장히 싫어해요. 그래서 Albert 슈바이처 아프리카 갈 때 너 신학은 가르치지 말아라. 가서 의사치료만 해라. 이렇게 제안을 두고 Albert 슈바이처를 아프리카 람바르네에 보낼 정도였어요. 그의 신학은 좀 과격했거든요. 근데 슈바이처는 자신의 시각에서 볼 때 서구의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서구는 이제 문명적으로 몰락했다. 이제 새로운 문명이 인간의 자연으로부터 새롭게 솟구쳐야 한다 라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정통기독교 가치가 상충되어서 많이 신학자들의 세계에서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바로 슈바이처가 서구문명의 몰락과 종언을 말하고 생명 외경사상을 가지고 다시 한번 문명을 건설해야 된다 라는 그 이야기를 저는 생각했어요. 저도 우리 아시아적인 시각에서 이 오미크론에 이르기까지 코로나바이러스의 이 문명을 우리들은 바라보면서 서구 문명의 종언을 어떻게 우리는 탈 서구, 서구 이후의 일을 우리가 서구이전이 아니라 서구 이후의 길을 우리가 만들어 갈 것인가 라는 고민도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리고 이제 마지막 탈 종교는 아무리 기도해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피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력합니다. 어떤 신적인 기도에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피해갈수 없습니다.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우리 전통 종교에서 말하듯 타력적인 방식을 갖고서는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죠. 피해갈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스스로 함 스스로 하는 일 이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래서 종교가 의타적인 종교가 되는 것 가지고서 타력적으로 되는 거 같아서 기복적으로 그런 종교는 이제는 끝이 났다. 종교는 어떻게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코로나바이러스를 극복하는 길은 우리나라의 최고의 생태학자 최재천 이라는 분이 말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손 씻고 마스크하고 스스로 자기를 지키는 길 밖에 없다. 더 이상 타력적인 그런 것에 기대할 종교성은 이제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면서 이제 종교의 방식도 동학 식으로 말하면 벽에 놓고 기도하고 제사하는 종교가 아니라 자기 속에 하나님을 찾으면서 그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신고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 하는 그런 어떤 종교성. 이런 것들이 우리 타력적인 종교에 익숙한 기독교도 한번 적극적으로 탈바꿈을 해야 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결국은 예수가 그 2만 명의 아이들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가 태어나 이 땅에 왔다라고 한다면 그 2만 명의 아이들의 죽음, 그 희생의 대가를 통해서 예수가 이 땅에 왔다면 기독교인들 같은 경우는 그 무거움을 느낌들을 다른 어떤 경우보다 더 무겁게 받아들여야 될 때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경험들을 깊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기독교의 존재방식도 특별히 굉장히 좀 달라질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꼭 이뿐만은 아니겠지만 종교의 어떠한 역할과 이런 규명도 상당히 좀 달라지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제가 이 글들을 여러 군데에서 같은 글들을 반복하면서 글을 썼고 그러면서 했던 말은 공유경제 공유지의 확보 기본소득 뭐 그런 문제까지 제가 이렇게 다루면서 이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상상할까? 앞으로 아시지만 코로나 이후를 지금 경험하고 극복하느라고 엄청나게 양쪽완화가 되었는데, 돈이 많이 풀렸는데 이제 과도한 인플레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돈이 이제 미국을 중심으로 돈이 회수되기 시작 할 때가 오고 금리인상으로 나타나면 지금 세상사람들 경기학자들이 말할 때 앞으로의 세계는 IMF이전보다 더 많은 파산하는 국가들이 생기고 한 국가 내에서 더 많은 파산자들이 생겨날 수 있다라고 전망합니다.
리만 브라더스 이후에 이미 돈이 풀렸고 그 풀린 돈을 회수 하기 전에 이 코로나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엄청난 돈이 풀렸고 미국은 이미 근본이 되는 이미 지나갔고 미국의 채권을 가지고 돈을 풀었지만 이제는 미국 자체가 위험해 지기 때문에 그것을 회수 해야 되는 상황이 생기게 되면 몇 개의 국가가 IMF로 파산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파산될지 지금 헤아릴 수 조차 없다는 것이 경제를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코로나 이후는 더 많은 불평등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 라고 경제학자들은 걱정합니다. 그래서 이런 때에 종교가 할 일은 좀 과격하게 말하면 자기 건물 팔아서 사람들을 구제할 준비가 되었다. 그 동안 사람들에게서 헌금 걷어서 자기의 교세를 늘리고 건물을 짓고 충분하게. 이제는 어쩌면 교회가 역으로 보네포 목사가 이야기했듯이 건물을 팔아서 자기의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 할 때가 되었다. 이미 개신교 목사들 중에서는 교회 전세금을 빼서 사람들에게 교회 나름대로 기본 생활비를 지원하는 교회들도 여럿 생겨나고 있는 교회들도 있다. 어쩌면 교회가 그런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종교가 그런 위기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종교 스스로가 그런 준비를 해야 될 때가 되었다. 뭐 이런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습니다.
-최현민 수녀님: 목사님 감사합니다. 40분 이상 발제를 해주셨습니다. 책 한 권과 논문 하나를 40분 발제 해 주셨는데요. 지금 말씀 하셨듯이 지젝이 펜데믹 사태를 철학적으로 사유를 했다면 목사님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팬데믹을 성찰하시고 저희들한테 그 모든 것들을 정리해서 말씀해주시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책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문명의 교정자 라는 표현을 쓰셨고 또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새로운 New Normal을 할 수 있는 어떤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라는 말씀도 하시면서 네 가지 탈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이 탈을 보면서 아까 호스트의 개념들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냥 우리나라의 탈, 탈을 그냥 생각했어요. 가면이죠 사실은. 가면을 벗겨내는 그런 의미도 여기에서 함축적인 뜻도 있지 않나 그래서 인간의 탈을 벗겨내고 또 성장의 탈을 벗겨내고 서구적인 어떤 탈과 종교적인 탈을 벗겨내는 어떤 그런 부분이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 이후를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던져진 메시지가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듯이 탈 인간의 부분에서 그 불평등의 부분을 다루셨죠? 그래서 여러 다양한 인종차별 성차별 경제적 불평등까지 이 불평등의 부분을 종교인인 우리들은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 함께 의견을 나누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고요 두 번째 탈 성장이라고 표현하셨을 때 책에서는 돌봄 가치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돌봄 가치에 대한 표현은 제가 놓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부분은 많이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은 사실 이 탈 성장 아까 공유지의 부분이라든지 기본소득이라는 부분이라든지 책에도 자세하게 그 부분을 풀어서 설명을 해 놓으셨는데 저희 종교인 입장에서 돌봄 가치에 대한 새로운 연대,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촉진, 그런 면도 이 탈 성장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저는 조금 같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봤고요. 아까 탈 서구라고 했을 때 서구의 개인기적인 사고, 동양의 공동체성적인 어떤 영적으로의 변화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까 탈 종교를 말씀하셨을 때 사실 책에서는 이 부분 질문을 드리고 싶었던 부분인데요 은총감각이라는 표현도 쓰시고 은총의 새로운 차원이라는 표현도 쓰셨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혹시 목사님이 조금 이 책에는 있으나 오늘 발표에는 그 부분을 빼셨는데 이 부분이 사실 중요한 부분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종교가 어떻게 코로나 시대 이후의 종교가 어떻게 변해야 할지 그래서 탈 종교부분에 포커스를 맞춰서 같이 의견을 나누면 좋겠다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정배 목사님: 좋은 지적을 해주셨고요. 탈 종교 속에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저는 이제 기독교에서의 은총이라는 말, 불교에서 연기라는 말, 그리고 또 원불교에서 사은사상이라는 말, 동학에 시천교 라는 말 이모든 것들이 이세상에 한마디로 말하면 관계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하는 거 한마디 말이 될 터인데 관계가 있어야 내가, 우리가 존재하는 것인데 우리는 특별히 기독교가 이번 정권 하면서 주술, 무속이 왜 나쁘겠어요. 인간의 기본적인 종교성인데 무속이 욕심이 돼서 주술이 되면 그게 사람을 해하는 욕심이 되는 것처럼 모든 종교가 아무리 좋은 교리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걸 바탕으로 자기욕심을 채우는데 급급한 종교가 되어버렸다. 성직자들 스스로도 종교인들 스스로도 욕심으로 가득 차 있고 그리고 성도들도 그 종교를 바탕으로 그 종교의 본질보다는 자기 욕망을 채우는 일에 급급했다. 그래서 모든 대한민국에는 한마디로 말하면 자본교육 밖에는 없다 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의 현실이 되어버렸는데 이미 은총 받은 존재다. 존재 자체가 은총이기 때문에 사은사상에 특별히 그런걸 강조하죠. 우리가 할 일은 이제 우리가 받은 것을 나눠주는 것밖에 없다라고 하는 어떤 그런 기본정서. 이런 것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종교에 없던 것은 아니지만 다시 한번 그런 은총의 감각들을 다시 우리가 회복 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은총감각들을 잃어버렸다. 이미 은총인 것을 다 잃어버렸고 새로운 은총을 자꾸만 찾는다. 복을 받는 것만 강조하지 복을 짓는 일 에는 우리가 많이 게을렀다. 축복이 아니라 이제는 조복이다. 복을 지어라. 복을 만드는 것. 이게 원래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의 형상에 가까운 개념이다. 뭐 이런 개념에서 오늘 우리들 존재자체가 은총으로 이미 주어진 존재다 이미 네가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 가 아니라. 너는 이미 소금이다. 빛이다. 이런 명령을 받고 있는 존재들이 우리가 아닌 가. 그런 인간의 바탕에는 그런 종교성의 바탕에서 네가 종교를 다시 생각해야 될 때가 됐지 종교 하면 마치 자기의 복을 구하는 것 이런 개념으로 종교가 자꾸 회자되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최현민 수녀님: 예. 다른 분들 질문이나 느낌이나 좋습니다. 어떤 것이든지요.
-심원 스님: 목사님 말씀 너무 잘 들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New Normal을 주제로 이야기를 해봤으면 좋겠다 라고 제안을 드렸을 때는 오늘 목사님 말씀과 목사님 책에서 말씀해 주신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을 생각하고 제가 제안을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목사님께서는 제가 생각했던 것을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말씀을 해주셨는데 제가 New Normal을 말씀을 드렸을 때는 보통 New Normal이라 하면 지금 현재 혹은 이전의 시대에는 그렇게 통용이 되지 못한 가치나 아니면 삶의 방식이 어떤 계기로 인해서 새롭게 그 시대의 어떤 주류 내지는 삶의 형태에 사회문화 형태로 정착되는걸 저는 New Normal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코로나가 오므로 해서 우리가 이제는 살던 방식과는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지금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까 마스크 말씀을 하셨는데 처음엔 마스크 낀 얼굴이 어색했지만 지금은 마스크 벗은 얼굴이 오히려 어색할 정도가 되었고 그리고 이전에는 음식을 배달한다던가 아주 불가피한 상태에서 음식배달 혹은 이런 서비스를 찾았었는데 지금은 보편화되었고 재택근무 라던지 이렇게 대면사회보다는 비대면 사회가 더 주류가 된 것이 아닌가 그러면 이렇게 달라지는 삶의 형태에서 우선 1차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고 어떤 New Normal이 라고 했던 것이 그냥 New자가 떼어진 Normal상태가 되었는가를 먼저 이야기를 하고 논의가 된 이후에 이제 목사님이 제안하셨던 탈 성장, 탈 자본, 탈 종교시대에 우리가 할 역할을 생각해 보는 게 순서가 아닐까, 저는 사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 중간과정을 우리가 다 공유하고 있을 거라 목사님께서 생각하셔서 그런지 생략을 하고 목사님이 바로 그간에 생각하셨던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는 어떤 쪽의 목사님이 생각하신 부분을 설명해주신 것 같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오늘 논의가 시작된 거 같아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최현민수녀님: 미산 스님, 7시30분에 나가셔야 하니까 먼저 말씀을 해주시죠.
-미산 스님: 네. 4가지 탈에 대해서 이미 잘 설명을 책에도 해주시고 요약도 잘 해주셔서 따로 질문은 없지만 그 인상적인 말씀이 탈 종교 쪽에서 이제 탈 타력이 저한텐 눈에 확 들었어요. 탈 타력이 기독교 입장에선 굉장히 과감한 측면이 있잖아요. 본질을 추구하는 종교에서는 당연히 그게 맞지만 일반 기독교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대중성이 있을까 이런 생각이 한편으로 깊이 들었어요. 불교도 교리적으론 자력과 타력이 선명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들의 신앙형태는 기본이 타력이거든요. 제가 보기에도. 불교에 번역된 책을 최근에 쭉 열람을 해봤는데 이분도 지금 목사님 말씀하신 것처럼 불교가 자력적인 종교로서 손색없는 과학과 대학 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교리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신화적인 마법적인 신앙을 못 버리고 있다. 그럼 불교는 굉장히 재앙을 맞이할 것이다. 이런 경고를 봤는데 그것과 일맥상통을 한다고 해서 저도 공감이 가면서도 한쪽으론 물음표가 생각났습니다. 제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정배 목사님: 맞습니다. 사실은 현실적인 차원에서 보면 타력과 자력이 공존하지 않는 종교가 하나도 없죠. 타력과 자력이 다 함께 있는 게 종교의 실상인데 이제 제가 좋아하는 다속 용어도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나는 늘 항상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묵상을 했는데 6.2
5때 자기아들이 공관군 한테 잡혀가니까 나도 모르게 기도가 나오더라 라는 다속 용어도 이야기를 하면서 비바람이 칠 때 (어려울 때)가 바로 빌고 바랄 때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분이 공유를 하면서 우리 기독교는 많이 교회 가는 것으로 부족해서 점도 보고 이런 사람들이 부지기수에요. 그런 현실에서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제가 다속에 대한 존중도 하는 것은 남의 생명을 먹지 않으면 살수 없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있지 않느냐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계속적이다. 우리들의 일상이 계속 아니냐 남의 생명을 먹어야 되는 거 (동학으로 말하면 이천 식전),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 것 이 되는데 어떻게 남의 생명을 먹고 사냐 이제는 너의 생명을 바칠 때가 되지 않았느냐 그게 십자가다. 그게 종교의 마지막 가는 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은총신앙, 타력신앙 거기에 매달리고 있는데 오히려 그것이 일상의 우리들의 삶이 바로 대속이다. 그리고 내 몸을 바치는 것 진짜 종교의 길은 바로 거기에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기에 역시 이제 코로나 시대를 맞아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겠어요. 교회만 가면 코로나 안 걸리겠다 말한 설교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설교자가 걸리고 이런 지경 아니겠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지나칠 정도로 타력과 그런 것에 무속을 주술로 바꾼 것처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주술적인 행위들에 대해서 우리가 이제는 크게 한번 단을 요청해야 되는 것 아닌 가. 일상적인 행태가 되어버린 그런 종교로부터 일단 단을 한번 해보자 라는 취지에서 말씀 드려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