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대화 녹취록
- 모임 일시: 2022. 03. 24(목) 오후6시
- 참 석 자: 최현민 수녀님, 이정배 목사님, 미산 스님, 박태식 신부님, 이공현 교무님,
송용민 신부님, 박소이 교수님
[2-2]
-미산 스님: 예. 잘 이해됐습니다.
-최현민수녀님: 네. 우리 신부님들도 말씀 좀 해보시죠.
-이규성 신부님: 예.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는데. 종교의 관점에서 저도 종교인들 모임이 있지만 사실 불교, 원불교 잘 몰라요. 저는 그냥 가톨릭적인 입장에서 종교개혁이 있었고 어떤 문제 때문에 있었다. 이 정도만 알고 있고 아직도 갈등이 지속된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탈 종교라는 관점은 사실 최근에 목사님뿐만 아니라 탈 종교, 문자 그대로 쓰지는 않지만은 이런 방향으로 많이 쓰시는 것 같아요. 근데 이게 종교가 필요 없다 라는 이야기냐. 그건 절대 아닌 것 같아요. 목사님 말씀 하시는 것은 종교가 사실은 무속화됐다. 무당화됐다. 그래서 기복신앙의 종교가 됐다라는 관점에서 종교의 참된 가르침으로 들어가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라 하는 관점에서 말씀하신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고요.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어떤 나라에서는 예수님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자유롭게 선택 했지만 그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라는 인물을 그렇게 몰아 간 것 이거든요. 십자가 사건으로 몰아갔죠. 그리고 제자들이 보기에는 분명히 스승이 분명히 이를 극복하고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라는 것을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어찌 보면 거대한 사력에 의해서 밀려가는 것처럼 보이고 어찌 보면 또 자발적으로 들어간 것 같이 보이는데 결국 살해당했죠. 예수라는 사람이 살해당했습니다. 근데 다들 도망가요. 근데 그 십자가가 거기서는 어떤 상징 이냐 면 자기 스스로를 죽인 살인도구죠. 살인도구고 자기 스승은 묵사범으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조롱 받는 가운데 죽었고요. 저주 받는 가운데 죽었죠. 근데 이게 아니나다를까 며칠 있다가 보니까 가치전환이 일어나요. 죽음의 십자가가 생명의 십자가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제자들이. 그리고 저주받고 조롱 받은 사람이 사실은 인류의 구원자라고 그러죠. 전혀 가치 정도가 180도 바뀌죠. 그래서 저는 이 코로나가 그런 방식으로도 이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보여요. 죽음으로 몰아가는 어떤 질병으로 생각을 했는데 어찌 보면 이게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어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건 아닌 가. 십자가 나무가 나무자체로 보면 나무를 죽이는 도구였지만 의미로 보면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어가는 어떤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모두들 십자가를 지고 가라. 이런 식의 이야기가 되는 거죠. 코로나를 피해갈수는 없대요.
최재천 교수님 말씀으로는 바이러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가 22세기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피해갈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거죠. 피해갈수 없으면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새로운 생명을 낳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 종교인들이 새로운 길을 모색해 줄 수 있는 게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하나의 생명의 길로 제시하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라는 관점이고요. 목사님 말씀하신 것처럼 공생공빈 도 저희는 수도생활을 하니까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고 그래서 벌어들인 돈을 공동체에다가 집어넣고 저는 제 월급이 얼마인지도 몰라요. 교수 월급이 있겠죠. 그냥 용돈 한 달에 얼마씩 타냅니다. 근근 히 살아가는데 그렇게 표현은 하지만 여태까지 돈에 쫓겨서 거지처럼 산적은 한번도 없어요. 그러니까 진짜 빌어먹는 그런 식의 관점. 구걸하는 그런 식으로 살아 본적이 없어요. 예수회에 85년부터 살았으니까 38년째 살고 있는데 한번도 제가 가난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봤거든요. 오히려 저는 풍요롭다고 생각이 들었었어요. 그런데 이게 이러한 공생공빈 의, 우리는 수도자니까 청빈이라는걸 하나의 서원, 지켜야 될 덕목으로 이야기하는데 이게 모든 사람들에게 다 이렇게 제공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인류 60억70억80억 그런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살아야 된다 이야기 할 수는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현대신학자들 이야기로는 비판적인 대조적 삶이죠. 이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면서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가는 자본주의 방향으로 극심하게 갈수록 오히려 공생공빈 의 가난을 강조하고 더 나눔을 강조 함으로서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 할 수 있다라는 관점인데 가톨릭에 속해있는 이 수도자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저희만 해도 서강대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서강대학교 뺏기면 안 된다 이런 관점을 갖고 있으니까 저희 자신도 창피한 일이기도 하지만 단편적으로는 공생공빈 의 공유경제 이 조그만 20여명 200여명 정도의 공유경제, 공생공빈 의 생활을 하고 있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는 어필을 하는데 잘 선전은 안되어있죠. 수도자들이 잘 이런 모습으로 산다 하는 것을..스님들도 마찬가지죠. 공생공빈 을 저희들 보다 더 심하게 강하게 하시는 분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것 들이 많이 어필되지는 않죠. 어찌 보면 우리가 잘못 사는 것 도 있지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가치로서는 이 사회에 비판적 대조적 삶으로서의 어떤 제공이 될 수 있지 않느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입니다.
-이정배 목사님: 네. 신부님 말씀 저도 동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제 지금 코로나 사태를 Zizek 같은 사람은 예외상태, 비상사태 전시적 공산체제의 사태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 이 경험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 인가. 이 경험을 통해서 우린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를 철학적 종교적으로 신학적으로 깊이 사유 할 때 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 까. 저는 이재명의 입에서 저는 심상정의 말을 기대를 했는데 결국 이재명의 입에서 심상정의 말은 나오지 않았죠. 심상정은 뭐 사실은 옳은 말은 했지만 자기가 당선 되리라고 생각해서 한말은 아니지만 현실은 어렵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사실은 이재명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야 될 때가 되었다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런 말들이 못나와서 아쉽고요 한마디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신부님 멋지게 해석 해줘서 그 말씀 저도 따를 수 있고 따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제 Zizek 같은 사람은 우리는 보통 이사야 서의 고난 받는 종의 이야기를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연루시켜서 대속 신앙대 고백하는 것을 신 구약의 연결고리로 삼고 그걸 기독교의 핵심으로 여기는데 Zizek 같은 사람은 이제 유물론자고 무신론적인 배경을 갖고 있으면서도 기독교를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이 Zizek 인데 지젝 같은 사람은 욥기와 예수의 십자가를 연결시킵니다. 욥기에서 나의 하나님 어째 나를 버리시나이까 바로 그 십자가 상에서 예수가 죽습니다. 그걸로 끝났다. 그런데 끝난 줄 알았는데 거기서 공동체가 생겼다. 우리는 가끔 부활신앙이나 자꾸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지만 유물론자로 보면 그렇게 죽었는데 공동체가 생겼다. 그 공동체가 뭘 할거냐 라고 하는 물음을 물으면서 지금 신부님 말씀하신 그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지금 애를 쓰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할 일은 그리고 예수님이 마지막 요한1서인가요?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공동체를 일궈라 라는 부르너 로프 공동체에서는 그 창시자는 그렇게 풀고 있기 때문에 이 공동체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이 공동체 개념이 단순히 수도자 개념, 그 차원만이 아니라 공동체 개념을 어떻게 우리가 그래서 공유경제 기본소득 뭐 이런 문제로까지 우리 종교인들 끼리만 공동체 만들어 가지고 부족함 없이 살면 되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서로 사랑하라 인간에게 주셨던 공동체를 일구라고 한다면 공동체는 어떻게 일궈야 될까 그거는 경제문제에 뭐 이런 문제와 관련되어서 말하지 않으면 허무한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종교인들만의 이야기가 되어버리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런 점에서 그런 점에서 제가 탈 종교라고 하는 말은 보네포가 말한 비 종교 하라는 말을 충분히 염두 해 두고 쓴 거죠. 보네포가 생각할 때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타자를 위한 존재였다. 그러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결국은 예수를 믿는 거 아니냐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길이다. 지금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지만 사실 없는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지금. 코로나 아무리 기도해도 이룰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사는 삶이다. 결국 비 종교화된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결국 예수를 어떻게 사랑 하는 거냐 공동체를 위한 삶, 개인차원이 아니라 시스템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제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선악과 사건 이야기할 때 선악과 사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보통 교만의 상징으로 하나님처럼 되리라. 뭐 이런 개념으로 이해했지만 선악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은 모두의 것인데 모두의 것을 사적으로 취한 것이 바로 교회다. 공유지로 있는 것을 약탈해서 돈을 번 것이 자본주의이고 대기업들 아니냐 그럼 자신들이 모두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 것을 다시 모두의 것으로 환원 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 아니겠는가. 뭐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공유경제, 기본경제 이런 이야기를 풀 수 있는 근거도 맞기 때문에 기존에 기독교가 갖고 있던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관점자체도 이제는 굉장히 좀 Zizek도 과격하게 해석했듯이 그런 해석도 좀 달라질 수 있는 여지도 좀 만들어서 코로나19시대에 걸 맞는 신학도 풀어내면 좋겠다라는 우리 개신교니까 가톨릭은 감히 이제 체재 속 에서 그런 생각 못하는 부분이 크지만 개신교는 아무래도 이제 사적인 자유가 더 보장된 부분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신학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 에서 이 책 속에 그런 내용도 좀 담아 봤습니다. 그러나 아까 신부님 말씀하신 예수십자 가에 대한 이해는 100퍼센트 저도 따르고 싶습니다.
-미산 스님: 네 저 또 나가야 돼서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거든요. 지금 하신 말씀처럼 공유경제, 기본소득 뭐 이런 모든 것들이 국가적인 시스템에서 결정했을 때 이게 가능한 것들이잖아요. 직접 저는 목사님께서 작은 교회운동을 하고 계신다고 해서 저도 강의도 듣고 했었는데 저는 그런 입장이 존경스럽습니다. 실제 몸으로 실천하고 거기서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 뭐 기대 할 수도 없잖아요.
지금 뭐 선거 때 기본소득 한다고 했을 때 반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가지고 제대로 표현을 못 하더라 구요. 사실 그게 저는 옳다고 봤거든요. 지금은 그런 개념을 빨리 공론화 시켜서 할 수 있을 만큼 제도권 내에서 해야지 미래에 담보가 되는데 쏙 들어가 버리는 이 사회풍토 속에서 우리가 국가에 기대고 큰 변화를 바란다는 것은 사실 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거든요. 근데 목사님께서 그렇게 작은 교회 운동을 하고 대안학교를 만들고 그 교육을 받아가지고 그런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는 큰 희망을 저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실현 가능한 쪽으로 초점이 맞춰줘 있다.
저는 그래서 불교를 또 봐요. 불교는 또 이미 전통적으로 기득권 이것이 또 하나의 표상이 되어버렸거든요 그래서 작은 절 운동 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포교단 인데요 열면 20개중에 1개 살듯 말듯한. 지난번에 제가 목사님 강의 들었을 때 매우 조직적이고 실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정성 있게 실천하려고 하는 목사님들이 만나서 그런 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저는 굉장히 큰 희망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정배 목사님: 미산 스님이 늘 이점을 격려해주시고 너무 좋게 이야기해주셔서 부끄럽기도 하고 또 이 작은 교회운동은 사실은 저는 두 번째 종교계의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종교개혁은 루터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이제 가톨릭은 작은 교회 운동을 하기가 체제적으로 어렵지만 개신교는 그나마 이제 이런 운동이 쉽기 때문에 체제적으로 작은 교회 운동을 이제는 두 번째 종교개혁이라고 하면서 종교개혁 500년을 맞으면서 이 운동을 펼쳤는데 사실은 개신교도 100개의 작은 교회가 생기면 2년, 3년 안에 96개가 없어지고 4개 밖에는 살아남지 못하는 그런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조하는 것이 교회부터가 천장위주로 되면 교회는 1등부터 100등까지 획일화되는 구조로 간다. 이 작은 교회는 큰 교회를 따라 잡을 수가 없잖아요. 평생 열등감을 갖고 살아 갈수밖에 없으니까 작은 교회는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하라. 그러면 우리모두는 자기가 잘 할 수 있는걸 가지고 서로 획일적으로 되지 않고 다양성 측에서 모두가 저마다 자존감을 가지고 1등을 할 수 있는 길을 우리는 만들어 낼 수 있다. 바리스타 잘하는 목사님 있고 또 연극판에 가서 밤새고 연극하는 아이들 밥해주면서 청년들을 뒷받침 해주는 그런 여성 어머니 같은 여성목회자 들이 있거든요. 그 목회자들은 밥해 주는 게 일이에요. 일년에 몇 백 만원도 못 벌면서 연극판에 있는 그 젊은이들에게 언젠가는 생각하면서 이런 일들도 하라 그게 더 무가치하지 않다. 이런 작은 교회의 흐름들이 있고, 사실 요즘에 탈 성장 말이 나올 때 참 쓰기 어려운 말인데 이 말을 한국사회에서 가장먼저 쓴 단체가 어디냐 작은 교회라고 공식화 되어있어요. 작은 교회 운동에서 탈 성장이라는 말을 제일먼저 사용했다라는 말을 이 말을 쓴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작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먼저 탈 성장의 가치를, 획일화된 가치를 깨 부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스템을 향해서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 우리부터 그 흐름을 만들어 내자라고 하는 그런 몸짓이죠.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이고 탈 성장, 기본소득, 공유경제 문제는 영국에 있는 학자들이 굉장히 책들을 많이 만들어 냈거든요. 회의에 회장들도 영국에서 나와있고 그렇습니다. 이제 앞으로 어쩔 수없이 향후 5년 동안은 퇴임이 되겠지만 그러나 어쩔 수없이 정부도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기 위해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하는 것 때문에 이제 스님 말씀하신 방향으로 가게 될 터 인데 그걸 갖도록 하기 위해서 종교가 이 사회에게 줄 수 있고 볼 수 있는 어떤 하나의 원칙과 태도는 가지고 있어야 된다. 그 흐름을 좀 주도하자. 스스로 주도하기 보다는 우리도 좀 숨통을 쥐고 그런 방식으로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언제나 획일화된 구조에서 1등 100등의 그 구조를 가지고 우리가 허우적거려야 되는가 자존감 다 잃어버리면서, 우리가 빨리 벗어나자. 뭐 이런 취지에서 우리가 먼저 살자 라는 시작에서 시작했지만 그러나 이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들을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종교가 먼저 만들어내서 이야기를 하게 만들자. 뭐 그런 생각에서 시작을 했는데 굉장히 다양한 작은 교회의 흐름들이 저마다 1등 할 수 있는 그런 흐름들이 만들어지고 포착이 되 서 고마운 일이긴 합니다.
-미산 스님: 네 감사합니다.
-최현민 수녀님: 네 박태식 신부님 어서 오시고요. 일단 발제가 끝났고 지금 질의 응답하는 그런 시간이에요. 그래서 일단은 그 이정배목사님의 책과 제가 메일로 보내드렸던 부분을 중심으로 이야기 나누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도 신학적인 부분이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그랬는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
-박태식신부님: 예 일단은 좀 듣겠습니다. 제가 늦게 와서 적당한 때 끼어들게요.
-최현민 수녀님: 네 그러십시오. 네 그럼 교무님 혹시..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를 하신 거 같아요. 좀 나눠주시죠.
-이공현 교무님: 네. 저 는 이번에 너무 재미있고 감사하게 읽었어요. 코로나 바이러스 사람에게 묻다. 이정배 목사님 평소 옆에서 말씀 받들 때 마다 굉장히 다양하게 접목해 주시는 거에 대해 감사했는데 이렇게 많은 고민을 담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사실 저는 문제만 직시하고 문제만 던졌던 이러한 것을 다 연결하면서 고민해보지를 못했었는데 머리 속을 한번 정리 하는 거 같아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을 갖고 쭉 읽었어요. 그러면서 저는 받아 들이는 게 편안했던 것이 원불교가 시작 할 때 던졌던 그런 문제점들. 이러한 내용들이에요. 이 책에 굉장히 다양하게 오히려 풀어져 있는듯한 느낌들이 들어서 원불교적 용어들로만 보아 졌던 문제들을 또 다른 신학적인 차원이나 기독교적 차원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되어서 저는 기회가 되면 한번 더 연마하는 그런 시간을 가져봐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저는 여러 가지가 재미있었어요. 탈 성장 이라는 말도 저희는 시작부터 그러한 화두를 가지고 시작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들도 있지만 좀 전에 이제 이정배 교수님께서 말씀 하실 때 에 꾸준히 생각 났던 게 최근 들어서 그 MZ세대 있잖아요. 새롭게 대두되는 접목세대들의 의식이 기존의 저희들하고는 굉장히 차별화된 것들이 많거든요. 이 친구들은 저희가 경제적으로 무언가 더 혜택을 주고 싶어도 본인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거절해 버리고 나도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그건 안받겠다 이런 식 으로 나름의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실성을 가지고 뭔가 개척해 나가는 친구들은 기존의 우리들하고는 또 다른 흐름이나 의식 같은 게 또 다르게 일궈 지는 게 있는데 이거하고는 어떻게 생각해 보신 게 있을까? 생각이 났던 것이고, 또 재미 있었던 게 루터에 제사 직론 이나 이런 것들도 말씀 하셨지만 거론하시는 것은 성직자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리도 재미있었는데 그거보단 이제 출가자의 입장이지만 앞으로의 시대는 출가와 출가하지 않은 제가들 신도와 성직자의 이러한 나눔?분리? 이게 이분화되지 않은 세계로 가야 된다. 그런 준비 기간, 되게 끔 가르쳐야 된다. 늘 저희도 그런 출발점으로 하고 있지만 하다 보면 제도 속에 갇히게 되면 그 부분이 참 어렵다라는 것을 현실에서 느끼거든요.
그런 쪽에서 안전장치나 보호받는 권위나 찾는 스스로를 보면서 반성하곤 하는데 이러한 부분에 대한 마지막 말씀이 저는 굉장히 와~ 울림이 되게 강하게 와 닿으면서 그러면서도 재미 있는 건 속리산 내정사 같은 경우에는 원불교를 앞으로의 시대는 성직자가 덜 갖고 청빈이나 이런 것도 있지만 오히려 세속사람들은 많은 부분들을 그렇게 하는 성직자들에게 오히려 기부하고 오히려 성직자들이 더 편안하게 살수 있게끔 오히려 그런 세상을 자꾸 열어가는 시대로 갈 것이다. 그런 말들도 하고 이런 것들도 생각이 났었거든요. 그래서 출가와 제가 성직자와 성직자가 아닌 사람의 일상이 둘이 아닌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의 종교생활이 강조되다 보니까 그렇게 갈수밖에 없겠다 생각이 들어지지만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고민이 들어 지는 게 종교가 제도에 있다 보니까 저희도 원불교의 성장을 위해서 노력을 하다 보니까 원불교가 하고 싶었던 지금 우리가 사는 이시대. 우리가 공존하는 시대를 어떻게 더 잘 살수 있게끔 노력할 것인가 보다 제도를 중심으로 어떻게 생각하는 앞만 보는 좋은 활동이나 가치관이나 사랑 속으로 오히려 종교가 가야 할 것들을 닫고 그러한 느낌들을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되게 답답한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아까 말씀하시는걸 쭉 들으면서 이 그러한 종교가 종교계가 서로 연대하고 공감 할 수 있는 세대로 간다는 것에 대해 이러한 제도종교를 떠나서 각 종교가 저희는 회상이라는 말이 있고 교단이라는 말이 있는데 각 종교의 교단이라는걸 더 넓은 틀의 종교의 회상이라는걸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많이 던져줘야 되겠다 이런 생각들을 저한테는 좀 있었고요 이렇게 여러 가지 읽으면서 너무 재미있으면서도 사람과의 문제점들이 되게 깊어졌고 교회라는 것을 저는 되게 그게 좀 궁금했어요. 에클레시아라고 교회가 종교본질을 흩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거에 대한 직접적으로 말씀 들어본 일이 없어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작은 교회 하고의 사이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이런 생각도 좀 있어서 말씀 부탁 드려봤습니다.
-이정배 목사님 : 네 교무님 고맙습니다. 사실 저도 이 코로나 이야기를 했을 때 개신교 목사들한테도 여러 번 했고 교무님들한테도 가서 했는데 개신교 목사님들보다 저한테는 이질적 이기도 합니다만 원불교 교무님들이 그분들이 훨씬 더 이 이야기를 더 받아주셨어요. 처음에는 익산 중앙 훈련원에 한번 하러 갔는데 거기 계신 분들이 다른 네 번도 다 하라고 그래서 못하겠다고 그러는데 잘 받아 주셔가지고 다섯 번을 하게 된 그런 경험이 있는데 하여간 고맙습니다. 이 출가와 제가 문제도 저도 목사지만 대학교수로 있었지만 유학시절부터 사실은 아마 누구보다 많은 설교를 하는 그런 목회자로서 삶을 살아봤어요. 목회도 하면서 저한테는 그런 기회가 주어졌어요. 그래서 목회자의 삶도 하고 친구들은 감리교단에서 큰 교회의 담임목회자들로 은퇴 안 한 채 있어서 알고 있지만 단적인 예로 우리 개신교는 새벽기도를 하잖아요 근데 하다 보면 목사들에게는 새벽기도는 자기 이기에요. 근데 신도들에게는 자기의 삶에 자기에요. 자기 직업으로 일로 새벽기도 오는 사람과 자기들의 삶을 다해서 오는 사람과 목사들은 새벽기도만 끝나면 와서 또 자요. 그러나 신도들은 끝나고 일터로 갑니다. 그렇게 봤을 때 누가 더 종교적인가 누가 더 삶이 거룩한가를 따져보면 목사는 목사세계를 너무 잘 알거든요. 저는 그런데 대해서 한번 이제는 더 정직하게 한번 우리 자신들을 돌아 봐야 된다라는 생각을 그렇게 이제 저는 하는 것이죠. 그래서 맨날 목사들 세계에 모이면 어디 놀러 갈까 뭘 먹을까 이야기만 대화방 에서 한 가득 입니다. 교인들이 만약 그 이야기의 내용들을 알고 있으면 참 그런 모습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런 의식들로 꽉 차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거는 제 자신과 제 주변을 보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과장만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와 출가의 문제들 성직 인 게 뭔가에 대한 물음이 지금으로서 보장받는 성직 이거는 서양의 것이다. 그러나 삶으로 수행으로 성직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설령 출가 제가를 떠나서 우리는 그런 점에 대해서 더 다르게 이해할 부분들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된다라는 생각을 한번 더군다나 탈 종교 문제와 더불어서 제가 탈 성직의 문제를 다룬 거거든요. 탈 종교는 탈 성직의 문제와도 그렇다고 성직을 버리자는 문제는 아니니까 성직의 새로운 의미들을 찾고자 이야기했던 것이고요 이제 에클레시아 라는 말이 흩어진다라는 시나보 입니다. 이제 교회는 잘 모였다가 배우고 흩어지는 곳. 모이는 것 없이는 흩어지는 것도 없지만 그러나 모이는 것 , 지금 교회는 모여서 자기들만의 집단을 교회라고 생각하지만 모여서 배워서 흩어져서 자기들이 머무는 삶의 자리를 다 거룩하게 교회로 일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이제 에클레시아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근데 우리는 일상은 한없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욕망덩어리로 살다가 교회 와서 믿습니다. 아멘 하면 구원을 받았다라고 하는 이런 시대 종교의 구조를 가지고서는 기독교는 백날 있어봤자 아무 쓸모도 없고 정말 세상의 역할을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그런 자기만의 공동체가 되어버리고 말 꺼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설교해요. 교인들 중에 전문직을 살려가지고 이 시민단체에 파견해라. 교회가. 그래서 우리 교회가 십일조를 요구하지만 말고 교회가 시민사회에 십일조를 내라. 그리고 인력도 좀 교인들도 일하도록 만들고 거기서 피드백을 받아서 필요한데 지원하고 교회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그런 시민단체를 위해 그리고 교회가 가지고 있는 좋은 건물들,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은요 실패 할 줄 알면서 그 길을 가야 할 운명을 갖는 사람들이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 만큼 영성이 필요한 사람들이 없어요. 시민운동치고 열악하죠? 그리고 그게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죠? 그러나 옳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시민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영성을 주는 일들이 얼마나 시급한 일인 줄도 말할 수 없어요. 그들이 훨씬 거룩해요. 모든 게 보장된 제도와 틀 속에서 신앙적으로 제사 직을 수행하는 성직자들도 훌륭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 길이 옳기 때문에 가는 시민 운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그 길을 가는지 조금만이라도 안다면 우리는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있다. 일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 그게 바로 에클레시아의 본질이다. 그래서 이제 자꾸만 코로나 시대에 비는 것만 강조하고 그것을 예배라고 교회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러지 말고 그렇게 지금까지 기독교, 개신교만큼 많이 모이는 단체가 어디 있어요? 새벽기도 나와야죠, 수요일 나와야죠, 금요일 속회 봐야죠, 주일 대 예배 봐야죠, 오후 예배 봐야죠. 1주일에 5,6,7번 예배를 드리는 그만큼 많이 모였으면 이 코로나 시대에 좀 흩어지는 교회가 돼보자. 그런 취지에서 흩어지는 교회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이 책 속에서.
-이공현 교무님: 목사님 MZ세대에 대해서.
-이정배 목사님: 잘 몰라요. 잘 몰라. 너무 생각이 다르고 따라갈 수 없다 그런 생각만 가득 가지고 있어서 청년들 앞에 설 자신이 전혀 없습니다.
-이공현 교무님: 그럼 한가지만 더. 영성에 대해서 마지막에 많이 해주셨고 공감이 되게 많이 갔어요. 작다, 고독감, 외로움, 여러 가지 이제 쭉 이런 말씀을 듣다가 요즘 사실은 요즘 공간들 보면 한 건물 건너 한 건물에 명상하고 요가 하는 공간들이 되게 많고 종교생활보다 그러한 치유나 이런 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고 종교시설 같은 공간에 가지 않아도 내 스스로가 내 삶은 살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용기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이 많아 진 거 같아요. 영성이나 정신세계에 대한 추구와 또 다른 종교는 그보다 다르게 제시해야 될 부분이 분명히 필요 할 텐데 이런 부분을 어떻게 다가서야 될까 이런 고민들도 개인적으로 고민하시는 부분이 있으면.
-이정배 목사님: 지금 제가 말하는 거는 개신교적인 입장에서 경험을 가지고 말하는 거라고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제가 보편화 시킬 수 도 없고 또 성직자들 출가, 제가 문제에도 개신교적인 것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이야기는 아니고 제가 절실하게 느끼는 제 주변의 문제기 때문에 그런 글을 쓴 거니까 저희 같은 경우엔 개신교는 수행의 개념이 너무나 없는 개신교 집단이기 때문에 그런 문제의식을 많이 갖고 있는 것 이고요. 저는 이제 지난번에 최현민 수녀님과도 의견이 같았다고 보는데 호모데우스 책을 쓰면서 저자가 명상을 많이 강조했잖아요? 그리고 기독교의 네거티브의 이야기들을 뇌 부정적으로 봤고 뇌에 있어서 어떤 거짓된 작동에 의해서 했는데 저는 여전히 네거티브에 대한 중요성을 부정할 수 없다라고 생각을 하고 명상이 갖는 숨 기능과 좋은 역할에 대해서는 추어도 의심함이 없지만 그걸로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저자의 가르침에는 저는 동조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명상만으로 될까 그런 의미에서 특별히 개신교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영성으로 꼽은 것은 책에도 썼지만 고독과 저항과 상상 이라고 하는 세 차원을 가지고 저 나름대로의 영성의 틀을 만들어 보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깊은 고독이라 하는 것에 대해서 세상에 대한 저항이라고 하는 것. 또 고독함이 없으면 상상력도 없는 것 상상하지 않으면 저항도 없는 것이고 그래서 고독과 저항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의 영성이 꼭 종교적인 틀로 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이러한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표현될 수 있겠다 싶어서 또 사람마다 근기도, 성질도 다르고 그래서 명상으로 깊이 자신을 변화시켜서 세상 속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또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싶어서 서로 자기전통에서 부족한 것은 배우지만 어느 하나만 가지고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영성은 없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답이 안될 거 같은데 한없이 부족한데 저는 이렇게 밖에는 대답을 못하겠습니다.
-최현민 수녀님: 감사 드리고요. 세분 말씀하셨는데 우리 정 소이 교수님, 유학자 입장에서 어떻게 접근하셨는지 의견 듣고 싶습니다.
-정 소이 교수님: 네 저는 잠시 쉬어가는 타임이 어떨까요? 하고 제안하고 싶었는데. 사실은 너무 재미있어가지고 적으면서 하다 보니까 제가 어떤 것을 질문을 드리고 싶었는지도 잊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작은 교회 라던지 코로나 시대에서 조직이 커가는, 한없이 커가면서 성장을 추구하는 극단적으로 그런걸 떠나서 다시 이제 개인화되고 조그만 교회로 나간다 라는 게 굉장히 와 닿았는데. 제가 한번 생각을 했던 것은 서양은 이혼건수가 되게 많이 늘었다고 그래요. 집에서 같은 얼굴 또 보고 너무 지겹고 사랑했다고 생각해서 결혼을 했는데 맨날 해 먹이고 볼꼴 못 볼꼴 다 보니까 로맨스가 다 깨져 버린 거 자나요. 그래서 이혼건수가 많이 늘어난 건데 한국에서는 얼마나 이혼 많이 할까 저는 돌밥 하면 돌아서면 밥이고 돌아서면 밥이잖아요. 그러면서 이제 애 둘을 계속 하다 보니 근데 놀라운 건 한국전체 이혼건수가 되게 줄었어요. 그게 사실은 진정한 가족으로 돌아 왔지 않나. 쓸데없는 가족모임이 없어지고요 이제 가족핑계로 만나는 사람도 없어지고 제사가 없어지고 쇄신이고 명절이고 그런 게 없어지면서 사실은 아까 말씀하신 관계도 매우 중요하지만 관계의 무조건적인 확장 이라던지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게 맞잖아요. 교회 조직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영성, 하느님과 마주치고 느끼는 은총의 감각을 되살리는 것? 그게 되게 와 닿았던 게 일방적으로 자손들을 거느리고 명절을 하고 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하부조직들이 억울하기도 하고 이러면서 가족의 정을 나는 못 느끼는데 이쪽은 느껴야 되고 이게 온갖 불평등과 그 근원이 오히려 코로나로 인해서 사라지고 명절 이라던지 생일이 한 개인당 부모님이 자기가 스케줄에 맞춰서 찾아가고 각자 맛있는걸 해와서 나눠먹고 그러면서 부모님과의 관계도 각자의 관계로 재 설정 되면서 핵가족이지만 다 1대1의 관계처럼 스몰 조직으로 움직이게 되니까 사실 양가가 다 화목해 졌어요. 저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화목해지고 제 다른 주변을 봐도 소외된 사람들도 물론 있겠지만 오히려 유교의 병폐다 해서 온갖 제사와, 명절 자체는 문제는 아니었는데 가족 이라던지 관계성 이라던지 그런 의미? 이런 것들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되게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꼭 유교가 아니더라도 아까 말씀 주셨던 공유 경제 라던지 공동체, 공동경제, 공유지, 기초생활비, 기초소득 이런걸 들을 때 마다 당연히 동양철학 공부하셨던 선생님들도 묵자 라던지 요순시대의 공동체, 그때는 대동사회 잖아요? 묵자도 공동체를 중시했는데 항상 커뮤니 테리어니즘 이라고 하는 게 묵자가 어떤 조그만 공동체를 조직한 게 아니라 대동사회에서는 사유재산 이런 게 없었기 때문에 모든 땅은 공유지고 이게 커뮤니티 조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아니었구나 목사님의 그 큰 선악과 라던지 비유를 통해서 제대로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고요. 사실 요순시대가 끝난 것이 우 임금으로 세습이 처음 시작되면서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온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게 요가 순한테 선향을 하면서 아무도 자기 불러들일게 아니었는데도 논에서 밭 갈다가 발탁이 되었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우 임금부터 세습이 시작이 되었고 세습 이후에 그 예라는 것이 생겨났고 소강상태가 생겨났고 서로서로 조심하면서 전쟁상태는 아니지만 그런 것이 제도화 되면서 문제가 생기는데 그런 것이 어떻게 대동으로 돌릴까? 대동의 상태로 요순이 유토피아로 어떻게 돌아갈까? 유학자들이 예를 이야기하는 유학자들이
의식이기도 한데 대동은 항상 뭔가 멸사봉공 해가지고 큰 공동체를 만들고 어떤 큰 조직을 만들어서 함께 나아가야 된다. 이런 생각을 항상 그쪽 방향만 생각했지 이렇게 잘게 쪼개서 개인으로 다시 돌아가서 처음으로 탈 성장과 탈 인간적 조직과 이런 것들 중심으로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코로나로 인해서 제사의 문제처럼 탈 가족, 큰 공동체로서의 가족대신 진정한 의미에서의 일대일 부모자식간의 진정한 관계? 자기가 모든걸 희생하고 가족 공동체가 모여야 되는 시간에 딱 모여가지고 12시에도 졸린 데 일가야 되는데 제사를 지내고 이런 형식이 아니라 어쨌든 모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살아나는? 그런 게 굉장히 저한테 큰 영감을 주셔서 감사하고 감사한 통찰이었습니다.
-이정배목사님: 예 감사합니다. 공감하는 말씀입니다.
-최현민수녀님: 네 감사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용민 신부님 한 말씀 하시고..
-이정배목사님: 8시까지는 끝내주셔야 합니다.
-송용민신부님: 네. 너무 좋은 말씀들 많이 하시고 사실 이정배 목사님의 그런 통찰과 해안은 늘 존경스럽게 듣고 제가 보는데요. 책도 아주 꼼꼼하게 다는 못 봤지만 전체적인 기조들은 저도 동의 하는 바이고 많이 공감을 했습니다. 저는 이제 잠깐 자기 성찰적인 의미에서 개신교 목사님들의 성찰을 들으면서 많이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성직 제도성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그 아픔을 딱 지적해 주신 거에요. 저희는 일인데 신자들은 삶이다. 정말 너무 딱 맞는 말씀이신데 목사님들은 더 더욱이 가정을 가지고 계시니까 더 피부에 와 닿으실 텐데 가톨릭 사제들은 독신을 선택하고 살다 보니까. 사도 바오로가 그런 말씀을 했거든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까 고민하고, 남편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근데 저희는 가정이 없으니까 당연히 저희들의 에너지를 신자들을 위해서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쪽으로 훨씬 많이 장점은 제도적으로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도 우리 사제들 안에서도 당연히 사제 직을 중요한 소명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직업적 소명 같은 것을 생각하면 흔히 저희들 내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목과 취미생활에 경중이 뒤바뀌는 일들이 생긴다. 이런 말들을 저희가 자주 하거든요. 낚시 좋아하는 신부님은 본인이 해야 할 일 끝나고 낚시만 한다던가 뭐, 이러한 어패 들도 갖고 있긴 하지만 가톨릭 사제 직무 중에 한가지 중 자랑 아닌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건 저희는 신부가 될 때 숙명 서약을 하거든요. 주교님께 그러면 주교님이 나에게 어떤 명을 내리시면 거기에 어떤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따르는 거에요. 예를 들면 제가 어떤 자리에서 너무 행복하게 있었어도 내일 당장 어디 다른 곳으로 가라. 해외로 갈수도 있고 작은 섬으로 가서 몇몇 안 되는 신자들하고 살수도 있고 사회복지기관에 가라고 하면 두말없이 가야 되요. 이러한 것들이 저희들이 숙명서약을 통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자칫 정직의 욕망이 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스스로가 내려 놓을 수 있는 준비가 저희는 항상 되어있어요. 떠날 준비가 저도 지난 6년 동안 한국주교 회 라고 하는 한국천주교회 핵심 중심부에서 큰일을 하다가 이제 넌 충분히 했으니까 교구로 돌아가서 성당 가서 신자들하고 살아봐. 그래서 저는 작년 1월에 성당에 왔는데 또 제가 큰일을 했다고 이런 것도 있어요. 열심히 한 사람들은 성당도 좀 안정적이고 좋은 성당을 보내주세요. 그래서 제가 있는 성당이 6년 전에 제 동창신부가 새로 지은 성당인데 인천에도 논현동이 있어요. 여기도 제법 사는 동네니까. 성당을 구성하고 있는 신자들이나 성당규모가 제법 돼요. 그리고 전임신부님의 빛도 다 갚았고
저는 비록 코로나한복판에 여기 와서 신자들이 없는 곳에 와서 미사가 없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신자들이 찾아오면 같이 미사하고, 한 공동체를 형성해 가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신자들을 위해서 이 어려운 시기에 뭔가 해 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할 수 있는 그런 힘은 좀 얻은 것 같아요. 코로나시대에 제가 받은 소명을 살아가는 방식인 거 같고요. 이제 전체적인 상황 속에서 이정배 목사님의 기조나 제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여러 가지 종교적인 단면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그 부분이 많이 공감이 되는데요 자본교 라는 말씀을 하셨거든요. 저희가 호모데우스 심포지엄 할 때 데이터를 유발 하라리가 많이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자본교 라는 것은 모든 어떤 사회적 가치가 딱 자본에서 잠식되는 된 건데 자본주의 시스템이죠 요즘 제가 더 많이 관심을 갖고 듣는 강연은 중앙대학교의 김유리교수가 뜨겁게 떠요 이분이 이제 차이나 클래스 나온 후부터 유명세를 떠가지고 엄청나게 많이 불려 다니시고 그분의 강연을 들으면 아주 일목요연한 자기 기조가 있어요. 그 기조에서 눈 여겨 봤던 거는 이번에 최근에 종교통계가 나왔죠. 2022년에 불평등지수 보고서에서도 우리 대한민국이 7개 분야에서 부끄럽지만 탑을 차지했잖아요. 빈부, 남녀, 이념갈등, 학력갈등, 우리도 너무 체감 하고 있는 그런 갈등지수나 불평등 지수가 엄청나게 높은데 이정배목사님 말씀하신 것처럼 프랑스 혁명지수보다 불평등지수가 높은데 왜 우리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느냐 이것에 대한 질문에 아주 좋은 답변을 주셨어요. 저도 마이클 샌들의 ‘공정하다는 착각’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데 능력주의 신화가 우리에게 이런 불평등의 현실을 사회적 구조에 탓을 돌리지 않고 내 자신에 능력의 탓으로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거에요. 내면화의 과정이 아 난 능력이 없으니까 이거밖에 못해 난 능력이 없으니까 이렇게 살아도 난 할 수 없어. 이런 자조 섞인 우리들의 태도가 이 사회를 변화 시킬 수 없는 선상이 되고 끊임없이 내가 경쟁사회로 내몰려서 경쟁에서 누군가를 치고 올라가서 내가 성장하거나 자포자기 하듯이 포기해서 삶을 종결시키는 그런 자살의 현실로 양극화 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는 거죠. 그래서 그러한 부분들의 종교의 자본화를 생각하면 저도 그런 부끄러운 부분들도 많이 느끼지만 탈 종교와 탈 성장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의 화두를 우리가 지금의 현재 종교적 삶에서 실천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저도 하면서 그런 글을 썼는데 과연 교회도 능력주의 신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저희 내부니까 말씀을 드리면 제가 속해있는 인천교구나 서울교구같이 수도권에 있는 교구들은 가톨릭 중심으로 운영이 되는데 교구의 재정적인 능력이나 형편에 따라서 굉장히 빈부차가 커요. 서울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저희 인천도 굉장히 많은 대학과 학교를 운영하고 병원을 두 개씩 운영하고 하니까 신부들이 엄청나게 많은 곳에 관리인으로 파견되어 있는 거죠. 어떨 때는 사제가 신자들을 위한 어떤 영성 적이고 종교적인 소명으로 파견되어야 하는데 지금은 기능적인 관리직을 하면서 병원을 운영하고 학교를 운영하고 복지시설의 관리 장을 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모습들이 더 더욱이 국가에 제도적인 제도 맞닿았을 때 지금의 정부는 정부가 공익적 차원에서 사립학교에 대해서 어떤 국가의 간섭? 복지시설의 국가적 간섭을 강화 하다 보니까 어떤 현상이 생기 냐면 사립학교나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교회재단 경우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국가로부터 강탈당하고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거 에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교회가 기득세력이 된 거에요. 기득세력이 되었는데 이번 대선을 겪으면서 너무 놀라운 것은 당연히 우리 가톨릭의 정신에서나 교회정신 에서는 누구를 지지해야 되는지 너무 명확한데 이 높으신 분들께서는 이 시설을 관리하고 책임을 져야 되는 분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우리 교회도 스스로 능력주의 신화에 빠져서 그 능력을 더 성장시켜서 사회 안에서 우리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그런 세력이 되어버렸나? 하는 부끄러운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조금 많이 반성을 하구요. 한가지 좀 말씀을 마무리 하고 싶은 것은 이정배 목사님이 말씀하신 탈 종교적 작은 교회운동에 대해서도 개신교 목사님들을 운동을 하다 보니까 많이 뵙는데 제도적 차원에서의 이런 만나는 분들과는 다르게 많은 목사, 목회자 분들이 양산되면서 그분들이 목회에 할 수 있는 공간적인 자리가 없어지고 대형 교회화 되고 있는 현실에서 목사님들의 어려움들도 커지는데 작은 교회운동 이라는 게 일각에서는 대형교회를 지양하는 성장중심의 개신교가 그렇게 할 수 없는 자구체계의 작은 교회의 운동을 시작한 것 이라면 작은 교회 운동은 실패할 수 없는 거지만 그 의미를 찾아서 대안운동처럼 하고 있는 건데 일각에서는 조금 작은 교회 운동하시는 분들이 뜻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성장하고 큰 존경 받는 목회자가 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차안 밖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 같은 자조 섞인 그런 현상일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도 더 큰 교회 목회를 할 수 있는 현장이 주어진다면 능력발휘를 할 수 있는데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그런 목소리도 개신교 일각에서는 있다는 말을 제가 들었거든요.
-이정배 목사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정확한 답을 드려야 할 꺼 같아요.
뭐 일리 있는 말씀이고 언제부터인가 작은 교회 운동을 하기 시작하고부터 여러 신학대학이 교회성장 론 이라고 하는 과목을 가르치지 않기 시작해요. 그리고 학생들을 작은 교회 운동을 하는 현장에 와서 너희들의 미래가 이렇게 될 수도 있다. 이런 게 너희들의 미래일수도 있다 하는 것을 좀 보이고 관심하는 설교 신학자들이 많이 생깁니다. 가톨릭 교회는 아무리 작아도 갈 곳이 있잖아요. 근데 개신교 목회자들은 갈 곳이 없어요. 그것도 현실이고. 2중직 3중직 4중직까지 일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면서 교인도 한 명도 없는 교회들을 지키고 있는 교회들도 물론 있어요. 이게 현실이죠. 그리고 또 그런 반면에 어느 사람은 자기 1달에 판공비가 1억이 넘는 돈을 펑펑 쓰고 살 수 있는 대형교회 목사들도 있고 이런 불공정한 구조가 있는데 여전히 목사들은 1억이 되는 교회를 가고 싶죠. 그리고 또 사람이 몇 명 모이는 교회를 가려면 암암리에 교회에다가 헌금을 하던지, 가는 목사가 아니면 떠나는 목사에게 전별금을 주기 위해서 돈을 가지고 가던지, 명목상에는 현금이지만 돈 거래가 이렇게 왔다갔다하는 이런 현실입니다. 개신교의 상당히 보편화된 일입니다. 문제가 커요. 그런데 우리가 하는 작은 교회는 단순히 숫자적으로 작다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가치적으로 작다. 200명 정도 모이는 작은 교회도 작은 교회 운동이 함께합니다. 숫자적인 의미가 아니에요. 작다라는 의미에는 거기에 가치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40명 넘으면 20명씩 분가해서 5개 교회이상을 분가한 교회들도 있어요. 신부님이 말하는 그런 실정도 있지요. 자포자기해서 그리로 오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함께하는 작은 교회 운동은 또 작은 교회 운동을 하는 이 그룹에 대해서 지금 그 시각은 대형교회 목사들, 제도권 목사들, 배가 부른 목사들이 작은 교회 운동을 하는 가난한 목사들을 향해서 말하는 비난의 한 부분이기도 해요. 그러나 가치를 가지고 우리가 처음에는 작은 교회도 희망이다라고 슬로건을 내걸려고 하다가 마치 패자 부활 전 같아가지고 그거 노하고 <작은 교회가 희망이다>라는 말로 바꾸면서 더 가치지향성을 분명히 했죠. 그런 점 에서 이 작은 교회 안에 제가 쓴 글에도 무수하게 다양한 이 작다라고 하는 의미를 가치론 적으로 지향하면서 자신의 목회를 해 나가는 여러 형태의 목회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점들이 작은 교회의 본질이죠. 지금 말씀 한 것은 비본질적인 부정적인 평가일수도 있고 설령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게 본질은 아니다라고 말씀 드릴 수 있고 그래서 가톨릭 신학자 김교수 같은 사람은 더 이상 내 탓이오 그만하라고 그러잖아요. 네 탓 이라고도 그래야지. 종교가 사회적인 개혁을 못하게 만드는 그런 모든걸 자기 내면의 문제로 탓하게 만드는 그런 종교에 엮이는 것도 사실은 저는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항이라고 하는 개념이 중요하다. 상상과 저항 그리고 고독 이런 개념이 우리 영성에 중요한 개념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개신교적인 세계에 오직 교리가 있죠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서라는 말을 고독, 저항, 상상이라는 말로 그런 식으로 보편화 이야기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현민 수녀님: 네 8시가 넘어가고 있는데요. 우리가 오늘 뭐 계속 이야기를 하면 한없이 나올 거 같습니다만 여기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기록 : 씨튼연구원 간사 김영민 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