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대화 녹취록
- 참석일시 : 2022.06.23.
- 주제 : 가톨릭 신앙인의 입장에서 본 New Nomal
- 발제자 : 이규성 신부님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교수)
- 방법 : Zoom 화상회의
- 참석자 : 최현민수녀님, 이규성신부님, 이정배목사님, 송용민신부님, 심원스님,
미산스님, 이공현교무님, 박태식신부님.
이규성 신부님 : New Normal 이라고 했을 때 제가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교회사, 그리스도교 사적 역사를 살펴볼 때 사실상 New Nomal이 아니었던 때가 없었죠. 새로운 문제가 일어났었고 그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서 그 당시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자 교회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했느냐에 따라서 항상 역사는 흘러왔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New Nomal이라는 게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굉장히 새롭게 대두되는 개념이긴 하지만 사실상 코로나19 못지않게 100여 년 전에 있었던 스페인 독감 같은 경우에도 오늘날보다 타격이 더 심했었죠. 그때도 아마 그 시대에 어떤 생각이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에 New Nomal이라는 관점에서 또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그때도 있었을 테고요. 그래서 New Nomal에 대해서는 제가 특별히 말씀을 못드리겠고요.
들어가기를 해보면 현대 세계에는 다음과 같은 풀릴 수 없는 난제들이 있어요. 그 이야기중에 생태계의 불균형, 그래서 불과 우리나라도 10년 사이에 코로나, 사스의 타격으로부터 큰 타격을 받았죠. 피할 수 없는 것은 온난화, 생태오염, 이런것 들이 우리의 난제로 있고요, 경제적 양극화도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이상하게 국가에서 보조금을 지급하면 갖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벌게 되는 결과로 통계로 나타나있죠. 가치관의 변화가 되게 심한데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제 아버님세대, 저의세대, 자녀들세대. 이 세 세대가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어서 충돌을 하고 있고 저희 아버님은 일단 태극기 부대의 관점에서 모든 걸 이야기하고 있고, 저는 반독재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제 조카는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당신네들 모이는데 다 싫다 우리들 끼리 모이겠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대간 갈등은 굉장히 첨예화 되어있어요. 저는 제 아버님을 만나러 갈 때는 아무리 생각이 달라도 아버님이니까, 라고 생각하는데 제 조카만 해도 그렇게 생각을 안해요. 아버님을 안 만나겠다가는 20대 중반에 있는 애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보다 더 젊은 애들은 더 이상한 생각들을 갖고 있겠죠. 저희가 그 세대를 이해 못하는 것처럼 그 세대도 저희들을 이해를 못해요. 오히려 거부하고 안 봤으면 좋은, 접촉하지 않았으면 좋은 그런 시대정신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신중심주의 였다가 1600년부터 근대주의로 인해 인간중심주의로 가구요. 계몽주의가 낭만주의로 갈라져나갔고 그 틈바구니에서 산업화가 일어났고요 산업화를 통해서 자본의 불균형이 일어나니까 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첨예한 대립이 일어났고 탈근대주의 적인 이데올르기적인 관점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운동이 있었는데 덕분에 탈 권위적인 관점도 생겼지만 가치가 많이 해제됐다. 제가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소위 말해서 자본주의적인 관점이 많이 들어와 있고요. 다문화적인 관점이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은경우에는 시대착오적 이데올르기 논쟁, 약간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잘 몰랐는데 점심을 먹다가 어느 신부님이 유튜버를 보았는데 저랑 이름이 비슷한 사람을 보았는데 가톨릭이랍니다. 근데 이 양반은 교황이 정신이 나갔다는 거에요. 왜냐면 대전교구에 추기경 한분 되셨잖아요? 추기경되신 분이 북한을 돕는 것을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이 유튜버(이계상)라는 사람은 종북 좌파 주교다. 이런 작자를 추기경으로 받아들이는 교황이 정신이 나갔다. 이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 다른 종교로 가고 싶은데 천주교를 지켜야 하니 내가 이런 목소리를 계속 내겠다. 이런 식의 시대 착오오적인 이데올로기를 벌이는 사람이 꽤 있어요. 저희 아버지만 해도 적극 주장을 하지 않지만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적극 찬성입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고성장, 저출산, 고령화, 일자리 문제, 저효율 문제 이런게 있는데 젊은이들 문제 중에 허세 인플레이션이 있어요. 허세인플레이션이 뭐냐 했더니 요즘 젊은이들의 정신이 허세 인플레이션이다. 무슨 소리냐 했더니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말씀들 드려볼게요. 회현역 쪽으로 지름길로 가려고 신세계백화점 지하로 들어갔는데 신세계백화점 1층과 지하층이 명품관이에요. 거기에 사람들이 줄을 서있어요. 금액이 한 두푼이 아닌 이런 식의 상품들을 갖다 놓고서 줄을 세워놓고 천천히 손님을 접대합니다. 근데 그 사람들이 5~60대의 손님들이 아니라 2~30대가 옵니다. 그래서 정신 나갔다고 처음에 생각했는데 이해가 갈만 했어요. 정상적으로 돈을 벌어서 집을 못 사요.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집 사는 걸 포기해요. 집 사는걸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꾸미는 걸로 먼저 방향을 돌렸습니다. 제일 먼저 사는건 자동차, 그 다음 가방이나 시계 이런걸 산답니다. 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돈이 많지 않죠. 어떻게 하냐면 명품 가게에 가서 자기 경제에 허락하는 것을 사요, 사고 나서 한 두달 사용하고 당근마켓 비슷한 데에 팔아요. 명품가방이나 시계는 되팔아도 그 가격이 그대로 나온다네요. 손해가 없답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서 돈을 더 버는 사람들도 있대요. 그러면서 자기 자산을 늘려가는 건데 소위 말해서 자산도 아닌건데 그렇게 해서 자기를 꾸며가는 것을 늘려가는 거죠. 옛날에는 100만원짜리 시계를 샀다가 이번에는 그것을 팔아서 2백만원 짜리 시계를 사고, 한 두달 차다가 팔아서 4백만원짜리 시계를 사고 또 6백만원 짜리 시계를 사고 가방도 마찬가지에요. 이런식으로 해서 자기 자신을 꾸며 나가는 겁니다.
자기의 정신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자기 겉 모습에 대해서 꾸며나가는 물질적 가치를 꾸며나가는, 이것을 일컬어 젊은이들이 갖고있는 허세 인플레이션이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트민남, 트민녀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주로 약자로 많이 쓰기 때문에요 제가 주로 출퇴근 할때나 어디 갈 때는 지하철 많이 이용하는데 젊은 고등학생들이 모여서 서로가 이야기를 하면은요 제가 못 알아 들어요. 못 알아 듣는데 제가 처음엔 어떻게 알아들었냐 하면 쟤네들 몽골사람인가? 그렇게 그럴 정도롤 자기네들 끼리의 이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알아들을수 있는게 없어요 그래서 몽골애인가 했는데 자기네 특수 용어를 사용하는거죠. 트민남, 트민녀는 트렌드에 민감한 남자, 여자라는 뜻이랍니다. 그러니까 허세 인플레이션을 위해서 이 트렌드에 민감해야 되요. 그런데 이 트렌드에 민감해야하면 페이스북에 들어가야하는데 주로 오늘 내가 무엇을 했다하는 자기 성찰하는 이야기가 주입니다. 인스타그램은 그런거 필요없고 요새 유행하는 것은 이런 것 이라는. 그림만 사진만 주로 나온다는 거죠. 그래서 10대 20대 초반애들은 페이스북보다 인스타그램을 더 많이 이용합니다. 그래서 많은 말을 하는걸 싫어한대요. 곧 의미있는 것들을 전달받는 것을 싫어 하는거에요. 어떤 메시지 전달 같은거를 싫어해요. 그냥 트렌드에 민감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정보제공 차원, 이 정도로 족하기 때문에 인스타그램이 이 젊은 사람들한테는 굉장히 많이 호응을 받는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플렉스라는 말은 허세 인플레이션을 위해서 물건을 샀다가 되팔이 하는거죠. 오늘 플렉스 했어!하면서 시계나 명품가방을 보여주는 것이죠. 얼마전에 예수회 신부들끼리 총회를 열었는데 중요한 안건 발표에 하나가 경제 성장을 통해서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 였습니다. 주로 예수회 신부님들이 어떤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비교적 비판적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물론 평균적으로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엊그제 발표한 신부님은 경제 성장을 통해서는 경제 불평등 없앨 수 없다. 오히려 거꾸로 되야한다. 이야기해요. 근데 저는 이게 가능한 일인가? 경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경제 불평등을 컨트롤 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게 경제학자들의 문제이긴 하지만 사실상 굉장히 의문시 되네요. 그러니까 이 첫 번째 경제 성장을 통해서 경제적 불평등을 축소한다는 그런 대안책으로 경제를 통제함으로서 경제 불평등을 해소한다? 이건 또 다른 양극단이라는 느낌이 드는 문제,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젊은이들한테 희망과 미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제가 보아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인데요 그래서 이 문제들에 대해서 저희들이 교회의 종교기관에 속해있는 사람으로서 이 시대적인 과제로 이야기한다면 비록 종교에 속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치인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이런 것들이겠죠.
청년들을 위해서 일자리 뿐만 아니라 가치관 같은 것도 줘야죠. 제 조카같은 경우에는 가치관 같은게 없어요. 가치관을 거부하는게 가치관이에요. 우리 때는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그럼 그 시대에서 살어, 그래요. 나는 할아버지가 하는 그런 가치관 싫어. 나는 내 맘대로 살거야. 이게 무가치관의 가치관, 오늘날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 이라고 볼 수 있고요.
그리고 세 번째 공동의 집이라는 것은 생태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개는 인류만의 거주지가 아니라 인류를 포함한 생물들의 거주지다. 그래서 공동의 집에 대한 돌봄에 대한 어떤 것이 있어야 된다라는 거죠. 그래서 신학은 이러한 과제에 대해서 이 시대의 과제에 대해서 응답 할 수 있는가? 그렇게 질문을 해 보는데요 신학이 만약에 다른 사람들한테 타당성이 있다면 신학자가 가톨릭 교회에 이야기하는 것이 나름대로 합리성이 있다라고 이야기 한다면 이미 사실은 이게 하나의 상식인데 신앙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종교적인 신심 이런것들은 주관적인 것들이거든요. 근데 그것이 다른 사람들한테 전달이 되려면 합리성을 띄어야 하거든요. 이성적 작업이 있어야 됩니다. 개인의 주관적인 종교적 자세인데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타당하다. 라고 한다면 어떤 합리적인 모습을 갖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근데 신앙이 어떤 합리적인 모습으로만 다 해부되지는 않겠지만 합리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거죠. 미안하지만 우리나라의 종교형태가 지금 일반대중으로부터 합리적인 집단으로 평가를 받고있는지 이게 지금 심각한 문제에요. 스님들 계셔서 제가 말씀이 쉽지가 않은데 얼마전에 어떤 모 정치인이 스님들이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다 라고 말씀을 한 적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불교계에서 굉장히 격분을 한게 있었어요. 그런데 스님들 귀에는 약간 그렇겠지만은 제가 보기에는 일정부분 맞거든요. 무조건 그 정치인이 틀렸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가 없거든요. 그 정치인들은 나름 어떤 사람들은 합리성이 떨어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사람들은 대중의 합리적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 얻어 내는것에 민감한 사람들 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 같아요. 우리가 그런것도 있지만은 사실 불교정신에서 잘못 봤다 그 정도로 해명을 했었어야 하는데 광적인 차원으로 반발을 했어요. 제가 보기엔 그래요. 그러니까 어떤 분들도 쉬쉬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거에요. 정치인이 강하게 표현하긴 했지만은 난 시원하다. 이렇게 이야기 하더라구요. 그러니까 제가 가톨릭 신부니까 불교를 싫어하는 건줄 알고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 그러니까 누군가가 우리 가톨릭을 편애한다. 그러면 가톨릭도 그 어떤 또 광적인 사람들이 또 집단적으로 들고 일어나가지고 편애한 사람을 들겠죠.
그 다음에 또 일반 대중에서 신천지, 신천지는 제가 보기에 이단도 아닙니다. 가톨릭 교회나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 중에서 이단이라고 판정된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굉장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너무 열심히 과하게 이론적으로 상대방에게 과하게 강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단 판정이 났죠. 그러면은 신천지를 포함해서 오늘날 우리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소위말해서 저는 사이비입니다. 사이비 종교집단이라고 보이지만 아닌거죠. 그냥 개별 이득집단입니다. 그래서 종교를 쟁취한 양아치 집단이다. 이거는 불교 빼고 개신교빼고 어디빼고 어디빼고 나머지가 그렇단 이야기가 아니라 신천지같은 독자적인 단체도 있지만 사실은 천주교, 개신교내에도 있고 불교내에도 있고 성공회, 원불교 내에도 있다 라는 겁니다. 이 사이비 집단이. 그리고 이 매스컴이 이 사이비집단에 대해서 지나치게 과장되게 보여주기 때문에 이 종교 집단이 대중들에게는 비합리적인 광신적인 어떤 양아치 집단으로 많이 가있어요. 그래서 그 이런 맥락에서 신학이다 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대부분의 경우가 우리 신학대학원에서도 어떤 사람이 가끔가다 들어오는 줄 아세요? 우울증 걸린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왜그런가 하고 보면 신학을 공부하면 우울증이 날 것같은 이런식의 믿음을 갖고 들어오는 거죠. 근데 저는 알죠. 근데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이 신학이랑 곧 어떤 면에서는 비판적인 관점에서는 광신집단을 위한 어떤 사이비, 어용 학문이다. 이렇게 보일수가 있는거에요 그리고 뭐 제가 유학나가서 신학박사를 하는 과정에 어떤 동물학하시는 어떤 박사과정에 있던 분이죠. 아, 신학은 간단한 것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왜요 했더니 하느님이 존재한다 그것만 이야기 하면 되는거 아니냐, 예수그리스도가 구세주다 그것만 이야기 하면 되는거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런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소위말해서 엘리트 집단조차도 신학에 대해서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단 겁니다. 그리고 19세기말 20세기 초반에 독일 대학 사회에서 신학은 과연 학문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결과로 신학 컬리지가 사라지게 되고요(독일 대학은 대부분 국공립)거기에 종교학부가 들어와요. 모든 대학교가 종교학과로 바뀌고 종교학과 내에 신학이 들어와서 그런식으로 되어있었어요. 그것 조차도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토론에 열심히 참여했기 때문에 그나마 종교학부 내에 신학전공자들이 들어가서 가르칠 수가 있었죠. 사실은 신학부는 영영 사라지고 종교학부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굉장히 위험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예수회 같은 경우에는 신학을 국가 대학교에다가 위탁시키지 않고 스스로 교육을 시키는 신학부 체계를 스스로 만들어 가지고 교육을 시키는 쪽으로 선회를 했었죠. 그래서 그때 논쟁이 벌어진 이유는 뭐냐면 신학이 과연 학문이냐 (사이비성이냐 관계없이)라고 질문을 했을때에 학문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학은 근본적으로 신앙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주관적인 것을 갖고서 어떻게 보편적인 것을 인간 지성에서 출발하는 학문이 될 수 있겠는가? 였습니다. 그래서 대학교 내에서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라고 거부를 당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신앙에서 출발하긴 하지만 이 신앙자체가 어떤 지성적 비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학문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라는게 어느정도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신학부가 여전히 존재하고요 특히 석사학위는 인수브루크 대학에서 했었는데 인수브루크는 종교학과가 없고 그냥 여전히 가톨릭 신학부가 있습니다. 거기는 워낙 전통적인 가톨릭 지역이라서 더욱더 그랬죠. 그래서 신학에는 약간 불완전한 정의 이긴 하지만은 일단 교회를 통해 선사받은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에 대한 지성적 해명이다. 라고 일단은 말씀을 드리고 싶구요. 그래서 4가지 구성요소(삼위일체 하느님, 선사, 교회, 신앙과 지성)가 있겠습니다. 요정도의 어떤 질문을 갖고서 오늘날의 문제 우리나라 또는 전쟁이 갖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해명할수 있을까? 해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수 있는가? 저는 제가 해결할 수 있다라고 보진 않고요 해결할 수 있는 단초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원래 제가 응급실에 2달정도 있었었는데 응급실에서 신자인지 아닌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죽어가면서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면 저희들은 어떤 교육을 받냐면은 죽음의 기로에 있는분 같은 경우 조건부 대세라는 것을 줍니다. ‘조건부 대세’ 대세 라는 것은 세례를 주는건데 조건부로 준다라는 겁니다.
만일 당신이 합당하다면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토마스로 세례를 줍니다.를 해요. 나중에 이양반이 살아나게 되면 자기가 왜 내 허락없이 했오? 그러면 없던 일로 치는거고 만약에 감사하게 된다면 다시 성당에 가서 교리교육을 받고 본당공동체에 수용이 되는 것이죠. 근데 거기서 가르치는 조건부 대세 내용이 뭐냐하면 천주존재 삼위일체 강생무속 그다음에 상선권한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근데 그런 이야기와 조건부 대세때 가르쳐주는 내용하고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 하고는 약간 격이 좀 다르다.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요.
우리는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입니다. 지성적으로는 알 수가 없죠. 지성적으론 삼위일체론을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교회로부터 전달되어온 신앙의 하느님으로서만 삼위일체 하느님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인데 가톨릭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전형적인 신앙형태입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무슬림과의 대화가 불가능해요.
무슬림들은 이 문제를 갖고서 상실론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쉽지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교육을 받을 때 이 계시된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성대의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다. 이런식의 교육을 받거든요. 그래서 하느님은 단순하게 지성의 대상으로서 하느님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신앙의 대상으로서 하느님인데 지성과 신앙이 서로 포괄 해야된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어떤 지성을 어떤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끌어준다. 라고 보는거고 이성은 신앙을 이해하고 비판적 기준을 부여한다라는 겁니다. 신앙이 만약에 지성적인 비판기능을 거부 한다면 광신도 집단으로 빠져들게 돼요. 그럴 위험이 상당히 큽니다. 또는 나는 신앙의 하느님이 싫어 지성적으로 볼 때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 같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싫어. 하지만 내가 보기엔 하느님이 있는것 같아. 그래서 나는 내 믿는 바의 하느님대로 살고 싶어. 라고 하면 상당히 그 어떤 식으로 빠지냐 하면 사실 무미 건조하고 무책임한 무관심한 합리주의 적으로 많이 빠지죠. 그다음엔 냉소적이 되구요, 공동체적인 관점이 많이 사라지죠. 그래서 삼위일체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것은 이시대의 중요한 게 뭐냐 라고 이야기할 때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처럼 먼저 생각해야한다 가톨릭 신학자가 아니라 개신교 신학자라고 하더라도 그 밖의 다른 교의 신학자라고 하더라도 일차적으로 삼위일체적인 관점이 제일 중요하다 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이게 왜 중요하다고 생각 하냐면 어떤 종교적인 신앙의 문제는 아까도 이야기 한것처럼 주관적인 것인데 개별적인 것이잖아요? 근데 이게 개별적이다 라고만 이야기 하지 않잖아요. 이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야 라고 보통 다들 이야기해요. 어떤 종교집단이 들어가 있던간에. 근데 출발점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인데 어떻게 객관적이고 보편적이 될 수 있는가. 이 주관적 개인적인 것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다. 라고 하려면 지성적 비판의 기능이 반드시 있어야 돼요. 그래서 종교 신심이 지성적 비판의 기능을 배제하게 되면 결국은 광신도 쪽으로 간다. 아니면 이기적인 집단으로 간다. 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삼위일체 하느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고 모든 것을 완성하신다. 창조주 하느님, 그다음에 완성자로서 하느님인데 모든 걸 좋게 창조했죠. 모든 걸 좋게 창조했지만 죄악이 들어서는 관계로 들어서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합해서 선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이다. 그래서 제가 공부하고 있는 칼 라거라고 하는 20세기의 최고의 신학자중에 한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낙관적 구원 보편주의’라고 보통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창조, 종말에 대한 어떤 모든 것을 좋게 창조하고 좋은 것으로 인도하시는 모든 것들이 다 새롭게 창조되는 그런 하느님이다. 라는 것을 우리가 봐야 되는데 그 안에 살고 있는게 역사 안에서 인간이죠. 악이 들어와 있는데 이 세상은 그냥 그 기본적으로 선한 존재죠. 이세상은. 근데 인간의 악행을 통해서 많이 악에 오염이 되어있어요. 그리스도교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 이야기인데 윤리적인 기본 원칙이 뭐냐하면 ‘선은 행하고 악을 피하라’에요. 이거는 종교성이고 관계없이 그러면서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죠. 그리고 인간의 가치는 역사 안에서 있는 거구요. 인간은 지성으로 사는 한 인간의 가치를 역사 안에서 시작하려고 하는겁니다. 그런데 이 역사 자체가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가 되어있고 이 역사를 통해서 하느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지성적 비판적 정신의 기능을 사용해서 이 역사 안에 드러내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으며 그 메시지가 어떠한 것이라고 우리가 이야기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선으로부터 와서 비록 악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선이 이긴다. 라는 구원 낙관주의 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봐야 되는데 결국 구체적으로 인간은 역사적 존재죠. 그 역사적 존재 안에 정치, 사회, 문화, 생태적인 이슈를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사실은 이 역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관점에서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고 사회적인 문화적인 상태적인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간파하고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게 우리 이슈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다음에 우리나라에서 하느님이냐 하나님이냐 많이 싸우는데 굉장히 웃기는 논쟁이에요. 하느님이냐 하나님이냐 논쟁은 그분은 하느님도 하나님도 아니에요. 원래 히브리어에서는 굳이 이야기한다면 야훼라고 첫 장에 쓰여 있습니다. 그 야훼라는 말에 하느님이냐 하나님이냐 그런 말 없어요. 야훼라는 뜻은 발생한다 라는 뜻입니다. 뭔가 계속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고 이야기 할 때는 자꾸 숫자를 이야기 하려고 하는 거죠. 근데 사실은 그 숫자조차를 자체 창조자기 때문에 그것의 근원이에요. 일치의 근원이에요. 하나의 근원이지 하나가 아니에요. 그래서 하느님은 하나의 근원이자 다양함의 근원이다. 이렇게 보는 게 더 합리적인 해석이죠. 숫자개념을 넘어선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다양한 것은 하나로 부터 왔다. 이 만물 세계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가 되어준다. 소위말해서 신학적인 전문용어가 있어요.
‘Perichoresis’다 라고해서 상호 내주성이다. 라고 하는데 이거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짧게 요약한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냥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자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고 창조자 하느님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창조자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고 있는 그런 상태일 때 인간들은 하느님과의 공동체성 그러니까 ‘구원’, 구원 받음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자기 실현을 확신하지 않는 가운데에 하느님과 공동체는 있을 수가 없어요. 도피적인 관점, 세상은 더럽다. 세상은 나쁘다. 그래서 우리끼리만 잘 살자. 도피적인 관점에서는 제가보기에는 하느님과의 공동체 구원이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현실을 배제한 구원이라는 것은 없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구요.
그 다음에 선사받은 신앙이니까 왜 선사받은 신앙인가? 다른 종교 에서는 모르겠는데 내가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해서는 인간적인 결단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결단이 있는 건데요, 우리가 신앙을 공부할 때는 그거는 하느님의 초대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그런 초대일 수 밖에 없는가? 그거는 예수그리스도 동정성모마리아께 잉퇴 되어나시고 이런 말들을 하도 자연스럽게 하니까 그리스도교를 모르는 사람들 조차도 당연한 것,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게 하나도 없거든요. 동정녀 마리아께 잉퇴되어 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더군다나 말 안되거든요. 인간경험상으로. 1853,1950년도에 가톨릭에서는 개신교가 보기에 아주 중대한 일을 저질러 놨는데 무슨 일이냐면 성모 무염시태, 성모 승천, 같은 그리스도교 집단 내에서도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에요. 이게. 그런데 그런 신앙을 가톨릭교회가 동정성모마리아께 잉퇴되어 나시고 그런 것만 믿는다는 게 아니라 무염시태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는거야. 우리가 가장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날아 올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기가 쉽죠. 또는 예수님이 갈릴래아 바다해를 가른 것, 예수님이 죽고 부활했다 라든지 나환자를 고쳤다던지, 맹인을 고쳤다던지, 다리저는 사람을 고쳤다던지, 이런식의 이야기가 나와요. 근데 현대 과학적으로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죠. 말도 안돼요.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이런 가르침에 대한 신앙이라는 것은 합리성이 없어요. 사실은. 따라서 예수를 우리가 십자가를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이 없는 십자가를 다는데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이 달려있는 십자가를 성당에든 집에든 답니다. 상식적으로 물어봐요. 여러분들 예를 들어서 사람이 살해된 모습을 예수님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방에다 걸어 놓는 사람 있습니까? 물어봐요 어떤 미친 사람이 그걸 걸어놓겠습니까. 사람을 죽인 도구를 여러분 방에다가 갖다 걸어놓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그걸 어떻게 걸어 놓을 수 있습니까. 근데 개신교 신자들 가톨릭신자들은 걸어놓거든요. 예수님이 거기 달려있냐 안 달려 있냐 이건 차이는 있겠지만 걸어놔요. 그리고 웃기는 것은 그걸 통해서 은총이 온다고 생각을 해요. 근데 그거는 사람을 죽이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삶은 사실은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다가 처절하게 그냥 죽은 것 이거든요. 무참히 죽은거 에요 무력하게. 로마시대 때는 저주 받아 죽은 것 이거든요. 저주받아 죽은 모습을 갖고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 한다는 거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도구를 갖고 구원의 도구라고 이야기하고요. 십자가의 길을 가는 거 갖고 은총의 길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합리성에서는 합리적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 한다면은 인간의 지성적인 결과로서 시작하는 게 아니다.
그런면 에서 그것은 은총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건데 은총이라는 말이 라틴말로는 Gratia, 히브리말로는 헤세드 이런 말이 있는데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헤세드는 ‘총애’ 라는 뜻인데요. 이 서구권에서는 주로 Gratia라는 관점에서 보통 이야기합니다. Gratia라는 것은 무상, 거저, 무 전제 이런 이야기 인데요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이 어떤 조건을 갖고 존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저 창조했다는 겁니다. 위에서 자유롭게 은총에 의한 창조다. 그래서 인간 존재는 하느님으로부터 은총 받은 존재다. 근본적으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고요 그다음에 하느님이 어떤 존재조건을 가지고 어떤 일 때문에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하느님이 사랑 자체기 때문에 준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인과율이 없어요. 성당에 가서 이런 신자들이 있죠. 나는 저 사람보다 헌금 10배를 낸다. 그러면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10배를 더 받겠는가. 근데 이런 식의 산술적인 어떤 질문들이 있는 건데 하느님의 은총은 기본적으로 인과율에 머물러있지 않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건데 인과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것 처럼 고통에서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는거에요. 우리가 예측된 삶으로 살다가 예측된 죽음으로 간다면은 어떤 면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자유로움 해방 이런 것 들은 벗어나는 체험이거든요. 그런 체험을 할 때 어떤 의미가 있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을 우리가 가져야되는데 그것은 내가 스스로 나의 존재의 근원이 아니면서도 내가 필연적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없으면서 있으므로의 자유로운 비향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고요. 존재하는 한 모든 것은 사물의 법칙을 따라가긴 하지만 그 사물의 법칙, 인과율의 법칙을 넘어서려고 하는것도 인간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성향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보상이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여기서 은총을 받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고민을 해봐야 되는데 하느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줄때는 다른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주신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를 한다. 감사라는 말이 그리스말로 eucharistia, 한국말로는 성체성사라고도 번역을 하는데요. 미사죠. 그래서 답변은 감사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은총에 대해 주시는 감사는 인간의 자유로운 자기봉헌이다. 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고요 감사에 대한 자기봉헌 행위는 교회를 통해서 한다. 교회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있는데 Avery Dulles Sj라는 분이 있어요. 돌아가신지 20년정도 됩니다. 이분이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교회관을 5가지 정도로 나누었습니다. 제도로서의 교회, 이것은 가톨릭교회에서 많이 강조가 되었던 것이죠. 친교로서의 교회는 가톨릭 교회에서 새로 나온 개념이구요. 성사로서의 교회도 전통적인 가톨릭적인 관점에서 교회관입니다. 사신으로서의 교회는 개신교 쪽에서 많이 강조가 되는 것이구요 종으로서의 교회도 개신교 쪽에서 강조가 되는 것입니다. 다양한 모델은 있는데 이것들은 나름대로 전통적인 모델, 5가지의 서로 다른 이해방식은 한계가 있다. Avery Dulles Sj는 제자들의 공동체 제자들의 직분의 공동체로 바꾼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뭔가?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을 자신의 공동체를 통해서 실행하는 것인데 사실은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제자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죠. 그래서 주체가 하느님인 것이죠. 다시 말하면,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과 함께 세상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세상안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문 가르칠 때 이야기를 하는데 세상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이슈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된다. 라고 보는 겁니다. 하느님이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지금 실현해 내고 있기 때문에 라는 겁니다. 그리고 더 드러날 수 있도록 교회가 봉사해야 한다 라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최근에 벌어지는 모습들을 보면 안타까운 모습들이 많죠. 왜냐하면 신천지 같은 경우는 거의 뭐 미안하지만 양아치 집단 같기도 하고 그냥 사이비 집단같기도 한데 어떤 엄밀한 의미에서 사람들 구원을 위해 있는것인가 저게. 자기네 조직을 위한 조직이다. 자기들을 위한 조직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의 목적이 자기 자신이 되면 안돼요. 교회의 목적은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있는 겁니다.
Ad Maiorem Dei Gloriam은 가톨릭에서 이야기 하는거고 Soli Deo Gloria는 개신교에서 이야기 하는데 사실은 트라피스트 회에서 주로 사용한 것이죠. 트라피스트 수도회에서 인사를 할 때 Soli Deo Gloria, ‘유일한 하느님께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만 영광이 이런 뜻이 더 강합니다. 하느님의 영광하면 우리는 굉장히 구태의연한 식으로 이해를 할 수 있는데 지나친 신 중심주의가 아니냐 라고 보는 것 인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지나친 신중심의 메시지는 잘 이해를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하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어떤 것들이 큰 이슈냐 하면 예언자들이 드러날 때 예언자들이 왜 그렇게 소위말하면 박터지게 싸우냐 이거야. 자기가 죽을 줄 알면서 위험을 무릅쓰면서 왕에게 대들며 싸우냐 이거지. 근데 그 예언자들은 어떤 하느님을 보는거냐면 구체적으로 황야를 건너서 광야로 탈출하는 그 해방된 기억을 갖고있어요. 이집트 지역에 있을때에 그 때는 이스라엘 이라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히브리인이라고 불렸었어요. 일종의 외국인 노동자에요. 다양한 외국인 노동자. 이 사람들이 모세의 인도를 통해서 홍해를 건너서 해방이 됐는데 별 볼일 없는 피압박, 특정한 민족도 아니고 별 볼일 없는 피압박, 어떤 그 사람들을 해방시킨 하느님의 기억, 예언자들의 기억으로는. 그래서 예언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은 어디서 드러나는가. 이 피압박자들을 해방하는데서 드러나는 것으로 보는거에요. 항상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소위 말하는 홍해 탈출이 주 모티브지만 나라를 건설하고서 어떻게 변형이 되냐면 국가내에 있는 과부, 떠돌이, 병자등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예언자들에게는 큰 이슈가 되었다. 50년만에 오는 희년이라는 것은 이런 사람들을 해방시키려고 하는 것이죠. 제도적으로. 물론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희년이라는 것이 개념만 있는 것 뿐이지 역사적으로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에 신학에서도 같은 라인 인데요 죽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났다. 신약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느님이 아들이 자기를 그렇게 드러냈다. 그래서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인데요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서 피압박 사회주변부 인간들, 죄에 눌려있는 인류 모두를 구원했다 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 할 수 없다. 스스로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게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례자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는데요 그분이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그분은 더욱 커져야 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된다. 그래서 교회가 만약에 하느님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또는 교회가 올바른 의미에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는데 있어서 교회가 드러나면 안된다. 교회가 드러나는게 아니라 하느님이 드러나야 되는데 자꾸만 교회를 드러 낼라고 그래요. 이게 2천년 간 교회가 갖고 있는 중대한 실수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거는 종교개혁 때까지도 심각한 문제였고요. 종교개혁이 일어난 다음에 개신교도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이 문제 때문에 교회가 더 분열이 일어났는데요 더욱더 가난한, 구원 받는자 들에게 귀화가 되었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교회의 영광으로 더 가는 그쪽으로 방향을 잘못 설정한 그런,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는데 일정 부분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가톨릭도 개신교도 피해갈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작은 교회가 되고요. 독일 프랑스에서는 수도원 건물이 무슬림한테 팔리고요 원래 성당인데 모스크가 된 곳도 있고요. 원래 성당인데 호텔이 된 곳도 있어요. 원래 성당인데 기숙호텔로, 식당으로 변경된 곳도 있어요. 무슨 뜻을 갖고 있냐면 교회를 꾸미는 데에 돈도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운영할 돈이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팔았죠. 결국은 기숙호텔, 모스크, 여관 그런식으로 쓰이는 거에요. 이젠. 제가 보기엔 교회가 교회 답지못한 어떤 과거가 뭔가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식의 결과가 나지 않았나 라는 겁니다. 교회가 건물인 것처럼 생각 했겠죠. 그래서 우리는 새롭게 교회는 교회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되고 하느님의 영광이란 곧, 주변부의 인간들을 피압박자들의 해방을 추구해야 된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든지 예언적 소임을 갖고 있어야 되고 여기에 목숨을 걸어야 된다. 라는 겁니다. 따라서 교회가 어떤 권위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 권위는 지배하는 권위가 아니라 어떤 봉사하는 권위다. 만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권위가 있다면 봉사하는 권위만 인정될 수 있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교회가 제도교회거든요. 그리고 요새 가톨릭교회 에서는 제도성을 상당히 많이 강조합니다. 더군다나 종교개혁 시절에 이 제도교회에 대한 반발이 많았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발로 역 반발이죠. 역 반발로 제도교회를 더 강조하게 되었는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냐하면 저도 요즘에 신학교에 가서 가르치는데 교구에서 운영하는 신학교, 혜화동에서 한 과목을 가르치는데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떤 과목들은 뭐랄까 강의가 어떻게 이루어 지는지 알 수 있겠더라고요. 소위말해서 독일에서는 신학교 신학이라고 합니다. 신학교 신학은 어떤 신학이냐면 당국자 신학, 이것이 정부의 기본 방침입니다. 기자회견을 할 때에 장관들 청와대 대변인들이 나와 가지고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것이 대한민국의 입장입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처럼 그런 신학을 배우는 거에요. 젊은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그런 신학을 배우게 되면 나중에 신부가 돼서 나가면 항상 당국자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요 당국자 입장에서만.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그런 교육을 받는 겁니다.
봉사하는 권위가 아니라 지배하는 권위의 방식으로 당국자 교육을 받는 겁니다. 그게 저는 안타까웠어요. 아직도 그런 흔적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비판적인 말씀을 하면서 교회는 성사적인 존재인데 원래 그리스말로는 ‘Mysterium’입니다. 그런데 라틴말로 바꾸면 ‘Sacramentum’으로 바뀌었어요. 유명한 시대의 천재가 권유를 한건데 ‘Mysterium’말은 아시다시피 신비입니다. ‘Sacramentum’말은 우리나라 말로는 성사라는 말로 번역을 했는데 이 단어는 어떻게 쓰였냐면 로마제국 내에서 군인이 국가에 대한 맹세를 할 때, 군인이 국가에 대해서 희생할 것이라고 선서 할 때, 재밌는것은 국민이 세금 납부하는 것, 이것도 성사라고 했어요. 엄밀히 말해선 숭고한 일, 숭고하다는 뜻이에요. 근데 가톨릭에서는 이것을 성사라고 번역을 했고 개신교에서는 성내전이라고 번역을 한 거 같아요. 근데 근본적인 뜻은 ‘Sacra’이고 뜻은 종교적인 인 이야기도 있고 세속적인 이야기도 있는 거에요. 하느님께 바쳐지는 것들과 기물들. 숭고하다는 게 원래 원뜻이다. 그런데 지금 가톨릭에서는 성사라고 부른다. mentum이라는 것은 원래 숭고한 것, 어떠한 것, 성사에서 거룩할 사 자에다가 일 사 자잖아요. 맞는거 같아요.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틀린 번역은 아닙니다. 성사 라는게 그래서 ‘Sacramentum’을 성사라고 번역한 것에 대해서 틀린 것이 아니지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거는 ‘Mysterium’이라는 근본적인 개념이 없어요. 여기에 왜냐하면 ‘Mysterium’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기 드러냄이에요. 인간이 제압당하는 겁니다. 제압 당해가지고 입을 다문 형태에요. 어떻게 뭐라 표현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게 신비라는 ‘Mysterium’뜻이구요. ‘Sacramentum’은 그런 것 보다는 내가 주도권을 갖고 뭐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객이 약간 다르죠. 그리스말 에서는 신적 주도권을 갖고 있는 반면에 Sacramentum이라는 언어자체에서는 인간적인 주도권이 더 강한 색 차가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있고 가톨릭 교회에서 서방교회에서 ‘Sacramentum’를 많이 강조하는 바람에 인간의 행업 주의적 관점이 강화되었다. ‘Mysterium’을 많이 상실했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스스로 자기를 이해할 때 성서적 존재라고 이해를 하는데 사실은 ‘Mysterium’관점이라는 것이 더 많이 부활된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성사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나게 해야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7성사가 있어요. 세례성사부터 시작해서 견진, 혼배, 성품, 병자성사까지 7가지의 성사가 있는데 인간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주요 단계마다 주점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대해서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라는 것을 어떤 일종의 종교적 행위를 하는 건데요 그런데 잘못 이해가 되면 성사가 하나의 무당 굿 처럼 이해될 수 있고, 교회에 와야지 7성사를 받을 수 있고 이기적인 자폐적인 집단이고 자기희생이란 것은 없다. 양보를 안해 교회안에서 은총, 구원받으러 교회 야. 성당에서 파견받아 세상으로 갈 때는 다시 세속인으로 돌아오는 거죠. 이런식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해결을 하려면 교회가 성서적인 집단인데 성서적인, 신비적인 집단으로서 뭔가 개념이 바뀌어야 된다. 그래서 1번은 제가 했던 이야기이구요. 두 번째는 최근에 예수회 신부들 한테서 같이 의논한 것중의 하나가 이겁니다. 이미 교회는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고 하는데요.
이걸 만들어놓고 책임자를 부여하고 책임자를 사람들을 모아놓고 계속 여기가서 일을 하라는 거지.
근데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고 봐요. 여기 와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곳으로 가야 됩니다. 신부들이 그리로 가야 된다는 거죠. 신부님들이 성당에 좋은 플랜트를 만들어놓고 아무개 형제 당신이 회장, 부회장하고 당신이 이걸 좀 해봐. 사람이 필요하면 내가 도와줄게. 그래서 신자들을 모임으로 끌어들인 다음에 여기서 뭘 하게 하자. 이제는 그런 시대는 지난 것 같아요. 지금 교회는 굉장히 노령화 되었어요. 10~15년 정도 지나면 양로 수준으로 갈거에요. 심각합니다.
이정배 목사님 : 앞으로 시간을 더 쓰실 생각이신가요?
이규성 신부님 : 한 5분 10분이면 됩니다.
이정배 목사님 : 네 알겠습니다. 네네~
이규성 신부님 : 그래서 이제 제가 보기에는 협조자들을 구해서 교회가 주도권을 갖고서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다가서야 된다. 우리는 교회 건물을 갖고 있고 교회 건물로 사람들을 자꾸 오라고 하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공동의 집을 돌봄은 결국은 우리가 약화된 가치관- 절제, 극기, 나눔, 사회적 기여들이 더 필요하다. 라고 보는 것이고요.
칼라너의 표현인데요 ‘신비인도의 영성이다’. 인도라는 것은 나라 인도가 아니고 이끔. 신비로 이끄는 영성이다 라고 보는 겁니다. 교회가 한마디로 신비다 구원의 신비다 라고 보는거고요. 교회가 사람들을 그런 방식으로 이끌어야한다. 교회는 신비로운 생명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책무가 있다. 교회가 자기주장을 하면 안 됩니다. 자기 영광을 위한 자기주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하느님의 가르침을 이제 보여줘야 된다. 자기 영광을 주장할 때 교회는 그 신비를 상실한다라고 이야기 드릴수가 있습니다. 개신교에서 늘 하는 말이지만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교회는 항상 개혁해야 된다. 라골 봐야되는 것이고요. 개혁되는 것은 항상 창조적 관점에서 봐야되는 거고요. 그리고 창조적 관점이지만 전통에 대한 충실성을 갖고 있어야 되기 때문에 창조적 충실성을 가져야 된다. 단순한 해체로서는 안된다. 신학이라는 것은 항상 창조적 충실성 가운데 있어야 된다. 마지막으로는 ‘Finding God in All Things’하느님을 모든 사물에서 발견한다. 왜냐 하느님이 모든 사물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실현하고 있기 때문에 라는 관점이죠. 그래서 이 초월적인 관점이 있어야 되는데 이 초월적 가치 실현은 현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현실을 결코 배제하면 안된다 라는 거죠. 그래서 항상 사회적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과 함께함, 이런 것이 배제된 상태에서의 개인의 행복추구, 종교를 이용한 개인의 행복추구는 곧 제가 보기에는 그냥 미신이다. 사회적 관점이 없으면은요. 그래서 서강대학교 추진석 교수님이 한번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항상 다음으로 넘어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저는 이정도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최현민 수녀님 : 신부님 고생하셨습니다. 한 학기 강의를 1시간 만에 요약해서 삼위일체론부터 시작해서 신론, 모든 것을 총 망라해서 정리해 주신 것 같습니다. 감사드리고요 지금까지 교회가 행해왔던 여러 행태에 대한 신랄한 성찰과 비판과 우리가 가야할 새로운 Nomal을 향해서 우리가 어떻게 가야할 것인지 종합해서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복음의 기쁨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현실과 실제 사이에 Gap, 그것이 우리 삶의 자리에 늘 항상 있죠. 어떻게 줄여 갈수 있을까 그것은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하다. 그것을 줄이기 위해서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 또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만이 그 간극을 줄여갈 수 있다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굉장히 깊이 공감을 하면서 우리가 참 교회가 지향하는 것과 현실에서 우리가 맞닥드리는 면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가톨릭교회만 그런 것 같지 않고 다른 종교 공동체에서도 같은 문제를 볼수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고요. 제가 명상 컨퍼런스를 하면서 어떤 분이 새로운 자아로 갈아입어야 한다 새로운 자아라는게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갈아입어야 할 새로운 자아는 무엇일까? 일단은 많이 변해야 하는 건 분명한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지. 사실은 자기 자신부터 변해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다른 여타의 교회의 문제에 있다고 하기 전에 우리 자신부터 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래야 무슨 변화에 시발점이 거기서 출발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신부님 발제문에 대해서 각자 의견들을 내주시고 질문 있으시면 질문해주시고 여러 가지 다양하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박태식 신부님 : 제가 이규성 신부님 발표하시는 걸 들으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종교를 어두운 면, 잘못되어 있다 하는 면을 까놓고 이야기 하는 게 쉽지 않은데 신부님 말씀 중에 하느님이 들어가야 할 자리가 엉뚱하게 교회가 들어와 있다. 그걸 2천년동안 해왔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그렇지? 우리가 이 모양인가? 했더니 교회가 들어가 있어서 그랬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오늘날 한국 교회를 외부에서 바라볼 때 사람들 왜 저러지 할 때 좋은 설명이 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 궁금한게 불교에도 그런게 있지 않나? 또 원불교에도 그런게 있지 않나? 과연 제도권 종교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한번 우리가 제가 불자도 아니고 그러니까 불자는 이렇다 하고 남의 이야기 하는건 좀 그렇잖아요. 한번 미산 스님이나 심원 스님이나 교무님께서 이게 왜 우리쪽에서는 어떻게 돌아가기 때문에 모순들이 발생하고 있다. 하느님 자리에 교회가 들어와서 있어왔다. 교회를 유지하는데 급급하느라고 등등 세분한테 여쭤보고 싶어요. 솔직하게. 불교가 잘 나가고 있으면 이야기 안하셔도 됩니다.
이정배 목사님 : 제가 발제에 들어가기 전에 오늘 들은 소감부터 먼저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실 New Nomal에 대해서 공부하기를 원했죠. New Nomal은 신부님이 말씀하신 너무 일반화된 New Nomal이 아니라 오늘 특별히 팬데믹 위기 시대에 기후 붕괴시대에, 불평등의 시대에 도대체 모든 종교가 New Nomal을 늘 말해왔지만 그러나 이런 시대에 New Nomal이 무엇이어야 할까를 우리는 고민하는 그런 자리로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물론 신부님의 이 강의 속에서 어떻게 교회가 Nomal을 제시하지 못해왔고 이 New Nomal을 제시하려면 교회가 어떻게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되고 삼위일체론이 어떻고 교회론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가톨릭 교회 입장에서 말씀을 하셨는데 정작 오늘 앞에 청년들, 사람들이 어떻고 하는 것들이 New Nomal로 이야기 되는가에 대해서 여전히 아무 이야기 없으셨고 교회가 여전히 그렇다는 이야기만 하셨는데 오늘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사실 수도 없이 해왔죠. 사실 개신교 사람들이 가톨릭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부패가 되면 또 그 부패가 넘어서 그게 바로 우리 개신교 역사인데 지금 이런 상황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교회 안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New Nomal을 말해야 되는 것인가. 저는 신부님이 앞에서 그렇게 청년들의 이야기 하시면서 교회 이야기 하시는데 이게 또 하나의 물과 기름처럼 역시 섞이지 않는 그냥 우리만의 독대처럼 이야기 되는 그런 느낌이 더 들었어요. 그렇게 되면 이건 New Nomal에 오늘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특별히 그냥 모든게 다 New Nomal이다. 시대들마다 이런 차원이 아닌 오늘 우리 시대에 더 각별한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저는 종교가 너무 부자다. 이제 종교가 자기 건물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도와줘야 될 때다. 이미 우리 보네포 목사가 그런 이야기 했죠. 교회가 너무 많이 부자다. 너무 많이 건물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성도들로부터 무수한 많은 재물들을 받아들였다면 앞으로 이제 지난번에 우리가 코로나 이후 시대에 앞으로 6~8개월 이후에 엄청난 소용돌이가 발생할거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 교회가 어떻게 되야 된다 이 이야기 하는 것으로 지금 그런 문제에 대한 New Nomal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정말 우리가 이런 시대의 New Nomal 이라고 한다면 어떤 이야기들을 각 종교가 해야될까 지금 있는 자리에서 그냥 그렇게 늘상 해오던 이야기 강도있게 하는 것으로 과연 New Nomal을 말할것인가 우리가 아무리 교회가 신비롭다 성사보다 미스테리움을 강조해야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현실 교회에는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는 그런 현실들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면서 과연 우리가 이 New Nomal을 어떻게 제시해야 될것인가 하는 더 진지하고 더 고통스런 고민들이 우리들 앞에서 나와야 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가 이유와 진단을 못해서 그런게 아니라 이유와 진단은 하나님 자리에 교회가 들어섰다? 그 이야기 우리는 수도 없이 해왔던 이야기들인데 그걸 몰라서 그런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왔던 것이고 그러면 그렇게 알면서도 그렇게 되어온 현실들을 그냥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어떻게 끝날까 그러나 다행히 가톨릭은 한분 교황의 탁월한 지도력 때문에 가톨릭이 그렇게 세상에 다르게 보이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분도 혼자지 그분을 뒷받침 하는 세력들은 없잖아요. 저는 New Nomal에 신부님의 기본 단서가 제안이 New Nomal이 아닌 듯 싶어서 과연 우리가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인가 아니면 팬데믹 이후의 상황에 대한 여실한 고민들을 나누기로 한 자리가 아닌가 각 종교들로.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제 소감을 그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최현민 수녀님 : 목사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사실은 지난번 이정배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각 우리가 속해있는 종교 공동체의 입장에서 새롭게 이 시대를 향해서 어떤 New Nomal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하는 취지로 New nomal을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신부님께서 상당히 자세하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정리를 잘 해주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