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튼연구원 종교인 모임
일시: 2025 12 06 토요일
장소: 성북동 씨튼연구원
발표주제: <노동, 성, 권력> 3-4장
발제자: 최현민 수녀
1. 노동·성·권력이라는 역사 이해의 틀
윌리 톰슨은 노동, 성, 권력이라는 세 가지 핵심적 동력이 역사적 시기와 사회 구조 속에서 서로 얽히며 문명의 흥망성쇠를 이끌어 왔다고 본다. 그는 이 세 축을 통해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오늘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역사 분석의 중심에 세운다. 특히 노동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형성된 사회적 산물이며, 그 변화는 세계사의 흐름과 긴밀히 맞물려 있음을 강조한다. 사회 발전과 함께 재편되어 온 노동 기반의 경제 활동이 반드시 인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온 것은 아니라는 점 또한 그의 중요한 문제 제기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신석기 시대를 하나의 결정적 전환기로 주목하며, 이 시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본격적으로 검토한다.
2. 신석기 혁명: 정착과 농업의 세계사적 전환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며 사냥과 채집에 의존하던 후기 구석기 시대의 생활 방식은 점차 사라지고, 정착 생활이 일반화되면서 인류 문명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인류는 식물 재배뿐 아니라 가축을 길들이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고기와 가죽을 얻는 것은 물론 이동과 경작의 수단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이러한 농경사회로의 전환은 문명 발전의 주기를 본격적으로 작동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초기에는 더딘 속도로 진행되었지만 결국 거대한 가속 효과를 낳았다.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는 이러한 변화를 ‘신석기 혁명’이라 명명했다. 그는 정착과 농경으로의 급격한 전환이 인류 사회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동력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혁명으로 규정했다. 물론 농경 이전에도 일부 지역에서 정착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이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 제기되었지만, 신석기 시대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다양한 형태의 변화가 연속적으로 전개된 시기로 이해할 때, ‘신석기 혁명’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 년 전 이후 지구온난화는 세계적인 농업혁명을 촉발하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비록 초기 농경사회는 수렵·채집 사회에 비해 생산성과 안정성 면에서 취약했지만, 변화한 기후 조건 속에서 인류는 농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농업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인더스 계곡으로 확산되었고, 이집트와 인더스 문명은 이 지역과 비교적 독립적으로 출현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역시 밀 재배를 기반으로 한 유사한 발전 양상을 보인다. 한편 중국 양쯔강 유역에서는 쌀 농업이, 중앙아메리카와 안데스 지역에서는 옥수수와 감자를 중심으로 한 농업이 발전했다. 지역별 차이는 있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농업과 정착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이를 농업혁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수렵과 채집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농업을 보조하는 경제 형태로 전환되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유라시아 대륙이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어 작물과 가축의 확산이 용이했기 때문에 다른 대륙보다 농업 발전이 빨랐다고 설명한다. 이는 농업혁명이 기후뿐 아니라 대륙의 지리적 구조와 환경 조건에도 크게 의존했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신석기 시대에는 가축화가 이루어졌는데, 수많은 동물 가운데 실제로 가축화에 성공한 종은 극히 소수였으며, 양·돼지·염소·소 등은 중요한 식량원이자 노동 자원이 되었다.
3. 잉여의 축적과 불평등의 발생
정착 생활은 물자의 저장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개인의 필요를 넘어서는 잉여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잉여는 곧 사회적 불평등의 토대가 되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파라오의 무덤은 청동기 사회의 기술력과 물질적 풍요를 보여주는 동시에, 특권층과 일반 대중 사이의 분명한 사회적 격차를 드러내는 고고학적 증거다.
축적된 부는 경제적 종속 관계를 낳았다. 부유한 가문이 위기에 처한 이웃을 돕는 경우, 그 대가는 노동이나 성적 서비스로 상환되어야 했고, 이러한 관계는 점차 고착화되었다. 또한 축적된 물자를 둘러싸고 이를 지키려는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과 긴장이 발생했다. 다이아몬드는 정착과 저장 문화의 형성이 잉여를 관리·통제하는 집단의 권력화를 불러왔고, 그 결과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었다고 설명한다.
결국 부의 축적은 계층 분화를 낳았고, 빚을 노동으로 갚는 구조가 자리 잡으면서 초기 농경사회 안에서 이미 강제 노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평등 사회가 어떻게 지배 계급과 왕권을 형성하며 불평등한 사회로 전환되었는지를 보여주며, 『불평등의 창조』와 같은 연구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4. 교류와 혼인: 정착 사회 내부의 사회적 분화
앞서 살펴본 정착과 농업혁명, 그리고 부의 축적은 신석기 사회 내부에 불평등의 구조를 형성했다. 그러나 사회 변화는 경제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교류와 혼인 관습의 발달은 공동체 간 관계를 재조직하며 사회적 분화를 한층 더 심화시켰다.
고고학계는 신석기 농업 공동체가 결코 완전한 자급자족 체계가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각 공동체는 생존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자체적으로 확보할 수 없었고, 부족한 물자는 다른 공동체와의 교환을 통해 조달해야 했다. 이러한 교환 대상에는 소금과 같은 필수품뿐 아니라 장신구나 사치품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교류 구조는 이미 구석기 시대에도 부분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정착 농업사회에 이르러 훨씬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공동체 간 교류에는 혼인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씨족과 씨족 사이의 혼인은 단순한 개인적 결합이 아니라, 물자와 인적 자원을 교환하는 사회적 장치였다. 각 문화권에서는 혼인 과정에서 자신들이 보유한 풍부한 물자를 주고받는 관습이 형성되었고, 이는 공동체 간 위계와 차이를 점차 가시화했다. 이러한 혼인 네트워크는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동시에, 신석기 사회 내부의 분화와 계층화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5. 유목과 정착의 긴장: 순환적 역사 구조의 형성
정착 농업사회가 낳은 또 하나의 중요한 결과는 가축화와 유목 사회의 등장이었다. 유목 사회의 출현은 기원전 6천 년경으로 추정되며, 유목 생활에 적합한 가축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순록은 지역적 제약이 컸던 반면, 양·염소·닭·말과 같은 가축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용될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유목민들은 주로 이동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대체로 정착 농경 공동체에 비해 물질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놓였다.
이로 인해 유목민과 농경민 사이에는 상호 의존과 갈등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일부 유목 집단은 정착 공동체에 공물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유지했으며, 다른 집단은 무력을 통해 직접 정복을 선택했다. 특히 훈족이나 몽골족과 같이 기동성이 뛰어난 전사 집단은 이러한 전략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정복에 성공한 유목 집단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더 고도화된 정착 문명 속으로 흡수되었고, 이후 또 다른 유목 집단이 새로운 정착 사회를 공격하는 순환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순환 구조는 중세 이슬람 사상가 이븐 할둔의 역사 이론에서 이론적으로 정식화된다. 그는 『무깟디마』에서 변방의 유목 집단이 지닌 강력한 집단적 결속력, 즉 아사비야가 문명 정복의 원동력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정착 이후 풍요로움 속에서 아사비야는 점차 약화되고, 결국 더 강한 결속력을 지닌 새로운 집단에 의해 왕조는 교체된다. 이 과정에서 왕조의 수명은 대체로 3~4대, 약 120년을 주기로 반복되며, 역사는 직선적 진보가 아니라 순환적 구조를 이룬다.
정착과 농업은 이처럼 사회적 분화와 불평등을 낳았을 뿐 아니라, 유목과 정착이라는 상이한 삶의 방식 사이의 긴장을 통해 근대 이전 세계사의 기본 역동을 형성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신석기 시대는 이후 인류 문명의 정치·경제·사회 질서를 결정지은 근원적 전환점으로 자리 잡게 된다.
제4장 성의 차이 성관계와 혈연의 문제
----------성, 번식, 혈연: 사회 질서의 또 다른 토대
앞선 장들에서 살펴본 정착과 농업혁명, 부의 축적과 불평등, 그리고 교류와 혼인을 통한 사회적 분화는 모두 노동과 권력의 재편이라는 문제로 수렴된다. 제4장은 이러한 분석을 한 걸음 더 확장해, 인간 사회의 또 다른 핵심 축인 성, 번식, 혈연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톰슨은 인간 생활의 중심을 성관계와 생식, 혈통의 관리라는 문제군에 놓고, 이 영역에서 성·노동·권력이 어떻게 긴밀히 얽혀 작동해 왔는지를 추적한다.
이 장에서 특히 주목되는 주제는 할머니의 중요성과 여성의 성적 차별성이다. 이는 성이 단지 개인적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조직과 권력 구조를 형성하는 결정적 요소였음을 보여준다.
1. 할머니의 진화적 역할과 다산의 사회적 의미
인류의 진화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두 발로 직립보행을 하는 유일한 포유류라는 점이다. 이러한 해부학적 특성은 인간 사회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유인원이 새끼를 어미의 몸에 매달아 이동하는 것과 달리, 두 손이 자유로워진 초기 인류는 아기를 품에 안고 돌볼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모자 관계의 긴밀성을 강화했다.
여성의 성기가 두 다리 사이 깊숙이 위치한 구조 또한 인간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직립보행으로 좁아진 산도와 점점 커지는 아기의 두개골 사이의 긴장은 ‘출산의 역설’을 낳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독특한 방식으로 진화했다. 아기의 머리 크기는 상대적으로 작아졌지만, 그만큼 긴 성장 기간과 많은 돌봄이 필요해졌다. 이때 산모를 돕고 아이를 보살피는 역할을 담당한 이들이 바로 산모의 어머니, 즉 할머니 세대와 경험 많은 여성들이었다.
인간의 아기는 신체적 미성숙뿐 아니라 방대한 사회적 학습 때문에도 장기간 성인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여성들은 지속적으로 출산해야 했고, 어린아이를 돌볼 인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 맥락에서 할머니는 단순한 노년 여성이 아니라, 집단의 생존과 번영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 사회 자원이었다. 인류학자 커츠는 폐경 이후까지 생존하는 여성의 존재가 인간이 유인원과 구별되는 진정한 인간 사회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특히 가족과 사회 조직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초기 농업사회에서는 다산이 중요한 생존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출산보다 사고, 질병,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이 훨씬 높았고, 인구는 항상 부족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다산은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는 수단이자, 노년기에 의지할 가족 구성원을 확보하는 전략이었다. 농업사회에서 자녀는 곧 노동력이었으며, 부모의 노후를 책임질 존재였다. 더 강한 성인 남성의 확보는 전쟁에서의 군사력과도 직결되었고,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되면서 다산은 농경사회가 선택한 자연스러운 생존 방식이 되었다.
2. 성과 권력, 종교의 결합과 여성 차별의 구조화
그러나 성과 번식은 곧 권력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톰슨은 성별에 따라 형성된 차별 구조를 추적하면서, 생물학적·물리적 불리함이 어떻게 여성의 지위를 지속적으로 규정해 왔는지를 분석한다. 나아가 성과 권력, 성과 종교의 결합이 성별 역할에서 비롯된 차별과 폭력을 어떻게 제도화했는지를 드러낸다.
그는 기독교 사회에 내재된 성별 불평등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창세기는 남성이 먼저 창조되고 여성이 남성의 갈비뼈에서 만들어졌다는 서사를 통해 불순종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읽혀 왔다.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 이야기 역시 인간의 고통을 여성의 호기심과 선택에 귀속시킨다. 중국 신화에서는 여성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존재로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 여성이 역사적으로 ‘패배한 성’이 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농업혁명 이후 축적된 부와 전쟁, 노예제는 여성을 약탈하고 특정 남성에게 종속시키는 관행을 낳았다. 기독교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성은 타락의 상징으로 간주되었고, 문제의 책임은 주로 여성에게 전가되었다. 금욕은 신앙의 증표가 되었고, 처녀성은 덕목으로 숭상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히에로니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교부들의 영향 아래 성적 욕망 자체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사상으로 강화되었다.
역사적으로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성직자는 결혼을 했으나, 4세기 이후 성관계 금지 규정이 등장했고, 11세기에 이르러 성직자 독신제가 제도화되었다. 이는 성직의 세습을 막고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목적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결혼의 목적은 오로지 자손 생산으로 한정되었고, 여성은 개인으로서의 존엄을 철저히 무시당했다.
결국 성관계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문제는 성별에 따른 구조적 불평등이었다. 결혼은 오랫동안 재산과 권력이 얽힌 거래였고, 지참금 제도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여성은 폭력과 통제 속에 놓였으며, 이혼은 대체로 남성의 특권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요약하며 톰슨은 발터 벤야민의 말을 인용한다. “모든 문명의 기록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며, 여성 혐오의 기록이다.”
3. 성 규범과 권력: 종교·법·문화가 만든 불평등의 구조
수메르 문명 이후 매춘은 지속적으로 법과 규제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 규정은 대체로 남성에게 유리하게 작동했고 성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이나 소년에게는 불리하게 적용되었다. 이는 성 규범이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관계 속에서 형성·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친족구조>
구약성경에서 동성 간 성행위는 하느님의 진노를 부르는 행위로 규정되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다. 그러나 본문 자체를 살펴보면 소돔의 죄는 동성애가 아니라 낯선 이를 향한 집단적 성폭력과 타자에 대한 폭력이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동성애 금기의 상징으로 굳어진 것은 성서 본문보다는 이후의 신학적 해석과 수도원 규율, 스콜라 철학의 재독해 과정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후대의 규범이 소돔 이야기에 투사되면서 동성애와 소돔의 죄가 결합된 것이다.
레위기 18장은 동성 간 성행위를 ‘가증한 일’로 규정하고, 유다서 7장 역시 소돔의 음란함을 언급하지만, 이 역시 특정 시대의 규범 의식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역사적으로 보면 19세기 오스만 제국은 동성애에 비교적 관대했으나, 현대의 많은 이슬람 국가들은 이를 엄격히 금지하거나 사형에 처한다. 기독교 국가들 또한 1960년대 이후 점차 동성애 처벌을 폐지해 왔지만, 일부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는 여전히 신의 형벌론을 고수하며 이를 반대한다. 9·11 테러를 동성애 허용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해석하는 주장 역시 이러한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성 규범은 언제나 종교·법·권력과 얽혀 있었고, 그 결과는 반복적으로 특정 성과 집단에게 불리하게 작용해 왔다.
초기 농업사회와 수력 공동체는 친족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형성되었으며, 통치 권력은 세습 귀족에게 집중되었다. 토지와 재산은 주로 아들에게 상속되었고, 직업과 기술 역시 부자 간에 계승되었다. 인도에서는 이러한 구조가 극단화되어 카스트 제도로 고착되었다. 여기서 노동, 성, 권력이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족은 노동력을 생산하는 핵심 단위였고, 성별 역할 분담은 강하게 강조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산업혁명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영국에서는 아동들조차 공장 노동에 동원되었다. 가족은 보호의 공간이기보다 폭력과 억압의 공간이 되기도 했으며, 이는 전 세계의 문학과 민담 속 ‘폭군 같은 시어머니’, ‘사악한 계모’라는 반복적 모티브로 드러난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가장 큰 희생자는 여성과 아동이었고, 아이들은 가족의 재산이자 사회적 자산으로 취급되었다.
<톰슨 해석에 대한 보완적 설명>
1. 여성 수도원 입회에 대한 해석의 한계
톰슨은 중세 여성들의 수도원 입회를 주로 성관계의 단절과 금욕의 이상이 사회적으로 추앙받았기 때문으로 설명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해석은 교회가 성을 죄와 타락의 상징으로 간주해 온 역사 속에서 일정 부분 설득력을 지니지만, 여성 수도자들의 선택을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환원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실제로 중세 여성들이 수도원에 들어간 이유는 훨씬 복합적이었으며, 종교적 동기뿐 아니라 사회적·경제적·가족적·정치적 요인이 중층적으로 얽혀 있었다.
① ‘성적 금욕’ 중심 해석의 문제
톰슨은 교회의 성 이해—곧 성을 죄의 근원으로 보는 시각—를 여성 수도원 입회의 핵심 배경으로 제시하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이러한 설명이 남성 중심적 신학 담론을 여성의 삶에 투사한 결과라고 비판한다. 여성의 수도원 입회는 단순히 “성을 끊고 신에게 헌신하는 길”이라기보다, 당시 여성에게 허용된 제한된 조건 속에서 자율성과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다.
캐롤라인 워커 바인엄(Caroline Walker Bynum)은 『Holy Feast and Holy Fast』(1987)에서, 중세 여성들의 금욕 실천과 수도원 입회를 교회의 성 억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수동적 복종으로 해석하는 관점을 비판한다. 그녀에 따르면 여성 수도자들은 남성 성직자 중심의 교회 질서 안에서 자신들만의 영성, 권위, 종교적 주체성을 구성해 나갔으며, 이는 오히려 기존 질서에 대한 일종의 대응 전략이었다. 이러한 해석은 여성들이 교회의 성 담론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그 틀 안에서 능동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재구성했음을 보여준다.
② 사회·경제적 배경과 수도원의 기능
중세 여성들의 수도원 입회는 가문과 계급의 이해관계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귀족 가문은 딸들의 결혼 지참금 부담을 줄이거나, 교회 내에서 가문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수도원 입회를 선택하기도 했다. 이는 신앙적 동기 못지않게 경제적·정치적 계산이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시사한다. (버버라 로젠바인, Medieval Women and the Church, 1998).
특히 중세 후기로 갈수록 여성에게 허용된 사회적 역할이 축소되면서, 수도원은 여성들에게 ‘제한된 자율성의 공간’으로 기능했다. 수도원 안에서 여성들은 교육을 받고, 서신을 교환하며, 필사·음악·예술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지적·문화적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수도원은 단순한 금욕의 공간이 아니라,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대안적 삶의 형태이기도 했다.
③ 종교적 동기의 다양성
여성 수도자들의 입회 동기는 결코 단일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신비주의적 체험과 하느님과의 직접적 합일을 추구했고, 어떤 이는 안정된 공동체와 사회적 보호를 원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폭력적 결혼 제도나 강제 혼인을 피하기 위한 현실적 선택으로 수도원을 택했다.
12–13세기에 등장한 베긴회(Beguines)는 이러한 다양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베긴회 여성들은 공식적인 수도회 규율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종교 공동체를 형성해 독자적인 영성 생활을 실천했다. 이는 공식 교회 질서 밖에서 전개된 여성 영성의 한 형태로, 교회의 억압적 구조 속에서도 여성들이 신앙과 삶의 방식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톰슨의 해석은 수도원을 여성들이 자율성·지식·신앙을 새롭게 조직한 공간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2. 히에로니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성 이해에 대한 재검토
톰슨은 서구 기독교 문화의 성 도덕과 죄의식이 4–5세기의 히에로니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이 성을 곧바로 하느님의 분노이자 처벌로 규정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두 신학자의 입장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측면이 있다. 실제로 이들의 성 이해는 동일하지 않으며, 각각 고유한 신학적 맥락과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① 아우구스티누스의 성 이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성 이해는 그의 원죄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는 성욕 그 자체를 죄로 보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타락 이후 성욕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비자발적 충동(concupiscentia)으로 변했다고 이해했다. 이 때문에 성욕은 죄의 원인이기보다는 죄의 결과이자 징표로 해석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결혼과 성관계 자체를 악으로 단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결혼을 하느님이 허락하신 선한 제도로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여전히 타락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보았다. 그는 “결혼은 선하지만, 그 안의 정욕은 죄의 벌이다”(『혼인과 욕망』 I.27)라고 말함으로써, 성욕을 하느님의 징벌로 이해했다. 이러한 관점은 중세 서방 교회에서 성을 늘 경계와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신학적 토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② 히에로니무스의 성 이해
히에로니무스는 아우구스티누스보다 더 급진적인 금욕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수도생활과 처녀성(virginity)을 강조하며, 이를 “천상의 삶을 미리 살아가는 방식”으로 이해했다. 히에로니무스에게 결혼은 허용될 수 있는 선이었지만, 영적 완전성의 관점에서는 처녀성보다 한 단계 낮은 상태였다.
그는 “결혼한 이들도 선하지만, 나는 처녀를 찬양한다. 그들은 천사와 같다”(『요한 복음 주석』 서문)라고 말하며, 금욕을 이상적인 영성의 형태로 제시했다. 이러한 사상은 서구 수도원 금욕주의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 종합적 평가
히에로니무스의 급진적 금욕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적 성 이해가 결합되면서, 서구 기독교 문화 속에는 점차 ‘성=죄’라는 무의식적 정서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인물 모두 성 그 자체를 악으로 규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이 문제 삼았던 것은 성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타락 이후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몸을 온전히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이들의 신학은 성을 악마화하기 위한 단순한 도덕주의라기보다, 타락 이후의 인간 조건을 설명하고 영적 질서를 회복하려는 시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다만 이러한 신학적 문제의식이 역사 속에서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성에 대한 죄의식과 금욕의 윤리가 과도하게 강화된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