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모임
씨튼연구원은 영성의 토착화와 종교간의 학문적 대화가 목적입니다.
세미나 자료

생태위기극복을 향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2009 11월강좌)---최 현 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0-10-25 12:28

본문

서론

1912년 호화 여객선 타이태닉호의 침몰사건을 아는가?  영화  ‘타이타닉’을 통해 우린 그 호화로움을 간접적으로 안다. 그 배를 탄 어느 누구도 그 배가 침몰하리라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린 지금 지구라는 갑판위에서 지구라는 배에 구멍이 나고 물이 들어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는가?

예)100가지 종류의 동식물이 멸종해가고 2만헥타르(6050만평)의 사막을 만들어내고 1억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 지난 한세기 동안 파괴한 것이 그전 50세기간 파괴한 것보다 많다.

우린 이미 생태위기의 위험순위에 대해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위기감을 느끼고 대처하는 사람들의 수가 그리 늘지 않는 것 같다. 왜 사람들은 그 심각성을 알면서도 이에 대처하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명박정부가 들어서  4개월이 채 못되어 100일동안 일어난 촛불집회를 알고 있다. 여중고생들의 주도로 2008년 5월 시작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조건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는 한국사회에 정치사회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커다란 충격과 과제를 남겼다. 이로 인해 이명박 대통령은 두 차례 대국민 사과를 했다. 분명 이 사건은 이명박정부를 당황케 했고 촛불집회를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몰아갔던 보수언론 또한 네티즌들의 보수언론 광고기업 또한 그들의 불매운동으로 인해 타격을 입었다.

 많은 이들이 촛불집회의 참석자들이 누구냐에 대해서 연구해왔다. 이것은 한국 집회 역사의 새로운 측면을 드러냈다. 그것은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종전과 달리 여성 10대 유모차부대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교환한 특이한 집회였음을 기억한다. 이대 조기숙 교수는 잉글하트의 탈물질주의론으로 이 집회의 참석자들의 문화를 해석한다. 즉 집회 참가자는 일반국민과는 다른 문화적 특징을 갖는 것으로 드러났다.

 탈물질주의자는 유럽과 미국의 젊은 세대에서 주로 발견되는 가치관으로, 물질적 가치보다는 인권이나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 적성 등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으며, 투표와 같은 전통적 정치 참여뿐만 아니라 항의, 집회, 농성과 같은 비전통적인 정치참여에도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서구의 탈물질주의자와 같은 문화적 속성을 보였으며, 정치적 참여에 있어서도 매우 유사한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조교수는 촛불집회의 특징은  집단주의적이기보다는 개인주의적이며, 물질주의적이기보다는 탈물질주의적이라고 보았다.

조교수의 해석이 전적으로 옳은지 차치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먹거리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먹거리에는 사람들이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데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왜일까?

이것은 먹거리는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4대강은 한치 건너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이 어쩌면 생태문제가 참으로 쉽지 않은 문제임을 여실히 우리에게 보여주는 실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부에서 언론에 밝힌 바에 따르면,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는 대운하와 관련이 없으며, 수질개선 홍수방지  물 부족 문제를 해결, 19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하여 불황의 늪에 빠진 나라 경제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신뉴딜정책이라고 선전한다. 미래 경제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 말을 듣는다면 상당수 국민들이 실상을 제대로 알기도 전에 얼마나 복음처럼 여길 것인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요 핵심사업들이 거의 종전 방식 그대로 홍수방지를 위해 대규모로 하상을 준설하고, 하안에 제방을 높이 쌓고 하천을 가로질러 댐들을 건설하려고 하는 것 같다. 이런 방식의 구조적인 하천정비만으로는 홍수피해를 줄일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오래전에 알려진 상식이다.

선진국의 연구들에 의하면, 이러한 구조적인 하천정비가 심각한 환경파괴와 훼손을 초래함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 오히려 홍수피해를 가중시킬 수 있다. 즉 하천을 정비한다고 손을 댄 결과가 바로 원인이 되어 하천관리에 해마다 막대한 돈이 투입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돈 들여 고질병을 얻는 것과 다름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는 경기불황을 핑계로 허겁지겁 벌일 성격의 사업이 절대로 아니다.  과거 수십년간 하천정비나 관리에 그토록 많은 투자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강이 죽어가는지를 장기간에 걸쳐 정밀하게 조사·진단하는 하천환경평가를 먼저 시행한 후 시행 여부를 결정할 일이라고 본다. 이는 분명 거시안적 정책을 펼치기 보다 임시방편적인 대응책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득보다는 실이 큰 정책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정책을 보면서 나 자신은 그렇지 않는지 자문해보게 된다. 나는 과연 거시안적 사유를 하며 살아가는지, 아니면 눈앞에 놓인 것들에 급급해 하며 그것들을 처리해버리기에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는지....4대강 문제는 내 코 앞의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하면서...어찌 보면 정부가 정책을 결정할 때 우리의 가치관은  바로 우리 각자의 것이 아니던가? 거시적인 것보다 눈앞의 것에 우선 순위를 두는... 이제 우리는 그것이 지닌 문제점들을 경험을 통해 보았기에 비판한다. 남의 근시안에 대해 잘 비판하나  정작 나는 어떤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 한겨레신문 2009, 10 31)자에 ‘내 안의 사대강’이라는 생태칼럼이 실렸다.-장성익<환경과 생명>주간-생태는 자연 그리고 우리의 삶을 주변인 환경의 문제가 아님을 우린 감지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근원지는 바로 다름아닌 우리 내면의 문제임을....

여기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 하면 개인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결국 생태문제는 인간들의 손에 달려있다. 아니,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를 개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영성 안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1. 불교를 통한 개인주의 극복

불교의 기본가르침이 연기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불교는 존재를 관계적 존재로 봄을 의미한다. 그러나 연기라는 불교교리를 알아서 생태문제에 솔선수범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나? 나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성을 지녔기에 자연을 보호함은 곧 나를 보호하는 것이라 여기고 자연보호에 앞장서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는 무엇을 말하나 무엇을 안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행하도록 촉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연기를 아는 것이 실제적으로 인간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마음을 극복해주진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불교 강의의 내용을 요약 정리>

4월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정제 팔정도의 가르침을 통해 생태문제의 해법을 제시했다.

붓다는 현실 안에 드리운 고라는 문제를 푸는 길로 팔정도를 제시했다. 이는 계정혜의 삼학으로 요약할수 있다.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면 생태문제뿐 아니라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는가? 그 해결이 결국 불교는 생태문제해법을 마음의 문제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5월 종범스님의 강의  ‘선과 생태영성’에도 확인된다. 중요한 것은  반야심-애증심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이다. 그래서 반야심은 평상심이고 무분별심이다. 반야심을 지닌 사람이면 현 생태문제에 대해 깊은 책임의식을 지니고 실천하리라고 본다.  깨달은 주체--임제의 무위진인은 곧 반야심을 깨친 사람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결국 생태문제는 마음문제이고 마음 닦음 곧 수행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린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범부들의 경우 마음닦음이 쉽지 않지 않나? 그들의 마음 깊이에 놓인 이기심 개인주의의 뿌리를 어떻게 단절할수 있나? 이것이 생태문제가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임을 시사해준다.

앞서 말했듯이 삼라만상은 얽히고 설킨 관계망 속에서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생태문제는 이 관계망이 끊어져 가고 있음을 말한다. 그 주범이 바로 인간이고 이를 풀어갈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이는 생태문제는 결국 인간문제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생태문제를 푸는 해법은 인간문제를 풀어감에 있다고 본다. 생태문제의 해결방안은 불교를 통해 살펴본 우리는 이제 그 문제의 근원지는 다름아닌 우리 내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눌선사는  <수심결>에서 “수도를 원하는 자들은 밖에서 찾지 말라”고 했다. (願諸修道之人 切莫外求) 즉 근원적인 문제해결은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불교의 생태영성을 통해 우리가 고찰해온 것들도 결국 문제는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

이런 점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안으로 자성, 자심을 닦아야함이야말로 생태문제를 알고 있는 우리가 해야할 일인 것이다. 팔정도를 실천하고 식심에서 선심으로 나아가는 것, 도겐이 말한 아견을 버려라, 회심 발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을 통해 인간의 본래성을 회복해 가는 길이 결국 생태문제의 근원적인 해법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여기서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것은 불교만이 제시하는 해법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이와 유사한 해법을 제시한다.

2. 그리스도교를 통해 본 생태문제 해법

1) 예수가 믿고 신뢰한 하느님 아버지

 예수가 생태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이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현재의 생태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생태와 예수를 연관시킬 수 있는 키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가 당시 유대사회 안에서 그만이 지닌 특이한 점이 무엇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왜 그는 유대사회로부터 외톨이가 되었을까. 붓다가 힌두전통에서 그러했듯이............

그는 기존 포도주와 달랐다. 분명 “새 포도주”였다. 어떤 의미에서 새 포도주였을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그의 인식이다. 그는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로 보았다. 이것은 구약성서나 랍비들을 통해서 배운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아니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의 세례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음성을 내적으로 들었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2가지점에 주목하자. 하나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당신이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들었다고 하시는 이 말씀은 바로 그분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깊이 자각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오는 체험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세상과 하느님 그리고 인간과 맺는 관계의 핵심이었다 .

또 다른 하나는 예수가 세례받을 때, “하늘이 열렸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래서 예수가 말한 하느님 나라는 하늘나라로도 표현할 수 있었고, 또한 그 나라는 ‘지금 여기’ 역사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 나라로 선언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늘의 길이 뚫렸고 예수는 이를 하느님나라로 말했고 하늘처럼 이 땅에도 지금 여기에서 실현시키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가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열려 하느님과 상봉했다는 것일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체험 후 예수는 하느님과 일치된 언행을 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이 계신 그 하늘이 예수에게 열려 이제 예수가 계신 곳도 하늘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말한 하느님나라이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 음성을 듣고 하늘이 열리는 체험을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

구약은 '하느님 경외'사상으로 집약되나, 예수에게서는 주로 '하느님의 부성적인 사랑의 돌봄'이 드러난다. 이것이 아버지로서의 하느님 이해!  이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예수가 말한 새 포도주이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알아들어야 한다. 이런 점이 바로 그의 가르침을 새 포도주가 되게 했다. 이제 우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러나 그 하느님은 인간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우주의 아버지, 자연의 아버지이다.

 모두에게 비와 햇빛을 주시는 분...

이런 점에서 하느님은 인격적인 부성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부성을 지니셨다.

 즉 하느님은 동물과 식물에게도 하느님의 부성을 제공하시며, 더 나아가 해와 비를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다 비추고 내리시는 분(마 5,43-48)이시다.

따라서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인간중심적(또는 의인중심적)인 협의적 의미를 탈피한 우주적 부성으로서의 하느님의 모습에 대한 강조이다.

예수가 깨달은 하느님은 부성의 사랑으로 자연의 질서를 보존하시며 그것을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복을 제공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신 창조주 하느님이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이 예수의 특이한 점이다.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신뢰! 예수 자신이 깨친 하느님께 대한 신뢰는 그가 사람들을 향해 가르친 첫 마디가 되었다. “회개하고 하느님을 믿으라” 이것이 그의 가르침의 핵심이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길 힘들어했나? 무엇이 장애가 되었나? 유대인들은 감히 입으로 이름을 말할 정도로 하느님은 경외로우시고 가까이 할수 없는 분이신데 압바라니....이런 버릇없는 가르침이 어디 있나? 그들이 생각하던 하느님과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은 달랐다! 그들의 하느님은 두려워해야 할 분, 경외로운 분이시다. 이에 반해 예수가 말한 하느님은 어머니같은 분 아버지같은 분이다.

그에게 있어 하늘 아버지는 우주만물을 움직이는 에너지요 모든 생명 안에서 모든 것을 움직이는 힘이다. 예수는 모든 생명의 아버지요 어머니이셨다. 낳으시고 기르친 분 너희 부모가 너를 잊어도 난 너를 잊지 않으리라 바로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이것이 예수가 믿고 가르친 아버지요 어머니이신 하느님이시다.

예수의 생애전체는 아버지와 그분 창조세계에 대한 신뢰를 향한 지칠줄 모르는 노력이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가장 많이 철저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신뢰’이다. 어머니의 위대함은 그녀가 자식에겐 가장 신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신뢰와 평안의 감정은 우리 몸과 영혼의 건강을 지켜주는 최선의 방패이다. 예수는 암울해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아버지를 신뢰하셨다.

2) 예수의 하늘 의미

예수가 가르친 ‘주의기도’를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하느님을 수식하는 ‘하늘’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점이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언급은 지상의 아버지와는 대비되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늘이란 땅과 대비되는 개념의 장소적 개념인가?

이것은 주기도문에 있어서 계속되는 청원인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짐’을 비는 간구와 관련해 이해할 때, 비로서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하늘은 장소개념이 아니다. 곧 하늘이 하느님 계신 곳이 아니라 하느님 계신 곳이 바로 하늘이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늘이 장소개념이 아니듯 땅도 장소개념이 아니다. 하늘이 하느님 계신 곳이듯 땅도 하느님 계신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땅을 하느님이 머무시고자 하는 곳으로...우리가 허락만 하면 하느님이 머무실 곳 그러나 우리의 허락을 기다리시는 곳이다.

3) 예수에게 있어 자연의 의미

“ 예수는 인간에 대해서 많이 언급했지, 자연에 대해서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의 대부분은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에 우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예수가 쓰던 말들을 살펴보면 그의 직업이 농사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농사꾼 냄새가 물씬 풍긴다.

예) 가뭄 겨자씨 곳간 광양 구름 까마귀 누룩 무화과나무 벼이삭 백합 비 뿌리 씨 씨뿌리는 사람 포도 포도주 꽃 나뭇가지 농사 소금 빛.....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자연의 비유 대부분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 나라와 자연간의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예수의 자연이해는 그가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그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깨달은 선상에서 자연과 역사의 사건들을 재조명하셨다. 이는 구약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창조신앙이 먼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구속사건에서 하느님이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되심을 확인하고 찬양한 것이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연은 그가 하느님나라를 설명하는 소재가 된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비유에 나타나는 것(예: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마 5,13.14; 씨 뿌리는 비유: 마 13,3 이하; 겨자씨 비유: 마 13,31 등)은 자연의 속성과 특징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설명한다. 그것이 단순히 자연현상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을 설명하는 지혜적 말씀의 성격을 띄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는 하느님나라를 자연을 통해 설명함은 생태문제를 다루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이 ‘하느님나라’라면 그 나라를 예수는 자연의 섭리로 설명하고자 하셨다. 즉 예수는 하느님나라와의 연결선상에서 자연을 바라보신 것이다. 그에게 있어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은 곧 자연의 섭리가 머무는 곳이다. 자연의 섭리가 살아나는 곳이고 자연의 순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것이 예수가 말한 하느님 나라이다. 왜? 바로 그 자연이 하느님이 섭리하신 것이고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섭리가 살아있는 곳이 하느님나라라면 그리스도인이 생태살림은 하느님나라 건설함과 직결되는 것이라 해석할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연은 하느님의 섭리가 숨쉬는 곳이며 이를 이어주는 것이 예수라면 예수는 이제 그의 제자에게 그 일을 맡기신 것이다.

2. 하느님의 협력자로서의 인간

1) 예수 기적의 새로운 의미

앞서 우리는 예수가 깨친 “하느님, 하늘, 자연, 하느님나라”의 의미를 고찰했다.

여기서 우린 그가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은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말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깨친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을 당신 삶을 통해 드러내셨다. 소통이다. 자연과의 소통! 막힌 곳을 뚫으셨다. 그의 이적들은 바로 이 소통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의 소통, 하느님과의 소통...

예수는 어머니 아버지같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에서부터 당신의 일을 시작했다.

그의 기적은 바로 그와 하느님과의 관계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느님에 대해 철저히 신뢰했기에 예수는 하느님의 힘으로 일할 수 있었다. 바로 아버지에 대한  신뢰에서 치유의 힘, 치유의 능력이 나온 것이다.

<생태주의자 예수>를 쓴 프란츠 알트는 예수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자연의 법칙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 자연은 이미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하느님의 기를 담은) 예수에게 전혀 기적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예수의 기적이다.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 어떻게 하시는지 잘 보라!

그가 눈먼 이를 고쳐주신 사화를 보라(요한 9, 1-9)

예수께서 땅에 침을 뱉아 친히 손으로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셨다..이와 같은 그의 손길은 곧 하느님의 손길이다. 또한 죽음의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자를 일으키는 그의 손 역시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주는 창조주의 호흡을 매개하는 것이다.

그 밖에 모든 기적 사건이 마찬가지다. 진물나는 문둥병자를 치유하는 손이나, 듣지 못하는 자의 귀를 손가락으로 막고 '에바다'(막 7,34)하므로 열리게 하는 것이다. 또한 죽음에 처한 소녀를 향하여 '달리다굼'(막 5,41)이라고 외치는 그 모든 행위와 말씀은 창조를 가능케 하던 하느님의 행위였고 말씀이었다. 이러한 예수의 병치유 기적은 하늘과의 길이 막힌 상태를 뚫어주는 것이었다. 처음 창조되었을 때 보시니 좋은 바로 그 상태로의 회복!

이것이 바로 예수가 행하신 행적들이다. 하늘과의 통함이다.

天理의 상통, 佛性의 상통, 하느님 모상이 다시 그 모습을 회복하고 드러난 것이다.

 인간의 죄악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파괴된 하느님의 첫 창조가 다시 새로워지는 행위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의 기적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적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바로 자연과 하느님 그리고 인간이 예수를 통해 다시 통하게 된 상태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하늘과 통하는 통로가 되셨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창조를 지속시키는 예수의 행적을 의미한다. 예수는 이 일을 위해 그의 제자들을 택한다(막 3,14).

  그리고 그들에게 치유의 기적에 동참하도록 하셨다. (마 10,8 병행 참조;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쫒아내되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2) 제자들이 베푼 기적

하늘과 통하는 예수의 통로가 이제 제자들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베푸는 기적들이 이를 말해주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가 살아있을 때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 후 그들은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시작된 하느님의 창조행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의 이적---- 죽은 사람을 살리고 앉은뱅이를 고침 (사도행전 3 :1-8)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세시,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아름다운 문'이라고 성전 문 곁에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애가 된 사람이 하나 있었다.  날마다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다 놓으면    그는 앉아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을 하였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눈여겨 보며 "우리를 좀 보시오."하고 말하였다.  그 앉은뱅이는 무엇을 주려니 하고 두 사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돈이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 하며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 않은뱅이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3. 생태문제의 해법

1)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생태위기를 풀 수 있는 해법은 밖에 있지 않다. 따라서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중세 십자가의 성요한은 말한다. “너희는 열고 깊음으로 들어가라 모든 종교의 지류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근원적 흐름을 그 깊음 속에서 찾게 될 것이다. 이 깊음에서 우리는 생태위기의 해법을 발견한다. 안으로 들어가라 이것이 바로 생태문제의 해법이다.

오늘날의 생태위기는 우리에게 “이제 그만 밖에서 찾고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고 있다.

환경위기는 내면세계의 위기라 할 수 있다. 그 의미는 종전에 통했던 세계가 지금은 불통이 되어벼렸다는 얘기이다. 종래 사람들에게 통했던 하늘과의 상통이 이젠 전혀 통하지 않게 되었다. 오염물질로 꽉찬 땅은 스스로 하늘과의 길을 막아버렸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늘과 상통했다. 그러나 이제 땅의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의 빚장을 걸어잠근채 하늘과의 상통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예수는 바로 이 막힌 하늘과의 소통을 다시 여신 분이시다. 이것이 그의 세례때 “하늘이 열렸다”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등장했다. 예수가 가르친 주의기도에서 그는 당신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시며 라고 하셨다. 하늘과 땅을 다시 소통케 하신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 6, 10)

발전지상주의는 끝없이 우리를 밖으로 내몰았다. 발전의 길은 생태파괴의 길이었음을 우리는 이제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발전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발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발전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내면이 황폐할대로 황폐해진 상태에선 진정한 의미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수 없다고 하셨다. ”

우리 앞에 양자택일의 길이 있다. “재물이냐 하느님이냐”

 지금 우리에게 영적 지혜가 필요하다. 이 생태적 위기를 극복할 영적 지혜가 ....

2) 호모 심비우스로서의 인간의 본래성 회복

지금까지 고찰을 통해 결국 생태문제는 내면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본래성을 상실했기에 곧 생태파괴를 낳는다는 것이다. 자연을 파괴하면서 결국 우린 인간의 본래성도 잃어가고 있었다. 바로 인간의 본래성을 회복해야 하는 길임을.........

본래 인간의 본래성은 더불어 사는 것이었으나 세상은 어느새 더불어가 아니라 따로 따로를 외쳤고 그 개인주의(따로따로)가 경쟁해야 발전한다고 속여왔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인간의 본래성은 바로 우린 더불어 사는 존재임을 다시 자각해야 한다. 바로 이 인간의 본래성 회복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생태문제해법이다. 우리는 자연을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결전장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이 시대에 경쟁논리를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사람들로 다윈과 멜서스를 들 수 있다.

이미 200여년 전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가 그의 ‘인구론’(1789년)에서 밝힌 것처럼 삶의 현장에서 경쟁은 불가피하다. 맬서스주의는 무엇인가? 맬서스론은 인간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간은 식량위기에 직면할 것이며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인구감축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요약된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 어느순간 식량이 부족한 사태를 맞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윈을 생존경쟁개념을 생각하게 되었다. 기린을 예를 들면 기린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 유난히 목이긴 기린이 좀더 높이 위치한 잎을 따먹을 수 있기에 생존에 유리할 것이고 살아남아 후손을 이어갈 수 있다. 환경의 영향에 따라 특정개체가 선택적으로 살아남는다는 자연선택의 토대가 여기에서 기인한다.

찰스다윈은 맬러스의 <인구론>에서 진화와 생존 경쟁의 관계를 알아냄.--적자생존 약육강식의 통해 무한 경쟁을 불러일으킴. 찰스 다윈 역시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하지만 다윈은 그 무한경쟁에서 이기는 길이 막무가내의 약육강식만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 지구생태계에서 합쳐 놓으면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가는 생물군인 현화식물, 즉 꽃을 피우는 식물과 개체수가 가장 많은 생물인 곤충의 성공 비결만 보더라도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무차별 경쟁만이 유일한 길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현화식물과 곤충은 서로 돕는 공생관계를 맺으며 더불어 성공했다. 서로 물고 뜯은 게 아니라 손을 마주잡았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 대립과 전쟁을 넘어서 생명과 협동이 21세기 인류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국제환경학회에 가 보면 소가 지구온난화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점잖은 환경학자들이 있다. 흰개미들과 함께 소들이 뀌는 방귀 속의 메탄가스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소가 얼마나 많으면 그런 얘기가 나올까. 소들은 어떻게 하여 이처럼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결론은 간단하다. 우리 인간과 공생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지구 최대의 지주가 누군지 아는가. 바로 벼 밀 보리 옥수수 등 이른바 곡류식물들이다. 불과 1만년 전 우리 인간이 농경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저 들판 한구석에서 말없이 피고 지던 잡초에 불과했던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그 넓은 땅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결론은 역시 간단하다. 오로지 우리 인간과 공생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자연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무기는 공생밖에 없다. 혼자서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인류는 곧 멸망하고 말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무차별적 전투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다른 생물들과 동맹을 맺은 생물들이 더 잘 살아남는다.

우리는 이미 역사 안에서 이를 거듭 확인하고 있지 않나? 이라크전쟁 이스라엘전쟁 등

중동지역의 평화를 되찾고자 노력하는 미국 버락 오바마대통령이나 동아시아공동체 구축을 위해 노력하는 일본의 하토야마 유키오는 그래도 늦게나마 이를 깨달은 지도자이다.

하토야마의 정치관은 지나친 경쟁사회에서 탈피해 더불어사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아시아공동체창설과 아시아통화통합을 주창한다. 즉 그는 무한경쟁으로 인간성파괴와 이웃간 대립을 초래하기보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웃과 더불어 잘 지내자는 정치철학을 기본정책으로 삼고 있다.

그들은 화해만이 살길이라 말한다 제발 그들의 말이 말만이 아니길 바란다. 인간이 이번 세기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다시금 공생인간, 즉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는 일이다.

-현생 인류의 학명은 알다시피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다. 현명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요사이 우리들이 하고 있는 짓거리들을 보면 결코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현명하다면 자기 집인 지구를 불태우겠는가"

스스로 자신의 살 집인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어리석은 동물이다. 게다가 희망을 꿈꿔야 할 21세기 벽두부터 끊임없이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걸 보면 우리는 필경 스스로 갈 길을 재촉하는 우매한 동물임에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현명한 존재'를 뜻하는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새롭게 등장한 인간에 대한 학명이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이다. 이는  '공존하는 지혜'를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제 인간은 21세기에 걸맞는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야 한다.

호모 심미우스는 '통섭(consilience)'할 수 있는 존재이다. 통섭이란 모든 것은 연결시켜 이해함을 말한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모든 문제는 상호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이것이 바로 통섭이다. 대운하 건설이 단순히 토목공사가 아니고 온갖 문제들-하천 수질 홍수 생태-이 모두 연결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통섭'이라는 것이다.

4. 결론

달라이라마는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오늘의 종교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창조질서의 보존을 위해 일하는 종교만이 종교라는 명칭을 달고 다닐 수 있다.”

생태위기시대에 생태적 종교만이 치유의 종교 우리를 건강하게 하는 종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생태적 예수에게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생태적 종교가 될 수 있다. 생태적 깨달음이 없는 종교는 스스로 부패해질 뿐 아니라 남까지 부패하게 만든다.

예수가 이해한 종교(religion=다시 묶다)는 우리 자신을 아버지 창조자 창조세계 자연 생명과 다시 묶는 것이다. 우리가 이 religion을 하느님 자연 생명과의 연결로 이해한다면 여기에는 하나의 윤리적 의무가 뒤따른다. 즉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과 모든 생명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존하고 창조세계의 보존을 도와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이성의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도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의 교의 안에 생태적 해법을 지니고 있다. 생태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삼는 것 그것은 바로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자기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불교의 교의는 연기사상을 통한  자연과 인간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깊은 자각, 선수행을 통한 깨침을 통해 반야심으로 살아감은 분명 생태적 혜안이다. 그러한 주체적 삶을 사는 사람은 임제가 말한 무위진인의 삶이 되겠다. 결국 이는 불성을 회복한 존재라 한다면,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추구한 길과 만날 수 있겠다.

예수께서 하늘과 통하고, 그래서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구현하기를 희망하고 그의 제자들에게 그 일을 이어가도록 주심은 바로 그 하느님나라구현이 곧 생태회복의 길임을 우린 오늘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 바다 위의 거대한 호텔은 실제로 당대 최고의 호화로움과 기술력의 집성체였다. 그 호화로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오스카상을 수상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1997)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실제 타이타닉호의 내부가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이 자랑스러운 타이타닉호는 영국에서 출항한 지 불과 나흘 후, 북대서양에서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고 말았다. 침몰원인은 오랫동안 추측했던 것처럼 충돌로 말미암아 선체 외벽이 거의 100미터 가까이 갈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아주 작은 여섯 개의 구멍 때문이었다. 이 작은 구멍들로 1분당 400토의 물이 선내로 유입되었던 것이다.

  당시 강철의 강도는 오늘날에 비해 현저히 약했고, 빙산은 타이타닉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위치에 갑자기 나타났다. 빙산과 충돌한 지 3시간 만에 타이타닉호는 바닷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아버렸고 2208명의 승객 중 1504명이 배 안에서 익사하거나 혹한의 바다에서 얼어 죽었다. 사망자 수가 이렇게 많았던 이유는 무엇보다 여객선 안에 구명보트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최대 승선인원인 2400명의 승객과 700명의 승무원 모두를 구하려면 보유하고 있던 것보다 세 배나 많은 구명보트가 필요했지만, 미관상의 이유 등 이런저런 구실로 구명보트는 훨씬 적은 수만 구비되어 있었다. 겨우 30척의 구명보트로 이루어진 빈약한 구조장비지만 당시 법적 안전규정에는 어긋나지 않았다.

<무위진인>

眞人은 본래 도교에서 쓰던 말이다 임제선사가 無爲眞人이란 말을 쓰면서 선가에 회자되게 되었다 임제스님이 하루는 대중 설법을 하셨다.

"여러분의 몸뚱이 속에 한 무위진인(無爲眞人)이 있다. 그는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 출입하고 있으니 아직 깨닫지 못한 자는 살펴보아라."

그때 어떤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무엇이 무위진인입니까?"

임제스님이 대뜸 스님의 멱살을 잡고서"말해보라, 말해봐."하였는데 스님이 머뭇거리자, 밀어 제쳐버리고 말하기를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덩어리냐?"하고 곧 방장실로 되돌아가 버렸다.

--무위진인이란 언어에 끌려 절대화 하면 무위진인의 참뜫을 잃고 도달할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육근을 통해서 활발하게 작용하는 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은 한순간도 쉰 적이 없다. 이 사실을 알면 단지 '한평생 일 없는 사람'(一生無事人)일 뿐 달리 부처다 조사다 할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