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글이스라엘 다녀와서4 10.10.25
- 다음글영성생활2010 봄 39호 (다윗의 누룩) 10.10.25
영성생활 2010.가을 40호 (실상 필요한 건 한가지)
페이지 정보

본문
<실상 필요한 건 한가지>
최 현 민
1. 성숙한 종교다원사회가 되려면
올해 7월, 동아일보 기자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우리 사회의 갈등과 마찰의 원인으로 부각되는 소통의 부재문제를 해결할 해법을 찾고 있는 중이란다. 그 중 하나로 다종교문화이면서도 종교적 갈등보다 화합의 역사를 창출해온 한국종교문화 속에 뭔가 비결이 숨어 있지 않나 해서 그 예를 찾는다는 것이다. 1993년부터 지금까지 종교대화를 해온 씨튼연구원도 그 예가 되겠다는 것이 기자의 취재 동기였다.
오전에 기자의 전화를 받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과연 한국의 종교문화가 진정한 의미의 화합의 역사였던가? 물론 사회활동 안에 종교화합을 이룬 사례들이 있다. 가톨릭, 불교, 원불교 수행자들이 함께 사회활동을 하기도 했고, 불교와 가톨릭 및 개신교 대표들이 모여 전국적으로 장기(臟器) 기증 운동을 벌린 예도 있다. 또한 ‘대운하 반대 100일 순례’에 불교, 가톨릭, 개신교, 원불교, 성공회의 몇몇 지도자들이 함께 강을 따라 걷는가 하면,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님이 53일간 오체투지 순례를 하기도 했다.
물론 이와 같이 ‘함께 일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보다 성숙한 종교문화를 이루어가려면 이웃종교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진정 이웃종교를 마음으로부터 이해할 때 보다 성숙한 종교화합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이웃 종교 안에 면면히 흐르는 영성을 이해하는 일은 단순히 이웃종교를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나의 종교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기 전에 먼저 한국문화의 옷을 입고 살아왔다. 유아세례를 받았더라도 우리 안에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종교 문화적 DNA’가 각인되어 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전에 한국인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성숙한 크리스찬으로 살아감은 자기 문화의 종교영성과 그리스도교 영성을 어떻게 잘 조화시켜 가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문화 속에 면면히 흐르는 동아시아 종교영성은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풍요롭게 하는데 좋은 자양분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우리 문화의 자양분이 되어온 동아시아 영성에 대해 알고 있는가? ‘나는 크리스찬인데 다른 종교적 가치들이 무슨 필요가 있나’ 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내 신앙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나는 동아시아 종교를 공부하면서 우리 문화 속에 깃든 이 종교영성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훨씬 더 풍요롭게 그리스도교 영성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그 필요성을 절감케 하는 것은 동아시아 영성이 우리가 이원론적 사유로부터 자유로워지는데 도움이 되리라 보기 때문이다.
이원론적 사유는 그리스도교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 현 지구가 겪고 있는 생태문제가 이 사유와 깊은 연관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금이라도 생태문제에 관심을 갖고 접근해본 사람이라면 생태문제의 원인이 이원론적 사유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할 것이다.(영성생활 37-39호 졸고 참조) 그러나 이원론적 사유는 생태문제의 원인만이 아니다. 이는 자연과 인간을 이원화시키는 문제로부터 나와 너의 주객 간에 일어나는 일상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뿌리가 깊다. 여기서는 이원론적 사유에 관한 모든 면을 다룰 생각도, 그럴 지면도 없다. 다만 우리네 삶에서 야기되는 너와 나의 주객관계에서 빚어지는 문제의 발단이 이 이원론적 사유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2. 이원론적 사유와 예수님의 가르침
이원론은 본래 그리스도교의 사유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이 어떤 가르침을 펼치셨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적어도 성경을 통해 접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원론적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 그 예로 마르타와 마리아의 예화(루카 10, 38-42)를 들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마리아는 나를 도와주지 않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만 있는가.’ 하며 마르타는 투덜댄다. 마르타가 지닌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녀는 ‘마리아’에 대한 자기 판단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마리아에 대한 가치판단으로 마음이 분열된 마르타는 급기야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만다. 그래서 예수님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요구한다. 결국 자기 안에 훈습된 기억들이 마르타에게 이런 요구를 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우리도 일상에서 이와 유사한 상황을 자주 만나지 않는가.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만나면 우리의 잠재의식, 곧 기억들이 작동한다. 자신에게 훈습된 온갖 인식과 가치, 판단, 편견들은 어떤 대상을 만나면 반응을 일으킨다. 그렇게 우리 안에 축적되어온 인식들은 ‘종자’의 형태로 남아 있고, 이는 계속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정보들과 결합하여 새로운 종자를 형성한다.
외부의 대상이 자신의 인식체계를 만나 형성된 주관적 인식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허망한지 영성생활을 해본 이는 알 것이다. 어떻게 이 연쇄적인 인식작용을 멈출 수 있을까?
마르타를 괴롭힌 것은 마리아가 아니라 그녀의 주관적 의식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대상 자체가 나를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를 번뇌 망상에 빠트리는 것은 다름 아닌 ‘주관적 인식’이다. 나의 주관적 인식이 분별적 사유를 낳고, 그것이 나를 번뇌 망상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좋다 싫다, 더럽다 깨끗하다라는 이원론적 사유는 결국 마음에서 만들어진 관념일 뿐이다. 보통 장미는 아름답고 쓰레기는 더럽다고 느끼지만, 결국 장미가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 기도해야 할 상대는 바로 이러한 주관적 인식에 빠져있는 우리 자신이다. 나의 문제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자각이 일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나 수행은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상대와의 관계를 통해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라.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 안에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예수님은 주관적 인식에 빠져 번민에 쌓인 마르타에게 충고하신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그 한 가지는 무엇일까?
아견(我見)에 휩싸여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신의 주관적 인식체계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올리는 길뿐이다. 내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께 마음의 지향을 두는 길뿐이다.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 올릴 때 분별적 사유에서 자유로워져 ‘순수직관’에로 나아갈 수 있다. 순수직관이란 바로 내 신성의 지혜이다. 그것이 작동할 때 우리 마음은 자아로부터 ‘신성, 곧 사랑’에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불교에서는 ‘지향성을 제거하라’고 가르친다. 즉 자기의 주관적 인식이 지향하는 바를 끊어버리라는 것이다. 즉, 자신의 ‘기억’을 정화시키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수행이다. 일본의 도겐선사는 「현성공안(現成公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자기를 싣고 만법을 닦는 것은 ‘미혹’이며, 만법이 권하여 자기를 닦는 것은 ‘깨달음’이다. 미혹을 크게 깨닫는 것이 부처이며, 깨달음에 크게 미혹한 것은 중생이다.” 자기의 주관적 인식에 의해 만법을 판단하는 것은 미혹이며 만법에 의해 자신을 닦아가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는 또 말하기를 “불도(佛道)를 닦는 것은 자기를 닦는 것이요, 자기를 닦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라 한다. 자기를 잊은 마음 상태, 그것이 바로 보리심(菩提心)이다.
3. 본래성, 본래면목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열심이었던 첫마음은 사라지고 시들해지는 자신을 볼 때가 있다. 그 시들함이 더해지면 더 이상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고 무미건조한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때론 더이상 노력할 마음마저 사라져 수행생활이나 기도생활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받기도 한다. 첫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그것이 쉽지 않다. 그때 우리는 그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며 많은 일을 하기도 하고 여기 저기 다니며 기도나 명상 방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러나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자신의 기도 동기이다.
그동안 자신의 영적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서 기도해오진 않았는가, 마음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남과의 관계회복을 위해서 등, 나를 위한 동기들이 대부분은 아니었나? 어떤 목적을 이루기위한 기도, 무엇을 얻기 위한 기도 등,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기도는 그것이 채워지든지, 아니면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으면 더 이상 기도하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물론 청원기도도 기도의 일부다. 그러나 보다 진정한 기도는 내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자각함이 필요하다.
어떻게 아무런 목적도 없는 행위, 곧 기도가 가능할까? 이는 먼저 자신의 본래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즉, 우리 마음 안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음을 깨닫는 데에서 시작된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우리의 본래성은 부족한 것이 없다. 본래성 안에 모든 것이 있기에 달리 무엇을 청할 필요가 없다. 그 본래성이 바로 우리의‘신성(神性)’, 곧 ‘사랑’이다. 수행이나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본래성’에 대한 참된 이해이다. 하느님이 우리 마음에 모든 것을 갖추어주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잘 믿으려 하지 않는데 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결핍된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밖으로부터 끊임없이 부족을 채우려 한다. 특히 현대인에게 이는 큰 유혹으로 다가온다. 정보의 홍수시대를 사는 요즘,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자연히 갈망이 커지고 결핍감도 커진다. 소족(少足)할 줄 모른다. 그래서 더 불안해하고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리 소유해 봐도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소유하면 할수록 더더욱 공허감이 커질 따름이다. 이 공허감을 극복하려면 부족함이 없다는 마음, 이미 나는 갖출 것을 다 갖추었음을 ‘믿는’ 것 아니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별로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내 존재 자체는 누구 못지않게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바로 그 ‘존재감’이야말로 나의 본래성에 대한 이해라 할 수 있다.
그 본래성에 대해 그리스도교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다고 가르친다. 이는 우리가 신성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있어온 바로 그 신성을 받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성’이다. 불가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있다.
불가에서는 만물의 본래면목을 ‘불성(佛性)’이라 한다. 즉 만물은 부처님의 성품을 지녔다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이 바로 이 만물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그리스도교에서의 본래성, 곧 신성과 불가에서의 본래면목에서 우린 상당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본래성에 대한 신심을 지니는 것은 우리가 기도나 수행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기도생활은 여기서 출발한다. 선수행의 출발 역시 ‘만물의 본래면목’을 믿는데에서 시작된다. 이를 믿는 마음이 바로 선심(禪心)이요, 초심이요, 보리심(菩提心)이다. 선수행에서는 보리심을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입보리행론」에 보면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보리심을 내는 것이고, 둘째는 그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 조동종의 스즈끼순류 선사는 「선심 초심」에서 “좌선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초심을 지키는 것”임을 강조한다. 초심자의 마음은 바로 ‘어린이’의 마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라고 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다. 즉 어린이의 마음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신뢰를 둔 마음이며 동시에 자신의 본래심, 곧 신성을 믿는 마음이다.
그런데 문제는 믿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우리는 자신의 신성을 믿는가? 내 본래성이 신성인데 나는 얼마나 번뇌망상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가? 수행이나 기도생활을 해본 사람은 이를 잘 안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을 지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신의 주관적 인식체계 속으로 빠져버림을……. 물속에 빠져버린 베드로처럼 말이다. 여기서 나올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베드로는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 14, 30)라고 소리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구해주셨다.
물속에서 나오기 위해 베드로가 한 일은 먼저 자신이 통제하려 하는 일을 그만둔 일이다. 대부분 우린 스스로 통제력을 발휘하려 한다. 그러나 우린 이미 수없이 경험하지 않았던가? 내가 누구를 컨트롤하려 해서 컨트롤되지 않음을……. 우린 실패의 경험을 통해 이를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끝까지 잡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남을 통제할 수 없을지라도 자기 자신만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끝까지 자신에 대한 통제의 주도권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자신에게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통제하는 마음을 놓아 버리고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자신이나 남을 컨트롤할 수 없음을 자각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주신다. 그리고 가르치신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바로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맡기는 일, 그것이라고…….
4. 기억을 정화하는 길
기도나 수행을 해본 사람은 기도실에서와 일상에서의 자신이 다름에 대해 어려움을 느낄 때가 많음을 알 것이다. 기도실 안에서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만나기 때문이다. 이 괴리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여 살아왔고 살아간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억은 좀처럼 쉬지 않고 내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휴가 가는 일도, 잠을 자는 일도 없다. 아니 꿈속에까지 파고 들어온다. 그 대부분의 기억들은 나의 주관적 인식에 의해 형성되어온 것들이다. 그 기억들이 일상 안에서 내가 만나는 대상이나 상황 속에 다시금 작동한다.
불가에서는 바다와 파도의 비유를 말하곤 한다. 바다에 늘 파도가 있듯이 우리 마음에도 물결이 일곤 한다. 물결이 생긴 마음이 나의 본래성인가? 아니다. 대상에 의해 좌우되는 마음이 본래성일 수 없다. 물결은 대개 대상으로 인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상 자체가 물결을 일으키는 건 아니다. 밖에 있는 것 자체가 물결을 일으킬 수는 없다. 다만 그 대상이 나의 인식체계를 자극하여 내 마음에 물결을 일으키는 것뿐이다.
우리 마음에 물결이 이는 것은 자기 주관에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기도는 마음의 방향을 자신으로부터 만법에로, 또 만법의 주인인 하느님께로 돌리는 행위이다. 그러기에 기도의 비결은 마음의 방향키를 끊임없이 자신에게서 하느님께로 되돌림에 있다. 아만(我慢)에 빠져있는 마음을 ‘반복’하여 하느님께로 돌릴 때, 조금씩 우리의 본래성이 드러나게 된다. 반복하여 기도하는 것, 다만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 실상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도겐선사는 “다만 오로지 앉아 있으라(只管打坐)”고 가르친다. 다만 오로지 좌선수행을 지속하는 그 자리가 ‘불성’이 드러나는 자리라고.
스즈끼순류 선사는 우리의 수행은 마치 밀가루 반죽을 오븐에 집어넣고 그것을 조심스레 주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밀가루 반죽이 어떻게 빵이 되는지를 알아낼 때까지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거듭 하느님께 돌리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자신을 오븐 속에 넣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게 반복하다보면 반죽이 부풀려져서 빵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지 않으셨던가?
앞서 이원론적 사유의 극복에 대해 언급했다.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이를 발견한다. 그분은 가라지와 밀이 함께 있음을 수용하시듯이 나의 안팎으로 선악이 공존함도 허락하신다. 세상 속에, 특히 내 안에 있는 선하지 못한 동기들을 어떻게 정화해 가야 하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지혜는 자비의 마음을 키우는데 있다. 즉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반복해서’ 자비의 눈으로 바라봄에 있다. 그 반복의 행위가 악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 있는 길이며 결국 선악의 이원론적 사유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이를 위해 자비로운 마음을 키우는 기도 방법을 스스로 습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남기신 말씀은 우리 자신을 정화시켜 가는데 얼마나 소중한 말인지 새록새록 깨닫게 된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말은 마음의 빗장을 열어 나의 본래심을 드러나게 한다. 동방정교회의 ‘예수의 기도’ 역시 같은 맥락의 기도방식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화살기도가 그것이다. ‘호오포노포노’라는 현대 하와이식 치료법에서는 “사랑합니다. 나를 용서하세요,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를 되풀이한다. 이러한 짧은 기도문이 나를 주관적 인식의 세계로부터 신성의 지혜로 끌어올리는 신비로운 정화수가 될 수 있다. 오늘도 이 정화수로 우리 자신을 다시 씻어보면 어떨까?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