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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생태위기와 생태영성으로의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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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0-11-10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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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생태위기와 생태영성으로의 회심
           
                                                                        최 현 민

1. 아시아 생태문제의 실상

칼 가스퍼 수사님은 아시아 생태문제의 실상 및 원인, 그리고 해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해주셨다. 무엇보다 생태 파괴가 가난한 자들의 삶에 얼마만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지 필리핀의 사례를 통해 말해주고 있다. 벌목으로 인한 산림파괴에 의해 고지대에서 추방되어 주거지를 잃고 실직된 토착민들, 벌목의 결과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홍수로 집을 잃고 교량파괴로 인해 농산물 운반이 막히면서 생계유지의 어려움을 느끼는 이들, 광산 채굴로 인해 광산업체에서 나온 화학물질로 강의 오염으로 인해 강의 어획량 감소로 피해를 보는 이들, 수천 헥타르의 농장에 농약 항공 살포로 인해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농촌의 빈민들의 이야기...
이와 같이 생태파괴가 가난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은 필리핀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의 가난한 지역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자행되는 4대강 사업으로 인한 생태파괴에서도 가장 피해를 받는 사람들은 강변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이다. 팔당호 부근 유기농업 단지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에게 4대강 사업은 그들의 삶의 터전을 와해시킬 만큼 치명적인 피해를 주고 있다. 얼마전 준공식을 마친 새만금사업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은 갯벌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어민들이었다. 갯벌에서 생계를 유지해온 그들에게 갯벌의 죽음은 곧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 그 자체였다.
그러나 정작 생태파괴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는 건 생태계이다. 속살이 파헤쳐진 강과 갯벌, 쓰레기더미로 오염되어가는 대지와 물 그리고 그 곳을 서식처로 삼고 살아가는 생명체들이다. 생태파괴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는 그들만큼 가난한 존재가 있을까? 4대강 사업으로  멸종의 위기에 놓인 생명체들....... ①귀이빨대칭이, ②꾸구리, ③남생이, ④단양쑥부쟁이, ⑤묵납자루, ⑥미호종개, ⑦수달, ⑧얼룩새코미꾸리, ⑨재두루미, ⑩표범장지뱀, ⑪흰목물떼새, ⑫흰수마자가 바로 그들이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는 이 생명체들이야말로 진정 가난한 존재이다. 가난한 존재의 의미를 인간만이 아니라 생태계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까지 확대하지 않으면 생태문제의 근원적 해결은 어렵지 않나 싶다.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식의 전환’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재정립없이는 생태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2.  생태파괴의 원인- 인간중심적 자연이해

가스퍼 수사님은 생태파괴의 원인을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온난화에서 찾는다. 지구온난화를 야기시키는 온실가스의 주범은 이산화탄소이다. 그 방출은 현대 산업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생태문제는 자본주의 경제와 밀착된 자본주의의 부산물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자연을 생산자본의 도구로 본다. 따라서 ‘도구화된 자연’은 경제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무차별적으로 파괴되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 자본경제논리의 뿌리에는 ‘인간중심주의’가 있다. 결국 자본경제시장의 논리 속에서 인간복지를 위해 무작위로 자연을 이용해오면서 그 결과로 생태위기를 만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4대강사업 정책의 저변에는 자본경제의 논리와 인간중심주의적 사유가 짙게 깔려있다. 보다 나은 인간복지(?)를 위해 자연은 아무렇게나 개발하고 파괴해도 된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생태파괴의 현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성찰을 해본다. 나는 동식물이나 자연을 나의 행복을 위한 도구적 존재로 생각하며 살아오진 않았는가? 나는 다른 피조물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며 살아가는가? 지금 파헤쳐져가는 4대강에서 신음하는 수많은 생명체들의 신음 소리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나의 무딘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중심적 사유와 그 안에 젖어 살아온 나의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3. 생태영성으로의 회심

1) 크리스찬으로서 자기 본래성 회복

가스퍼 수사님은 ‘왜 그리스도인이 기후변화에 관여해야 하나’는 질문과 함께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돌보도록 위임하셨다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생태파괴를 방치해온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이 견해에 공감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리라 본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흙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하느님 모상’이라고 말한다.(창세기 1,27, 2,7) 인간 아담(Āḏām)은 흙(adamah)으로부터 왔다. 생명의 근원이 4大(地水火風)으로 되어 있다고 보는 불교나 힌두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도 인간은 땅과 바다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가르친다. 에제키겔 예언자는 말한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에제 47, 9) 강의 유기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야 바다의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 있다. 생명의 근원지인 바다가 강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때 강이야말로 우리 생명의 근원지이며 모태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은 바다나 강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지닌 ‘생태계의 일원’이다. 생태파괴의 현실 앞에서 깊이 자각하고 성찰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실제로 생태계 일원이었던 인간은 언제부턴가 교만해져 자기 존재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음을....
성경에서는 말한다. ‘인간은 흙의 존재이고 생태계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의 소명’을 받은 존재라고.’ 창세기에 나오는 ‘지배하고 다스려라’(창 1, 28)의 본래 의미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세상 관리인로서의 소명을 말한다. 생태파괴의 현실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청지기로서의 소명’을 살아내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2) 청지기로서의 소명

생태적 회심은 우리의 영성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치우쳐 있지 않았는지를 성찰토록 촉구하고 있다. 만일 우리의 영성이 자연과의 관계가 배제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만 머물러 있다면 우린 ‘통합된 영성생활’을 하지 못한 것이다. 무차별하게 파괴되어가는 숲과 나무들의 울부짖음, 그리고 4대강의 눈물을 외면한 체 우린 영성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관계를 간과해버린 영성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영성과는 거리가 멀다. 생태위기의 현실은 현대 영성이 자연과 관계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하고 있다. 무엇보다 필요한 건 ‘자연과의 화해’이다. 요즘 신문지상에 실리는 4대강 사업과 관련된 생태칼럼을 읽다보면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은 ‘존재의 연대성’에 대한 자각이다. ‘강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 ‘생태적 감수성’을 회복해 나가는 영성, 그것이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가 가야 할 영성의 길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점에서 심층생태학자들이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극복의 일환으로 제시한 생태중심적 사유는 우리에게 생태적 감수성을 일깨우도록 도움을 준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을 평등하게 보는 생태중심적 존재이해는 생태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해 나가야 할 ‘주체문제’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우리는 생태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를 책임질 ‘주체’ 문제에 대해 숙고해 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자연을 파괴한 것도 인간이지만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존재 역시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청지기의 소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오늘날 청지기로서 산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지를...
성서가 우리에게 제시해준 청지기의 모델은 바로 예수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가난한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 기성세력으로부터 박해받는 사람,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임을 성경은 말해준다. 예수님이 제시한 하느님나라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정의 실현에서 시작하여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로 확산되는 데 있다. 이 현실에서는 예수님의 시선을 끈 가난한 존재들이  누구일까? 오늘날과 같은 이 생태적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떤 가르침을 주시고 실천하셨을까? 그분이 이 땅에 오셨다면 분명 4대강가에서 가르침을 펼치셨을 것이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하신 것처럼....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가난한 존재는 바로 무참히 파헤쳐지는 강과 그 곳에서 살다가 멸종되어가는 (하느님의 피조물인)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서 1장 15절에서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제자인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모상이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인 그 분의 일을 모방하는 자들이다.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의 허탈함과, 강의 아픔에, 죽어가는 생명체의 울부짖음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청지기로서 살도록 불리운 그리스도인의 몫인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본래성과 소명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인식의 전환만으로는 부족하다. 생태문제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을 생태적으로 만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4. 구체적인 실천

우리는 이미 생태위기에 대해 많이 들어왔고 그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도 갖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이에 대처하거나 행동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성찰과 자각이 있어도 ‘행동’이 쉽게 따라오지 않음을 우리는 경험하곤 한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가? 가스퍼 수사님도 자연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미약함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이유를 묻고 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구체적인 실천을 머뭇거리게 만드는가?

1) 인식과 행동의 괴리, 어디서 오는가?

 나는 이 문제를 4대강 사업과 2008년에 일어났던 촛불시위를 비교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 4개월이 채 못 되어 100일 동안 촛불집회가 일어났다. 2008년 5월부터 미국산 쇠고기 수입조건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는 한국 사회에 정치사회적 그리고 학문적으로도 커다란 충격과 과제를 남겼다. 이로 인해 이명박 대통령은 두 차례 대국민 사과를 해야만 했다.
그럼 무엇이 누가, 시민들을 광장으로 나가게 했을까? 놀라운 것은 이 집회가 어느 누구의 선동이나 이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자발성의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조사에 따르면 촛불집회 공감자의 51.4%가 정부추진정책이 반서민적이기 때문이라고 했고 38.2%는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바로 수입쇠고기가 자신의 먹거리, 가족의 식탁문제였다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4대강 사업은 많은 이들에게 ‘한 치 건너의 일’로 여겨진다. 즉 자신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또 우리의 발을 묶어두는 또 다른 요인은  “나 하나가 뭘?-헛수고는 안한다.”라는 심리이다. 많은 이들이 생태문제는 손대기에는 너무 엄청나게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일에 관여하는 것은 마치 ‘달걀로 바위 깨기’나 ‘바다에 돌 던지기’와 같다고 여긴다. “문제의 심각성은 알지만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래서 그 문제의 크기에 짓눌려 지레 겁먹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무기력함에 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스스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곤 하지 않나?
또 그 외에도 “굳이 내가 나서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는가” 라는 책임의 불분명성 때문에 방관자로서 대하려는 마음도 한 몫을 하지 않나 싶다. 길가다가 강도를 만나 살려달라고 소리지르는 사람을 보면 선뜻 나서서 구해주려 하기보다는 “내가 아니더라도 주변의 다른 사람이 하겠지, 굳이 나서서 그 일에 관여되고 싶지 않다. 그러기엔 나는 너무 바쁘고 할 일이 많다”는 변명을 늘어놓곤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선뜩 행동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만드는 요인들 속에는 인간중심적 사유보다 더 깊은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 사유가 숨어 있지 않나 싶다. 우리의 마음과 발목을 잡고 있는 자기중심의 사유를 내려놓지 못한다면, 이로부터 자유로와지지 않으면 생태문제는 계속 ‘너의 문제’로 남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너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임을 자각하고 끌어안을 때 비로소 우린 행동하게 된다.

2) 지구적 사유와 지역적 연대

 ‘지구적’으로 생각하되 ‘지역적’으로 연대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수사님의 견해에 동의한다. 수사님은 지구온난화와 관련하여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캠페인을 지역적으로 펼쳐나가야 함을 강조하신다. 환경단체에 동참하는 방법으로 숲을 보호하기 위한 캠페인, 벌목반대운동, 나무심기, 지구촌 불끄기 행사에 참여 등을 제안한 것이 그 좋은 예들이다.
지역적 연대의 필요성에 깊이 공감하면서 무엇보다 지금 이 땅에서 행해지고 있는 자연재해가 아닌 인공재해의 현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가슴아픈 것은 이 땅에 진실이 왜곡되고 언어가 그 본래의 생명을 잃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국민은 허위를 진실로 알고 생명을 잃어버린 빛바랜 언어를 참말인양 믿고 희망을 갖는다. 이렇듯 죽음의 길이 생명의 길로, 절망이 희망의 탈을 쓰고 국민을 희롱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죽임’을 ‘살림’이라고 선전하는 거짓 앞에서 무엇이 참 진실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과연 4대강 사업으로 잃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강바닥을 파헤치고 준설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를 알고 있는가?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은 그저 아름다운 풍경만이 아니라 무수한 생명들과 그 생태적 관계망들이 모두 끊어진다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는가? 우리 자신부터 진실을 알고 그 진실을 알리고 공유하기 위해서 연대할 필요가 있다. 가톨릭은 지금 주교단을 비롯하여 공식적으로 4대강사업에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생명평화미사와 행사 등에 적극 참여하고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지금 여기서’ 생태적 삶을 살고 실천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6월2일에 있을 지자체 선거 또한 생태적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뽑을 기회로 주어져 있다!

3) 이웃종교인들과의 연대

가스퍼 수사님은 그리스도교 뿐 아니라 아시아의 이웃종교들의 가르침 안에 있는 생태적 지혜에 대해서도 언급하신다. 모든 존재가 하나의 생명의 원천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토착민들의 신앙, 天地人 삼재(三才)가 기(氣)로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중국종교전통(유교나 도교),  그리고 만물 안에서 신의 내재를 느끼는 힌두교,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에 기초한 연기(緣起)적 진리를 통해 만물의 상호연관성을 가르치는 불교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세계영성의 보화를 지닌 아시아에서 사는 축복을 받은 우리는 아시아 영성이 지닌 생태적 지혜를 배우는 일 또한 생태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이 땅의 많은 종교인들이 4대강 사업을 통해 하나가 되었다! 4대강 가에서 생명평화미사로, 단식기도로, 오체투지로..... 각자가 믿는 교의의 차이를 넘어 각자 자신의 신앙 안에서 현 생태위기 극복을 위한 나름의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 이와 같이 종교인들이 오늘날의 생태위기 문제를 풀어갈 책임 있는 동반자로서 마음과 힘을 모으는 것이야말로 참된 의미의 종교적 유대와 화합이 아닌가 싶다. 진실을 알리려는 종교인들의 몸짓에 더 많은 이들이 연대해 나아가기를 희망해본다. ‘행동의 연대’에서 더 나아가 서로 안에서 생태적 영성을 배우려는 개방된 마음과 열정을 통해 ‘영성적 연대’도 함께 이루어지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