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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Postcorona) 시대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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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9.27 한국외방선교회 피정강의
포스트 코로나(Postcorona) 시대의 영성
1. 코로나 사태
벌써 코로나 사태를 접한 지 2년째에 접어든다. 코로나19 이전에도 흑사병, 스페인 독감, 사스나 메르스와 같은 감염병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코로나19처럼 인류를 한꺼번에 대혼란에 빠뜨리지는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은 사회 경제 정치 문화 할 것 없이 인류의 전 영역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에서 인류사에서 처음 일어난 사태인 건 분명하다. 어쩌다 현명한 인간이라는 호모사피엔스 종이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백신접종이 시작되면서 이제 곧 괜찮아지겠지 라는 희망을 가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변종 바이러스가 출몰했고 올 연말이면 끝나리라는 기대는 지나친 낙관이 되어 버렸다. 팬데믹 초기에 느낀 두려움은 이제 우울증을 넘어 분노로 바뀌어갔다. 코로나로 인한 우울증을 코로나블루라 이름 한다면, 분노의 감정은 코로나레드로 명명되고 있다 공동선 160, 36쪽.
이렇게 상황이 변해가면서 우리는 앞으로도 코로나 펜데믹과 공존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최근 나온 기사(9월27일)에서는 코로나 종식을 불가능하다고 보고 독감처럼 관리해야 한다고 보는 이가 국민 10명 중 9명이 된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는 이제 코로나와 공존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인 것 같다. 나도 2년째 학생들을 만나지 못하고 줌화상 수업을 하고 있다. 수업을 위해 이런 저런 컴퓨터 사용법을 배우고 익혀가면서 내 앞에 펼쳐진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숙고해본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우리 앞에 도래할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를 위해 먼저 코로나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리라.
1) 코로나사태의 발단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은 인간의 욕망을 무한대로 자극하는 자본주의라는 시장경제 시스템이 그 사태의 주요 원인이라고 본다.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면서 우리가 근원적으로 대적해야 할 대상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바이러스를 창출하게끔 만든 자본주의 체계 아니, 자본주의적 가치관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이미 신이 된지 오래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후에 대해 한 약속을 믿기보다 시장경제라는 신이 말하는 지상 천국을 지향한다. 곧 현대인에게 있어 천국은 내세에 있는 게 아니라 돈이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현재 여기’이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논리는 무한 생산을 통한 ‘성장과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무자비하게 아마존 숲을 파괴해버렸다. 햄버거용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목초를 기르겠다면서 숲을 파괴하더니 그것도 부족해서인지 이제는 그 속에 살던 야생 동물들까지 섭식하기 위해 끄집어내는 바람에 결국 그들과 함께 공존해온 바이러스의 역습을 받게 된 것이다. 케냐, 런던 파리에 가면 야생동물 레스토랑이 있다고 한다. 거기에 야생동물을 공급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가서 동물을 잡아온다고 한다.
무한생산에 대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소유하도록 부추기며 소유가 미덕이라고 말하는 자본주의체계 하에 자연생태가 파괴되고 생태파괴로 인한 기후변화로 인해 홍수 가뭄 산불 태풍 등이 연이어 발생하는 게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다.
이렇게 점점 생태위기의 위험순위가 높아만 가도 사람들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코로나’라는 화두를 던지셨다. 이제는 이 화두의 의미가 뭔지 깊이 숙고하지 않으면 안될 절박함을 느끼는 게 필요하다. 누군가 하겠지, 언젠가 끝나겠지, 나는 그저 이 사태가 빨리 지나가도록 기도하는 게 나의 소명이 아닌가 라는 소극적인 대응책으로는 더 이상 이 사태에 대처하기 어렵게 되었다.
생태학자들은 바이러스가 발생하는 창궐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예상한다. 3-5년마다 아니 1년마다 창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매년 새로운 화학백신을 개발해도 코로나 19처럼 많은 이가 죽고 경제사회가 무너진 후에야 그에 따른 백신을 개발하게 될 것이다. 백신이나 사회적 거리두기같은 방역대책이 답이 아니라면 근원적 치유책은 무엇일까?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종전과 같은 일상으로의 복귀가 어렵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상을 준비해야 하는가?
2. 생태적 회심 곧 우리의 의식체계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화학적 백신만으로 근본적으로 전염병 사태를 극복할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건 화이자와 같은 화학백신이 아니라 생태백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말한 생태백신은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건너오지 못하도록 숲으로 들어가 야생동물을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과의 거리두기를 하는 행동백신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백신, 곧 자연 친화적 삶에로의 전환이 아닐까. 이를 위해선 우리의 의식이 변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2015년 6월18일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하셨고 생태위기의 근원으로 기술만능주의와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하셨다. 그리고 실천가능한 행동지침들을 제시했으나, 사람들은 이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생태신학자들이 코로나19는 신앙의 위기이자 영적인 위기라고들 말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왜곡되이 바라보고 있음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자연을 자원으로만 여겨온 우리의 인식체계가 바로 이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체계 아래에 이분법적 사유가 자리하고 있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근대합리주의적 세계관은 정신/물질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은 뉴턴 이래 근대 자연과학에 영향을 주어 우주를 하나의 기계장치로 보는 기계론적 자연관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자연은 그저 인간이 활용할 자원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결국 자연과 나를 이원론(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사유야말로 생태파괴를 야기시킨 근원적인 원인이 되어왔던 것이다. 정신/물질,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을 주객 이원론적으로 보는 인식을 우리는 어떻게 전환할 수 있을까?
성경은 이미 우리가 자연의 일부임을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인간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는 창세기 2장 7절을 통해 우리가 흙에서 왔음을 알지만 그러나 이는 그저 머리로 알 뿐이다. 이 정도로는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이 가슴 깊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코로나가 우리에게 이 사실을 각인시켰다. 다시 말해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인류가 지구라는 한 생명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재인식하게 된 것이다.
영육이원론적 사고가 서구철학에서 왔다면 동양에서는 인간 존재를 자연과 불가분의 관계로 본다. 인도나 불교사상에서도 모든 물체를 사대(四大)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 바로 그것이다. 지(地)는 단단한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인체로 말하면 골격과 같은 부분, 수(水)는 혈액을 구성하는 것으로 물체가 하나로 뭉쳐지는 작용.화(火)는 열기(熱氣)로 체온과 같은 것이며, 이는 모든 물체를 성숙시키는 작용, 풍(風)은 움직이는 것으로, 사람의 운동과 생장은 이 풍의 힘으로 되는 것. 즉 풍은 생장하는 작용을 갖고 있다. 이 사대(四大)가 서로 연결되어 함께 일어난다.
또한 불교는 모든 삼라만상이 인연에 의해 생겨났다 사라진다고 본다. 이를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사상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존재이해 방식이야말로 우리가 자연의 일부임을 보다 설득력있게 설명하는 인식체계가 아닌가 싶다.
타인에게 우리 자신을 소개할 때 우리는 대개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의 일원임을 말한다.
나는 수업 때 학생들에게 자신을 소개해 보라고 하면 대개 학생들은 “나는 어느 학교 무슨과에 소속이고 나는 무슨 동아리를 하고 나는 우리 가족 중 몇 째이고” 등등.....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통해 자신을 소개한다. 이렇듯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관계적 존재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떠나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숨쉬며 들여마시는 산소는 자연에서 온 것이고 우리가 내품는 이산화탄소는 다시 식물이 흡수하여 광합성을 한다. 이렇듯 우리는 잠시도 자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이다.
러브록은 가이아이론에서 지구가 가이아(Gaia)라는 하나의 유기체라고 본다. 즉 모든 존재는 상호 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파괴한 생태파괴의 결과를 코로나를 통해 우리 자신이 되받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자연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의 상호 연관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존재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불교에서는 망상 중 망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불교가 명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깨달음의 세계는 바로 이 이분법적 사유로부터의 해방 해탈 자유라 할 수 있다. 그럼 그들이 말하는 깨달음의 세계에선 존재를 어떻게 보는가. 바로 불이(不二)의 관계로 본다.
“나는 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관계적 존재다. 너없는 나는 있을 수 없고 나없는 너도 있을 수 없다. 너와 나의 관계가 나를 알게 한다. 나는 관계로 존재한다. 관계가 파괴되면 나도 파괴된다.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나를 파괴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가 관계적 존재임을 비추며 내가 나이게 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그것에 굴복하여 관계를 단절한다면 나는 나로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1) 예수님의 생태적 감수성
예수님의 생태적 감수성을 어떠하셨을까? 그분께서는 공생활 시작 전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다. (마가 1.13) 이처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래 모습 그대로인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던 그분이 생각하신 하느님 나라는 본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습을 회복함에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실 때 늘 자연 가까이에 계셨다. 요단강, 갈릴리호수, 강가의 배 위에서, 아니면 산 위에서, 아니면 들판에서, 아니면 우물가에서 ...
무엇보다 예수님의 생태적 감수성은 그의 가르침에서 드러난다. 그분이 말씀하신 대부분은 자연이나 그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에서 온 이미지들이다.
예) 물고기, 알곡과 가라지, 포도밭, 겨자씨, 우물과 물 항아리, 추수할 밭, 들짐승, 까마귀, 염소, 양, 소, 말, 당나귀, 새, 여우, 사자, 백합, 벼 이삭, 벌레, 번개, 별, 샘, 생명, 생수 등 한 없이 생태적 배경과 자료와 소재가 넘쳐난다.
이렇듯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생태영성이 녹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상상을 해본다. 만일 예수님이 지금 살아계신다면 어떤 가르침을 펼치셨을까?라는. 분명 생태위기를 풀어갈 해법을 제시해주시지 않으셨을까? 우리가 예수의 제자들이라면 그분이 하시던 일을 계속 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흙에서 왔다는 사실 뿐 아니라 흙에서 난 것을 잘 관리하라는 소명을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 청지기로서의 소명이 바로 그것이다. (창 2 16)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을 다시금 의식하고 일깨울 필요가 있다. 이 코로나사태에 어떻게 사는 것이 청지기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길인가?
앞서 말한 의식화과정도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우리는 살면서 너무도 명백히 알고 있다.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면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 소명을 해 나가려면 우선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조금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상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구체적으로 안 쓰는 전기 스위치 끄기, 자기 전에 전기콘센트 꺼진 것 확인하기, 양치컵 사용하기, 분리수거하기, 택배 라벨 뗀 후에 종이 비닐 재활용하기. 종이를 버릴 때 호지키스를 떼고 버리기, 병을 버릴 때 라벨 떼기 등 이런 작은 일들을 실천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작은 실천들이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이 실천이 우리의 삶을,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킨다. 이렇듯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우리의 행동의 변화가 따르기 시작하면 그것이 나비효과를 불러 일으키리라. 곧 나의 변화는 더 나아가 너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또 너의 변화는 그 사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주변으로 번져가고 이렇게 이어가는 변화의 고리가 한 사회를, 나라를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3. 지금 여기 현재를 살기
--자본주의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회복--
앞서 자본주의적 가치관에서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의식전환 곧 이원론적 사유의 전환에 대해 성찰해보았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현재라는 시간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앞을 보고 달려가라고 암암리에 강요하고 있다.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마라톤 대회를 하듯 서로 경쟁하면서 앞 다투어 먼저 쟁취하기 위해 정신없이 앞만 보고 뛰어가다보니 정작 우리는 현재를 사는 것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라. 실제 시간이란 지금 여기뿐이지 않는가. 과거나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관념적 시간일 뿐 진정한 의미로 시간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미래지향적 삶을 살도록 자극함으로써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을 놓치게 만든다. 이렇게 현실을 놓치고 미래지향적으로 살다보니 우울이 찾아온다.
1) 비교의식
자본주의적 가치관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계속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자극한다. 이러한 경쟁심을 부추겨온 자본주의적 논리는 지기 싫어하는 한국인의 비교의식을 자극해왔고 그래서 우리나라를 기적같이 빨리 선진국 대열에 들게 만들었다. 이렇듯 나라는 이제 선진국에 들었을지 몰라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삶은 여전히 절망적이다. 한국인의 자살률이 10만명당 2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는 게 이를 반증해주지 않는가.
현대인들은 차 집, 돈과 같은 소유, 또는 학벌, 외모...권력. 자식, 직장에 대한 비교의식을 지닌 체 살아간다. 하이데거는 우리의 일상적 삶은 ‘잡담과 호기심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격차에 대한 우려에 사로잡혀 살아간다고 말한다. 자신이 타인보다 뒤떨어져 있다면 그 격차를 줄이려 하고, 타인이 자신을 바짝 쫓아오면 그 격차를 벌리려 하는 비교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비교의식은 남과의 비교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일어난다. 곧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것이다. 내가 과거에 이랬었는데...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혹은 남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변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교의식은 우리 안에 수많은 생각들을 야기시키며 우리 안에 정신적 무질서를 가져온다. 마르코 5 1절에 나오는 게라사인 지방의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의 일화는 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의 상태가 아닌가 싶다. 그의 이름이 군대이듯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망상은 마치 하나의 군대처럼 무리를 이루고 나타난다. 이러한 비교의식으로 과거와 그렇지 못한 현실의 나와 비교하게 되면 우울해진다.
2) 우울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생겨났듯이 요즘 많은 사람들이 우울해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우울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우울한 사람들은 지금 현실의 삶과 자신이 살고 싶은 또 다른 삶 곧 두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서 이전을 생각하면 지금이 우울할 수 밖에....
이렇듯 과거와 현재의 두 삶 사이에 갭이 크면 클수록 우울증세가 드러나게 된다. 그건 분명 우리마음 속에 현실의 삶과 또 다른 삶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또 다른 삶이란 내가 그리던 원하는 삶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곧 나는 이렇게 살고 싶은데 지금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 그 갭을 느끼면서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나”라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현재 진행되는 삶과 자신이 원하는 삶 사이의 차이가 커지면 커질수록 현재의 삶에 불만이 많아지게 되고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우울증세가 나타난다. 이렇듯 우리 마음은 잠시도 지금 여기에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를 시계추처럼 오고간다. 그래서 마음이 현재에 머물러 있지 못하다. 이와 같이 마음이 둘로 갈라지면 생각이 많아진다. 우리는 1초에 10만회, 아니 1조 개의 생각이 오고간다고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현실의 삶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삶도, 미래의 삶도 사실 지금 나의 삶이 아니다. 현실이 아닌 삶을 자꾸 생각하는 건 내 삶에 어떤 변화도 가져다 줄 수 없다. 우울함을 해결하려면 먼저 두 가지 삶을 살아가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자신이 지금 두 개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직시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 그것만이 코로나 블루와 함께 내 마음에 드리운 우울증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3) 지금 여기에 머물기 위해
이와 같이 현재에 머물지 못하는 우리 마음을 어떻게 현재에 머물게 할 수 있을까. 그러러면 우리의 시선을 밖에서 안으로 돌려야 하지 않나 싶다. 마음공부는 마음으로 마음 찾는 길이다. 걱정이 일어날 때 계속 걱정을 쫒아가면 영원히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걱정하는 마음을 돌아봐야 된다. 누구를 미워해서 미워하는 그 사람을 계속 쫒아가서 싸움을 하면 미운 사람에게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또 무엇이 싫어서 그것을 계속 버릴려고만 하면 그 싫은 것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밖을 향해 있는 시선을 안으로 돌리는 것을 불가에선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한다. 회광반조는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우리 안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마음공부라 한다. 우리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뭔가 집착하고 있는 게 보인다.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 마음공부다.
보통 불교에서는 화두로 하는 마음공부를 화두 참구(參究)라고 한다. 지금 우리 현실 속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화두는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참구할 것인가. ‘이뭐꼬’라는 화두가 있다. 이뭐꼬는 ‘이것이 무엇인가’의 경상도 사투리다.
“코로나 이게 무엇인가. 코로나를 두려워하는 이 마음이 무엇인가. 무서워하는 이 마음이 뭔가? 우울해진 이 마음이 무엇인가. 걱정하는 이 마음이 무엇인가. 비교하는 이 마음이 무엇인가. 무엇인가, 무엇인가.”
선사들은 이러한 화두참구를 일상사 안에서 해야 한다고 말한다. 밥 먹을 때도 ’무엇인가?’ 아주 은밀히 은밀히(綿綿) 또 이어지고 이어지게(密密) 다른 사람이 모르게 은밀히 은밀히.... 밥 먹으면서도 무엇인가?, 마음공부 하면서 먹는지 모르게 은밀히 은밀히 또 면면(綿綿)히 면면히 하는 것이다. 여기서 ‘면’자는 이어질 면자로 끊임없이~라는 의미다.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보면서도 밀밀히 면면히 ‘무엇인가?’를 참구하는 것이다. 마음공부를 하다보면 우리 안에 힘이 생긴다. 우릴 유혹하는 자본주의의 손길로부터, 그리고 자꾸 밖으로 시선이 가는 우리 마음을 안으로 돌리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