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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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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용서
가정이나 수도 공동체에서 우리가 맺은 인간관계를 틀어지게 만드는 게 무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분노’야말로 인간관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분노로 인해 부부나 부자관계, 형제나 동료관계에 금이 가고 때로는 더 이상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는 경우도 종종 본다. 몇 개월 전 한 기업가의 모녀가 직원들에게 폭언과 폭행으로 자신의 화를 표출해서 사회이슈가 된 바도 있지 않았던가.
우리는 화가 나면 그 원인이 상대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저 사람이 내게 이런 말, 이런 행동을 해서..” 화가 났다고 말이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에서 나는 화가 났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 차이가 뭘까? 그건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메커니즘이 각자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마티유 리카르는 분노를 ‘어떤 사람에 대한 적개심의 표출’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저 사람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이 미워지고 복수라도 하고픈 마음이 올라오게 된다. 처음 올라온 분노의 감정은 생각기차를 타고 계속 달리기 때문에 분노는 눈덩이마냥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이와 같이 분노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분노의 원인이 네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 있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분노에서 자유로워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정서의 저명한 학자인 폴에크먼은 “분노에 분노로 대응하지 않는 것은 굉장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대개 많은 이들은 과거의 그림자에 얽매여 살아간다. 화가 났던 과거사에 매여 지나간 것을 곱씹으면서 자기연민에 휩싸여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처럼 분노는 우리를 지금 여기에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많은 이들이 분노문제에서 걸려 넘어지는 건 언제 분노가 일어났는지 모를 정도로 화의 메커니즘이 너무 빨리 일어나 버리고 만다는 사실이다.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분노에너지가 올라와 말과 물리적 행동을 통해 화를 드러내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화를 낸 후에야 자신이 화를 낸 사실을 인지하곤 한다. 이는 화가 난 그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이 분노문제를 해결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어떻게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화를 알아차릴 수 있을까? 이것을 알아차리려면 지금 이 순간 내게 일어나는 것에 마음을 다하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그 수련방법 중 하나가 마음챙김(mindfulness)이다. 이는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에 마음을 집중하는 명상법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마음챙김은 어떻게 하는가?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 우선 자신의 숨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한다. 먼저 숨을 깊고 천천히 들이쉰 후 내쉰다. 1부터 10까지 세면서 이것을 반복한다. 어디서나 짧게라도 숨을 깊이 쉬는 연습을 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자각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는 연습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게 되면 내 안의 화도 조금씩 잠재울 수 있게 된다. 여기 마음챙김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화를 알아차리는지 그 예를 들어본다.
“중요한 약속을 했는데 교통 체증 때문에 약속시간에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럼 운전대를 잡고 있는 몸이 긴장되기 시작한다. 몸 어깨 턱 그리고 마침내 다른 차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나를 알아차린다. 내가 생각과 감정에 휩쓸려 버렸다는 걸 알아차리고 쥐고 있는 손의 힘을 풀고 마음챙김 호흡으로 숨을 몇 번 들이쉬고 내쉰 뒤 몸이 이완됨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교통 체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라고 자신에게 되뇐다. 그렇게 함으로써 긴장을 풀고 스트레스와 분노에서 자유로워진다.”
이처럼 마음챙김은 당신의 머리와 몸에서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것을 멈추어 관찰하는 명상이다. 격렬한 분노의 감정은 폭풍과 같아서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이 폭풍 같은 감정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심호흡을 통해 깨어있는 마음의 힘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알지 않은가? 분노라는 게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분노는 지나가는 것이고 감정일 뿐이다. 감정은 나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나는 감정 이상의 존재다. 나는 분노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존재이다.
몇 년 전 서강대에서 ‘수양과 명상’ 과목을 가르칠 때의 일이다. 이 과목은 불교 명상과 그리스도교의 기도방법들을 소개하고 함께 명상실습을 하는 시간이다. 그 해에 종교학과 석사과정에 있던 목사님 한 분이 내 과목을 청강하셨다. 무척 열심히 명상하시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날은 각자가 해온 명상에 대해 나누는 시간이었는데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오늘 저는 내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아이는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틱낫한 스님은 분노는 바로 내 안에서 울고 있는 아이와 같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그 아이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아이를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일이다. 이렇듯 내 안에 부정적 감정들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보듬어 안아주는 것이다. 어머니 같은 자애에너지로 말이다.
예수님께서 분노를 풀 수 있는 열쇄가 용서에 있다고 하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마 그분은 당대 사람들의 분노를 많이 샀기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 골몰하신 듯싶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주의 기도’에서 그분이 얼마나 용서를 강조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먼저 용서해야만 ‘분노의 기억’을 ‘화해의 기대’로 바꿀 수 있음을 일찌감치 자각하신 것 같다. 사실 용서는 너를 위함이기 전에 나 자신을 위함이다. 용서하거나 용서를 청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 말이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남북 간 냉전체제가 북미회담을 통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상대를 향한 분노와 적대의 감정을 내려놓고 화해와 대화의 물꼬를 텄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 말씀대로 우리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주변부터 화해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리라. 분노를 내려놓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 각자가 해야 할 몫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