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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엔카의 위빠사나 명상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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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일 수
전북 진안에 있는 담마코리아에서 진행된 고엔카 위빠사나명상 10일 코스에 참여하기 위해 오늘 수녀원을 나서다. 기차로 전주역까지 와서 거기서 진안으로 들어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담마코리아에 도착하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딸린 1인실을 배정받다. 무료로 제공되는데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놀라다.
간단한 저녁식사를 한 후 배정된 번호순서대로 명상실에서 고엔카선생의 간단한 가르침대로 아나빠나 명상을 하다. 내일부터 새벽 4시 기상이라고 하니 명상 후 바로 취침하다.
11/21일 목
아나빠나 명상 1일째
오늘도 어젯밤 배운대로 코구멍으로 공기가 들어가고 나감을 알아차리는 아나빠나 명상을 하다. 마음이 미래로 가면 이를 알아차리고 다시 코끝의 호흡으로 돌아오다. 마음이 계속 반란을 일으켜 이리저리 날뛰는 걸 체험하다. 이를 알아차리고 다시 고 끝에 의식을 집중하는 아나빠나 명상을 수없이 반복하다. ‘알아차림과 평정심으로 앉아 있으라’는 고엔카선생의 법문을 마음에 새기다....
11.22 금 2일째
오늘도 왼쪽 콧구멍, 오른쪽 콧구멍, 양쪽 콧구멍으로 들어가는 공기를 주의깊고 명료하게 그리고 인내롭게 알아차리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마음이 미친 방둥이마냥 쉴 새 없이 날뛰는지를 관찰하다. 호흡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산란함과 방황으로 마음은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다시 호흡을 알아차림으로 인해 조금씩 마음의 평정이 회복됨을 알아차리다.
호흡이라는 도구를 통해 실제를 직접 경험하다. 그 실체와 맞닥뜨리기 위해 건너가야 할 다리가 바로 호흡이다.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호흡을 알아차리고 나면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하는 호흡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호흡이 마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리다. 마음의 번뇌가 있으면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도 이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흡을 통해 현재에 마음을 두는 법을 배우다.
‘반응’하지 않고 ‘관찰’만 하게 되면 자유로워질 수 있음도 알아차리다. 반응하지 말고 관찰하기! 오늘 아침에 4시간, 점심에 4시간, 저녁에 1시간 30분, 도합 오늘 9시간 30분 앉아서 명상하다. 오늘 오후에는 코끝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알아차림을 놓치면 호흡을 세게 하라는 고엧카선생의 가르침대로 호흡을 세게 하니 다시 코 부위에서의 호흡을 알아차리게 되다. 그렇게 몇 분 호흡을 세게 한 다음 다시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하다.
오늘 배운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반응’이 아니라 그저 ‘관찰’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다가오더라도 반응하지 말고 관찰하는 것! 그것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되면 거기서 혐오나 갈망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저 관찰함으로써 평정심을 갖게 된다. 명상을 하며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반응을 하며 살아 왔는지를 돌아보게 되다. 오늘 새벽에 일어난 경험은 명상을 마치고 고엔카 선생님의 빨리어 경전 찬팅이 30분 가량으로 길어지자 뜻도 모르는 걸 들으며 앉아 있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싫은 감정이 올라왔고 결국 명상실을 나와버렸다. 그러면서 알아차린 것은 이것이 바로 반응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만일 내가 이것을 그 즉시 싫은 감정이 올라옴을 바로 알아차렸더라면 –내가 이해못하는 말을 듣기 어려워하는 것을- 그냥 앉아 있을 수 있었으리라.
11.23 토요일 셋째날
어젯밤부터 주의 집중 곧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 호흡이 아니라 코를 중심으로 한 삼각형 부위에서 일어나는 감각으로 바뀌었다. 가려움이나 냉기, 따뜻함, 축축함, 건조함, 따가움, 시린 등 그것이 어떤 감각이든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그저 관찰하고 그 외의 부분에서 일어나는 감각들은 무시한다. 이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실재와 맞닥뜨리다.
지금 내가 직면하는 실상은 다름 아닌 내가 느끼는 감각, 바로 그것이다. 그것에 반응하지 말고 그저 객관적으로 관찰하다. 나의 감각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갈망이나 혐오의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가려움이라는 감각을 느꼈을 때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관찰하다. 그렇게 한참을 관찰하다 보니 가려움이라는 감각이 사라졌다. 몇 번은 가려울 때 관찰하기 전에 바로 코를 만지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어떤 감각에 대해 상당히 빠르게 반응함을 알아차리다.
<코를 중심으로 한 삼각형 부위의 감각 알아차리기>
1. 윗 입술에서 코끝, 코끝에서 안쪽, 코 중간, 그리고 코와 만나는 이마 가운데 끝.
2. 이 부위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감각이든 알아차리다.
냉기, 따뜻함, 따스함, 가려움, 근질거림, 통증, 축축함
3. 만일 감각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는 다시 호흡을 알아차린다.
4. 호흡을 멈춘 뒤에 어떤 감각이 느껴지는지를 관찰한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다시 코부위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알아차리다가 다시 코주변의 감각을 알아차리다. 오늘도 가려움증을 여러 번 느꼈다. 코 주위뿐 아니라 코끝에서 가려움이 느껴질 때 그것을 관찰하니 사라졌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코끝이 아닌 얼굴의 다른 부위로 가자 어느새 손은 콧끝을 긁는 반응을 보였다. 관찰을 놓친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빠르게 반응을 보이는지를 깨닫게 되다.
1월 24일 넷째 날,
어제에 이어 오늘도 콧끝 삼각형 부위를 알아차림하다.
오늘도 간지러움과 가려움이 느껴졌고, 새로운 감각은 공기가 들어오면서 평정함을 느끼고 공기가 나가면서 수축감을 느꼈다. 코 끝에 모든 주의를 집중하는 이 명상법이 오늘로 4일째를 접어든다. 하루 9시간씩, 3일간 27시간, 그리고 오늘 오후 3시까지 같은 방식으로 명상했다. 과연 이러한 호흡과 감각의 알아차림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드디어 아나빠나 명상법에서 벗어나 위빠사나 명상을 배우다!
오후 3시 15분에서 5시까지 고엔카선생의 가르침을 통해 위빠사나 명상을 배우고, 그 이후부터는 위빠사나 명상을 하도록 지시받다. 이 명상법은 어떠한 이성이나 지성의 활동을 최소화하고 모든 의식을 오직 경험에만 집중하도록 만든다. 이 경험을 통해 실제를 있는 그대로 체험케 되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가르침을 통해 무상을실제 몸으로 경험하다.
....코끝에 공기가 들어가고 나감을 통해 코끝에서 느껴지는 감각, 가려움이 주로 많이 느껴졌는데, 때로는 손이 먼저 코에 가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가려움을 알아차리고 관찰함으로써 그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짐을 관찰할 수 있었다.
오후 1시 40분 드디어 알아차렸다!
30년간 불교를 연구하고 가르쳐 왔건만 그것은 그저 이성적인 행위였을 뿐이었다. 그것이 직접 삶에 적용될 수 없었던 것은 내 몸의 감각을 지성과 연결시켜 바라보고자 하는 알아차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감각적으로 반응하는 그 모든 행동의 근저에는 그동안 축적되어온 반응들 곧 상카라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시 말해 내가 유쾌한 감정이나 불쾌한 감정에도 마음이 끌리게 되고 애착이 일어나게 됨으로써 거기서 형성된 상카라에 의해 또 새로운 상카라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결국 종래에 형성된 상카라가 다시 새로운 상카라를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내 안에 계속 쌓이게 되는 상카라들....이러한 연쇄적 상카라 형성을 막으려면 갈망이나 혐오에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 반응하지 않고 그저 관찰하는 것만이 새로운 상카라를 형성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반응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만 하라!
11월 25일 월요일 5일째
어제 오후부터 시작된 위빠사나 수행! 이 명상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분 부분씩 나누어서 거기서 느껴지는 감각을 느끼는 행법이다. 순서는 두피 곧 머리 꼭대기에서 시작해서 두피 뒤쪽으로 부분 부분 (5-7cm정도) 나누어 감각을 알아차린다.
그 다음 이마에서부터 눈, 코, 입술, 얼굴 전체를 나누어서 알아차린 후 오른쪽 팔과 왼쪽 팔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손목, 손가락 하나하나에서까지 느껴지는 감각을 알아차리다.
다음 후에는 목에서 등 뒤판도 부분 부분 나누어서 그 곳의 감각을 알아차리고 다시 목에서 가슴 부위를 내려오면서 부분 부분 나누어서 감각을 알아차린다. 몸통 아래로 내려와 오른쪽 다리와 왼쪽 다리를 내려오되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는 1분간 머물렀다가 이동한다. 이 때 어떤 감각도 알아차려지지 않는 부위가 있다면 그냥 지나갔다가 다시 그 다음에 그 곳을 관찰 할 때 그 부위에서 1분간 머물러 본다. 이와 같이 감각을 알아차리기는 행법을 통해 무상(아닛짜)를 깊이 자각하고 평정심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어떠한 불쾌한 감각이나 유쾌한 감각이 일어나더라도 그저 그것을 알아차리고 관찰할 뿐이다. 모든 감각은 일어났다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무상 곧 아닛짜 아닛짜 아닛짜이다!
오늘부터 강한 결심인 아닛타나 명상을 하게 된다. 아닛타나는 1시간 동안 명상하면서 움직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하루에 3회 아침 8시에서 9시, 오후 2시에서 3시, 오후 6시에서 7시 명상 때 이 행법을 사용한다.
나에게 있어 30년 동안 배우고 가르쳐온 불교의 진리는 이렇게 위빠사나수행을 하면서 비로소 몸으로 경험되어지고 있다. 무상(아닛짜)를 지적으로 이해해 왔으나 그것은 그저 피상적인 이해였을 뿐이다. 이제 지적인 이해를 넘어 몸의 감각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해 아닛짜를 몸으로 체득하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관찰함으로써 비로소 무상이 몸으로 체득되어가고 있다.
고타마 싯타르타께서 어떤 경로로 위빠사나 명상을 하셨는지,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한 부분도 놓침없이 세밀하고 고요하게 기민한 마음으로 관찰하는 과정을 통해 이제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들을 알아차리게 되다. 이렇듯 감각은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데, 문제는 그 감각에 집착하는 데 있다. 그렇게 집착하는 까닭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한 무지인가? 무상함에 대한 무지이다. 무상한 감각에 집착하여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이 곧 쌍카라인데 이 상카라로 인해 혐오와 갈망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오늘밤 고엥카 법문에서는 사성제에 대한 것과 오늘 할 수행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감각을 알아차리고, 다시 발끝에서 머리쪽으로 감각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양쪽으로 역동적으로 감각을 알아차리는 과정을 통해 보다 민감하고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러한 알아차림 과정 중에 계속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어떤 고통이 와도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그저 관찰할 뿐이다. 법문에서 ‘집착’에 관해 들었는데 법문이 끝나고 나서 잠시 휴식한 다음에 보니
어깨들 덮을 때 사용한 숄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매니저에게 내 숄이 사라짐을 알렸으나 지금은 불을 켤 수 없는 상태이니 명상이 끝난 후에 밝아지면 그때 찾으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명상 시간 동안 ‘숄이 어디 갔을까’ 생각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내가 지금 숄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다. 명상이 끝나고 불이 켜지고 나서 명상실을 둘러보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는데 신발을 신으려다보니 신발장 위에 내 숄이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작은 것에도 ‘내 것’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 마음을 발견하게 된 오늘이다.
11월 26일 화요일 6일째
...오늘 아침 일어나니 비가 오다. 아뿔사, 어젯밤에 빨래를 바깥에 널어놨는데....짜증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평정심을 갖고 이미 벌어진 일을 관찰하다, 거기서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반응을 보이면 그것이 내 안에 상카라로 축적된다는 배움이 마음에서 작동함을 알아차리다.
오늘 아침 명상 때에는 다리를 교정시키기 위해 묶는 줄이 사라짐을 발견하다. 명상실에 갔다가 다시 찾으러 방에 갔지만 없었다. 왜 자꾸 이런저런 것들을 잃어버리는지 나 자신에게 화가 남을 알아차리다. 모든 주머니를 다 뒤졌지만 없어서 그냥 명상실에 갔고, 명상 끝난 다음에 나와 보니 숄을 넣는 장에 그 줄이 있지 않은가. 아마 오늘 새벽 명상 후에 그곳에 잠시 둔 것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아닛짜 아닛짜 아닛짜 ... 새로운 상카라를 만들지 말자.
수행 과정 중에서 선생님과의 면담이 몇 번 이루어지는데, 오늘로 네 번째다. 첫 번째 면담에서는 호흡을 알아차리는지를 물으셨고, 3일째에는 코 주변의 삼각형에서 감각을 알아차려야 되는지를 물으셨다. 5일째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몸의 감각을 부분적으로 알아차려지는지, 그리고 아닛타나(강한 집중)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7일째에는 몸을 대칭적으로 알아차리고 있는지, 평정심을 이루고 있는지를 물으셨다. 이에 대해 나는 몸의 감각을 알아차림하다가 평정심이 일어났을 때 그 상태에 머물러 있어도 되는지를 질문했더니 그것은 위파나사 수행이 아니라고 지적하셨다. 그러면서 위빠사나 수행은 계속 이동하면서 몸의 감각의 감각과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안내해주셨다.
몸의 감각을 통해 무상함을 알아차리고 그 감각으로 평정심을 이루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도 해 주셨다. 고엔카 선생은 몸의 좌우 대칭을 덩어리로 알아차리고, 놓친 부분은 개별적으로 알아차리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러면서 그것이 거친 감각이든, 미세한 감각이든 그것의 무상함을 자각하고 그 안에서 평정심을 가지도록 지도받았다. 신체 안에서의 모든 감각의 알아차림을 계발하고, 그 감각에 대한 평정심을 유지함으로써 내 몸의 상카라들은 미세한 진동으로 용해된다. 그러기에 곧 불쾌하든 유쾌하든 모든 감각에 대한 평정심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1시부터 50분간 명상 하면서 몸의 양쪽 대칭의 감각을 동시에 알아차리다. 몸통 전체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알아차린 후 다시 발끝에서 머리쪽으로 알아차리다. 이 과정에서 놓친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다시 알아차리다. 이렇게 덩어리로 그리고 부분 부분으로 몸의 감각을 놓치는 부분 없이 알아차리되, 평정심을 갖고 끊임없이 의식을 이동해가면서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 명상에서 어느 한 곳에 의식을 머물지 않고 계속 이동하면서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평정심을 갖고 감각을 알아차림으로써 쌍카라가 힘을 잃게 하기 위함이다.
어떤 감각이든 거기에 반응하지 않으면 쌍카라는 사라진다. 불순물을 제거하는 금속 정화 과정처럼 순수한 알아차림의 링을 통과하면 막대기 끝에서 불순물이 빠져나오게 하는 자석과 같다. 이처럼 순수한 알아차림의 링을 신체에 통과시킴으로써 불순물을 녹여내도록 하는 것이다.
감각을 알아차리는 과정이 다름 아닌 마음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 곧 상카라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마음의 쌍카라가 사라져야 더 이상 갈망과 혐오에 대해 반응하지 않게 된다. 아니 관찰하는 힘을 키움으로써 반응을 멈추는 것이다.
오후 2시 30분에서 3시 30분 명상시에 감각을 알아차림하다가 오른쪽 다리의 감각을 알아차리면서 어릴 때에 입었던 화상이 떠오르다. 그 사건으로 인해 몸에 숨어 있을 분노의 쌍카라,
그 분노의 상카라가 용해되기를...
오후 3시 45분에서 4시 40분, 오른쪽 다리에 피부이식 수술로 인해 감각이 사라진 부위를 알아차리다. 그 때 지녔던 분노의 상카라가 이후에도 내 삶의 자리에서 계속 남아 있었음을 알아차리다. 가슴에 묻어둔 분노의 쌍카라의 무상함을 관찰하라. 더 이상 사람들에 대한 분노의 쌍카라를 불러일으키지 않기를!
현재는 과거의 쌍카라에 의해 결정된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현재에서 우리는 자신이 주인이 될 수 있다. 어떻게 주인이 될 수 있는가? 감각에 대한 평정심과 알아차림을 통해서 가능하다.
1월 28일 목요일 8일째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가. 가려움을 느끼는 것은 내가 가려움을 느끼는 것이고 고통도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나라는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까. 어떻게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무상은 느껴지나, 무아는 아직 잘 느껴지지 않는다.
감각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게 도대체 어떤 것일까. 어떻게 해야 감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무의식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는 콤플렉스, 이것이 모두 마음 표면에 떠올려 사라질 때
위에서 열거한 것들이 위빠사나 명상을 하면서 내가 갖게 된 의문들이다. 육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의식하게 되다. 의식과 지각이 있을 때 감각이 느껴진다. 마음에 뭔가 일어날 때 신체적 감각이 동반된다. 그러므로 감각을 보는 것은 마음을 보는 것이다. 감각이 느껴지지 못한다면 마음을 느낄 수가 없다.
오전 9시 15분에서 10시 10분, 한꺼번에 통과시키고 나서 부분부분 다시 알아차린다. 이 과정을 통해 무의식 내부에 숨겨져 있는 쌍카라들이 의식 표면 밖으로 올라오다.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리는 과정을 통해 몸 세포 구석구석에 잠재되어 있는 쌍카라들이 올라옴을 느끼다.
이것들을 평정심을 갖고 바라보며 그것들이 힘을 잃게 됨을 알아차리다. 평정심을 개발하는 데 있다는 중요하다라는 고엔카 선생의 가르침에 깊이 공감하다.
평정심이 있을 때 무의식에 있던 쌍카라들이 올라오게 되고, 그것들이 힘을 잃게 된다. 공동체 생활에서 부정적인 쌍카라로 마음에 남아 있는 자매들이 떠올랐다.
그 상카라들을 평정심으로 대하다. 그 감각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혐오라는 새로운 상카라를 만들지 않는다. 상카라는 정신적인 반응이기에 이것이 의식의 흐름에 힘을 가져다준다. 즉 쌍카라에 의해서 의식이 흘러가는 것이다. 쌍카라가 없으면 의식은 흘러가지 않고, 평정심만 남게 된다.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숨어 있는 쌍카라들이 올라와서 방가되는 것이다.
12시 5분 <선생님과 면담 시에 얻는 것들 >.
1. 무아에 대한 질문-무상에 대해 계속 수행하게 되면 자아의 실체 없음을 자각하게 된다.
2. 미세한 감각에 대한 질문— 계속 관찰하다보면 손바닥 등에서 미세한 진동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미세한 진동이 일어나기를 갈망해서는 안 됨을 충고하시다.
3. 알아차림과 쌍카라와의 관계? 계속 기민하게 알아차리면서 평정심을 갖게 되면 상카라의 용해가 이루어진다.
<오후 명상 시작시에 고엔카 선생의 가르침>
몸 전체를 통과시켜 훑어 내리면서 감각을 알아차려. 그리고 나서 다시 부분 부분에 대한 감각의 알아차림을 근면하게, 꾸준히, 지속적인 평정심을 갖고.... 계속하라. 오늘 오후에 미세한 진동이 팔에서 느껴지다. 몸 전체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발끝에서 머리까지 몇 번 훑고 난 뒤에 다시 양쪽 팔의 감각을 알아차릴 때 미세한 진동을 느끼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어떻게 쌍카라가 용해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저 평정심에 머물러 있다. 중요한 것은 갈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상카라가 용해되기를 갈망하고 이를 없애려는 갈망을 일으키면 또 다시 새로운 상카라를 만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위빠사나 명상을 하면서 무념 무상의 상태를 지향하는 선불교와 위빠사나가 만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다.
11월 29일 금요일 9일째
오늘 드디어 손바닥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고, 그 진동이 팔에서도 그리고 올라가면서도 계속 느껴졌다. 그리고 팔에서 목, 얼굴을 지나 머리에서 뒤쪽으로 내려오면서 아래쪽으로도 느껴졌다. 발끝까지 간 뒤에 몸 앞쪽으로 다시 올라와서도 진동을 느끼다. 양쪽 발에서부터 위까지 목에서 다시 팔로 내려갔다가 팔 안쪽을 지나 팔 안쪽에서 허리 옆선을 타고 아래로,
바깥쪽 다리에서 발끝으로, 발끝에서 오른 다리 안쪽으로 쭉 올라와 다시 왼쪽 다리 안쪽으로 내려가서 발바닥을 지나 다시 왼쪽 옆선을 타고 위로 쭉 올라오자 엉덩이를 지나 왼쪽 옆구리를 타고 왼쪽 팔 아래, 다시 바깥쪽으로 목에서 뒷머리 쪽으로 올라가다 이렇게 온몸을 통과하면서 미세한 진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리다.
왜 고엔카선생이 위빠사나 코스에 10일이 필요한지를 오늘 명상을 하면서 알아차리게 되다. 어제까지 느낄 수 없었던 미세한 감각이 오늘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제까지는 거친 감각을 알아차리는데 머물렀다면 오늘은 미세한 감각들이 알아차려졌다.
이 새벽에 모든 몸의 구석구석까지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막힘없이 계속 앞뒤 양옆 구석구석 미세한 진동을 알아차림하면서 평정심을 갖다. 고엥카 선생님께서 왜 이 10일 코스가 최소한의 과정이라고 하셨는지 이해되는 오늘 새벽이다.
미세한 진동을 느끼기를 갈망했으나 그 갈망을 내려놓은 체 알아차림을 계속 하다보니 미세한 진동이 조금씩 손바닥에서 느껴지면서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쉼없이 통과하며 미세한 진동을 알아차리는 이 과정이 신기하기도 했고, 이 예민한 알아차림을 통해 내 몸의 감각을 구석구석까지 알아차림한다는 것이 남의 체험이 아니라 나의 체험으로 다가왔다. 이제 이 체험을 바탕으로 알아차림과 평정심에 바탕한 위빠사나 수행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제부터 어제까지 눈이 내리다. 새벽과 아침까지 멀리 보이는 산자락의 설경이 그야말로 장관이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눈이 녹아 다시 그 전 모습이 되다. 오늘 아침식사 후 잠시 산책할 때에도 누군가 만들어 놓은 눈사람이 녹아서 머리 부분이 없어지고 몸통만 남아 있음을 발견하다. 이렇게 눈녹듯 모든 게 그렇게 사라져 간다.
이 적막하고 모든 것이 고요하고 고요한 아침, 내 몸의 구석구석까지 알아차림하면서 몸이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다. 오늘 위빠사나 수행의 마지막 날이다. 열심히 고요하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오늘 하루를 보낼 것을 다짐해 본다.
9시 15분에서 10시까지 고엥카 선생님의 법문 중에 나온 ‘세 가지 알아차림’
첫째 거친 알아차림만 있고 미세한 알아차림은 없는 상태이고
두 번째는 거칠고 미세한 알아차림이 섞인 상태
세 번째는 미세한 알아차림이다.
명상시에 어떤 종류의 알아차림이든 결국 무상을 체득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따라서 미세한 알아차림이 낫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고 또 못 느꼈다고 불쾌할 것도 아니다. 유쾌한 감각이든 불쾌한 감각이든 올라오면 그것은 상카라를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어떠한 알아차림이든 평정심으로 대하라. 이렇게 알아차림을 통해 거친 감각이든 불쾌한 감각이든 그것을 평정심을 바라보라. 그러면 그것이 용해된다. 이것이 방가이다. 이것은 미세한 감각을 통해 쌍카라가 용해되어짐을 의미한다. 어떠한 감각이든 그 감각과 함께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오는 상카라를 흘려버려라. 이렇게 감각과 함께 쌍카라가 용해되면 깨끗한 마음 상태가 이루어질 수 있다.
거친 감각은 빠르게 일어나 사라지고 미세한 감각은 미세한 진동으로 용해되어진다. 이와 같이 의식의 상카라가 올라오면서 이것을 평정심으로 관찰하면 잇따라 사라진다. 거칠고 불쾌한 감각은 혐오의 상카라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미세하고 유쾌한 감각은 갈망의 상카라를 제거하는 도구로 삼고 계속 평정심을 유지하면 새로운 쌍카라가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오후 3시 45분에서 4시 45분, 몸 전체를 통으로 몇 번 훑어 내린 후에 통증을 느끼는 부위를
알아차리다. 목 뒤에서 어깨 쪽으로 뻐근한 느낌이 있고 그의 감각이 팔을 타고 무겁게 느껴졌는데, 아마 어깨 쪽에서 긴장된 것이 팔 쪽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한참 그 부위의 감각을 알아차리다가 다시 통증이 있는 오른쪽 무릎의 감각을 알아차리면서 그 곳의 상카라가 빠져나오기를, 왼쪽 무릎 역시 같은 방법으로 알아차림하다.
1월 30일 10일째
새벽 4시 40분부터 한 명상에서 근막의 감각을 알아차리다. 모든 근육을 둘러싸고 있는 근막에 혐오와 갈망의 에너지가 있음을 느끼다. 그래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의 근막을 알아차리며 명상하다. 머리 전두엽 측두염, 후두엽을 지나 이마, 눈썹, 눈, 코, 귀, 입, 목, 어깨를 둘러싸고 있는 근막들 양쪽 팔을 내려오면서 근막을 알아차리자 척추를 타고 내려오고 척추 양쪽의 근육, 허리, 오른쪽 다리, 왼쪽 다리로....
12월 1일 11일째
아침 3시 50분 기상 4시 30분에서 6시30분까지 위빠사나 명상에 이어 고엥카 선생의 마지막 법문을 들었고 이어 메타(자비) 명상이 있었다. 고엥카 선생님은 법문을 통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이 수행을 이어갈지를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하루 2시간 아침 저녁으로 위빠사나를 수행하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나 밤에 잘 때 아닛짜를 5분 동안 실천한다. 6시 30분 이후에 아침 식사 가 있었고, 이어서 명상실 청소와 방청소를 마친 뒤 8시 20분에 카풀해 주신 분 덕분으로 무사히 전주역까지 왔다. 차 안에서 표가 있어서 예매할 수 있었다.
함께 동행한 선생님과 함께 전주역 근처 망고찻집에 가서 커피를 마신 후, 차를 타고 올라오다. 10일간의 수행은 20년간 서강대에서 가르쳐온 불교 명상법을 함축적으로 경험케 해주었다. 놀라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을 통해 몸에 박힌 혐오와 갈망의 쌍카라를 어떻게 용해시키게 되는지를 경험케 해준 위빠사나 명상법! 그 과정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고 이를 통해 쌍카라들이 용해되어 감을 몸으로 체험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이제 일상에 돌아가서도 평정심을 갖고 계속 감각을 알아차림하기로 마음먹다.
....살아있다는 것, 생명을 갖고 살아간다는 건 감각을 통해서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의식을 지녔다. 그 의식은 감각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이를 무시하거나 간과하여 살아왔던가. 이 연결된 상태를 깊이 이해하는 게 의식을 가진 인간이 해야 할 일이다. 감각과 의식의 연결성에 대한 자각! 나는 위빠사나 명상을 배우며 이를 깨달았다.
왜 유발 하라리가 감각을 배제한 체 이루어지는 의식활동, 곧 상상을 통해 이루어진 모든 지적 활동이 허상이라고 주장했는지 이해된다. 내가 쓴 글이 감각을 배제한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역시 살아있는 글이라 하기 어렵겠구나 싶다. 살아있는 글은 감각에서 나와 타인의 감각을 건드리고 그것과 연결되는 글이 아닐까.
오늘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을 듣다. 그녀는 자신이 소설을 쓸 때 감각적인 언어를 많이 사용한다고 말한다... 춥다 덥다 따뜻하다 등의 오감의 언어.. 그녀의 글이 왜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그녀가 느낀 고통이 그녀가 쓴 글을 읽는 독자에게 가서 공감대를 불러 일으키는 건 그녀가 오감으로 느낀 것들이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