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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도 여정과 수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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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5-12-1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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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도 여정과 수행 이야기
       

                                                                                                                              최현민 (사랑의 씨튼수녀회,씨튼연구원 원장)

1. 수도 여정의 시작

나는 모태신앙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스스로 신앙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았기에,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일요일 미사에 겨우 참석하는 정도의 얄팍한 신앙인이었다. 사실 그 무렵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나서려는데, 주임신부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셔서 대학생이냐고 물으셨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갑자기 나를 교리교사실로 데려가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소개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얼떨결에 자기소개를 했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모임의 일원이 되어 버렸다. 물론 억지로 시작했기에 중간에 그만둘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나는 내 신앙을 진지하게 알아보고 결정하자는 마음이 있었다.
2년 동안 교리교사를 한 뒤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면서 본당을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새 본당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어 다시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두 번째 본당에서 함께 지낸 교사 중 두 분은 신학교에, 한 분은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렇게 가까운 이들이 사제와 수도 성소를 선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왜 이들은 세상에서 벗어나 성소의 삶을 택하는 것일까?”라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내 안에 생겨났다. 본당 수녀님이 소개해 주신 성소 피정에도 참여해 보았지만 그때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대학을 졸업한 뒤 생명에 관해 심도깊은 연구를 하고자 대학원에 진학했다. 2년 동안 생화학 실험실에서 거의 지내다시피 하며 공부했지만,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깊은 고민이 시작되었다.
미래를 식별하고자 피정에 참여했고, 그 안에서 ‘과학의 세계만으로는 인생이라는 숲 전체를 다 볼 수 없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지인을 통해 사랑의 씨튼 수녀회 성소 피정을 소개받아 참여하게 되었고, 그 경험을 계기로 수도원 입회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광주에 있는 사랑의 씨튼 수녀회 본원을 방문했을 때, 약 스무 명의 수녀님들이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마치 한 가족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에서 나는 ‘코모레비(木漏れ日)’—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은은한 햇빛 같은—작은 빛을 만났던 것 같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 등장하는 그 조용한 햇살처럼, 잔잔하지만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그런 빛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빛은 주님께서 내게 보여주신 작은 상징이 아니었을까. 수도원을 떠나오는 길에, 마음속에서 새로운 길에 대한 갈망이 조금씩 자라나는 것을 느꼈고 결국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회를 결심했다.
수도생활을 시작한 뒤 가장 큰 도전은 공동체 생활이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동체 생활의 어려움은 수련기뿐 아니라 이후의 수도생활에서도 이어졌다. 공동체 구성원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는 일은 매번 큰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는 그분 사랑의 파스카 빛이 내 삶을 비추고 변모시키는 은총을 체험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내 삶 안으로 들어오셨기에, 나 또한 나의 삶 전체로 그 신비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으로 나를 당신 수난에 신비롭게 결합시켜 주신다. 고통·고난·낙담·두려움 같은 내 삶의 그림자를 주님께 봉헌할 때, 나는 주님 고난의 신비에 참여함을 느끼며 오늘도 이 수도 여정을 감사한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2. 이웃 종교와의 만남

수련기를 마친 뒤 강진 성요셉여고에서 과학 교사로 2년간 근무하던 중 수도회에서 종교교사 자격증을 취득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에 따라 1년간 서울대에서 종교학을 공부해 자격증을 취득했고, 다시 성요셉여고로 내려가 과학과 종교를 함께 가르쳤다. 그렇게 1년을 보냈을 무렵, 수도회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토착화를 위해 종교 간 대화를 새로운 사도직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장상께서는 나에게 종교학 전공을 권했고, 나는 그해 서강대 종교학 석‧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불교에 깊이 매료되었다. 이는 지도교수였던 고(故) 길희성 교수님의 영향도 컸지만, 친할머니의 종교적 감성이 내 안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셨지만, 아버지의 말씀으로는 출가를 고민하실 정도로 불교 신심이 깊으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할머니 기일이면 아버지께서 우리 가족을 데리고 사찰에 가시던 기억이 오래 남아 있다.
서강대에서 처음 만난 불교는 일본불교였다. 불교사로 보면 가장 후대에 등장한 전통이었으니, 나는 마치 뒤에서부터 불교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 셈이었다. 기독교 신자이면서 불교를 전공했던 길희성 교수님은 대학원 첫 학기에 일본 중세 가마쿠라 시대(1185–1333)의 정토진종 창시자 신란(親鸞, 1173–1262)을 강의하셨다. 교수님은 사도 바오로 사상과 유사한 점에 매료되어 일본에서 신란을 연구하고 돌아오신 직후였기에, 그의 사상을 열정적으로 가르치셨다. 신란의 글에서는 자신의 죄악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드러나는데, 이는 놀라울 정도로 사도 바오로의 고백과 닮아 있었다.

“정토진종에 귀의했건만
진실한 마음은 얻기 어렵고
허가부실한 나에게는 청정한 마음이 없구나.
겉으로는 현명하고 선한 척 보이지만
탐욕과 노여움과 거짓이 많아
간사함이 가득하다….”
        『正像末 和讚』, 『全集』Ⅱ, 527쪽.

신란의 이 고백은 다음과 같은 사도 바오로의 말과 깊게 공명한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7, 15-16, 18-19)

신란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번뇌로 가득한 범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고, 오직 아미타불의 자비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고백했다. 이는 죽음의 육체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고백하는 바오로의 신앙과 맥을 같이 한다(로마 7, 25 참조).
나는 신란을 공부하며, 불교 안에도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신앙적 인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수도생활 안에서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던 내게, 신란의 실존적 고백은 큰 울림을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만일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만으로 구원이 결정된다면—즉 악이 구원의 장애가 되지 않는다면—‘왜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 신란의 가르침만으로는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 그리고 수도자로 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3. 도겐선사와의 만남

석사논문에서는 교토학파의 선불교 학자인 히사마쓰 신이치(久松眞一)의 그리스도교 비판을 다루었다. 히사마쓰는 그리스도교가 신을 인간 외부의 대상적 존재로 파악함으로써 근본적 이원성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보았고, 예수를 유일한 계시의 근거로 삼는 점을 들어 그리스도교의 한계를 지적했다. 나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그리스도교 측의 응답을 살펴보고자 임마누엘 신학을 발전시킨 타키자와 가쓰미(瀧澤克己)의 사상을 비교 연구했다.
박사과정에서도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종교대화를 이끌어온 교토학파를 깊이 있게 연구하기 위해 일본 나고야의 난잔(南山)대학에서 2년간 연구원으로 지냈다. 그 곳에서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 1900~1990)를 비롯한 교토학파를 연구한지 1년이 지나갈 무렵, 나는 그들의 종교철학적·인식론적 방법론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의 논의가 신앙인의 삶과 직접 연결되지 못한 채, 철학적 개념의 유희에 머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 C. Smith)는 신앙을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초월을 향해 역동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 성향으로 보았다. 나 역시 신앙을 단순히 초월을 인식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초월의 세계에 전존재를 열고 그것을 몸으로 살아내는 삶이라고 이해했다. 이런 관점을 가진 나에게 교토학파의 논의는 현실과 동떨어진,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느낌을 주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난잔대학의 쓰치다(土田) 교수님을 통해 도겐 선사(道元禪師, 1200–1253)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읽으며 나는 그의 신앙과 깨달음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도겐은 스미스가 말한 종교의 ‘물상화(物象化)’를 철저히 넘어서는, 온 존재를 열어 초월과 만나는 삶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도겐의 독특한 불성(佛性) 해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불성은 『대반열반경』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닌다—는 구절에 기반하며, 이는 ‘내 안에 불성이 내재한다’는 의미의 불성내재론적 이해로 이어진다. 나 역시 도겐을 만나기 전까지 이러한 해석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도겐은 이를 ‘일체는 중생이요 실유는 불성’이라고 해석하는 게 아닌가? 아니, 불성이 내재된 게 아니라 삼라만상의 존재가 곧 불성 그 자체라니? 이 놀라운 독법은 나로 하여금 도겐의 불성론과 ‘수증관(修證觀)’—수행과 깨달음의 역학적 관계—에 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이를 중심으로 박사논문을 쓰게 되었다.
도겐이 살던 가마쿠라 시대에는 천태본각사상(天台本覺思想)이 널리 퍼져 ‘본래 부처’라는 관념이 과도하게 강조되다 보니, 수행을 소홀히 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이미 부처라면 굳이 수행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수행무용론(修行無用論)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도겐은 깊은 의문을 품었는데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은 내게 시사해주는 바가 컸다. 이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면 도덕적 삶과 수도적 삶의 동기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나의 질문과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도겐은 수행을 깨달음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는 ‘수증불이(修證不二)’를 깨달았다. 도겐은 송나라에서 만난 연로한 전좌승(典座僧)에게서 기존의 수행관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일상의 모든 행위가 곧 불도(佛道)라는 통찰이 그것이다. 즉 깨달음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됨을 그때 깨달은 것이다.
나아가 도겐은 수증 관계를 ‘본증묘수(本證妙修)’로 보았다. 이는 ‘흠 없는 옥을 더욱 갈아 빛을 내듯이(皓玉無瑕 琢磨增輝), 이미 주어진 깨달음(本證) 위에서 더욱 빛나는 수행(妙修)을 이어간다’는 의미이다. 깨달음은 목표지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삶 속에서 현전하는 사건이라는 도겐의 관점은 나의 수도 여정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모토가 되었다.
그리고 도겐에게서 배운 또 한 가지는 그가 철저히 붓다를 모방하려 했다는 점이다. 『정법안장』을 통해 그는 붓다의 법과 붓다의 길에 함께 참여하여 살고자 했다. 나는 도겐과의 만남을 통해 내가 예수의 제자라는 정체성을 다시금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생명까지 내어준 예수를 따르고자 수도의 길에 들어선 나는, 시간과 종교의 경계를 넘어 도겐 선사를 통해 자신의 소명을 새롭게 확인한 셈이었다. 종교의 틀을 뛰어넘는 만남 속에서 스미스가 말한 역동적 신앙의 세계, 그리고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만나는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4. 나와 종교대화

박사과정을 마친 후 나는 서강대에서 불교와 명상 관련 과목을 강의하며, 김승혜 수녀님과 함께 씨튼연구원에서 종교대화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김승혜 수녀님이 원장으로 활동하시고 나는 간사로서 종교대화 활동을 해왔다. 이후 김 수녀님이 수녀회 총장으로 미국에 가시면서 내가 연구원을 맡아 지금까지 종교대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씨튼연구원의 주요 활동은 종교대화 모임, 종교강좌, 그리고 영성 관련 서적 출판이었다. 그중 핵심은 ‘종교인 모임’으로, 1993년부터 30여 년간 이어져 오고 있다. 이 모임은 가톨릭·개신교·유교·불교·원불교 등 5대 종단에 속한 대학 교수들로 구성되며, 연 4회 세미나를 개최했다. 그중 한 번은 각 종단의 종교시설을 방문하여 1박 세미나를 열었다.
초기 10년 동안은 주로 ‘교의적 차원’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이를 통해 서로의 종교를 깊이 이해하고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각자의 종교적 입장이 분명했기에 때로는 대화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한계를 통해 서로의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는 아름다움이 피어났다. 이 초기 10년의 논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화』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중앙승가대학에서 10주년 기념 심포지엄도 열렸다.
교의적 대화의 10년을 지나며 우리는 현대 사회의 구체적 문제들을 함께 나누고자 했다. 그래서 2004년부터 10여 년간 ‘생태문제’를 주제로 종교대화를 이어갔다. 이 연구 역시 정리되어 『생태문제, 종교인들이 답하다』로 출판되었으며,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하나뿐인 지구–생태문제와 종교간 대화」라는 주제로 20주년 심포지엄을 열었다. 2015년부터는 생태문제에 이어 ‘종교와 현대과학’을 주제로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종교대화는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교의적 차원의 종교대화를 통해 이웃 종교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생태문제를 중심으로 한 대화는 현대 인류가 직면한 기후위기와 생태적 위기를 성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얻은 지혜가 내 삶을 얼마나 더 넓고 깊게 변화시켰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다. 생태문제를 10년간 논의했지만, 내 삶은 과연 얼마나 생태적으로 변했는가? 여전히 지적 이해와 실제 삶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갈수록, 이 간극을 줄이기 위해서는 구체적 실천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됨을 절감하게 된다.
예전에 무소유 공동체 ‘야마기시(산안 마을)’에서 40년을 살아온 김현주 선생님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운동권 학생에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신념과 각오가 있으면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인 줄 착각하며 지내왔다. 그 시간이 너무 길었다. 신념과 지금 자신의 상태는 별개의 문제다.... 신념에 차서 말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그의 삶이 그가 말한 것과 많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념과 실제 삶의 괴리를 좁히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에게는 명상이 그 해답을 비추어 주었다. 명상은 지금의 나 자신을 더 빨리 알아차리도록(sati, mindfulness) 이끌기 때문이다.
나는 고엔카의 위빠사나 명상, 도겐 선사의 지관타좌 명상, 그리고 종교인 모임에 함께하신 미산 스님이 개발한 ‘하트 스마일 명상(Heart-Smile Training: HST)’을 배워왔다. 이러한 불교 명상의 지관법(止觀法)은 나의 기도생활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는 그리스도교의 관상기도 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본래심 수련’을 연구·기획하고 있다.
앞으로도 명상을 통해 ‘지금-여기’에 깨어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처럼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코모레비’를 발견하며, 삶의 소소한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은 것이 나의 소박한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