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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영성에서 본 인간의 본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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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영성에서 본 인간의 본래심
-교종 프란치스코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를 중심으로-
최현민 (사랑의 씨튼수녀회, 씨튼연구원 원장)
서론
교종 프란치스코는 마지막 회칙에서 ‘인류는 마음을 폄하해 온 매우 긴 역사를 지녀왔다’는 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합리주의, 그 이후의 관념주의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물질주의가 바로 그것이다.(회칙 10항) 본 논문에 나오는 항목들은 회칙 『Dilexit Nos』의 항목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서구의 주류 철학 전통은 마음보다는 이성이나 의지, 자유와 같은 다른 개념들을 선호해 왔다. 그것은 아마 통제가 가능한 지성과 의지의 영역에서 사고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가 낳은 전쟁, 탐욕, 소비주의, 인간 소외 등의 문제들로 인해 우리는 이성과 자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윤리적· 사회적 병폐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현대 사회의 문제들은 인간의 회복, 곧 '마음'에 대해 성찰이 필요함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은 ‘분명하고 명확한 생각’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주관적 영역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온전히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바로 이러한 점이 신학적으로도 마음을 깊이 다루어 오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철학과 신학에서 배제되었던 마음의 문제를 교종 프란치스코는 마지막 회칙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Dilexit Nos)』에서 주목하고 있다.
1. 인간의 본래심
교종은 회칙에서 현대를 ‘마음을 잃어버린 시대’로 진단한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알고리즘의 지배를 받으며 주체성을 상실한 체 살아간다. 그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장 논리 속에서 현대인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점점 피폐해져가고 있으며, 개인주의가 야기한 파편화 과정에서 영적 공허함과 관계 단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이 마음을 상실한 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교종께서는 마음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보다 절실함을 역설한다. 필자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당신의 마지막 회칙에서 마음을 ‘온전한 우리 본연의 모습’이라고 본 사실에 주목한다(5항). 같은 책, 14쪽.
여기서 잠시 멈추어서 물어보자. “지금 내 마음을 나의 온전한 본연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선 ‘온전하다’는 표현이 낯설게 다가온다. 오히려 예레미야 예언자의 다음 말이 우리의 마음을 더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할 가망이 없는데 누가 그 마음을 알 수 있을까”(예레 17,9) 예레미야 뿐만 아니라 사도 바오로도 ‘자신이 선을 행하기보다 해서는 안 되는 악을 행하고 있다’(로마 7장 18-20 참조)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죄로 얼룩진 마음과 본래 온전한 마음 간의 간극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교종은 먼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도록 초대한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나는 나의 삶과 행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가? 나는 왜, 어떤 목적으로 존재하는가? 생의 마지막에 나는 삶을 어떻게 회상하고 싶은가? ... 다른 이들을 위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하느님에게 나는 누구인가?“(8항) 같은 책, 16쪽.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러한 물음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인격의 중심부로 돌리도록 이끈다. 그 중심에는 ‘인간은 사랑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실존적 진리가 놓여 있다. 바로 그 인간 실존의 근원지에 대해 창세기는 이렇게 서술한다. 가톨릭에서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이 모상은 인간의 영혼, 특히 이성적 사고 능력, 자유의지, 도덕적 판단력 안에 드러난다고 본다. 즉 은총 상태와 타락 이후의 상태를 구분하여 원죄 이전에는 하느님의 모상이 온전했고, 원죄 이후에도 모상은 손상되었지만 파괴되지는 않았다고 보아 (아우구스티누스 사상 영향) 자연적 인간 능력에 은총의 도움을 강조함으로써 구원을 통해 하느님의 모상 회복 가능하다고 본다. 이에 반해 개신교 (특히 루터, 칼뱅 등 개혁 전통)에서는 기본적으로 원죄로 인해 하느님의 모상은 완전히 파괴되었거나 심각히 손상되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모상이 회복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특히 칼뱅주의)에서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은총에 의한 회복에 중점을 둔다. 모상은 단순히 이성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에 살아갈 때 드러난다고 본다. 이에 반해 동방정교회에서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εἰκών)으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의 **형상(ὁμοίωσις)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본다. 그래서 모상은 인간 안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며, 형상은 성화 과정을 통해 실현되어 간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 존재 전체가 하느님의 모상 (육체와 영혼 모두 포함)이며 인간이 은총으로 하느님과 참여적 일치에 이를 수 있다는 신비주의적 강조한다. 이것을 신화(神化, theosis)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기 1장 26-27).
이렇듯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습(Imago Dei)으로 창조하셨다’고 묘사한다. 그런가 하면 창세기 2장 7절에서는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전한다. 윗 귀절에 나오는 ‘생명의 숨’ 곧 ‘생기(生氣)’는 하느님이 흙(땅)에서 비롯된 인간의 몸에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준 바로 그 숨을 말한다. 성서학자들은 이 때의 ‘숨’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불어넣어 준 ‘생명’뿐만 아니라 ‘영(רוּחַ,ruach)’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창조 때 하느님으로부터 ‘영’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영적으로) 깊이 연결된 존재임을 뜻한다.
이와 같이 창세기에서 인간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영을 부여받음으로써 하느님과 근원적으로 연결된 존재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영을 느낄 수 있는 ‘하느님의 마음’이 인간의 본래성 안에 깊이 새겨져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맥락에서 신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의 마음’을 통해 인간의 본래성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2. 성경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마음
2.1 구약성경에서의 하느님의 마음
구약성경에는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한 이들의 산 증언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이는 성경이철학적, 형이상학인 텍스트가 아니라 역사 속 인간의 생생한 삶을 담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 마음 문제에 접근할 때 로고스(logos)적 접근이 아닌, 미토스(mythos)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성으로 무장한 현대인들은 미토스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 ‘신화(神話)’로 번역되지만 본래 미토스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감정과 정신 그리고 영혼을 훈련시키는 이야기다. 우주 창조와 인간 창조, 영웅 이야기들은 모두 미토스이며 인간이 주어진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이런 점에서 미토스는 예술을 창작하기 위한 창의성과 같은 것이다. 조각가는 정과 망치를 들고 대리석 조각을 하나씩 덜어낼 때 자신의 창의성을 조금씩 드러내듯이 미토스를 통해 내면깊이에 있는 본래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미토스적 감각으로 그리스도교의 마음 문제를 접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분에게서 멀어져 하느님과의 계약이 깨질 위협에 놓였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그들을 지켜주셨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리라”(예레 30,22).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 관계를 통해 실패와 좌절 그리고 희망을 꿈꾸는 고난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하느님이 자신들의 삶에 깊이 개입해서 그들과 관계를 맺고 당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체험했다. 이것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내려주신 십계명에 잘 드러난다. 하느님은 십계명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공적으로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의 역사에 깊이 개입했음을 선포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이 자신들의 역사에 개입한 계약의 존재라는 뜻에서 하느님을 ‘헤세드(חֶסֶד, chesed 혹은 hesed)’ 곧 충실한 사랑의 성품을 지닌 분으로 여겨 왔다. 구약성경(특히 시편, 창세기, 룻기 등)에서 약 250번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헤세드는 충성된 사랑, 자비/긍휼(Mercy, Compassion), 언약적 사랑 (Covenantal Loyalty), 은혜로운 친절 (Loving-kindness) 등으로 해석된다. 본래 헤세드는 ‘구체적인 상호의무’를 뜻하는 말이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계약을 맺을 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그대에게 헤세드(호의)를 베푼 것처럼… 그렇게 대해 줄 것을 여기에서 하느님을 두고 나에게 맹세해 주시오”(창세 21,23)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서로의 의무를 지키는 의미였던 헤세드가 하느님의 충실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특히 시편 136편은 각 절 끝마다 “주님의 헤세드(자애)는 영원하시다”는 후렴구를 붙일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절절히 체험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힌 채 하느님의 신실한 사랑인 ‘헤세드’가 이스라엘 역사에 끊임없이 작용해 왔음을 증언했다. 그 중 호세아 예언서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마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1.1 호세아 예언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마음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사랑- ‘헤세드(hesed)’-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곳이 호세아 예언서이다. 기원전 8세기 후반,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호세아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통해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호세아서 1-3장에는 호세아 예언자가 자신의 결혼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심오한 사랑을 어떻게 선포되었는지가 잘 드러나 있다. 하느님은 호세아에게 고멜을 아내로 맞아들이도록 명하신다(호세1,2). 호세야는 하느님의 영을 받들어 고멜과 결혼하지만 고멜은 남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고 배신과 부정을 했다. 호세아의 첫 아들의 이름인 ‘이즈르엘’은 예후(841-814년)가 정변을 일으켰을 때 반대파들을 학살했던 장소로, 호세아가 등장한 여로보암 2세 말엽부터 기원전 722년 북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전개될 음모와 살인으로 얼룩진 상황을 예시한다. ‘로-루하마’란 딸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더 이상 가엾이 여기지 않을 것임을 나타낸다. 둘째 아들의 이름인 ‘로-암미’는 창녀짓에 빠진 이스라엘을 더 이상 당신의 백성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선언적 뜻을 드러낸다.
이러한 고멜의 행위는 바알신앙에 빠져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실을 드러내주고 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와 계약을 맺었던 때를 상기시키면서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회개를 촉구했다.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호세11,8). 호세야 예언자는 아내에게 배신을 당하였으면서도 사랑 때문에 안타까워하는 (남편과도 같은) 분으로 하느님을 선포한다. 호세아는 배신한 고멜을 다시 받아들이라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 고멜을 다시 아내로 맞아들인다(3장).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호세 2,21). 자신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더 깊이 체험케 된 호세아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이스라엘 백성)을 끌어당겼다”(호세 11,4). 고멜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받아들인 호세아의 행동은 인간의 불충실에도 불구하고 조건 없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호세아 2:21).“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복받쳐 오른다”(호세 11.8).
이와 같이 호세아 예언서에 등장하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혼인 관계, 그리고 거기에서 드러나는 부정과 간음, 매음과 같은 표상들은 예레미야서(2,23-24; 3,1; 30,14; 31,22)뿐 아니라 에제키엘서(16장과 23장), 이사야서의 후반부(50,1; 54,4-7; 62,4-5)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신실한 사랑은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절정에 이른다.
2.2 신약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의 마음
구약성경이 이스라엘 백성과의 계약 속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드러냈다면,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준다. 예수는 탕자의 비유(루카 15:11–32),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5–37) 등 다양한 예화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그 사랑이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에 국한된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을 향해 열려 있음을 선포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당신들이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을 지니고 있었지만, 예수는 이 선민의식을 부수어 버리고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드러내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계약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열어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다름아닌 ‘예수의 십자가’다.
2.2.1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마음
그리스도인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행적과 말씀을 하느님께서 일하고 말씀하신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예수께서 당신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세상에 드러내셨다는 그분 말씀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그 믿음은 요한복음사가가 말한 예수와 하느님의 관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한 10.3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한 14.11, 17, 21).
예수의 행적 중에서 가장 극적인 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는 예수 당시 인간이 고안한 가장 잔인한 사형 도구의 형틀이었다. 그런 십자가가 어떻게 하느님 사랑의 절정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탈바꿈되었을까? 도로테 죌레 는 갈보리산 위에서 가장 취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며 '하느님의 일방적인 무장 해제'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필립 얀시 저 김성녀 역,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Ivp출판사,2021, 277쪽.
그의 말대로라면 왜 하느님은 당신을 무장 해제시켜 십자가상에 매달리셔야 했을까?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야말로 하느님의 지혜이고 힘(고린 1.27-28)’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그는 또 무슨 근거로 십자가의 약함이 하느님의 강함이고,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하느님의 지혜라고 말한 것일까?
모든 것의 본질은 그것과 대비되는 것을 통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빛은 어둠 속에서, 은총은 죄가 많은 곳에서, 일치는 분열 한가운데서 그 가치를 더 잘 뿜어냄이 그것이다. 사도 바오로가 십자가를 하느님의 지혜요 힘이라고 고백한 것은 하느님의 지혜와 권능과 굳건함이 세상의 어리석음과 약함과 비천함의 상징인 십자가를 통해 가장 밝게 드러났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으며”,(갈라 3,13) “우리의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어 스스로 죄인이 되시고, 또 우리의 죄의 상처를 당신 상처로 낫게 해 주셨습니다.”(1베드 2,24 참조)
이런 관점에서 ‘죄와 저주와 고통의 상징인 십자가가 ‘사랑’이라는 렌즈를 통해 비로소 그 참된 의미가 드러나는 구원의 표지가 된다.
사랑은 때로 어리석고 무모해 보이지만 그 어리석음 속에서 사랑의 진실이 드러난다. 그래서 오리게네스의 말처럼 “사랑은 고통”으로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의 십자가 고통과 어리석음과 약함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심으로써 십자가는 더 이상 죽음과 저주의 상징이 아니라 구원과 생명, 사랑의 표지가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십자가는 믿음 없는 자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지 몰라도, 믿는 이의 눈에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는 상징체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의 나무’라고 고백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나이 광야의 여정 속에서 나무에 매달린 불뱀을 봄으로써 치유되었다. 이처럼 믿는 이들은 인생이라는 길고 거친 광야를 지나면서, 타는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 나무’임을 자신들의 삶에서 경험해 온 것이다(탈출 15,22-25 참조).“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라며 의심의 목마름에 빠져들 때, 바위를 쳐 물이 솟아나게 한 마싸와 므리바의 나무지팡이(탈출 17,5-6 참조) 역시 십자가의 예형이었다고 가르쳐 준다.
고통으로부터 회피하는 한, 고통은 해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자신의 고통과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치유의 길이 열린다. 바로 이러한 생의 지혜는 십자가 신앙과 맞닿아 있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음을 삶을 통해 배워왔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그 절정인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교회 전례와 신심 안에서 ‘예수성심’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해 왔다. 그럼 프란치스코 교종의 마지막 회칙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Dilexit Nos)』을 통해, 예수 성심이 오늘날 어떤 의미와 사회적 메시지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3. 회칙 『Dilexit Nos』에 드러난 예수성심과 그 현대적 의미
3.1 『Dilexit Nos』에 드러난 예수 성심
앞서 인간의 본래심이 하느님의 모상성에서 비롯되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잠언 4장 23절에서는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본래심이 ‘생명의 원천’임을 상기시켜 준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회칙 『Dilexit Nos』 에서 현대 사회가 직면한 인간성 상실의 문제를 마음과 연관지어 성찰하면서 그 해법으로 ‘예수성심’을 제시한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 전해진 구원의 메시지가 예수 성심 안에 압축적으로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성심을 예수의 신적인 사랑과 인간적인 고통이 하나로 만나는상징으로 이해해왔다. 교종 프란치스코가 예수성심을 ‘복음의 육화된 종합’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러한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성심의 성서적 근거는 무엇인가?
요한 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신 뒤 그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로마 병사가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고 그때 생긴 창상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고 기록한다(요한 19, 34). 예수께서는 3일 만에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 징표로서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셨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 사가는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요한 19. 37)라고 덧붙힌다. 이는 즈가리야 예언자가 예루살렘에서 생명의 샘이 터질 것이고 사람들이 ‘자기가 찌른 이를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한 예언과 상응한다(즈가 12, 10 참조).
그 예언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고, 예수의 몸에서 흘러나온 물은 교회를 찾아온 목마른 영혼들이 마실 생명의 샘이 되었다. 예수께서 ‘목마른 자는 다 나에게 와서 마시라(요한 7,37)’고 하셨듯이 그리스도인은 그분에게서 생명수를 얻어 마시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묵시록 22.17, 요한 7 37-38 참조).
이렇듯 예수의 찔린 옆구리는 하느님께서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 백성에게 보여준 사랑의 원천이자 생명의 샘으로 이해되어왔다. 이와 같은 이유로 가톨릭교회는 예수의 가슴에 생겨난 상처를 그분 사랑의 표상, 곧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고 조건 없는 사랑의 징표로 이해해 왔다. 같은 책, 69쪽.
이러한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은 여러 성인들의 다양한 영적 체험을 통해 더욱 확산되어 갔다. 회칙 『Dilexit Nos)』 에는 성 아우구스티노, 성 베르나르도, 성 보나벤투라 그리고 샤를 드 푸코와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체험이 소개된다(103-142항). 또한 그리스도 성심 신심은 성인들의 영적 여정에서 다양한 색채로 드러났다. 예컨대,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마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마음을,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의 공로가 자신의 큰 재산을 포기한 사람의 공로보다 더 클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더 큰 사랑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기 때문입니다”(148항).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사랑의 신비를 과거의 유물이나 다른 시대의 영성으로 치부하곤 한다(149항). 교종은 “그리스 사상의 영향으로 신학이 육체와 감정을 경시해온 경향을 지적하면서 신학이 이론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을 영성과 대중 신심을 통해 보완해 왔다고 평가한다. 십자가의 길, 그리스도의 오상에 대한 신심, 그분의 보혈과 성심에 대한 신심, 다양한 성체 신심은 모두 그리스도의 육체적, 정신적, 역사적 실재와의 관계를 유지해 온 표현들이다.(63항) 바로 이 모든 신심 활동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온유한 사랑, 희망과 기억, 열망과 감정에 자양분을 공급하며 신학의 간극을 좁혀 갈 수 있게 했음을 상기시켜준 것이다(63항). O. González de Cardedal, La entraña del cristianismo, 살라만카, 2010, 70-71면.
예수 성심 신심은 종종 신학적인 기반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신자들의 신앙 감각’(sensus fidelium)은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는 통찰을 담고 있다. 그러한 신앙 감각은 그리스도의 수난이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한 사건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현재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신비로 드러나게 한다(154항).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교회가 각별히 하느님 자비를 고백하고 그 자비를 공경하는 모습을 보일 때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심을 향할 때입니다. 그리스도 성심의 신비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접근하는 이 길은 사람의 아들께서 수행하신 메시아적 사명의 중심을 이룬 계시의 핵심이 무엇인지 헤아리게 해 줍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 1980.11.30., 13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2(제4판), AAS 72(1980), 1219면.
그리스도 성심에 대한 신심은 수많은 남녀 수도회가 수행하는 복음화 활동과 교육 사업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를 모두 열거하기는 어렵지만, 그 가운데 “성심수녀회 창립자(다니엘 콤보니 성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성심에 대한 사랑으로 다그쳐진 우리는 복음에 기반하고 사랑, 용서, 정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의 연대라는 복음의 요청에 기반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인간 존엄성 안에서 성장하도록 하고자 합니다.” 성심수녀회, 「회헌」(1982년), 7면.
그렇다면 가톨릭 전통 안에서 전승되어 온 ‘예수성심’ 신심은 과연 복잡한 현대 위기 상황에서 어떤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을 바탕으로 회칙 『Dilexit Nos』 가 제시한 예수성심의 현대적 의미에 대해 짚어보기로 하자.
3.2. 예수성심의 현대적 의미
프란치스코 교종은 현대사회의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3억 명을 넘는 전 세계 우울증 환자들, 청년층 자살률의 상승, 우크라이나· 가자지구와 같은 분쟁 지역에서의 대규모 민간인 희생, 게다가 AI 챗봇, 자동화, 메타버스의 확산 속에 인간은 데이터에 갇히고, 감정은 소비 코드로 환원되어 감으로써 현대 기술의 탈인간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어 가고 있는 문제 등이 그것이다. 물질과 재화에 대한 탐욕과 참혹한 전쟁을 대하면서도 비정하고 무관심해진 세상에 대해 교종은 참담한 심정으로 ‘세계가 마음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탄식한다.
교종은 이러한 현상이 세상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사목자들에게도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복음과 상관없는 외부활동과 구조적 개혁 조직 개편 세속적 사업과 사고방식 등이 그것이다. 이에 교종은 교회가 지향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방향을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것’이라고 천명하며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성심에 담긴 사랑을 새롭게 성찰할 것을 촉구한다.
교종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에게 마음이 있는가’(23항).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단지 ‘심리적 감정’이 아니라, “모든 영적, 심적, 육체적 차원에서 사랑이 깃드는 자리”(21항) 곧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인간의 존재론적 중심이다. 우리는 어느새 이 본래심을 잊고 살아간다. 그래서 교종은 마음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 마음은 하느님 사랑에서 시작되어 타인에게로 흘러가는 사랑의 마음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교종은 인간의 존재론적·사회적 위기를 해결하는 길은 구조 개혁보다 먼저 사랑의 회복이라고 말하며, 이를 위한 치유의 길로 ‘예수 성심’을 제시한다. 기존 가톨릭 교회에서는 ‘예수성심’이라는 표상을 개인적 신심 곧 경배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은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마음에 대한 신심이지, 표상 자체에 대한 신심일 수는 없다. 표상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진정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마음과 하나되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이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이론이나 규범이 아닌,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 분과의 살아있는 관계란 ‘마음과 마음의 만남’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 가까이에 머물 때 우리는 자연스레 우리의 본래 마음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것은 예수성심이 바로 우리의 본래심임을 의미한다. 내게 숨을 불어 넣어준 하느님과 당신 아드님은 같은 마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성심을 통해 우리자신의 본래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종이 마지막 회칙을 통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의 핵심이다. 자기 본래성을 되찾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모상을 구현하는 일이자, 온전한 마음의 회복인 것이다.
4. 결론
본 논문에서는 마음의 원천인 ‘하느님의 마음’을 신구약 성경을 통해 살펴보았다. 구약에서는 ‘헤세드’라는 단어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충실한 사랑이 호세아 예언자의 삶 안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확인했으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그 사랑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음을 고찰했다.
가톨릭 교회는 예수 성심이라는 상징체계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사랑과 마음의 체험’임을 일깨워 준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Dilexit Nos』를 통해, 현대 위기인 인간성 회복에 대한 해결책으로 예수성심을 본받을 것을 제안했다. 이것은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이 오늘날 상처 입은 인간성과 단절된 공동체를 치유할 수 있는 영적 자원이자 소명으로 다시금 주목받기를 호소한 것이다.
성 헨리 뉴먼은 “마음이 마음에게 말한다”는 것을 자신의 모토로 삼았다고 한다(26항). 그의 말처럼 나 자신과 주님과의 가장 깊은 만남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기도의 마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함으로써 비롯됨을 교종은 역설한다. 우리도 마음의 저 깊은 심연으로부터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성모님께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듯이” 본래 마음자리에로의 회귀를 위한 시간을 지속적으로 갖기를 소망해 본다.
이 글을 마치면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의 수상 소감을 떠올려 본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그녀는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 속에서 글을 써왔으나, 자신의 글쓰기의 참된 동력은 따로 있었음을 추후에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나 자신의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심연에는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한강 작가의 고백처럼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고 그것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한강 작가의 고백과 ‘사랑과 생명이 움터 나오는 마음을 회복하라’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메시지는 서로 이어져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두 목소리의 공명 위에서,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빛과 사랑이 서로를 향해 이어져 있음을 기억한다. 그 사랑이 피어나는 마음, 그 마음을 회복하라는 교종 프란치스코의 마지막 당부를 마음에 새기며 글을 맺는다.
<참고문헌>
1. 교종 프란치스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Dilexit Nos)』, 한국천주교중앙 협의회, 2025.
2. 성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 한국천주교중 앙협의회, 2022(제4판).
3. O. González de Cardedal, La entraña del cristianismo(기독교의 심장부), 살라만 카, 2010.
4. 필립 얀시 저 김성녀 역,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Ivp출판사, 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