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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기 위한 망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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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6-01-01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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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기 위한 망설임

알릴레오에 『논어를 연찬하다』를 펴낸 이남곡 선생이 출연했다. 몇 년 전 씨튼연구원 종교강좌에서 강의를 들은 인연이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방송을 시청했다. 대담을 들으며 나는 공자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시각에 교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남곡 선생이 그려낸 공자는 완성된 답을 가진 성인이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쉽게 단정하지 않으며, 자주 망설였던 한 인간에 가까웠다. 그 모습은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소비해 온 ‘권위적인 공자’와는 사뭇 달랐다.

우리는 너무 쉽게 옳다고 말하고, 너무 빠르게 편을 나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으면서도, 그 말이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균열을 남길지에 대해서는 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이남곡 선생과 유시민 작가의 대담을 들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나는 과연 얼마나 자주 멈추어 생각해왔던가.

이남곡 선생에 따르면 공자가 말한 ‘인(仁)’과 ‘극기복례(克己復禮)’는 흔히 오해되듯 도덕적 완성이나 자기 억압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나를 조정하는 일에 가깝다. 분노가 앞설 때 한 박자 늦추는 것, 옳다는 확신이 들 때 그 확신을 한 번 더 의심해보는 태도 말이다. 극기란 욕망을 부정하는 금욕이 아니라, 욕망을 그대로 밀어붙이지 않는 성찰의 자세라는 해석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복례 또한 고정된 규범이나 형식의 준수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거리와 형식이다. 지금 이 관계에서 어떤 말이 적절한지, 어떤 침묵이 필요한지를 가늠하는 일에 가깝다.

이렇게 본다면 극기복례는 개인의 수양이라기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술이다. 말할 자유가 넓어진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말하지 않을 책임을 잊는다. 모든 의견이 즉각적으로 표출되는 시대일수록 말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관계는 쉽게 부서진다. 공자가 보여준 태도가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는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언제 말해야 하는지는 끝까지 고민했다.

군자와 소인에 대한 이남곡 선생의 해석도 인상 깊다. 군자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판단의 근거를 끊임없이 점검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소인은 악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이익과 감정에만 매몰된 상태를 가리킨다. 이 구분은 타인을 가르기 위한 잣대가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한 질문에 가깝다.

이 대담을 통해 나는 다시 묻게 되었다. 지금 이 말이 정말 필요한가, 이 판단은 관계를 감당할 수 있는가, 나는 충분히 망설였는가. 공자는 우리에게 답을 주기보다 함께 생각하자고 손짓한다. 그리고 그 망설임의 태도야말로, 오늘의 사회가 가장 잃어버린 윤리인지도 모른다.

옳음보다 관계를 먼저 떠올리는 일, 말보다 침묵의 무게를 재는 일. 어쩌면 그것이 지금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할 가장 오래된 지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