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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한스 큉 세계윤리구상 박태식신부(2024.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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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4-10-1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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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윤리구상(57-84)

                                                    박태식 신부(2024. 9.27)

1-5-나,다,라:

(나) ‘후기 근대’에 들어서면서 세계에 변화가 생기는데 이는 가치의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가치의 변화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⓵ 윤리적 책임을 배제하는 과학으로부터 인정하는 과학으로 ⓶ 인간을 지배하는 기술로부터 인간성에 기여 하는 기술공학으로 ⓷ 자연을 파괴하는 산업으로부터 자연과 일치하는 인간의 관심사와 욕구를 증진 시키는 산업으로 ⓸ 형식적인 민주주의로부터 자유와 정의를 통해 화해하는 생생한 민주주의로 이다.

(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단일이념을 제시한다던가 사회적 이상향을 노리는 새로운 전 지구적 계획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리려 근대가 지닌 곤경을 극복하여 미래를 위한 길, 즉 후기 근대의 길을 찾아보자는 데 있다. 이는 흔히 파괴된 후기 근대의 모습으로 여겨지는 극단적인 다원주의, 또는 상대주의에 따라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식의 윤리주의가 후기 근대의 특징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세계에 대한 획일적인 해석을 목표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라) ⓵ 우선 후기 근대는 반 근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계획적으로 계몽주의를 반대하고 교회의 복고를 요구하는 모든 반 근대적인 형태는 거부되어야 한다.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천명한 바 있는 가톨릭의 ‘유럽의 재 복음화’라는 교회 복고 계획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소비주의, 쾌락주의, 물질주의로서의 서방 민주주의를 고발하는 대신 자유, 다원주의, 관용의 가치를 긍정하는 자세가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든, 이슬람이든, 유대교든 퇴보적으로 억압하는 종교는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다.

⓶ 후기 근대는 초 근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성은 이성을 통해서 치료되지 않는다. 과학의 근본적인 결손과 기술의 침해는 단순히 더 많은 과학과 더 많은 기술을 통해 제거되지 않는다. 자연과학과 기술은 전통적인 윤리를 해체할 수 있으나 새로운 윤리의 창출과 근거를 제공할 수 없다.
⓷ 근대는 자신의 인간적인 내용 때문에 긍정되어야 하고 자신의 비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부정되어야 하며, 새롭고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다원적이고 전체적인 종합에 전이되어야 한다.

2: 무엇을 위한 윤리인가?: 오늘의 세상은 세계윤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윤리가 결손과 허약에 대한 수선 기술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부정의 대답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세계윤리에 대한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을 찾으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2-1-가,나: (가) 인간은 왜 악을 행해선 안 되는가? 인간은 왜 ‘선과 악의 피안’에 서 있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에 대한 의지”, 곧 성공, 재물, 안락만을 추구하는가? 이 물음 그대로 개인에게 주어진다. ⓵ 인간은 처벌받는 두려움이 없음에도 왜 거짓말을 해선 안 되며, ⓶ 아무런 윤리적 억압이 없는데도 왜 이윤 추구의 한계를 설정하며, ⓷ 왜 이론의 여지가 없는 태아의 제조기술을 개발하지 않고, ⓸ 왜 성 유전자를 조작하여 자식의 출산을 근원적으로 조정해선 안 되는가? 집단으로 질문을 옮기면 왜 엄청난 힘을 가진 종족이 다른 신앙이나 소수 외국인을 미워하거나 괴롭혀서는 안 되는가?

 (나) 인간은 왜 선을 행해야 하는가? 개인에게 주어지는 물음은, 인간은 ⓵ 왜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행동하는 대신 친절과 도움을 베풀어야 하며, ⓶ 왜 사업가나 은행가나 노조 담당자는 공동선을 위해 헌신해야 하며, ⓷ 왜 자연과학자, 의사, 연구원은 인간을 상업화와 상품화와 판매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 혹을 목표로 여겨야만 하는가? 질문을 집단으로 돌리면, 왜 한 민족은 다른 민족을, 한 종교는 다른 종교를 관용하고 존중해야 하는가? 왜 국가와 권력을 소유자는 전쟁 대신 평화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가? 어떤 계층, 종족, 집단에 속하든 말든,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사람은 절대적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2-2-가,나,다: 근본적 동의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

(가) 자유 민주 국가는 이제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중립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종교, 신앙, 철학, 이념을 용인해야 하는데 이런 용인은 인류 역사의 엄청난 진보를 의미하여 그 결과 세계 도처에서 요구되는 자유와 인권에 대한 갈망을 감지할 수 있다. 민주 국가가 자신의 중립성이 손상되지 않으려고 존중, 보호, 증진에 있어 어떤 유의 삶의 양식이나 의미를 명령해선 안 되고 어떠한 최고 가치나 최종 규범을 법칙으로 규정해선 안 된다. 다양한 세계관이 공생하는 다원적 사회는 기본적인 동의가 필요하다.

(나) 일정한 가치, 규범, 태도와 관련해 최소한의 기본적 동의를 배제하고서는 인간의 사회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공생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동의란 무엇일까? ⓵ 사회의 내적 평화를 위해서는 갈등을 폭력 아닌 대화로 해결하려는 의견의 일치가 전제되고, ⓶ 경제 질서와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경제 질서와 법을 준수하는 의견의 일치가 전제되고, ⓷ 앞의 제도들을 암시적으로 거듭 새롭게 동의하고자 하는 의지를 말한다.

그래서 이념적 대결 현장에서 터지는 테러의 반작용, 정치에서 마키아벨리즘, 상거래의 심리요법, 자유 방임주의가 당연시되는 현장에서 교화가 아니라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다) 근대 사회가 제대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선택된 개인의 속박에 대한 질문을 늘 던져야 한다. 2000년대를 위한 윤리적 목표설정은 무엇일까? 미래 전략을 위한 선전 표어는 과연 무엇일까? 미래 전력을 위한 핵심적인 개념은 이 지구를 위한 인간의 책임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유롭게 선택된 구속이다.

2-3-가,나,다,라,마: 미래의 구호-현세적 책임:

(가) 지향윤리는 정의, 사랑, 진리 등 고립적으로 이해되는 가치 이념을 지향하면서 오로지 행위자의 순수한 내적 동기만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 행위의 결과는 주된 관심 대상이 아니다. 그에 비해 책임윤리(막스 베버)는 우리의 행위가 가져올 결과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렇지만 지향윤리를 배제한 책임윤리는 결과를 위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결과윤리로 전락할 수 있으며, 책임윤리를 배제한 지향윤리는 자기 합리화의 관리윤리로 타락할 수 있다. 현재의 자유와 미래의 생존을 위해서는 인간의 자기 통제를 포함하는 새로운 윤리가 요구된다.
(나) 2000년대를 위한 표어는 세계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책임, 즉 동시대, 주의 세계 그리고 후대를 위한 책임으로 구체화 돼야 한다, 그래서 살만한 지구상의 인간으로 생존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늘 해야만 한다.

(다) 답은 이렇다. 인간은 지금보다 더 커져야 하고 더 인간답게 되어야 한다. 인본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인간의 적극적인 가능성은 자신의 존재 상태보다 더 크다. 이러한 의미에서 책임이라는 현실적인 원리와 희망이라는 이상적인 원리는 동질의 것이다.
자아의 책임과 세계의 책임, 곧 자기주장과 세계 헌신은 상호 간에 서로 배제할 필요가 없다. 정체성과 연대성은 더 나은 세계의 형성을 위해 요청되고 있다. 인간이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 되어선 안 되고 항상 목적과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 돈, 자본, 과학기술, 산업은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은 언제나 얼마나 인간의 발전에 기여 하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재화 자본이 아니라 인간 자본이다.

(라) 근대는 윤리를 개인적 사안으로 여겼지만, 후기 근대에 들어서는 인간의 복지와 생존을 위한 일차적인 의미를 지닌 공적 관심사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사회제도 안에서 개별적인 문제가 발생할 경우, 윤리 전문가에게 의뢰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문제가 가진 엄청난 복합성과 과학 그리고 기술의 전문화에 직면하여 윤리 자체가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 특히 정치와 경제를 하나의 윤리적인 전체 맥락 안에서 통찰해야 한다는 사실을 숙고해야 한다. 이는 경제적 사고를 지닌 기업인이나 전문 경영인들, 그리고 정치인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자라고 하여 비경제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며, 언제나 위기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행동한다. 그러니 기업가들이 져야 할 사회적 책임이나 생태학적 책임을 단순히 정치가들에게 전가할 수 없듯이, 윤리적 책임을 단순히 종교인들에게 전가할 수 없다. 윤리적 행위는 그렇게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행위를 위한 자명한 공간을 형성해야 한다.

이를 좀 더 일반화시키면 (마) 인간이란 본디 더 많은 법률과 규정을 통해 개선될 수 없는 존재다. 법률은 아직 관습이 아니니 당연히 법률 역시 윤리적 토대가 필요하다. 종종 국가에 의해 제재의 수단으로 결정되고 권력의 수단으로 관철된 법률이 내포해야 할 윤리적 수용성은 온갖 정치 문화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더 많은 경찰, 교도소 그리고 엄격한 법률에 대한 요구가 우리 시대가 가진 어려운 문제를 없애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 없는 노릇이다. “관습을 배제한 법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류는 이미 국제적인 국가공동체와 초국가적, 초문화적, 그리고 초종교적인 법의 구조를 창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질서가 인류 전체를 위해 구속력을 발휘하는 윤리, 즉 세계윤리를 배제한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예를 들어 금융과 주식 거래의 조작, 또는 공격적인 유전공학의 연구가 한 나라에서는 금지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준수되지 않는 경우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후기 근대의 인간에게는 공동의 가치, 목표, 이상 그리고 비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종교적인 신앙을 전제로 하지 않는지 물음을 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