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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식 한스 큉의 세계윤리구상 제3장~제6장 발제에 대한 토론(202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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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5-03-28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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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큉의 세계윤리구상 제3장~제6장 발제에 대한 토론 (2024.12.21.)




박태식신부 : 이규성신부님께서 정리를 잘 해 주셨고요.
최현민수녀 : 일단 이규성신부님께서는 윤리적 기준을 먼저 자신에게 엄격히 적용해야 하는데 한스 큉은 그러지 못했다고 표현하셨어요.
이규성신부 : 그렇다고 한스 큉이 엄청 타락하고 산 건 아니예요. 그냥 자기 자신을 일개 신학자로 평가하는 데 대해 굉장히 불만족스러워 하고 있었지요. 어디에 가면 항상 가운데 자리를 앉는다든지, 누군가가 교회론과 관련한 논문을 쓰면 자기 사상을 항상 결론으로 써야 되는데 여러 의견 중에 하나로 쓰면 그 논문은 통과가 안 된다든지 하는 거예요.제 스승님은 교회론 전문가로 발터 카스퍼 밑에서 공부를 했어요.카스퍼와 한스 큉은 동시대 사람인데 제 스승님은 교회론에 대한 박사 논문을 썼는데  한스 큉은 제 스승의 논문은 통과시켜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국 카스퍼의 제자 중에 하나가 비엔나에서 교의 신학 교수를 하고 있어서 그쪽으로 논문을 보내서 1년 후에 통과를 해서 받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한스 큉이 교황의 교권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예언자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한스 큉의 삶이 진정 예언자적이었는가는 좀 다른 문제예요. 그는 아주 으리으리한 집을 갖고 있었고 여비서는 4명이 있었다고 하지요.
최현민수녀 : 그런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이규성신부 : 아까 칼 바르트가 나왔는데 그 가톨릭 신학자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한스 오스콘 발타사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가톨릭계에서는 20세기에 최고의 신학자예요.칼 라너라는 사람에 버금가는 최고의 신학자인데 이 발타사르가 칼 바르트를 엄청나게 존경해서 거의 아버지처럼 모셨고 나중에 <칼 바르트>라는 책을 썼어요. 자신이 강연된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책을 쓴 거지요. 그가  바젤 대학교에서 12주 정도로 매주 한 번, 2시간씩 가르쳤는데 칼 바르트도 그 강의를 들었다고 해요.1950년도인가 53년도인가에 한스 큉이 와요. 자신이 칭의론에 대해 논문을 쓸건데 좀 도와줄수 없겠냐고 발타사르한테 물어보니까 바르트의 미출간 원본 원고 이 주간 원고를 참조하라고 줬는데 그것으로 한스큉이 칭이론을 쓴거죠. 그것은 발타사르가 바르트에 관해 쓴 것을 적당히 빼서 쓴 것이었어요. 물론 자기 언어로 썼지만요. 나중에 발타사르가 그걸 보고 굉장히 분노했다고 해요.
미산스님 : 아니, 그걸 밝히지 않았어요? 안 그러면 표절이잖아요.
이규성신부 : 안 밝혔어요. 그래서 저는 한스 큉이 인간적으로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봐요.
최현민수녀 : 신부님께서 5장과 6장을 비판적 고찰로 결론을 내리셨는데 이것을 다시 신부님의 언어로 정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규성신부 : 간단하게 말하면 이겁니다. 에토스는 그냥 나오지 않는다. 이게 지금 에토스를 얘기하는 거잖아요. 에토스는 종교를 바탕으로 나온다고 얘기했지만 그 종교 자체도 에토스이고 종교를 바탕으로 에토스가 나온다.에토스 자체는 그럼 어디서 나오냐? 미토스에서 나왔는가?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이라는 게 고구려도, 신라도 거쳤고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도 건국 이념이라는, 근본적으로 단군에 관한 미토스에서 나온 것이거든요.
그러면서 그 시대별로 자기 자신들의 에토스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에틱스(ethics)가 아니에요.에틱스는 근본적으로 윤리학이지만 에토스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윤리학 이전에 우리의 근본적인 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가이드라인인 거죠. 그건 ‘무엇을 해야 된다’가 의무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의 가이드라인인 거죠. 뭐 해야 된다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의 가이드 라인이에요.그러면 홍익인간이라는 미토스에서 홍익인간이라는 단어가를 만들어지고, 그 단어를 창출해서  그 다음에 윤리 의식적으로 일반적인 삶에서 어떻게 규정되는가 이렇게 나오는 거거든요. 저는 그래서 에토스도 중요하지만 미토스를 얘기하지 않는 상태에서 에토스를 얘기하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지요.  미토스는 우리의 근원적인,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신적 체험이에요.
최현민수녀 : 신부님이 얘기하는 미토스라는 게 각 종교의 신앙인들이 자기가 속한 종교 안에서 경험되는 어떤 체험을 말하시는 건지, 아니면 그 너머에 보다 시원적인 체험을 말하는 건가요?
이규성신부 : 미토스라는 것은 원래 다원적인 체험이거든요. 시원적이고도 목적론적인 어떤 다원적인 체험인데 어떤  윤리학이 성립되고 거기에 대해서 신학이 성립되고 철학이 성립되려면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신적 경험을 하고, 저 사람은 자기 나름의 신적인 경험을 하는 거지요.그리스라고 하는 반도 내에서도 다양한 경험들을 한거죠. 그게 수백 년간 지속되어 온 거죠. 그러고 나서 드디어 어떤 철학적인 관점으로 재정리를 한 것이지요.우리는 지금 워낙 단편주의적인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먼저 윤리적인 삶이 중요하다고  한스 큉은 주장하는 거죠. 물론 윤리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근데 이것이 의미가 있으려면은 내 안에 동기가 있어야 되거든요. 안다는 게 아닙니다.

이 책 (세계윤리 구성)이 출판된 지 지금 40년이 지났어요. 근데 이 책이 내 마음에 들어와 저를 자극하지는 않아요. 이론적으로는 굉장히 좋아요. 그러나 추상적인 이야기예요. 예를 들어서 이순신은 실제 인물이지만 이순신 미토스가 있잖아요. 또는 정주영 미토스가 있고, 이병철 미토스가 있고 성철 미토스가 있고 모두 실존 인물이고 우리가 다 알아요.뭘 썼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다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의 미토스가 있어요.우리는 그걸 바라보면서 에토스를 만들어내는 거잖아요.그 미토스가 바로 에토스를 만들기 위한 어떤 동기가 되고 자극이 되는 거거든요.
최현민수녀 : 신부님 말씀을 들으니까 왜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으로는 긍정할 수 있고 그래서 세계 윤리가 중요하고 그것이 지금 필요로 한다는 거는 받아들이겠는데 이 안에서 미토스 얘기가 없기 때문에 공허하게 들린 것이군요.
심원스님 : 신부님 말씀처럼 미토스를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미토스는 너무 특수성 그리고 지역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지금처럼 전 지구적 어떤 하나의 공감할 수 있는 이것을 미토스에서 도출해 내기는 거의 불가능해지지 않을까요?
이규성신부 : 지속적으로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지금 에토스를 먼저 만들자고 이야기하기는 어렵고 우리가 어떻게 갈지 모르지만 서로 간에 갖고 있는 미토스적 경험이 있거든요.이건 내 경험이고 저건 너 경험이고 이렇게 서로 양립 가능하되 서로 교환 가능하지가 않은 거예요.처음에는 그리스 사회가 미토스 사회에서 에토스 사회로 넘어간다는 것은 아무튼 나름대로의 그 신들의 투쟁이 있었던 거죠. 그 신들의 투쟁의 결과로 유일신적인 어떤 사고 방식으로 나온 거지요. 이처럼 인류 공동의 어떤 지성적 작업도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시원적, 그 다음에 목적론적 어떤 경험을 통해서 거기서 신들의 전쟁이 벌어지는 데 우리 신이 제일 좋다 니네 신이 제일 좋다하며 서로 강력하다고 하는 그 신들의 전쟁이 벌어져야만 가능한 일이 되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총칼론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뭔가를 나누는 게 있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심원스님 : 피라미드가 연상되는데 그런 기본 단위의 것에서 그 다음 단계로 어느 정도 공통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고 그 중 단위의 어떤 것에서 다시 모여 하나의 정점으로 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데 그게 가능할까요?

미산스님 :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 신들이 많이 있었잖아요.거기에 그 미토스도 있었고 근데 이제 그런 신들이 전쟁을 통해서 에토스를 추출해냈고요.  인도에도 수많은 신들 중에서 브라만으로 나온 거잖아요. 또 그걸 반대해서 블교가 나왔고, 자이나가 나온 거잖아요.사실 정말 신화가 많거든요.인도도 다양한 과정을 거쳐서 에토스가 나왔는데 각 문명권마다 이걸 통합해야 되잖아요.그래서 통합을 해야 되는데 그게 인위적이 될 수는 없고, 자연적인 만남을 지속적으로 해야만 가능한 거고요.근데 에토스는 사실은 영혼 없는 메아리 같아요.아주 논리적인데 내 마음에는 안 들어와요.  그렇지 다 알아.. 근데 안 들어오는 이유는 미토스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칸트가 이야기하는 순수 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이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는 이야기하지 말자 이렇게 얘기하거든 그러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종교 간의 대화를 왜 하는거지? 너는 뭐니? 우리는 이런 거야, 내가 알고 있는 걸 이야기해 주고, 너가 알고 있는 걸 이야기해서 나눠야 되거든요.근데 진리에 대한 최종적인 추구라는 것을 배제한 상태에서 그냥 대화하죠.그러면 내가 아는 것은 아는 게 아니고, 네가 아는 것도 아는 게 아니고, 그럼 우리는 무엇 때문에 대화하는가 이게 제일 큰 문제인 거지요.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순수 이성 비판에 관한 관점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 안 보인다.두 번째는 실천이성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에서는 이게 실천이성이니까 그런 관점은 강하게 드러나지만 단순하게 지성적으로는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거 아니거든요.근데 지성적인 사람이 윤리적으로 왜 살아가냐면 판단력 비판 왜 판단을 이렇게 하는가 그건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판단하는 거거든요.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교에서 판단력 비판이 뭐냐 이게 일종의 미학인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거거든요. 근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걸 발타사르는 인간사에서 가장 흉악한 사건이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사건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그러니까 십자가를 그려놓지! 농담으로 우리가 안중근 의사 사살당한 장면을 여기다 걸어놓나요? 아니면 윤봉길 의사나 어떤 성인을 교수형한 사진을 걸어놓지는 안잖아요.
어떻게 애들도 같이 사는데 사람 죽는 걸 올려 놓습니까? 근데 예수의 십자가는 올려놓잖아요.미산스님 : 잔혹함 속에 아름다움이 있는 거지요.
이규성신부 : 네. 근데  왜 그러냐 하면 거기에 십자가 구원이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저주의 최종적인 종점이지만 사실 구원의 관점에서 얘기하면 십자가라는 살인 도구가 구원의 도구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처절한 저주받은 죽음이 어떤 부활이고 영생의 통로가 된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그런 면에서 예수의 십자가가 아름답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자기도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려는 겁니다.
심원스님 : 근데 그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의미가 부여되었기 때문에 아름답다 아니면 구원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 아예 그런 것에 대한 사전적인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름다울까요?
이규성신부 : 그러니까 저는 제일 먼저 얘기하는 게 왜 방이나 침실마다 십자가를 걸어 놓느냐? 가장 흉악한 모습인데... 그게 그리스도교 내에서는 암묵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지요.  그래서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이고 그게 하나의 모티베이션(motivation)이에요. 십자가를 왜 강조하는가? 아름답기 때문이지요.
심원스님 : 신부님 말씀하신 판단력 위선에 있어서 최종적인 미학을 말씀하시는데 미학만큼 가장 가치론적인 성격이 강한 건 없지요. 보통의 어떤 도덕이나 이것 이상으로 거부할 수 없이 다가오는 가장 최고의 가치, 공감의 가치가 바로 미학이잖아요.
이규성신부 :  칸트가 뭐라고 얘기하냐면 판단력 비판에서 특수 형이상학을 요청하는 거예요.그게 무슨 말이냐하면 원래 형이상학에서 있었던 개념인데 칸트가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한 게 아니라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려고 들은건데 사람들은 오해해서 형이상학을 무너뜨렸다고 판단한 거예요.어쨌든 간에 칸트는 특수 형이상학을 통해서 하느님이 존재해야 하며 인간은 영혼 불멸해야 하고 그래서 상선벌악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 주장한 거예요.그래야 윤리학을 할 수 있지요.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이 아름다움의 추구하는 데 전제 조건이 뭐냐하면 신존재, 영혼불멸, 상선벌악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입증할 수가 없죠.그래서 이 세 가지가 전제된 상태에서 아름다움이 강조가 돼야만 윤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미산스님 : 한강작가 이번에 노벨상 시상식 할 때 한 강연 제목이 ‘빛과 실’이에요. 굉장히 감명깊은 강연이었어요.최현민수녀 : 정말 한강 작가의 강연 속에는 신부님이 얘기했던 미토스가 살아 있었던 것 같아요. 한강 작가의 글을 보면 감각적인 언어들을 많이 사용하잖아요. 거의 그분은 그 오감을 건드리더라고요. 그래서 한 문장, 문장이 그냥 살아서 마음에 꽂히게 만들더라고요.그것이 다른 소설에서 볼 수 없는 한강 작가만의 독특한 글쓰기라는 생각이 들어요.이규성신부 : 돌아가신 김명희의 소설 <혼불>을 보면 그냥 짜릿짜릿하잖아요.미산스님 : 한강 작가의 강연회에서 정확하게 그 이야기를 해요. 사실은 빛과 실인데 잔혹함과 아름다움을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이게 질문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 질문에 의해 책이 써지는 것이지요.그러니까 한강 작가는 “나는 소설을 쓸 때나 시를 쓸 때 감각에서 느껴지는 것을 언어화한다.” 그렇죠, 그래서 듣는 독자들이나 보는 독자들이 같이 느끼는 거겠지요.
최현민수녀 : 작가의 고백을 듣는 순간 이 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 그녀의 피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것은 바로 한강 작가가 감각의 언어로 글을 쓰기 때문이겠지요.
미산스님 : 작가가 8살 때 두 줄 쓴 것이 자기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해요.두 줄 사랑이, 그러니까 잔혹함과 아름다움을 연계하는 실은 결국 사랑이라는 결론이 되는 거예요.
최현민수녀 : 스님이 말씀하신 ‘잔혹함과 아름다움’의 양쪽 대비가 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고 사라지게 되지요. 그것은 결국 사랑의 힘이 아니었나 싶어요.
미산스님 : 한강 작가는 광주 민주화항쟁을 갖고 2년~3년간 스스로 질문하면서 감각적으로 나오는 언어들을 쓰는 거예요. 그래서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구요.
이규성신부 :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미토스적인 체험인데 그것을 핵심적으로 말하면 사랑인 것이지요.그 사랑이 무엇이고 어떻게 구현되느냐를 그리스도 교회는 계속 말해오고 있는 것이구요.미산스님 : 그러니까 사랑은 표현할 수 없는 거지요. 사실은 사랑은 그냥 감각적으로 느끼는 거지요.
이규성신부 : 한강 작가는 신학을 잘 모르실텐데 굉장히 신학적으로 말씀하시더군요.
미산스님 : 한강 작가는 불교도 모를텐데 진짜 그 연결성에 대해서 잘 표현하고 있어요. 기 강연 제목도 너무 아름답고 좋아요.‘빛과 실‘ 그 사랑의 빛은 모두 실같이 모든 존재들에서 연결돼 있어요.
최현민수녀 : 저는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었을 때 왜 다르게 느껴질까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바로 그의 감각적 언어 때문이었군요.
이규성신부 : 기본적으로 미토스적인 경험이라는 게 생명력을 경험케 하지요.최현민수녀 : 맞아요. 정확하네요. 신부님박태식신부 : 아까 스님이 하신 것 중에 비슷한 얘기가 이 책에 나오긴 해요.“정언적 특성은 한계와 제약에 부딪히고 있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대신 절대에 의해서 그 근거가 제시된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걸 보면서 이 사람도 어쩔 수 없는 그리스도인이구나라는 걸 느꼈어요.이규성신부 : 미토스, 에토스 얘기도 했는데 한스큉의 주장이 왜 생명력이 없냐면 이 내용 자체에 대한 유기적인 연결성이 없어서예요. 스핑크스를 예를 들면요. 이 피라미드 옆에 있는 스핑크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어떤 존재, 그러면 인간의 두뇌와 사자의 강건함과 독수리의 공중 비행 그 다음에 뱀에 그래서 그 스핑크스가 만들어지는 거잖아요. 그건 인간이 충분히 그렇게 만들어낼 수 있어요. 상상으로는 만들어 낼 수 있으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지요. 그게 일종의 독일 싱크레티즘이죠.서로가 연결될 수 없는 얘기를 억지로 갖다 붙여서 스핑크스를 만들어냈고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느 쪽이 강조가 되면 다른 한쪽은 다 무시될 수밖에 없는 그런 것들이 있어요. 근데 이것을 백화점 나열식으로 해가지고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면 생명력이 없는 거죠.심원스님 : 그래서 제가 책을 읽으면서 이제 그런 부족함이 느껴져서 이렇게 해봤나 봐요.이것은 제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각고의 투쟁을 한 거지요 (웃음)
박태식신부 : 어쨌든 한스큉은 세계적인 학자인 건 분명하고, 80-90년대에, 세계 그리스도교에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어요.
심원스님 : 일단 1부가 전체를 다 개괄하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2부 3부는 1부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할 것인가 하기 때문에 조금 진도를 나가야 할 것 같아요.
박태식신부 : 그러면 다음 발표를 정하고 다음 모임 날짜 정하지요.
최현민수녀 : 그럼 이 책의 남은 2, 3부를 이규성신부님께서 다음 모임에서 정리해 주시는 걸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