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글2014년 10월 정경일 원장님 강연 녹취록입니다. 14.11.07
- 다음글9월 종교대화강좌 안내 14.09.05
강좌안내 2014년 9월 유정길 이사장님 강연 녹취록입니다.
페이지 정보

본문
첨부파일
-
9월 녹취록.hwp (58.5K)
0회 다운로드 | DATE : 2026-05-21 21:01:42
9/15 종교대화강좌
유정길 에코붓다 전 공동대표, 지혜공유협동조합이사장
에코붓다가 정토회에 있는 단체입니다. 법률스님계시는 정토회에서 저희가 88년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열 몇분의 초기멤버들이 법률스님과 정토회를 시작했습니다. 모임은 84년부터 해왔는데 불교내에 사회단체나 사회운동하는 곳에 저희가 다 관여하고 있었다. 청년단체, 대학생 단체 다 관여하고 있었고 당시 불교개혁에 관한 여러 활동들. 조계사에서 무수한 난투극이 있지 않았습니까. 80년대같은 경우는 저희가 학생이었고 졸업한지 얼마 안된 열혈청년들이 불교를 더 낫게 만들어보자며 관여했었습니다. 그러다가 88년들어서 저희가 아예 불교내에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법당이라고 해서 성당이나 교회같이 만들고, 불교사회연구소 불교사회교육원을 만들었습니다. 90년에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세상이 급격하게 변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이 활동해왔던 그룹이 90년들어서 전세계적인 변화가 어떤 변화일까ᆞ 살펴보자고 해서 3년간 폐문정진을 하게 됩니다. 불교에서 스님들이 득s도를 하기 위해서 폐문정진이라고 절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면벽수행을 하는것처럼, 저희도 3년간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그동안 잘 몰랐던 것 무심했던 것, 알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갖고 있던 관념적인 오만함 때문에 무시해왔던 것에 대해 겸손하게 살펴보자고 해서 3년동안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3년간 그동안 저를 비롯해서 사회운동을 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반성적으로 생각하자고 하면 관념적인 오만함이 있었어요.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다는, 너희는 의식화의 대상이라는 관념적인 오만함이 있어서 몇몇 단체들과 협력하기는 하지만 내면 깊숙이는 (우리가) 잘났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런 활동을 하면서 종교가 갖는 외피를 이용하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다가 급격하게 90년데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여러 변화를 보면서 굉장한 혼란이 있었습니다. 내부적으로 3년간 다양한 모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로 불교를 변화시킨다는게 뭘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종교를 변화시키는 것을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과 같게 보지 않았는가. 종교는 정신이고, 불교는 정법이 서는게 개혁인데, 불교내 민주세력 반민주세력 나눠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불교세력이 중심이기 보다는 정치적인 생각이 먼저 있었던 거예요. 불교를 변화시키는 것이 사회혁명하는 것처럼 정치권력을 바꾸면 종교가 바뀌는 것처럼 생각했어요. 종교는 정신세계에 의한 것인데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잘못이 있었던 게 아닌가. 저희는 당시에 정치와 결탁했던 사람들을 미워하면서 다른 사람만 들어서기만 한다면 모든 게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3년간 폐문정진을 하면서 많은 것을 돌아보고 반성했는데, 종교라는 것은 종교적으로 바꿔야지만 개혁인 것이지, 정치개혁이 아니다. 깨달음이나 정법의 중심이 서야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그런 전통이 있습니다. 무수하게 많은 중들과 불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법을 갖고 있는 사람이 1명만 있다고 한다면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법을 제대로 갖고 있다고 하는게 중요한 의미입니다.
또 느낀 것이 뭐냐면, 저희가 자본주의 모두가 경제성장을 하고 풍요를 추구하고 있는데 저희가 당시에 안보기 시작했던 책을 봅니다. 주로 생태와 환경. 법률스님께서 환경에 관심을 가져보라고해서 저는 처음에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런 것은 변방의 사안이지 사회의 골간이 될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가 존경하는 사람이니까 대접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알겠다고 하고 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생태를 보다보니까 환경이야기가 아닌거계요. 어떤게 발전이냐 무엇이 성공이냐 좋은거냐 어떤게 진보냐는 이런 질문들을 전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생태가 주고 있는 매시지입니다. 지고지순한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잘못된 전제 위에 서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무엇이 진보고 발전이고 선이고 좋은것이냐는 생각 자체가 90년초에 읽었을 때 그런 책을 통해서 굉장히 많은 충격과 도전을 받게 됩니다.
자본주의라는 것은 돈중심의 사회라는 것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자본주의는 인류역사상 짧은 시간이거든요. 그런데 자본주의는 돈만 되면 다 사고팔수있게 한다는 것이 매우 비인간적입니다. 이것이 아닌 다른게 뭐가 있을까 사회주의? 사회주의는 붕괴하면서 실패했다고 보여지고. 그래서 협동조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저희가 몬드라곤을 보고 협동조합에 대한 전율적인 감동을 받고.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효율성도 있지만 인간성을 가진 시스템은 협동조합뿐 아니냐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발전에 대한 생각의 전환, 두 번째는 새로운 시스템이 뭐가 있을까, 세 번째는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이익을 중심으로 하고 사회주의는 공적인 이익이 우선인 것이잖아요. 그런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성격이 도입되자마자 무너지는 것을 보니 그 사회를 이끌어갈 만한 인간형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전체에 대한 책임의식과, 전체를 자기화하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데 결국 이기적인 인간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구조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구조를 이끌어갈 사람이준비되어있지 않으면 사회는 붕괴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네 번째는 그렇다면 이런 것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게 뭘까? 생각했습니다.
네 가지 화두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좋은 생산력.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생산력의 고도화를 말합니다. 잘먹고 잘사는 것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이잖아요.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내일이 낫다를 물질적인 풍요를 근거로 해서 말합니다. 생산력이 높아지는 것들을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는 역사가 발전하고 진보라고 생각한 거예요. 두 번째는 인간과 인간끼리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 뭘까. 세 번째는 좋은 인간형이라는게 있어야 하는게 그것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네 번째는 이것을 만들기 위한 좋은 방법이 뭘까. 좋은 생산력. 좋은 생산관계. 좋은 인간. 좋은 방법. 이 네가지가 저희가 3년간 폐문정진하면서 만든 의제입니다. 끝나고 난 뒤에 저희가 불교라는 베이스로 10년간 활동을 했는데 제로포인트로 돌아가서 어떤게 좋을지 생각해보자고 했습니다. 불교의 근본까지 다 내려놓을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기본적으로 사회를 바꾸는 활동을 하다보니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내 밖에서 문제 삼는것에 익숙해져 있었어요.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면밀하게 분석하는 것에 능슉해져 있었어요. 그런데 밖을 변화시키는 것과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둘로 나눌 수 없었어요. 궁극적으로 개인의 깨달음은 사회적인 깨달음인 동시에 개인의 깨달음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개인의 완성의 형태로 다시 돌아와야 올바른 깨달음의 완성이 아니냐 생각했습니다. 사회의 변화와 자기의 변화 이 두가지가 동시에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교내에서의 많은 수행법이 있지 않습니까. 수천년동안 자기를 변화시키는 노하우가 축적되어있는 거거든요. 간화선 위빠사나 명상이라든가 기도라거나 수천년동안 자기변화의 방식이거든요. 불교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인류의 자산으로서의 수행법을 이미 갖고 있다면 불교라는 이름을 언제든지 뗄 수 있다는 마음을 갖는 것도 중요하고 종교에 얽매여서는 안 되지만 불교가 갖고 있는 내용들을 나와 사회변화에 쓸 수 있지 않냐 생각했습니다. 저희가 그때부터 만일결사를 시작했습니다. 만일이면 30년이죠. 불교내에서 결사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라는게 있지 않습니까? 가볍게 말하면 모임을 결성할 수 있는 것인데 불교에서는 그런 의미를 넘어서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평생 노력과 힘을 모으자고 하는 약속을 결사라고 합니다. 30년 정도에 우리가 노력을 집중하면 한국사회 내에 작은 뭐라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30년간 결사를 하게 되었고 그 방식은 매일 아침 기도를 합니다. 1000일 단위로 나눠서 그때마다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왜해야하는지 다시 생각해보고. 1000일이면 3년 조금 안 되는 기간입니다. 그때마다 다시 만나서 활동 시스템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100일마다 만나는데, 20년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천 원 보시를 하게 되어있습니다. 의식적으로 나의 이익에 기반이 되지 않는 활동을 의식적으로 하게 되어있습니다. 수행, 보시, 봉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있습니다.
정토회는 사회활동과 수행을 반드시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산하에 세 개의 사회단체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에코붓다입니다. 에코붓다의 이름으로 종교인들이 90년대부터 사회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좋은 벗들이라고 해서 난민인권지원단체가 있습니다. 북한 난민 지원과 인권 관련된 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제이티에스라는 개발보건단체가 있습니다. 저희는 1000일마다 해고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관계가 오랫동안 축적이 되어야 개인에 대한 신뢰가 단체에 대한 신뢰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인적관계, 자산의 낭비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1번 더 연임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면 총 6년이죠. 그 다음에는 무조건 바꾸게 되어있습니다. 그 시스템이 시작된 두에 제가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엌에 들어가는 일을 하겠다고 했어요. 불교에서는 사회활동하면 얼굴도 비춰지고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까.
저희 정토회는 100여명이 같이 살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수도원같이. 공동체 내에서 밥하고 빨래하는 사람들은 표시도 안나지 않습니까. 불교에서는 마음공부하기 좋은 곳이 공양간이에요. 그동안 밖에 가서 생색내는 일을 했지만 공덕을 쌓는다고 해서 공양간에 들어가게 되어있어요. 어떤 사람을 보면 2, 30대에 사업을 벌였는데 고생한 것에 비해 성공을 하게 되면 쉽게 성공하게 되면 그 자체가 독이 됩니다. 하지만 초기에 어렵고 넘어지고 엎어지고 좌절하는 무수한 과정을 관통하고 성공을 하게 되면 어려움에서 온 내공이 받쳐져 있기 때문에 탄탄한 성공이 될 수 있어요. 일종의 쌓는 일을 하는게 공덕인 겁니다. 칭찬받지 못하고 어려운 조건에서도 티도 안나지만 그런 활동을 오래해본사람이 대접받는 위치에 가도 괜찮은 겁니다. 그렇지 않고 한 일없이 칭찬받거나 돈을 많이 벌면 독이 됩니다. 공덕을 쌓ᆞᇂ는게 중요한데 절에서는 공양간에 가는 것이 공덕쌓기에 좋다고 봅니다.
어머니들은 오랫동안 해오셨는데 그 때 느낀 것이 아버지노동과 어머니노동이 차이가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노동은 노동을 하면할수록 노동의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아버지 노동이라는게 이를테면 남성성의 노동이라고 할까요. 남자가 밖에서 일하게 되면 자기 경력도 축적되고 돈도 됩니다. 진전이 발생한단 말이죠. 그런데 어머니노동으로 대표되는 가사노동이나 청소노동은 해도 축적이 안돼요. 시지프스 노동인겁니다. 바위를 산에 올려놓고 떨어지면 또 올려야하고. 이걸 매일 반복합니다. 일종의 순환노동인 것입니다. 축적이 일어나지 않고 순환되고 표시도 안 나고 돈도 안 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버지노동으로 대표되는 직선적인 노동이 돈을 지급받는 노동이라면 어머니 노동은 무불노동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노동은 돈을 받지 않는 노동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옆 집 사람에게 웃어주고, 배려하고 역할을 하는구나 도와주고 봉사하는 이런 것들은 돈을 안받는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돈받지 않고 돈 벌지 않는 무불노동, 그림자노동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교자체, 불교개혁을 바라보는 시각이 저희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불교 종교변화가 총무원이라는 종교권력을 변화시키면 불교가 변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말도 안 됩니다. 그것은 종교 권력을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종교개혁은 아닙니다. 분노와 증오심을 동력으로 삼아서 상대방을 무너뜨린 후에 본인이 또 비슷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지 않습니까. 권력을 변화시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불교는 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자기변화와 수행을 통해서 자기변화하면 그게 불교입니다. 불교의 스님들은 수행자이지 성직자가 아닙니다. 종교는 민주적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스님앞에서도 대등하게 하지 못합니다. 리더들이 갖고 있는 사회영향력이 크고 좋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정토회 공동체는 110명정도 살고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좋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결혼하는 사람들도 이혼하는 마당인데. 불교의 전통은 큰 방에서 같이 자는 겁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힘든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공동의 질서를 만들 수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공동체의 의사결정과정이 어떤지에 대해 가장 궁금해 합니다. 어떻게 의사결정하는지, 그 과정은 정말 민주적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갈등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하는지도 궁금해 합니다. 저희가 20년동안 공동체 생활을 해오면서 온갖 시행착오를 겪어왔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문제가 발생한 순간 문제는 너에게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문제해결주체 역시 ‘나’입니다. 이 두가지가 공동체 내에서의 갈등해결 원칙이 됩니다. 니가 문제라고 생각하면 내가 나가든가 니가 나가든가 이 두가지 방법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저 사람이 문제일까? 나의 경험세계 성장과정에서의 자기 정당성을 찾는 일이 고정관념에 의한 것일 수 있습니다. 공동체 내에서는 운영과 같이 큰 일로는 싸울 일이 별로 없습니다. 가령 청소 왜 안하느냐, 밥하기로 했는데 왜 늦게 나오느냐 같은 사소한 일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두 가지 기본 방침 외에, 포살이라고 해서 공동체 계율이 33가지가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포살을 읽습니다. 살생하지 않겠습니다, 살생을 했으면 참회한다고 하면 삼배를 합니다. 쓰레기를 남기면 또 알아서 삼배를 합니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삼배를 하고 나면 공동체 내에서 그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그 후에는 ‘나누기’를 합니다. 삼배를 했어야 하는데 못했다 라거나, 당신이 나에게 한 말이 상처였다 같은 말을 나눕니다. 모든 비폭력적인 방식의 대화는 ‘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 상태를 설명하지 않고 상대방을 추궁하고 화내거나 왜 화내냐고 따지기 시작하면 싸움이 됩니다.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이 발생할 때 내 이야기만 하는 겁니다 아쉬웠고 괴로웠고 기분 좋았고 격려가 되었고 행복했고 이런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말을 못해서 막히는 경우가 있어요. 상대한테 그 말을 꼭 하면 풀어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영국의 어느 공동체 경우는 갈등해결 방법이 ‘개인에게 직접 부드럽게 말한다’가 원칙입니다. 절대 그 개인이 없을 때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도록 되었어요. 누구도 내가 없을 때 나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신뢰가 있습니다. 이 신뢰감이 공동체에 대한 신뢰감으로 이어집니다. 팃낙한 스님이 계신 곳은 쪽지를 보냅니다. 그러면 그 내용으로 일주일 안에 같이 이야기를 하기로 되어있고 필요하면 중재자가 나서서 이야기합니다. 공동체에서는 그런 개인에 대한 갈등문제에 대한 것들이 공동체 유지에 중요합니다. 이런 과정은 없어야 좋은 것이 아니라 가까워지기 위한 통과의례에요.
타인은 자기모습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내 마음공부의 대상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공동체 내에서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 있고 해결주체는 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대화는 내 상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또 일년에 두 번 가까이 자작을 논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의례가 있습니다. 자신이 살면서 스스로 노력하려고 하지만 발견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너는 그러니까 안되’라고 내치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노력을 해보자며 나를 끌어당기는 차원에서 조언과 도움을 청하는게 자잘입니다. 이것은 청해야지만 하도록 되어있어요. 그런 공동체 내에 질서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민주주의는 다양합니다. 우두머리 없이 모두가 평등한 이상적인 공동체가 있는데 그런 공동체같은 경우는 합의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죠. 만장일치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충분한 이야기가 없으면 해소가 되지 않고 결정의 속도가 빠ᆞ를수록 사람도 다치기 때문에 의사결정은 오래 걸립니다. 여기서 나름대로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가 있는 경우는 시간이 단축됩니다. 물리적으로 권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초기부터 정보를 알고 있고 무수한 상황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보다 통합적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많죠. 이런 한 두명의 지도자가 있으면 합의나 결정을 내리는게 빠를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공유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에게 이 내용을 결정하기 좋은가 설득을 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모두 다 모여서 우리 의논을 해보자고 하는 것도 있지만 순간순간 빠르게 결정해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토회같은 경우는 삼위제라는 방식이 있습니다. 삼위제라는 것은 세 번 묻는다는 거예요. 토론을 하다가 일정 시간이 되면 거수를 합니다. 만약 삼분의 일이 동의하지 않으면 얘기를 더합니다. 첫 번째 물어보고 한참 토론하다가 두 번째 물어봐요. 다시 거수를 합니다. 그런데도 삼분의 일이 또 남았어요. 그러면 한번 더 토론합니다. 한참 토론하다가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거예요. 그럴 때 삼분의 일 이하일 경우 개별적으로 물어봐요. 개별적으로 자기 의견을 계속 개진하겠느냐 접겠느냐 물어봐요. 세 번을 물어봐도 동의하지 않는 의견이 나오면 내용을 충분히 전달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삼분의 일 이하의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은 자꾸 토론을 할수록 고집하는 경우가 생기잖아요. 내 의견을 돌리려고 하다보니까 어색하거나 이상하고. 그렇게 세 번 물어보고 난 뒤에 자기 의견을 돌아보고 내려놓게 해요. 이렇게 결정하는 방식이 삼위제입니다.
제가 썼던 글에는 실상사에 대해 나옵니다. 세 가지 큰 보배라는 뜻에서 깨달음, 부처님, 법를 말합니다. 깨달음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승이라고 합니다. 승에서는 비구 비구니 우바세 우바. 비구는 출가한 남자스님, 비구니는 출가한 여자스님, 우바세는 출가하지 않은 남자 신도, 우바는 출가하지 않은 여자 신도. 이 네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공동체의 구성원인 것입니다. 비구 비구니 우바세 우바 네 그룹이 하나의 생각을 합니다. 지금의 조계종은 비구 비구니만 주인이고 우바 우바세는 돈내고 시주만 하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불교가 올바른 개혁을 하려고 한다며 이 네 구성원이 동등한 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조계종은 비구니도 우습게 보고 비구스님만 중심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무튼 승가공동체입니다. 청정한 승가공동체를 만들기위한 규칙이 있습니다. 불교나 모든 종교가 가톨릭은 잘모르겠지만 지금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도 다 돈에 종속되어있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ᆞ. 본래의 근본가치마저 갖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토회에서는 그런 차원에서 저희가 백일마다 만난다고 말씀드렸죠. 백일마다 어떤게 주어지냐면 백일 만날 때 동안 천원씩 모았던 십만원을 내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수행일지를 쓰는게 있어요. 아침마다 기도하고 일지를 제출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또 하나가 뭐냐면 100일 동안 했던 사회적 실천들이 있습니다. 이 기간동안 빈그릇 운동 서약식, 탈북자 지원활동을 한 것을 가급적 수치로 평가할 수 있도록 쭉 보여줘요. 이 활동을 누가 가장 열심히 했고, 세월호 서명운동을 했었는데 이것을 보여주고 다음 활동을 공지하기도 하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실제로 큰 에너지가 돼요. 사회활동도 열심히 하게 되고요. 정토회의 종교조직 같은 경우 강한 성격의 운동을 대중적으로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ᆞ. 대중적으로 활동을 하자고 할 때는 저항과 반대의 기치를 놓는 활동으로 정토회가 결의할 수 있는 없는 것이거든요. 예스 무브먼트가 있고 노 무브먼트가 있다고 하면, 종교는 감시 저항의 운동도 있지만 대안운동으로서 예스하는 운동, 긍정하는 운동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대중성을 갖기 좋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예전에 보면 조선 고려시대 때 스님들에 대한 통계를 낸 것을 보면 5만, 10만으로 내어있어요. 600만밖에 안되는 조선에 승려가 5만 10만이라니 놀랐습니다. 지금 한국만해도 2만이 안됩니다. 알고 보니까 예전에 문화적으로 고려때 사찰이 중심이 되어서 지역내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승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승도에는 스님들뿐 아니라 지역의 우수한 사람들이 같이 활동을 하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절만이 아니라 지역의 운동과 마을운동을 같이 했던 것입니다. 실상사는 지역의 균형운동본부를 만들고 그 지역에 대안학교도 만들고 정착하게 되고 지역내에 거대한 공동체가 됩니다. 그 지역에 실상사가 매개역할을 하면서 지역을 살리고 사람들이 문화를 보존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저는 세계의 여러 공동체를 다녀왔었습니다. 일본의 야마기시 공동체에도 가보고 녹색평론 10호에 글을 쓰기도 했는데, 영국의 부르더호프 공동체라든가 핀더 공동체, 미국의 아나키즘 공동체인 트윈 오크스. 여기는 100명이 사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종교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비인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적 사회주의자- 생시몽 오웬 푸리에,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에 의해서 공동체에 대한 실험이 많이 있어왔습니다. 19세기에 많았었어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독일에서 시작되었던 재세례파라고 해서 아나뱁티스트들이 많은 공동체를 만들어왔고, 미국에 있는 옛날 방식으로 살아가는 에미쉬 공동체도 있고. 퀘이커고 그렇고 이런 공동체들이 19세기에 많았었습니다. 이런 흐름이 줄어들다가 1960년 중반 이후에 공동체 운동이 부활합니다. 유럽에 68학생혁명 이후에 히피들의 운동이 나오게 되는데 히피들의 경우는 지금의 물질문명에 대한 문명적 저항이 있는거 잖아요. 그러다보니 무엇을 벗어나기 위한 공동체가 많았었어요. 과거 19세기 공동체는 자신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우리가 원하는 모델을 만들기 위한 공동체가 많았다면 60년대에는 무엇이 싫어서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가치로 통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공동체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종교적 신념, 기독교적 신념이 공동체를 만들었기 때문에 무수한 어려움도 극복해내게 했습니다.
트윈 오크스는 60년대에 나온 공동체입니다. 여기는 재밌는 것이 어떤 통제도 싫어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월든이라는 소설 아시죠? 월든2도 있어요. 월든2는 행동주의심리학자였던 스키너가 심리적 이상사회라는 형태로 그린 월든이란 소설을 보고 만든 공동체입니다. 지금 100명이 살고있고 15~20명은 아이들인데 홈스쿨을 시킵니다. 건물이 25개정도있는데 숲속에 흩어져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내가 키울수 있지만 아이들만 재우는 건물이 있습니다. 여기서 키우는 거죠. 식사도 같이 하니까 여성들의 경우 가사노동이나 육아에 대한 대등할 수 있죠. 여기에는 네이버포트라는게 있습니다. 소위 일하는 시스템에 대한 것입니다. 종의 한 장에 7개의 줄이있어요. 그리고 시간이 나눠져 있습니다. 가령 수요일날 개인에게 카드를 줘요.자신이 채워야 하는 총 시간을 자율적으로 시간표를 짜고, 플래너들이 와서 조정을 해줍니다. 이것의 특징은 하루종일 하나의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일을 할 수 있고, 노동계획을 스스로 짤 수 있고, 몸이 아픈 사람을 배려합니다. 또 재밌는 것은 식당에 큰 보드판이 있는데 오늘 저녁에 어느 토론방에서 페미니스트 토론회를 할 것이라는 것, 탁구대회를 한다는 것, 춤프로그램이 있다는 등의 공지가 붙여놓습니다. 그러면 밥을 먹으면서 어느 프로그램에 갈 것을 정합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안에서 굉장히 재밌어요 즐겁구요. 트윈 오크스 공동체는 기본적 원칙이 다양성입니다. 게이나 트랜스젠더 다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와 다른 걸 틀렸다고 하면 안 된다는 원칙이 있어요. 커뮤니티 잡지를 발행하기도 하구요.
공동체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저희처럼 지갑이 하나인 공동체가 있습니다. 돈은 같이 벌어서 지갑하나에서 필요한 것을 같이 쓰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결합력이 높습니다. 이것과 다른 느슨한 공동체 같은 경우는 마을공동체 같은 것이죠. 같이 마을에 살고 있지만 개별적인 삶을 삽니다. 그래서 시간날 때마다 돕고 배우고 가르치고 상호부조하면서 협력을 통해 배우게 되는 공동체가 마을공동체입니다. 여러분 렛츠(LETS)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local exchange trading system. 지역교환 및 통화 시스템을 렛츠라고 합니다. 우리끼리 돈을 따로 쓰는 것입니다. 지역화폐는 이자가 없습니다. 여기 계신분들이 돈을 같이 쓰자고 화폐를 만들어요. 통화의 이름이 필요하잖아요. 우리끼리는 ‘씨튼’이라고 해보죠. 거래할 때 저에게 2만 씨튼을 주셔야 합니다. 제 통장이 있습니다. 내 통장에 2만 씨튼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마이너스 된 통장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줘서 - 법률상담을 해주거나 치료를 해줘서 채웁니다. 그러면 도움을 받은 사람은 다시 마이너스죠. 그분은 또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서 받습니다. 서비스나 재화를 교환하는 거죠. 화폐는 본래 그런 것입니다. 금융자본주의는 이자를 통해 돈이 돈을 낳게 되지만 말입니다. 여기 화폐는 말이 화폐이지 상호 룰을 갖기 위한 화폐입니다. 많이 쌓아둬봤자 소용이 없고 마이너스가 많아도 흠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이너스가 만다는 것은 이 시스템이 돌아가도록 한 공헌을 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지역화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계좌방식이 있고 화폐방식이 있습니다. 통장을 만드는 것은 계좌방식이고 화폐방식은 실제로 돈을 찍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국은행이 가만히 있을까? 가만히 있습니다. 오히려 만들어줍니다. 지역통화를 만들어서 우리끼리 돈을 따로쓰니까 관계가 각별할 것 아닙니까. 만약 빵가게 하시는 분이 계세요. 소보루빵이 1000원인데 500원은 현금 500원은 지역화폐 받겠다고 하면 지역 분들은 여기 가겠죠. 현금은 500원만 내면 되잖아요. 지역통화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대전 송파 속초. 또 마을 만들기, 지역통화, 개별적인 삶을 살면서 의존하고 공유하고 살려고 하는 것이죠.
지갑하나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같이 살고 생산을 같이 합니다. 두 번째는 이정도 수준은 아니지만 같이 살되 지갑은 따로 쓰자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코하우징(co-housing) 공동체입니다. 의논을 해서 건물을 같이 지었습니다. 아이들이 가서 놀기도 하고 밥도 먹고. 9가구가 만들었는데 아주머니 저녁밥을 해주는 아주머니가 있어요. 다 밥을 여기서 먹어요. 세탁기도 아예 하나만 두고 그 세탁기만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갑은 따로 있지만 공동의 공간이나 시설을 같이 쓰는 것입니다. 덴마크에서 시작해서 지금 굉ㅈ아히 많아지고 있습니다. 마포의성미산 소행주라는 건물이 이 예입니다. 안성에 있는 들꽃피는 마을이라든가. 또 여러 군데에 있는 생산공동체가 있죠. 삶은 따로 살지만 생산을 같이 해서 공동생산해서 공동분배를 합니다. 생활을 같이하는 공동체가 있고 생산을 같이 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결의수준에 따라 다릅니다. 이런 공동체가 왜 필요할까요.
돈이 있을때와 돈이 없을 때 누가 사람을 많이 만날까ᆞ요. 돈이 없으면 사람을 많이 만나겠죠. 기본적으로 겸손할 수밖에 없죠. 비버리힐즈에 가면 사람보는 것이 귀찮은지 성벽같이 쌓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은 득되는 사람이 아니라 훔치려하거나 그런 사람이니까 돈이 많을수록 사람 만나는게 귀찮아져요. 돈이 없을수록 사람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사람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사회가 경제성장 2프로, 5프로, 저성장 마이너스성장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돈을 더 많이 벌자가 아니라 사람간의 협력적 관계, 의존적 관계를 높여서 그것을 통해 삶의 질을 유지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이런 이야기가 많아지는 이유가, 내가 돈을 적게 벌어도 의존을 통해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운동이나 복지운동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풀뿌리 공동체를 만드는 게 목표에요. 궁극적으로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지역을 지킵니다. 옛날에 우리 선조들 같은 경우는 4백년, 5백년 살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 동네의 모든 곳에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어요. 협력하며 살았단 말입니다. 애착도 생기구요. 그런데 지금은 한 지역에서 10녀 20년 산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보니 지역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도 없고, 지역의 환경을 뭐 보존할게 있어 라고 생각합니다. 옆사람과 사귀는 것도 웃어주느라 힘들고 일부러 살 필요가 없는 거죠. 떠돌이 문화에요. 붙박이 문화가 아닙니다. 그래서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것들이 환경을 위해서 교육 복지를 위해서도 좋고 서로 의존하면서 돌보는 과정도 많아지게 된다는 거죠.
떠돌이 문화가 아니라 붙박이 문화로 협력적 관계를 높여나가는 것이 우리가 앞으로 지향해야할 사회인데 불교도 마찬가지로 부처님을 믿는 방식이 ‘믿습니다 주시옵소서’입니다. 예수님도 버리고 부처님도 버리고 무소유로 살려고 하는데, 신도들은 보시를 투자로, 100만원 하면 1000만원 벌게 해주실거야라는 마음으로 삽니다. 예수님 말씀 헌금 많이 할 테니까 출세하게 해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종교가 자본주의에 포섭되어있기 때문에 돈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돈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제대로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 종교를 출세와 돈을 벌기위해 이용하고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이런 현상들을 회복시키는 것은 사람끼리 협력하며 가치를 만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종교적으로 볼 때도 공동체는 중요합니다. 미래사회 환경시대를 볼 때에도 지역을 지키기 위해서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지금사회 속에서 돈 벌기를 거부하는 신념을 갖고 있는 단체가 종교밖에 없어요.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와 연민을 갖는 집단은 종교가 유일한 집단이거든요. 자본주의 거대한 물결을 그나마 막을 수 있는 것은 종교라고 봅니다. 종교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공동체의 시도와 연결이 있다고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