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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종교대화강좌
사회적 고통과 그리스도교 관계영성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정경일 원장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너무 좋지 않습니까. 저는 슬펐어요. 집이 용인인데 나오면서 바람, 햇살, 초록을 심심해 하는 나무들, 푸른 하늘, 그런데 저는 고통을 이야기하러 오는 길이었습니다. 슬픔도 느끼고 아이러니도 느꼈는데 한편으로는 아픔과 아름다움은 서로 안에 있는 친구같은 관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깊이 아파할 수 있는 사람만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아픔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아픔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저는 씨튼연구원과 인연이 깊어요. 제 은사님이시고 영적 멘토이시기도 한 김승혜 수녀님이 씨튼연구원을 소개를 해주셔서 인연이 닿았습니다. 제가 36살에 유학을 가기로 결심을 했는데 마음이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안정적으로 일을 하던 시점에 새로운 도전을 하러 떠나는 길이 걱정도 많고 두려웠어요. 떠나기 전에 수녀님이 연구원에 오라고 하셔서 작은 기도실에 데려가셔서 기도를 해주셨어요. 그 기도의 힘으로 버텼던 것 같구요. 돌아와서도 최현민 수녀님도 만나뵈었구요. 제가 새길에서 고민이 많을 때 였어요. 그때 김승혜 수녀님이 위로보다는 현실을 바로 보라며 리더는 영원히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해주셨는데, 위로가 아니었음에도 힘이 되었습니다. 또한 제가 서강대에서 공부를 할 때, 종교대화강좌 책 여러권을 녹취를 했었어요. 아마 한국 종교사에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한국의 종교대화를 기억한다면 씨튼 연구원에서 하는 종교대화강좌가 깊은 기여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거예요. 단순히 종교인들이 만나 피상적 대화를 했던게 아니라 심층적 대화 인격적 대화를 하고 영적 친구가 되는 모습을 실현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합니다. 그런 중요한 강좌에 아직 공부중이고 사상이 영글지 않은 저를 초대해 주셔서 부담도 크고 고맙기도 합니다.
오늘 사회적 고통과 그리스도교적 관계영성. 첫이야기 시작이 좀 셉니다. ‘지옥의 지형과 한국사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떤 곳일까 그런 물음을 갖고 시작하고 싶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지옥을 알고 싶거든 현대사를 연구하라고 했습니다. 홉스봄도 20세기를 극단의 세계라고 말했듯이 20세기에 홀로코스트가 있었고 원폭이 있었고 가깝게는 한국전쟁이 있었고 온갖 종류의 인종학살들, 그리고 911테러까지. 수업는 고통과 악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본다면 OECD 국가에 여러 1위가 있는데 노동시간, 비정규직 비율, 산재사망율, 사교육비 비중, 이혼률, 자살률 저출산률.. 여기서 중요하게는 자살율이 가장 높고 출산율이 가장 낮다는 것은 지금 살고있는 현실이 고통스럽다는 이야기죠.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벗어나고 싶어서 자살을 택하고 새로운 생명을 이 세계로 초대할 수 없는 지옥과 같은 상태를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올더스 헉스리가 ‘이 세상은 다른 세상의 지옥인지도 모른다는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죠. 단테의 지옥편을 보면 9개의 형태의 지옥이 있잖아요. 한국은 지옥쯤에 어디에 있을까 생각을 하면 더 험한 곳에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일제 강점, 분단의 경험, 동족이 서로를 학살하던 한국전쟁의 경험이 있었고. 서양에서는 길게는 400년이 걸렸던 근대화 산업화를 우리는 몇십년 만에 했어요. 정상적인 속도를 살아온 사회가 아닙니다. 서양의 10배빠른 속도로 했기 때문에. 광고도 있었지만 “미친속도” 그것이 우리 삶의 속도였던 것 같고, 무리한 부분을 빨리 진행하기 위해서 독재가 있었던 것 같고요. 신자유주의화. 그리고 지난 봄있었던 세월호 참사까지 보면 지옥 속에서도 가장 험한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강좌가 3월에 시작했죠? 두 번째 강좌가 4월 16일 전 이었일테고 세 번째 강좌가 5월, 6월에 이어서 있었을텐데 4월 이후 5월 이후 세월호 이야기가 빠진적이 있나요? 저는 그 이후 여러 모임이나 포럼에서 강연도하고 패널로 참여도 하면서 주제가 무엇이든 결국은 세월호 이야기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세월호는 그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고 하는 절대주제가 되었을 정도로 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야기도 그 근본에서는 세월호 참사와 성찰의 필요를 이야기하게 될 것 같아요. 제가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너무 비관적이지 않냐고 하실 수도 있는데, 얼마 전에 한 모임에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장해익 선생님이 오셨어요. 장해익 선생님께 질문을 드렸어요. ‘사회정치현실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고 정신이 없기 때문에 생명이라는 근원적 화두를 들고 씨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또 사회정치경제적인 참사가 일어나는 악순환이 생긴다. 무엇을 해야하냐’고 여쭤봤어요. 장해익선생님이 조금 침묵을 지키시다가 아직도 멀었다고.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더 큰 참사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될때만이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비관을 하셨는데 그 말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 세월호 참사도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어떻게 이것보다 더 큰 참사를 어떻게 견뎌야 하냐’고 여쭤봤더니 침묵하셨어요. 그것은 정직한 비관이었고 그것을 부정할 수 없는게 솔직한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지옥의 이야기가 고통스럽고 과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정직한 비관입니다. 지옥과 같은 현실에서 출발할 때 우리의 희망이 구체적인 근거, 바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여태까지 종교학 신학을 배우면서 종교 전통에서 배워온 것은 이것입니다. 현실을 있는그대로 보라. 아름답게도, 너무 절망적으로도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종교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가르침 중에 하나는, 불교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이지만 삶의 현실이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 고통으로부터 해탈, 구원, 해방의 길이 곧 종교라고 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종교는 구원론적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나는 단 한가지를 가르친다. 고통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두 가지인데 불교에서는 한 가지라고 하죠. 이 말은 고통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그 앎 자체가 구원과 해탈의 길이라는 점에서 하나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죠. 십자가는 고통의 길인데 그 길을 지날 때만이 부활이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교 안에서도 고통과 구원이라는 종교 본연의 길을 십자가로 상징한 것 같습니다. 저는 모든 고통은 사회적이라는 것에서 출발하려고 합니다. 고통의 세 차원이라고 한다면 신체적, 심리적/영적, 사회적 고통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는데, 이 세가지를 다른 말로 하면 관계적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를 통해서 얻는 것이기도 하고, 관계를 통해 표현되기도 하고요. 심리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분노, 수치 여러 감정적 고통은 결국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잖아요. 영적 고통도 마찬가지이고. 사회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저는 신체적 고통도 사회적이라고 봐요. 누구나 다 아프고 병이 들죠. 어떤 사람들은 쉽게 나을 수 있음에도 사회경제적 여건이 안 되서 죽는 사람들이 많죠. 반면 고치기 어려운 병도 어떤 사람들은 최첨단 의료시설로 낫는 사람도 있고요. 해방신학자 가난한 자의 정의를 ‘자신의 정해진 수명보다 빨리 죽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굶주림이든 병이든 어떤 자는 그걸로 죽지 않지만 어떤 자는 그것으로 죽죠. 그런 면에서 모든 고통은 사회적 고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희망이 있죠. 사회적 고통, 관계적 고통은 다른 관계를 회복하게 되면 극복할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고통의 사회적 차원을 이해하면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그리스도교 관계영성의 세 차원을 ‘감수성’, ‘책임성’, ‘저항’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감수성’은 response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인가에 바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이 ‘감수성’에 기초해있죠. 첫 번째 예로, 출애굽기의 말씀을 보면 ‘고통받는 이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느님’. 민감하게 듣고 반응하시는 하느님이죠. 출애굽기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짓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온다. 또한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못살게 구는 모습도 보인다. 내가 이제 너를(모세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어라.” 신학, 종교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을 텐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정의는 한국의 민중신학을 만든 산업록 선생의 정의입니다. ‘신학은 민중의 부르짖음에 대한 메아리다.’ 민중의 울음, 고통. 고통받는 자들의 소리에 대한 메아리. 그것이 신학이고 종교라는 것이죠.
두 번째 그리스도교 관계영성의 민감성, 감수성을 보여주는 것이 마르코 복음서에 나오는 12년 동안 겪었던 하혈증을 겪었던 여성의 치유이야기 아시죠. 이 이야기에서 흥미롭고 놀랍게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예수님의 의식과 의지보다도 빨리 나왔다는 겁니다.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혈증으로 고통 받는 여성이 다가와서 예수님의 몸의 옷깃이라도 잡으면 나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옷깃을 만졌는데 손을 대자마자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았어요. 재미있는 것은 예수께서 그때서야 당신의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아차리신거죠. 정상적인 관계로 본다면 고통받는 사람이 찾아오고,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고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알아차리고 고쳐줘야겠다고 결단해서 힘을 방출을 하셔야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신도 모르게 힘이 빠져나간 것이죠. 그만큼 예수님의 사랑, 치유하는 힘은 민감했다는 것이죠. 예쉼의 생각과 의식보다도 빨리 유출된는 상황. 그것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민감하게 고통받는 자들에게 반응하는 것. 여러 가지 사랑의 표현이 있을 것 같은데, 저는 이것을 ‘나도 모르게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사랑이 빠져나가는 감수성이 그리스도교의 감수성인 것 같습니다.
두 번재는 responsibiliti책임성입니다. 첫 번째는 고통을 당하는 자에 대한 책임성입니다. 창세기 4장 9절을 보면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모른척하죠. 하느님이 동생 아벨이 어디있냐고 물어봤을 때 카인은 이렇게 답합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하지요. 나와 무슨상관있느냐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고통받는 사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그 사람과는 무관하다는 선언이자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사회적 고통의 대부분도 가장 큰 장애가 무관심과 망각이죠. 4월 16일 이후 200일이 가까이 되어가고 있는데 저희 교회에서도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하는 예배 하는데 유가족이 이야기하시는게 잊히는 것이 제일 두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너무 빨리 잊어가는 것 같아요.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되었을 때 광주의 기억을 국가의 공식적 기억에서 폭동-> 민주화 바꾼 기간이 17년이었습니다. 1996년? 97년에 국가적으로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바뀌었죠. 제주 4.3은 사십몇년 더 지난 후였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비참하게 비통하게 죽어간 사람을 기억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몇 달도 안되었는데 기억을 지우려는 우리 사회의 무관심, 무책임성 그것을 성찰하는 게 종교인의 몫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고통을 당하는 자에 대한 책임성은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죠. 여러 형태로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연대 하는데, 두 번째 책임성은 어렵습니다. 고통을 일으키는 자에 대한 책임성에서는 카인의 말처럼 ‘내가 무슨 상관있냐’고 말하고 싶죠. 내가 히틀러에, 홀로코스터에, 수많은 학살과 폭력에 내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죠. 그런데 유대인인 랍비 사상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소수지만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세월호가 침몰한 것은 몇 명의 선박직 승무원과 몇 기업의 책임자뿐만 아니라 탐욕의 체제를 살아가고 타협하면서 그 안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고자 했던 우리 자신의 연루되어있을 겁니다. 희생자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가해자와의 관계도 책임성을 인정할 때 문제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의 선생님이 카톨릭 신학자인 폴리터 교수인데, 에살바드로에 학살이 많았기 때문에 암살을 막으러 에살바르도에 내려가려고 하신적이 있습니다. 그때 버니 그레스먼이라고 불교선사가 계세요. 그 분을 80년도에 만나서 같이 수련을 하고 독대를 했죠. 그랬는데 버니 그래스먼 선사가 ‘암살자들과 당신이 하나라는 것을 알 때에만 당신은 암살자를 막을 수 있다’고 하셔서 이분이 평생의 화두가 되었어요. 그 말을 우리가 지금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세월호를 침몰시킨 이들과 우리가 하나라는 것,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저항의 차원입니다. 고통을 일으키는 악의 체제에 맞서는 저항이죠. 유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악의 체제에 맞서는 저항이 일찍이 자리잡았던 것 같습니다. 성서의 예언자 전통이 그렇고, 그리스도교 사회 운동 전통이 그렇죠. 20세기 급진적으로 등장했던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도 그렇고요. 저는 이 점이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악의 체제에 맞서는 것과 사랑, compassion이 분리되어있는데 기독교에서는 자비로움과 정의를 위한 저항, 대결이 항상 같이 있죠. 이것이 그리스도교적인 관계영성의 독특한 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것이죠. 토로테 쥘레라는 독일 여성신학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십자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랑은 우리를 십자가에 이르게 한다.” 십자가의 고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다보면 결국 십자가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적인 사랑 자비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고통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응답이 무엇일까 고민해야 합니다. 민감성 감수성, 책임성은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같이 해나갈 수 있어요. 그런데 마지막 저항의 측면에서는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근본 문제는 이것이죠. ‘복음은 정치적 균질성을 요구하는가?’ 여기 계신 분들은 각각의 공동체에 있으실텐데 제가 작년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느껴진 변화 중에 하나가, 제가 8년정도 있다 왔는데 유학가기 전보다 사회정치적 대립이 더 격렬해진 것 같아요. 입장이 다르면 종북으로 몰아붙이거나, 서로를 악마화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대립의 골이 훨씬 더 깊어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안에도 그리고 심지어 종교 안에서 화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종교도 연루되어있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정치적 차이로 인한 갈등과 괴리, 대립이 격렬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세월호 이후에도 마찬가지더라구요. 이념의 문제가 종교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고 4월의 고민은 그렇게 나눴지만 5월 이후 지금까지는 정치화가 된 거예요. 저도 노란 뱃지를 달고 있지만 어떤 선생님 한분이 40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회에 리본을 달고 갔더니 종북이냐고 묻더라는 거예요. 애도의 표현조차도 하나의 정치적 표현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는 겁니다. 정치적으로 분열되어있을 때 그리스도교에서 가능한 선택을 세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우선적 선택입니다. 해방신학의 근본적인 입장중에 하나입니다. 민중교회는 기초공동체, 바닥공동체에서 ‘가난한 자를 위한 하느님의 우선적 선택/사랑’. 하느님께서는 사회적 약자, 아파하는자 억눌린 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더 많이 사랑하신다는 것이죠. 물론 하느님의 우선적 사랑은 부유한 자에 대한 미움은 아니죠. 하느님의 사랑이 다르게 표현된다고 봅니다.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품고, 안고 회복시켜줌으로서 사랑하시고, 부유한 자에 대해서는 그들의 잘못을 멈추게 하는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당파적 선택, 우선적 선택이 그리스도교 사랑의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제가 요새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한 교회에서 같은 정치적 입장을 취할 수 있을까. 저희 공동체에서도 고민을 하고 있고, 제가 개신교쪽 선배 목사를 많이 만나봤어요. 상담도 받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대부분의 교회에서 정치적으로 다른 분들은 같이 하기 힘들다는 거예요. 정치적 입장이 분명하면 결국 떠나시거나 아예 어떤 정치적 표현도 하지 않으면 남아있거나. 정치적 다름을 나누고 차이를 넘어서 공동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일이 한국 교회, 아마 세계교회에서도 많지 않을거란 말이죠. 그래서 처음 들었던 근본물음. ‘복음은 정치적 균질성을 요구하는가’ 이 고민에 대해서 답을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말씀을 드리면 다 아실 교회가 있었는데 80년대 독재와의 정면대결이 필요했던 시기에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세요. 악마는 교회안에도 있습니다. 독재에 맞서는 나의 설교를 정치설교라고 하고 정치목사라고 한다면 그런 분들이 마귀입니다고 설교시간에 선포를 하셨어요. 그리고 눈물을 흘리셨어요. 청년들은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했고 그날로 민주화운동을 반대하셨던 분들은 다 공동체를 떠나셨죠. 그런 극단적 선택이 우선적 선택의 한 형태일 수 있다는 거예요. 물론 80년대 급박한 상황에서 교회의 선택이 아프지만은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21세기에, 다원화된 시기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것인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반대쪽도 가능하다는 거예요. 부유하고 권력있는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교회도 있다는 거죠. 한국의 우파교회들, 대형교회들은 아주 일관되게 정치권력 자본을 편들어 왔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당파적 선택만큼 부르주아를 위한 당파적 선택이 가능하다는 면이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세월호 이후, 가톨릭에서는 교종이 왔다 가시면서 아파하는 자와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많은 분들을 감동시켜주셨죠. 개신교는 6월 4일이 지방선거였고, 6월 1일에 아주 큰 대형교회에서 기도회가 있어요. 현직 대통령도 참석했고.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로하는 기도회였는데 유가족은 단 한명도 없었어요. 어떤 면으로 보면 지방선거 바로 전에 정치적 면죄부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죠. 지금의 대형교회들이 누구를 편들고 있는가 물으면 당파적 성격이 더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나치정권때 독일 교회도 제3제국을 지지했고 유대인 학살을 침묵했고, 이태리에서는 바티칸이 무솔리니의 학정에 협력을 했었구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가난한 자 반대편에 우선적, 당파적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가능한 응답은 불의의 인식과 희생자를 향한 자비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되는 것은 정의는 하나가 아니라는 거예요. 정의들이 복수로 대립하고 충돌한다는 거죠. whose justice를 물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흑과 백의 대립사회가 아니라 복합적으로 어둠과 악이 연결되어있는 상황에서는 누구의 정의인가를 물으면 답이 잘 안 나온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정의에서 출발하지 말고 불의에서 출발하자는 거예요. 비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자는 겁니다. 이 생각의 영감을 받은 자가 에드워드 스킬레벡스입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 중 하나이시죠. 에드워드 스킬레벡스도 같은 고민을 했어요. 20세기 현실에서 악을 보면서, 그리고 그 악이 정의와 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것을 보면서 정의로부터 출발하는 것의 문제를 보셨던 것이죠. 당장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광주 학살 이후 등장했던 정권의 구호가 뭐였어요. ‘정의사회구현’. 당의 이름은 ‘민주정의당’이었죠. 무엇이 정의인가를 물으면 악을 행하는 사람도 악에 맞서는 사람도 정의를 말하게 됩니다. 반면 불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의외로 우리는 쉽게 합의에 이를 수 있죠. 저기 한 아이가 굶어죽고 있는데 정의로운 것인가요? 불의한 것이죠. 그리고 저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수없는 음식이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어요. 여기에서의 빈곤이 여기에서의 풍요의 원인이 되고 있죠. 나의 안녕은 저들의 불안과 고통의 대가이죠. 이것은 의롭지 못하죠. 이것을 불의라고 지목하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동학대, 인종차별, 홀로코스트, 테러와 같은 부정성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경험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반응이 나온다는 것이죠. 내가 정치적으로 진보든 보수든 첫 번째 반응은 it shouldm't be. 부정적 경험의 대조로 저러면 안된다는 반응이 나온다는 것이죠. 동양으로 본다면, 맹자의 측은지심이 그런 것이 잖아요. 맹자는 그런 마음을 갖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고 합니다. 인간은 부정성의 경험에 대해 저래서는 안된다, no라고 할 수 있는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출발하게 되면 정의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더 나은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든다면 굶어가는 아이를 두고, 정치적 진보는 그 아이가 굶주림에 있는 상태를 위한 사회구조적인 변화를 고민하겠죠.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관심이 없는 분들은 내가 빨리 돈을 모아서라도 뭘 보내서라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불의에서 출발한다면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생기고,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저에게 영감을 주시는 아브라함이라는 분이 쓰신 이야기를 읽어드릴게요. “예언자들이 정의와 의에 그토록 몰두하는 까닭인즉 불의를 그만큼 민감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정의가 좋은것이며 바라고 나아갈 최고이상이라는 것은 모두가 받아들이는 상식이다. 부족한 것은 불의라는 괴물을 제대로 인식하는 일이다. 모든 시대에 도덕론자들은 덕목들의 가치를 유창하게 노래하였다. 예언자들이 그들과 다른 점은 불의와 억압의 멍울을 가차없이 벗기고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악들을 명확하게 밝혀냈다는데 있다. 그들은 정의가 정의가 무엇인가에 정의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관심하는 것은 궁지에 몰린 정의, 정의를 실천해야할 자들이 오히려 정의를 경멸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예언자들도 정의 이상을 선포하고 말하는 것이 예언자의 관심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예언자들의 관심은 고통의 현실, 정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불의의 현길에 대한 고발. 이것이 근본 관심이었다는 것이죠. 이것 역시 스킬레벡스의 대조경험과 만날 수 있는 예언자 전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희생자 중심의 관점, 희생자와의 관계 접촉이죠.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복잡한 일이 있을 때 여기서 누가 고통을 겪고 있는가, 희생자는 누구인가 그것을 먼저 생각하고 희생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문제의 많은 부분이 해결될 수 있어요. 최근에 있었던 주제중 하나가 희생자들의 윤리에 관한 것이거든요. 세월호 이후로 유가족들이 계속 힘들어지고 있는데 대리기사 폭행사건, 김영오씨의 사생활과 정치적 입장들, 윤리적 문제로 유가족들에 대한 공격이 있었어요. 유가족들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윤리적 문제가 활용이 되었는데 희생자의 관점에서 사태를 보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요. 한 기도회에서 유경근 대변인이 와서 이야기를 하시는데 울고싶다고. 그리고 누가 좀 대신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해요. 나는 유가족인데 울고 싶은데 그런데 이분들이 계속 거리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죠. 이분은 견디고 견디고 울면 진다는 생각으로, 예은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밝히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빠의 임무라고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는데 한달 전부터는 감정조절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분들은 윤리적이고 정상적이고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자기들의 아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던 부모들이고. 우리 역시도 4월에는 매일 울고 뉴스봤었잖아요. 그때는 정상적으로 사는게 비정상이었던 시절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은 그분들한테 우리에게 요구되거나 어떤 면에서는 더 높은 정도의 윤리를 요구하는 것이죠. 희생자중심의 윤리 관점이 아니라 우리의 개념적 윤리를 가지고 그들도 똑같이 평정을 유지하고 사고 안치고 정치적으로 세련되고 협상 잘하고 흔들림 없이 우리 앞에서 모든 프로세스를 차근차근 진행해가는 일을 지지자들도 반대자들도 요구해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희생자 중심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윤리 담론 프레임에 갇히면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놓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희생자 중심의 관점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들과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유가족을 비난하는 분들은 유가족을 만나본적이 없는 분들이에요. 신영복 선생님이 한번 그런말씀을 하셨어요. 관점이 관계를 결정하는게 아니라 관계가 관점을 결정한다. 정치적 관점이든 사회적 관점이든 누구와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거예요. 고통받는자, 희생자들과 관계를 맺는다면 우리는 희생자 중심으로 가겠죠. 그런 면에서 고통받는자와 접촉하지 못했던 현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젯밤 꿈을 하나 이야기 해드릴게요. 꿈을 많이 꿔요. 이 자리에서 5월에 고혜경 박사님 모시고 세월호와 꿈에 대한 포럼을 했거든요. 제가 꿈에 관심도 많고 꿈을 통해 많이 배우는데 강의 때문에 그랬는데 어제 인상적인 꿈을 꿨습니다. 제가 전쟁중이었어요. 하늘은 검고 곳곳에서 붉은 화염이 피어오르고 포성과 총성이 연이어 들리는 전쟁터에 제가 군인으로 있었어요. 저 쪽에서 동료병사인데 창백하고 몸이 야위었고 작은 친구가 오더니 쓰러지는 거예요. 제가 그 친구를 안았는데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운 것을 느꼈죠. 그런데 우리 진영에는 군의관이 없었어요. 그래서 무전으로 적들에게 무전을 칩니다. 지금 이쪽에서 한 젊은이가 죽어가는데 의사가 없으니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보내겠다고 하는 거예요. 계속 총탄은 날아오고 그 친구와 총탄을 피해가면서 벽에 기대어 앉아서 적이 보내주는 의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전쟁터에서 하나라도 더 죽이려는 상황인데 적이 아군을 구해주러 오는 상황이잖아요.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불가능한 가능성’. 불가능한 가능성이 지금과 같은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상황에서 종교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죽어가고 있는 희생자, 피해자를 끌어 안는다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 번째는 갈등을 품는 공동체 이것이 .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인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을것인가
종교공동체에서 정치적 사회적 차이로 인한 갈등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제가 어떤 방법을 알려드린다기 보다는 같은 고민을 나눠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갈등을 경험하면서 느끼는 서글픔이 있어요. 제가 어제 저의 아버지, 온 가족이 모여서 주일 저녁에 식사를 같이 했어요. 추석 때 만나고 처음이었어요. 거의 한달 넘었나요? 가장 가까운 가족도 한 달에 한번 만나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저희 교회에서는 얼마나 자주 만나죠.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 그리고 더 열심히 나오는 그리스도인들은 주중에도 만나고 이렇게 강좌에서도 만나면 더 자주 만나겠죠. 그렇게 자주 만나는 자매 형제들이 서로의 다름, 차이 때문에 갈등하게 되고 갈등이 미움을 일으키고 서로 해치게 된다면.. 마틴 루터킹이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일요일 11시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시간일 수 있다. 가족보다도 친한 친구들보다도 신앙의 공동체가 다름이 미움의 이유가 된다면 얼마나 일요일이 얼마나 외롭고 괴로운 시간이겠어요. 갈등의 가능성 속에서 공동체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무엇일까. 이것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주제입니다.
먼저 2000년 전으로 기원으로 돌아가봅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희한한 모임 아니에요?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분도 있었고 어부, 농부, 당시 죄인으로 배제되어던 창녀, 병자. 요셉처럼 부자도 있었고. 니고데모같은 종교지도자도 있었고, 심지어 고넬과 같은 백부장도 넓은 의미에서는 예수의 공동체에 속해있었죠. 같이 하기 힘든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었단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합니다. 그들의 욕망과 목표도 제각각이었죠. 어떤 분들은 정치적 해방을 추구했을 것이고, 어떤 분은 내면의 평화를 원했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공동체에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았다는 거죠. 그리고 갈등이 존재했었다는 거죠. 서로 다르니까 서로 목표도 다르고 삶의 방식도 다르니까. 오죽하면 예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쳤겠어요. 그러니까 예수의 공동체는 갈등이 없는 공동체가 아니라 갈등을 품은 평화의 공동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부 강의 시작하면서 제가 갈등없이 사는 분이 계시냐고 물으니까 다들 웃으셨죠. 갈등은 우리 삶의 일부라는 거죠. 갈등의 존재 자체가 공동체의 근본적인 결함 자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갈등을 통해서 우리가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성령은 갈등을 통해서도 공동체를 성숙시킨다”고 했습니다. 갈등이 반드시 분열과 대립과 충돌의 원인이 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갈등을 잘 알아차리고 대하고 반응한다면 갈등을 창조적인, 성숙의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죠. 제가 석사과정 때 종교인류학을 공부 했어요. 샤머니즘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아이티 부두교라고 하는 샤머니즘 영향이 강한 종교전통이 있죠. 부두교에서는 삶의 문제가 없거나 갈등이 없으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당연히 삶에서는 문제와 갈등이 있어야 하는데 평정, 평화의 상태가 계속 유지되면 밸런스가 깨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의례를 통해서 갈등을 일부러 불러일으키는 거예요. 갈등이 있는 삶이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삶이라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본다면 갈등을 통해서 우리가 오히려 배워야할 것, 성숙을 위한 자원으로 전환시킬 것이 있는지 성찰을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갈등의 반대는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 다름의 존중과 공존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커 말러는 이렇게 이야기하죠. “사랑의 최고 형태는 차이를 없애지 않는 친밀함이다”. 그러니까 공동체 안의 친밀함, 공동체 안의 사랑은 차치와 다름을 없애지 않는다는 거예요. 다름을 품고 친밀해지는 단계가 공동체의 사랑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정치적 다양성은 공동체 안에 있으면 안 될까요. 다른 다양성이 필요하다면 정치적 다양성도 필요한 게 아닐까요. 이게 제 고민입니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이상을 가지고 현실로 들어오면 답답하죠. 심지어 가족관계에서도 정치적 차이로 인해 얼굴 붉히고 그러잖아요. 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제가 배워보고 있는 거예요. 한 번 나눠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갈등의 에너지를 공존과 공생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방법에 대해서인데, 에릭 로우는 성공회 사제입니다. "은혜의 공간(Grace Margin)", 경계로 보셔도 될 것 같은데, 이러한 개념을 만드셨어요. 그리고 이것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만들고 계시는데, 에릭 로우가 말하는 핵심은 이거에요.
safe zone(세이프존, 안전지대) - fear zone(피어존, 두려움지대)
왼쪽엔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안전지대 안에서는 사람들 간에 정치적으로 입장이 같고, 삶의 방식도 같도, 신앙의 방식도 비슷하고, 말이 잘 통하고, 친밀하고, 다정하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자기를 다 오픈하겠죠. 굉장히 편안하고 안전한 지대입니다. 오른쪽에, 안전지대 바깥에 피어존이 있습니다. 두려움 지대라고 할 수 있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와 정치적 입장이 달라요. 사는 방식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신앙도 달라요. 세이프존에서 피어존을 바라보면, 저기는 다 내가 싫어하고 같이 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문제는 피어존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어떻게 느낄까요. 마찬가지로 서로에겐 세이프존처럼 느끼겠죠. 피어존에서 세이프존을 보면, 세이프존은 피어존이 되는 거예요. 교회 공동체, 마을 공동체에는 두 개의 세이프 존이 있는 거죠. 내지는 두 개 이상의 여러개의 세이프존이 있습니다. 문제는 세이프존이 강해질수록.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내적 동질성이 강해질수록 피어존이 강해진다는 거예요. 세이프존이 강해질수록 피어존도 강해지고 더 많이 생긴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서로 대립하고 격돌,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게 삶의 모습이예요. 편한 것, 나와 말이 통하는 곳을 찾는 것이 우리 자연스러운 욕망이니까요.
에릭 로우가 제안한 것은 세이프존과 피어존 사이에 그레이스 마진(grace margin, 은혜의 공간)을 만들자는 겁니다. 이것은 경계, 울타리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세이프존과 피어존이 만나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은혜의 공간이라고 번역을 하고 싶은데요, 은혜의 공간을 만들고 은총의 공간에 참여하는 방식을 찾아보자는 겁니다. 그레이스 마진을 단순한 공간이라고 보기 보다는 하나의 경험,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좋겠죠. 피어존에 있는 사람들과 세이프존에 있는 사람들을 그레이스 마진으로 초대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들어갈 땐 약속을 정해야 합니다.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을 정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그레이스 마진에서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이번 그레이스 마진의 목표라고 합시다. 여기 들어갈 때 약속을 합니다. ‘여기서는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나누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않습니다’. 행동, 액션을 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로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와 함께 여러 종교적 상징과 기도와 음악과 침묵의 의례들을 포함하는 거예요. 작은 기도회처럼 그레이스 마진을 경험하는 거죠. 시간도 정해서 그 시간이 끝나면 미진한 상태여도 끝내는 겁니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소통하는 것. 서로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이 그레이스 마진의 내용과 방식입니다.
우리가 갈등을 겪는 이유가 정말 생각이 달라서인가요? ‘말’ 때문에 겪지 않아요? 오늘 신흥수 선생님이 와 계시는데, 선생님은 비폭력대화를 한국에서 일찍부터 하신 분이에요. 대부분 말과 표현 때문에 갈등이 대립이 되고 증오와 미움을 일으키죠. 그래서 에릭 로우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R.E.S.P.E.C.T. 리스펙트. 존중하다, 존경하다의 뜻이죠. 이것이 그래이스 마진에 들어와서 대화하는 방법이에요. 리스펙트의 첫 글짜를 따서 이야기를 합니다.
첫 번째는 R. responsibility, 책임성입니다. 아까 말씀 나눴던 책임성과 다른데요. 자기가 하는 말, 느끼는 것에 대해서 책임 있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강조하는게 I statement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 생각은 이렇다.’ 대화를 할 때 자기 생각을 그룹 전체의 생각인 것처럼 강조할 때가 있죠. 당신이 틀린 것이라는 절대적인 진술이 아니라 ‘내 생각에는’ 당신의 이야기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말과 느낌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E. empathy, 공감이죠. 다른 말로 하게 되면 공감적 경청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분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듣는 것입니다. 대화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공감하면서 경청하는게 아니라 내 생각을 먼저하 잖아요. 상대방 이야기의 헛점을 잡아내서 잘 반박할까. 이것은 듣는게 아니라 이미 말을 시작한거죠. 이미 자기 말을 하고 있는거죠. 이런 면에서 공감적 경청은 그 사람 입장에서 왜 저런 말을 하는지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고 그 사람의 사상의 출처가 어디인지 고려해 보는 것이 공감적 경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S, sensitibity, 민감성이죠. 어떤 사람에게는 대화가운데 조용히 침묵으로 있는게 공감의 표현일수도 있고 수긍의 표현일수도 있죠. 반면 어떤 사람에게는 조용히 침묵하는게 강한 no의 표현일수도 있는거 잖아요. ‘말’뿐 아니라 그 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 눈빛, 제스쳐, 자세를 통해서 상대가 불편해하는지 공감하는지를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그레이스 마진에서의 대화는 모든 감각과 모든 몸과 마음의 기관이 총동원되어서 집중해야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마인드 플레이스라고 하죠.
네 번째는 P, ponder, ‘생각하다’ 입니다. 생각하다의 여러 영어표현이 있는데 ponder폰더는 깊이 생각한다, 곰곰이 생각한다가 될거예요. 어떤 말을 듣고 쉽게 판단하는 게 아니라 곰곰이 생각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다섯 번째는 E, examination, 점검하다, 분석적으로 성찰하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자신에게 묻는 거예요.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왜 화가나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화가나는 이유는 저 사람이 나를 도발해서 아니면 나를 비판해서 일까. 아니면 저분은 자기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내 안에 무엇이 그 말을 내 분노의 이유로 만든 것일까. 다시 말하면 내 화와 분노가 상대방 때문인가 나 자신 때문인가를 성찰해보라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생각에 대한 생각’이라고 해도 좋겠죠.
여섯 번째는 재밌으면서도 중요한데, C, confidentiality, 비밀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크릿secret과는 달라요. 이것은 개인적 관계에서 비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임을 함께 한 사람들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대외비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레이스 마진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공적인 이야기이죠. 간단히 말하면 뒷 담화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떤 문제를 가지고 그레이스 마진에서 대화를 나눴는데 결론이 났을 수도 있겠죠. 예를 들어 우리 공동체에서는 세월호 특별법에 관해 전문가를 모시고 들어보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이것만 이야기하면 되는데 누구의 이런 이야기 누구의 저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공동체가 깊은 이해를 이루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된 거예요.
일곱 번째는 T. trust. 신뢰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겁니다. 무엇을 신뢰하는 것일까요? 에릭 로우가 말하는 ambiguity, 모호성을 신뢰하라는 거예요. 제게 가장 큰 영감을 주었던 것인데. 그레이스 마진의 목표는 합의에 이르는 것, 결론을 내리는 것, 옮고 그름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깊이 하자는 거예요. 제가 속한 교회에서도 대화의 규칙을 정하곤 하는데 1번이 뭐냐면 “대화의 목적은 합의가 아니라 이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대화는 급진적인 불일치도 수용한다” 입니다. 대화를 통해서 반드시 일치에 이를 필요가 없어요. 서로간에 이해가 깊어지면 그것으로 됩니다. 저는 대화의 목적은 대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레이스 마진에서 모호성을 신뢰한다면 서로에 대한 신뢰이기도 합니다. 모호성과 다름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는 것에 대해 신뢰를 갖는다면 앞의 모든 것이 부차적인 것이 되겠죠. 에릭 로우가 말한 그레이스 마진의 핵심적인 방법입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 정치적 차이 사회적 문화적 차이를 갖는 사람들이 의례로서의 대화 기도로서의 대화를 한다면 공동체에서 갈등으로 인한 고통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교회가 사회 속에서 그레이스 마진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국사회는 선거결과로 나뉘어 지잖아요. 모든 사회영역이 정당에 대한 선호도에 따라서 갈라지듯이 정치적으로 균열되어있고 비무장지대가 없어요. 다들 전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 교회가 비무장지대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게 교회의 사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사명을 감당하려면 교회 자체가 먼저 평화로워야 되겠죠. 팃낙한 스님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평화를 원하면 평화로워져라”. 교회가 은혜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평화로워지고, 모호성을 받아들이면서도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대화의 방법을 이야기했을 뿐이고, 더 깊이 들어가서 신앙공동체는 영성 수행으로 가야겠죠.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회영성, 관계영성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교적 마음 챙김 christian mindfulness라고 하는 것이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스스로 평화가 될 수 있게끔 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어서는 영성’이라는 겁니다. 이 영성의 의미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넘어서는 영성입니다. 영성을 찾기 위해서 숲으로, 사막으로, 동굴 속으로 들어가지만 사막 안으로 들어가서도 세상보다도 세상적인 욕망에 시달릴 경우가 많잖아요. 사막은 결코 평화로운 곳이 아니죠. 제가 메트로폴리나 뮤지엄에 갔을 때, 사막으로 들어간 성 안토니의 그림을 보았습니다. 안토니가 성경을 읽고 있어요. 그런데 악마들이 성경을 옆에서 잡고 있어요. 가장 평화롭고 영적인 곳에서 성 안토니는 격렬한 전투를 했다는 것이죠. 사막 안에서도 세상의 욕망과 싸우기 위한 영적 전투를 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똑같이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세상의 욕망을 그대로 가져온 사람도 있지 않겠어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분들의 욕망,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욕망, 탐욕, 그것만큼 무서운건 없는 것 같아요. 그리스도인의 마음챙김이라는 것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어서는 영성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모든 수행자들에게 중요한, 특히 사회적 고통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수행자들에게 중요한 것인데 ‘관상과 활동을 일치시키는 영성’입니다. 가톨릭 전통에서는 이것이 잘 정착되고 계발되고 수행되어왔었죠. 이냐시오 성인의 컨템플레이션 액션. 관상과 활동이 구분될 수 있지만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베니딕토성인은 기도가 곧 노동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사회적으로 재해석한다면, 영적 수행(spiritual practice)은 사회적 실천(social practice)이고 사회적 실천은 영적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머튼도 ‘컨템플레이션은 샘과 같고 액션은 개울, 스트림과 같다. 개울이 없으면 샘에서 물이 솟아나도 소용이 없고 샘이 없으면 개울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죠. 항상 이 두 가지가 항상 같이있어야 한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근원으로 들어가면 사도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던 것, 예수께서 늘 깨어있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깨어있음’, ‘알아차림’, ‘잊지않음’이 기독교적 마인드챙김이라고 생각합니다. 틱낫한 스님도 기독교적 안에도 마인드플래이스가 있고 모든 종교전통에 있다고 하셨어요. 그것은 늘 깨어있는 상태, 잊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는지 잊지 않는 상태를 유지한다면 여러 형태의 갈등들을 공동체 성숙을 위한 자원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공간에서도 깨어있음으로 대화에 임하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면 고통의 현실속에서 관계적인 영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아들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제 아들이 5학년이에요. 3년전 쯤인가, 8살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제가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랑 놀아줄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의 죄책감이기도 했는데 매일 아침 스쿨버스 타는 곳에 데려다주는 5-10분 거리인데 아이를 학교 보내는게 일상의 시작이고 부분이었어요. 그 시간이 대화시간이고 놀이시간이었는데 스무고개처럼 알아맞히기 게임을 해요. 보통 사물이나 동물을 퀴즈로 내다가, 하루는 추상적인 개념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사랑’을 해봐야다고 마음먹고 이렇게 설명했어요. “이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이야” 그랬더니 아이가 “슬픔?”. 그래서 깜짝 놀랬죠. 8살 아이가 하는 치고 이상하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 슬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맞아요. 슬픔은 그런데 굉장히 관계적인 감정이잖아요 남의 아픔을 보고 슬픔을 느끼는 것. 맹자가 말했던 측은지심을 일으키는 것,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마음이고 그 슬픔에서 사랑이 나오고 슬픔의 원인을 극복하기 위한 행동도 흘러나오지 않는가. 우리가 사회적 고통과 그리스도교적 관계영성을 이야기할 때 다른 무엇보다도 남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온전히 느낄 수 있는게 그리스도교적 관계영성의 핵심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을 성찰할 수 있도록 부족한 저를 이 주제로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질의응답>
1.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고통인 세월호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회학자가 세월호 문제에 접근하는 내생적 접근과 외생적 접근이 있는데, 한국사회는 외생적 접근으로 가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사건을 보고 피곤하다, 지겹다는 표현을 한다고 합니다. 안산의 한 어머니가 플랜카드에 “어떻게 자식이 지겨울 수 있습니까”라고 썼다고 합니다. 현재 세월호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처벌하고,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가 중심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세월호 문제가 한국사회 전체를 건드리는 문제라는 의식을 가졌고 이것이 내생적 접근방식인데, 실질적으로 한국사회가 세월호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은 외생적 접근- 처벌과 보상-입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쪽으로 가고 있다면 처음의 문제의식과는 멀어지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갈수록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선생님 강의를 들으면서 종교인으로서 어떻게 계속 이 문제를 담아내고 살아가야 할지 마음 답답하면서도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속해있는 곳이 어느 공동체이든지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 접촉을 계속 유지해나가는 것 이 부분이 강의안에서 깊이 있게 다가왔습니다.
2. 강의 들으면서 마지막에 리스펙트는 저도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해왔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고 저의 방식을 보완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레이스 마진이라는 영역이 불교계에서 이야기하는 화생이라는 담론과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 영성가들은 같은 지점을 바라보면서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구나 느꼈습니다. 불교계에서 저는 화생, 야단법석이라는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야단법석은 종단 내부문제부터 시작해서 사회적 문제까지 두루 다루며 둥그렇게 앉아서 대화를 합니다. 거기에는 지향과 비전과 가치에 비해 방법론에 대해서는 부족한 지점이 있습니다. 야단법석의 한 방법으로 리스펙트 방법을 활용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다른 각도에서 질문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세월호 문제는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세월호 전에는 2-3년만 사회활동하고 시골에 내려가서 살아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건 터지고 나서 그렇게 살면 안 되겠다.. 제 인생에서 광주에 비견되는 사건이라고 스스로 규정합니다. 세월호 이후의 나의 삶은 어때야 하는가를 저도 계속 고민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와중에 아까 그리스도교 관계영성의 핵심으로서 책임성 말씀하시면서 고통을 당하는 자에 대한 책임성 뿐아니라 고통을 일으키는 자에 대한 책임성까지 말씀하셨잖아요. 세월호를 침몰시킨 자들과 우리가 하나다. 저는 오늘 강의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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