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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안내 2014년도 12월 최현민 수녀님 강연 녹취록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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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종교대화강좌
황금률의 영성(최현민)
한국사회 전체가, 많은 관계의 끈들이 끊어지고 있는 상황을 성찰하고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는 취지로 1년 강좌를 기획했습니다. 그런데 416 세월호 참사가 한국사회 전체를 지진이 일어난 느낌이라고 할까요. 전체를 뒤흔들어버리는. 세월호 참사를 많이 말씀하셨고, 저도 이 사건이후로 제 머릿속에서 이 사건이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었고요, 사회가 시름시름 앓고 있는 느낌을 받고 있었어요. 나는 어떤 부분에서 계속 아픔을 지니고 있는가 성찰하면서 제가 사회전체가 갖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에 큰 관심을 갖고 살지 않았다는 성찰이 먼저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도자라는 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제게 맡겨진 소임을 성실히 하면 되지 않나 하는 소극적인 일면도 제 안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 계속 세월호 참사를 당하신 많은 분들께 미안함을 넘어서 죄책감까지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제 관심이 이런 상황들을 계속 접하면서 제 마음이 사회영성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성이나 종교가 고착화되기가 쉽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울에 갇혀서 지내기가 참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이라는 시점, 또 오늘이라는 상황 안에서 영성, 신앙공동체가 끊임없이 재해석되지 않으면 박물관에 박제되는 영성을 살게 됩니다. 이런 성찰을 하면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강의내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을 보지 않고는 우리의 문제에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알아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와 관련된 것들과 관련된 자료들을 보면서 몇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경제학이 태동된 것이 역사가 길지 않습니다. 1776년입니다. 철학의 경우는 기원전으로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시작한 것은 역사가 아주 짧습니다. 이런 경제학이 한국과 전세계의 가치관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이 1776년에 나왔고 그 때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시장에 자율성을 주면 시장에 의해서 모든 것이 잘 생산되고 소비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방임주의라고 말하지요. <국부론>에서는 국가가 간섭하지 않으면 시장 자체가 잘 돌아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이론이 안 맞아 떨어지는 때가 있었는데, 경제 대공황이 왔을 때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케인즈 이론이었습니다. 정부가 아무 손을 쓰지 않을 때가 아니고 통화량을 증가시켜서 돈을 돌게 해야 경제가 회복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케인즈의 이론에 따라서 정부가 통화량을 풀어서 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케인즈 이론이 다시 벽에 부딪히는 상황이 도래했는데요 부시정부가 이라크와 전쟁을 일으키면서 약 3조달러를 썼다고 해요. 미국경제가 흔들릴 정도의 돈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돈으로는 3천조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3년의 해당되는 GDP에 해당되는 돈을 이라크 전쟁에 썼다는 것이 됩니다. 이 과정을 지나며 오일쇼크가 발생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석유는 단순히 자동차를 굴리는 정도의 원자재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생필품은 석유에서 나와요. 겨울에 꽃을 어디서나 살 수 있게 되는 이유도 석유에 의존합니다. 꽃, 샴푸, 화장품 모든 것이 석유와 연관되어있습니다. 석유값이 올랐다는 것은 물가의 상승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오일쇼크로 인해 물가가 상승하고 비용인플레이션이 발생 하게 되는 동시에 경제침체가 발생했습니다. 이것을 스테그플레이션이라고 합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함께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미국의 시카고학파가 통화주의자로서 신자유주의론을 들고 나오게 됩니다. 앞에 자유방임주의에서는 정부가 손대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국가가 개입하지 말고 통화량을 일정하게 유지하라는 논지를 펴게 됩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특징 중의 하나로 감세정책이 있습니다. 이 감세정책은 세금을 줄여주는 것입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임기시절에 나온 정책 중 하나인데, 감세가 되면 소득이 높아지게 되고 그로 인해 경기가 활성화되고 그에 따라 세금을 자동적으로 많이 낼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정책의 혜택이 고소득자에게 돌아간다는 거예요. 근로자의 50%는 소득세를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부자만 부가 축적되는 상황이 옵니다. 우리 사회 전체 안에 빈부의 격차가 심해진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시장체제가 가져온 사회현상은 빈익빈 부익부입니다.
신자유주의 시장은 종전의 경제체제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전에는 대량생산을 하면 기업은 대량소비를 촉구합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순환되는 경제체제였습니다. 한편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서로 경쟁을 하게 되니까 신제품을 계속 만듭니다. 아이디어를 계속 발굴해서 신제품을 만들어냅니다. 신제품을 팔아야하니까 끊임없이 기업이 하는 일은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는 것이죠.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인간의 욕구와 인간이 필요로 느끼는 개념 간에 혼돈이 오게 되는 거예요. 오늘날의 사치품이 내일의 필수품이 되는 것이지요. 아이폰5에 이어서 아이폰6가 나왔죠. 아이폰5에 대해서도 잘 몰라요. 그런데 신제품이 나오니까 아이폰5는 구닥다리가 되는거예요. 남들이 샀으니까 나도 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자극하는 겁니다. 현대사회 안에서 인간의 모방욕구. 모방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것입니다. 남이 갖고 있으니 내가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자본주의 사회가 무한한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고 자본주의가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나 유일신 신앙을 갖고 있는 분들은 무신론과의 대결이 아니예요. 우리 앞에 도전으로 다가오는 것은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는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어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본주의라는 종교시스템에 살고 있습니다. 편리함과 안락함에 나도 모르게 젖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자인 성정모 교수가 <시장, 욕망, 종교>라는 책을 내고 강연을 연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한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어느 외국 쇼핑센터의 앞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성당 앞 같아요. 아치형모습으로 되어있고 쇼핑센터에 들어가는 것이 성당에 들어가는 느낌을 주는 거예요. 착각을 일으키도록. 그 안에 들어가면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있어요.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어요. 행복은 사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행복이 거기에 들어가면 있다는 것이죠.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학생들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환상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환상인지 모르면서 환상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것 중에 하나가 ‘지속가능한 발전’입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런 표현을 많이 씁니다. 생태위기에 처한 지금 생태를 보존하면서 경제발전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죠. 그 일환으로 나온 것이 지속가능한 발전입니다. 지구 성장회의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생태도 살리고 경제도 발전하고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잘 들여다보게 되면 굉장한 모순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는 한정되어있어요. 우리가 쓸 수 있는 자연자원은 한정되어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무한한 경제를 개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왜 문제가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경제체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을까. 왜 힘을 모으지 못하고 저항이 일어난다고 해도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반복될까. 저는 그것이 우리가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발전과 성장이라는 환상 말입니다. 경제가 발전하면 우리 생활이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환상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혜택을 받게 되고 조금 더 인내하면 시장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을까. 이런 환상. 우리가 봐야 하는 실상은 점점 심화되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입니다. 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장합리성에 모든 것을 맡기면 된다는 시장만능주의가 빈부 불평등을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골프선수 타이거 우즈가 경기할 때 모자를 항상 쓰고 나옵니다. 나이키 모자를 쓰고 나옵니다. 그 사람이 나이키 모자를 한번 쓰면 수익이 5500만원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이키 모자를 태국의 노동자들이 만드는데, 하루 일당이 4000원이라고 합니다. 태국 노동자들이 38년을 일하면 5500만원을 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무수히 많지요. 지금 인구 70억의 35억인구는 겨우 생존하는 정도이고, 그 중에 10억은 극빈, 그 중 4억은 하루 1달러 미만의 생활. 그런데 매년 생산되는 곡물은 22억톤. 그 곡물이면 70억이 먹고도 남는 어마어마한 양. 왜 이렇게 재분배가 안 될까. 신자유주의는 이것을 희생의 논리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희생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종교적인 슬로건을 가져와 가난한 이들의 희생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합니다. 이 시스템이 돌아가려면 누군가 희생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 희생하는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인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갖고 있는 환상중에 하나는 인간의 본래성은 이기적이다는 것이죠. 이 환상도 깨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다윈의 종의진화를 보면 자연은 치열한 경쟁을 하는 곳이고 살아남은 자는 힘을 가진 자들 입니다.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사회생물학이라는 학문체계는 인간의 본성을 이기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표현을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책제목이기도 합니다. 개미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의 사회적 행동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내용이 사회생물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유전자에 의해 모든 행동이 좌지우지 되는데 이것이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세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단백질은 DNA에서 만들어지는데 DNA가 이기적이니 인간은 본래부터 이기적일 수밖에 없구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유전자론을 반박하는 사람들이 등장을 하게 됩니다. 인간의 행동이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아니 인간의 행동은 이성, 지성, 교육, 학습 그리고 문화의 산물에 의한 것이다. 미국생물학자의 리처드라는 사람이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리처드에 따르면 유전자는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없고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서 세포가 필요한테 세포자체의 협력이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유전자 자체가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이론을 편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약함 안에 이기적인 부분이 있지요. 그러나 이것을 인간의 본래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복음의 기쁨 54페이지를 보면 ‘무관심의 세계화’라는 표현을 하고 계십니다. 점점 갈수록 무관심이 심화되고 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교황님의 말씀을 빌리면 점점 사회가 불평등이 발생할수록 무관심이 세계화되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한 우리 자신의 무관심이 확산되면서 동정심을 무력화시키는 문화를 야기했다는 표현을 하고 계십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광화문에 단식하시는 분도 많았고 미사를 하고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유가족들과 함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제가 갔을 때 단식텐트 바깥으로 한 그룹이 외치고 있었어요. 그 단체가 어버이연합회였는데 연세가 드신 분들인데 그분들이 유가족을 향해서 ‘떼돈을 벌려고 하냐’, ‘자식들을 의사자로 만들려고 하느냐’ 이런 막말을 마구 하고 있었어요. 한국사회가 극과 극을 달리는 모습을 봤는데 저 사람들이 자기 자식이 그 배에서 그런 희생을 당했다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저 사람들은 유가족의 마음을 한번이라도 헤아려 본 적이 있을까. 어떻게 해서 우리는 조금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나 의문이었습니다. 앞부분에서 모방욕구에 대한 말씀을 드렸는데 이것 점점 무관심이 세계화되고 있는 현실에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 55항에서 무관심의 문화가 돈에 대한 우상적 숭배의 결과라고 표현하십니다. “사회적 불평등이 주는 도전적 과제는 복음과 신학의 가장 중심 주제이다” 교황님의 메시지가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직시하시고 그 문제에 교회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세상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돈이라는 새로운 우상은 안 된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래성이 무엇이냐고 묻게 됩니다. 요즘 뇌과학이 굉장히 발달되어 있습니다. 뇌과학 안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밀접한 연관을 맺습니다. 파충류와 인간은 진화의 관계안에서 볼 때 무관하지 않습니다. 파충류와 인간의 뇌를 비교하면, 포유류가 되면 파충류에게는 없는 부분이 확대됩니다. 뇌의 전두부분에 흰피질이라는 부분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파충류 뇌에서 하는 것은 먹고 번식하고 생존하는 부분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본능적인 부분이 다 있지요. 포유류의 뇌에 발달되어 있는 신피질은 타인에 대한 돌봄과 보살핌을 가능하게 합니다. 포유류는 태어나서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미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어미가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하고 먹이를 가져다 주어야 하고. 포유류는 모성애가 발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신피질에서 하는 역할입니다. 남을 보살피고 돌보는 쪽으로 인간은 진화되어 온 것입니다. 포유류가 가지고 있는 본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타적인 면을. 거울세포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미러유런이라고 해서, 여러분이 티비를 보고 계시면 주인공이 울고 있으면 같이 울게 되잖아요? 웃으면 같이 웃게 되고, 축구를 보면 흥분하게 되고. 이것이 공감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울유런이 있어서 같은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소방관들이 자기 목숨을 내걸고 불타는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119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어요. 그 사람들이 영웅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잖아요?’ 라고 답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입니다.
우리 안에 공감을 느끼는 신경세포도 있는데, 어떻게 하면 이것을 어떻게 더 발달시킬 수 있을까, 사회가 더 확장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맹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옥속장이라는 편에 제선왕이라는 왕의 일화가 나옵니다. 어느 날 왕이 대전에 앉아 있는데 그 아래로 제사에 쓸 소를 끌고 가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소도 자신이 도살장에 가는걸 느낀다고 합니다. 왕이 보기에 소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제선왕이 소를 놓아주라고 합니다. 그러자 소를 끌고 가던 사람이 그러면 제사를 드리지 말까요? 묻습니다. 그러자 왕이 소 대신 양으로 바꾸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정황은 모른채 왕을 비판합니다. 백성들은 왕을 비판합니다.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왕이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계유 불인인지심”라고 합니다. 참을 ‘인’이죠. 모든 사람에겐 ‘불인인지심’이 있다. 이것을 인간의 본래성이라고 봅니다.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 이것이 맹자의 성선설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맹자는 제선왕 안에서 이것을 본 것입니다. 그렇기에 왕은 왕 될 자격이 있습니다. 차마 내 눈 앞에서 소가 떠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소를 살리는 마음이 있기에 왕의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포인트는 ‘본다’는 것에 있습니다. 보는 것은 만남을 전제하고 이것은 관계를 말합니다.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자행되는 것은 만남이 부재해서 그렇습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가 오늘날의 인간관계를 황폐화시킵니다. 오늘날 의사소통의 수단은 훨씬 더 많이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사소통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얼굴을 맞대고 교감하기 보다는 핸드폰, SNS으로 의사를 소통합니다. 미국의 독서문화를 연구하는 마크 바울이라는 사람이 <가장 멍청한 세대>라는 책을 냈습니다. 번역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세대는 미국의 청소년 세대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멍청한 이유는 디지털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인쇄술의 발명보다 디지털 혁명이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만, 이것이 진화가 아니고 이탈, 탈선으로 아이들을 몰고 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세계의 모든 정보다 디지털을 통해 접할 수 있지만, 문제는 지식의 파편들을 접하면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지식의 파편들로 이루어진 지식의 세계는 도처에 널려있지만 이야기 주고받고 사진 주고받고 또래가 주목하는 기쁨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시민적 유산, 전통적으로 만들어온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디지털이 현대사회에 가져오는 폐해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많을지 모르지만 지혜가 없다. 그래서 미국 젊은이들이 멍청이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미국만 그런가. 한국은? 한국만 그런가? 유럽은?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날로그적 독서. 책 읽는 것, 책을 통해서 지식을 받을 것. 책을 통해서 보는 것은 지식이 이어지잖아요. 생각하고 성찰하게 합니다. 아날로그식 독서로 돌아가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붕괴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연구를 했는데 하루에 평균적으로 4시간 30분 전자기기 사용을 하는 6학년 100여명을 학생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50명은 평소의 생활을 유지하고 50명은 전자기기 사용을 못하고 캠프 안에서 5일간 생활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연구의 결과는 전자기기 화면을 많이 본 아이들보다 전자기기의 접촉 없이 캠프 안에서 활동한 학생들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 향상되었다고 합니다. 무관심이 확산되는 데에는 디지털 문화와도 많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드린 몇가지 환상들 외에도 많은 환상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데 여기서 어떻게 실상을 직면하고 그 안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면서 동서양 안에서 우리에게 전수되어 온 황금률, 황금률의 지혜안에서 그 실상을 볼 수 있는 지혜를 얻지 않을까 상상을 해봅니다.
관계에서 깨어야 되는 환상은 ‘너가 바뀌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직면해야할 실상은 우리가 결코 남을 바꿀 수 없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해야할 실상입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입니다. 우리가 매일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나를 바꿀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황금률입니다. 사실 ‘황금률’을 최초로 제안하신 분은 공자님이셨어요. 예수님 태어나시기 500년전에 공자님께서, 매일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서’라고 했습니다. ‘서’는 용서하다는 뜻이죠. 공자님이 말씀하신 ‘서’의 의미는 배려에요. 남에 대한 배려. 공자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어있다. 이것을 일이관지라고 표현합니다. 공자님께서 하나로 꿰뚫고 있는 ‘도가’ 있다고 했을 때 다른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그 중에 증자라는 제자에게 다른 제자들이 저 의미를 물었어요. 하나로 꿰뚫는 도가 무엇인지 아냐고 물어보니 증자가 하는 말이 선생님의 도는 ‘충서’다고 했습니다. ‘충’이라는 것은 가운데 ‘중’, 마음 ‘심’을 쓰고 있죠. 가운데 있는 마음은 나 자신의 마음, 속내를 의미합니다. 무슨 일이 있든지 내 마음이 중용을 지켜서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충의 의미에요. 내 마음이 최선을 다하는 것. 서라는 것은 같을 ‘서’에 ‘마음 심’자를 씁니다. 무슨일을 하는데 있어서 남의 마음을 헤아려서 일을 처리하는 것. ‘충’은 자기에게 충실한 것입니다. ‘서는’ 남에게 남의 마음, 어떤 행동을 할 때 남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먼저 고려하는 것입니다. 서를 풀어서 공자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마라.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말씀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공자님의 황금률이에요. 황금율 이 서 정신이 인간사회 안에서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고 보편적인 윤리이다. 그렇게들 말하고 있죠. ‘서’를 실천하게 되면. 남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내가 하지 않는 것. 이것이 풀어서 이야기하면 내 중심이 아니고 너 중심이 되는 거예요. 너 중심으로 넘어가는 것. 바로 서의 정신이 공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공자 사상의 핵심이 무엇이죠? ‘인’이지요. ‘인’과 ‘서’는 상통합니다. 서가 확충된 것이 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논어 안현편에 보면 공자께서 인이 뭐냐 이렇게 물었을 때 안현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애인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애인. 보통 학문에서 ‘인’ 자는 남을 가리키죠. 타인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남을 배려하는 것이고 공자께서 말씀하신 황금률 서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공자가 말씀하신 모든 가르침을 하나로 이야기하면 그것이 충서이고 충서가 확충된 것이 인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을 그리스도교적으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강의안을 보시면 랍비 힐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랍비에게 하루는 이교도가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랍비이니까 유대교의 가르침을 한쪽다리로만 서서 암송하면 유대교로 개종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헬렐이 한쪽 다리를 들고 이야기 합니다. “너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하지마라. 이것이 토라이고 율법이다.” 나머지는 전부 해설이니 너는 이것을 가서 실천하라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유대교에서 이야기하는 황금률도 공자님이 말하는 황금률과 일맥상통 하는 부분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죠. 공자님의 황금률이 하지 말라는 점에서 소극적인 황금률이라면 그리스도교는 훨씬 더 저극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은 적극적인 표현이 되겠죠. 성 아우구스틴이 그렇게 표현했다고 하는데요, 우리는 성서의 해석에서 다른 이를 궁휼히 여기는 마음을 찾기전에는 떠나서는 안 된다. 자선밖에 가르칠 것이 없다는 표현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의 핵심이 황금률에 있다는 사실을 달리 표현한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황금률의 실천을 함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것, 봐야할 실상은 아까 제가 표현을 했는데요 인간은 모두 연결되어있다.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우주에 제한된 한 부분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감정, 생각이 다른 것과 분리된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착시일 뿐이다. 다른 이런 환상 때문에 개인적인 욕망을 쫒고 애착이 주변의 몇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불교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설명을 잘하는 것 같아요. 부처님의 깨달음이 바로 이것이에요. 연기라고 표현합니다. 삼라만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여러분과 내가 서로 연결되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듣고 있고.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는. 우주 이야기 라고 빅히스토리, 토마스베이의 우주이야기를 번역하셨는데, 우주 전체가 빅히스토리로 오늘날 어느 정도 정착이 되어 있습니다. 우주가 처음 생겨난 것이 빅뱅. 어느 한 순간에 한 찰나에 마치 그것보다 0.00001초라도 빠르거나 늦었다면 우주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빅뱅의 순간 그 찰나에 폭발하면서 시공간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우주 탄ㄴ생은 137억년 전이라고 합니다. 태양은 50억년전에. 지구는 38억년전에 탄생했고, 지구 탄생과 함께 생명체가 있게되었고 생명체의 진화과정을 거쳐 아프리카에 직립으로 서서 걷는 유인원이 처음 등장한 것이 400만년전. 결국은 모든 존재가 친족관계에 있다. 황금률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밑바탕에 자각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어요. 우리가 다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점인 것 같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가져올 수 있을 때 이것이 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여러분 달라이라마를 아시죠. 달라이라마를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면 어떻게 늘 행복한 모습을 갖고 계시는지 놀랍습니다. 유머도 굉장히 많으셔서 대화를 할때마다 유머섞인 말을 하신데, 사실은 그분의 삶을 보게 되면 어려운 삶을 살고 있음을 알고 있어요. 티벳이 중국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고 결국 그곳에 가지도 못하는 현실 안에서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살 수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어떤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어요. 달라이 라마님은 매일 어떤 명상을 하시냐고 누가 물었어요. 그랬더니 달라이라마께서 자신은 매일 주고받기 명상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티벳불교 명상의 독특함인데요. 시각적인 상상을 통해서 상대에게 따뜻한 감정을 보내줍니다. 그리고 상대의 부정적인 감정을 흡수해서 정화시킨 다음에 긍정적인 감정을 다시 내보냅니다. 내가 불편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감정을 흡수하고 긍정적인 감정을 내보냅니다. 달라이 라마님께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시간이 많이 들었습니다.”고 답하시더라구요. 영적인 성장은 시간이 많이 들죠. 전등이 찰칵하고 켜지듯 그렇게 이루어지는게 아니죠. 정신적인 변화는 작은 불꽃에서 시작해서 점점 커지고 세어지는 것처럼 일어납니다. 영적인 성장은 하루아침에 변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노력들, 관계가 불편한 저 사람을 상상하면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내려고 하게 되면 에너지를 빼앗기는게 아니라 다시 받는거죠. 줌을 통해서 에너지를 받는 것이죠. 그래서 달라이라마님의 표현이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달라이 라마님의 <용서>라는 책을 보니까 부시대통령과 사담후세인의 대화를 적어놓으셨습니다. 부시대통령에게 사담후세인이 100% 악한 사람이라고 볼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 사람이 그렇게 되는데에는 주변의 사람들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의 군대. 그 군대가 전쟁을 하도록 무기는 사오잖아요. 미국에서. 결국은 전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미국이에요. 무기를 팔아야 자기들 경제가 사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게되면 결국은 모든 것들은 연결되어 있는데. 그래서 달라이라마의 세상 만물이 연결되어있다는 표현들. 다시 한번 우리에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듯이 황금률을 실천하는 것. 결국은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남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내가 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남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내가 하지 않는다는 작은 하나이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을 상처주잖아요, 그런 작은 실천들. 성찰하고 개선의 계기로 이어지는 것. 또한 황금률의 적극적인 표현에 의하면 상대방이 원하는대로 내가 행동하는 것. 전화를 먼저 해서 안부를 묻는다든지. 이런 작은 변화들을 내 안에 가꾼다면,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삶의 자리를 바꿔나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겠죠. 깨야하는 환상중에 하나는 ‘나 하나쯤이야’입니다. 생태와 관련하여 지구가 dnk나 하나쯤이야가 아니라 나 하나부터. 내가 움직여야 전체가 회복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혹시 티비에서 기립박수하는 장면 많이 보셨죠? 어떻게 하던가요? 누군가 항상 먼저 일어섭니다. 그 뒤를 이어 몇 사람이 일어나고 계속 이어집니다. 한사람의 힘이 모여져서 무관심의 세상을 변화시켜갈 수 있지 않을까. 거창한 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아닌 것 같습니다. 간디를 보면서 체구도 작은 사람이 어떤 힘이 있어서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독립시킬 수 있었을까. 그 한 사람이 시작이 되었죠. 그리고 힘이 모아져서 인도 독립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끔 드는 예화하나가 있습니다. 벌새의 예화입니다. 벌처럼 작은 새를 말합니다. 숲이 불이났는데 숲 속의 모든 동물들이 살기 위해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벌새는 바쁘게 왔다갔다 합니다. 동료들이 무엇을하느냐, 작은 날개가 타버리기 전에 어서 나오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하는지 봤더니 벌새의 작은 부리로 근처 강물을 옮겨다 던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벌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어”. 우리 삶의 자리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되면 현대 사회 여러 암울하고 어두운 현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었는데 그 현실에 조금은 변화가 오지 않을까. 나로부터 시작한다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떠오른 한 사람이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죠? 가장 현대적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경쟁의식이 가장 투철했던 인물로서 말입니다. 창세기 33장에 보면 야곱의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지요. 쌍둥이었던 야곱. 태중에서부터 형과 싸웠고 형보다 먼저 나오려고 형의 발꿈치를 잡았던 야곱. 절제력이 약했던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팥죽 한그릇에 장자권을 사들였죠, 그리고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권을 가로챘어요. 이렇게 형도 속이고 어머니, 아버지를 이용했던 야곱은 분노한 형을 피해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 피신합니다. 20년동안 거기서 지내게 되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재산을 가로챕니다. 라반의 두 딸을 아내로 삼고 두 종을 첩으로 삼습니다. 라반에게 열 번이나 품삯을 속이면서 결국 들통이 나버려서 야반도주 합니다. 라반이 알고 추격을 하죠. 하느님이 야곱을 보호해주십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형을 만날 것이 두려웠죠. 그래서 자신이 갖고 있었던 가축배를 네 무리로 나눠서 먼저 보내고 자기는 뒤에서 따라갑니다. 근데 그 즈음에 혼자서 강 나루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하느님과 싸우게 되죠.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의 황도뼈를? 부러트리시고 다리를 절게 됩니다. 날고 길던 야곱이 더 이상 뛸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경쟁력을 잃었다는 것이 됩니다. 더 이상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뒤처지게 되는 것이죠. 그러고 하느님 안에서 회개를 하고 화해를 합니다. 다리를 절면서 야곱은 저기서 오는 형을 만나기 위해서 갑니다. 중간에 절을 하죠. 몇 번이나? 일곱 번이나. 형이 오는데 계속 절을 하면서 가는 거예요. 그냥 살고 싶어서, 단순히 형의 분노를 막기 위한 제스쳐가 아니었고 정말 잘못했다는 깊은 성찰 안에서 나오는 절절함이 담긴 화해의 행위였습니다. 그러고 예사후를 만나게 되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둘이서 껴안고 울게 되죠. 야곱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마치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습니다.” 야곱의 변화, 야곱의 회개 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더 이상 현대사회가 우리를 부추기는 경쟁, 소유가 아니라 겸손, 참회 그리고 형과의 화해, 관계를 회복하려는 마음이 변화를 갖고 오게 하지 않았는가. 하느님이 개입하셨고 하느님이 야곱의 인간적인 힘을 약화시켰고, 하느님 앞에 겸손해진 야곱은 애사후 앞에 일곱 번이나 절을 하면서 형에게 다가갔고 20년동안 쌓였던 분노를 녹아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관계회복이라는 것은 내쪽에서의 변화가 일어날 때 내쪽에서 야곱이 애사후에게 다가가듯이 할 때 가능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여러분과 관계회복의 영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서 제 안에 야곱적인 측면이 있는 것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되고 이것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야곱처럼 내가 먼저 다가가는, 화해의 손을 내미는 그때 우리 안에 갖고 있는 관계회복이 가능해지지 않는가 생각을 해보면서 강의를 마무리 하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