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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안내 2015년 4월 종교대화강좌 녹취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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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종교대화강좌
가톨릭교회와 한국사회(박동호 신부님)
종교대화강좌를 마련하면서 수녀님 말씀이 마음에서 맘돌았습니다. “올해로 우리는 광복 70년을 맞이합니다. 우리 민족이 오랜세월 응어리를 안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안으로만 삭히지말고 공감하고 소통할 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광복 70주년이지만 빛을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는 생각이듭니다. 역사를 보면, 구한말에 통상권을 양도했고 을사늑약에서 외교권과 국방권을 넘깁니다. 하나의 정치공동체가 독립적으로, 주체적으로 설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넘긴 것이지요. 그리고 어렵게 광복을 했지만 70년이 지난 지금 더 합법적인 방법으로, 더 아름다운 언어로 치장된 방법으로 통상권은 넘겨져 있고 외교권도 없고 국방권도 없습니다. 그러나 의식으로는 정치공동체인 한국사회가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우리 공동체의 선익을 위하여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통상, 외교, 국방을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특정집단을 위한 것인지 공동선을 위한 것인지는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더 아픈 응어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의 흐름에서 가톨릭교회는 한국사회에 무엇인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한국가톨릭교회는 한국사회와 불통하고 있다면 왜 불통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선이 통상권을 넘겼을 때 대한제국이 일본제국과 합의를 했습니다. 이 때 합의문에 서명을 한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고위공직자들, 관료들입니다. 이들은 2천만의, 요즘말로는 시민, 그때말로는 백성, 자신이 임무를 가지고 지켜야할 사람들을 위하여 통상권을 넘겼습니다. 소위말해서 국익을 위하여 넘겼습니다. 과연 그것이 국익이었을까, 아니면 특정세력의 이익을 위하여 국익을 내세운 것이었을까. 통상권을 넘긴 후 미국이나 영국에서 철도 건설권, 광산채굴권을 가져갔지만 싹 다 가져가지는 않았습니다. 대한제국의 client들에게 역할을 맡깁니다. 예수님 시절에 로마제국때 대사제가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27번 바뀝니다. 대사제는 종신직인데 그렇게 바뀌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마총독의 입장에서 보면. 유다인을 통치할 때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하는 법은 동족을 이용한 후 중개수수료를 주는 것이죠. 개별적인 사안이라면 푼돈이겠지만 국가를 상대로 하면 어마어마한 것이죠. 통상권을 넘겼을 때 대한제국에서 이 일을 대신했던 사람들에게 커미션이 안 떨어졌겠냐는 겁니다. 을사늑약을 성사시킨 자들에게는 땅을 주고, 작위도 내려서 몇 대가 먹고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국가와 국민과 시민의 삶을 볼모로 삼았던 특정집단, 극소수의 위정자들은 로마제국 때도 그랬고 일제강점기 때도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극소수의 이익이라고 했을 때 교회는 해당되지 않을까요.
교회라고 할할 때 조심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2차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를 이야기할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제도로서의 교회만 이익을 본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시민이기도 하고 국민이기도 합니다. 제가 요즘 농담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성당이라는 공간에서 매일매일 참이슬만 먹고살면 된다고 말합니다. 영롱한 참이슬만 먹고 머리도 타라상태에서 살면 고통도 없고 그럴텐데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삶이 잠깐 안정되는 것은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할 때뿐이고, 문화 경제 가정문제가 다 고통스럽잖아요. 하지만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고통스럽지는 않습니다. 한국교회안에서 사적인 이익을 욕망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내세워서라든지, 하느님을 내세워서라든지 자기 것을 다 챙깁니다. 그리고 명분은 하느님과 교회를 내세웁니다. 그 대가는 로마시대 때도 그랬고 일제강점때도 그랬고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갑니다. 유다인들 전체 90분 이상이 동족의 지도자들과 로마로부터 이중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일제 때도 그랬겠죠. 같은 프레임으로 우리의 하느님의 백성은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제도가 요구하는 것을 쫓아가려니 힘이 들고, 한국사회에서도 가하는 유무형의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역대 교황들은 항상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교회는 끊임없이 정화, 쇄신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서인데, 하느님 백성을 위해서입니다. 가톨릭교회와 한국사회의 관계를 ‘소통과 공감’의 측면에서 본다면 한국 가톨릭교회는 한국사회와 소통하고 있는지 성찰해봐야 합니다. 교회만의 이익,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이익 이 두가지를 위하여 가톨릭교회 내에 일부 권력과 이익을 탐하는 사람들이 한국 교회, 천주교회 전체 그리고 신앙을 내세우는 것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교회 안에서도 힘겹고 세상안에서도 힘겹습니다. 한국교회라고 말할 때 구체적으로 보통의 교우를 두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와 수도자를 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한국사회와 소통할 마음이 있는가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나눠드린 강의록을 보시면, ‘시대의 지표를 꼼꼼하게 탐구하기’라는 제목의 부분에서 <복음의 기쁨> 51항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사목활동가, 주교와 신부. 한국교회안에서 신부님과 수녀님은 교우들의 무조건적인 신뢰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음의 기쁨을 보시면 일반 교우들에게는 말투가 따사롭습니다. 반면 교회사람들에 대한 말투는 무척 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강론준비를 열심히 하지 않는 신부를 보고 협잡꾼, 사기꾼이라고 합니다. 교우들에게 좋은 것을 줘야하는데 정성스럽게 준비를 하지 않으니 사기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성이나 교리에 있어 깊이가 있다고 알려진 사람조차도 경제적 이익과 권력에 사로잡혀있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교회 안에서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놀랄 일이 아니라는 표현을 씁니다. 교회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2장, 4장에 가서는 굉장히 무서운 언어들을 사용하고 5장에 가서는 더 절절하게 호소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복음의 기쁨>을 다시 읽어보면 교우들에게는 위로, 희망, 용기를 주지만 사제, 주교, 수녀들에게는 읽기가 귀찮은 것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51항을 읽어보겠습니다. 교회사람들이,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자세를 말합니다.
“현실을 자세히 그리고 완전하게 분석하는 것은 교종의 임무는 아니지만 저는 모든 교회공동체가 무엇보다도 시대징표를 꼼꼼하게 탐구하기를 권고합니다. 이것은 사실 막중한 책임입니다. 실제 어떤 현실은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탈인간화의 길로 치닫게 되고 그렇게 되면 되돌리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하느님의 계획과 충돌하는 결과를 나을지 분명하게 식별해야만 합니다. 시대징표를 탐구한다는 것은 시대정신을 식별하고 확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선한 정신의 움직임을 선택하고 악한 정신의 움직임을 거부하는 것도 포함하는데 사실은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보편 교회가 교도권을 갖고 내놓은 여러 문헌들이 이미 다양하게 분석한 것들 것뿐만 아니라 지역과 대륙의 주교들이 제시한 것까지 승인합니다.”
이 대목 때문에 소개합니다. 주교들은 깃발을 들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교는 사람이 아니고 제도입니다. 제가 가져온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는 무엇인가’를 다룬게 교회헌장이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첫 번째가 신비로서의 교회를 이야기하고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를 이야기하는데 교계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32항에 가면 주교는 어떤 사람인가를 이야기하는데요, 주교는 제도라고할 수 있습니다. 각 나라의 주교들은 깃발을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시대정신을 식별, 확인한 후 선한 정신 움직임을 선택하고, 악한 정신의 움직임 거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깃발을 들어야 양들이 쫓아온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저는 사목의 전망에서 “교회쇄신의 추진력을 약화시키거나 제한시킬 수 있는 교회안팎의 몇몇 요소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백성의 존엄함과 생활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이지요.
주교님 신부님 수녀님들은 누리는 게 많으면 책임도 무거운 것입니다. 힘이 세면 책임이 무거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른이 있고 아이가 있는데 어른이 돌맹이가 있어서 아이와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니 가위바위보를 해서 치우자고 하면 되겠습니까? 힘센 사람이 치워주는 것이지요. 힘이라는게 권력일수도 있고 책임일 수도 있고 능력일수도 있습니다. 같은 자연인으로서 너와 내가 인격적으로 평등할 수 있지만 관계에서 짊어질 짐은 힘이 센 사람일수록 많은 것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교님들이야 거의 교회안에서 절대적이죠. 그러면 절대적인 책임을 지는 겁니다. 누구를 보면 알 수 있습니까? 지저스 크라이스트입니다. 하느님 아들이라는 무한의 영광을 가졌으니까 무한한 책임을 지고 십자가에서 장렬하게 가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점에서 상식적으로도 사회지도자들은 돈도 많이 가지고 명성도 가지고 있으면 도덕적, 윤리적으로 더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됩니다.
주교님뿐만 아니라 교회안에서는 신부님 수녀님은 일단 현실로서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교우들의 짐이 10이라면 신부님은 100, 수녀님은 70, 주교님들은 10000정도. 교우들이 물어보잖아요. 천주교의 역사가 220년 좀 넘습니다만, 앞의 100년은 교우들이 일군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8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주교님들에게 당부한 것이 기억, 희망의 지킴이잖아요. 기억의 지킴이를 말하면서 ‘한국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성직자들의 도움없이 하느님 백성이 직접만난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성직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한국천주교회의는 사도시대의 이상으로서의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초대100년은 그런 모습입니다. 교우들 사이에서 쌀 한줌이 한국 선교사들의 일기를 보면 춘공기, 봄에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가을에 곡식을 거두고 어머니들이 밥을 지을 때 한줌씩 모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모은 것을 가지고 천주교 신자들이 춘곤기를 이기지 못하는 더 힘든사람들을 주려고 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없겠죠. 교황님이 이것을 읽으셨는지 모르겠지만, 한국교회는 사도시대의 이상ideal이 한국에 와서 가장 좋은 표현을 한 것이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한국교회가 교황이 주교들과 이야기한 것입니다. 교우들과 이런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교우들은 충분히 고통스러워요. 대중으로 하는 강론 때 메시지와 교회 사람들에게 하는 메시지가 다릅니다. 교황님은 ‘오늘의 이 모습으로 여러분을 평가해야한다’고 말씀하시고, 복음의 기쁨에서는 ‘우리를 거울에 비춰봤더니 지저스 크라이스트께서 우리를 가리켜 비난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가 되지 말아야 한다, "well to do" 하는 사람들, 각자 알아서 자신의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교회가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한국교회가 번영의 신학을 이야기할 때 다음을 고려해야합니다. 신학을 이야기할 때 theological vs devine으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게 devine이고, 그리고 인간이 하느님께 향하는 모든 것은 theological한 것입니다. 후자는 학문의 의미만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모든 것은 디바인이고, 인간의 응답하는 모든것은 테올로지컬이라고 보면됩니다. 그렇기에 번영의 신학을 이야기할 때 ‘하느님에게 이렇게 하면 우리가 번영하게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안 됩니다. 교회론은 철저히 내려오는 것이지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비판하시면서 그래도 “번영의 신학에 이르렀다고는 말하지 않겠으나”라고 교황님이 첨언하는 것은 이런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교황님께서 8월 14일에 주교들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4월 16일이되면 여러 군데에서 사회지도자들, 종교인들이 세월호 참사를 ‘우리의 죄’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책임이 불투명해집니다. 넓은 의미에서 너와 나는 하느님 아래에서 하나이니까 ‘우리’로 되는 것이지만 시시비비를 가리는데 있어서는 이런 발언은 책임을 희석시킵니다. 만약 제가 난방관리의 책임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침 저녁 참이슬 소주를 먹으며 보내다가 난방관리를 못하고 누군가 저체온증으로 죽었다고 합시다. 일차적 책임은 저에게 있겠죠. 하지만 모두가 돌보지 못한 것이라면서, 누가 저 사람에게 돌을 던지겠냐고 한다면 될까요?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이런 것을 ‘일반화의 오류’라는 것입니다. 분명 사건의 책임에는 직접적 간접적인 정도, 가까이 멀리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른이 주먹을 휘두른 것과 아이가 주먹을 휘두른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같은 행위를 누가 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뿐 아니라 우리 교회는 ‘분명한 악’에 대해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집단이 있다는 겁니다. 리얼리티에서는 예수님을 못 밖은 사람이 있으니까, 또 다시 예수님을 못 박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방신학하는 분들은 오늘날의 예수를 못 밖는 구조가 있는지 없는지 깨어보자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의 잘못이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일반화의 오류는 똑똑한 사람들이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쓰곤 합니다. ‘소모적인 이야기를 그만하고 앞을 향해 나가자’고 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앞을 향해 나아감을 통해 누가 이득을 얻는지 봐야 합니다.
트렌트 공의회에서 개혁을 말할 때,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00명이 있으면 이 중의 10명만 사람이고 90명은 사람이 아닙니다. 당시는 전근대, 신분사회였지요. 귀족과 왕족, 그리고 교회사람들이 이 10명이고 나머지 90은 하층신분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율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갖고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 개혁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개혁은 그렇기에 주교들, 성직자들의 개혁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개혁적 조치들은 성직자, 주교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같은 경우 여러 상징적 의미를 갖는 이유는 트렌트 공의회가 열려야 했던 와중에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기 위해 깃발을 든 사람이 프란치스코이기 때문입니다. 귀족, 왕족들이 권력과 경제력을 갖췄고 교회가 이 사람들에게 발을 맞춘 것이잖아요. 한편 하층민들은 거리에서 비참한 생활을 보내고 있구요. 귀족출신의 젊은 청년인 프란치스코가 이런 현실을 넘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현 교황이 자신의 이름을 프란치스코라고 지은 것이고요. <복음의 기쁨>에서 교황이 가장 격렬하게 비판하는 것이 오늘날의 경제입니다. 사람과 사회를 황폐화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제. 우리나라 주교님들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환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고위관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와대에서 한 연설을 읽어보시면 사단납니다. 교황님이 연설에서 남북관계 문제, 국내의 정치적 갈등, 경제적 불평등, 환경관리를 거론하며 ‘골치아프죠?’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는 ‘정치 및 국가지도자 여러분들이 할 일은 복잡한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 특히 사회적 약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여러분의 임무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 문화적으로 품위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여러분의 임무’라고 말합니다. 어떤 정치평론가는 내정간섭이 심하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국빈으로 초대받은 사람이 그 나라 사회현안으로 코치한 것이 관례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평화는 무력시위, 군사적 과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외교관들보고는 외교는 아트라고 말을 한 뒤, 남북관계와 동북아의 평화, 세계평화의 대의에 그들이 들어가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남북문제를 언급하고 경제적 불평등, 힘없고 약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이야기하셨습니다.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주교들의 재산소유를 금지하고 관직을 금지하고 성직 매매를 금지했습다. 당시는 주교가 땅과 사람을 갖고 전쟁도 했습니다. 그러니 전쟁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가톨릭이 개혁을 한 이후에 산업혁명을 겪고, 양차대전을 겪은 후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1차 2차 대전에서 팽창주위와 식민주의와 팽창주위는 발전을 가져와줄지 모르지만, 당사자 나라의 시민사회, 피식민지 나라의 고통은 엄청난 것이죠. 가해자는 행복하고 피해자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 승전국의 시민들 역시 피폐해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패전국이 더 잘살게 됩니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가 경제적으로 살아납니다. 전후에 승전국에서 원조와 투자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교회는 무엇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배경입니다. 전쟁과 산업화가 지구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가져다 주는데 교회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반성이 나오는 것이죠. 19세기 말 새로운 신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교회가 하는 역할을 회의했습니다. 북유럽 신학자들이 교회 신신학운동을 벌이고 거기부터 분위기가 무르익어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쇄신이야기가 나오면서 교회는 무엇을 하는가 이야기하게 됩니다. 교회의 대전환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교회가 세상을 다스리는 위치였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소금이고 누룩이 되고 빛이 되는 교회, 세상에 봉사하는 역할로 이렇게 바뀝니다. 이게 개혁이라면 수구의 사람들을 싫은 것이죠. 교회는 사목헌장에서 선언을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교회의 임무를 말하며 ‘현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 슬픔 고뇌를 우리가 취한다’, ‘예수님이 짊어졌듯이, 그들의 것을 우리가 갖는다.’고 합니다. 교회의 대전환을 가져온 사건입니다.
31항에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주교는 믿는 이들이 한 마음 한 영혼이었던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 이상을 따라서. 항상 자기 교구 안에서 복음화 사명 속에 친교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주교는 앞에 나서서 자기 백성에게 가이드를 제시하고 그들의 희망을 살려야 합니다. 때로는 단순히 그들 가운데 겸손하게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들 가운데 뒤처지는 사람을 도우며 뒤를 따라야 합니다. 혹은 과감하게 새로운 길을 접어드는 그들을 뒤따라가야 합니다. 주교의 사명은 역동적이며 개방적인 친교 사명 줌심을 이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교회법이 제시하는 참여의 방법들과 다양한 형태의 사목적 대화들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때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말하는 이들만 아니라 모든 이들의 말을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같은 참여와 대화가 교회의 조직화를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모든 이에게 다가가기 위한 교회의 사명에 따른 열정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를 조직하고 효율적으로 통솔하기 위한 대화와 참여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날의 평범한 시민은 소통을 못하거나 안 할 형편에 있지 않습니다. 모양새만 달리할 뿐이지 소통과 공감을 안 하는 사람들은 사적인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민주가 되면, 권력의 독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민이 소통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정보를 왜곡합니다. 대중매체와 경제분야가 진리를 왜곡합니다. 민은 왜곡된 정보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하루하루 생존자체가 투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존엄에서는 동등하지만 책임에서는 동등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임무라고 말했지만 이 임무를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는 것은 성직자와 수도자의 몫입니다. 교인들은 이것을 할 시간도 없습니다. 시대징표를 탐구하라고 시간과 자리와 임금을 주는게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들이 우리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관한 진리는 세상에서 구체화되면서 있습니다. 불의를 고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노예노동이 제도적으로는 불법이 되었지만 실제 여전히 통계는 증명하고 있고 이것이 지구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범죄망이 치밀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해서 된다고 생각하세요? 거대한 악이 치밀하게 세계화되면 그것과 같은 선한힘으로. 법을 잘 만들어라고 하잖아요. 피해자를 구제하는 법, 사회로 복구시키는 법. 그런 사람들을 단호하게 다시 못하도록 징벌하는 법을 만들어야 악은 그래야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악의 희생자는 매일 더 많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커다란 악을 맞서는 일은 그것보다 더 규모가 큰 선이 모여서 맞서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없어서, 귀찮아서 노예노동에 대해 그냥 지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그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시민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동네에서 가난한 사람을 만났을 때 남이라고 여기지 않고 따뜻한 손을 내밉니다. 국가, intergovernmental organization, 기업, 시민사회, 교회에 호소하고, 이들이 힘을 합쳐야 악을 맞설 수 있습니다. 불의를 고발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대한 악에 대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갈구하며 기도에 그치려고 합니다. 교회 안의 사람들은 이것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은 악의 힘에 처절하게 날아갑니다. 하느님의 고요한 음성을 들으면서 깊은 묵상에 빠져 있는 사이 바깥에서는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얼어 죽습니다. 거짓 안전망을 주는 제도 안에 갇혀있는 두려움.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관습 안에 있는 두려움, 나에게 평화나 기쁨을 준다고 하는 제도 안에 갇혀있는 두려움 때문에 안에 갇혀있습니다. 그런데 문밖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치지 않고 우리에게 '니가 문을 열고 나가서 주라'고 말을 합니다. 제도나 관습, 규칙안에서는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성직자, 수도자가 아닌 교우들은 이런 관습,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발전은 첫째로 정당해야 합니다. 효율적이고 정당해야 합니다. 참된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은 누구를 원조한다고 알려져있지만, 문화와 경제식민주의를 양산해온 역할을 했습니다. 복지논쟁의 성격도 그렇습니다. 빈민들을 도와주지만,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자신보다 나아지면 안 된다고 봅니다. 이런 원리에 따른 복지를 ‘잔여적 사회복지’라고 말을 합니다. 만약 국가가 최저 빈곤선을 100으로 정해요. 어떤 사람이 80정도를 벌면 격차인 20만 주는 거예요. 장애인을 도와주는데 간신히 이동할 정도만큼만 도와줍니다. 약간 불편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보편사회복지의 문제로 넘어가면 권리의 문제로 갑니다. 사람이 품위있게 사는 것이 권리인가 아닌가의 문제입니다. 보편복지의 문제로 갔을 때 품위있게 사는 것은 권리입니다. 복지대상자가 되는게 권리로서 여겨진다면 사회는 의무를 다해야하고, 사회구성원은 기여를 해야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금의 경제시스템을 비인격적 경제독재라고 말을 합니다. 가정뿐 아니라 사회까지 비인격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봅니다. 교회성직자들이 2차바티칸 공의회에서 사제의 직무와 생활과 관련해서 해야할 첫 번째 임무가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봉사자라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잘 전해주는 직무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복음의 말씀을 잘 전하는데 현대사회에서는 ‘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사제는 일반적으로 혹은 추상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신자들의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적용해서 말을 해야 합니다. 대화할 때 서로 공감하는 이야기를 해야 눈빛이 마주치지 않습니까? 간추린 사회교리에서 제시했던 8가지 요소들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환경인 것입니다. 노동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노동이야기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아요. 교회 목자들은 다른 학문이 기여하는 바의 도움을 받아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분명하게 쓰여있습니다. <간추린 사회교리>가 2004년에 나온 것입니다. 그 7년전에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나왔습니다. 제가 가져온 책은 3편인데 목차를 보시면, 인간의 소명, 성령안의 삶, 인간의 존엄성, 인류공동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사람과 세상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성령 예수님 교회이야기가 아니라 사람과 세상이야기입니다. 사람과 사회에 관한 하느님의 은총과 법이있다는 겁니다.
십계명의 우상숭배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미신이나 잡신에 대한 것 말고 국가 재물 인종 성 쾌락에 대해서도 나옵니다. 황금만능사상이라는 말을 하잖아요. 돈이라는 새로운 우상을 거부해야 한다고 교황님은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인간과 돈이 맺은 관계를 주종관계를 뒤바꾸는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비윤리적이라는 것이죠. 정치 지도자들을 보고 윤리적인 요소를 고려한 정치개혁과 금융개혁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도 그렇게 보면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4계명은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는데, 부모가 자식에게 할 의무도 이야기합니다. 국가-시민, 스승-제자. 고용자-노동자. 상호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와 경제 문제이기도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경우 우리는 사람을 죽였냐 안 죽었냐, 자살했냐 안 했냐, 낙태했냐 안 했냐, 안락사했냐 안 했냐 가지고만 이야기하지만 전쟁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서는 무감하고 자살과 안락사에 대해서만 고민을 합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무력증강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떼로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대범하고 한 생명에 대한 사사로운 죽음에 대해서는 이야기합니다. 남북전쟁을 겪은 한국은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무감각합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또 있습니다. 얼마 전에 간통죄가 폐지되었고 성매매특별법의 위헌제청이 나왔고 작년 같은 경우 성소수자들, 동성애자들의 인권이슈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가톨릭 교리서에 ‘동성애는 상당수의 남녀가 동성애적 성향을 갖는다’고 써있습니다. 예전에는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지금의 교리서에는 ‘원인을 모르겠다’고 전제합니다.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이전에는 입에 담기조차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새 가톨릭교회 교리는 상당수의 남녀가 그렇지만 밝혀진 바가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자연법과 전통에 의해서 그것을 일탈했다고 본다’고 이야기합니다. ‘무질서라고 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곤 ‘성경의 전통에 따라서’라고 단서를 붙입니다. 이것은 바뀔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이 당사자들이다. 교회는 이들에게 차별의 기미를 보여도 안 된다. 인간의 존엄함, 인권의 관점에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세 번째 항에 가서는 동성애자들도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을 완성시킬 소명을 받았다. 정결의 덕에 관한 소명을 받았다고 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6계명과 가톨릭교회의 6계명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에 보면 지금의 경제구조는 처방을 내어놓을 수 없습니다. 경제정책은 정책을 내놓게 되면 부작용이 생기잖아요. 완전할 수가 없으니까요. 경제정책의 최선의 방법은 부작용을 최소화시키는 겁니다. 자본주의 경제정책의 치명적인 약점은 빈부격차와 호황과 불황의 주기성입니다. 그래서 빈부격차를 줄이는가, 어떻게 하면 빈자들을 살려내는가를 고민 하고 사회복지 보장제도같은 것을 만듭니다. 사기업을 규제하고 정책적 수단으로 개입하는 것이죠. 이것이 정책인데 자본주의 경제모델의 시장의 절대자율, 금융투기의 자율화를 보장하는 경제정책으로는 새로운 처방을 내어놓을 수 없다고 봅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몰아주기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내용이 계명안에 있습니다.
가톨릭교리서의 3편이 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헌장의 구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입니다. 머리말부터 해서 4장을 보시면 하루전날 인간의존엄이 실현되는 장이 될 것입니다. 복음은 명백히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사회정치적 애정이라고 그랬습니다. 사랑을 이야기할 때 개별적 행동을 재촉하는 것만 사랑이라고 하는데 사회제도 법률을 통해 사람을 사랑하는 길도 있습니다. 사회적이고 공적인 문제이니까요. 국민건강보험제도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공공성을 확보하는 일은 정치적인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죠. 전 세계에서 건드릴 수 없는 산업이 있다고 합니다.-군수산업, 의료산업, 식량산업. 많은 사람들의 생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정치적 차원의 애덕이 세상과 소통하는데 진리를 증언하고 불의를 발전에 기여하는게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정치적 차원의 제도와 법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시 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오직 천국을 준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종교는 사회영역과 국가영역에 영향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가톨릭교회가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외면하는 동안에 하느님의 백성은 고통받는 거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야기 하는 것은 closed and elite group, 즉 소수의 엘리트 그룹이 경제적 이익과 권력에 몰두하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는다고 말을 합니다. 주의할 것은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 타겟을 분명히 해야하는 것입니다. 성직자들의 소통과 공감능력의 회복이 한국교회에서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