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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15-06-2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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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적 관점에서 본 소통과 공감(김지원 교수님)

 

오늘 심리학에서 말하는 소통과 공감을 말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들은 공감을 우리는 해줘야한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나’를 주어로 이야기하면 공감을 받고 싶은 것이죠. 모두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은 공감을 받고 싶은데 받기 어렵다는 것이죠. 내 욕구를 알아차려서 이렇게 까지 이야기할 수 있다면 상담에서는 절반은 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내 욕구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지는 말로 시작하는 것, 내 욕구와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담에서 소통에 대해 중요하게 얘기하는 부분입니다.

제 내면에 상전이 있어서 완벽하게 하라는 상전이 있다고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누군가 나에게 완벽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내가 나에게 하는 이야기이지요. 내가 하는 목소리, 내가 갖는 당위적인 요구. 우선 나와 솔직하게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나한테 말하고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 상담에서는 상담에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본 지각이고 내 욕구이고 내 감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한참 걸립니다. 내 목소리라고 인정하지 않는 그 배경을 들어보면 왜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나와 소통하게 됩니다.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소통의 역사를 간단하게 보겠습니다. 프로이드는 누구도 하지 않았던 정신세계에 대해 의사로서 분석을 제시했던 사람입니다. 프로이드는 상대방의 마음을 아는 방법으로 ‘전이’라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전이’는 지금도 여전히 심리학에서 인정하고 있는 말이고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전이’는 내담자가 상담자를 무의식의 감정들을 투사해서 어떤 사람처럼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담자가 상담자를 본인의 엄마처럼 여기며 투사하는 것입니다. 투사란 내 안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던진다는 것입니다. 관계 속에서 투사하는 걸 정신분석에서 하는 해석입니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어머니를 알지못하지만 내담자의 투사로 인해서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처럼 되는 것을 전이관계라고 하고, 프로이드는 정신분석에서 전이관계를 이용해야한다고 보았습니다.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전이관계를 통해서 미해결감정인 무의식을 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하고 말해주게 되고 이것을 해석이라고 합니다. 무의식적인 행동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신분석가가 해석해주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이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가 됩니다. 왜냐하면 내담자는 정신분석의 이론과 세계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프로이드, 정신분석가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석가가 지적인 힘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죠. 그래서 수직적 관계에 있습니다. 무의식을 알게 하는 것, 의식화 하는 것이 정신분석가가 하는 상담입니다. 이런 상담을 통해 내담자에게 통찰을 주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상담관계에서 공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상담용어로써 공식적으로 등장합니다. 19세기 말 인본주의 상담의 시초로 칼 로저스가 나옵니다. 그때 인문학적 배경이 인본학적으로 흘러갔습니다. 칼 로저스는 ‘상담이란 공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후 로저스와 비슷하게 게슈탈트에서도 내담자가 자기에 대해 알아차리고 자기와 접촉하고 연결성을 갖기 위해 공감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상담에서 공감은 기본이 됩니다. 로저스가 처음으로 공감을 이야기하면서 상담자가 내담자를 공감해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유튜브에 칼로저스 인본주의 상담/공감 검색해보시면 참고가 더 잘될 것 같습니다. 왜 공감을 통해 내담자가 변하는가, 그 메커니즘이 무엇인가. 우리는 다 공감받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고 무슨 사건이든 그 사람의 입장이 있잖아요. 죄지은 사람도 공감받기를 원합니다. 공감은 기본적인 욕구이고, 사람과 연결되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소통하기를 원하고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프로이드는 모든 인간을 병리적으로 봤다면 로저스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시작하는 접근이 일단 긍정적입니다. 또한 프로이드와 달리 과거 지향적이지 않습니다. 프로이드와 로저스는 정 반대의 대척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드는 분석가와 등을 대고 피분석가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습니다. 피분석가는 카우치라는 소파에 누워서 편안하게 자유연상을 하면 그것을 분석가는 종이에 빨리 받아적고 공감하거나 반영하거나 그냥 해석해주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일주일에 무슨 일이 있었고 어릴 때 어땠고 등등 과거의 얘기를 했다면 로저스는 미래지향적입니다. 과거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무엇을 원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상담을 통해서 잠재력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상담이 할 일이라고 봅니다. 무의식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잠재되어 있는데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기능하도록 해주는 것을 상담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로저스는 상담의 목표를 충분히 기능하도록(fully functioning)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왜 부적응하지 못하는가? 로저스는 부모 혹은 외부에서 부여된 가치 조건에 내사되어 있는 것과 자신이 불일치하다보니 충분히 내 본래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로저스든, 펄스 게슈탈트든 융이든 다 비슷한 부류들이에요. 비슷한 시기에 나왔고요. 융도 부모가 자신이 해보지 못한 것들을 자녀에게 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융 역시 잠재기능을 충분히 기능하도록(fully functioning) 도와주었습니다. 미래지향적으로 가게끔 도와주는 일을 했습니다.

상담은 자아(에고)가 실현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자아실현을 하는 과정에서도 보면 에고 아래 있는 이드가 올라올 때도 있고, 에고 위에 있는 초자아가 당위적 목표로 자신을 억압할 때도 있습니다. 에고는 그 사이에서 바쁩니다. 어렸을때는 이드 중심으로 살았지만 에고가 점점 생기는 것이고 그러면서 문화와 규범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에고가 점점 커가면서 다른 사람과 다른 나만의 에고를 만듭니다. 융이 말한 개성화입니다. 나만의 나, 에고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하는 일, 내담자가 충분히 기능하도록 하는 일을 상담자가 내담자와 함께 하는 일입니다. 그러다보니 상담자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또한 상담자도 내담자와 함께 성장합니다. 관계속에서 상담자가 변하고 내담자가 변합니다. 관계를 이어가려면 내담자도 견뎌야 하겠지만 상담자도 마찬가지로 견뎌야 합니다. 상담을 하다보면 처음 시작하는 자신과 달라져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관계를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람은 그걸 견디는 힘이 있습니다. 관계를 이어나가고 만들어가려는 능력이 상담에서 필요합니다.

문제의 답은 내담자에게 있기 때문에 매 시간마다 배워야 합니다. 내담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알도록 도와주는 과정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안다는 것은 알아차리는 것, 자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공감받고 싶다는 것은 내 욕구라는 걸 알아차린다는 걸 아까 이야기 했었습니다. 상대방한테 당위적으로 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는 건 사회적 관념이나 규칙입니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나에게 일어나는 신체감각, 생각, 감정, 욕구 행동 등을 지각하는 것입니다. 무의식을 알아차린다는 것도 이런걸 이야기합니다. 어린이들은 생각, 기분, 욕구 다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성인들은 판단위주로 이야기를 말을 합니다.

알아차릴 때 방법이 있습니다. 나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고, 편견을 내려 놓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연습이 잘 되어있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바라볼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과 대화할때는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야합니다. 10대와 대화할때는 10대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내담자가 공감을 받으면 공감을 받는다는걸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듣는걸 하면 아이가 자신이 잘못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편견없이 본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의 예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본 나무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싶어요. 그러면 듣는 사람은 이 사람이 본 나무가 무엇인지를 들으려고 해야합니다. 그러려면 듣는 사람이 기존에 갖고 있던 나무에 대한 생각은 내려놔야합니다. 상대가 말하는 나무가 무엇인지, 오로지 상대방이 경험하고 있는 나무로 가야합니다. 내가 경험한 나무는 배경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경청하기가 공감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에고 바운더리를 지키려고 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의 경험에 들어가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 모험하는 것 같아요. 로저스는 내담자가 공감을 받으면, 자신이 알아서 에고를 통합한다고 봅니다. 가령 자녀가 무엇이 힘든지 이야기할 때 부모가 무조건 혼내지 않고 공감해주면, 자녀가 알아서 자신의 상태를 성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내담자 중심이고 에고를 믿어주고 에고의 잠재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스스로 통합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게 로저스가 한 일입니다.

자신을 알아차릴 때 신체에서 느껴지는 감각,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 이런 것들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럴 때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 또한 알아차리면 됩니다. 단계를 점점 높여서 욕구, 생각, 감정을 알아차리고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이것이 소통의 시작입니다. 소통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게 있어야 전달을 합니다. 사람들은 얘기하자고 해놓고선 너의 이야기부터 해보라고 합니다. 요즘에 나는 이런걸 하고 싶어. 오늘날씨 이렇지 않아? 신체 생각 감정 욕구 행동. 이것을 나를 먼저 개방하는 것. 나를 이야기하는 것. 그러려면 자기에대한 자각이 있으셔야 하잖아요.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높이뿐 아니라 물리적인 눈높이도 중요합니다. 엄마한테 자녀가 대화하자고 했는데 엄마는 설거지하느라 바빠요. 그러면서 그냥 “해해해” 이렇게 말하면 대화가 아닙니다. 있는그대로 그 사람의 대화를 들으려면 설거지하면서 들을 수 없습니다. 경험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판단중지’, ‘내려놓기’. 이렇게 할 때 공감이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문제해결이 된다는 겁니다. 로저스가 그랬잖아요. 공감하면 자고 일어나서 자기가 알아서 한다.

공감을 이 상황에선 이렇게 저 상황에선 저렇게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경험한 나무를 알려면 그 사람의 경험을 들어야하고, 상대방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의 초점은 내가 공감받고 싶다는 것, 내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잘 표현해야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내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기 시작합니다. 듣는 것, 말하는 것. 여기서 특히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을 잘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들을 때는 내담자의 얘기도 친구의 얘기도 듣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의 경험에 내가 삼분의 일이라도 발을 담그고 그 사람의 경험 감정에 젖어들어야 이야기를 합니다. 화자는 상대방이 내 얘기를 듣는다, 공감한다 아닌다를 아주 잘 압니다. 내가 가식으로 하는걸 정확하게 압니다. 눈빛과 표정은 계산할 수 없어요, 따라가요 직감으로. 그렇기 때문에 공감한다는 것은 편견, 생각, 판단, 이런 것을 과감하게 내려놓아야합니다.

상대방의 경험, 미지의 세계입니다. 어떤 나무? 이렇게 들어가려고 할 때 그 사람이 나한테 나무 얘기를 해준다는 거예요. 그러려면 내가 알고 있는 나무에 대한 경험은 뒤로 배경으로 물러나야 한다는거죠. 그런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가 경험해봤던 수녀, 내가 경험해봤던 선생님 이런 것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서로가 잘 안 만나지고 방해요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과 만나려고 해도 내 경험과 지식이 자꾸 침투하는 것이지요. 제가 성북구에서 한부모 아이들과 심리상담을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데, 그 아이들의 삶을 너무 몰랐습니다. 그런데 저는 안다고 생각한 것이죠. 아이들의 특징을 논문을 찾아보고 안다고 생각하니까 그 아이들과 안 만나지는 거예요. 그런 경험은 다신 할 수 없습니다. 상담할 때도 상담자가 내담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면서 내 앞에 현존한다는 경험을 또 한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과 내가 현존한다는 것. 그러려면 내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고 그 사람의 경험세계로 들어가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 때 공감을 해야한다는 당위에 앞서 내가 공감 받고 싶다고 말할 수 있어야 소통이 된다는 거죠. 누가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나를 온전하게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고, 듣는 사람은 경청의 태도가 필요하고 이것이 소통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