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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안내 2016년 4월 종교강좌 <주역읽기2-만물의 변화와 그 관계> 강의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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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16-04-14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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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4.11강의 <주역2-만물의 변화와 그 관계>
                                                                                                                     최 현 민

서론

 

생태문제의 심각성은 이미 많이들 인식하고 잇으나 생태 문제해결은 참으로 녹록치 않다. 얼마전 지구법학이라는 주제로 열린 가톨릭 에코포럼에 다녀왔다. 거기에서는 생태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과 연관지어 지구법학에 대해서 말했다.

지구법학이라 함은 인간 중심의 법질서가 지구중심으로 바뀌어야 하고 자연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이 이론의 배경에는 토마스 베리의 사상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는 인간문명을 일관해온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우리의 사유체계가 지구중심의 사유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현 헌법체계가 인간존엄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지구법학은 자연과 생명의 존엄을 그 근본 전제로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자연과 생명의 존엄을 말하려면 자연도 주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지구법학은 인간만이 주체가 아니라 자연도 주체라는주장에 바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 역시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주객이원론적 사유에 바탕한 것이다.

주역의 인식체계에서는 주객을 구분하지 않는다. 주역의 생성과정은 주객미분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바로 존재를 관계론적으로 이해함을 의미한다.

 

1. 역과 변화

 

역의 의미는 변화에 있다. 중국인들이 삶의 변화에 민감했던 것은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짓는데 우주만물에 대한 민감성이 길러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지만물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면서 천지만물 즉 우주만물의 변화는 인간사의 변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주역이 신유학자들에 의해 유교적으로 해석하면서 그 변화의 근원을 유학자들은 태극이라 칭했다. 즉 변화의 근원 곧 움직임의 근원은 ‘태극’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1) 태극과 음양

 

역전 <계사전> 下 1장을 보면 “천하의 움직임은 一로 곧다.(天下之動 貞夫一者也)라 했다.

여기서의 一이 바로 태극을 의미한다.

태극은 기로 하여금 그 원리를 얻어 움직이고 고요하게 한다. 그처럼 태극은 동정을 주재한다. 즉 태극의 동의 원리가 양을 낳고 태극의 정의 원리는 음을 낳는다. (생성논리 273

태극은 음양으로 나뉘어지는데 바로 이 음양이 만물을 생성케 한다. 음 양이 갈마들어 움직이면서 만물을 낳는데 이 과정을 음과 양의 감응 과정이라 한다. 즉 만물은 음양이 감응하기 때문에 생성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갈마든다는 건 곧 감응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만물을 창생하는 근원적 힘의 상호작용이다. )

이처럼 만물은 음양의 상호작용(交易)에 의해 생생변화가 일어나며 이 생생변화에 의해 음양이 다시 정립된다. 그래서 음이 홀로 생기지 않으며 양이 홀로 생기지 않는다. 즉 음양은 각각 독립될 수 없다. 즉 양은 반드시 음을 얻은 뒤에 선다. 그러므로 양은 음으로써 기초를 삼는다. 마찬가지로 음도 스스로 드러날 수 없고 반드시 양을 기다린 뒤에야 드러난다. 이렇듯 음양은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 그래서 음양의 관계를 흐름으로 말한다면 하나의 사그라들고 다른 하나는 자라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음과 양은 태극 자체의 성질 차이가 아니라 유행작용에 의해서 생긴다. 음양은 서로 유행하므로 양은 변화하여 음이 되고 음은 변하여 양이 된다. 322

이처럼 음에서 양으로 양에서 음으로 변화되어 가는 모든 과정은 과정의 개체적 단위로서 마치 물이 흘러갈 때 생기는 파장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존재의 사실성은 파장의 생성이라 할 수 있다. 곧 주역은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파장에 의한 실체 이해에 가깝다. 그래서 하나의 괘를 해석할 때 그 괘를 독립적으로 이해함은 무의미하다. 반드시 64괘 전체의 맥락 속에서 한 괘의 의미가 해석되어야 한다. (생성논리287

이렇듯 세상만물의 변화는 음양의 관게에서 비롯되지만 그 외에도 만물의 변화요인으로 시간과 공간을 들 수 있다.

 

2) 때와 위치(시공)에 따른 변화

 

각 괘는 6효로 구성되어 있는데 초효에서 상효에 이르기까지 효가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다시 말해 각 괘의 의미는 각 효가 어디에 자리(位)하느냐에 따라 괘사의 의미뿐 아니라 효사 곧 각 효의 의미도 달라진다. 이처럼 효와 괘의 의미 곧 괘사와 효사는 효의 위치와 때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하나의 효사는 이웃하고 있는 효와 상응관계인지에 따라 괘사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주역에선 자기동일성을 주장하는 실체가 아니라 때와 자리의 변동과 함께 끊임없이 자기갱신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적 존재를 강조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주역에서는 만물을 ‘실체의 모임’이 아니라 ‘흐름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

이렇듯 괘는 처음부터 정해진 상이 없고 효 또한 처음부터 정해진 자리가 없다는 것은 주역은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고 모든 것은 변함을 말해준다. 그래서 정이천은 때와 勢를 아는 것이 역을 배우는 큰 방법이라 했다.

주역에선 만물에는 정해진 때가 있으니 그 때를 잘 알아 행위해야 길하다고 했다. 만일 자리를 얻지 못하거나 마땅한 자리(當位)가 아니면 흉하게 된다. 이처럼 주역에선 때의 알맞음과 자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역경>에서 時를 말한 때에는 항상 하늘과 함께 언급한다. 이는 주역이 주나라의 역이기 때문이다. 계사전에 말했듯이 하나라가 상제를 중시했다면 주나라는 天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주역에서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제 때에 일을 행하고, 하늘에 순응하여 제 때에 행하는 등 하늘의 때를 받든다. 그리고 그들에게 때는 하늘에 의해 안배된 규율 혹은 명령으로 이해해왔다.

주역에서 양효와 음효 두 효를 剛柔라 부르는데 계사전에 보면 “강유는 서로 추이하여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역전>에서는 강유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유가 서로 부딪치고(剛柔相盪) 서로 섞이고(剛柔相雜) 서로 변화하고(剛柔相易 번갈아 사용하는(迭用剛柔) 등 또 서로 사귀며 절제한다

즉 만물의 변화는 음양의 강유(굳셈과 유약함)의 움직임과 고요함(동정) 하늘의 때와 자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역경의 괘효사 모두 음양의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변하며 음양의 강유에 의해 천지만물이 서로 작용하여 만물이 변화된다. 그럼 지천태괘와 천지비괘의 비교를 통해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단전>에 이르기를

천지가 교제하여 만물이 형통하며 상하가 교제하여 그 뜻이 같다. 안은 양이고 밖은 음이며 안은 건실하고 밖은 순하며 안은 군자이고 밖은 소인이니 군자의 도는 커지고 小人의 도는 사라진다.

지천태(地天泰)는 땅을 뜻하는 곤괘(坤卦)가 위에 있고 하늘을 뜻하는 건괘(乾卦)가 아래 있는

64개의 대성괘 중에서 최고의 괘(가장 이상적인 괘)이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천지가 거꾸로 돼 있는 상태를 최고로 보는 건 우리의 상식과 다르다. 왜 지천태괘를 최고의 괘로 보는가.

그건 땅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오고 하늘의 기운은 위로 올라가므로 위에 있는 '지(地)'와 아래 있는 '천(天)'이 서로 만나기 때문이다. 즉 서로 다가가는 마음이 있어 관계를 맺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 있는 천지비(天地否)괘는 주역에서 가장 나쁜 괘이다. 이름 그대로 否는 소통되지 않아 형통하지 못하고 막힌 괘이다. 천지가 不交하니 만물이 不通하는 것이다.

상에 이르기를 천지否는 사람의 길이 아니다. 군자가 올바름을 펴기에는 이롭기 않으니 큰 것이 가고 작은 것이 오기 때문이다 이런즉 천지가 교제하지 못하니 만물이 통하지 않고 상하가 교화하지 못하여 천하에 나라가 없다. 내괘는 음이고 외괘는 양이다. 이것은 내심은 유약하면서 겉으로는 강강함을 가장하는 것이다. 권력의 핵심은 소인들 차지가 되고 군자는 변두리로 밀려난다. 그리하여 소인의 도는 장성하고 군자의 도는 소멸한다.

그러나 태괘는 언제나 좋고 비괘는 언제나 나쁜 괘로 규정할수는 없다. 태괘는 先吉後凶으로 전반에는 순조롭고 상승하다가 후반에는 쇠락할 수 있으며 비괘는 先凶後吉로 전반엔 고난의 시기나 후반엔 극복할 수 있다. 이처럼 처음에는 길하나 나중엔 흉해질 수 있고 흉하다가 길해질수 있다. 이와 같이 길흉도치 독법이 가능하다는 것은 주역에서의 길흉화복은 효가 어디에 위치함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3. 음양의 감응(感應)

 

건곤의 변화를 주역에서는 음양의 감응관계를 통해 설명한다. 感이란 움직임이며 應이란 대답함이다. 가까운 일만 서로 감응하는 것이 아니라 먼 일도 서로 감응한다. 공영달은 감응을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한다

1. 소리 불 물처럼 의식이 없는 것끼리의 감응

2. 구름과 용 바람과 범과 같이 의식있는 사물이 의식없는 것의 감응

3. 성인과 만민 사이처럼 의식있는 것들과 의식있는 것의 감응.

 

이러한 천지만물은 같은 부류끼리 감응하기도 하고 다른 부류끼리 감응하기도 한다. 감응의 대표적 예로 함괘(31괘)를 들 수 있다. 함괘는 하괘인 (산)과 상괘인 (못)의 두 기가 감응하는 괘이다.(산위의 못)

산과 못이 기를 통한다는 건 유약한 것은 올라가고 굳센 건 내려감을 의미한다. 산 괘는 유약함을, 못괘는 굳셈을 나타내는데 유약함과 굳센 기가 서로 통하고 감응한다.

계사전에서는 <함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위는 못이고 아래는 산이다. 함은 감과 같은 뜻이고 느낌이 좋다는 의미다. 젊은 여자를 상징하는 태와 아래 젊은 남자를 상징하는 간괘가 있다.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을 상징하는 감상적인 의미의 함이다.

이처럼 만물의 생성과 변화는 하늘과 땅이 서로 느끼고(感) 응하는 것에서 비롯됨을 주역은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2. 변화의 목적인 生生

 

주역은 만물의 변화를 그리는데 그 변화의 목적을 어디에 있는가? 변화의 목적은 바로 生生에 있다. 즉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나아감에 있다는 것이다. 천지의 변역 곧 우주의 수많은 변화와 의의는 생명을 화생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주역에서 가장 가치로운 것은 바로 생생함이다. 변화 가운데 있는 생생이 그것이다. 그래서 계사전에서는 “천지의 큰 덕을 生이라 일컫는다(天地之大德曰生).” (계사전 하 1장).

이러한 주역의 생명이해는 낱생명적 생명이해와 다르다. 사실 생명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학습하지 않고 얻은 자득적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생명은 낱생명으로, 하나하나의 살아있는 개체의 개별생명체를 의미한다. 생명체를 구성할 설계도에 해당하는 유전자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주요부분이지만 그 자체만으론 생명이 지닌 어떤 성격도 나타내지 못한다.

장회익 교수는 낱생명으로는 생명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고 온생명(global life)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말한 바 있다. 온생명의 주된 구성단위는 생물종이다. 온생명은 지난 수억년간 5차례 걸친 초대형 멸종사건이 있었다.

 

공룡의 멸종사건

 

--약 6500만년전 직경 10km되는 초대형 운석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와 지구와 충돌했다. 이 충돌로 초운석이 산산조각이 나 먼지가루가 되어 지구상공에 흩어졌고 이 충돌로 산불이 나서 흙먼지와 연기가 수년간 대기중 머물면서 태양 빛을 상공에서 흡수해버렸다. 햋빛의 90%이상을 차단당한 지구 표면은 대낮에도 한밤중같이 어두워졌고 기온은 여름에도 겨울같은 냉기가 돌았다. 이렇게 되지 몸집이 가장 크고 많은 먹이를 먹어야 하는 공룡부터 기아와 추위에 견디지 못해 사멸되었고 많은 생물종들이 멸종하고 말았다.

공룡멸종의 경위는 지구전체에 깔려 있는 이리듐 퇴적층 확인하는데서 나왔다. 이 원소를 지구상에서 볼 수 없는 원소이다. 이것이 지구상에 있다는 건 외계로부터 무언가 날아왔다는 것을 뜻한다.

즉 이것이 지구전체에 깔렸다는 건 외계 천체가 가루되어 떨어졌음을 의미한다. 현대 지질학자들이 지층 탐색한 결과 전 세계의 모든 지점에 6500만년전 지층에 이리듐함량이 높은 층이 균일히 깔려있음을 알게 되었다.

6500만년전 인간의 직계선조는 요즘 생쥐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은 연약한 포유류였기에 살아남았고 오히려 이 사건이 전화위복의 계기로 작용했다. 곧 하늘의 뜻이 우리 포유류로 하여금 오늘처럼 번영을 누리게 하기 위해 그런 과정을 거치게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이처럼 종래의 멸종사건은 외부환경적 요인이 많이 작용했으나 현대 상황은 오히려 인간 스스로 인위적 대참사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6번째 찾아올 생물종의 멸종은 종전과 달리 그 원인이 오로지 인간의 행위에 있다. 생태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에 따르면 현재 생물종의 멸종속도는 정상적 멸종 속도의 1000배-만배에 이른다고 한다. 그는 오늘날의 추세로 간다면 길게 잡아 400년이내에 모든 생물종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가 생물종의 멸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있는가? 우선 먼저 생명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생명관인지 우리의 생명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중국에서 날라온 미세먼지가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낱생명의 생명관에서 온생명의 생명관으로 ....주역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 낱생명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럼 주역에서는 생명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생명현상을 달리 신진대사라 하는데 주역에선 양과 음이 상호의존하면서 신진대사운동을 통해 생명을 유지한다고 본다.

 

신진대사 과정을 보면 남음과 모자람이라는 비평형이 필수적이다. 꼭 맞는 경우는 없다. 무언가 부족하고 무언가 남는다. 이렇듯 남음과 모자람이라는 비평형상태야말로 신진대사를 가능케 한다. 이를 주역에 비견해 보자면 주역의 괘는 늘 음과 양의 지속적인 비평형상태에 의해 변화가 일어난다. 즉 음과 양은 끝없이 갈마들어 움직이면서 자신의 남는 것을 내어주고 모자란 것을 받아들이면서 만물을 낳고 또 낳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것이 바로 음양감응의 과정이다.

이처럼 주역에선 음양의 감응이 만물을 창생하는 근원적 힘의 상호작용이다.

생명은 유한하여 때가 되면 결국 죽게 마련이지만 천지의 생명력은 유한한 생명 가운데서 다시 새 생명을 창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를 온 생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낱생명의 죽음은 온생명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고 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이처럼 날로 새로워짐을 盛德이라 한다. (계사전참조)

이처럼 주역에서는 우주만물을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보고 그 생명체는 음양의 감응 변화에 의해 생명을 생성한다.

생생의 생과 생 사이에는 죽음이 내재되어 있다. 계사전 상 4장에 보면 “시초를 먼저 거슬러 알고 돌아가 종말을 구한다. 생이 극에 달하면 죽음에 이른다.

주역에서 생생의 개념에는 한 세대 한 세대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생명의 의미가 들어있다. 이를 “역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 계속된다.”라 표현할 수 있다.

궁하게 되면 유한한 생명이 천도의 반복하는 道에 의지하여 변화하고 이 과정을 통해 생명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다.(生生不已).

그래서 64괘는 기제괘로 끝나지 않고 미제괘로 이어진다. 이는 우주생명변화에는 종결이 없음을 말해준다.

 

5) 화수미제(火水未濟)

-화수미제(火水未濟)괘는 64괘 중 제일 마지막 괘

*괘사에서 말하기를 “미제괘는 형통하다”고 한다. 형통한 이유에 대해서 彖傳에선 ‘음효가 중효(제5효)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5효는 중의 자리이므로 괘의 전체적 성격을 좌우하는 자리이다. 원래 5효는 양효인데 음효가 자리하고 있는데 왜 형통하다고 표현했을까? 있어야 할 양이 아닌 음이 있는데 이를 형통하다고 표현한 것이 바로 주역을 읽는 독법을 단순히 단층적으로 해석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즉 중이 음효일 때 이를 길하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주역에 많다. 그것은 음이 지닌 위대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양음이라 하지 않고 음양이라고 하여 음을 앞세우는 것은 동양사상이 기본적으로 땅의 사상이고 모성을 강조히기 때문이다.

 

**미완성의 괘

-최후의 괘가 완성 괘(完成卦)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한다.

-불이 물 위에 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다 타지 못하므로 미완성으로 끝난 괘이다.

미제未濟가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

-왜 주역에선 완성괘가 아닌 미제괘를 마지막 괘로 두었을까?

최후의 괘를 완성괘가 아닌 미완성괘로 둔 것은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彖傳엔 “어린 여우가 강을 다 건넜을 즈음 꼬리를 적신다. 이로울 바가 없다.”고 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 삼아 다시 시작한다.

-특히 마지막 단계에 작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 끝이라고 방심하다가 아니면 얼른 마무리하려고 서두르다가 그만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한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없다. 마칠 수가 없다.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없다.

그래서 64개의 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

자연과 역사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남는 것은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

우리는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完成態)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반성하는 괘로 읽는 것이 필요하다.

가능성은 어느 개인의 결심이나 그 개인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사물과 변화의 보편적 상황인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反省)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미완성이 사물과 변화의 보편적 상황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過程)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완성이나 달성(達成)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완성(完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목표(目標)’라는 개념이 없어진다. 목표가 없어진다면 남는 것은 과정이다. 즉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이것이 주역사상이 지닌 핵심이다.

우리의 삶이란 어느 정점을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시작해서 과정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직선적 세계관이 아니라 순환적 세계관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너무도 목표를 강조하고 있다. 목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목표달성을 향해 돌진한다.

그렇게 달리기만 하다가 되지 않으면 인생이 다 끝장난 것처럼 여긴다. 우리의 인생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에 비유할 수 있다.

더 빨리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사람들은 과속하고 위반하고 조금 더빨리 가려다 영원히 빨리 가버린다.

 

3. 천지의 생생을 본받는 방법(法天地生生)

 

천지가 생생하는 과정 속에 참여함이 인간의 삶이며 주역에선 이를 大業이라 한다. 즉 大業은 인간이 천지의 생생작용에 참여함이며 이는 곧 인간세 측면에서 말한다면 천하가 다스려짐이라 할 수 있다. 천하를 잘 다스리기 위해 천지의 도를 본받아야 한다.

(천지의 도를 본받는다는 건 천지의 덕인 생을 본받음이다.)

生은 역경 전체가 지향하는 최고 가치이요 목표이다. 그 生生에 나아가기 위해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知幾

 

역전에서는 기미를 매우 중시한다. 계사전 상 10장에 보면

“역은 성인이 그 심오한 이치를 끝까지 구명하여 미미한 기미를 연구한 것이다. 오직 심오하기 때문에 능히 천하만민의 뜻을 통할 수 있고 기미를 연구하기 때문에 천하의 모든 일을 능히 성취할 수 있다. 오직 신묘하기 때문에 빨리 나아가지 않아도 만사가 속성하고 일부러 행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다르게 된다. 라고 하여 성인은 ‘기미를 중시한다’고 말한다.

역시 기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렇듯 일이 발생하기 전에 어떤 기미를 미리 읽어낼 때 우리 그 상황에 더 잘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기미를 앎이 신묘하구나 군자는 위 사람과 교제할 때도 아첨하는 일이 없고 아랫사람과 교제할 때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으니 일의 기미를 아는 바로구나 기미는 움직임이 아직 미미한 것이며 길한 조짐이 먼저 나타나는 것이다. 군자는 이 기미를 보고 행동하여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하셨다. (계사전 하 5장)

이렇듯 주역에서 군자는 덕을 닦음에 있어 그 때에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건괘 문언전)

時와 位에 따른 군자의 행위는 그 상황에서 당위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때에 맞게 하는 것을 시중이라 했다.

신유학자가 쓴 주역 주석서중 가장 유명한 정이의 <역정전>에서 51번째 진괘의 다섯째 효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대개 중하면 바름을 위반하지 않지만 바르다고 해서 반드시 중한 건 아니다. 천하의 이치 중 중보다 더 좋은 건 없으니 ...때에 따라 변화에 응할 수 있는 건 중을 유지하는 것에 달려 있다..”

즉 내가 원칙적으로 옳은 일을 했다고 해서 그게 그 당시 반드시 알맞은 행동을 한 건 아닐 수 있다. 내가 바른 말을 했어도 그 상황속에서 꼭 적중치 않을 수 있다.

변화하는 가운데 응해서 그 한 가운데 있는 것이 중요하다. 중을 얻었는가가 길흉을 판단하는 준거이다. 그래서 정이는 “중이 곧 도이다..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고 했다. ”

다시 말해 도란 상황 속에서 중을 찾아 실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는 규정화다ㅚ어 있다기보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실천할 때 형태를 갖는다.

이처럼 군자는 배우고 분별하되 항상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이상 속에서 행동을 통해 그 덕을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현실 속의 실천적 인간이다. 이렇듯 역은 ‘성인이 심오한 이치를 끝까지 구명하고 기미를 연구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주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단다.

“硏(연구함)은 살핌과 같고 幾(기미읽음)는 미미함이다. 심오한 이치를 끝까지 구명함은 지극한정밀함이요 기미를 연구함은 지극한 변화다.

심오한 이치를 끝까지 구명함이 정적 측면에서 말한 것이라면, 미미한 기미를 연구함(硏幾)는 동적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미를 앎은 움직임의 미미함을 앎이요 미세한 움직이란 생명이 처음으로 움직이는 미묘한 순간을 말한다. 지기는 음양변화의 운동과 시간을 내포한다. 그래서 기미를 알면 제 때를 맞출 수 있고(時中) 모든 변화에 잘 순응할 수 있다.

지기의 내용은 나아가고 물러서고 보존하고 망함을 아는 것이요 미미함도 알고 드러남도 알며 유연함도 알고 굳셈도 아는 것이다. 사람은 기미를 알아야 비로소 장래의 행동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기미를 알려면 군자는 비우는 노력을 취해야 한다. 함괘 상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산위에 못이 있으니 군자는 그로써 자신을 비워 남을 받아들인다.

 

2) 비움

 

왕필의 함괘 주석에 보면 “자신을 비워 사람을 받아들이니 만물이 이에 감응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공영달도 “군자가 자신을 비워 사람을 받아들이는 건 이 함괘를 본받은 것이다. 이는 아래에 산이 있고 위에 못이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워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며..

정이는 말한다. 군자는 산과 못의 기가 통하는 상을 보고 마음을 비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인다. 무릇 사람의 마음이 비면 받아들일 수 있으며 차면 들어올 수 없다. 마음을 비움이 곧 무아이다. 마음에 사사로운 주인이 없으면 느끼는 것치고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주역의 산지박괘(山地剝卦)는 단 1개의 양효가 남아 있는 형상이다. 박(剝)은 빼앗긴다는 뜻이다.

음적양박(陰積陽剝)의 상태, 박괘는 세상이 온통 악으로 넘치고 단 한 개의 양효(선)만 남아있는 상태인데, 그 한 개의 양효마저 언제 음효(악)로 전락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그런데 이 박괘는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임을 함축하고 있다. 즉 절망이 쌓이고 쌓인 가운데 오직 실낱같이 가느다란 단 하나의 희망이 남아 있는 상태로 64괘 중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초효부터 5효까지 모두 음효이다. 양은 선 음을 악으로 보면 악이 득세하는 말세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즉 붕괴직전 상황 하나의 양효마저 언제 음효(악)으로 전락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상징한다.

그러나 효사에는 1개 남아 있는 양효를 신윤복교수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석과(碩果)는 씨과실이다. '씨 과실'은 불식(不食), 먹지 않는다. 또는 먹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늦가을 찬서리 내릴 때 감나무 끝가지에 남겨놓은 큰 감이 '씨 과실'이다. 씨과실은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먹히지도 않는다, 아무리 혹독한 시련에도 최후의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희망의 언어 이다.

 

"석과불식은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임을 말해준다" 이처럼 절망을 뛰어넘어 희망으로 나아가려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지금 처한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 작게는 가족 좀더 나아가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박괘에서 무너져 버린 어려운 상황을 복괘에서 근본으로 되돌아와 회복시키고 무망괘에서 사사로움이 없이 멈추어 보존한 결과 대축괘에 이르러서는 하늘이 주는 복을 받아 열매를 맺게 된다.

 

** 지뢰복(地雷復)

 

산지박괘의 다음 괘는 지뢰복(地雷復)괘로 이는 땅에 우레가 묻혀있는 형상을 갖추고 있다. 초효 1개만 양효이고 2효에서 6효까지 전부 음효이다.

초구는 서서히 위로 올라오기에 절망이 희망으로 바뀔 수 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산지박괘의 절망이 지뢰복괘에 와서 희망의 괘로 바뀐 것이다.

-아무리 절망적 상황이라 해도 희망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절망의 깊은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건 바로 우리가 본래 자리로 되돌아감을 통해 이루어진다. 복괘는 바로 회귀 돌아옴이다.

돌아가야 할 자리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그건 바로 천도 천명에로 회귀함을 가리킨다.

하늘의 운행은 순환 반복하는 변화의 흐름이며 이 흐름 가운데 우린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천지의 마음은 곧 생생불식을 반복하려는 의지다. 그러므로 되돌아오지 않음은 생명 공동체로부터의 이탈이다

역의 근본법칙은 천도 혹은 천명의 중심으로 순환반복하기 때문에 생명은 계속 발전한다.

 

<결론>

 

주역의 변화를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이 생명의 가치를 보존키 위해 변화를 한다. 오늘날 생명의 가치를 경시하는 오늘날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하는 것이 바로 생명의 가치임을 일깨워주며 생명을 생하기 위해 변화하여 이를 위해 통해야 하며 통하기 위해 기미를 알아야 하고 기미를 알기 위해선 비워야 한다.

주역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 窮卽變 變卽通 通卽久)이다. 이는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말로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이 궁극에 달하면 곤궁하게 된다. 이럴 때 보통 사람은 그 궁극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곧 변함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권력이나 명예를 쥔 사람은 특히.그러나 결국 그 끝은 좋지 않다. 우리가 내려놓을 줄 알 때 곧 변화를 받아들일 때 우린 세상과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고 결국 그 때 오래 갈 것이다.

태평한 시기도 세월이 흐르면 다시 궁하게 되기 마련 아침 해가 뜨면 밝고 따뜻하지만 밤이 오면 다시 추위와 어둠이 찾아든다. 하루가 이렇듯 일년이 그러하고 우리인생이 그러하거늘 때가 되어도 변치 않고 그대로 고착하고자 한다면 결국 통할 수 없고 그래서 결국 오래 갈수 없게 된다.

 

 

생명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결이 안 되도록

만들어진 것인 듯.

꽃도

암술과 수술로 되어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벌레나 바람이 찾아와

암술과 수술을 연결하는 것.

생명은

제 안에 결여를 안고

그것을 타자가 채워주는 것.

 

--요시노 히로시 (吉野弘)의 <생명은>

<北入會>, 靑土社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