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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안내 2016 5월 종교강좌 <논어읽기1-사람답게 살기> 녹취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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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6-07-12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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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종교대화강좌- 논어

 

 

1. 근대 중국과 서양의 관계

 

 

‘공자’ 하면 우리는 마치 잘 아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실제로는 공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곡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말합니다.

조선시대 500년의 정치적 이념으로 자리매김해온 유교는 그만큼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유교는 생활 속에 남겨진 형식적 가부장적 면이 마치 공자에게서 비롯된 것인냥 오해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 편견을 내려 놓아야, 공자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근대 중국과 서양의 관계에 대해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양자 관계는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입니다. 여기서 ‘서’는 서양을, ‘동’은 중국을 의미합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서양에 비해 약세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서양은 모든 것을 가진 선진국이고,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는 가진 것이 없는 후진국으로 표상되는 시대적 조류가 있었습니다. 중국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서양에는 있으나 중국에는 없는 것들을 찾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중체서용(中體西用)’입니다. 중국에서는 ‘체용’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본질은 중국의 것을 고수하되, 기술적인 것은 서양에서 배우자는 생각이 중체서용이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은 해군도 창립하고, 군수공장도 설립하면서 서양을 따라가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중국은 약세이고 서구는 앞으로 전진하는 형국이기 때문에, 빨리 쫓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표현 속에 담겨있습니다. 세 번째로 ‘전반서화(全般西化)’를 들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던 중체서용이 서양을 닮은 중국의 탄생을 제대로 가져오지 못하고 부족함이 생기자, 전반적으로 완전히 서구화되려는 시도로써 민주적인 가치관과 서구의 과학을 수용해서 변화를 가져보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사유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발전한 서양 문화가 결국 1, 2차 대전을 야기했고, 이성의 발달이 세계를 파괴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서양만 닮아서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자각과 함께 중국 문화에 새롭게 눈뜨기 시작하게 됩니다.

어떤 인디언 추장은 유럽순례 후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문화의 발전과 빛을 준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당신들의 문화가 꼭 빛으로만 다가오는 건 아닌 것 같다. 빛 속에 어둠의 그림자가 들어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중국이 근대에 들어와 서구 문화를 수용하면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도 엄청남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 예로 심각한 생태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그 후 기술적인 발전만 가지고 진정한 의미의 발전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지식인들의 반성이 일어나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문화의 가치를 돌아보는 성찰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성찰의 중심에 공자의 사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2. 공자의 시대적 배경

 

공자는 인류의 4대성인 중 한 분으로 보는데 그것은 그만큼 그분의 삶이 당시 춘추시대 뿐 아니라 역사를 초월해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자사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책이 <논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논어를 통해서 공자가 어떻게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탐색해보려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주는 무게만큼, 공자가 동아시아 문화에 끼친 영향력, 그 무게 또한 엄청난 것입니다. 그의 삶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논어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고대중국은 하, 은, 주 삼국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춘추전국시대로 건너가기 전 부족국가의 형태입니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친 후 제후국들이 진시황에 의해 통일되면서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서주시대는 하은주에서 주나라를 말합니다. 그때 다루어진 철학적인 주제는 주로 자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자연의 움직임에 예민할 수 밖에 없엇습니다. 자연의 운행에 따라, 인간 사회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서주시대의 지식인들은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연과 인간의 삶의 관계를 ‘상제(上帝)’와 ‘천(天)’의 존재 안에서 이해했습니다. 자연을 운행하는 존재를 상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은나라 역시 부족신으로 상제를 섬깁니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망시킬 때 “천명(天命)에 의해서”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천명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중국사상의 ‘天’ 개념이 드러났고, 이는 공자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공자는 주나라가 이루었던 문화를 회복함을 자기 삶의 목표로 삼습니다. ‘천(天)’의 명,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하느님의 뜻과 같은지, 다른지 논의해볼 수 있습니다. 공자사상에서 ‘천(天)’은 인격적인 부분과 비인격적인 부분이 함께 있으나 논어에서 ‘천(天)’의 인격성을 많이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왕은 天의 아들, ‘천자(天子)’입니다. 천자는 天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명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서주시대를 건너오면서 다른 국가간의 알력들이 생기면서, 천자의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전엔 절대군주의 이미지였다면, 그 밖의 제후국들의 힘이 세지면서 천자로서의 주왕의 위치가 조금씩 불안해집니다. 이에 따라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변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천자가 명하고, 백성들이 따르는 구조였다면, 다른 제후국들간의 힘의 갈등들이 생기면서, 왕의 권력만으로는 나라를 이끌어가기 어렵다는 자각이 생깁니다. 이로써 힘의 정치에서 덕德의 정치에로, 정치 이념의 구도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서주시대에 왕이 천자로서, 다른 제후국들 위에 군림하다가 다른 제후국들 간과의 힘의 균형이 변하면서 혼란의 시기가 왔으니 이 때를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릅니다.

서주시대는 성왕의 카리스마에 의해 사회질서가 잡힌 이상시대였습니다. 성왕은 모든 것을 구비한 존재입니다. 패자는 권력을 지녔으나 학문과 이상적인 면에서는 부족함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패자가 군림하고 패자끼리 경쟁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패자는 성왕으로서 모든 것을 겸비한 사람이 아니라 힘은 있으나 학문적 부분이나 덕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것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이런 인물들이 여기저기서 우후죽순 격으로 출현했으니 이를 사(士)계급이라고 합니다. 공자 역시 힘은 갖고 있지 않지만,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계급에 속했습니다.

공자는 사계급을 세 등급으로 나눕니다. 첫 번째는 ‘도덕성과 능력 갖춘 사람’, 두 번째는 ‘가족윤리에 충실한 사람, 세 번째는 ‘실무적 실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공자는 그 중에서 첫 번째 ‘사’를 제일 높은 층으로 봅니다. 사계급은 제후국들의 왕을 보좌하는 사람들로 등장하게 됩니다. 제후국 중 제나라 수도는 임치였는데 그곳의 선왕이 당시 유명한 사상가들, 곧 도덕성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초빙해서 함께 자유롭게 사상을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장을 펼쳤습니다. 그 장이 바로 직하학궁/직하학사입니다. 맹자도 여기 출신입니다. 당시 엘리트들이 여기에 모여 서로 자신의 사유를 나누고 또 어떻게 이 어지러운 시대를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가게 할 수 잇을까 하여 나름의 이론들을 주장했던 곳입니다.

당시 중국도, 일본도 그랬듯이 시대가 혼란스러워지면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경우가 생깁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힘으로 치고 올라오는데 춘추전국시대도 혼란기였기 때문에 하극상의 사회적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Q 일반 백성들은 왕이나 제후보다 사(士)계급을 더 존경했나요?

A 네. 왕은 권력은 있었지만,

 

덕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군림했을 때 망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은나라가 그 대표적인 국가이지요. 은나라 마지막 왕은 주왕이었는데 악덕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은나라는 상제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상제와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왕’이었어요.

왕이 악덕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어렵게 사는 틈을 타서 주나라가 은나라를 공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침략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주나라는 天사상을 말했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공자’의 생애를 보겠습니다.

 

3. 공자의 생애

 

공자는 BC 551-BC 479년에 살았던 사람으로 노나라 출신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몰락한 귀족집안 자손입니다. <사마천 사기>를 보면 공자는 “아버지가 숙량홀, 어머니는 안씨, 노양공 22년에 출생”했다고 합니다. 머리 위가 조금 패어 ‘구(丘)’, 라는

이름이 붙어 孔丘가 됩니다.

공자는 여러 기술을 습득 했습니다. 워낙 똑똑해서 노나라 관직에 들어가 51세 늦은 나이에 계사구가 됩니다. 이는 법무장관이라고 하지만 어마어마한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대부’를 ‘상대부’와 ‘하대부’로 나누는데 상대부는 장관급과 유사하나 공자는 하대부 소속이었다고 주석을 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시비비가 있으나 공자가 51세 때 노나라의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2년- 3년정도 짧은 시간을 지내다가 정치적 모략으로 공직에서 사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공자는 55세부터 유랑생활을 시작해서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있는 통치자를 찾아 나섭니다. 어지러웠던 당시 어느 제후국의 통치자가 자신의 뜻을 실현할 수 있을지 찾아 14년간 유랑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공자가 덕의 면에서나 지적인 면에서나 누구도 추종할 수 없을만큼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유랑생활을 했던 시절이 공자의 삶에서 핵심을 이루게 됩니다. 가시밭길을 걸었던 14년이 오늘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공자 사상의 꽃이 피어난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활 전 30년이라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3년이라는 그의 공생활이 가능했듯이 말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수가 메시아가 된 것이 아니듯이 공자 사상도 유랑생활을 통해 여물어갔습니다.

논어는 이러한 공자의 일생을 담아놓은 책입니다. 공자는 69세에 다시 노나라로 돌아옵니다. 자신의 뜻을 펼치려고 했던 지도자를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실패한 것이지요.

그런데 인류에 족적을 남겼던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실패한 사람이 주는 메시지, 그 울림은 굉장한 거예요. 실패의 쓴맛을 봤을 때 인생은 거기서 꽃을 피우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절정에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가 아니겠어요. 철저히 실패했던 그가 주는 메시지가 2000여년간 수많은 이들의 삶의 좌표가 되어온 것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자신의 삶에서 실패를 소화해내느냐. 실패를 어떻게 승화시켰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50대를 전후한 시기가 공자의 생애에서 핵심을 이룹니다. 72세의 삶에서 클라이막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문하생들도 많았고, 51세에는 관직에 나가서 토목공사를 주관하는 장관까지 되었고. 다른 제후국들과의 평화협정을 맺는 일에서 왕의 보좌관으로 따라가 노나라에 유리한 쪽으로 모든 협정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공자가 외교 능력이 출중하자 다른 이들의 시기 질투를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왕의 일족인 계손씨, 숙손씨, 맹손씨 이렇게 삼환씨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 공자는 그들 눈의 가시였습니다. 공자는 정공12년에 삼환씨의 모략을 받아 위기를 넘겼지만 결국 1년 뒤에 실각하고 유랑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4년동안 위나라에 7년, 진나라에 3년, 위나라에 4년을 보냅니다.

50세에 공자는 지천명, 천명을 알았습니다. 공자의 실패를 뒷받침 해준 것은 ‘천명’에 있었습니다. 천명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 논어> 속에 나타난 공자의 모습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논어 속의 공자>

 

공자의 정체성은 배우기를 좋아하는 호학자라는 것입니다. ‘학’은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자는 자신이 성인이 아니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10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라도 나만큼 충실하고 믿음성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과는 같지 못한 것이다.”(공야장 28)

 

“당시 초楚나라 섭공은 공자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가 제자 자로子路를 만나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자로는 선뜻 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왜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한 가지 주제에 깊이 열중하다 보면 밥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나아가는 길에 즐거워하며 삶의 시름마저 잊어버려서 늙음이 찾아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내고 있습니다.’(술이19)“

 

공자가 제자 자공에게, 왜 자신을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냐고 반문 합니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호학자로 보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두 번째로 공자는 자신을 옛 문화 계승자로 규정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공자가 자신을 문화를 창조하는 성인이라기보다 성인의 문화를 전달하는 계승자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공자가 주목한 것은 주나라 문화입니다.

 

“주는 앞선 두 왕조(하/은나라)를 자신의 본보기로 삼았다. 영광스런 그 문화여, 나는 주를 따르겠노라”(팔일14)

 

여기서 말한 영광스런 문화는 주나라의 문화를 의미합니다. 특별히 공자가 본받고자 했던 옛 문화의 성인은 우임금입니다. 우임금이 어떤 인물이었길래 공자가 높이 평가했을까요?

 

“우임금은 자신은 싸구려 음식을 먹으면서 귀친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았고 변변치 않은 옷을 입으면서 의례용 의복과 모자를 가장 아름답게 꾸몄네. 또 머무는 거처를 허름하게 지으면서 치수사업에 온 힘을 쏟았다네”(태백21)

 

‘예’는 우리가 많은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 중 하나입니다. 유교는 지나치게 예를 중시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공자가 말하는 ‘예’는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는 오늘날 그 의미가 변질되어 형식만 남고 그 내용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공자는 자신을 “술하되 작하지 않는(述而不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곧 새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었던 문화를 전승해서 이 시대에 맞게끔 새롭게 해석하고 토착화하는 것, 그것이 공자가 하고자 한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의미로 바꿔 이해한다면 예수가 우리에게 남겨준 문화를 어떻게 이 시대에 맞게끔 토착화하고 내 삶에 맞게끔 살아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 역시 ‘술이불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공자는 자신의 소명의식을 끝까지 지고 갔습니다. 논어 <미자편>을 보면 공자가 같은 시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공자는 제자와 함께 길을 가다가 강을 건널 나루터를 찾지 못하자 자로를 시켜 인근 사람들에게 물어보게 했습니다. 그가 두 사람에게 나루터를 묻자 그들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공자일행이 하려는 일이 참으로 허망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신도 사람을 피하려고 드는 인물. 즉 공선생을 따라다니기 보다는 아예 세상을 등지고 사는 인물을 따라다니는 것이 어떻겠소.”(미자6편)

 

이 메시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면 사상가들은 두 방향의 길을 선택합니다. 하나가 은자의 삶입니다. 곧 “세상을 등지고 사는 인물” 곧 ‘피세지사(辟世之士)’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지러움을 접하지 않고 혼자서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세상을 등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세상을 등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자는 노자와 다릅니다. 그것은 세상 속에 남아 끝까지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하고자 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동시대 사람들은 공자를 두고 안 되는 줄을 알면서 무엇이든 해보려고 하는 사람이라 지칭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엇이든지 해보려고 했던 사람이 바로 공자입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사람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공자를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인생은 실패했지만 그를 실패했다고 낙인찍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공자는 불리한 상황을 탓하지 않고 끊임없이 학습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의 틈새를 열어 젖히고자 노력했다”

 

여기서 왜 공자에게 학습이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자로가 노나라의 성문에 하룻밤을 묵었을 때 문지기가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자로가 공씨의 문하에서 왔다고 대꾸하자 문지기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엇이든 해보려고 하는 사람 말이죠’라고 응수했다.(헌문41)”

 

공자의 정체성의 핵심이 문지기의 입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문지기도 알 정도로 공자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끝까지 했던 사람인 것이죠. 공자와 은자 모두 세상의 흐름을 탐탁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공자는 도가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마저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공자는 자신의 바람이 실현될 수 없다는 운명을 알았지만 실패를 넘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수행하고자 했습니다.

무한한 열정과 굳은 소명의식으로 자신을 담금질하며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도 아무리 소명의식으로 무장했다고 하더라도 수시로 찾아오는 무기력과 좌절감을 떨쳐버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자가 어떻게 실패에 무릎 꿇지 않고 정면으로 맞설 수 있었을까요? 그 에너지 힘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건 바로 공자가 하늘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광(匡)지방에서 위험에 처하셨을 때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文王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 문화가 여기 나에게 전해져 있지 않은가.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려 했다면 文王보다 뒤에 죽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 문화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늘이 이 땅에서 앞으로 이 문화를 없애버리지 않는다면 광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자한 5)

 

유랑 14년동안 공자는 여러 번 생명의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광지방은 노나라, 송나라, 위나라, 진나라의 경계, 요충지대를 일컫습니다. 공자께서 광지방에 머물렀을 때 광지방을 공략했던 사람이라고 오인받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공자와 제자들이 붙잡혔고 생명의 위협마져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공자께서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나라의 문왕이 돌아가시고 그 문화가 나에게 전해졌다.” 공자는 자신이 주나라 문화의 계승자, 전승자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지 않았는데, 광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없앨 수 있겠냐’고 한 것입니다. 공자는 광지방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위기를 겪었습니다. 56-57세 때의 여행 중에 송의 환퇴가 공자를 위해하려 했습니다. 이때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덕을 나에게 주셨는데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는가?“(술이23)”

 

환태는 송나라의 관료로 오늘날 국방부장관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여행 중에 공자를 죽이려고 했을 때 공자께서는 “하늘이 덕을 나에게 주셨는데 환태가 나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공자는 자신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천(天)’에 대한 강한 믿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의 속내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위험에 쳐했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공자는 하늘과 관계를 가지면서 하늘이 나에게 문화계승자로서 소명을 주셨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냐며 하늘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공자가 한탄하고 절망에 빠진 대목들도 논어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남들을 탓하지도 않으며 비근한 것을 배워 고원한 것에 이른다. 나를 알아주는 분은 아마도 하늘이리라. (헌문35)”

 

어디에서도 자신이 펼치려고 했던 뜻을 함께할 제후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하늘을 원망하지도, 남을 탓하지도 않으며 그래도 나를 알아주는 이가 있으니 그는 ‘천(天)’일 것이다라 하여 천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덧붙였듯이 하늘이 자신의 사명을 보호해준다는 신념,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고 또한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도 합니다. ‘버렸다’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 안연이 젊은 나이에 죽었을 때입니다.

 

“안연이 죽자 공자께서 아!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선진편)

 

안연의 죽음 앞에 공자께서 통곡하셨는데 논어에 보면 통곡한 것은 이때뿐입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그래서 자신의 계승자로 점찍어 놓은 바로 그 제자입니다. 그런 제자가 젊은 나이에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논어 제 10장에 보면 공자께서 통곡을 하셨는데 그의 제자들이 선생님께서 통곡하심을 보고 놀라니까, 공자께서 “이 사람(안연)을 위해서 통곡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를 위해 통곡하리’ 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볼 때 공자의 일생 안에서 이 때가 가장 어두운 밤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와 유사한 느낌이 공자가 제자 안연을 잃었을 때 드러났습니다. 그렇지만 공자는 하늘에 대한 원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논어라는 책>

 

논어는 공자가 그의 제자들이나 당대 인물과 나눈 대화를 중심으로 공자의 일상적 모습을 제자들이 모아놓은 언행록입니다. 말 그대로 논어는 곧 철학책도 아니고, 통합된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논어는 각 편이 통합된 주제를 지니고 있지 않기에 관통하는 주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논어는 구전으로 전수되다가 지금의 형태로 편찬된 것은 맹자시대(기원전 372-289)에 와서입니다. 논어는 20편으로 되어 있고 전편과 후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논어는 20편으로 되어있는데 전편은 학이편부터 10편 향당편까지이고, 후편은 선진편부터 20편 요왈편까지입니다. 전편은 공자의 모국인 노나라에 남아 활동하던 제자들 사이에서 전승되어온 것들을 편집한 것이며 후편은 전국시대 중심지인 제나라에 가서 활동하던 제자들 사이에서 편집된 것입니다.

 

<논어를 통한 공자의 가르침>

 

제1편이 학이편, 제2편이 위정편, 제3편이 팔일편. 제4편이 이인편입니다. 편명은 글의 첫 번째 두 자를 따서 붙인 것입니다. 학이편의 시작은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고 되어있습니다. 학이편에서는 배움과 군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공자에게 있어 성인은 이미 이룩된 사람이고, 군자는 노력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위정편은 정치에 대한 것이고 팔일편은 인간사의 예에 대한 것이며 이인편은 인(仁)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공자사상의 핵심은 인(仁)입니다. 그리스도교로 보면 사랑에 해당합니다. 仁을 이해하는 것은 논어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仁과 禮. 이 두 가지가 공자사상의 양 기둥입니다. 인(仁) 없이 예(禮)는 의미가 없어요. 예의 껍질만 남는 것이죠. 仁이 없는 예는 공자사상이 아닙니다. 공자에게 있어 예는 인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仁이 드러나는 것은 예를 통해서입니다. 이만큼 공자사상에서 인과 예의 관계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논어는 그냥 쉽게 읽혀지는 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 그 내용은 심오한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의미들을 찾아내고 곱씹어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1. 학이편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기쁘지 아니한가. 친구가 있어 먼 데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아니하니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학이 1)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이 표현은 공자 사상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학(學) 곧 배움의 목적은 서구에서 말하는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인식 논리적 객관적 사고방식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터극함에 있다. 이 삶의 지혜는 머리로가 아니라 꿈으로 익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에게 있어 학 곧 배움이란 몸으로 익힐 때까지 애쓴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배우되 그것을 때때로 몸에 익을 때까지 배우니, 그것이 “기쁘지 아니한가(不亦說乎)” 그냥 즐거운 것이 아니라 배워서 몸에 익힌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영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지요. ‘학’과 ‘사(思)’의 관계는 위정편 제15에 나옵니다.

 

“배우되 생각하지(思) (혹은 실천하지) 않으면 어둡고(罔),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즉, 思而不學이면위태롭다(殆)(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위정(爲政)편 15).”

 

생각한다는 것은 배운 것을 내 안에서 성찰하고 곱씹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배우고 안으로 생각하고 성찰하는 행위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합니다. 어떻게 군자다운 인격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배움을 통해서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군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학이편 1장의 맨 마지막에서 말하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남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기대하죠. 내가 뭔가를 했는데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괜히 짜증을 냅니다. 그런데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을 수 있는 인격이 바로 군자라고 합니다. 16장에서는 똑같은 의미를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남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할까 근심해야 한다(학이 16)”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鮮矣仁)(학이3)”

이 말도 유명한 말입니다. “교언영색은 말을 정교하게 남이 듣기 좋도록 하고 얼굴빛도 곱게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듣기 좋은 말이나 보기 좋게 꾸민 얼굴 중에는 어질고 순박한 사람이지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색을 꾸미는 사람에게서는 인자함을 찾아보기가 힘들다”(학이3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천 필의 병거를 소유한 제후국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정사를 공경스럽게 하여 백성에게 신의를 지켜야 하고 경기를 절약하여 백성을 아껴야 하며, 부역을 시키는 일을 알맞은 때를 가려서 해야 한다.”

 

학이1장은 자기를 닦는 수기(修己)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 주제와 따라오는 것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맺음에 대한 것입니다.

‘인(仁)’은 논어 안에서는 타인을 가리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가(治人)에 대한 이야기가 5장에 나와 있다는 것이지요.

공자사상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시중(時中)’사상입니다. 화살을 쐈을 때 정 중앙을 맞추듯이, 때에 맞게 하는 것을 시중이라고 합니다. 때에 맞지 않으면 좋은 것도 사람에 따라 화를 불러 일으킬 수 있지요.

흔히 유교를 가족중심의 윤리로만 왜곡되어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가족을 지탱하는 자연의 정이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그 정이 미칠 수 있는 거리에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가족중심주의라는 점에서 비판받아온 유교사상의 근거가 공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공자사상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仁의 출발은 가족으로 보고 군자의 삶 역시 가까운 가족부터 시작됩니다.

군자의 의미는 공자 이전과 이후에 완전히 달라집니다. 공자 이전에 쓰였던 군자는 시경에서는 ‘임금의 아들’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즉 공자 이전에 군자는 임금의 아들, 귀족과 같은 의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지배층 출신을 군자라고 했다면 공자에 와서 군자의 의미는 인격적으로 된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출신이나 사회적 엘리트층을 군자라고 불렀던 것이 공자에 와서는 인격적으로 된 사람, 노력한 사람을 칭하는 것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군자는 두루 화친하고 편당적이 아니다. 편당적인 건 小人이다.”(爲政편)

 

군자는 늘 소인과 대인을 대비해서 정의됩니다.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동일함에도 화목하지 않다(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子路편)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관용과 공존을 추구하는 반면, 동(同)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 가치를 고수하려 합니다. 군자는 화(和)의 논리를 소인은 동(同)의 논리를 따릅니다.

공자께서는 배움의 좌표로 충(忠)과 신(信)을 말합니다. 충과 신은 4장 5장 8장에서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충(忠)하고 신(信)하는 것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뿐 아니라 동등한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효제는 형제끼리 우애있게 지내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의 완성이 인(仁)입니다. 바꿔 말하면 인(仁)의 기초는 효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자에게 있어 인(仁)을 이루는 것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즉

거기서부터 인(仁)이 출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 제2 위정편을 보겠습니다.

 

<위정편>

 

위정이덕(爲政以德)은 ‘덕으로 정치한다’(덕치)는 의미입니다. 덕치에 대립되는 표현은 모든 것을 법으로 다스리려 하는 법치입니다.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면서 진시황이 제후국들을 통일하지 않습니까. 그 통일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바로 법가사상입니다.

법가사상으로 통일을 이룬 진시황은 법가에 반하는 유교책들을 다 불살라 버렸습니다. 당시 주역처럼 유가책이 아닌 것들만 남았죠. 그래서 나중에 유학자들이 주역을 유가적으로 재해석하여 역전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정이덕(爲政以德), 공자는 덕으로 정치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닌 것입니다. 공자는 덕을 지닌 지도자를 북극성에 비유합니다. 북극성은 자기는 움직이지 않고 늘 제자리를 지키면서 다른 별들에게 구심점을 주고,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다른 별들이 북극성을 향해 오는 것이죠. 공자는 바로 그런 북극성 같은 지도자를 찾았던 것이죠. 덕과 예로서 백성을 다스리게 되면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잘못한 것을 고치려 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법제로 백성들을 이끌고 형별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죄를 면하기만 하면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덕으로 그들을 이끌고 예로 다스리면 부끄러운 줄 알아서 스스로를 다스린다”

 

공자는 ‘법치’가 아닌 ‘덕치’로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섰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던 것이죠.

위정편 제3은 ‘덕’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덕스럽다’는 의미도 있지만, 한마디로 ‘답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군주다운 것, 대통령다운 것, 어머니다운 것, 아버지다운 것, 선생님다운 것, 그것이 바로 공자께서 말씀하신 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답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학이시습지를 통해 각자의 자리에서 다워짐을 지향하고자 합니다. 내가 소속된 곳에서 나의 역할은 각각 변합니다. 내가 처한 위치에 따라 ‘다움’이 달라집니다. 수도자 답게, 사제답게, 크리스찬답게. 덕치는 수기로부터 시작합니다. 닦음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통해서, 즉 옛 문화를 계승받아서 재해석하고 새롭게 현대에 맞게 ‘신(新)’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6월 강좌에서 논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