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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6년 11월 종교강좌 <노자, 장자 읽기> 녹취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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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7-01-0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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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민 수녀님께서 '노자, 장자 - 세상과의 소통'을 주제로 강의하셨습니다.
 
 
 
 
어지러운 현실 앞에 노자와 장자에 대해 강의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 나름대로 한국의 현실을 함께 아파하면서 그것을 풀어낼 수 있는 해법이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 안에 있지 않나 하는 한 가닥 희망을 엿보면서 오늘 강좌를 준비해보았습니다. 지난 시간 도의 정체성을 말씀드리면서 도덕경 1장 첫 마디에 나오는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말할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해석되는데요, <노자 도덕경>에서 노자가 하고 싶었던 의미가 이 한 마디 안에 함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엇이라고 규정하거나, 절대성을 부여하거나, 불면하거나, 영원하거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도가 아니다.” 이 부분은 그리스도교에 상당히 도전적인 표현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께 절대성을 부여하고 영원 혹은 불변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도가적 표현과는 상당히 다른 색깔의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에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것에도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고 영원한 것도 불변하는 것도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는 무엇일까요. 노자는 도를 불변하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것’으로 봅니다. 어떤 면에서 변화한다는 표현 안에 희망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것이 불변하든가, 변함이 없다면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버겁겠습니까. 그러나 <노자 도덕경>에서는 도는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관점은 그리스도교 신앙에도 새로운 빛은 주지 않나 싶습니다. <노자 도덕경> 2장에서 짚어본 것 중 하나는 이원론적인 사유방식입니다. 대극관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길고 짧은 것, 아름답고 추한 것, 사랑하고 미운 것, 내향과 외향 등 대극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대극관계 속에서 판단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교육받아 온, 선이라는 기준에 의한 것이고, 그것에 반하는 것은 모두 악이라고 내칩니다. 노자는 그런 이원론적 인식방법은 도에서 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원론적인 사유방식을 뛰어 넘을 때, 비로소 우리 삶에 드리운 갈등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럼 그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노자는 이에 대해 ‘무위(無爲)’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無爲와 有爲라는 두 표현은 오늘 강의의 키워드라 할 수 있습니다. 無爲는 ‘하지 않음’이지만, 단지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함이 없는 것’입니다. 노자는 無爲를 無以僞라고 말합니다. ‘함이 없다’는 것이죠. ‘함이 없다’는 것은 결국 有爲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노자가 볼 때, 우리의 행위의 대부분은 有爲함입니다. 有爲는 내가 의지와 목적을 갖고 행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有爲함 없이 사는 방법이 바로 무위자연입니다. 노자와 장자의 핵심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무위자연이라 할 수 있습니다. 無爲는 목적을 초월해서 사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유위함은 삶에 자국을 남깁니다. 우리는 내가 어떤 것들을 했다는 자국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여기서 자국은 자신의 프로필 같은 것이죠. 이에 반해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 없이 함이 무위입니다. 자연이 그러하다고 노자는 이야기합니다.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고 해서 자연이 뭔가를 안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연을 보면 다른 어떠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 자연은 함이 없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무위함이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도(道)가 무엇인지 엿볼 수 있는 표현들을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道가 가지는 속성, 道를 지닌 이는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도(道)의 속성 첫 번째 속성으로 道라는 것은 비어있음입니다. 道라는 것은 차 있지 않고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노자 도덕경> 11장을 보면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빈 바퀴통에 모인다. 그 빈 것 안에 모든 것이 수용되어 수레가 쓸모있게 되는 것이다.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빈 부분 때문에 그릇이 쓸모있게 된다. 문과 창문을 뚫어서 방을 만드는데 그 빈 공간 때문에 방이 쓸모 있게 된다. 따라서 有가 이로운 건 無가 用이 되기 때문이다. 수레의 곡(轂)은 바퀴살이 모이는 통이다. 이 곡(轂)에 축을 끼움으로써 수레가 된다. 이 때 곡이 비어 있어야 축을 끼울 수 있다. 방이나 그릇도 비어 있어야 쓰임이 있다는 것이다.” 쓸모있음은 비어있는 자리 때문이라는 것이죠. 수레에 빈 바퀴통이 있기에 수레가 굴러갈 수 있고, 그릇의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고요, 이 모든 것들이 빈 공간 때문에 쓸모 있게 됩니다. 노자는 道의 속성이 바로 이 비어있음에 있다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비어 있음에 대해 <도덕경>에 계속 반복해서 나옵니다. 우리 삶의 방향성이 비어있음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16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비움에 이르는 길을 지극히 하고 고요함을 지키는 일을 전심으로 하라. 만물이 모두 생겨나는데 나는 그 돌아감을 본다. 사물이 많기도 많지만 각기 그 뿌리로 돌아간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한다. 이것을 ‘천명에 돌아간다(復命)’고 일컫는다. 천명에 돌아간 즉 항구해지고 항구함을 아는 것을 밝다(明)고 한다.” 본문을 보면, 시위복명(是謂復明)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復明은 천명으로 돌아간다, 뿌리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뿌리로 돌아가기 위한 작업이 바로 비어있음이에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비움에 이를 길을 지극히 하고, 고요함을 지키는 일을 전심으로 하는 것, 그것이 도에 이르는 길이라고 노자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이루고 싶고 행동하고 싶고 하는데 노자는 비움의 길, 고요함을 지키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요함을 지키는 것은 결국 뿌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복귀기근(復歸基根), 그 뿌리로 다시 돌아간다. 우리가 온 그 뿌리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죠. 그 뿌리로 돌아감을 정이라 하고 복명(復明)이라 한다. 천명에 돌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고요해지는 것이고, 고요함을 지극히, 전심으로 하게 될 때 우리는 밝게(明) 되는 것입니다. 밝음(明)은 무엇이냐면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참으로 아는 것은 자기 안에 내재한 道를 아는 것입니다. 道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죠. 48장에는 비움에 이르는 길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학문을 하면 배우는 게 매일 늘어나는데 도를 닦으면 날마다 덜게 된다. 덜고 또 덜어내면 무위(無爲)에 이른다. 하는 것이 없지만 되지 않는 일이 없다.” 학문을 하면 배우는 것이 늘어나죠. 그러나 도를 닦으면 반대로 덜게 돼요. 덜고 또 덜게 되면 무위에 이르게 됩니다. 무위에 이르는 것은 쌓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덜어내느냐 하면 우리 안에 욕망의 덩어리, 마음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을 비워내고 또 비워내면 道에 이르게 되고, 그 道의 이름이 무위라는 것입니다. 계속 곱씹어 봐야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것 같습니다. 이게 단순히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각자가 갖고 있는 비워내야 할 것들이 다 다르죠. 나는 어떤 것으로 나를 계속 채우고 있는가. 계속 배우고 가르치는 저에게는 도전으로 다가오는 말이고, 계속 곱씹고 성찰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부드러움 道가 지닌 가장 중요한 속성이 비어 있음이라면 두 번째는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이 강한 것이다.” 우리는 부드러움 하면 약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노자는 부드러움이 지닌 강함을 이야기합니다. 그 상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물과 어머니입니다. 노자가 道에 대해 말할 때 많은 상징물을 쓰는데, 그 중 물과 어머니가 많이 등장합니다. 물은 언제나 아래로 흐르고 형태에 자기 자신을 맞추죠. 흐르는 그 자리에 형태를 맞추는, 자기 것이 없는 것이 물의 성격입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물의 속성 중 하나가 부드러움이죠. 도덕경 76장에도 부드러움에 대한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살았을 땐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었을 땐 단단하고 뻣뻣해진다. 만물과 초목도 살았을 땐 부드럽고 연하지만 죽었을 땐 마르고 뻣뻣해진다. 따라서 단단하고 뻣뻣한 것은 죽은 무리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살아있는 무리다. 이 때문에 군대가 뻣뻣하면 패하고, 나무가 뻣뻣하면 부러진다.” 우리가 분노에 꽉 차 있으면 얼굴이 굳어지죠. 그러면 가까이 가기가 꺼려지고, 말을 걸기도 어렵습니다. 자신이 경직되어 있거나 뻣뻣해져 있을 때, 이를 빨리 자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국인은 분노 즉 화를 많이 지닌 민족이라고 하는데요. 자신이 화난 것을 빨리 자각하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딱딱함 곧 죽음의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노자 도덕경> 6장에는 모성성, 여성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道를 谷神, 즉 계곡의 신령에 비유한 것입니다. “현묘한 암컷, 현묘한 여성의 문, 이를 일컬어 하늘과 땅의 뿌리라고 한다.”고 6장에서 말합니다. 계곡은 푹 들어가 있죠. 그렇게 들어가 있는 형태이기에 노자는 그것을 현묘한 여성의 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성의 생식기라고 볼 수 있을 텐데, 모든 것을 품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죠. 그걸 곡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중국 민간신앙에서 도교가 종교로서 자리매김하는데 바탕이 되었던 것이 <노자 도덕경>입니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의 성격은 도가 갖고 있는 여성성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중국에 갔을 때 여러 도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아직도 제 머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도사 한 분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그 분이 여자도사라고 생각했는데 남성이었습니다. 아미산에 계신 분이었는데요, 그 분에게서 저는 도의 모성성, 여성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덕경>에 나오는 도가 지닌 부드러움과 여성성을 말입니다. 그래서 <노자 도덕경>의 이 부분을 읽을 때면 그 분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제1장에서도 도는 천지지모(天地之母)라는 표현이 이미 나왔는데, 여기 6장에서 어머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비어있음, 부드러움, 여성성, 물, 곡신. 이러한 상징물들을 통해 노자가 말하고자 한 성인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인의 길 도덕경 제5장에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천지는 자애롭지 않으니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芻狗)로 여긴다. 성인은 자애롭지 않으니 백성들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로 여긴다. 하늘과 땅의 사이는 풀무와 같아서 비어있되 쪼그라들지 않으며 움직일수록 더욱 튀어나온다. (그래서) 말이 많아서는 자주 막히니,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비어있음(中)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추구(芻狗)는 풀, 짚으로 만든 개 형상을 말합니다. 제사 때는 이것을 잘 모시고 썼지만 제사가 끝나면 그냥 버렸다고 합니다. 그 의미는 다음을 이해해야 알 수 있습니다. 천지불인 성인불인(天地不仁, 聖人不仁), 천지는 자애롭지 않다, 성인은 자애롭지 않으니 백성들을 추구로 여긴다는 것은 백성들을 하찮게 여기라는 뜻일까요? 여기서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仁이 유가전통에서는 모든 덕의 완성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노자의 仁은 유가의 仁이라기보다는 ‘친애하다, 편애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仁이라는 개념이 공자에 와서 덕의 완성으로 유가에 정착이 되었지만, 그 전에 쓰였던 仁의 의미는 親에 가까웠습니다. <도덕경>에서도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지와 성인은 편애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선인은 좋아하고, 불선인은 싫어한다는 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취하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은 노자가 말하는 성인의 사유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을 79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天道는 無親이어서 언제나 성인과 더불어 있다.” 그러면서 추구, 곧 풀강아지는 백성을 하찮게 본다는 뜻이 아니라 각자 그 소임대로 맡겨두고 사적인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무위지치(無爲之治)이죠. 노자가 세상에서 피했고 은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세상 안에 들어와서 세상을 다스리되, 다른 방법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무위로 다스리는 것은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두는 것이죠. 위에서 강압적으로 모든 것을 컨트롤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렇듯 무위지치의 핵심은 추구라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되면 자식을 간섭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자식이 잘 되는 경우보다는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지켜보는 여유가 바로 무위적인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자리에 모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풀무’라는 표현 역시 중간이 비어있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비어 있는 공간으로 많은 바람이 통할 수 있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무한한 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2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까치발로는 오래 서 있지 못하고 가랑이를 한껏 벌리고 걷는 자는 멀리 가지 못한다. 스스로 빛내고자 하는 자는 빛나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으며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그 공이 없고 스스로 뽐내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도의 견지에서 말하자면 그건 먹고 남아도는 음식이요 쓸데없는 군더더기다." 까치발은 더 커지고 싶을 때 하는 행동이죠. 그러나 그 상태로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또한 가랑이를 한껏 벌리는 것은 자기 영역을 넓히려는 삶의 자세입니다. 요즘 한국정치상황을 보면 이런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자기꾸밈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드러내려고 떠벌리는 사람들은 자기 존중이 낮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노자는 “먹고 남은 음식”, “군더더기”를 모으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페르소나라는 말은 인격을 의미하는데, 본래의 뜻은 가면입니다. 나이를 들면서 우리는 하나 둘 가면을 쓰게 됩니다. 자신이 하는 일들을 통해 가면을 쓰게 되는 것이죠. 그 가면을 벗지 않고 그 가면이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인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권력, 명예를 지닌 사람은 페르소나를 벗기를 두려워하죠. 그것을 벗고 자기 자신과 직면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페르소나에 갇혀 살아가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자기 자신을 상실한 채 가면이 자신인 양 착각하면서 평생을 사는 것이죠. 분석심리학에서는 페르소나, 곧 가면을 벗겨내는 것을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의식의 세계가 5%라면, 무의식은 95%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무의식에 있는 것을 의식화할 때 우리가 조금 더 나 자신을 알게 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첫 번째로 행해져야 할 작업을 가면을 벗는 것입니다. 수도자라는 가면, 사제라는 가면, 그것을 벗겨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말하는 비움과 연결됩니다. 다음으로 대극을 통합한다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대극의 통합은 성인이 되는 길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대극들을 갖고 살아갑니다. 36장에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는데 미명(微明)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27장에는 습명(襲明)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노자 사상을 이해하는 데 이 두 단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명의 微는 ‘미약하다, 숨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미명(微明)이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동기가 목적이 아직 잘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반면, 明은 어둠과 밝음이 함께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새벽녘에 어둠이 아직 남아 있으면서도 서서히 밝음이 찾아오고 있는 그 상태, 곧 밝음을 감싸고 있는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는 그 상태가 미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약함과 강함의 이중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 이게 바로 道이지요. 어둠을 내치지 않으면서 어둠을 품을 수 있는 것, 악인을 내치지 않고 악인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道는 품고, 싸는 데 있습니다. 선인만을 택하고 악인을 내치는 게 아니라 악인을 감싸 안고, 포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미명이고 습명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노자가 이야기 하는 도의 성격입니다. 습(襲)은 옷을 껴입는다, 싼다는 뜻입니다. 옷을 껴입듯이 밝음을 감싸는 의미인데, 그러면 밝음의 명도는 약해지죠. 그래서 어둠도 공존할 수 있게 됩니다. 너무 밝으면 어둠이 자리할 수 없게 되지요.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도의 속성입니다. 이것과 비슷한 표현으로 화광동진(和光同塵)이 있습니다. 빛과 화합하고 먼지와 함께한다는 화광동진은 미명, 습명의 다른 표현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 표현 안에 노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도의 속성이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보통 빛을 사랑하고 먼지를 싫어하는 그런 애증심이 우리 안에 있는데, 그것을 버려야합니다. <신심명>에 보면 어떤 것은 사랑하고 어떤 것은 미워하는 애증심을 발산시켜야 한다고 나옵니다. 무엇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결국 집착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선불교의 조사 중 3대 조사인 승찬이 남긴 <신심명>이라는 선어록에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으면 훤하게 명백해진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문제는 어디서 생기느냐, 애증심에 있다는 것이죠. 이것을 버리는 것을 <신심명>에서는 강조합니다. 노자에서도 같은 말이 나옵니다. 빛만을 좋아하고 먼지를 내치는 양자택일적인 의식을 내려놓는 삶의 자세, 먼지와 동거할 수 있는 삶의 자세가 노자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도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상징물 중에 모든 것을 아울러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으로 ‘연못’과 ‘웅덩이’를 예로 듭니다. 연못이나 웅덩이는 모든 것을 품어냅니다. 깨끗한 물도 더러운 물도 모두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혼합이 되어버리죠. 모든 것을 품어줄 수 있는 웅덩이 같은 마음을 무위적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7장에 보면 “무명의 통나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도는 항상 무위하지만 또한 하지 않음이 없다. 후왕이 도를 지킨다면 만물은 장차 저절로 운화되리라. 운화하여 욕망이 생기면 나는 장차 이를 무명의 통나무로 진정시킬 것이다. 무명의 통나무는 또한 어떤 경우에도 욕망을 내지 않는다. 고요함으로써 욕망을 일으키지 않으면 천하가 장차 스스로 바르게 되리라.” 통나무는 아직까지 어떠한 형태로 만들기 전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통나무는 자기 자신이 없지요. 자기가 없기 때문에 보시의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즉, 무한한 것을 내어줄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무위정치와 그 주체 57장을 보면, “故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성인이 무위한 정치를 하게 되면 백성(民)은 “자화, 자정, 자부, 자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백성이 스스로 하도록 두면 스스로 교화하고, 스스로 바르게 되고, 스스로 부유해지며, 스스로 …. 이게 바로 무위지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노자는 이것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성인이라고 봅니다. 성인이라는 표현은 유가에도 나오는데, 양자는 같은 표현을 쓰지만 의미를 조금 다릅니다. 유가에서는 성왕(聖王)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성왕은 계몽을 일으키는 주체, 지배자입니다. 그래서 지배자의 덕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성왕이 다스림의 주체이기 때문에 주체가 어떤 사람이냐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유가에서는 주체자로서 가져야 하는 덕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노자의 성인은 계몽의 주체나 지배자로 군림하지 않고, 마치 자기는 세상에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없는 존재처럼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백성이 스스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꼭 이렇게 해야겠다는 상심(常心)이 없으면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 것. 이는 결국 자기 마음이 없다는 것이고 자기를 비운다는 의미죠. 이것이 바로 구체적인 성인의 마음비움이고, 이 마음비움은 무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무욕에 바탕한 것이 노자가 말한 무위정치입니다. 무위정치를 현대어로 표현하면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그건 바로 “보조성의 원리(Principle of Subsidiarity)”가 아닌가 싶습니다. 강우일 주교님께서 11월 9일자 한겨레 신문에 쓰신 기고문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요약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나라의 중앙집권 정치와 같이 대통령이 모든 것을 장악하는 상황 안에서 최순실 비선실세 사태가 발생한 것을 지적하면서 강주교님은 성서의 모세 이야기를 하십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일어난 갈등을 해소시키는데 모세 혼자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장인은 50인 대장과 백인대장에게 그 짐을 나누어 주라고 조언합니다. 결국 모세는 이를 그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탈출기 18장에 나오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보조성의 원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보조성의 원리는 한 사람이 권력과 권위를 모두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배하는 것입니다. 권력자는 다른 사람이 일을 나누어 할 수 있도록 분배하는 역할을 잘 해야 합니다. 보조성의 원리가 가능하려면 밑에 있는 사람들을 신뢰해야 하지죠. 그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위 사람들은 자리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이는 국가의 정치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작게는 가정 안에서, 또 수도공동체,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대 민주주의는 보조성의 원리를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보조성의 원리 그 밑바탕에는 노자가 말하는 무위적인 정치, 무위적인 다스림이 깔려있지 않나 싶습니다. 도가의 덕 도덕경은 도경과 덕경이 합쳐져서 도덕경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37장까지 나오는 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덕에 대한 이야기는 덕경의 시작인 38장부터 나옵니다. "上德(최고의 덕)은 덕스럽지 않으니 그래서 덕이 있다. 下德(낮은 덕)을 지닌 이는 덕을 잃지 않으려 하니 그래서 덕이 없게 된다. 최고의 덕은 억지로 하는 것이 없지만(무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낮은 덕은 무엇인가를 하려 야단이지만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최고의 어짐은 하는 바가 있지만, 자신의 의도에 따라 하지 않는다. 최고의 의로움은 행위할 때마다 자신이 의도하는 바가 있다. 최고의 예의라도 실천하면서 응하지 않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끌어당긴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후 덕이 생겼고, 덕을 잃은 후 仁을 말하게 되었다. 인자함을 잃자 의로움을 언급하고 의로움을 잃은 후에야 예를 내세웠다. 예는 진실하고 믿음있는 마음이 얄팍해진 것으로 모든 혼란의 시작이다."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上仁爲之而有以爲. 上義爲之而有以爲.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扔之.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禮者忠信之薄, 而亂之首) 덕은 상덕과 하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상덕은 덕스럽지 않은데 덕이 있고, 하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고 하지만 덕이 없습니다. 상덕은 無爲한 사람을 의미한다면, 하덕은 有爲, 무언가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래서 덕이 없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 다음으로 인의예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의예지는 결국 道를 잃었기 때문에 德이 생겼고, 德을 잃어서 仁을 말하게 되었고, 仁을 잃어서 의로움을 말하게 되었으며, 義을 잃어서 禮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유가의 인의예지는 자연스러운 도를 상실한 데서 나온 차선책이며 인위적으로 덕을 닦으려는 작위적인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작위적인 것은 노자의 입장에서 하덕에 해당되고, 그것을 넘어서 상덕은 무위함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禮는 ‘팔을 걷어붙이고 끌어당긴다(則攘臂而扔之)’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는 강압성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때문에 예는 有爲한 하덕에 해당되는 것이며 상덕은 무위한 덕이라는 것입니다. 무위의 덕은 날마다 덜어내고 줄이는데 있다는 의미입니다. 결론 노자를 이해하는 데 핵심은 無爲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위함이란 유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위는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지만, 무위함은 집착함이 없습니다. 결국 무위함이란 자신의 집착을 내려놓는 행위입니다. 자기 집착을 내려놓음 대해 노자는 비움, 무욕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런 표현은 모두 無爲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방식은 욕망을 자극하고 소비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비움을 채움으로, 계속 우리에게 소비를 강요하고 있는 사회구조 속에서 노자의 메시지를 내 삶에 수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본주의의 한계를 깊이 자각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그냥 따라가게 됩니다. 노자는 현대 자본주의에 반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방향이 우리가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위한 길이라고 보기 때문이지요. 우리 자신이 자본주의에 대해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노자의 가르침을 따라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최근 한국 사회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모두들 그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면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 끊임없이 손가락질을 하곤 합니다. 그러고 나서 돌아서면 씁쓸함이 남지요. 정말 우리가 당면한 이 현실의 원인이 그 한 사람에게 있는가, 그 사람과 주변 사람에게만 원인이 있는가. 결국 나를 포함해서 우리 자신,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이 지금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을 향해서 손가락질을 하라는 메시지를 넘어선,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성찰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게 아닌가, 노자를 읽으면서 이 점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장자 장자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것을 보면 “성은 장이고 이름은 주다. 장자는 송나라 사람이고 몽이라는 곳에서 났다. 젊어서는 옻을 재배하는 곳에서 관리를 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사기>에 보면 양나라 혜왕과 제나라 선왕과 동시대 사람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맹자 안에도 양혜왕과 제선왕 장이 있기에 장자가 맹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둘이 만난 것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생몰연대가 비슷하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장자 역시 춘추전국시대, 가장 혼란한 시대를 살았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혼란한 시기에 성인들이 많이 출현했다는 점입니다. 근래에 쏟아지는 글들을 보면서 좋은 글들이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시대의 어둠이 사람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두운 시기가 사람들로 하여금 내면으로부터 굉장한 빛을 발하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혼란을 어떻게 해결할 지 제시하는 해법이 각자 다르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맹자나 노자처럼 장자 역시 시대적인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해법은 상당히 달랐습니다. 장자를 읽으면 당시의 혼란을 전혀 겪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면도 있지만, 자기 내면으로 상당히 승화시켰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자는 현실적인 고통을 어떻게 승화시켰는가? 그건 바로 소요가 아닌가 싶습니다. 장자 제1장이 ‘소요유’인데요. 소요는 한가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런 소요가 시대적 해법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장자가 말한 소요 안에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계속 장자를 읽고 또 읽으면서 그 행간의 의미를 맛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기>에 보면 당시에도 장자가 현명하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에 초나라 위왕이 제상으로 삼고자 사신을 보냈는데, 그때 장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초나라엔 신령스런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3천년이 되었다고 했다. 임금이 그를 상자에 넣어 보관한다는데 당신이 거북이라면 죽어 뼈만 남겠소, 살아 진흙 속에 꼬리 끌고 다니겠소.” 이는 장자가 무엇을 지향하며 살았고,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는지가 함축적으로 담겨져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장자라는 책 장자라는 책은 송북 곽상이 편집한 곽상본 편집본입니다. “내편이 7, 외편이 15, 잡편이 11편, 총 33편이 있다” 이 중에서 장자가 직접 집필했다고 학계에서 인정한 것은 내편의 일곱 편 뿐입니다. 나머지는 후학들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편을 중심으로 해서 장자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1편은 소요유, 2편은 제물론, 3편은 양생주, 4편은 인간세, 5편 덕충부, 6편 대종사, 7편 응제왕 이렇게 7편이 있습니다. 오늘은 1편을 살펴보고 다음에 나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장자는 노자 도덕경과는 상당히 다른 서술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노자는 굉장히 철학적인 이야기로 되어있는 반면, 장자 1장을 읽으면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한 마리 살았는데 그의 이름은 곤이었다”라는 식의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노자 도덕경>과는 상당히 다른 서술형태인 만연체로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읽어서 의미를 알아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많은 비유와 상징, 암시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달을 그릴 때 원을 그려서 달을 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달을 그리지 않고 달 주변에 구름을 그려 달이 있음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그리는 기법이 있습니다. 이것을 홍운탁월법이라고 합니다. 이런 글쓰기 방법을 우언이라고 하는데, 장자의 대부분이 이런 우언(寓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 70%는 중언(重言)인데, 자기가 주장하고 싶은 말을 역사적으로 권위 있는 인물의 주장인 양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공자와 안연이 등장해서 그들의 대화로 풀어나가는 장면이 있는데 이런 것을 중언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입을 빌려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공자라는 이름을 빌려서 표현하는 것이죠. 소요유(逍遙遊) 장자 제 1편 소요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말 그대로 소요(逍遙)는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장자가 말하는 소요는 단순히 육체의 소요이기보다 정신적 소요입니다. 정신적으로 얽매임없이 유유자적하는 것이죠. 이것은 어떤 면에서 노자의 무위하고도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소요유의 遊라는 것도 목적지를 향해서 걷는 보행이 아니라 목적지 없는 보행입니다. 불가에 행선(行禪)이 있습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걷기선입니다. 좌선수행 중에는 좌선과 행선을 번갈아 합니다. 좌선을 40-45분하고, 행선을 10-15분하는 수행체계도 있고, 행선만을 따로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팃낙한 스님의 행선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걷는다는 게 어떻게 수행이 될 수 있을까요? 보통 걷는 것은 어떤 목적지를 두고 걷지요. 집에 간다거나, 직장에 간다거나. 이것은 걷기 위한 걸음이 아니고 어디를 가기 위한 수단의 걸음이지요. 그러나 걷기선은 걷기 위한 걸음입니다. 수단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목적으로 걷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인 걸음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우리는 대부분은 수단으로 살지요. 목적을 정해놓고 그 목적을 위해 살아갑니다. 이 목적이 달성되면 다음 목적을 세우고, 그 다음은 또 다른 목적, 그 다음 목적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면 계속 수단을 살다가 어느 날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뭐하고 살았지?”라고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수단만이 아닌 목적을 사는 삶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바로 지금 여기를 계속 목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를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완전히 몸과 마음을 가져올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지금을 목적으로 사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순간순간 이어갈 수 있으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목적을 사는 삶이 될 것입니다. 걷기선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보행과 행선의 다름은 보통 걸음은 수단의 보행이지만, 걷기선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렇듯 행선 수행은 내 삶의 방향을 바꾸게 만듭니다. 소요유(逍遙遊)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기에 노니는 것은 여기에 내 마음을 온전히 다 갖고 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지금 여기에 온 마음을 다 갖고 오게 되면 그것은 소요유, 노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놀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놀이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소요유(逍遙遊)의 첫 부분을 한 번 보겠습니다. “북해에 한 물고기가 있는데 이름을 곤(昆)이라고 한다. 곤은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도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한번 노하여 날면 그 날개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운 것 같았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명으로 이사를 간다. 남명이란 천지(하늘못)다. 재해는 뜻이 괴이한 사람(책)이다. 재해의 말(기록)에 의하면 대붕이 남명으로 날아갈 때는 물결이 삼천리이며 폭풍(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 상공에 올라 여섯 달이 되어야 쉰다.” 이 이야기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건네려고 하는 건지 알아 듣기가 어렵네요. 물고기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새가 된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비약시키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짚어보기는 어려우니까 중요한 키워드를 몇 가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소요유(逍遙遊)를 통해서 장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자유로운 존재로의 변화입니다. 여기 드러나는 것은 물고기죠, 물고기 이름은 곤인데 이 물고기가 새로 변합니다. 존재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놀던 물고기가 하늘을 향해서 날아오르는 큰 변화를 말입니다. 곤이라는 물고기가 우리의 존재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면, 무한한 가능성으로 비약하고 있는 것을 새, 곧 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말을 빌린다면 그렇게 자유로와진 존재가 신인(神人)이고, 지인(至人)입니다. 우리 안에는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새로 존재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 모두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장자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첫 번째 메시지라고 봅니다. 이어서 계속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소요유(逍遙遊) 마지막에 보면 혜자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그와 장자가 하는 대화가 나옵니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 아주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가죽나무라 말하네. 크기만 했지 옹이가 박혀 목수의 먹줄에 맞지 않고 가지는 굽어 곱자와 그림쇠에 맞지도 않네. 그래서 길가에 서 있어도 목수들조차 돌아보지도 않는다네. 자네의 말은 이 나무처럼 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으니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라네.” 여기 등장하는 가죽나무는 크기만 컸지 쓸모가 없지 않느냐, 그래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라고 혜자는 장자에게 말을 건넵니다. 바로 장자가 하는 이야기는 쓸모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죠. 이에 장자는 답하기를, “자네는 언젠가 족제비를 본 적이 있겠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엎드려 망을 보는 거만한 놈이네. 동서로 날뛰며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지만 결국 덫에 걸리거나 그물에 걸려 죽게 마련이네. 저 검은 소는 그 크기가 하늘에서 구름이 내린 것 같으니 이야말로 크다고 하겠으나 쥐를 잡을 수도 없네. 그러니 자네의 나무가 크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네! 어떤 인위도 없는 고장의 광막한 들에 심고 그 곁을 할 일 없이 노닐고 그 밑에 누워보기도 하면 어떻겠나? 도끼로 찍힐 염려도 없고 아무도 해치지 않을 것이니 쓸모없다고 어찌 괴로워한단 말인가?” 족제비와 검은 소 이야기를 하면서 장자는 물건의 크기와 모양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크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생각이 나라를 건지는 데 쓸 수 있다는 것이죠. 장자가 하고 있는 뜬구름 잡은 이야기들의 속내에 담겨있는 이야기는 뭘까요? 우리는 늘 ‘어떤 것이 쓸모 있을까?’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용함이 갖고 있는 大用입니다. 뒷부분을 보면 “혜자, 당신은 쓸모를 말하는데, 자칫 쓸모라는 것에 자신을 가두게 되기 쉽다오. 쓸모에 갇히게 되면 쓸모에 눈이 어두워져 덫에 치이거나 그물에 걸려 죽기 십상이지. 쓸모가 없어지면 그때에야 소요유할 수 있다네, 이건 無用으로 보일지 모르나 이것이야말로 진짜 쓸모 중에 가장 큰 쓸모인 大用이오. 삶에는 목적이 있는 삶이 있고 목적이 없는 삶이 있소. 목적이 있는 쓸모(小用)를 탐하는 삶이 있는데, 쓸모를 탐하지 않는 목적이 없는 삶이 있다네. 쓸모를 탐하지 않게 되면, 그야말로 소요해지고 유해져 진정한 쓸모(목적)가 될 수 있다오. 그래서 이것을 大用이라 하는 것이오.” 삶에는 목적이 있는 삶이 있고 목적이 없는 삶이 있는데, 목적이 있는 쓸모를 탐하는 삶과 탐하지 않는 목적이 없는 삶,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장자는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소요유를 통해서 장자가 우리에게 건네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의 습관, 이로움과 해로움 등을 구별하고 판단하는 인식의 습관으로부터 자발성으로의 비상, 건너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발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교육을 통해 인식의 습관이 생겨나면서 우리 안에 본래 있던 자발성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장자는 그것이 얼마나 큰 상실인지 많은 이야기을 통해서 우리에게 건네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자는 우리가 갖고 있던 자발적인 성향을 다시 키워내고, 다시 재발견해서 훈련하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노자 도덕경에는 아쉽게도 수행론이 빠져 있습니다. 자유롭게 되고 무위하게 됨의 의미는 이야기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그 수행론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인식의 습관에서부터, 내가 본래 갖고 있는 자발적 성향으로의 비상.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어린이와 같이 되어라’는 것은 장자가 이야기하는 자발성의 성향으로서의 되돌아감. 인식의 습관 바로 그 전, 우리 인간 존재가 본래 갖고 있었던 자발성의 성향, 그것이 갖고 있는 잠재력. 그것을 통해서 진정으로 비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장자를 통해 배우게 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다음 달에 장자가 제시하는 수행방법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