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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2017년 3월 시민종교강좌 녹취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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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17-03-2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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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13
 
 
고독, 상상 그리고 저항 - 사회적 영성으로 종교를 말하다
 
이정배 목사님
 
 
 2017년이 여러모로 참 중요한 해라는 것을 모두들 느끼고 계실 것입니다. 그 징조와 기미가 시작되고 있지만 일단 대선이라는 하는 중차대한 과제가 있겠고요. 또 하나는 개신교에 국한된 경우이겠습니다만,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은 근대로 넘어가는 정치적인, 교육적인 혁명이 되었고 종교가 개혁이 되어야 세상도 같이 개혁이 되는 것이라는 전례를 남겼습니다. 올해 종교개혁 500년을 맞으면서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제대로 바꾸어보는 실험을 해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꼭 개신교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 종교개혁이라는 것이 모든 종교의 당면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님이 한국 와서 하셨던 말씀 중에 제 개인적으로 종교 개혁과 관련한 화두가 된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가 먼저 복음화되지 않으면 세상이 복음화되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곧 복음이고 복음이 곧 교회이며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식으로 교회와 복음을 하나로 보는데 반해서 교황님 생각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의 복음화가 없으면 세상의 복음화는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교회의 복음화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 누구냐, 그건 성직자들이다. 그렇다면 성직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는가에 대해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쓰레기통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거듭 비워내지 않으면 악취가 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시대의 교회가 달라질 수 있는지와 관련해서 이 말씀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을 말하려고 합니다. 꼭 개신교의 종교개혁 500년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도 유교도 막론하고 모든 종교가 크게 개혁이 되어야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오늘 참여와 명상이라고 하는 것을 주제로 제 강연이 좁혀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본격적으로 이야기 들어가보겠습니다.
 
 작년 대림 강의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밝히는 대림절 촛불과 광장에서 들었던 촛불이 정말 다른 촛불일까 생각해봤습니다.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들었던 촛불은 예수님을 기다리며 들었던 촛불과 무엇이 다를까? 제가 최근에 낸 책 제목이 “광장과 교회는 둘이 아니다.”입니다. 광장에서의 바람이 교회에서의 바람과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현실에서 보면 태극기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태극기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민족주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민족주의를 넘어야 하지만, 떠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죠. 민족주의는 뜨거운 감자처럼 우리의 자산이면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인데요. 태극기를 들고 나오면서 태극기 옆에 성조기가 세워졌고 성조기 옆에 이스라엘기가 세워졌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요? 기독교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성조기를 들고, 이스라엘기를 들고 나왔다. 그럴 때, 성조기와 이스라엘기와 결합된 태극기가 삼일 독립운동을 할 때 들었던 태극기인가? 한편 다른 한 쪽에서는 태극기와 함께 세월호 리본을 들고 나왔습니다다. 세월호 리본이 만난 태극기가 진짜 태극기냐,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만난 태극기가 진짜 태극기냐. 그렇게 보았을 때, 성조기와 노란 리본의 결합이 바로 태극기의 좁은 의미, 협소한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진짜 약자와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차원을 태극기를 통해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현상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사실 제가 내걸었던 주제는 고독, 저항, 상상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고독하라, 저항하라, 그리고 상상하라” 이게 저의 책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세 가지 화두를 가지고 종교를 개혁하자는 측면에서 말을 걸었는데요. 고독, 저항, 상상은 어떤 뜻이냐면, 고독이란 신앙이라는 것, 믿음이라는 것을 인문학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저항이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하는 종교적 언어를 인문학적으로, 시대적인 차원에서 풀어내려고 쓴 말입니다. 다음으로 상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성서를 굳어진 경전으로만 알고 있지만 성서 안에 얼마나 우리의 상상의 보고가 있는가를 일깨우지 위해 쓴 말입니다. 표면적인 성서 말씀에 따라 모든 걸 다 재단하는 게 아니라, 성서가 우리에게 주는 아주 큰 영감과 상상력에 집중한 것입니다. 믿음, 은총, 성서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말이죠. 이것들 없이 하루를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들을 일반적으로, 인문학적으로 풀어낸 것이 바로 고독, 저항, 상상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오늘 같이 해보려하고요, 그러나 결국은 성서적인 언어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가 믿음-은총-성서, 고독-저항-상상과 마찬가지로 병렬적으로 이해하는 또 다른 단어들이 있습니다. 어느 종교든 간에 자기 종교를 이해할 때는 세 가지 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이해할 때 불교인은 불교를 이해할 때 자기 종교를 이해할 때 필요한 세 가지 눈이 있는데요. 세 가지 눈을 가지고 대화하는 사람들끼리 종교 간의 대화가 가능합니다. 첫 번째 눈은 신앙의 눈, 믿음의 눈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에 대해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종교를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종교에 우리 삶을 던지면서 종교에 귀의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성직자든 아니든 간에 말이죠. 그러니 우리 모두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입니다. 문학적인 시선이나 무신론적 시각으로 신앙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믿음에 젖은 눈으로 바라봅니다. 이 말의 의미를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내가 성서를 읽는 것 같으나 성서가 내 삶을 읽는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사가 내 삻을 읽어주고, 결국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느끼게 해줍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눈이죠. 그런데 그런 눈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교회는 자꾸 이런 믿음의 눈만 강조할 수 있어요. 그래야 성도들을 복종시킬 수 있고 딴생각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하면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의 눈과 함께 자기 전통에 대한 의심의 눈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서를 근거로 만들어진 수많은 전통은 시대의 산물이기에 비복음적 요소들이 수없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물음들에 대해서 의심의 눈으로 바라봐야합니다. 의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서 진짜 하느님의 말씀을 찾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의심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 자기 전통에 대해서 자기가 저항하는 일입니다.
 
 많은 여성 신학자들의 책 가운데 ln Memory of her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녀에 대한 기억 속에서 라는 엘리자베스 피오렌자의 책이죠. 아주 유명한 미국의 카톨릭 여성신학자입니다. 그녀라고 했을 때 누구를 기억하느냐, 한마디로 말하면 성서에 수없이 나오는 여성들입니다. 그 여인들의 이름이 성서 전통 안에서 다 잊혀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잊혀질 존재가 아니라는 거죠. 여성의 눈으로 성서를 다시 바라보는 의심의 눈이 반드시 필요하죠. 신앙의 눈과 함께 의심의 눈도 필요하고, 교회에서도 이러한 의심의 눈도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냥 ‘신앙’만가지고 살 수 없어요. 이렇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옛날에는 ‘저 머리가 아프니까 약주세요’하고 나으면 낫고 아니면 아니었는데, 이제 똑똑해져서 ‘이게 무슨 성분이라서 먹어야 하죠?’,‘제가 간이 안 좋은데 먹어도 되나요?’ 묻고 약을 먹는 시대가 되었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성서에 쓰여졌다는 이유만으로 절대 진리가 된다거나, 무조건 따라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의심의 눈이 필요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구요.
 다음으로 세 번째는 자기 발견의 눈입니다. 인도의 유명한 카톨릭 신학자 레이몬드 파니카라는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까 말한 그 의심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전통 안에서 자기 전통을 올바르게 깨닫기 위한 과정이라면, 자기 발견의 눈이란 자기 전통에는 없으나 남의 전통에서, 다른 종교의 전통에서 자기 전통에 없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뜻은 세계관과 종교의 관계입니다. 이걸 물과 물고기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관이 없으면 종교가 태동할 수 없어요. 세계관은 물이고 종교는 그 세계관에서 뛰어노는 물고기와 같은 것인데, 이 땅에 존재하는 종교들은 저마다 세계관들이 달라요. 몬순형 풍토가 있고, 사막형 풍토가 있고, 또 목장형 풍토가 있고 자기들 문명을 발생시킨 토양이 다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의 종교에서는 초월적인 하나님 개념은 나올 수 없어요. 사막지역에서 나온 히브리종교에서 업이니 윤회니 하는 것이 나올 수 없어요. 세계관 속에서 태동된 종교이기 때문에 자기 종교에서 덜 강조되거나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 것을 중요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이 시대의 더 풍성한 종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 파니카 신부님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눈, 의심의 눈, 자기발견의 눈, 이 세 가지가 함께 있을 때 자기 종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 드린 대로, 믿음-은총-성서, 고독-저항-상상, 그리고 믿음의 눈-의심의 눈-자기 발견의 눈, 이러한 도식을 통해 전체를 윤곽지어 보면서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은총, 성서가 현실의 문제와 어떻게 만나게 하는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고독, 저항, 그리고 상상
 
  고독이라고 하는 말은 외로움이라는 말과 우리말로는 똑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고독과 외로움은 그 뜻이 굉장히 다릅니다. 영어에서 고독은 loneness이고, 외로움은 loneliness로 표현되는데 이는 정 반대의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길을 가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고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길을 걷다가보면 때로는 자신보다 우월한, 부러워할 만한 사람도 만나고, 어떨 때엔 자기보다 열등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만나는 등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고독은 그런 순간에 나보다 우월해보여서 내가 열등감을 갖거나, 내가 우월감을 갖거나 그런 감정이 아닙니다. 고독은 자기가 걷는 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확신이 있기 때문에, 고독은 타자에 대해 깊게 열려있는 감정입니다. 고독은 절대로 닫힌 감정이 아닙니다. 반면에 loneliness라고 하는 것은 똑같이 자기 길을 걸어가지만 가는 도중에 우월감을 느끼고 시샘하고 열등감 때문에 무시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닫힌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인이 고독할 것 같지만 외롭습니다. 다 열려진 감정의 소유자가 되지 않고 닫힌 감정을 가지고 살 때가 참 많습니다. 그 안에서 정말 고독한 경험을 잘 못하죠. 그런 점에서 우리가 정말로 고독하다고 하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정말로 열려있는 감정입니다. 자기에게 깊어질수록 세상에 대해 열린 감정이 되는 것, 이것이 저는 고독이라고 생각하고, 이 깊은 고독속에서 믿음의 문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저는 봅니다. 고독하냐 외롭냐, 열린 감정을 갖고 사느냐 아니면 닫힌 감정을 갖고 살아가느냐. 우리 수도원이 정말 열린 공간이 되느냐 닫힌 공간이 되느냐는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항이라고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고 나를 있게 만든 사회에 대한 저항이기도 합니다. 내 전통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고 우리의 전통 밖을 향한 저항이기도 합니다. 저항이라는 것은 흑백도식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살면서 벽과 경계를 쌓게 되고 영역을 만들게 되고, 적과 아군을 만들고,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에 대한 분별이 생기는데요,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는데 이를 어떻게 넘어서야 할까요. 갈라티아서 5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자유케 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저항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틀에 안주하고, 주어진 틀 속에 강요되어 사는 게 아니라 어떻게 이 자유를 느낄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있는데 그게 어떤 것일까요?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이 체제에 갇힌 사유밖에 못해요. 교회 체제는 교회체제 안에서, 정치 체제는 정치 체제 안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이 체제를 뛰어넘어서 사유할 힘을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체제를 향한 저항이 되고 체제를 넘는 초월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겨자씨 비유라는 게 있잖아요. 언젠가는 큰 나무가 될 꿈을 꾸면서 작은 교회들을 꾸려나가죠. 그런데 왜 겨자씨 비유를 하나님 나라라고 했을까요? 겨자씨가 빨리 자라서 일까요? 그게 아니라 겨자씨는 아주 빠르게 자라서 그 주변을 불편하게 만들어요. 한마디로 이 세상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라는 것이죠. 이 세상, 체제 안에 안주하는 세상은 체제 속에 머물도록 길들이고 체제를 넘어서면 죄라고 말하며 틀 속에 사람들을 가둡니다. 예수님 오실 때 이미 유대교 전통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어놨었잖아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체제 밖의 사유를 돕고, 체제를 넘어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이를 나중에 은총이라는 것과도 더불어 말하고 싶고, 이것이 정치적 함의를 또 갖는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다음으로 상상입니다. 저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도 아닐 것이고, 사랑이라는 말도 아닐 것입니다. 베르자예프(Nikolai Berdyaev)라는 러시아 사상가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까 했을 때, 상상력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상상력을 통해 우주도 갔다 오고, 상상력을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상상력을 통해 모든 것들을 다 느끼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게 뭘까, 전혀 다른 새로운 것들을 상상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상상력이 너무나 결핍되어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물론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이 말하는 배고픔의 문제도 있지만, 상상력 자체가 없거나 부패한 것이 큰 문제입니다. 함석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하늘의 별은 우리가 손에 잡으려고 있는 게 아니라 쳐다보려고 있는 것인데, 저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고 해서 사람들은 별 보기조차 안한다는 것입니다. 저 별은 원래 잡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잡을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쳐다보지도 않는 것, 상상력의 붕괴, 부패, 부재. 이것이 오늘 우리시대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종교가 이런 상상력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상상력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교리로 모든 걸 축소시키고, 틀로 제도로 모든 걸 맞추려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상상력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교회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독, 저항, 상상이라는 말은 오늘 우리 시대에 중요한 말입니다. 고독은 자기 자신으로 깊게 들어가는 것이고, 하느님 앞에 단독자가 되는 것이고, 그 길을 통해 세상을 향한 열린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은 절대 하나의 주관적 상태에 머무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독자의 길에서 세상의 길이 무한히 넓어지는 게 신앙의 길이다. 저항은 이 세상의 틀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넘어서는 길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이걸 넘어설 수 없다 생각합니다. 이것을 조금만 비판하면 빨갱이라고 하죠. 헬더 까마라 주교가 처음에 가난한 사람 도와줄 때에는 아주 칭송하다가, 그 분이 그들로하여금 가난한 이유를 알려주고 가르치기 시작하니니 주교를 빨갱이라고 배척하기 시작했어요. 도와주면 천사처럼 여기지만 왜 가난해졌는가, 왜 이렇게 가난한가 말하면 그것은 배척받을 일이 됩니다.
 자본주의가 우리 삶에 당연히 뿌리 내리고 있지만, 인류의 역사를 하루라고 치면 자본주의는 11시 59분 47초에 생겨난 것입니다. 조금도 다르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것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대안’에 대해 이야기하잖아요. 그걸 가장 먼저 빠르게, 확실하게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종교인들의 과제인데 종교인들은 못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안을 만들고 있고, 교회가 주는 물에 사람들이 목말라하지 않아요. 진짜 대안은 교회 안이 아니라 밖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상상력이 없고 저항할 수 있는 힘도 없고 체제에 순응하고 있기에, 교회 안에 과연 복음이 있는가 물어야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어요.
 카톨릭에 대해서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기독교가 로마를 기독교화 시켰느냐, 로마가 기독교를 로마화 시켰는가 했을 때, 역사가들은 로마가 기독교를 로마화시켰다고 말합니다. 로마라고 하는 하나의 정치적 제국에 이데올로기가 필요해서 기독교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해요. 우리로서는 아픈 지적이고, 한편으로 과장이 있지만,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개신교의 경우, 기독교가 자본주의를 기독교화 시켰는가 물으면 아니에요. 자본주의가 기독교를 자본주의화 시키고 말았어요. 지금 교회의 존재방식 자체가 완전히 자본주의지 어디 복음이 있어요. 그 어마어마한 대형교회와 하꼬방 교회. 조그만 교회 목사가 되려면 4중직을 해야 먹고 살아요. 택시기사, 퀵서비스, 목회…. 그러면서도 목회하는 사람이 있으니 신기하죠? 그런데도 큰 교회는 그런 교회 나몰라라 합니다. 제가 속한 감리교단이 장로교 다음 큰 교단인데 서울 연회가 잇는데 부자 동네도 80퍼 교회가 미자립입니다. 제가 작은 교회 운동을 하고 있는 이유도 그런 데서 기인합니다. 자본주의에 교회가 먹혀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저항할 줄을 몰라요. 교회 밖에 구원이 있냐고 묻기 전에 교회 안에 구원이 있는가 물어야 하는 시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님께서 “교회의 복음화가 없으면 세상의 복음화는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 JPIC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를 말합니다. 20세기 들어와서 20세기 신학을 근본적으로 뒤바꾼 사건 중 하나가 아우슈비츠 경험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히틀러가 독일에 사는 유태인 600만명을 살해한 것입니다. 경건한 유태인들을 기독교인들을 부추겨 죽인 거죠. 예수를 죽인 유태인들을 죽이자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가며 다 죽었어요. 그 사건이 기독교 신학을 한 번 크게 변화시켰고요. 두 번째 사건이 바로 이 정의 평화 문제입니다. 정의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분배문제의 불균형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는 200만 명이 절대 빈곤에 있다고 합니다. 1세계와 3세계 간의 빈부문제의 극대화, 정의의 문제가 깨져버린 것이죠. 그 다음으로 평화, 1세계간의 핵무기 과다보유 문제입니다. 늑대들은 싸우다가 힘의 균형이 안 맞으면 자기 목덜미를 보인다고 합니다. 내가 졌다라는 의미죠. 그러면 상대 늑대가 절데 물거나 죽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이 동물 생태계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핵무기의 과다보유는 말이죠, 지구를 15번이나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을 만큼의 양이 있어요. 하려면 한 번만 망가뜨릴 만큼만 있으면 되는데, 자기들이 더 많이 가져야 된다는 생각에 이런 상태에 이르렀죠. 다음으로 창조질서의 보전이 시급합니다. 이건 생태계의 급속한 파괴 아니겠어요.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온도상승국이 되어 있잖아요. JPIC를 발의한 바이제커라는 물리학자이자 기독교인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기독교의 구원은 요원하다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구원을 받았다, 하늘나라 갔다, 아무리 얘기해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기독교 구원은 멀었다는 것이 세계 기독교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참여와 명상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참여를 더 잘하기 위해 명상하는 것이고, 이런 현실 참여 속에서 명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광장과 교회는 둘이 아니라는 것이죠. 광장의 촛불과 교회의 촛불이 결코 둘이 아닙니다. 무조건 같다고 할 수 없지만 이 둘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이게 진짜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인문학적 이야기를 구체화하기 위해 믿음, 은총, 성서의 이야기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믿음, 은총 그리고 성서
 
 우리가 믿음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제일 중요하게 드는 게 로마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 읽다가 은혜를 받아요. 어거스틴도 그랬고, 마틴 루터도 그랬죠. 우리가 오늘날 로마서를 읽을 때 어떤 면에서는 루터보다 어거스틴보다 로마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요. 수많은 학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연구를 해줬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서가 어떤 상황에서 쓰여졌는냐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로마라는 제국주의 상황에서 쓰였습니다. 그 점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로마서를 오독하기가 쉽습니다. 로마같이 거대한 제국이 지배하는 시대에 로마서가 쓰였고, 그 세계 속에 교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을 오늘 이야기하려 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믿음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의가 새롭게 나타났다는 걸 믿는 것 아닙니까? 유태인들에게는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양심을 줬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가지고도, 양심을 가지고도 이 세상을 옳게 만들지 못했어요. 그 결과가 하나는 유태인들의 모습이고 하나는 로마라는 모습입니다. 율법으로도 안 되고 양심으로도 안 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나타났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 새로운 의를 가지고 로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새로운 인류의 미래를,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찾아보자, 이것이 바울 서신의 목적입니다. 바울이 그 하나님의 의로움, 이 타락한 세상을 구원할 전적으로 새로운 의로움을 가지고 가장 처음에 한 것이 유태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당시 바울이 봤을 때 가장 큰 바운더리는 이방인과 유태인입니다. 이들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 것인가가 첫 번 째 문제였고요. 두 번째 작은 바운더리는 유태인과 기독교인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입니다. 세 번째는 이방인으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과 유태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 사리를 어떻게 묶을 것인가. 이 세 가지 단계가 그 당시 바울이 봤을 때에는 전세계입니다. 어떻게 이들을 묶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인가, 이게 가장 큰 꿈이었죠. 따라서 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존재를 일컬어 그리스도 안의 존재(sein im christ)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의 존재’라고 하는 건 뭘 의미할까? 당시 로마라는 제국의 삶의 양식과 전혀 다른 삶의 양식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제국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 제국은 그 당시에 어떤 가치를 지향했을까요? 노예 제도를 인정합니다. 힘 있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 노예로 부릴 수 있어요. 그리고 가부장제예요. 여성들은 남성의 소유물이었습니다. 가부장제와 노예제가 로마라는 제국의 가치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현실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이 됐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누려왔던 노예제, 당연시했던 가부장제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하는 존재입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노예가 있으면 편하고, 가부장제를 따라 살면 편하다고 생각하며 제국의 가치관을 떨어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존재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교회 안에 제국의 그러한 가치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늘 있어온 거죠.
 
 로마서에 ‘오직 믿음’이란 말이 있잖아요. 오직 믿음이란 말을 우리가 오해하고 잘못 생각해왔습니다. 행동 없이 오직 믿음만 가지고 구원이 온다는 아주 극단적인 개신교 교파도 있는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로마서에서 행위를 결여한 믿음은 없습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없어요. 그리스도 안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제국의 삶의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라고 하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것 안에는 당연히 행위가 전제됩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없는 행위가 무엇이냐 물어야 합니다. 만약 교회 안에 머물러 있다 하면서도 제국의 가치관을 그대로 가져와 산다면 그게 바로 믿음이 없는 행위입니다. 믿음이 없는 행위는 문제가 될지언정 행위가 없는 믿음이란 말은 성경 안에 없어요. 지금 우리시대는 여전히 가부장제이지만 노예제는 아니잖아요? 이 노예제를 대신하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의 존재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욕망에 따라 산다면 그건 믿음이 없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믿음 속에 그런 행위가 결여되어 있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값싼 믿음을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믿음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고 하는 생각들이 교회에서 암암리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은 중요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아주 치열한 고민입니다. 왜 ‘의’입니까? 이 세상을 전혀 다르게 만들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인 것이죠. 우리가 주님, Lord이라고 예수님을 부르잖아요. 로마 당시 주님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은 로마 황제 하나였어요. 로마황제에게 붙였던 이름을 예수님에게 붙여준 거예요. 그가 주님이 아니라 이분이 주님이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교회란 제국의 입장에서 교회는 바로 겨자씨와 같은 존재여야 합니다. 제국이 교회를 불편하게 여길 수밖에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실에서 제국이 교회를 불편하게 느끼나요?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과거의 제국과 같은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자본주의입니다. JPIC의 문제를 확대 재생산 시키는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만들어 낼 것이냐? 수많은 곳에서 새로운 공동체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러시아 사상가 베르자예프의 말을 빌리면, ‘사람은 물질이 없으면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먹는 것 입는 것 다 물질이잖아요. 최소한의 물질로 살려고 할 때 ‘최소한의 물질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다. 사람은 물질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정신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야한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은 빵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자본주의 욕망의 시대에 최소한의 물질로 산다는 것은 제국의 시대의 노예제, 가부장제를 벗겨내고 그리스도 안의 존재로 살려고 했던 그 당시 그리스도교인들 모습만큼이나 어려운 것입니다. 100으로 살던 사람들에게 70으로 살라, 그리고 그 나머지는 다 하나님 것이고 가난한 사람의 것으로 하라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으면 JPIC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방인과 유태인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듯이, 교회는 그런 이를 존재해야 합니다. 명상이나 참여냐는 문제는 “오직 믿음”이란 이야기를 통해 볼 때, 행위 없이는 안 됩니다. 믿음은 반드시 당대의 지배적인 가치와 맞서 싸우는 개념입니다. 믿음이 없는 행위가 오늘 우리에게는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주일만 기독교인으로 살고 나머지 날은 아무 다름없이 사는 것, 믿음이 없는 행위가 정말 큰 문제입니다.
 종교사회학자들의 이야기인데,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어느 특정 지역에 특정 종교인이 4명중 1명이라면 그 지역은 그 종교의 문화로 바꾸어져야 옳다고 합니다. 그런데 강남지역은 개신교와 카톨릭 합치면 40%가 넘지만, 강남지역을 기독교 문화라고 할 수 없잖아요. 오경환 신부님의 말씀에 따르면 강남의 특징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실컷 먹을 곳이 많다. 또 하나는 먹기만 하면 살찌니까 실컷 뺄 수 있는 데가 많다. 목욕 사우나 문화가 여기 해당되겠죠. 목욕문화는 반드시 향락문화와 연결되죠. 그래서 무수한 방들의 문화가 있죠. 즐길 데가 많다. 그리고 네 번 째가 무엇이냐면 실컷 용서받을 데가 많다. 사람은 죄만 짓고 못 살잖아요. 강남지역 기독교란 게 그들의 향락문화의 밑바탕을 지지해주는 역할밖에 못 하는 거예요. 그 강남의 고질적인 향락문화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맨 밑바닥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것입니다. 해마다 연세대학교에서 많은 목회자들을 불러놓고 목회자 연수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1000 명되는 목사님들 앞에서, 반은 농담이겠으나 농담만은 아니었을 거예요. ‘목사님들 교인들에게 윤리적으로 살라는 말 하지 마세요. 윤리적으로 살라고 하면 사람이 뺀질뺀질해져서 헌금 안 가져와요. 맘대로 살라고 하면 죄 때문에 1억 ,2억 교회에 갖다 바쳐요. 윤리적으로 살라고 하지 말고 마음대로 살라고 하세요.’ 이런 뻔뻔한 말을 1000명의 목사 앞에서 하고, 그것을 웃으며 듣는 게 지금 우리의 모습이에요. ‘오직 믿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잘못 이해하는 것이에요. 뭘 믿는지도 모르고 믿으면 된다고, 마음대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믿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의’는 당시의 세계관 하고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관을 만드는 것입니다. 양심으로도, 율법으로도 실패한 공동체를 다시 만들라는 것이죠. 우리가 말하는 믿음에는 반드시 행위의 문제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인들이 깨닫는다면 참여니 명상이니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 자체가 이미 행위를 포함합니다. 깊은 고독이 세상을 향한 열린 길이 되고, 소통하게 되고, 다른 피조물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그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지금 ‘오직 믿음’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고 봅니다.
 
 은총은 중요한 개념인데, 이 은총을 무엇을 전제로 해서 쓰는가하면 인간의 전적인 타락, 원죄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인간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타락되었고, 하나님의 은총은 절대적이고 그것에 의해서만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인간이해가 바탕이 됩니다. 이처럼 은총에는 원죄설이라는게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은총에 대한 이해를 달리 하고 싶은데요. 그러면 원죄설에 대한 이해를 달리 해야겠다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과 교리로 원죄설이라고 정의내리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원죄설을 확정지은 사람이 성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이 원죄설을 확증할 때,당시로는 어마어마한 대지진과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거스틴 시절 무렵까지 기독교가 지배하는 로마의 세상이 정말 하나님의 나라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 멀리 북쪽부터 고트족이 침입했고, 하루아침에 로마를 초토화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고트족들이 지배하던 짧은 순간에 수많은 신부님, 주교님들이 배교했습니다. 다시 싸워서 쫒아내고 로마가 평정했는데 그 로마는 이제 옛 로마가 아니잖아요. 많은 신앙인들이 배교한 신부들을, 주교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배교한 신부 살해도 하는 등 엄청난 혼동을 경험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충격은 오늘 우리 시대의 무엇과 비교해야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혼동의 상황을 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해결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사람이 어거스틴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두 가지 교리를 가지고 그 상황을 처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없고 저기 있다, 하나님의 도성을 여기가 아니라 저기로 분명하게 말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생물학적으로 죄인이라는 원죄설을 만든 것입니다. 어거스틴 이전에는 창세기 1~3장이 초대 교부들에 의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찬미하고 긍정하는 본문으로 이해되고 사용되었습니다. 로마는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했지만 유태인과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느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옳게 살고 있다고, 인간이 자기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절제하고 금욕하면서 자기를 다스리며 건전하게 사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죠. 그런데 똑같은 본문이 어거스틴에 의해서는 원죄설을 말하는 것으로 완전히 탈바꿈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누구나 날 때부터 태생적으로 죄를 짓기에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너희는 모두 죄인들이다 이렇게 말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원죄설이라는 것은 목적이 있었죠. 그 어려운 신학적, 정치적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똑같은 본문이 자유의지를 찬양하는 본문이 원죄설을 긍정하는 본문으로 뒤바뀐 현실이 어거스틴 신학 속에 있는 것이죠.
 이처럼 끊임없이 전적인 인간의 타락과 원죄론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이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원죄보다는 ‘원은총’, original blessing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는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매튜 폭스 같은 분들이죠. 지금은 성공회로 가셨습니다만, 그런 분들이 원복이라고 말은 사용하십니다. 원죄 개념 또한 원복이라는 개념을 더 근본적으로 두고, 그 일탈로서 원죄로 보려는 시도가 있죠. 저는 참여와 명상의 주제와 관계 속에서 은총을 원복에 대한 맥락에서 조금 더 확장시켜보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란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한 번도 인간 세상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전적인 새로움이고, 그것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주 큰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은총을 하나님의 의라고 본다면, 이것은 무엇과 대립되느냐면 세상의 법입니다. 로마의 법, 유태인의 율법, 지금 우리시대의 실존법도 해당되겠죠. 하나님의 의를 은총의 본질로 본다면, 은총은 이 세상의 실정법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개념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는 성경이야기 몇 가지가 있죠. 첫 번째 포도원의 비유입니다. 아침에 온 자나, 저녁 때 온 자나, 황혼녘에 온자나 똑같은 품삯을 준거죠. 이것은 상식으로나 법적으로나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기준은 바로 ‘하루 살 돈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의 생존을 위해서라는 그 관점에 따라 모두에게 똑같은 품삯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세상의 법으로도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특히나 오늘날 같은 자본주의 현실에서는 더욱 불가능한 일이죠. 지금 자본주의사회는 어떤가요? 처음엔 여성들까지도 값싼 노동으로 비정규직 만들고 직장으로 내보내더니 이제는 다 빚으로 살라고 하죠.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으며 살라고 우리를 떠밀고 있는 게 이 자본주의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종교가 사람들의 죄를 먹고 살 듯,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빚을 먹고 산다.’ 해방신학자들이 하는 말이에요. 꼭 맞는 말은 아니지만 그런 측면이 있는 거죠. 이런 현실 속에서 마지막 온 자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준다는 것은 하느님의 의에 해당됩니다. 어떠한 세상의 법도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죠. 또 다른 비유는 잔치를 벌여놓고 초대한 사람들이 없으니 아무나 불러와라.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다 불러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과응보의 세계 속에 살고, 되로 주고 말로 받고 싶은 도둑심보가 있는데요.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 초대해서 잔치를 열어라, 오히려 그들이 갚을 것을 우려하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이런 두 가지 단적인 하나님나라 비유는 세상의 실정법으로는 감당할 수 없고 로마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유럽도 이민자법으로 말이 많지만 오늘 우리에겐 ‘환대’라고 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제게 처남이 하나 있는데, 거의 20년을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청주에서 이주노동자를 만난 거예요. 팔과 손이 끊어지고 아무 대가도 못 받는 것을 보고, 과감하게 공부한 것을 다 접고 지금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살고 있어요. 그런 이주노동자들이 있다는 건 법에 따르자면 불법입니다. 빨리 기한이 끝나면 내보내야 하는 게 맞아요. 그러나 기업들이 그들의 숨겨주면서 대신에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들이 손 잘리면 나몰라라 팽개치는 거죠. 그러나 그들은 법으로 보호 받을 수가 없습니다. 불법이니까요. 우리의 실정법으로는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면 실정법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어요. 그런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정부 입장에서 본다면 좌파 빨갱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따라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환대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환대는 법을 넘어 서있습니다.
 독일의 총리 메르켈의 아버지가 목사님이신데요, 모두가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올 때 그분이 유일하게 서독에서 동독으로 넘어간 사람입니다. 그렇게 메르켈은 동독을 경험했고, 지금 물론 유럽 전체가 흔들리고 있지만, 메르켈의 기본입장은 환대입니다.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이죠. 심지어 유럽통합의 이념이 깨지더라도 이민자들을 받아야 한다는 게 메르켈의 소신입니다. 때론 그러한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체제 안에서는 늦게 온 사람에게 똑같은 돈을 주지 못합니다. 어떻게 갚지도 못할 사람들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체제를 뛰어 넘는 체제 밖의 사유,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사유입니다. 그 속에 하느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은 체제 밖을 보라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의를 위하는 사람들은 실정법의 관점에선 범법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목사님, 신부님들이 범법자가 되죠. 요즘엔 감옥에 보내지도 않습니다. 벌금을 매기죠. 가난한 목사, 신부들을 돈으로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은총을 원죄의 개념에 따라 바라보겠습니까? 이 전통적 관점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지만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믿고 가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때로 범법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길에 우리가 어떻게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와 로마의 법이 맞섰던 것처럼 말입니다. 노예들을 데리고 살 수 있었음에도 다 풀어주었고, 가부장제 속에서도 여성들이 원하지 않으면 금욕하였던 그리스도 안의 존재들처럼 말입니다.
 법에 따라 살면 좋죠. 그러나 법에 따라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륭전자, 쌍용차, 세월호... 수없이 많습니다. 세종대왕상에 올라가서 세월호를 인양하라고 외쳤던 감리신학대 제자들한테 3500만원 벌금이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거기 맞서서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잖아요. 하나님의 은총이 이런 각도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로마서가 제국적인 상황에서 그 제국과 맞서는 방식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실현되도록 살아가려는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해지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우리들의 믿음이고 은총입니다.
 
 사실 이 신학은 이 신학은 헬라적인 신학이 아니라 아우슈비츠 윤리 신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히틀러가 독일의 기독교인들을 추동하여 유태인들을 죽였죠.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의 첫 번째 명제가 기독교인들이 유태인을 죽인 게 아니라 유태인들의 죽음으로 인해 기독교가 완전히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기독교는 하나님은 영원불멸하시고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상관하지 않으시는 그런 높으신 헬라적인 신관이 몰락한 것입니다. 높은 곳에 계신 지존의 하느님은 죽은 거예요. 하나님의 의는 세상의 법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많은 종교인들이 범법자가 되는데, 그들을 범법자라고 내버려둘 것인가. 그들을 품을 수 있는 신학도 있어야하지 않겠어요. 그것이 바로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입니다.
 
 마지막으로 ‘오직 성서’라는 말에 대해 보겠습니다. ‘오직 은총’이란 말을 저항이라는 말로 풀어도 되겠다고 보았던 것이고요. 이것은 믿음에는 행위가 포함된다는 말과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상상에 해당하는 게 바로 성서입니다. 성서는 상상력의 보고입니다. 성서를 교리적으로, 문자적으로, 근본적으로 믿고, 성서 구절에 근거해서 이건 맞다, 아니다 하는 식으로 이해해선 안됩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성서를 이해할 때에는 신앙의 눈과 의심의 눈과 자기 발견의 눈을 통해서 보아야 하고, 그랬을 때 성서를 옳게 보고 열린 복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서가 개신교는 66권이고 카톨릭은 73권입니다. 기독교가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정경화 과정은 필연적으로 필요했어요. 체계를 만들기 위해 원칙이 필요하죠. 그걸 부정할 수 없지만, 그때 정경에 들지 못했던 성서들을 다시 우리의 경전으로 아울러야 진짜 기독교의 모습을 폭넓게 알 수 있고 상상력의 보고를 성서를 통해 만날 수 있다고 봅니다.
 정경화될 때 기준이 뭐였느냐 하면 로마화된 기독교에 이 성경 본문이 적합한지 아닌지가 정경화의 첫 번째 원칙이었어요. 가부장적이고 교권적이었으니 당연히 마리아 복음서나 도마 복음서는 제외되었습니다. 정경이 되기 전에 마리아 복음서를 경전으로 삼는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12명이라는 숫자가 아주 중요해요. 그런데 제자 중 한 명이 배신을 했잔하요. 그리고 부활의 첫 증인이 마리아였죠. 때문에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의 첫 증인인 마리아가 예수의 열 두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 복음서 보면 카톨릭 교회의 반석이라는 베드로도 마리아에게 쩔쩔매는 모습이 나온다고요.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귀동냥하려는 모습이 나옵니다. 마리아 복음서가 이단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통용되었어요. 그러나 그것을 정경으로 당시 교회가 넣지 못했습니다. 성서에 잃은 양 한 마리 비유 있잖습니까? 도마 복음서에는 차라리 한 마리 잃은 양이 되라고 말합니다. 보통은 한 마리 잃은 양을 가엾고, 예수님이 고생해서 찾아오는 것으로 보잖아요. 그러나 도마 복음서는 이 거짓된 구조, 이런 틀에서 벗어나서 한 마리 자유로운 양이 되라고 말합니다. 이런 메시지가 있는 복음서를 로마교회가 어떻게 채택하겠어요. 그런 맥락에서 마가복음서도 정경에서 제외될 뻔 했어요. 마가복음서 공동체들이 돈을 보따리로 싸가서 부탁했다는 성서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마가복음음서에는 원래 예수 부활 이야기가 없었어요. 부활 이야기는 2세기경에 붙여졌죠. 이런 우여곡절 끝에 정경화가 되었고 그 과정은 필요했지만, 여기 있으면 진리고 아니면 진리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합니다. ‘성서 66권 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있다고 믿는 제사장적 확신이야말로 우리시대 가장 큰 미신이다.’ 팔만대장경을 가진 불교처럼 더 열린 이해를 하고, 더 열림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는 종교가 되려면 그 당시 제외되었던 성서들을 찾아야 합니다. 더 다양한 길을 기독교 안에서 열어보여야지, 이건 길이고 이건 아니다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님은 ‘우리 이제 한 3년 성경 보지 말자.’라고도 말했습니다. 그 대신 자연을 좀 보자고 하십니다. 백합과 새를 봐라, 하나님이 다 먹이고 기르시지 않는가. 그 들과 자연을 보며 하느님을 볼 수 있는데 그건 안보고 글자만 보고 있잖아요. 때문에 역설적으로 토마스 베리 신부님이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 들의 백합을 보고 그 안에 하나님을 보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지금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죠. 지금도 종이 멸종하는 속도가 종이 새롭게 생겨나는 속도보다 훨씬 빨라서 그렇지, 종의 생성과 같은 계시적 사건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천체물리학자의 말이, 지구가 위치한 태양계의 크기를 어떻게 비유하냐면 지리산 자락에 눈썹 하나 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우주가 지리산 자락이고, 우리가 있는 태양계는 눈썹 하나 떨어진 정도라는 것입니다. 지금 현대에 나오는 신학은 외계인이 주제가 되고 있어요. 외계인이 있다는 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어요. 우리들은 자연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생태적인 상상력이죠. 마지막으로, 아까 인도의 신학자 파니카 신부님 말씀도 드렸지만, 자기 발견의 눈을 가지고 자기 종교에서 없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세계관과 종교의 관계가 물과 물고기 관계라고 했어요. 물이 달라지면 물고가도 달라지죠. 그런데 그런 세계관의 핵심은 자연입니다. 어떤 자연인가에 따라서 인간이 자기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요.
 가령 몬순형 풍토에서 인간은 불가항력적 존재입니다. 자연에 대해 맞서 싸우겠다는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도 많지만 자연재해도 아주 큰 규모로 발생하죠. 이 어마어마한 자연 앞에서 인간은 수용적 인간이 됩니다. 그러한 수용적인 인간이해에 따라서 업이니 윤회니 하는 종교적 표상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막형 풍토는 인간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문명과 종교가 일어났죠. 때문에 사막형 풍도의 인간 이해 방식은 ‘의지’입, ‘집단적 의지‘입니다. 그런 가운데 나오는 종교적 표상이 초자연적인 신입니다. 신은 자연 맞서 이기는 분이지 지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스 지역과 같은 목장형 풍토는, 처음 있는 자연은 거칠고 조야하지만 인간이 길을 들여놓으면 질서를 갖고 인간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질서정연한 코스모스인 것이죠. 여기서 나오게 된 인간의 자기 이해 방식은 합리적 인간입니다. 자연이 질서를 갖추었기 때문에 만물의 근원이 뭐냐 하는 질문이 가능해지고, 철학을 발생시킵니다. 이처럼 풍토에 따라서 자기이해 방식이 달라지고, 자기이해 방식이 달라지면 종교적인 표상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를 보면 자기의 세계관 속에서 이해되어지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하트마 간디입니다. 간디는 처음에 바가바드 기타나 우파니샤드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에 유학을 가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배운 눈으로 보니까 바가바드 기타에 엄청난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렇게 바가바드 기타의 진리를 다시 발견하면서 간디의 비폭력이라는 사유가 나오게 된 겁니다. 다른 전통의 눈을 통해서 자기 전통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죠. 상상력이 있어야 저항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상력은 틀 속에 안주하는 것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전통에 대한 저항과 함께 세상에 대한 저항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교회 전통 내부에 대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외롭거나 폐쇄적이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체제 밖을 사유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해 저항하고, 틀에 안주하지 않고 때로는 실정법과도 싸우며 약자들 편에 서서 환대하는 일도 가능할 수 있죠. 그것이 우리가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입니다. 이번에 탄핵이라는 좋은 판결을 냈지만 세월호 문제와 관련해서는 참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우리나라 국회가 가진 문제 중 하나는 법을 공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법이라는 것에 대해 질문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은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감당하지 못하는, 법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 혹은 법 때문에 죄인이 되는 이들이게 살 길을 열어주는 것이죠. 이는 JPIC 정신과도 이어지는 것이고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의 길이기도 합니다. 정치와 종교의 문제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옳은 신앙의 길에 들어서면 정치적 감각은 함께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