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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사제들과 수도원의 수행자들
송용민 신부님
여유롭게 출발했다고 생각했는데 길이 예상보다 많이 밀리면서 길 위에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길 위의 사제’라는 오늘의 강연 주제가 저에게 많은 묵상을 하게 했습니다.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하느님, 제가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하고 조용히 기도를 해야 할까, 아니면 내 앞에 끼어드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 지르며 성질을 내야 할까? 혹은 수도권에 많은 인구가 몰려서 살고, 모두가 자가용을 소유하고 사는 한국의 이 구조적 모순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할까? 그런데 이런 생각들이 바로 오늘 주제의 시작이자 결론이더라고요.
이 강좌의 전체 주제이기도 한데요, 과연 종교인들이 이 사회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각자가 믿는 신에게 매일같이 기도하는 것, 힘든 상황을 견뎌내는 인내의 수행, 이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스스로 먼저 나아가서 목소리를 내는 것, 혹은 구약에 나와있는 것처럼 예언자적인 소명으로 사회 변혁을 위해서 힘을 보탤 수 있는 노력을 하는 것. 이런 여러 가지 혼란을 겪으면서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정의구현사제단도 아니고 활동가도 아니고요. 신학생 때 독일에 유학 가서 얌전히 공부 잘 했고, 인천가톨릭대에서 신학생들 잘 가르치고, 본당 가라고 해서 신자들과 알콩달콩 살았어요. 그리고 갑자기 부름을 받아 주교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 인생을 보면 평탄한 사제의 삶, 인생역경을 크게 겪지 않은 삶이죠. 제가 인생체험에 대해 글을 썼을 때, 이런 댓글을 다신 걸 봤어요. “신부님은 한 번도 고생 안 했을 것 같은 분이 나름 꽤 체험을 하셨네요.” 그래서 제가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내가 인생을 살 때, 내 인생을 움직이게 하는 밑바닥의 원동력은 뭘까. 과연 내가 여전히 이 길에서 살게 하는 힘은 뭘까? 제가 올해 사제서품 20주년인데, 성직자든 수도자든 어느 여정이 되면 한번쯤 되돌아보죠. 이 길을 잘 걷고 있는 걸까, 선택한 삶의 결단이 옳은 걸까 하고 말입니다.
종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저는 이 주제를 받고, 종교인으로서 종교적 수행이라고 하는 명상이나 성찰과, 거리로 뛰쳐나가서 예언자적인 소명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를 고민했습니다. 앞서서 이정배 목사님과 이공현 교무님 이야기 들으셨겠죠. 그런데 이 자리에 계신분들이 대부분 가톨릭신자라는 점에서 앞의 두 달은 신선했는데, 오늘은 카톨릭 사제라서 신선하진 않을 것 같네요. 저는 오신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궁금해요. 대중강연을 많이 해봤지만 평신도들, 특히 인생의 애환을 품고 사는 분들에게 한풀이하러 많이 다녔어요. 무교신앙을 박사로 전공했고 그걸 어떻게 가톨릭 신앙의 감각과 어우러지게 해서 토착화로 이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거든요. 여기 오신 분들은 나름 종교간 대화에 대한 깊은 성찰하고,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 싶으신 것 같아요.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 싶다는 건 뒤집어 말하면 내 종교에 불만이 있다는 거예요. 좋게 말하면 더 풍요로워지고 싶은 거죠. 가톨릭 신자라면 내가 가톨릭 신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카톨릭 신자로 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예수가 나에게 어떤 사람인가 묻지 않으면 안 되고, 또 그 이전에 한 인간으로써 인생을 살아가는 종교적 사명을 어떻게 누리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종교간 대화와 관련해서 깊이 있게 전공을 한 학자는 아닙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우연히 씨튼연구원의 회원이 되어서 최현민 수녀님도 뵙고, 지금까지 14-15년차 여기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씨튼연구원에서 활동하시는 다른 여러 종교의 연구위원님들과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면서 배우는 것이 많았어요. 씨튼연구원이 크고 부담스러운 자리이지만 지금까지 이 자리에 머물 수 있었던 건 그곳에서 나누는 대화가 가져오는 풍요로움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께도 저의 작은 체험에 대한 이야기가 풍요로움을 가져다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명상과 사회참여’라는 대주제를 가톨릭으로 이미지화 해보니까 이런 그림이 나오더라고요. 이 그린 안에서 생각거리가 좀 있지 않을까 해서 이야기의 도입부로서 사진 몇 가지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정의구현사제단입니다. 독재정권에 맞서서 큰 목소리를 내면서 정의구현사제단이 만들어졌는데요, 카톨릭이 사회참여를 하게 된 건 그때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세월호나 쌍용차 해고노동자 문제 등 사회적 불의나 불공정에 대해서 길 위에서 많이 미사를 하고, 여기에 동조해주시는 많은 신자, 수도자들이 계십니다. 수녀님들께서도 거리를 많이 메워주십니다. 수녀님들께서 많이 거리에 나오시는 이유는 수녀님들이 있으면 경찰들이 함부로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방패막 같은 것이죠.
또 정반대의 이미지를 볼까요.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이 정치적 색을 지나치게 갖고 정치에 개입하는 인상을 받다보니까, 종교가 종교적인 가치를 추구해야지 정치에 관여하느냐는 이견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수호천주교모임이라는 단체가 형성이 되어서 의견을 표현하기 시작했어요. 종북사제라는 논리를 만들고, 미사라는 가톨릭의 종교성을 정치선동으로 이용한다, 강론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정치적 선동한다고 하면서 사제복을 벗어라고 요구합니다. 이곳은 제가 살고 있는 중곡동 주교회의입니다. 이곳에서 춘계정기총회, 추계정기총회 등 총회가 있을 때마다 대수천 분들이 옷서 주교님을 환영해주세요. 태극기 들고, ‘종북사제들을 허용해도 됩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정치문제에 관여하는 종북주교님 퇴출 시위를 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강정해군기지 때문에 애를 썼던 제주교구 강우일 주교님께서 강정마을 지키려고 노력하셨는데, 그만 좀 하시고 신자들 돌보는 착한 목자로 돌아오라는 신문광고도 냈고요. 친북 정치사제 100인 명단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교회 내부에서 겪고 있는 갈등, 또 하나의 아픔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또 다음으로는 제가 직접 경험한 것인데, 지난 3월 13일 춘계정기총회 때의 일입니다. 대구 희망원 사태로 장애인연대가 와서 주교님들 입장하시자 마자 명동성당 미사를 방해하면서 천주교가 나서서 해결하라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여기서 이분들이 미사 방해니까 신자들에 의해서 쫓겨났는데요, 누군가 이것에 대해서 사설을 쓰면서 천주교가 명동성당이 쫓겨 난 노동자들의 성지였는데 이제 노동자와 약자를 쫒아내는 곳이 되었다고 예리하게 비판했습니다. 몇몇 정치인들은 가톨릭교회가 예언자적 소명을 저버렸다.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지 않고 조직을 옹호하고 지키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무엇을 찾고 있을까.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종교의 고유한 목적은 뭘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종교를 선택한 이유가 있고, 우리가 선택한 종교의 신념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종교에 대해서 이렇게 규정을 해봤습니다. 인간이 가진 유한성의 체험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죄와 고통과 죽음이 그것이죠. 우리는 이것을 넘어서려고 하죠. 이 넘어섬에 대해서 각 종교마다 다른 표현들을 갖고 있습니다만, 결국 종교는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 구원이나 영생, 영원성으로 나아가려는 희망’입니다. 문제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희망을 단어를 각 종교가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하느냐 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 영원성을 불교에서는 공(空), 도교에서는 도(道), 카톨릭에서는 하느님이라고 보죠.
그렇다면 종교인은 어떤 사람인가? 저는 종교인이란, 해방, 자유, 평화가 내포된 참된 구원을 위해서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와의 만남을 통해 참된 나를 찾고, 세상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면서 영원을 향해 순례의 여정을 걷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어떤 종교냐, 하면 이런 종교성을 예수 인격 안에서 보는 겁니다. 종교의 궁극적 신비가 예수를 통해 세상 속에서 드러났고, 그것이 죽음을 넘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한 부활 신비 안에서 발견된 종교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란 종교적 삶의 의미를 나자렛 사람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서 찾고, 그를 구원자로 고백하고, 부활신앙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인간의 궁극적 구원의 길로 고백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카톨릭의 교리이죠.
종교로서 그리스도교의 중심 원리 - 예수의 삶과 영성
교리를 해석하는데 중요한 것이 우리 중심의 케리그마, 즉 우리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하는 핵심입니다. 모든 종교적 삶 안에서 왜 그리스도를 택했는가 하는 것인데요. 거기에 예수의 삶과 영성이 기본이 되겠죠. 저는 오늘 우리 주제와 관련해서 두 가지 원형을 예수에게서 봅니다. 예수님은 종교적 인간의 원형이 어떤지, 수행하는 인간으로서 보여주셨고, 두 번 째로 그러한 수행이 세상에 참된 기쁨, 즉 복음을 가져오도록, 또한 그 복음을 나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이웃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세상 속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예수가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1) 수행자로서의 예수
이 두 가지를 아주 쉽게 성경으로부터 묵상하면 첫째로 광야에서 유혹받으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생각해볼 수 있겠죠. 인간이 갖고 있는, 끝없는 소유에 대한 욕망, 생존에 대한 욕구, 권력에 대한 유혹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오늘날 종교인으로서 세속의 사람과 왜 다른 인생을 살아야 되는지를 알려주는 아주 표징적인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이정배 목사님께서 종교적 가치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면 경건하고 낮아져야 되는데, 왜 한국사회는 종교가 부흥할수록 악이 더 범람할까 했을 때, 이유는 단 하나, 즉 종교가 세속적 욕망을 부추기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가 종교의 세속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우리가 여전히 광야에서 살면서 유혹을 받고 있는 중에, 예수님을 닮은 수행의 삶을 잘 살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행은 내 삶 자체를 하나의 방향으로 지향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인은 자신의 신, 자신의 존재근거를 향한 수행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은 기도죠. 예수님은 홀로 외딴곳에 가서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그러한 기도의 삶에서 예수님의 지향점은 게세마니 동산에서 했던 마지막 기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마태오 복음서 26장 39절) 이처럼 오로지 신의 뜻에 맡기는 수행자로서의 삶의 모델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기도에는 세 가지 지향이 있습니다. 첫 째는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로서, 하느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될 수 있는 기도입니다. 두 번째는 당신과 함께하는 이들, 특히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들이 위선이 아닌 진리를 따라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입니다. 세 번째는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내가 하는 기도가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질 수 있는, 그리하여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기도입니다.
2) 세상 속 종교인으로서의 예수
이러한 수행자로서의 예수 모습 뒤에 또 다른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세상 속에 있는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불교나 도교와 같은 각성종교, 법전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종교와 다른 점은 그리스도교가 계시종교라는 것입니다. 계시종교의 특징은 ‘계시’라는 사건 자체가, 존재근원에 대한 궁극적 원리가 내 안이 아니라 나의 밖에서부터 나에게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을 통해서 하느님이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자기계시의 보편성이 있는데요, 그리스도교 교리 안에서는 육화라고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 ‘말씀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볼 수 없지만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의 움직임이 우리를 소통하게 한다는 거죠. 잘 아시다시피 창세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사람을 빚고 숨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영의 소통을 이루어주셨다고 나옵니다. 이러한 영의 소통은 그리스도교 인간관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교가 계시종교가 불리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절대적 자유와 한량없는 자비를 종교의 근본이자 기초로 인정하기 때문이며, 하느님의 단순한 신성의 현현의 긍정이 아닌 (religio revelata),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본질적으로 초자연적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자유와 한량없는 자비’는 우리 인간 존재와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자유롭지 못하고 끝없이 자유롭지 못하죠. 이러한 인간의 한계체험은 무한함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희망이 종교를 살아가는 근본이죠.
계시헌장에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이신 것은 자신을 신으로서 보인 게 아니고 우리를 당신 자신의 영역으로 초대하기 위함입니다. 즉, 당신 본성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죠. 하느님께서 넘치는 사랑으로 인간을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말씀하시고 사귀시고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심오한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밝혀졌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죠. 중세 그리스도교 신앙의 틀, 즉 인간이 하느님을 창조한다는 구조 안에서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에서 인간과 신의 만남을 표현했습니다. 특히 하느님과 아담의 손가락을 통해 인간과 하느님의 닮음성이라는 자기 계시의 힘과 인간의 수동성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그러나 인간과 하느님의 손가락 사이가 붙어있지 않은 것은 또한 유사성 뿐 아니라 차이성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복음서 1장 14절)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론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 안에 있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예수가 우리 세상에 파견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강생의 신비를 드러내시셨는데, 그 강생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왜 인간이 되셨는지 그 의미를 이사야서에서 자세히 말씀하셨죠.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을, 눈 먼 이들을 보게 하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것, 그것이 예수님 파견의 이유입니다.
그렇게 파견되어서 예수가 만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간절하게 절대적 자유와 해방, 희망을 찾는 이들이었습니다. 중픙병자, 나병환자, 눈 먼 이, 귀먹은 이, 간음하다 붙잡힌 세리 등이 복음서에서 예수가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 절대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를 모르오’라고 세 번이나 말한 베드로 이야기, ‘아버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돌아온 탕자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탕자의 비유 이야기에서도 부성과 모성을 함께 지닌 이로서의 예수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예수님은 세상 속에 파견된 자신의 존재를 전할 때, 최후의 심판이야기를 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 중에 가장 작은이들 가운에 한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는 두 가지 모습이 드러납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인격적 일치를 추구하면서 늘 기도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끝까지 십자가에서 순명하신 분입니다. 또 하느님 아버지가 자신을 파견한 이유, 즉 세상에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야 할 소명을 따라 사셨죠. 기쁜 소식, 복음은 인간 존재의 증진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 사람은 이웃사랑과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이죠.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회교리는 하느님께서는 사회적 관계도 구원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구원이라는 개념 자체은 개별적인 개인의 영혼 구원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대한 구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명상과 사회참여는 가능한가? - 가톨릭의 신학적 응답
이런 예수님의 삶의 두 모습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명상과 사회참여는 가능한가? 이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가톨릭 신학에 기반한 대답을 찾아보았습니다. 먼저 “인생에서 무엇을 찾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보겠습니다. 저는 인간을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로서 영혼과 육신이 분리됨이 없이 하나로 결합된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영혼이라는 말은 사실 영과 혼의 합성어죠. 혼이라는 정신적인 요소를 끌어가는 영의 요소가 또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도 영을 불어넣었다고 표현이 되어 있구요. 우리는 분명히 육체적 존재지만, 육체적 존재의 한계에 멈추지 않고 도약할 수 있는 영적 존재라는 것이 그리스도교 인간관의 기본입니다.
그런 인간관은 하느님의 모상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창세기(1장 26절)에 나와있듯이 인간이 가진 위대함이라는 것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닮음이 신과 완전히 똑같아질 수는 없는데요, 그게 바로 죄의 체험입니다. 칼 라너는 우리 인간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신의 영원성 혹은 ‘형언할 수 없는 무한한 신비’로 개방되어 있는 세계 내 정신적 존재”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늘 인간을 당신께로 이끌고 계시며,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와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가톨릭 교리서」 27항)는 것, 이것이 가톨릭교회가 말하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을 찾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하느님을 찾는 방법에는 두 가지 신학적 길이 있습니다. 바로 명상할 것인가, 활동할 것인가입니다.
1) 신앙 감각과 신앙체험
명상을 뜻하는 메디타티오(meditatio)는 ‘주의하다, 밤새우다,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에서 말하는 묵상과 동양종교의 명상은 차이가 있습니다. 동양종교의 명상법은 내면의 순수함으로 몰입해서 존재근원으로 몰입하는 명상법이라면, 그리스도교의 묵상법은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는 초자연적인 실재와의 인격적 일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명상이라는 것을 가톨릭에서는 묵상이라고 흔히 표현합니다. 명상이라는 말이 가진 뉘앙스가 자아의 내면적 성찰에 포커스가 있기 때문일 텐데요. 그리스도교의 묵상은 자아에 대한 성찰의 지향점을 내 존재 바깥, 하느님이 내 바깥에 있다고만은 말할 수 없겠습니다만, 그러한 존재근원과의 만남을 통해 얻는 하나의 지향성을 가지고 이루어집니다.
저는 이 지향성이 신앙 감각(sensus fidei)으로부터 온다고 봅니다. 감각은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것이죠. 감각(sensus)라는 라틴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어떤 방향성, 지향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sensus’의 어원인 ‘sentire’는 ‘어떤 방향으로 따라가다’란 뜻으로, “어디서부터 어떤 곳으로 지향하려는” 혹은 “어떤 곳으로 다가서는” 과정으로 이해되어,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본능적인 ‘방향감각’ 혹은 ‘감각의 지향성’을 뜻합니다.
이러한 ‘감각’을 신앙과 연관시키면 세 가지 표현이 될 수 있어요. 첫 번째는 ‘신앙에 의한 감각’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무언가를 직관하고,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거예요. 하느님을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을 토대로 본능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죠. 두 번째는 신앙에 대한 감각입니다. 신앙이 인간의 자기완성을 이끌어주는 힘인가 하는 것을 지각적인 해석을 통해서 이해해보려고 하는 거죠. 직관과 본능이 판단하기 이전에 행동하는 것이라면, 옳고 그른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이해해보려고 하는 감각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모든 삶의 감각이 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신앙의 목표로 향하게 하는 감각입니다. 신앙을 위한 감각, 영성적 감각입니다. 이러한 신앙감각은 올바른 신앙의 원리들과 실천들을 파악하고 받아들이며, 잘못된 것을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합니다.
신앙 감각을 요즘 말로 한다면, ‘공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씨튼연구원의 종교인모임에서 제러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를 함께 읽었었는데요,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공감하는 존재인데, 그러한 공감의 논리를 산업화과정에서 잃어버렸다고 리프킨은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잃어버린 공감을 되찾는 것이 우리 시대, 21세기의 중요한 원리라는 것입니다.리프킨은 공감(共感)이란 ‘실체적 경험’, ‘구체적인 경험’이며, 이 경험은 이전의 경험들과 선취(先取)된 지식들에 따라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완전히 해명했을 때만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감성이나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체험도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인간이 가진 정신의 역동성이 있는 것이죠.
인간정신의 역동성이란 논리적이면서 논리성에 함몰되지 않고, “신앙 인식의 대상이 동시에 이 인식의 원리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독특한 인식 방식”입니다. 조금 풀어서 말씀드리면, “내가 하느님을 믿는다”라고 말할 때에는 내가 하느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나의 존재론적 논리가 있습니다. 내 직관적 체험일 수도 있고, 내 존재를 흔들어놓는 체험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사람이라든가,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회심체험을 한다든가 하는 경우입니다. 루터를 비롯한 많은 성인들 그러한 체험을 했죠. 신을 향한 믿음을 발로로 일으키는 것은 내 주체적 역동성이지만, 그 역동성을 뒤집어보면 내 신앙의 대상이 나를 그렇게 하도록 이끌어주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양면성입니다. 신앙 감각은 나를 하느님을 향하게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내가하느님을 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리로 대상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앙체험입니다.
저희 어머님 이야기를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오남매를 홀로 다 키우셨는데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성령체험을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것을 가장 한국적인, 샤머니즘적인 한풀이 체험이 그리스도교화 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성령에 대한 신학적 해석도 가능하고 필요하겠지만, 맺힌 한을 풀어내는 메커니즘이 우리 안에서 있습니다. 그러한 영의 움직임에 의해 한이 풀렸을 때 치유와 해방의 체험이 이루어집니다. 어머니가 그것을 체험하신 이후에 다음에 이어지는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가 생깁니다. 저처럼 신학을 공부하고 지식을 얻기도 하지만, 그런 걸 통하지 않고도 경험을 통해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체험 이후에 새벽 3시만 되면 칼 같이 일어나셔서 성경을 읽게 하셨어요.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성경말씀 안에서 자기 삶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면서 말을 건네는 걸 느끼신대요. 어머니는 순수한 자기 한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확신과 신비를 몸으로 체험하신 거예요. 그런데 저는 열심히 공부하면서 신학적 지식을 통해 신앙을 가졌죠. 어머님과 대화하면 어머니께서 “내가 너를 어떻게 이기겠니”하시지만, 저는 돌아서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나는 지식으로 신앙을 얻었지만, 어머니는 신앙을 살고 계신 거라고요. 묵상, 명상 이런 것들이 내 내면적 만족, 내 자아에 대한 환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구체적인 삶의 언어로 바뀔 때 그게 하느님의 지혜가 됩니다. 성경은 어떤 곳에서도 지식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하느님의 지혜를 이야기하죠. 지혜는 인간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신적 깨달음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감각의 원리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원한다고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나에게 그것을 허락해 주셔야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적 체험에 대한 카톨릭의 응답에는 두 가지 신학적 모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그 분을 향할 수 있는 내면적 욕구가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탐구한 현대 신학자들로 칼 라너와 발타살을 꼽을 수 있습니다. 라너의 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은 하느님, (라너는 하느님이란 말을 쓰지않고 ‘무한함’, ‘형언할 수 없는 분’ 등으로 부릅니다.) 거룩한 그 존재로부터 섭리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섭리되어 있다’는 것은 이끌림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깨닫는 것을 초월론적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즉, 내 존재가 어느 순간 유한성의 한계에서 갑자기 무한한 개방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체험이죠. 대부분 성령체험이나 신앙체험을 하는 분들은 자기존재의 한계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그 괴로움을 빵 터뜨려줄 수 있는 회심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루터도 중세수도자로 살면서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고행과 금욕생활을 했지만 자신 안에 있는 내적욕망을 이길 수 없단 걸 알고 좌절했던 사람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늘 읽던 로마서를 또 읽다가 “사람은 율법을 실행하는 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거룩하게 된다”는 것, 의롭게 된다는 체험이 자신을 관통했을 때 나를 꽉 막고 있던 것이 사라집니다. 그런 것을 초월론적 경험이라고 이야기하고요. 또 한 명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이라는 라너와 비슷한 시기의 스위스 출신 신학자입니다. 둘 다 예수회 회원이었지만 아주 다른 길을 걸어갔는데요. 라너가 스콜라 철학이라는 카톨릭의 전통적인 중세신학의 틀을 하이데거 사상으로 연결하여 현존재가 무한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반면에 발타살은 문학적 소양과 미술과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통로는 어떤 내면적 정신 체험, 정신의 자기체험이 아니라 하나의 분명한 현실, 내 앞에 나타난 하나의 미적 아름다움의 영광으로 내가 완전히 몰입되어질 수 있는 놀라운 미적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신학적 미학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매혹하죠. 아름다움이 흔히 말하는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혼을 존재론적으로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미학적 아름다움이 신앙 아래서 발생한다는 겁니다. 때로는 인간의 눈에 부조리나 역설처럼 여겨지지만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역설처럼, 하느님의 논리는 인간의 논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는 겁니다.
이 체험을 라너는 “하느님을 알고 느끼기 이전에 이미 그분은 나를 이 불완전한 세상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고 살 수 있도록 부르셨다.”고 표현합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실존적 불안과 무의미를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겠다는 의미에 대한 체험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 인간은 희망을 갖게 되고 희망 속에서 인격적 결단을 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죠. 이를 선험성과 개방성이라고 합니다. 내가 경험하기 이전에 내게 이미 주어진 것이죠. 그것을 라너는 거룩한 신비라고 말합니다. 그 신비로부터 우리가 섭리되어 있다고 얘기를 하고요. 그 신비로부터 섭리되어진 가장 전형적 인간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다고 보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초월론적 경험의 가장 원형이시다라고 말하고 있겠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것을 살아가신 분이죠.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러한 표현은 그분이 가진 하느님 체험에 대한 결단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던 것.
다음으로 발타살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 사건 속에서 발생한 진정한 아름다움과 거룩함의 체험을 통해 나는 하느님을 만난다.” 우리를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겉으로 보기 좋고 훌륭하고 미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혼을 충만하게 해주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겁니다. 흔히 얘기하듯 진흙탕 속에서 진주를 찾는 체험들이 있죠. 너무나 힘든 고통의 현장에서 여전히 기쁨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분들에 대해서 우리는 숭고하다는 말을 씁니다. 그러한 숭고함과 거룩함이 아름다움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의 죽음, 부활은 신의 구원의 드라마이자, 자신을 철저하게 내려놓는 것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신비라는 역설적 신의 논리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를 비움으로써 타인을 더욱 풍부하게해주는 빛의 역할을 하는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죠. 이런 것들이 제가 생각하는 신학적 응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가톨릭 신앙의 내적 수행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고민할수록 빠지는 딜레마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하느님을 잘 믿고 싶은데 왜 잘 안 믿어지지’라고 하는 나의 자발적인 의지문제가 있습니다.또 하나는 내가 하느님을 향한다고 하지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려고하는 집착의 문제입니다. 신앙이, 믿음이 내 소유가 되어야한다는 유혹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종교를 많이 접하시겠지만 모든 종교의 공통점은 내려놓고 맡기고 비우는 것이죠. 왜 모든 종교는 내어놓고 맡기고 비워야할까? 우리 존재자체가 텅 비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비워져있는 우리 존재를 무엇으로 채울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라너와 발타살이라는 두 신학자를 소개시켜드린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고자할 때, 그러한 내 주체적 결단 이전에 나를 그렇게 하도록 이끌어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체험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한 체험을 우린 은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은총체험을 하셨던 분들은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하셨던 이유가 있었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박완서 씨가 고통 속에 아들을 잃고 탄원을 하는데, 그 안에서 깨달음을 얻었던 이야기를 하셨죠. 내게 이렇게 탄원할 수 있는 주님이 계시고, 그 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나를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을 느끼는 후체험이죠.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후험적인 겁니다. 무언가 경험하고 나서 우리는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하기 이전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있는데, 그것을 신앙적 용어로 은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하느님감각이 갖고 있는 지향이 있습니다. 감각은 느낌과 달라요. 느낌은 그때그때 감각은 하나의 지향을 갖고 집중 하다보면 지향이 반복되면서 숙련이 되는 겁니다. 운동감각이든 예술감각이든 훈련하면 생겨나잖아요. 그런 것처럼 신앙에도 센스가 있는 거죠. 처음에 보여드렸던 대수천분들처럼 ‘신부들이 강론대에서 정치얘기만 하는 건 옳지 않아’라고 말하는 건 자기가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자신이 가진 신앙이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강론대에서 복음만 이야기해야 돼.’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러한 방향으로 감각을 성장시키는 것이죠. 정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종교가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개혁을 해야 한다는 감각을 성장시키면 신앙의 성향자체가 개혁적인 삶으로 바뀝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을 어떻게 지향하느냐가 중요해지는 데요. 이러한 감각의 수행에 있어 가톨릭 신앙 안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한 예는 렉시오 디비나, 성경묵상입니다.
성경묵상은 하느님의 말씀을 일상 안에서 받아들이는 수행연습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서 그 분의 말씀을 읽는 하나의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하나의 주체로서 읽는 대상을 객체화시키는 게 아니라, 읽는 대상이 나에게 말을 건네고 내 안에 들어오도록 나를 비우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내가 읽지만, 성경을 읽는 그 순간의 주도권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들어오시도록 허용하는 것, 그것을 말씀의 자기 복제여정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단순한 글이고 책이지만, 성경을 묵상하는 것은 신앙의 언어로 따지면 영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글자로 머물렀던 말씀이 내 존재를 충만하게 하면서 말을 걸어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렉시오 디비나를 흔히 네 가지 단계로 이야기합니다. ‘읽고-읽은 것을 되새겨보고- 되새겨본 것을 지향하는 것-관상’입니다. 지향은 기도를 갖는 것입니다.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상의 단계로 넘어가는 건 수행이 필요합니다. 저는 신자분들께 성경묵상의 한 단계로 추천드리는 것은 제일 맘에 드는 구절을 써서 여기저기 붙여놓고 암송하고 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꾸만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 말씀이 살아서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그런 식으로 어느 순간 말씀에 의해 엄습되었단 체험이 있을 때, 그 순간이 바로 관상에의 초대입니다. 수도자나 수행하는 분들은 그 순간에 머무는 겁니다. 말씀이 나를 엄습할 때, 그 순간에 머물 때, 내 생각이나 판단, 모든 게 멈춰지고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 되는 기쁨이 발생합니다. 엄청난 희열이죠. 지복지관도 궁극적 수행의 목적이 되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묵상의 실천단계에서는 이런 표현을 쓰는데요, “독서는 행복한 삶의 감미로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고 묵상은 그 감미로움을 발견하는 것이고 기도는 그것을 청하는 것이며 관상은 그것을 맛보는 것이다. 독서는 단단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고, 묵상은 그것을 잘게 씹어서 가루로 만드는 것이며, 기도는 그 맛을 보는 것이고, 관상은 기쁨과 새 힘을 주는 감미로움 그 자체이다.” 가톨릭 안에는 이러한 묵상이 아주 오랜 전통 속에서 이어져왔습니다.
이런 명상을 통한 수행을 삶 자체로 바꿔놓으신 분들이 출가수행자분들입니다. 출가수도자들의 이상은 초대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함입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사도 2:44-47) 청빈-숙명-정결이라는 복음의 삼대 서원을 하고 수도자로서 살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궁극의 기쁨, 즉 하느님으로부터 받아들여졌을 때 얻는 기쁨을 삶으로 수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대교회공동체 이상주의는 공산주의가 처음으로 이루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공산주의는 유일하게 수도회에서만 현실화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북한에서 인사가 한국에 왔을 때 한국 교회를 방문해서 수도원 사는걸 보고 ‘진정한 커뮤니스트들은 여기 있다’고 말했다고 해요.
출가 수도자의 전통은 가톨릭에서 네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정주 수행입니다. 처음엔 은수자로서의 삶에서 시작된 것인데요, 수도원이라는 분리된 곳에서 수도회규칙에 따라 노동과 기도를 통해 함께 모여 수행하는 전통입니다. 두 번째는 아씨시 프란치스코로 대표되는 탁발수행입니다. 수도원을 벗어나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걸식하면서 성과 거룩함과 속됨을 하나로 묶는 가난한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 만물의 아름다움을 하느님에 대한 찬미로 채워내는 생태학적 관점도 갖고 있었죠. 다음으로는 15세기-16세기 영적 쇄신을 일으켜준 이냐시오 로욜라의 선교 수행과 아빌라의 데레사의 내적 순례 수행이 있습니다. 영신수련이라는 예수회 정신은 로욜라 성인으로부터 나왔고, 아빌라 데레사도 관상이나 봉쇄가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수도회전통을 만들어냈죠. 이냐시오 로욜라는 우리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표징을 읽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결단하는 영신수련을 이끌었구요. 아빌라 데레사는 내 내면의 하느님을 찾는 <영혼의 성>이란 책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느님 향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전통은 빈첸시오 아 바울로 같은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자비의 수행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이 하셨던 수행자체라고 보는 거죠.
3) 가톨릭 신앙의 사회참여
그렇다면 이런 내면적 수행의 전통이 어떻게 사회참여로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요? 가톨릭교회의 사회참여는 예수님의 명령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르코 복음서나 마태오 복음서에 보면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해라.’라는 말이 나오죠. 이 ‘온 세상’과 ‘모든 피조물’이라는 말은 가톨릭이 가진 보편성을 드러냅니다. 보편은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넓이와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깊이가 있습니다. 넓이와 깊이를 가진 다이나믹인 것이죠. 그러나 보편이라는 것이 갖는 함정은 넓다보니까 모호해지는 것입니다. 모두 다 사랑하라고 하면 누군가를 특별히 사랑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보편성과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 개별성과 보편성을 이해하는 것이 종교간 대화에서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회칙에서도 말씀하셨지만 그리스도교가 공동선과 인권이라는 고유한 목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 사랑, 그들을 하느님과 닮은 존재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는 내면적인 영역, 사적인 영역 뿐 아니라 사회 공공성 추구와 관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모습, 보편적 형태의 정의 평화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앙 고백은 사회참여와 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요한 밥티스트 메츠라는 신학자를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라너나 발타살이 인간 개인의 정신성 안에서 하느님을 지향하는 지성적 신학을 이야기했다면, 메츠는 지성이 가진 이론이 우리의 존재를 바꾸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실천이 이론보다 우위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신학적 방법론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가난한 이들과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과 이들과의 삶의 진솔한 만남과 이야기, 그들과의 실천적 연대는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삶의 자리이다.”삶의 체험의 현장이 하느님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사람이 되어 사신 자리, 하느님의 복음이 선포되고, 구원이 선포되는 자리라는 것이죠. 그 자리를 찾는 작업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교리를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신앙의 체험 자체는 예수라고 하는 인물이 구체적으로 따라 나서기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는 순간에서 믿음이 시작죄기도 하죠. 우리는 흔히 알아야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천하면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여기서 짚어볼 몇 가지 중요한 점은 인간이 주체적 자유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와 하느님 현존 앞에서 시간의 궁극적 완성을 향해 우리 자신을 투신합니다. 시간을 영원의 상대적 개념으로, 따라서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시간은 현재를 계속 살아가게 해주는 원리이기도 하죠. 시간은 언제나 궁극적 완성을 통해 나아가는 끊임없는 현재기 때문에, 그 현재 앞에 투신하고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거에 묶여 살거나 미래만 희망하며 사는 것이 아니고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자유의 결단은 미래를 긍정하고 행동하는 사람에게 희망적 언어라는 겁니다.
역사 또한 메츠에게 중요한 것인데요. 우리가 역사를 인간이 스쳐지나가는 시공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역사 자체가 하느님 계시의 현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 은총이 현실이 되는 장소, 인간의 영원성과 불멸성이 현실이 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 자유가 실현되는 자리라는 겁니다. 하느님의 영원성을 시간 밖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 안에 녹아들어 있는 영원성을 체험하는 거죠.
쉽게 생각해보자면요. 우리가 시간을 느낄 때 시간이 굉장히 빨리 지나간다고 느낄 때가 있고, 반대로 시간이 가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두 가지 이유입니다. 내가 너무 몰입하고 재밌으면 시간이 빨리 가는데 그 시간을 힘들거나 몰입하지 못하면 더디 갑니다. 시간 속에서 영원을 체험한 거거든요.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춰버리는 겁니다. 충만해지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기분이 좋으면 ‘시간이 멈췄으면’이라고 하거나 ‘벌써 시간이 지났어’라고 합니다. 이런 체험은 사랑을 하는 사람이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이건 물리적인 시간과 전혀 다른 시간입니다. 시간 안에서 이미 내가 누릴 수 없는 영원이라는 것을 짧은 순간이지만 체험한 거거든요. 이때에, 더 이상 시간이 나를 가두는 게 아니라 내가 시간을 지배하는 체험이 됩니다. 영원성 체험이죠. 영원은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심어주신 것입니다. 영원을 맛보면 시간이 주는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순교자들이 하느님 안에서 영원을 체험했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순교를 받아들이고, 세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희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자유를 역사 안에서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봅니다.
그런 실천 가운데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타자의 존재가 있습니다. 타자는 나와 똑같은 주체성의 원리를 가진, 영원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영혼을 찾아가는 여정 중에 그 누군가 나로 인해서 그 사람의 영원을 체험할 수 없게 되거나 부자유의 체험에 떨어진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인간의 이기적 욕망으로부터 나온 겁니다. 메츠는 타자와 내가 공동의 주체성을 가진 가능성 그것을 찾아내는 원리가 필요하고,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내 영원성의 체험을 나누어줄 수 있는 연대적 체험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을 위한 세 가지 해석학적 원리를 메츠는 이야기하는데요. 첫 째, 실천은 언제나 윤리적으로 결정되는데, 그 윤리적 결정은 사회 정의나 자유 공동체적, 개인적 측면이 모두 중시되는 결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 째, 실천은 매우 많은 역사적 결정사항에 의거해 계속해서 결정된다. 무엇인가 결정하고 결단한다는 것은 결단을 통해서 지금 현실을 새롭게 바꾸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용기가 없으면 결단할 수 없죠. 결단이란 때론 위험한 것이고, 전복과 저항이 일어나는데 이건 기억 속에서 일어납니다. 연대적 주체성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리가 기억의 원리인데요, 새로운 것을 결단할 수 없게 만드는 것에 저항에 대한 체험을 결단 속에서 계속 느낍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기억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주체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는 거예요. 때문에 ‘위험한 기억’이란 말을 메츠는 씁니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게 내 존재를 위험하게 만드는데, 가장 위험한 것은 예수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존재론적으로 위기에 빠지는 것입니다. 안주하고 타협하고 유혹에 빠지고 마는 존재에 대해 예수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저항을 느끼는 것이죠. 마지막 셋 째, ‘실천의 희생적(pathic) 구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위험한 기억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면 주체적 기억이 나를 새롭게 받아들이는 출발점이 되는데, 이는 희생을 요청합니다. 실천이 본성의 정복과 통제를 의미하는 행위로 뿐만 아니라 ‘고통’을 내면화하고 개인화에 대한 저항의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인 형태를 취한다는 점입니다.
이 세 가지가 실천을 일으키는 원리라고 메츠는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명상이나 묵상이 어째서 내면의 영혼으로 빠지지 않고 명상과 묵상이 왜 실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신학적 카테고리에 해당되겠습니다. 기억하면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 이야기하면 존재에 대한 위기를 공적으로 말하면서 회심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집니다. 결심하게 되고 함께 이야기하게 하죠. 가톨릭 신앙의 중심인 미사의 성찬례는 기억의 제사입니다. “이것은 내 몸이나, 내 피다. 먹고 마셔라.”라는 것을 이천 년 동안 반복했습니다. 예수가 빵을 떼어주는 행위가 파스카만찬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살덩어리를 내어주는 살아있는 표징이란 걸 제자들이 깨달은 겁니다. 단순한 상징행위가 아니라 떼어나누는 그 순간 그것을 나누어 먹는 사람 안에서 살아있는 예수님이 체험되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가 성체성사로 산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유감스럽게도 가톨릭 신자들의 주일미사 참석률이 어마어마하게 떨어지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