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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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불교를 이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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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4-02-20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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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불교를 이해할 것인가?
                 
              들어가는 말   
              1. 타종교를 이해하는 3방식
              2. 붓다의 깨달음
              3. 공
              4. 공과 하느님
              5. 나오는 말

들어가는 말

과학의 발달로 인해 세계는 모든 방면에서 하나가 되었고 더 이상 고립되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인류가 한 덩어리가 되는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 살아가고 있다. 세계는 국가 단위가 아닌 하나가 되었고 세계역사 또한 단일 역사로 탈바꿈해가고 있다. 이렇게 세계가 일체화되어 가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다원성이 공존하고 있다. 인류사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해온 종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종교도 이제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 타종교와 만나 그 안에서 새로운 구원의 메시지를 던져 주어야 할 시대적 사명과 요청을 지니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 뿐 아니라 한국은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종교상황을 지녔다. 그것은 다름아닌 불교 개신교 가톨릭 유교 즉 여러 종교가 거의 대등한 힘을 지니고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는 여러 종교가 있어도 그 중 주된 종교가 있지 우리나라처럼 막상막하의 힘을 갖고 여러 종교가 공존하진 않는다. 이런 한국의 다종교상황 속에서 우리는 우리와 전혀 다른 세계관과 구원관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여할지 물어야 한다.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전인류의 하느님이라면 우리 신앙공동체를 통해서만 구원의 손길을 뻗치실까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된다. 즉 하느님이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만 당신을 보여주셨을까? 우리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그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데 그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즉 그리스도를 모르고 산 뭇사람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그래서 먼저 타종교를 어떤 입장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타종교를 이해하는 3가지 방식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보다 먼저 종교다원사회 안에서 타종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생각해 왔다. 그 생각들은 오늘날 새로운 신학으로 발전해 왔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신학이다. 거기서 말하는 타종교를 이해하는 입장으로는 크게 3가지로 본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가 그것이다.
이를 하나 하나 설명하면 먼저 배타주의 입장은 단순하다.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 이외에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이 기독교에만 있으므로 구원받으려면 기독교로 다 개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타종교 안에서의 구원을 인정하지 못한다. 교회 안에서만의 구원을 고집하는 교회중심주의적 입장인 배타주의는 오늘날 대다수의 개신교 교인들의 입장이다. 하지만 오늘날 종교다원성을 다루는 사람 중에는 배타주의 입장에 선 사람은 드물다. 배타주의의  대표적 신학자로는 칼 바르트를 들 수 있다.
배타주의의 입장을 극복하기 위해 나온 것이 포괄주의이다. 이 입장의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가톨릭의 대표적인 신학자 칼 라너이다. 포괄주의 입장은 기독교의 진리를 포괄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입장으로 타종교에서의 좋은 것을 기독교의 울타리 안으로 포괄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의 신자가 되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따르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불교신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선한 산다면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말이 다르고 개념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제도가 다르지만 타신앙을 갖고 그 안에서 올바른 삶을 살면 그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칼 라너는 이러한 타종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했다.
 물론 그 사람이 양성적 기독인이면 더 좋고 기독교의 진리를 알면 더 풍부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개종을 강요하진 않는다. 이러한 포괄주의의 입장에서는 신학도 약간 달라져서 예수를 역사적인 예수로만 보지 않고 우주적 그리스도로 생각한다. 즉 타종교에 있는 진리까지 포함하여 모든 진리가 우주적 그리스도 안에 포괄된다고 보는 것이다.
위에서 본 배타주의가 교회중심적 종교신학이라면, 포괄주의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다. 즉 타종교인들도 자신의 신앙의 중심을 그리스도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우주적 그리스도 안에 숨어있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괄주의도 문제점이 드러났다. 그것은 타종교인의 입장에 있는 사람의 반응으로 왜 멀쩡하게 다른 종교로 잘 사는 사람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느냐 하는 것이다. 즉 타종교인은 포괄주의에서 자기를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그 자체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타종교인들은 자기네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주적 그리스도라는 넓게 망을 쳐서 그 안에 훓어버리려고 한다고 포괄주의의 입장을 비판했다.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집어넣고 자기만족만 하는 것이지 이는 인격을 인격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고 타자를 타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는 비판을 했다. (가톨릭 입장)
그래서 나온 것이 다원주의이다.(존휙,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이것은 너는 너의 길 가고 나는 내 길 가도 다 구원받는다는 입장이다. 구원의 길이 여럿임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종교의 균등성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동등성이 아님)  이러한 다원주의적 입장은 신중심적 신학이다. 포괄주의는 그리스도 중심주의로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아직 고집하고 있는데 반해 다원주의 입장은 그리스도는 기독교적 개념이므로 그리스도를 빼고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하느님 중심의 신학을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은 신을 추구하고 있고 신께로 가는 길이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불교같은 종교가 문제가 된다. 즉 신중심적 신학이 신개념을 사용하는 한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다원주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옳은 지적은 아니다. 이러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신개념은 좁은 의미의 신개념이기 때문이다. 불교도 그리스도교적 신을 인정하진 않지만 불교식의 신개념이 있다. 이는 후에 공과 하느님을 다루면서 언급하기로 한다. 그러나 앞서 본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신대신 실재(Reality)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다원주의를 비판하는 새로운 입장이 최근에 나왔는데 그것은 마크 하임의 Salvations이라는 책자이다. 아직 나온지 얼마 안되어 학계에서의 반응이 나오지 않았지만 이 이론에 대해 긍정하는 사람도 있고 비판하는 학자도 있다. 여기서 그의 이론을 잠시 살펴보면 거기서의 다원주의에 대한 비판은 다원주의는 각 종교전통을 뛰어넘는 하나의 실재가 있음을 가정하여 각 종교의 차이를 극소화하고 각 종교마다의 특성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즉 다원주의는 이것을 믿어도 구원되고 저것을 믿어도 구원된다고 함으로써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어 자기 종교에 헌신할 당위성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각기의 종교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그리스도교에서 예수, 이슬람에서는 코란)에 온전한 헌신을 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임은 주장하기를 위 3가지 입장을 경우에 따라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 종교 안에 자기가 헌신해야 할 때 배타주의의 주장은 정당하다. 내가 믿는 종교가 유일하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헌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단 여기서 말하는 배타주의는 다른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 종교전통에 헌신함을 인정해준다. 즉 남이 다른 길을 택함을 인정해 준다는 점에서 전통적 배타성처럼 나만 옳고 남은 틀렸다고 본 전통적인 배타주의와는 다르다. 
둘째 포괄주의적 입장은 내가 결단에 의해서 택했던 하나의 길이 있기 때문에 나의 전체 삶은 그 길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단 나의 삶의 여정 중에서 다른 신앙에 대해 알게 되고 배움으로써 내 신앙 상태가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내 종교 체험이 안테나가 되어 그 안테나를 통해서 다른 이의 신앙을 이해할 수 있고 서로 나눌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세째의 다원주의 입장은 객관적인 연구가 필요할 때이다. 학문적 입장에 설 때, 종교 간의 대화를 할 때는 다원주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 이와 같이 형편에 따라서 3입장을 취하면서 종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을 하임은 orientation Pluralism이라고 하기도 하고  포괄적 다원주의라고도 한다.
위에서 살펴본 여러 입장 중에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단 타종교를 인정하고 타종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나의 종교관을 넗혀준다는 사실이다. 그런 입장에서 불교에 접근해보기로 한다.

2. 붓다의 깨달음
佛敎란 말 그대로  부처님(BC 560-480)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에게는 칭호가 여럿이 있는데 석가모니, 고타마 싯달타, 붓다가 그것이다. 석가모니 혹은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또는 줄여서 석존이라고도 하는데 석가(Sakya)는 그의 나라 이름이고 무니(muni)는 조용한 사람 혹은 聖者라는 출가자를 말한다. 따라서 석가모니란 말은 석가의 출가자 내지 석가의 성자이라는 의미가 있다.
두번째 이름은 싯달타로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준 이름이다. 말 뜻은 ‘네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 지리라’라는 뜻으로 목적을 달성한 자란 뜻이다. 고타마는 그가 소속된 씨족이름으로 성이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 고타마 싯달타는 그의 출생과 연결된 이름이다.
우리가 보통 부르는 부처는 인도어 붓다(Buddha)를 음역한 것이다. 이는 깨달은 자(覺者)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부처는 고유명사는 아니다.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가 다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 그 자체보다 그의 깨달음에 집중한다. 부처에게 집착하는 것 그것은 깨달음에 나아가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선사들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이다.(殺佛殺祖) (조사: 선의 법맥을 이어온 스승로 보리달마-혜가-승찬-도신-홍인-혜능)
 붓다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가 태어날 당시 점쟁이 아시타가 점을 쳤는데 그가 전륜왕(바퀴를 굴리는 임금, 즉 법륜을 돌리는 임금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왕이거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인간의 구원자)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이 말을 듣고 첫번째 왕이 되게 하려고 고생을 모르게 키워 16세때 야쇼다라와 결혼시켜 라훌라(자기를 얽어맴)이란 아들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붓다는 29세때 노인, 병자, 시체를 보고 세상의 허무를 느껴 출가하여 6년간 극단적인 고행을 했다. 그것은 그 당시에는 고행이 구원의 최고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행을 통해 무아경을 체험하지만 얼마 안가서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자기가 무아경에 들어갔을 때는 번뇌가 없어졌는데 다시 무아경에서 나왔을 때는 그 전과 똑같은 자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단의 고행에서 오는 황홀경이 참된 해탈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가 얼마나 지독한 고행을 했는지는 갈비뼈가 다 드러난 부처님 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소녀가 주는 우유를 받아먹고 난 뒤 지나친 고행도 아니고 지나친 쾌락도 아닌 중도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자 그의 5명의 제자가 그의 곁을 떠났다. 붓다는 혼자서 보드가야(Bodh Gaya)에 가서 명상하면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거기서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는 거기서 깨달음을 얻은 후 7주간동안 명상을 계속했는데 이때 그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르칠 것이냐로 고심했다고 한다. 부처 이전에도 깨달은 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깨달음은 자기가 해야한다는 것때문에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는 그의 자비심 (카르마 )때문에 가르치기로 결정했는데 이 결정이 오늘날의 불교를 낳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붓다의 생에 있어서 깨달음의 체험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은 그가 正覺의 체험 후에 자신이 꺠달은 진리를 자기만의 것으로 삼지 않고 무지로 인해 고통당하는 중생에 대한 깊은 자비심으로 그들을 위해 설법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붓다는 녹야원에서 첫설법을 하여 80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45년간 설법하셨다. 불교는 한마디로 말해 붓다의 지혜와 자비를 근본으로 하고 있는 종교이다. 
즉 2600년전 보드가야의 보리수 밑에서의 한 사람의 깨침이 불교의 시원점이 되었고 그를 추종하는 모든 불자들은 부처님의 깨침에 똑같이 이르려함을 목표로 삼는다. 이렇게 볼 때 불교를 안다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아는 것이 된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 당시 인도사상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꺠달음의 경지는 梵我一如였다. 우주적인 실체인 브라흐만 즉 梵과 개인적인 실체인 아트만이 일체라는 이 사상에서 부처님은 실체성인 아트만을 부정하고 무아인 안아트만(Anatman)을 주장했다. 我는 생멸변화하지 않고 영원불멸한 존재의 실체나 본질을 말하는데 부처님은 이러한 我를 부정한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한 순간도 정지하지 않고 생멸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과학의 설명과 다르지 않다. 옛날에는 고정 불변의 물질로 보았던 원자도 오늘날에는 불변의 것이 아니라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 중간자 등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운동체라고 본다. 불교에선 이를 諸行無常이라 한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自性이 없고 모두가 인과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緣起라고 한다. 연기야 말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연기설의 가장 기본적인 원형은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하면 그것이 생기한다. 이것이 없으면 그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그것이 멸한다”는 문구이다.
아버지가 있음으로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으므로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학생이 있으므로 선생이 되고 선생이 있으므로 학생이 되는 것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모두가 더불어 있으며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나와 남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너로 인해 내가 있고 나로 인해 너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이 존재의 관계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가 인과관계에 의해서 존재한다면 각 존재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붓다는 모든 존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기에 자성이 없다는 무아설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무아설이 각 개체의 자성을 부정한 것이라면, 연기설은 전체적 측면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전체적 측면에서 연기가 성립되려면 각 개체들이 무아일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무아의 개체적 측면에서 볼 때 그 무아 속에는 우주 전체(연기)가 들어와 있게 된다.
이러한 연기사상이 서기 150년 이후에 태어난 용수(나가르주나)시대에 와서 공으로 표현되었다. 결국 연기는 곧 공이며 공은 곧 연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사상이 불교전통 내에 면면히 이어져 왔고 궁극적으로 불교에서 깨달음이라 하면 공을 의미한다.

3.공
공은 무엇인가? 텅 비어 있다는 것, 그러나 이는 有의 상대개념인 無가 아니다. 여기서의 무는 상대무인데 공은 상대무가 아니라 유무를 넘어선, 아니 이를 포괄하는 절대무를 말한다.
돌아가신 성철스님의 법어 중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가 있다. 이 말은 그 자체로 너무도 당연한 말이라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이 말이 의미를 지닌 것은 이 말과 반대되는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말이 선가에서의 깨달음의 출발점이 된다.
사실 산은 산이 아니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언어활동과 논리의 기초가 되는 동일률을 범하기에 말이 안되는 말이다. 거기에 바로 문제의 핵심이 있다. 선사들이 말하려는 각의 세계는 동일률이 통하지 않는 세계이다. 즉 言語道斷의 세계이다.
불교에선 동일률은 언어에서만 통하는 인위적인 법칙이며 실상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올바른 인식의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즉 실상의 세계에선 어떤 것도 고립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물들은 상호의존적이며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A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선 B C D 등 다른 여건들이 있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여기 종이가 있는데 이것은 여러 조건들이 충족되어 지금 종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된 것이지, 따지고 보면 이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구름, 비, 물, 공기, 태양 숲, 나무, 나무꾼, 각종 도구들, 목재소, 제지소, 연료, 운송차, 도매상, 소매상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요소들이 연합하여 내 앞에 놓여 있는 종이를 산출한 것이다. 굳이 종이라고만 부르는데 문제가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무 이름도 붙일 수 없다. 어떤 한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 사물의 진정한 모습 즉 연기성, 의타성으로서의 공성을 왜곡하고 만다.  이름과 개념으로부터 오는 제한되고 편벽된 시각을 타파하기 위해서 선사들은 “산은 산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공의 지혜에서는 언어야말로 진리의 적이다. 언어야말로 사물들이 상호의존적으로 얽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들이 각기 고유한 성품을 지닌 독자적인 존재인 양 착각을 일으키게 한 주범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언어에 속아서 존재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이것과 저것을 차별하고 자와 타를 구별하며 온갖 집착에 빠진다는 것이다. 온갖 집착, 온갖 편견은 사물의 연계성과 상대성을 무시하고 차별성과 독자성만을 보게 하는 언어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상호의존적이며 조건적이며 자존적 실체성을 지닌 것은 하나도 없다. 이를 불교에선 연기라고 부르고 이 무자성성 무실체성을 다른 말로 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어떤 것도 자성이 없다면 우리가 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재로 산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이 순간 산이라 불렀지만 찰나 그 산은 벌써 변한 것이다. 모든 것은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이와 같이 언어로부터 오는 모든 고정관나과 편견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언어의 병을 치유해주고자 선사들은 언어 활동의 가장 기본적 법칙인 동일률을 무시하고 “산은 산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실상을 파악했을 때 우린 ‘산은 산이 아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또 산은 산이다라고 하는가? 왜 다시 상식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는 단순한 상식의 세계가 아니라 부정을 거친 긍정이다. 반야심경의 유명한 문구대로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색이 곧 공이라는 것은 산이 산이 아니다에 해당하는 것이고 공즉시색은 다시 부정을 거친 후의 긍정을 한 산은 산이다에 해당된다.
즉 만물은 자신의 자성을 갖고 있지 않고 타에 의존해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런대로 각기 이름을 갖고 존재한다.  즉 모든 것이 공이지만 우린 각 사물 안에 고유한 이름을 붙힌다. 산은 산이 아니지만 산인 것이다. A는 A가 아니지만 A인 것이다. 즉 방편적으로 A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서는 妙有라고 한다. 제일 처음의 산과는 달리 후자의 산은 이미 존재의 실상을 깨달은 다음에 방편적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바로 이 사물의 실상이 공임을 깨닫고자 한다. 즉 공이야말로 깨달음의 실재이다. 공의 깨달음을 통해 사물의 실상과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생멸변화 속에 있기에 어디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부처님까지도 집착해선 안된다.
단하천연스님이 木佛을 태운 일화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단하스님이 萬行 중에 날이 저물어 한 절에 찾아갔다. 마침 주지는 출다중이고 방은 찻다. 군불을 지피려고 땔나무를 찾았으나 보이질 않았다. 마침 법당에 모셔진 나무 불상을 보고 업어다가 도끼로 쪼개어 군불을 지폈다. 바싹 마른 목불이 얿마나 잘 탔겠는가. 출타했던 주지스님이 돌아와 그 광경을 보고 “부처를 태운 놈이 어디 있느냐”고 야단이 났다. 그런데 단하는 “이게 정말 부처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래 그게 부처 아니고 무어냐?”고 답하자 그는“부처는 화장하면 사리가 나오는데 이렇게 태워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데 무슨 진짜 부처냐 가짜지”했다고 한다.
부처마저도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불자들의 철저한 무집착의 수행은 바로 사물의 실상, 자신의 실상인 진여을 깨닫기 위함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면 실지로 달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존재의 실상 즉 공을 깨닫는데 손가락의 역할을 하신 분이다. 이렇게 존재의 실상인 진여을 깨닫게 되면 이제 더 이상 부처와 중생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나임음 깨닫게 된다. 열반은 생사를 떠나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사의 세계가 바로 열반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생사 즉 열반인 것이다. 이와 같이 깨달음의 세계, 공의 세계는 대립의 세계, 분별의 세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대립이 사라진 무분별의 세계인 것이다.

4. 공과 하느님
불교에서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것은 그들의 공관에 의해서 볼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성이 없고 무아인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자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절대자까지 상정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존재자에 실체성을 인정하므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나와 너라는 이원론적 사고 체계를 갖게 된 것이다. 불교가 깨닫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하는 것을 말한다. 즉 분별하는 지식인 분별지는 불교에서는 안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분별한다는 것은 각각의 자성을 인정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존재의 무자성성을 말한 불교의 공은 어떤 것도 예외일 수 없다. 절대자 하느님까지도 그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비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햐 하는가? 먼저 그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실체(Substance)인가?
공관은 우리들이 신앙하는 하느님에 대한 정면도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흔히들 불교는 공을 깨닫는 覺의 종교이고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은총을 믿는 은총의 종교라고 보기도 하며, 불교는 자력신앙이고 그리스도교는 타력신앙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래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서로 상반되는 종교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양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가?
저는 그렇게만 보는 것은 양종교를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겉에서 그렇게 다르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공관을 깊이 이해하게 될 때 그리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깨달아 갈 때 양종교는 만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불교인들이 비판하듯이 그런 실체적 존재자가 아니다. 즉 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지닌 존재의 허무성을 지니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그런 분이 아니다. 불교인들은 신을 인도의 데바신 정도로 생각한다. 즉 아직 윤회를 계속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하게끔 하는 존재의 근원, 존재자를 떠받쳐주는 실재 그 자체이시다. 그래서 폴틸리히는 하느님은 궁극적 실재라고 했고 하이데거는 하느님은 존재자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말하길 “ 만일 하느님이 계시다면 하느님은 존재자일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하느님을 대상화시키고 존재자로서 생각한다면 그런 신관은 여지없이 공관 앞에서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공에서 말하듯이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실지로 계속 변화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재자와는 구별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 존재자를 떠받혀주는 궁극적 실재, 철학에서의 제1원리, 피조물과는 구분되는 창조주, 절대자라는 개념도 공은 여지없이 공격한다.
하느님은 존재자체이다라고 할 때 흔히 인용하는 성서귀절이 출애굽기 3,14의 모세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나다”고 하신 그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틀을 구성하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다시 숙고해야 한다. 즉 히브리어 hayah는 헬레니즘적 사고에서는 ‘존재한다’는 뜻이지만 히브리어적 사고방식에서는 ‘되다, 활동하다, 일어나다’라는 의미이다. 즉 헬레니즘적 사고에 의하면 하느님은 절대존재이지만, 히브리어적 사고에서는 하느님은 ‘존재와 창조를 위해 일하는 역동적인 힘’이다. 즉 존재와 생성의 역동적인 통일‘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에 장벽을 튼 신학자 다끼자와 가쓰미라는 분이 계신데 그분은 바로 이러한 불교에서의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서 독창적인 임마누엘 신학을 펼쳤다. 그는 인간이 깨닫든지 꺠닫지 못하든지 간에 하느님은 임마누엘 원사실 그 자체로 모든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방식의 기반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초월성보다 내재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 존재의 기반은 우리의 존재 밖에 있는 어떤 대상적인 존재나 절대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나를 나이게끔 만들어 주는 바로 실재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엑카르트의 영성은 거기까지 갔다. “내가 그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그 눈은 그 안에서 하느님이 나를 보는 눈과 동일하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아무런 간격이 없는 일이니 나는 오로지 하느님이지 않으면 안되며 하느님은 바로 나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그의 체험의 표현이 급기야 그의 파문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공사상과 가장 가까운 그리스도교 영성을 찾으라면 그건 바로 엑카르트의 영성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하느님을 없이 계신 분이라고 하셨다. 인간은 있으면서 없는 존재인데 반해 하느님은 없으면서 있으신 분이라고 표현하셨다. 동서양의 사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드신 분이셨기에 불교의 공사상도 깊이 아신 분이셨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을 공이라고도 표현하셨다. 
이와 같이 우린 불교의 공관을 통해 우리의 신관을 다시 한번 재점검해 보고 숙고하게 된다. 대상화된 하느님이 아니라 내가 나이게끔 하는 나의 존재 자체이신 분,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하게끔 존재를 떠받혀주는 바로 그 실재 자체이신 분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관은 우리 신앙의 신관을 정화시켜주며 사물의 존재의 실상의 바로 보도록 우리를 재촉해 준다.
공관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이거나 텅비어있다는 허무의 의미가 아님을 우리는 앞서 살펴보았다. 공관은 존재자의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하여 있는 그대로의 진여의 모습으로 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따라서 불교를 허무주의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오해이다. 오히려 허무주의를 극복한 종교이며 현대과학적 사고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보편종교이다. 이제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할 때가 왔다. 사물의 실상을 공으로 파악한 불교와 존재의 실상을 하느님으로 파악한 그리스도교의 실재는 다른 것이냐?과연 양종교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냐?  공관과 신관이 서로를 배우고 서로 안에 대화를 할 수 있는 여지는 없는 것이냐? 양종교가 실재에 대한 표현양식이 다를 뿐 실재 그 자체는 같은 것이 아니냐? 불교는 극단적인 부정의 논리로 실재를 설명하려 했고 그리스도교는 절대적인 긍정의 논리로 실재를 설명하려 한 것은 아니냐? 하는 것이다.
종교 안에 모든 표현 양식은 그 시대와 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 그래서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우리의 신앙을 담는 표현양식도 바뀌어야 한다. 옛날 유대문화의 그릇에 담긴 그 표현양식을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대로 답습한다면 이는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며 모든 것이 달라진 오늘날에 우리의 신앙은 제대로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전통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의 진리추구는 전통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전통은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의 근거이며 뿌리이다. 다만 우리의 신앙의 내용을 담는 그릇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신앙전통은 오늘날의 시대적 지평과 문화적 지평과 끊임없이 만나 그 안에서 새롭게 우리의 신앙을 해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가다머의 해석학에서 말하는 “지평의 융합”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전통의 지평과 오늘의 지평, 과거와 현대의 지평, 우리신앙이 발생한 문화의 표현양식과 현재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문화의 지평간의 끊임없는 만남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새롭게 표현되어져야 한다.
우리의 신앙을 오늘의 시대에 맞게, 우리의 문화에 맞도록 표현해내는 일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토착화이다. 단순히 타종교를 자기 종교와 비교하는 차원이 아니라 신앙적 차원에서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린 한국문화 속에 뿌리내린 종교의 실상을 우리의 신앙 안에서 어떻게 소화해야 할 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시대적 요청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보살)
지금까지 공과 하느님 비교에서는 신관의 차원에서의 비교였다. 이를 그리스도론적으로 비교한다면 예수와 보살을 비교할 수 있겠다. 붓다는 누구에게나 출가생활을 권장했지만 그는 항시 재가신자들을 접하며 살았고 기회있는데로 그들에게도 설법을 베풀어주고 그들도 궁극적인 깨달음이 얼릴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파불교(붓다 사후에 그의 사상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파가 나누어짐) 시대에 이르러선 재가자들의 종교행위는 주로 물질적 보시를 통해 내세를 위한 공덕을 쌓는 일이나  붓다의 유골을 모신 탑을 참배하며 공양하는일에 국한되고 출가승려들은 사원에서 자신들만의 종교적 추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출가승이 추구하는 이상을 모든 속세의 번뇌를 끊어버린 아라한이 되어 생사의 고해를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는 일이었기에 그들의 삶에 있어 재가자들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란 거의 없었다. 대승불교는 이런 상황에 대한 불교내부로부터의 반성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대승불교운동의 주도자들은 무수한 중생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만의 해탈에 힘쓰는 아라한의 이상을 비판했다. 그들의 눈에는 아라한은 붓다가 보인 중생에 대한 자비와는 대조적인 삶을 사는 존재로 보였다. 따라서 대승운동의 주도자들은 아라한의 이상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보살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들고 나왔다.
보살이란 보리살타(菩提薩陀)의 약어로서 깨달음(菩提 Bodhi)를 추구하는 존재(薩陀) 혹은 꺠달음을 이룬 존재라는 뜻이다. 보살은 본래 깨달음을 얻기 전의 붓다를 가리키는 말로서 소승경전에서는 붓다 스스로가 성불 전의 자신을 보살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승에서 붓다가 보살로서 행한 자비행을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내세우게 된 것이다.
보살은 자신들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들만의 해탈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건져 함께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은 제도할 중생이 단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열반에 들기를 포기하고 생사의 탁류 속에 남아 중생과 고통을 같이하고 그들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한다.
보살이 지닌 자비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不二智의 깨달음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즉 生死와 涅槃, 차안과 피안, 성과 속이 둘이 아님을 아는 지혜이다. 모든 분별과 집착을 떠난 무분별의 지혜이다.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는 한 보살은 생사를 피하고 열반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보살은 생사가 생사가 아님을 알고 생사의 세계에 뛰어들며 번뇌가 번뇌가 아님을 알고 번뇌를 안고 산다. 이러한 무분별지는 바로 공의 진리를 말한다. 일체 상이 공임을 깨닫는 지혜 거기서부터 중생의 현실세계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아라한과 같이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불를 구별하여 집착하는 한 보살은 중생을 멀리하고 현실세계로부터 도피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보살은 不二智에 근거하여 두려움없이 중생계에 투신할 수 있다.
이러한 보살의 모습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랑,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 죄인과 의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완벽한사랑을 깨달은 예수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보살이 지닌 자비 바로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예수의 사랑도 그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를 예수이게끔 하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자각과 보살을 보살이게끔 해 주는 공의 자각은 통하는 것이 아닌가?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음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마르 8,35)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체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자는 관계를 떠나 자기 안에 머뭄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향한 관계와 자기 이탈을 통해서만 자기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 말은 A라는 하나의 개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B,C,D 등의 타자를 필요로 하며 B C D도 A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 부정을 통한 긍정, 죽음을 통한 생명 이것이 바로 사랑이며 모든 존재의 실상인 공과 통하는 것이다.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바는 바로 본래의 인간을 되찾고자함에 있다. 그리고 본연의 자기는 인간네에 있는 존재근거인 실재를 자각함으로써 드러난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즉 지혜는 궁극적으로 붓다의 자비와 만날 때 완성된다. 그리스도교 역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깊은 자각을 한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자각하며 살아갈 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나오는 말

타종교를 말할 때 나의 신앙을 저만치에 두고 타신앙을 접할 수는 없다. 그것을 종교학에선 판단중지라고 하는데 궁극적으로 타종교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판단중지를 통해선 불가능하다. 나의 신앙과 타신앙의 지평이 만나 그 안에서 새로운 지평이 형성된다. 변증법적 방법을 통해서 끊임없이 변화되어간다.
하느님의 다양한 구원의 방법을 배움으로써 나의 신앙의 지평이 확장된다. 즉 불교의 공관을 배움으로써 나의 신관이 변화된다.
산이 산이 아니다는 것을 깨달은 후의 ‘산은 산이다’라고 했을 때 그 깨달음 이전의 고백과 다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부정의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은 비로소 진정한 하느님이 될 수 있다. 공관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내재성을 일깨워 준다. 그래서 하느님은 임마누엘이시다. 우리와 늘 함께 계신 분으로 고백하게 된다. 임마누엘은 하느님의 실재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모든 존재를 떠받혀주는 실재, 모든 존재를 존재이게끔 하는 바로 그 실재가 하느님이다. 그 하느님은 존재 밖에 계신 분이 아니며 대상으로 실체로 계신 분이 아니고 존재 그 자체 나의 眞我이시다.
불교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공박은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은 바로 대상으로써의 하느님이다. 내가 그런 신관을 갖고 있다면 공관을 만날 때 여지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결국 공이라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우상숭배를 거부하도록 하는 사상이 아닌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공관을 통해 신관을 정화할 수 있었다면 불자들도 자신의 공관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은가? 불교인에게 하느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셨을까?  하느님은 공의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 아닌가? 하느님이 공으로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수는 없는가? 공의 진리를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냐? 공을 통해서 덧없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도록 하신 것이 아니냐? 무상하고 덧없는 유한성, 우연성을 깊이자각하는 가운데에서 그 현존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사물들 간에 상호 의존성과 개방성 속에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하느님의 현존을 간접적으로 감지한 것이 아닌가. 그들이 공이나 열반으로 표현했지만 말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이란 개념은 유대인에게서 나온 것일 뿐이다.
공을 통해서 불교인들은 세상에 대한 초월을 배운 것이 아닌가?
하느님 체험은 불교의 공사상이 말해주지 않는 여러가지 실재의 성격을 드러내주고 있다. 인격성의 문제, 인간의 자율성, 도덕적 책임성의 문제라든지 역사의 의미문제라든지를 하느님과 연결시켜 깊이 생각해 왔다. 그런데 공사상에서 어떻게 이런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 태초의 존재의 신비에 대해서 불교에선 말하고 있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서 불자들은 그리스도교에서 배울 것이 있지 않은가?

참고문헌
<<종교신학연구>> 제6집1993, 제7집 1994, 분도출판사.
스즈끼 저, 강영계 역, <<엑카르트와 선>> 1991 주류 일념.
한스 발덴펠스, 김승철 역, <<불교의 공과 하느님>> 1993, 대원정사.
히사마쯔 신이찌, 정병조 역, <<무신론과 유신론>> 1994, 대원정사.
아베 마사오, 변선환 역, <<선과 현대신학>> 1996, 대원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