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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그리스도교 관점에서의 몸.마음,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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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9 종교대화강좌
불교와 그리스도교 관점에서의 몸.마음.명상
최 현 민
먼저 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몸, 잘못이해하고 있는 마음에 대한 왜곡된 몸 이해 왜곡된 마음이해에 대한 올바른 시각의 교정이 먼저 필요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여기 서양철학의 몸과 마음 이해라고 표현을 했는데요, 여기 대부분이 카톨릭 신앙을 갖고 계시죠? 지금 카톨릭 신앙이 아닌 분들(기독교입니다) 네 같은 저깁니다. 저는 가톨릭 개신교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리스도교라고 표현하는데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기반이 되는 것은 히랍철학이에요. 히랍철학과 아우러져서 그리스도교 신학이 형성이 되었죠. 그 밑바닥에 히랍철학적인 이해가 깔려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히랍철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 사유가 토대가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서양철학 기본만 알아도 플라톤 이야기가 나오니까요. 플라톤은 이데아 사상을 가지고 있죠.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혼이고 물질이나 육체라는 것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한 마음과 영혼이 중심이 된, 바로 그것이 이데아를 이루고 있는. 그래서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에 불과하는. 육체를 무시하는 사유가 플라톤 사유 안에 있는데 바로 그것이 히랍 철학의 서구 철학의 또 그리고 그리스도 철학의 기본이 되어있고 플라톤적 사고가 서양의 데카르트에 와서 더 강화되면서 영육이원론적인, 그리고 몸은 기계로 생각하는 영육이원론이 뿌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신학의 뿌리 안에 영육이원론적인 사고가 자리잡고 있는 것은 히랍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몸에 대한 이해. 마음과 영혼이 중심되는 것이고 육체와 몸은 마음에 비해서 가치가 절하되는 이해방법이 얼마나 우리의 삶 안에 균형을 깨트리는 이해인지 알아야 합니다. 사실은 제가 생태에 대한 관심을 10여년 동안 가졌는데 생태에 대한 파괴의 근원지는 영육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왔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데카르트가 몸을 기계, 물체로 이해했던 근저 안에서 자연도 그렇게 이해했던 것이죠. 자연도 기계고 물체고 인간이 이용하는 자원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한 사고방식이 자연을 마구쓰는 결과를 가져왔고 삶의 자리안에서 자연을 파괴시켜왔고 그것뿐만 아니라 이웃종교, 제가 늘 저의 관심사는 불교와 그리스도교 안의 그 언저리에 있는데 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면 그런 몸이라는 것이 마음과 분리되어있는 몸이 아니라 내 몸의 바운더리가 넓어지는 거에요. 이 몸만, 이 육체만 몸이 아니라 너까지 포함하는 몸의 개념이 넓어지는 거에요. 전체, 자연까지 포함한 몸에 대한 이해. 그러면 이웃종교인도 몸 속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몸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게 될 때 이웃종교에 대한 관심, 사회에 대한 관심, 정의에 대한 관심 우리의 관심도가 넓어지게 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거에요. 아 몸이라는 것이 나의 몸이 너의 몸과 불과분의 관계를 갖고 있구나, 자연과 나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구나 라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되면 자연을 대하는 태도, 남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마음도 새롭게 이해하는 측면이 생기게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냐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큰 물음을 많은 철학하는 사람들이 그 질문을 던져왔고 지금까지도 그 질문을 잡고 사유를 하고 있죠. 그렇지만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뾰족하게 밝혀지지 않습니다. 저는 그걸 당연하게 봅니다. 인간의 본질을 사유 안에서 생각해서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왜냐면 인간의 본질은 삶의 자리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부딪히는 현장 안에서 인간이 누구인지가 밝혀지는 것이지 사유를 통해서 인간의 본질이 밝혀지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사람의 진가가 어디에서 드러나는 것이냐 할 때 고통의 현장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의 진가가 드러난다고 합니다. 아비규환의 상태에서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진가가 드러난다고 합니다. 자기만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꼴베신부처럼 자기 목숨을 내 던지는 사람이 있는 것이죠. 바로 그 자리에서 그가 누구인지가 밝혀지는 겁니다. 그가 누구인지, 우리가 누구이고 내가 누구인지가 드러나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입니다. 그것은 나라는 본질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몸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마음과 몸을 따로 분리시켜서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람들을 기억할 때 무엇을 기억합니까? 우리는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줬던 행동, 남에게 해줬던 행동, 그 사람의 행동을 기억해요. 그 사람이 했던 행위들, 말까지를 포함해서 그러지요. 여러분이 신앙을 갖고 계시면은 삶의 자리에 예수가 계신다면 예수라는 한 인물을 떠올릴 때 무엇을 떠올리는가. 그의 가르침. 우리 안의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것은 그분이 했던 삶의 행적들이에요. 그것이 우리를 건드리죠. 그래서 나를 교회 안으로 어떤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죠. 그런 부분에서 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현대 의학의 방향이 바뀌고 있어요. 옛날에는 생리현상 육체 이 몸뚱아리에서 생명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관심이 있었다면 현대 의학은 몸 자체의 연구에서 몸과 마음의 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늘어난 것을 볼 수 있어요. 플라시보라는 효과라는 말을 썼는데요 아주 재미있어요. 그게 뭐냐면 어떤 환자에게 어떤 약을 주는 것이죠. 어떤 할머니가 양로원에서 조금만 어떻게 하면 약달라고 오고 그래서 수녀님 한분이 할머니가 자꾸 약을 찾으시니까 약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되니까 머리가 아프다고 했지만 율무가루를 접어서 몇 개 드리고, 그러셨단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율무를 먹고 머리 아픈게 나았다는 거에요. 이것이 플라시보 효과하고 연결되는 부분인데, 가짜 약을 주면서 진짜 약이라고 속이고 주는데 놀랍게도 약효과가 생긴다는 것이죠. 이게 뭘 말하는 것인가. 사람이 마음먹은 데로 신체가 작동한다는 겁니다. 몸이 어떤 영향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 약을 먹고 낫는다는 생각이 몸에 변화를 일으켜서 결국은 약효과를 낸다는 것이 플라시보 효과에요. 옛날에 어머니가 아이 배아프면 쓰다듬어주면 정말 낫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마음을 건드렸을 때 효과를 본다는 그런 측면인 것 같습니다. 플라시보 효과라는 것이 19세기에는 의학적으로 별로 관심도 없었고 이걸 단순히 속임수라고 했는데 이것이 현대에 와서 점차 플라시보 효과에 대한 실체가 인정되면서 그 메커니즘을 밝히려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연구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 때 마음의 변화가 몸에 영향을 미치고 상호간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또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아드레날린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엔돌핀이 돈다고 하고 이런 것들이 몸과 마음의 역동적인 관계를 잘 보여주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노시보효과라는게 있는데요, 같은 맥락의 예입니다. 1950년 스코틀랜드 항구에서 짐을 다 내린 다음에 다시 포르투칼로 돌아가려고 하는 포도주 운반선이 있었는데요, 냉동실에 선원이 갇혔다고 해요. 다른 사람들은 다 가고 배는 떠났어요. 이 사람은 냉동실에 갇혔죠, 물론 짐은 다 바깥으로 뺐고 아무리 두들겨도 안되는거에요. 아 내가 이 냉동실에서 죽겠구나 이 생각을 했어요. 배가 포루투갈로 도착해서 냉동실 문을 열었는데 이 사람이 죽었어요. 근데 놀라운 것은 그 냉동실의 온도가 상온이었다는 사실, 19도였다는 사실입니다. 근데 이사람이 죽었어요. 그 사람의 쓴 글을 발견했는데 이렇게 썼어요. ‘몸이 점점 얼어붙어가고 있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안의 온도는 19도였고 먹을 만한 음식물도 얼마만큼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왜 죽었을까요? 내가 이 냉동실에서 죽을 것이란 생각.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는 곧 죽을거야 죽을거야 하다가 죽은겁니다. 처음에 들어갔을때는 영하의 온도였겠지만 짐을 다 꺼냈기 때문에 냉동실의 스위치는 내려가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처음의 온도만 생각했던 것이죠. 사실은 그 자리에서 굶어서 죽은 것입니다. 마음이 얼마만큼 몸에 영향을 주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1세기 들어와서 몸에 대한 연구가 많이 되고 있어요. 철학 안에서도 몸의 철학이라는 책도 나와있고요.
그리스도교 안에서 몸과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스도교가 지금까지 마음이 중심이 되는 그러한 영성이었다. 그런데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몸의 신학이라는 것을 책으로도 내셨지만 많은 강론을 하신걸 기억하실 겁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도 요한 바오로 2세의 몸의 신학에 대한 연구와 번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철학공부를 하셨어요. 맑스 쉘러를 가지고 박사논문을 쓰셨는데 맑스 쉘러가 인격에 대해 어떻게 바라봤냐면 자아나 인격을 실체로 바라보는 것을 비판하고, 인격을 세계 개방성, 세계를 향해서 자기 개방을 하는 것이 인격이라는 새로운 사유를 하기 시작합니다. 요한 바오호 2세는 맑스 쉘러를 연구하면서 새로운 몸에 대한 신학을 새롭게 하는 동기를 갖게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맑스 쉘러의 인격 개념, 세계 개방성이라는 인격 개념 안에서 맑스 쉘러가 잡지 못했던 사회적 관계면에 대한 부분을 비판하게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을 이해할 때 인간은 삼위일체적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이해해야한다는 깊은 자각을 하게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영향을 준 것은 맑스 쉘러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성요한에게도 영향도 받게 됩니다. 십자간의 성요한의 영향을 받으면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상호 자기증여의 순환관계로 풀이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안에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주는게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께 주는, 기브앤 테이크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죠. 그 안에서 인간을 규명하려는 관계적 인간관. 몸의 신학을 보게 되면은 남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풀어내고 있는데 더 깊은 안에서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의 깊은 자각이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기회가 되시면 요한 바오로 2세의 몸의 신학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보시게 되면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시각이 생길 수 있겠다 싶어요.
요한 바오로 2세의 몸의 신학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것은 그리스도교의 명성의 핵심은 예수의 성육신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고 성탄을 기다리고 있는데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신비죠. 육을 취하셨다는 겁니다. 말씀이 육을 취하여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이것 이상 그리스도교의 신비는 없다.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몸을 취했다는 사실 이것이 요한 복음 1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이시죠. 바로 하느님이 택하신 방법입니다. 하느님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택하신 방법이 육을 취하는 겁니다. 이 말씀은 성육신이라는 성육신에서 육신은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살로 표현하죠. 사륵스라고 해서 살로 표현하는데 바로 이 육체. 말씀이 육체 속으로 들어온 것이 아예 살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몸을 잠시 빌려 취한게 아니라 완전히 인간이 된겁니다. 플라톤적 사유와는 완전히 다른 겁니다. 플라톤의 영혼이 육체에 들어왔다는 거랑 다릅니다. 들어온게 아니라 된겁니다. 몸이 된것이죠. 플라톤이 생각하는 영육 이원론적 사고와 그리스도교의 기본 사고는 다릅니다. 이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여기서 출발하면서 예수님의 삶 그 자체가 관계성 안에 있고, 최후의 만찬을 보게 되면 더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는데요,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해서 내어준 내 피. 카톨릭에서는 매 미사때마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거행하는데요, 그 자체로 신비죠. 빵이 살이 되고 포도주가 피가 되는 그 최후의 만찬과 성체성사의 신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증여에요. 예수님의 자기증여. 자기증여를 통해서 성사의 신비를 통해서 예수님의 인격이 자기증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최후의 만찬 뿐만 아니라 죽음과 부활의 신비도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을 당하시면서 모든게 끝이나는 순간처럼 보였던게 부활을 통해. 죽음과 부활의 신비이고 예수의 몸이 부활을 통해서 시공을 넘나드는 몸으로 변화되시고 지금 여기서 현존하실 수 있는 몸으로 바뀌셨다는 것이죠.
제가 여러분들에게 건드리고 싶은 것은 몸에 대한 이해의 새로운 시발을 말씀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몸과는 거리가 있고 마음에 집중되는, 그래서 보통 마음기도라고 생각을 하시죠.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마음기도 이전에 몸기도를 해야한다는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기도 명상에 대한 신경과학적 접근이다. 신경과학자들이 네가지 F라고 부르는 메커니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인데요 feeding 먹이, fighting 투쟁, fleeing 도망, fuxxing 번식. 이 네가지 F 본능이죠. 먹고 싶고 생존하려는 투쟁, 두려움, 성욕 이 본능적인 욕구는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생존의 본능 식욕 색욕 탐욕이라고 하는. 이것이 1950년대 미국의 신경과학자 폴 맥린이라는 사람이 인간의 뇌가 진화 발달의 단계에서 어떻게 진화됐는가 연구를 했는데요. (칠판에 그리며) 이것이 대뇌입니다. 이것이 시상하부이고 이것이 척수입니다. 시상하부를 둘러싸고 대뇌피질이 형성되는데 피질이 세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요. 제일 안쪽에 있는 피질이 구피질이고요, 두 번째 피질이 고피질이고 바깥에 있는 피질이 신피질이라고 합니다. 진화적으로 고피질이 가장 오래된 것이고 고피질->구피질->신피질 순서입니다. 구피질이 파충류의 뇝니다. 그것보다 조금더 진화된 것이 고피질, 포유류의 뇌, 신피질이 인간의 뇌라고 합니다.
파충류들은 생존의 본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식욕 색욕 탐욕. 자기의 생존, 그런데 포유류로 넘어가면 자기 새끼를 낳고 자기 새끼를 길러야 하잖아요. 그럼 모성적인 본능이 생기는 거에요. 그러니까 모성적인 본능이 생기면서 두 번째 대뇌 변형계라고 나와있는 부분인데 여기서는 감정, 정서 작용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새끼를 돌봐야겠다는 감정적인 부분들, 모성적인 부분들이 포유류의 뇌에서 발달하는 것이죠. 인간의 고차원적인 신피질에 가서는 사고를 하는 이성의 뇌다라고 합니다. 추상적인 사유가 가능한 것이고 명상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은 이 신피질의 발달 대문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파워가 있는 것은 파충류의 뇌에요. 우리가 경험하잖아요. 다이어트를 해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언제 자기가 다이어트를 실패하는가 볼 때 초콜릿 케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옆에 있을 때 먹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지만 손은 가있고 입에 가있어요. 이건 생각이야 그런데 가서 손이 벌써 입에 들어가는 겁니다. 참기가 어려운거에요. 컴퓨터 게임에 들어가서 해보신 경험이 있으신분. 그만해야 되는데 안 되는 것이죠. 무엇이 작동했다? 파충류의 뇌. 파충류의 뇌를 사용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생존력이 강해지는 것이죠. 명상하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시 자기의 삶의 자리가 흐트러져있는 날을 발견하는 날이 있을거에요. 그만큼 이 명상을 통해서 무언가 나의 어떤 인간적인 부분들이 강화되려면 얼마만큼 노력을 필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파충류의 뇌가 강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이 명상이라는 것은 본능적인 뇌인 파충류의 뇌의 작동을 적게하고 인간 뇌의 작동을 원활하게 하는 것도 명상의 하나의 부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거는 어떤 방법하나가지고 되는게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 동원해서 매일 할 수 있는 만큼 꾸준히 해야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 방법밖엔 없어요. 우리의 숙제죠. 그래서 마음기도 가지고 안 되는 것이죠. 성당에 가서 하루에 30분 앉아있다고 되지 않아요. 그렇다면 어떻게 매일 기도할수있을까. 이것이 관건이 아니겠어요?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대부분이 마음기도에요. 묵상한다 향신기도 한다 엑시오 디비아 많은 방법들이 나열되었지만 대부분이 마음기도에요. 물론 그것의 가치를 절하하는 얘기를 하는게 아닙니다. 한계가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마음기도 갖고는 안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그걸 넘어서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카톨릭은 아쉽게도 몸의 기도가 발전되어 있지 않아요. 마음기도는 수도 없이 많죠. 몸의 기도가 없죠. 다른 종교 전통으로부터 몸기도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죠.
가깝게는 동방종교에 그 기도가 있어요. 아마 여러분들도 들어보셨을 거에요. 러시아의 순례자의 기도인 것이죠. 그 책 보셨으면 러시아의 한 이름없는 순례자가 데사로니카 전서에 나오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어떻게 해야 끊임없이 기도하는게 가능한건지 너무나 궁금한 거에요. 너무나 열망했었어요. 그래서 길을 떠났죠. 자기가 갖고 있는 고민거리를 수도원도 가보고 갈 수 있는 곳은 다 가서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성경에 나와있는데 어떻게 하면 쉼없는 기도가 가능한지 그 방법을 물어보는 것이죠. 마침내 어느 한 스승을 만났을 때 그가 이렇게 해보라고 알려준 거에요. “주예수 그리스도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기도를 계속 해봐라. 하루에 천번. 그렇게 했어요. 이 사람이 천번을 하는 것이죠. 저는 묵주를 가지고 있으면 어디갈때 돌면서 이 기도를 하곤 하는데요 이게 어디에 가서 장소를 불문하고 할 수 있는 기도이지요. 성당에 갈 필요가 없어요. 물론 성당에 가서 해도 되지만, 누워서도 할 수 있어요. 행주좌와. 누워서도 앉아서도 돌아다니면서도 누구랑 이야기하면서도 다 할 수 있는게 이 기도라는 것이죠. 이것이 하루에 천 번 했고, 술을 늘려서 삼 천번 육 천번 만 이천번을 예수의 호칭기도를 했다고 해요. 러시아 전 지역을 순례하면서 이 기도를 드렸고 그러고 나서 놀랍게도 이 사람은 자신이 어떤 생각. 계속 기도하고 있으니까 잡생각이 안드는 것이죠. 자기의 의식세계로부터 자유로울수있었고 하느님의 현존을 아주 깊게 느끼게 된다 이런 고백을 하고있는 것이죠.
문제는 제가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앞으로 할텐데요 생각의 문제거든요.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묵상을 하면 경험하시지 않습니까. 사고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것인지. 재밌는 것은 동방의 예수기도가 놀랍게도 동방 정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종교안에 비슷한 명상 방법이 있다는 사실이에요. 공통되는게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기도. “예수그리스도 자비를 베푸소서”. 앉아서 할 때는 숨을 들이시면서 “예수그리스도” 숨을 내벹으면서 “자비를 베푸소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겁니다. 어떤 생각을 떨쳐버리려 하지 말고 그냥 반복하면 자연히 생각이 떠나게 되는 것이죠. 이 기도의 핵심은 계속 함으로써 내 사고 의식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고 그 자리에 하느님의 현존을 맛보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동방정교회 필로카리아라는 책에 아주 상세하게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는 단순히 짧은 단문이지만 바로 구약과 신약의 그리스도교의 모든 가르침이 종합되어 있는 기도문이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자체 이름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죠. 이름의 핵심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스어로는 엘래이젼인데 이것이 올리브유에서 유래됐다고 하는데요, 올리브유가 엘레이온이라고 합니다. 구약 신약에 올리브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노아의 홍수때 노아가 홍수가 끝났는지 비둘기 한 마리를 보냈을 때 비둘기가 가져오는 잎사귀 하나가 올리브 잎이었다. 구약시대에 사제나 왕을 도유할 때 올리브유로 도유를 하고 있죠. 또 신약의 착한 사마리아인을 낫게 해주는 것도 올리브유를 통해서이고, 오늘날 성사를 집행할 때 사제는 올리브유를 사용하고 있죠. 이 올리브유는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서 인간이 그분과 새롭게 관계를 회복하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그래서 이 기도문은 주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는 거에요. 내 마음자리 안에 흐트러진 끈을 다시 잇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예수기도와 유사한 다른 종교의 기도형태들을 보게 되면 가장 쉬운 것은 불교의 염불이에요. 나무아비타불이라고 하죠. 아비타부처님께 나무, 귀의한다는 뜻이에요. 이것이 정토정의 염불 수행방법입니다. 또 일본에 니치렌종이라고 있어요. 니치렌종은 법화경의 경전을 중심으로하는 종파인데요, 법화경이라는 이름을 반복해서 읊습니다. 법화경의 원래 이름이 묘법연화경이라고 하거든요 묘법 연화경이라는 경전의 이름을 반복해서 읊는 것이 법화창제란 것입니다. 나무가 아까 귀의한다는 의미니까 나무묘법연화경. 일본어로는 나무묘효란게쿄. 바로 이걸 반복해서 함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히 녹아있는 법화경과 일치되는 겁니다. 법화경의 내용을 몰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법화경에 대한 이름만 읊어도 부처님에게 귀의한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 오늘날 한국에도 창가학회가 많은 데요 여기에 해당됩니다. 또 티벳불교에도 옴마니반메홈을 반복해서 합니다. 그 말 안에는 만이라는 것은 보베, 구술이라는 뜻이 있다고 해요. 옴이라는 것은 처음으로 내뿜는 비밀의 표현이에요. 모든 것을 처음 시작하는 의미에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처음 내뿜는 말이 옴- 이에요. 반메홈은 연꽃을 의미하고요 마니가 보베고. 옴 연꽃속의 보석이요. 연꽃속에 부처님이 계신것같은 마음을 갖고 하나의 진원을 읊는 것입니다. 또 힌두교에 봐도 하레 크리쉬나라는 크리쉬나는 신의 이름이죠. 인도신의 대표적인 신이죠. 하레는 에너지에요. 크리쉬나 신의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크리쉬나 신의 이름을 반복합니다. 마치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반복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이슬람교에서도 라일라하 일랄라 무함마드 라술룰라라고 계속 반복해서 하는데 의미는 알라신은 유일하며 무함마드는 하느님의 사도다. 유일신의 신앙과 무함마드가 하느님의 사도라는 신앙고백문에 여기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핵심이죠. 유일신교와 무함마드에 대한 신심을 드러내는. 그래서 여러분들 보십시오. 이슬람 힌두교 불교 종강종교 모두 다 반복적인. 묵주기고도 비슷한거에 해당됩니다. 반복적인 것을 통해서 자기중심적인 자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게 되면 의식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되거든요, 우리가 자유로워지고 하느님의 현존과 하나 되는. 바로 이런 몸기도. 하나의 몸기도에 틀인데요 앞으로 이런 비슷한 류의 몸기도가 개발되고 우리 영성 안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도 깨달음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불성을 꿰뚫어보는 것이죠. 확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확 깨닫는다고 해서 우리 삶이 바뀌나요? 아닙니다. 왜? 우리 몸에 담겨있는 업이 있기 때문이에요. 카르마. 살면서 지은 선업과 악업이 몸에 붙어있어요. 그걸 불교에서는 습기(習氣)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고기집에 가잖아요. 숯불 고기 구어서 먹으면 어떻게 되요? 베요 옷에 베죠. 지하철에 타면 사람들이 알잖아요. 고기집에서 온 사람인지 아는 거에요. 그거와도 똑같아요. 우리 몸에 습기가 베는 거에요. 그래서 견성 한번 깨침으로는 안 되는 거에요.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에요. 사람들이 선불교에서 한번깨달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알고 있어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그런 일이 없습니다. 한번 깨침이 왔을때는 물론 큰 깨침이 왔을 수 도 있죠. 부처님이 오늘날같이 불교라는 세계 대종교의 창시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엄청난 깨침때문이 아니에요. 물론 그의 깨침은 엄청나지만 그걸로 끝났다면 그는 그냥 크게 깨달은 사람에 불과하고 끝나버릴거에요. 불교가 불교일 수 있는 것은 그가 35세에 깨닫고 나머지 40년을 자비행을 베푸셨어요.그것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죠. 사람들은 깨침 깨달음에 핵심을 가져요.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엑스타시. 하느님과 하나되는 활홀경을 경험하는 것에 핵심을 가져요. 물론 경험하면 좋겠죠.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이 그의 삶 안에 들어가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에요. 그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가 그의 행위가 어떻게 바뀌었는가 그게 중요하죠. 우리가 명상을 하는 이유, 기도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내 삶이 바뀌기 위한 것이죠. 기도하고 삶이 안바뀌었다 그사람은 백날 기도하나 소용없어요. 그리스도교의 교리 신앙의 핵심은 사랑이에요. 잊으면 안돼요 발뺌할 수가 없어요.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없어요. 10년 20년 밤샘기도를 하나 소용없어요. 하느님이 우리의 삶을 짓는 잣대는 너가 오늘 어떻게 살았느냐야. 오늘 사랑의 삶을 살았는지 물어보지 다른거 안물어보세요. 기도는 그 삶을 성실하게 충실하게 살기 위한 수단이에요. 그래서 기도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면 안돼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기도에 대한 생각들을 제가 왕창 깨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깨져야 되는거에요. 바로 몸의 이해가 중요한 것이죠. 몸. 습기. 어떻게 하면 내 몸 안에 담겨져 있는 습기로부터 내가 해방될 수 있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그게 관건인 것이죠. 내년엔 그 부분에 대해서 해볼려고 그래요.
질문) 습기가 자기 안에 여지까지 경험하면서 쌓아온 업이라고 보면 될까요.?
업은 행위를 말하는 것이죠. 업을 지었다는 것은 선업을 지을 수도 있고 악업을 지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드러나는 행위. 살아온 흔적.
호흡기도도 마찬가지에요. 호흡을 들이쉬면서 내쉬면서의 반복하는 기도입니다. 숨을 들이쉴 때 예수. 내쉴 때 나. 예수 나를 반복하셔도 되고 예수 예수를 반복하셔도 되고 예수 자비를 반복하셔도 되고. 단어가 아주 단순할수록 좋습니다. 너무 길게 잡는것보다 제가 좋아하는 기도 문구를 정하셔서 숨을 들여마쉴 때 예수 내쉴 때 자비, 예수 자비, 예수 나. 이렇게 반복해서 하는 기도방법입니다. 쉽지 않아요 해보시면 아시겠지만. 기도가 단순할수록 쉽지 않습니다. 사고를 쓰는 것이 훨씬 쉬워요. 사고하지 않는 것이 훨신 어렵거든요. 사고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기도방법. 제가 호흡기도 방법을 여기에 써놨는데요, 그 다음에 에카르트 얘기 조금 더 하고 끝내겠습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하느님 아들에 대한 탄생 얘기를 하고있어요. 제가 추천해드리고 싶은 책은 길희성 교수님이 쓰셨던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이라는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 마이스터 엑카르트에 대한 핵심을 다루고 있어요.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마리아와 마르타에 대한 비유를 독특하게 해석을 하고 있어요. 보통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마리아는 관상쪽으로 마르타는 활동가로서 다루고 활동보단 관상이 조금 더 높은. 그래서 마르타를 꾸짖는 해석이 보편적인 것이죠. 엑카르트는 완전히 뒤집어서 해석을 합니다. 그것은 마리아는 하느님 계속 머무르고 싶어하는 것에 반해서 마르타는 세상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영성을 갖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돌파하는 사랑의 고삐를 삶의 자리 안에서 바삐 움직이는 것은 관상을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을 떠나는 것이에요. 영성이 한걸음 더 나아간. 사랑의 고삐를 매는 것이야 말로 육과 싸우는것보다 수천배나 더 낫다. 사랑의 고삐를 멘다고 해요. 사랑으로써 그대는 육을 빨리 극복할 수 있다. 육을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나왔어요. 사랑하라. 모르면 사랑하면 된다. 사랑의 힘이 육을 극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가르침이에요. 이게 바로 마이스터 엑카트르가 말하는 돌파에요.
그래서 마이스터 엑카트르 영성의 세가지 단계가 있어요. 초탈부터 돌파를 통해서 탄생. 초탈은 자기 자신을 비우는 거에요. 자기자신을 비워내는. 어떻게 보면 관상기도를 통해서 초탈의 경지를 경험할 수 있겠죠. 돌파를 하게 되면 이것을 초탈을 뛰어 넘어야 돼요. 하느님을 여읨으로써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랑의 힘이 작동해요. 이 사랑을 통해서 아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해서 낫나? 아뇨 내가 하느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우리는 벌써 하느님의 아들인것이죠. 하느님의 모상, 이것에 대한 회복이에요. 엑카르트는 이러한 초탈과 돌파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회복. 태초에 우리가 태어날 때 갖고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욕구들로 인해서 감추어져 있던 부분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엑카르트는 아들 탄생까지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엑카르트의 영성에 비춘다면 우리가 다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나기 위함이죠.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기도의 정점이면 정점이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고 하느님의 아들로써 태어나는 것은 아들로서 살 때 가능한것이죠. 아들로서 사는 것은 사랑을 사는 것이다.
불교.
불교를 이해하려면 불교의 기본을 알아야 명상에 들어갈 수 있겠죠. 불교가 존재의 실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불교는 몸을 네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지수화풍입니다. 지는 땅 지니까 뼈가 지에 해당되는 것이고, 수는 우리 몸의 70%이죠, 화는 따뜻하죠 36.5도, 풍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공기. 그러면서 사대로 구성되어있으면서 사대 오온이라고 말합니다. 오온은 다섯 덩어리라고 해요. 색수상행식이에요. 사대라고 하는게 색에 해당하는 것이구요 수상행식이 마음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수라는 것은 느낌이에요. 예를 들어서 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꽃에 대한 각자의 느낌이 오지요. 아 참 예쁘구나 하는 느낌이에요. 상이라는 것은 어떤 생각이죠. 여러분들이 아까 봤던 꽃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상에 해당하는 것이고. 행은 의지작용이에요. 생각하는 꽃을 꺾어서 성당에 제대 앞에 꽂아야지 하는 의지작용. 식은 판단이에요. 식이 제일 중요하죠. 판단하고 분별하고.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식이 만들어 놓은 것이에요.
이 식에는 육식, 칠식, 팔식이 있습니다. 육식이 의식에 해당하는 것이고 칠식이 자아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밑바닥에 있는 종자식이 있어요. 잠재의식이죠 보통 무의식이라고 하는게 팔식입니다. 사실 불교는 2600년전에 이 이야기를 다 말했어요. 의식 무의식이라고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이 불교에서는 놀라운 마음에 대한 연구가 2600년전에 다 돼있습니다. 문제는 칠식과 팔식이죠. 어떤 상황을 만날 때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이죠. 수상행식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상황에 도달 어떤 것을 봤을때 어떤 사람들은 덤덤하게 보는데 어떤 사람들은 분노가 치밀어 오는 경우가 있어요. 왜 이 차이가 나는가. 바로 내 마음자리에 있는 자아의식과 종자의식을 건드렸기 때문에 그것들이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명상은 이것을 알아차리는데 있어요. 아 내가 이것 때문에 그렇구나를 알아차리는 것. 불교의 가장 기본되는 명상은 사티라고 합니다. 알아차리는 것. 무엇을 알아차리는가 존재의 실상을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불교는 존재의 실상을 무라고 얘기하는데 무상이라고 얘기합니다. 상하지 않다는 거에요. 영원한 것은 없다. 無常 상하는 것은 없다는 거에요. 저는 지금 이 순간 변해있죠 1초전의 저와 지금은 다릅니다. 육안으로 같게 보이지만 변해있어요. 이것도 변해있어요. 이 조건들안에서 이것은 변화되어있어요. 중력과 보이지 않은 공기와 여러것들에 의해서 변해있습니다.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주 한계죠. 바로 이것이 불교가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무상하다는 것이죠. 또한 무상하기 때문에 무아에요. 아는 없다. 어 나 여기있는데? 아니에요 나는 변해있는 거에요. 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했던 행동들이 흔적이 남아서 계속 나의 정체성 비슷한 것을 엮어갈 뿐이죠. 불교는 존재의 실상을 무상과 무아로 이해합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할때 이 밑바닥에는 무상과 무아라는 불교의 존재의 실상엔 연기라는 부처님의 깨침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여기 교장선생님? 교장선생님을 소개해주실수있으세요? (저는 전북지역에서 왔고요 여고 책임자로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제가 선생님을 본인을 소개하라고 했는데 간단하게 했지만 전북이라는 지역을 얘기했어요 당신이 소속돼있는 공간 여고를 소개했어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모두가 다 나를 소개하라고 하면 나를 꼬집어서 소개하는 것이 나의 관계의 끈을 갖고 설명해요. 몇남 몇녀의 가족을 얘기하죠. 고향이 어디고. 나를 얘기하는데 나를 끄집어서 얘기하지 못하고 바운더리를 갖고 얘기해요. 나라는 것은 바로 관계의 끈안에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자연스럽게 저 사람이 그렇구나 이해합니다.
이것을 갖고 불교는 나는 나 아닌 요소로 되어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그렇게 얘기해요. 꽃은 꽃이 아닌 요소, 꽃이 아닌 공기, 바람, 햇빛, 물 이런 것이 꽃이 꽃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내가 나 아닌 것을 나라고 집착하고 살아가요. 그래서 그것을 사티하고, 알아차리고 내려놔요. 그것을 내려놓을 때 너의 번뇌의 불꽃은 꺼진다. 그것이 열반이에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상태를 미르바나라고 말해요. 어떻게 하면? 집착을 내려놓으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간단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체적으로 불교는 어떻게 부처님의 수행을 가르쳤고 제자들은 어떤 명상방법을 남겼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은 팔정도라는 수행을 가르쳐요. 이것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멸망하실 당시에 제자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지금 네가 해탈, 열반이죠 열반을 원하느냐? 열반을 원하면 팔정도를 닦아라. 여덟가지의 바른 길이에요 팔정도. 팔정도는 뭘 말하는가. 불교는 이것을 계, 정, 혜로 이야기합니다. 계는 계율을 말해요. 정은 定 수행을 말하고요. 혜는 지혜죠 깨달음을 말합니다. 계율과 수행과 깨달음 이 세 가지가 소태의 세 다리에요. 자 여기서 여러분들이 이거를 잘 보시면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아요. 계율이 굉장히 중요해요. 우리식으로 얘기하면 윤리, 도덕, 살면서 지켜야하는 규범들이겠죠.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것만으로는 깨달음을 절대로 할수없다는 거에요 착각하면 안되요.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깨달음 일상안에서 내가 어떻게 사느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래서 수도원에서는 규칙이 있는것이죠. 몇 시 몇 분에 일어나야되고 때로는 더자고싶고해도 그것이 몸에 베여서 나를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살게 만드는 것이죠. 수련받는 수련자 선생님들 아 내가 보화의 틀안에 살아가고 있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 사회가 망가지는 거는 윤리 도덕 규범이 망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것을 어떻게 다시 세우느냐 우리 모두의 책임지요. 여러분들의 수행 기도를 통해 깨달음으로 갈수있다고 생각하시면 안된다는 거에요. 이 세다리가 균형을 이루고 있을때 내가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갈수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삐딱한 사람이 돼요. 마치 내가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것이죠. 어떤 엑스타시의 경험.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했다. 절대로 아니에요. 관상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는게 아니에요. 착각하시면 안돼요. 그래서 팔정도 오늘날 불교는 선불교의 문제가 어디에 있느냐. 윤리 도덕 규범이 약화되는데에 있어요. 한국불교의 문제가 여기에 있어요. 책에서도 이 부분을 언급했는데 앞으로 글을 써야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우리 모두의 문제이죠.
부처님이 왜 이렇게 팔정도에서 계를 중시했는가. 이 부분을 다시 한번 깊이 자각할 필요가 있겠다. 계라는 것은 나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다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 틀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계에 해당되는 것이 정어, 정업, 정명 세가지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시면은 계에 대한 것이 뒷부분에 나오죠. 정어하면 바르게 말하는 거에요. 요즘 바르게 말하는 사람 많지 않아요. 바르게 얼마나 어려운지. 기본이 안되는 것이죠. 우리 사회보세요. 얼마나 거짓말을 하는지. 우리는 수도없이 매스컴을 통해서 보지 않습니까. 바르게 말하고 사는 것. 정업. 바르게 행동하는 거에요.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에서 깨달음이 옵니다. 정명. 바른 직업을 얻는 것. 이게 기본이에요. 이 세가지가 기본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 정에 해당되는 것이 정정과 정명과 정근입니다.
정념에서는 념을 보죠. 념이라는 글자를 보시면 념이 금에 마음심자. 지금의 마음.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는 것이 념이에요. 여러분의 마음은 여기 있나요? 저한테 있나요? 제 말에 있나요? 그러면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정념하고 있는거에요. 그런에 우리는 대부분 과거에 가있어요. 미래에 가있어요. 미래의 걱정. 어제는 뭘했는데. 우리의 95%이상 현재에 있지 않아요. 지금 여기에 살지 않아요. 우리는 그래서 살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과거라는 것은 없는 것이니까. 미래는 오지 않는 것이니까. 있는 것은 지금 여기만 있어요.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살 때 내가 사는 거에요. 그 훈련을 하는 것이 정념 수행이다. 지금 여기. 경험하는 것이죠. 이 생각이 또 삼천포로 빠졌구나. 저도 수업이 경험하는 건데요. 그래서 지금 여기에 온전히 내 몸과 마음을 두는 수행 바로 그것이 정념 수행이다. 정념을 하기 위해서 정정을 해요. 정정은 마음을 하나에 집중하는거에요. 어떤 대상을 선택해서 그 대상에 집중하는 것. 불교에서 많은 정정 수행은 호흡에 합니다. 호흡을 집중의 대상으로 삼아요. 아픙로 위파산하 수행을 말씀드릴텐데 이것은 호흡명상입니다. 이 정념과 정정을 어떤 결실을 얻으려면 정근이 필요하다. 꾸준히 하는 거에요. 꾸준히 노력하는 것. 이 세가지가 겸비될 때 비로소 명상수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게 되면 계와 정이 이루어지게 되면 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혜는 정견과 정사입니다. 정견은 바른 경해를 갖는 거에요. 그 사물을 왜곡되게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밝은 견해가 생기는 것이죠. 정사라는 것은 바른 견해를 지니기 위해서 바르게 사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깨달음이라는 것이 별게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곱씹어보면 그것이 얼마만큼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정견을 갖는 것. 어떤 편견없이 상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바른 정견을 갖는 것이죠. 우리는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내 안경을 통해서 남을 보죠. 그래서 부처님은 지각이 있는 곳에 기만이 있다고 하셨어요.
팔정도는 계정혜가 상즉상입 관계에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바른 언행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할 때 바른 수행을 할 수 있어요. 서로가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기도할 때 바르게 앉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좌선할 때 허리를 똑바로 피고 앉아있는 것. 바른 자세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정념과 정정을 할 수 있는 상즉 상입관계에 있어요. 몸과 마음은 따로 노는게 아니에요. 같이가요. 서로가 톱니바퀴처럼 연결되어 있어요. 자세가 삐딱하면 마음도 삐딱하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가능한한 자세를 바르게 갖는 것이 중요하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이 명상을 하는 것. 명상은 앉아서 좌선만 하는것도 아니고 성당에 들어가서 기도만 하는것도 아니라는 것을 반복해서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정중공부와 동중공부가 같이 있습니다. 정중공부라는 것은 좌선하는 것. 기도하는 것. 고요함 안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것. 이것이 정중공부죠. 동중공부는 일상안에서의 공부에요. 여러분의 명상 기도가 잘됐는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의 일상을 보시면 돼요. 여러분들의 행동을 보시면 여러분들의 기도가 어떤 결실을 맺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뀌지 않았다면 헛다리 짚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중공부와 동중공부가 같이 가는 것이다.
자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3월달에 진경스님께서 핵심을 두시간만에 쏟아 부으려고 해서 여러분들이 버거웠으리라 생각하는데요, 위빠사나 수행이라는 것은 불교는 근본불교가 있고 역사가 2600년이나 되니까 근본불교에서 상자불교에서 개승불교로 변화가 일어나죠. 가장 부처님의 명상에 가장 가깝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얘기합니다. ‘위’와 ‘빠사나’가 합쳐진 복합어다. 위는 꿰뚫고 빠사나는 보다.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사물의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보는 것이겠죠. 위빠사나 수행의 근거는 대념처경이라는 경전에 있습니다. 마하가 대에 해당하는 것이고 사티파타나가 념처에요. 그 다음에 산타라는 것이 경전을 말하고요, 사티가 아까 말씀드렸던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음안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알아차림의 대상이다. 자 그래서 위빠사나는 여러 가지 대상이 많은데 그중에서 오늘 여러분들과 제가 들여다 보려고 하는 것은 신념처에 해당하는 것만 보겠습니다.
신념처라는 것은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수화풍의 사대 중에서 풍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바람의 요소인 풍에 해당하는 호흡. 마하시라는 미얀마의 선지 1982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분이 위빠사나 수행안에서도 대념처경을 중심으로 해서 호흡관법을 독특하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마하시위빠사나 수행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냐면 배의 움직임. 불교의 팔정도에서 정을 하게 되면 한가지 마음을 집중할 대상을 찾으라고 했죠. 그 대상을 배의 움직임에 두는 것입니다. 복식호흡을 하게 되면 숨을 들여마시게 되면 배가 어떻게 될까요? 나오죠. 배가 나옴. 그 다음에 숨을 내쉬면 배가 들어감이죠? 나옴과 들어감을 알아차리는 거에요. 그게 첫 번째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아요. 이게 기본이에요. 좌선하고 앉아서 손을 배에다 대고 법개정입, 손을 모아갖고 오른손을 밑에 두고 왼손을 위에 두고 엄지를 모아서 달걀모양으로 만드는 것을 법개정입이라고 하는데 좌선을 해서 이게 배에 딱 가요. 복식호흡을 하게 되면 배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어요. 그렇게 해서 가장 기본을 알아차리는 것이죠. 여러분은 호흡하지만 호흡하는 것을 알아차려요? 대부분은 못알아 차리죠. 호흡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배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거에요. 이게 일차적으로 내가 관찰해야할 대상이에요.
이렇게 하다보면 호흡을 놓쳐요. 생각으로 다른데 가있고 그래요.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하죠? 다시 돌아오는 거에요. 끊임없이 반복해서 돌아오는 거에요. 반복해서 1차 내가 집중할 대상으로 돌아오는 것. 그 사이에 많은 것들이 있어요. 생각을 알아차리고 또 몸의 변화를 알아차린다. 침이 고일수도 있겠죠. 침이 고이는 것을 알아차리고 어깨가 뻐근하다, 그러면 뻐근한 것도 알아차리고. 목이 마르다, 목이 마른것도 알아차리고 가려우면 가려운 것을 알아차리고 이게 제대로 하는거야? 의심이 들면 의심을 알아차리고. 수행을 통해 뭘 얻으면 좋겠다 원함. 나 괜히 했어 후회. 정말 기쁘네 행복. 모든 감정 느낌 생각 모든 내 안에 일어나는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아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나중에 그런 것을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다 적습니다. 그래서 수행이 오래되면 그만큼 알아차리는게 예민해지는 것이죠. 그만큼 알아차리는게 많아져요.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거야? 알아차림의 반복을 통해서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엑스타시를 경험했던 아니면 아주 슬픈 경험을 했던 어떤 경험이든지 간에 어떤 느낌 감정 그 모든 것들을 다 생겨났다 사라지는구나, 생겨났다 사라지는 겁니다. 그거를 깊이 자각하게 돼요. 이게 존재의 실상이구나. 지금 여러분들은 제가 이야기해주니까 체험으로 깊이 와닿지 않죠. 체험을 통해 이것을 훈련하게 되면 상한 것은 없구나, 모든 것들은 있다가 사라지는구나 알 수 있습니다. 좋은것이든 나쁜것이든. 우리는 좋으면 갖고싶잖아요. 그 느낌이 오래갔으면 좋겠잖아요. 나쁜 것은 빨리 이렇게 하고 싶잖아요. 빨리 이렇게 하고싶은 것이나 갖고 싶은것이나 모든게 다 집착이에요. 그런 마음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런 무상과 무아라는 깊은 자각을 갖게 되고 그 무상과 무아라는 자각을 통해서 지혜가 열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마타 수행하고 다릅니다.
부처님께서 힌두교 전통안에서 태어나셨고 힌두교 요가 전통 안에서 모든 수행을 다 하셨어요. 그런데 힌두교의 요가 전통 안에서 당신이 진정으로 추구했던 그것을 발견할 수 없었어요. 그것은 사마타 수행만 하고 있었어요. 사마타는 마음의 평정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에요. 요가를 하게 되면 요가는 마음수행이니까. 비상 비비상 처 뭐 그 층 단계가 있어요. 최고의 경지까지 부처님이 다 경험을 하셔요. 그렇지만 그것은 사마타 수행이에요. 마음의 평정을 얻는 단계. 그것이 지나게 되면 아 다시 내가 고통을 느끼고 번뇌를 느끼고. 아 이거 뭐지? 그래서 부처님은 유과수행에서 자신의 그런 새로운 수행방법을 발견하시게 되죠. 그걸 통해서 얻게되는 것이 지혜에요. 그것이 유과수행과 부처님의 수행의 차이에요. 사마타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차이는 사마타 수행은 마음의 평정을 얻는데서 끝나요.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를 얻습니다. 차이점을 말씀드렸구요 그 다음에 간화선.
간화선이라는 것은 화두선이에요. 우리 한국불교의 선불교가 대부분이 화두선에 해당하는 것이죠. 看話선 보지만 그냥 보는게 아니라 꿰뚫어 보는 거에요. 화두를 참고한다는 표현을 써요 선불교에서는. 화두를 참고해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이 간화선이에요. 간단하게 얘기하면 그렇습니다. 간화선을 하는데 있어서 고봉스님께서 선효라는 유명한 책을 보게 되면 화두를 공부할 때 세가지 요소를 갖춰야 된다 그런말씀을 하십니다. 대신심-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일체중생 실의불성. 일체중성은 모두 불성이 있다. 존재하는 모든 중생은 부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에요. 그것이 바로 대신심. 대분심이라는 것은 왜 많은 사람들은 다 과거에 선사들, 조사들은 깨우쳤는데 나는 왜 깨우치치 못했는가. 깨우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발하는. 분하게 여기는. 더 분발하고자 하는 어떤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에요. 대의심이 간화선의 키워드에요. 화두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거에요.
어떻게 의심하는가. 불교의 화두는 무자 화두를 주거나. 이뭐꼬라는 화두를 줍니다. 이뭐꼬가 뭘까요? 이것이 무엇인고. 뭐가 이것이 무엇이라는 거에요. 스승을 찾아와서 묻고 있는 너는 누구냐. 너의 본래 면은 뭐냐. 이거를 묻는 거에요. 너 자신에게 묻는 겁니다. 이뭐꼬. 다른 어떤거에 관심갖지 말고 너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라. 너. 무는 무자화두라고 하는데 계승불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일체중생 실의불성이라고 해서 아주 유명한 말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불성사상의 기본이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부처님의 사상을 갖고 있다. 평등사상이죠. 그러니까 열반경이 나오니까 그러면 어떤 제자가 조두선사에게 가서 물어봤어요. 그러면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무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니 열반경에 다 있다고 하는데요? 그러니까 또 무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 이 사람이 어떻게 해요? 왜 있다고 하는데 왜 스님은 없다고 하지? 왜 있다고 하는데 없다고 하는지를 푸는 겁니다. 그거를 의심하는 거에요. 존재에 대한 의심덩어리를 품게 만드는 겁니다. 어떤 논리로부터 나와서 존재의 실상을 직면하게 만들어주는 그것이 바로 화두가 하는 역할이에요. 의심을 강하게 품어서 의심과 내가 떨어질려고 해야 떨어질 수 없도록 만드는 것. 어디를 가든지 의심과 하나되는 상태를 의적이라고 말하고 의심과 내가 완전히 한 덩어리로 되어있으면 의단이라고 해요. 의단상태까지 가야 그 다음에 어느 순간에 파. 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파 한데요. 그걸 화두를 깬다 그렇게 얘기해요. 이게 간화선에서 얘기하는 겁니다. 의전과 의단. 의단이라는 것은 이제 덩어리.
그래서 화두참구는 화두를 드는 것을 말하구요, 정중공부 동중공부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반복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아실겁니다. 뒷부분에 궁극적인 깨달음의 세계는 황홀경이나 신비체험이 아니라 존재의 실상을 자각하는데 있다. 체험을 깨달음으로 보아서 이에 집착하여 수행한다면 수행의 본래 의미를 오해하는 것이다. 수행은 다만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이게 아주 중요해요. 많은 사람들이 수행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해요. 깨달음이 목적이고. 그렇게 되면 평상 수단의 삶을 살게 되겠지요. 목적은 언제 얻을지. 그런데 만일 수행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목적에 연장선상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이거 엄청난건데. 많은 사람들은 수행을 저기 어디에 오지않는 어디에 갖다놓고, 그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서 그 과정을 다 수단으로 생각하고 삽니다. 언젠가 거기에 올라가리라. 만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순간을 목적으로 삼을 수 있다면 내가 굳이 거기 올라가지 않더라도 내가 여기서 목적의 삶을, 지금 이순간 사는거에요. 그래서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일 죽으면 안 되, 할 일이 너무 많은데 그게 아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