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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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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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5-04-13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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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이해

1. 서양에서의 몸 이해

우리가 대부분 학교에서 배운  것은 몸보다 정신에 관한 것이다. 이는 대학에 오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대학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학문 체계는 서양의 사유체계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몸보다는 이성과 정신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서양 정신세계는 플라톤을 그 축으로 하고 있는데 그의 사유는 영육 이원론적인 사유에 근거하고 있다. 플라톤은 몸을 지배하는 것은 영과 혼이라고 본다. 즉 머리에는 불멸하는 혼이, 가슴, 배에는 사멸하는 혼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는 건 내 몸이 갈증을 느끼기 때문인데 이는 내 몸에 있는 혼이 나로 하여금 물을 먹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 물이나 먹으면 안 되고 가려서 먹어야 함을 지성이 알려준다. 따라서 내 몸의 욕구를 지배하고 조절하는 것은 머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플라톤은 머리는 배의 선장 역할을 하며 몸은 배의 선원에 해당된다고 보고 몸 전체를 관장하는 것이 두뇌라는 측면에서 혼을 중시했다. 이와 같이 영 혼 정신을 중시하는 사유는 근대 데카르트에 와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여 인간 존재 근거를 이성에 두었다. 즉 인간은 생각하는 실체이며 그 나머지 다른 것들은 기계적인 것들이라고 본 것이다. 이렇듯 데카르트에 와서 이성이 더욱 강조되면서 몸은 정신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 차라리 몸이 없다면 우리가 더 사물을 투명하게 인식할 수 있고,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모르는데 몸이라는 굴레 때문에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서양의 몸 이해는 현대에 들어와 니체를 거쳐 메를로퐁티에 오면 ‘몸의 철학’으로 드러난다. 그의 [지각의 현상학]에 보면 몸은 세계 속에 있으며 세계를 향해 적응하고자 하며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몸이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은 세계가 몸을 계속 재구성함을 의미한다. 이렇듯 몸과 세계의 상호작용 안에서 인간의 존재를 규명하려고 하는 발상은 몸은 이성을 둘러싼 굴레가 아니라, 몸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가 나를 인식하게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의 몸은 세계를 향한 운동이다. 몸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몸이 세계의 의미를 바꾸고 실제로 세계 현상을 바꾸는 축이 된다.” 내 몸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나를 규정하고, 지금 내가 하는 나의 행동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내 몸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나 자신이 내가 굉장히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메를로퐁티의 몸의 철학은 ‘살의 철학’이라고도 표현한다. 내가 사물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물을 볼 때와 사물과 나 사이에 아무런 간격 없이 사물을 바라볼 때 어떤 쪽이 사물을 더 알 수 있을까? 세잔의 그림은 자신과 사물 간의 간격이 사라진 물아일체(物我一體)에서 그려진 것들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그건 우리는 우리가 지닌 지식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지닌 지식들은 많은 경우 사물의 실상을 보는 것에 방해가 된다. 선입견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바라볼 때 그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내게 돌아올 실속을 따지면서 상대와 관계를 맺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 관계는 진정한 관계가 될 수 없고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다. 성경에서 말한 ‘어린이처럼 되라’는 의미는 선입견 없이 존재와 관계하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어린이는 이것 저것 재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가진 오만 가지 생각들을 내려두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을 했다. 뭔가 그 사람들이 거기에 가도록 만든 여러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몸으로 거기에 동참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 자신은 변화되었고 그들 분 아니라 그 행동을 바라보는 세상도 변화되었다. 이렇듯 내 몸이 어디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내가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진다. 나의 생각만으로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온갖 변화와 반응들을 보면서 비로소 자신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2. 동양에서의 몸 이해

  동양에서의 몸 이해는 서양에서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유가의 四書 중 하나인 대학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가정을 화평케 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며, 천하를 평온하게 하는 것에로 나아감에 있어 먼저 나를 닦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나를 닦는 것을 몸을 닦는다(修身)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유가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각자의 행동거지가 아주 중요함을 의미한다.

 <논어>에 보면 공자께서는 배움의 목표를 修己安人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를 닦아서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인생의 목표요, 삶의 목표임을 보여주는 대목 이다. 유가 전통에서는 수양이 몸 닦음으로 표현된다.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이원론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덩어리로 보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리 몸이 다섯 가지 덩어리인 五蘊으로 되어 있다고 본다. 오온은 色, 受, 想, 行, 識을 말한다. 受는 느낌을 말하는데 좋은 느낌이 오면 갈망이 생기고 갈망은 집착을 낳는다. 나쁜 느낌이 오면 혐오가 생기고 미움이 발생한다. 어떤 사람이 나쁘다고 하면 그 사람을 다시 봤을 때도 그 느낌이 생긴다. 想은 어떤 것을 자각하여 형성되는 개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개념들은 다른 개념과 만나 복합적인 개념이나 추상적인 개념을 형성한다. 그런 것들이 모두 心底에 남아 있게 된다. 이 개념들이 복합적으로 정신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行이다. 기억이나 추리를 통해 많은 개념들이 복합적으로 형성되어 마음 속에 씨앗으로 남게 된다.

 서양에서는 마음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지만 불교에서는 5식, 6식, 7식, 8식이라는 식의 관점에서 마음을 바라본다.  5식은 오관을 통해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낌을 말한다  6식은 오식에다 의식을 추가한 것인데 문제는 자아의식인 7식이다. 자아의식은 사물을 보고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을 하는 게 아니라 잠재의식이 올라와서 형성된 것인데 바로 그 잠재의식이 8식이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석가모니불께서는 알아차림을 正念이라고 표현하셨다. 正念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 우리의 마음은  지금 여기 있지 않고 과거나 미래에 가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들과 이미 일어난 것들에 대한 걱정, 불안,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명상은 우리의 마음을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는 훈련이다.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로 줄행랑치는 마음을 지금 여기로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을 지금 여기에 두려면 내 안에 일어나는 잡다한 생각들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필요하다.

  알아차리기 위해 일차적으로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필요하다. 호흡이나 걷기가 그 대상이 될 수 있고, 그 밖에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다른 행위(양치질 세수 샤워 먹기 등)들도 알아차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정념(mindfuless)수행은 내가 집중해야 하는 대상에 마음을 두는 훈련을 통해 자신을 더 깊이 알아가는 수행이다. 자신을 깊이 알아가려면 무엇보다 깨어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2014.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