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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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영성

그리스도교의 청빈서원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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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16-04-15 17:08

본문

**본 논문은 한국교수불자연합학회지 제17권 제2호(2011)에 실린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청빈서원에 대한 고찰
                -불교의 무소유정신과의 비교를 시도하며-

                                                    최현민 (씨튼연구원장)

주제어: 청빈서원, 하느님나라,  하느님의 모상, 무소유정신, 깨달음, 반야바라밀다, 자리행(自利行), 이타행(利他行), 불국토(佛國土)


                                    국문초록

 현대 가톨릭 수도자들의 정체성의 위기는 '청빈서원'의 위기라 할 수 있다. 청빈서원의 위기는 소비문화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분위기, 부유한 수도공동체의 문제 등 외적인 원인만이 아니라 수도자 자신이 청빈서원의 본래의미를 살아내지 못하는 것 또한 그 원인 중 하나라고 본다. 불교의 경우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청빈서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 나라란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상태 곧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난 세상을 말한다. 수도자들은 예수가 보여준 하느님 나라 구현을 위해 자신을 비우는 가난의 영성을 택한 것이다.
이에 반해 불교 출가자들이 실천하는 무소유 정신은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지향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얻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소유에 대한 집착이며, 거기서 벗어나는 길이 무소유의 길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승려들에게 무소유정신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북방불교(대승불교)의 무소유정신 역시 남방불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승불교에서도 무소유적 실천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를 얻고자 함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무소유정신이 지향하는 깨달음은 청빈서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하느님 나라와 다르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무소유 정신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은 수행자 개인의 인식적 대전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리행(自利行)으로부터 이타행(利他行)에로 나아감에 있다. 진정 깨친 자 곧 부처라면 부처행을 통해 부처님의 자비가 넘치는 불국토(佛國土)로 만들어가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이렇듯 불교수행자의 궁극적 깨침이 부처님의 자비가 드러난 불국토 건설에 있다면, 이는 그리스도교 수도자들이 청빈서원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 곧 하느님의 베푸심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와도 만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들어가면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경제적 안정과 소비문화를 그 이상으로 하고 있다. 부의 축적과 물질의 소비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극복해야 할 것, 그저 퇴치해 버려야 할 쓰레기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한시라도 빨리 가난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친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도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하여 살아가려는 이들이 바로 불교 승려와 그리스도교 수도자들이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수도승들은 자신들이 택한 '가난'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는지 묻게 된다.
 도미니코회 펠리시시모 신부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현대 수도생활의 위기는 대부분 복음적 청빈을 버린데 기인한다고 본다. 청빈이 흔들리면 영성생활, 공동체, 사명 등 수도생활의 다른 측면도 흔들리게 된다. 물질의 풍요로 인한 안이한 삶은 우리 마음과 정신을 나태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수도자들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이 청빈서원은 현대 수도자들의 정체성의 위기의 원인으로 드러나고 있다. 청빈서원이란 가톨릭 수도자들의 삼대 수도서원-정결서원(貞潔誓願), 순명서원(順命誓願), 청빈서원(淸貧誓願) 중 하나로 가난을 자발적으로 택함을 의미한다. 수도자는 개인적으로는 사유재산을 갖지 않고 공동 소유하는 삶의 형태를 취한다. 자신의 사도직에서 생긴 수입 일체를 수도공동체에 내놓고 공동 소유함은 수도자들 자신이 소유로부터 자유로와지기 위함이며, 공동체 구성원들이 평등한 삶의 수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나눔과 연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사유재산이 없는 수도자 개인은 가난할지 몰라도, 수도공동체 자체는 부유한 경우가 많다. 또한 수도원뿐 아니라 수도회가 운영하는 기관이나 시설(병원 학교 기숙사 등)도 초창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설립 의도와는 달리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을 위한 시설로 변해버린 경우들도 있다. 이러한 소비문화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분위기, 부유한 수도공동체의 모습이나 사도직 현장의 일련의 상황들이 청빈서원을 살아가려는 수도자들에게 어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청빈서원의 위기는 이러한 외적인 문제에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수도자 자신이 스스로 서원한 그 본래의미를 살아내지 못하는 것 또한 그 원인의 하나라고 본다. 불교의 경우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수행자들 안에 출가자들의 계율에서 드러나는 무소유정신을 과연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는가? 이런 일련의 문제의식을 갖고 필자는 수도자들의 청빈서원에 대해 살펴본 후, 이를 불교의 무소유정신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럼 청빈서원에 대한 고찰에 앞서 그 근거가 되는 예수의 가난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 예수의 가난관

수도자들의 청빈서원은 예수의 가난에 근거하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의 삶은 철저하게 가난했다. 거처할 곳이 없어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의 출생처는 이를 잘 말해준다. (루카 2,7) 예수의 부모는 성전에 비둘기 한 쌍밖에 봉헌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예수도 부모와 함께 나자렛에서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공생활에서도 거처할 곳조차 없는 유랑생활을 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다"(루가 9 58; 마태 8,20)라는 간결하면서도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은 그분이 얼마나 가난하셨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이 베틀레헴에서의 탄생부터 정해진 거처조차 없이 가난했던 예수의 삶은 골고타 언덕에서의 십자가 죽음에까지 이어졌다.
예수는 당신 자신의 삶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극단적인 포기를 요구했다. 특히 그는 제자들을 파견할 때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고 말했다. (마태 10, 9-10) 이와 같이 예수는 제자들에게는 철저한 가난을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 재물 사용에 관해서는 어떤 규칙도 만들지 않았고 옷에 대한 규칙이나 거주에 대한 요구, 음식에 대한 제한도 전혀 하지 않았다.(이는 불교와는 상당히 다른 면이다.) 오히려 그는 당시 열심한 종교인들이 하던 단식을 지키지 않아 사람들로부터 먹보요 술꾼이라 비난받는가 하면, (마태 11, 19: 루가 7, 34 참조) 잔치에 참석하기도 했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한 첫 번째 기적(곧 물이 포도주로 바뀐 사건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요한 2, 1-12). 그 뿐 아니라 바리사이파인에게 초대받아 가시기도 했다.(루카 7,36-50).
이는 예수 이전의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그는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들꿀을 먹는 엄격한 고행자로 등장했다-과도 다른 점이며, 예수 당대에 유대교계 에세네파(Essenes)의 쿰란 공동체가 추구했던 이상과도 차이가 있다. 쿰란 수도승들은 엄격한 가난과 개인적 무소유를 의무로 삼았는데 그들이 행한 재산포기와 공동소유의 배경에는 세상에 때묻지 않을까 하는 종말론적 관점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이 행했던 것처럼 종말론적 세말의 대망을 위해 가난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쿰란 수도승들처럼 종말론적이고 금욕적인 길을 원하지 않았다면 왜 무소유와 무정처의 삶을 살았고 제자들에게도 무엇 때문에 철저하게 포기하며 살도록 요구했는가?

2. 하느님 나라를 위한 자기비움

예수는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유대교 회당에서 다음 이사야서를 읽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4. 18-19)

 루가복음사가는 이 내용을 예수의 공생활 서두에 둠으로써 예수가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지각하고 있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즉 예수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福音)을 전하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가복음은 예수가 선포한 이 말씀이 실제로 예수의 행적을 통해 실현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루가 4장-18장 참조). 다시 말해 예수의 행적은 말 그대로 그가 선포한 이사야서의 내용 그 자체였던 것이다. 바로 그 선포한 내용은 예수 자신이 추구해온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어로 ‘바실레이아 투 테우(basileia tou theou)’이다. ‘바실레이아’는 동사 ‘다스리다(바실류오)’, 명사 ‘왕(바실류스)’ 등과 연결되는 개념으로 ‘나라’보다는 ‘왕, 왕권’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현대 신학계에서는 바실레이아 투 테우를 ‘왕이 다스리는 땅’이라기보다 ‘왕의 다스림’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곧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상태 곧 하느님의 '베푸심'이 드러난 세상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그 세계는 내세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들 가운데 실현되는 삶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면서 하신 첫 말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는 예수가 당신 자신을 바로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 실현하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자임을 인식하셨음을 뜻한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가 4,43)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이와 같이 예수에게 있어 하느님 나라는 무엇보다 먼저 추구해야 할 첫 자리의 것이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그분의 가르침 중에 핵심에 속하며 최우선시되는 것이었고, 그의 생애 전체를 아우를 만큼 본질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보여준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그의 믿음과 신뢰에 기초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 속에 하느님 나라의 구현을 당신의 소명으로 여기셨다. 예수께서 당신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선포한 하느님의 다스림은 그가 하느님을 '압바(Abba)'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압바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당대 사람들에게는 색다른 것이었고 대담한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 당대에는 하느님을 감히 이렇게 부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압바'라는 호칭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와의 친밀한 상호 관계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 표현은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신뢰하듯이 예수께서 하느님을 신뢰했음을 보여준다. 예수는 자주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가르치셨다(마태18,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10, 14-15, 마태19 13-15 루가 18 15-17). 그것은 어린이다움이 하느님의 아버지이심과 그분의 섭리와 다스리심을 가장 잘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가 지녔던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지니려면 자기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이 비움의 영성-곧 가난의 영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썼던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이처럼 예수는 당신 자신을 비움으로써 -당신 자신이 '아들'임을 자각했고 하느님의 베품의 통로가 되었으며,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그 비움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분이 제자들에게 요구한 철저한 포기 속에 담긴 의미이다. 이 비움의 영성은 그의 산상설교에서 잘 드러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마르 3, 13; 루가 6, 20).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마음이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지 않는 자, 마음의 집착에서 벗어난 자를 말한다. 사도 바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한 존재는 '새 인간'인 것이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가는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 22-24)

그럼 여기서 말하는 새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다시 사도 바오로의 말을 들어보자.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새 3:9-10) 

여기서 새 인간이란 하느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셨던 그 본래 모습, 다시 말해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 안에서 이마고 데이로서의 인간상이 완성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옷 입음으로써 새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Ⅰ코린 15:49). 그래서 그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21)라고 말한 것이다. 즉 내가 그리스도화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수행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자기를 비움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과 자아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림 역시 자력이 아니라 그 안에 이미 인간의 노력을 선행하는 은총의 힘이 작용한다고 그리스도교는 본다.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는 자기비움을 초탈(超脫)이라고 말하면서 그 노력 안에 이미 은총이 작용한다고 본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기 전에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찾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은총이 뒷받침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단순히 자기비움, 자기 초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옷입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톨릭 미사 때 사제가 드리는 기도문 중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이 바로 '그리스도를 옷입음'에 있음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불교에도 이와 비견할 수 있는 표현이 있는데 ‘감응도교(感應道交)’가 그것이다. 일본 조동종 도겐선사(道元 1200-1253)는 『정법안장(正法眼藏)』「발보리심(發菩提心)」권에서 "보리심은 결코 자기 힘으로 인해 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다만 감응도교(感應道交) 즉 불(佛)과 자기가 서로 통하는 그 곳에서 생긴다"고 말한다. 감(感)은 부처님의 이끄심을 중생 쪽에서 받는 일이요, 응(應)은 중생의 근기에 대해 부처님이 응하시는 일을 말한다. 다시 말해 중생에게 기연(機緣)이 있으면 부처님의 힘이 이것에 응(應)해서 중생의 감(感)과 부처님의 응(應)이 서로 어우러지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그리스도를 옷입음으로써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이 때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의 일을 하게 됨을 지향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을 비워,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살 때 그 자신도 예수처럼 하느님의 베품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베품이란 자기 자신이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하느님의 베품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성서는 베품과 제자됨의 관계를 부자청년과 자캐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준다. 부자청년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예수는 그에게 조건을 제시한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라"(마르 10, 17-22)는 것이다. 이 말에 부자청년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예수를 떠나갔다. 이는 우리 자신이 '옛 인간'에 집착하여 그 속에 머물 때에 베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말해준다.
 부자청년의 경우와 달리 자캐오는 예수와 만나 회개하여 "앞으로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너무 많이 거두어들인 세금은 네 배로 갚아 주겠다"는 약속을 한다(루가 19:1-10). 회개한 자캐오는 하느님의 베품의 통로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캐오와 부자청년, 둘 다 예수를 만났지만 한 사람은 회개하여 예수의 인격을 받아들인 후, 베품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났고, 부자청년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체 옛 모습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는 우리에게 예수의 제자됨이 무엇인지 잘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비우는 회개를 통해,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통로가 되는데 있으며, 이를 통해 하느님나라를 구현하는데 있는 것이다.

3. 제자됨의 길로서의 청빈서원

수도공동체는 처음 어떻게 시작되었나?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는 먼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초대교회 공동체야말로 수도자들이 지향해온 이상이며 수도회의 설립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사도행전 4, 32. 34-5)

초대교회 후 그리스도교가 박해받던 로마시대에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자체가 영웅적이었다. 그 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종교자유가 주어지고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선포되면서 박해받던 그리스도교인들이 도리어 국가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도 세속적 가치가 들어와, 이방인으로서 사는 것보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사는 것이 더 편할 뿐 아니라 출세의 길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보다 철저히 예수를 따르려 한 이들은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사막에서 수도생활이 시작된 동기이다.
사막의 성 안토니오(250-356)는 이렇게 시작된 수도생활의 출발선상에 선 인물이다. 이집트 남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느 날 교회에서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태 19, 21)라는 복음말씀을 들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서 사막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 후 회(會)수도회들이 생겨나 수도자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수도공동체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기원을 두는 반면, 수도자 각자의 소명의식은 예수의 부르심에 근거하고 있다. 교회법으로는 수도생활을 봉헌생활이라 하여 "복음적 권고를 서원함으로써 봉헌된 삶이라고 정의한다.
그리스도교 수도공동체는 승가(僧伽, Sangha) 공동체와는 차이가 있다. 승가공동체는 불법승 삼보(三寶) 중 하나로서 불교의 중심에 위치하고 위치하는데 반해, 수도자들은 권위적 교계제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제적 전통에 속한 이들이 아니라 예언자적 전통에 속한 이들로, 교회의 중심에 위치하기보다 철저히 예수를 따르고자 택한 생활양식이다. 즉 수도생활은 교회의 제도에서 발생한 것도, 신학적 사상 체계나 교의에 의해 생겨난 것도 아닌 복음적 권고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이들이 택한 생활양식인 것이다. 즉 수도자들은 1986년 로마에서 열린 32차 수도회 장상들의 회의에서 "수도생활은 그리스도 생애의 교회적인 연장이다. ...수도생활은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제안했던 따르는 생활의 교회적인 연장이고 사도들은 그 첫 사람들이었다."고 결론내린 바 있다. 이와 같이 수도자들의 소명은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을 부르신 것에서 비롯된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 철저한 포기를 요구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 19,21)고 하면서 재산 소유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는 앞서 안토니오가 수도생활을 시작한 동기이기도 하다. 그 뿐 아니라 가족에 대한 집착마저도 끊으라고 요구하신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6).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마르 8,34)라 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마저도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를 따르려면 재산 가족, 자기 자신마저도 버리는 철저한 포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포기는 금욕적이거나 종말론적 관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자비가 베풀어지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함이다. 이런 점에서 수도자들은 보다 철저히 예수를 따르기 위해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한 자들이며, 그들의 청빈서원 역시 그 맥락 안에서 예수를 보다 철저히 따르기 위함이고,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실현에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사실, 예수께서 미리 보여주셨던 하느님 나라를 구현해가는 일은 수도자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몫이며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다스림 곧 그분의 자애를 드러내는 세상이 가능하려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앞서 우리는 예수께서 지니셨던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자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수도자는 예수가 보여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하느님 자비에 대한 신뢰 속에서, 예수의 인격을 옷입어, 예수가 시작한 하느님 나라 구현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자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최후의 심판 때 예수께서 하실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
우리는 여기서 예수가 그를 따르는 이들의 삶을 저울질할 잣대가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베품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가늠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얼마나 베풀며 살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예수는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것이 곧 당신 자신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예수는 당신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과 동일시함으로써 그들과의 연대성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난한 이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한 점이야말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어야 할 하느님 나라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의 공생활을 통해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보여준 복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수도자들의 삶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 예수의 일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회양극화 현상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야말로 현대에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징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수도자의 청빈서원을 불교의 무소유정신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4. 불교의 무소유정신과 청빈서원의 비교

출가자 곧 비구란 걸사(乞士), 즉 빌어서 사는 수행자를 말한다. 즉 이는 위로는 부처님의 법을 빌고 아래로는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빌어서 사는 수행자라는 뜻이다. 이처럼 비구라는 말마디가 의미하듯이 불교의 수행자는 철저히 무소유의 삶을 사는 존재들이다. 무소유의 정신은 율장 안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물건을 소유하는 방법에 관한 것은 250항의 전체 율장 중에 30항에 해당된다. 그 중 비구나 비구니가 가질 수 있도록 허락된 물건은 여섯 가지뿐인데 이를 비구육물(比丘六物)이라 한다. 승가리(僧伽梨 설법할 때 또는 마을에 나가 걸식할 때 입는 大衣), 울다라승(鬱多羅僧 uttarasaga : 보통 때 위에 입는 옷으로 왼쪽 어깨를 덮으므로 覆左肩衣라고도 함), 안타회(安陀會 antaravasa : 속에 입는 내의인데 측천무후가 축소하여 선승들에게 준 후로 동아시아에서는 장삼 위에 입게 되었음. 지금의 낙자)라고 부르는 세 가지의 옷에다, 한 개의 바릿대, 녹수낭(漉水囊 : parisravaa 물을 먹을 적에 물속에 있는 작은 벌레를 죽이지 않기 위해 물을 거르는 주머니), 니사단나(尼師但那 niidana : 앉거나 누울 적에 땅을 펴서 몸을 보호하며 와구(臥具) 위에 펴서 와구를 보호하는 네모진 깔개)가 그것이다. 이처럼 불가에서는 소유할 수 있는 물건까지 계율을 정할 정도로 무소유를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했다. 현대 승려사회에서 이러한 규율이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초기 불교교단에서 비구들의 소유물을 이렇게 규정함은 불가에서 무소유에 대한 실천이 얼마나 중시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무소유의 삶이 수행자들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필수적인 관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법구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황금이 소나기처럼 쏟아질지라도 사람의 욕망을 다 채울 수 없다. 짧은 쾌락에는 많은 고통이 따른다.(186)... 몸과 마음이 내 것이라는 생각이 없고 그것이 없어진다해서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사람 그를 진짜 수행자라 부른다.(367)...수행승이여 배안에 스며든 물을 퍼내라. 배가 가벼워지면 속력이 빨라질 것이다. 이와 같이 탐욕과 성냄을 끊어버리면 마침내 열반의 나루에 닿게 되리라.”(369)
 
이와 같이 출가 수행자에게 무소유정신은 탐욕을 끊고 열반의 세계로 건너가기 위한 뗏목인 셈이다. 그 건너갈 깨달음의 세계란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존재의 실상이 드러나는 세계이다. 다시 말해 무상(無常)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영원하지 않다는 존재적 사실을 깨닫는데 있으며 모든 존재는 무상한 것이기에 我라고 말할 것이 없는 무아(無我)적 존재임을 자각함에 있다. 따라서 존재의 실상이란 상호의존적 관계라는 연기(緣起)의 진리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존재를 바라볼 때 본래 소유할 수 없는 사물의 본질을 모르고 그것을 소유하려함은 집착일 뿐이며, 이러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한, 무상의 진리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이 궁극적인 깨달음에로 나아감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 그것이 바로 무소유의 길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승려들에게 무소유정신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재물과 소유에 대한 불교의 초기 규정은 시대와 장소의 변천에 따라 변하여 북방불교에서는 남방불교와는 상당히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다. 북방에 불교가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미 어느 정도 물질문명과 사유재산 개념이 형성된 후였기에 사원을 소유하고 사원을 유지하기 위해 농작물을 경작하게 되었다. 그 결과 초기 불교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던 걸식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대승불교에서의 무소유정신은 초기불교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대승불교에서도 무소유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반야지혜 곧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이다. 이 지혜 역시 일체존재는 비실체적 존재이므로 절대 얻을 수 없는 것(不可得)이며 소유할 수 없는 것(無所有)임을 자각함에 있다. 『금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땅히 머무르지 아니하며 그 마음을 냄에 있다.(應無所住 而生其心)." 아무 데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낸다는 말은 아무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마음을 낸다는 의미이다. 곧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반야지(般若智)를 얻는 길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소유는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불교수행자들이 지향하는 무소유의 삶은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불교의 무소유정신이 추구하는 깨달음은 수도자들이 청빈서원을 통해 지향하는 세계와 비교 가능한가?
오강남 교수는 그리스도교에서 불교의 깨달음과 비견할 수 있는 것으로 '회개'를 들고 있다. 회개 곧 메타노이아(Metanoia)는 의식의 변화 곧 내 속 가장 깊은 곳의 속사람을 바꾸는 것이기에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한스 큉(Hans Küng)이 내린 메타노이아에 대한 정의를 빌어 다음과 같이 회개를 정의내린다. "인간사고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변화를 받는 것, 모든 형태의 이기주의에서 하느님과 이웃으로 향하는 것으로서 완전히 변화된 의식, 변화된 사고, 방식 변화된 가치체계를 의미하며 나아가 전인격적으로 철저한 의식적 재구성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며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회개에 대한 이러한 관점에서 오교수는 불교의 깨달음과 비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이해하는 불교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는 선불교를 서양에 소개한 스즈키 다이세쯔(鈴木大拙, 1870-1966)의 견해를 빌어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물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는 것, 삶과 세계의 진성성 및 아름다움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다. 또 내적 삶의 전 체계를 뒤집어엎고 지금까지 꿈꿔보지도 못했던 세계를 열어주는 기적이다." 이러한 견해는 깨달음을 다만 인식의 대전환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이 단지 이러한 인식적 전환에 머무는 것일까? 깨달음의 진정성은 깨달은 자가 지닌 삼라만상과의 관계성에서 드러난다. 즉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本來是佛)임을 참으로 깨달았다면, 자신과 관계맺은 삼라만상을 향해 그 깨달음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진정 자신이 부처임을 자각했다면 부처로서의 삶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의 궁극적 깨침은 불행(佛行)인 자비행 실천으로 이어짐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도겐선사의 다음 표현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제불(諸佛)의 불도(佛道)는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깨달음을 초월하고 해탈한 경지의 실현 즉 불향상(佛向上)의 道의 行에 있다. 이 불향상의 道는 다만 행불(行佛) 이것에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진리 그 자체를 佛이라고 하는 자들이 꿈에도 보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불향상(佛向上)’이란 깨달음을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초월함에 있다. 다시 말해 ‘불향상’이란 ‘부처의 경지를 향해 매진한다’는 뜻이라기보다  ‘부처의 경지를 초월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깨침이 인식적 전환에 머무는 것이 아님은 십우도(十牛圖)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십우도(十牛圖)의 마지막 그림은 공의 깨달음을 표현한 인우구망(人牛俱忘)에서 끝나지 않고, 중생에게 손을 건네는 자비행을 드러내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이다. 이는 궁극적 깨달음이 동체대비(同體大悲)적 보살행으로 이어짐으로 봄을 의미한다. 대승불교의 이상상인 보살(Bodhisattva)의 의미는 보디(깨달음ㆍbodhi)와 사트바(역사ㆍsattva)가 결부됨에 있다. 다시 말해 보살이란 깨달음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이 시대의 역사 속에서 자비의 원력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는 궁극적 깨달음이란 연기에 대한 자각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현시켜 갈 것인가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불교의 궁극적인 깨달음이 인식적 차원의 깨달음에 머물지 않듯이, 그리스도교의 회개 역시 단순히 의식적인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도 바오로에 따르면 회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될 때 일어난다고 말한다.

여러분의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 신비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에페 3, 17-19)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회심은 단지 인식적 전환을 의미하기보다 예수의 인격을 수용하고 따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 말한 '나를 따르라'는 것은 어떤 가치나 이념을 따르라는 말이라기보다 예수 자신의 인격을 따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어떻게 관계 맺으셨는지를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즉 예수가 지녔던 하느님 자비에 대한 신뢰에 바탕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수용하는 것이며 그 믿음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회개는 '깨달음'이기보다는 '믿음'에 가깝다.
회개를 '믿음'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믿음'을 언급한 대목에서 발견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예수께서 사람들을 치유할 때는 상대의 믿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20번 정도의 치유와 구마 사화는 치유를 청하는 이의 믿음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눈 먼 장님이었던 바르티매오를 치유해주시면서 예수는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라고 말한다.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에 나오는 12년간 하혈한 여인의 이야기에서도 예수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5,34)”라고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불신이 드러났을 때에 예수는 이적을 행하심을 거절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없는 곳에서 치유를 보여주지 않은 것은 인간의 믿음과 하느님의 베푸심 간에 상호 역동적 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 즉 믿음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뜻하기에 신뢰를 지닌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비를 수용할 자리를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어놓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도록 통로를 내어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회개'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에 근거하며, 예수께서 시작한 하느님 나라에 그 궁극적인 지향을 두고 있다. 수도자들의 청빈서원의 궁극적 의미 역시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바탕한 하느님 나라 구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상에서 불교의 무소유 정신과 수도자의 청빈서원을 비교해보았다. 얼핏 생각하면 무소유정신이 깨달음을 지향하는데 반해, 청빈서원은 하느님 나라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양 종교의 궁극적인 세계에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무소유 정신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은 수행자 개인의 인식적 대전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리행(自利行)으로부터 이타행(利他行)에로 나아감에 있다. 진정 깨친 자 곧 부처라면 부처행을 통해 부처님의 자비가 넘치는 불국토(佛國土)로 만들어가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이렇듯 불교수행자의 궁극적 깨침이 부처님의 자비가 드러난 불국토 건설에 있다면, 이는 그리스도교 수도자들이 청빈서원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 곧 하느님의 베푸심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와도 만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결론

앞서 우리는 오늘날 수도자들의 정체성의 위기가 청빈서원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음을 언급한 바 있다. 하느님 나라 구현을 위해 사도직 활동을 기쁘게 살아가려면 근원적인 면에 회개가 필요하리라 본다. 예수께서 "회개하라,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한 것은 하느님 나라 구현은 회개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회개란 예수의 인격 곧 그분의 세계관을 수용함이며 이를 위해 나 자신을 비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자신을 비우지 않는다면 우리의 활동이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청빈서원을 통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제대로 되려면, 자기비움이 우선시된다. 그래서 예수도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았는가?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성 빈첸시오(St.Vincent de Paul, 1581-1660)는 우리가 진정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려면 무엇보다도 자기를 비워야 함을 강조한 바 있다. "마차를 끄는 암말은 마부가 가자는 곳이면 어디든 가듯이, 초연의 덕은 아무 것도 청하지 않고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으며, 마음으로도 어떤 것은 싫고 어떤 것은 원한다는 것없는 비움의 상태를 간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빈첸시오의 사도적 영성 밑에는 자신을 온전히 비운 무애착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에서 벗어나 무관심의 경지에 머무르십시오"라는 빈첸시오의 표현에 드러난 '무관심'이란 어떤 것에도 애착하지 않고 하느님께 나를 온전히 비운 자유의 마음을 말한다. 이러한 비움의 정신은 마이스터 엑카르트 사상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영혼은 자기를 잊고 자기를 여의어야 한다. 자기를 여읜 자만이 하느님 안에 자기를 다시 알 수 있다. 하느님을 앎으로써 자기를 알고, 자기가 결별한 모든 것을 하느님 안에서 알게 될 것이다."
도겐선사 역시 "불도(佛道)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요, 자기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라고 했다. '자기를 잊는다'는 것은 아집(我執)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의 관건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도겐은 자기라는 주체가 중심이 되어 만법에 나아감이 미궁(迷宮)이요, 자기를 잊고 아집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만법(萬法)에 의해 증험(證驗)되는 것을 '깨달음'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육조 혜능선사(638-713)가 말한 '생각에서 생각을 여읜다'는 무념(無念)과도 상통한다. 무념이란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으로 걸림 없는 자유로운 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무념의 마음일 때 예수께서 가르치신 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라는 참된 베품이 가능해질 것이다. 다시 말해 수도자의 마음이 참된 이탈의 자유를 누릴 때, 비로소 하느님의 베품이 드러나는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수도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하느님의 자비가 자기 자신을 통해 흐를 수 있도록 다만 마음을 열어두는 것뿐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수행'을 통한 하느님 나라 구현보다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헌신적 삶을 통한 자기비움이 보다 강조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적 관점은 자기비움과 자비행 실천을 선후관계로 보기보다, 상호 역동적 관계로 보는 경향이 있다.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 반드시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 곧 자리행(自利行)과 이타행(利他行)을 역동적 관계로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비단 그리스도교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수행과 자비행 실천 간의 상관관계를 한국불교계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한국불교는 깨달음의 관점을 지나치게 강조해오지 않았나 자문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깨달음을 보다 구체적인 역사의 장에서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인가 하는 측면이 소홀히 되지 않았나 하는 물음을 갖게 된다. 이 문제는 앞으로 좀더 깊은 성찰을 통한 연구가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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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한국교수불자연합학회지 제17권 제2호(2011)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