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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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영성

불교와 그리스도교 심성론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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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회 작성일 16-07-18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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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융연구원강의 2016.5.6

불교와 그리스도교 심성론 비교
                            최현민

<나는 어떤 차원에서 종교를 비교하는가?>

우리나라가 다종교문화이면서 평화가 공존하는 유일한 나라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 평화는 상대를 깊이 이해함에 기반한 평화가 아니기에 위험한 측면이 있다.
우리가 다른 이에게 타종교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건 바로 겉으로 보여지는 부분만을 갖고 이웃종교를 판단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사실 불교의 이제 법사는 기독교 교의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책을 출간했고, 이를 현응스님이 초대글을 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 무얼 자꾸만 달라고 빌고 천국 가는 것만을 지향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불교는 자기 자신이 주인으로 사는 것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또한 불교는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체대비 자리리타를 통해 남에게도 자비를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린 이웃종교에 대해선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보고 판단하고 자기종교는 깊은 차원에서 언급하는 것은 비교 잣대의 오류이다. 자기종교는 궁극적 차원, 깊은 차원에서 말하고 이웃종교는 현상적 차원에서 판단하며 비교하는 것은 얼마나 큰 오류인가.
    물론 그리스도교 신도 중 많은 이가 이런 기복신앙을 지닌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건 반성해야 하고 성찰해야 하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불교의 신자들은 부처님께 빌지 않는가? 초파일날 연등을 달면서 우리 남편 사업 잘 되게 , 우리 아이 시험 합격되도록 건강하도록 돌아가신 부모님 극락왕생하도록 빌지 않는가?  이렇듯 양종교 안에는 얕은 신앙과 깊은 신앙의 차원이 있다.

그리스도교나 불교나 하느님과 부처님께 비는 신앙의 차원이 있고 또 스스로 그리스도나 붓다로 거듭 태어나 살고자 하는 깊은 차원의 신앙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웃종교와 비교할 때는 내가 어떤 차원의 잣대로 비교하는지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는 인류의 평화롱곤을 위해 함께 협력하려면 상대에 대한 비판보다는 이해하려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협력을 하려면 일단 상대에 대해 알아야 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태도를 갖기 위해선  일단 상대에 대한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 종교학에선 이를 판단중지라 한다.

Ⅰ. 불교의 심성론

1. 무아와 유식

불교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수없이 변화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지역을 통틀어 변하지 않는 불교만의 색깔이 있으니 그건 바로 무상 무아 열반이다. 종파에 따른 교의 차이는 다만 이를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지난 시간에 불교의 공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공은 모든 이원성을 넘어선 세계 그래서  일체의 차별성이 멸해진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궁극적 실재에 대해 다른 표현들이 많다. 예를 들어  다르마(법)이나 眞如 佛性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를 무상 무아 열반이라는 삼법인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이해한다면 우린 불교에 대한 잘못된 궁극적 실재관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불성이나 여래장사상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함이 그것이다. 일본불교의 비판불교 학자들은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본이 여래장 사상에 더 예민한 건 그들의 불교사에서 중세에 천태본각사상에 빠진 경험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비판불교 만이 아니라 한국불교 역시 이러한 실재론적으로 불성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동아시아 불교가 벗어나야 할 그 과제 중 하나이다.
무상이면서 불성이고 무아이면서 불성이고 연기이면서 불성, 중도불성이어야 한다. 실재가 공이라면 찰라생 찰라멸이라면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건 바로 찰라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찰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찰나를 주인으로 사는 것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사실 이게 깨달음이다. 이런 면에서 깨달음이라는 목적지를 두고 사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를 목적지로 여기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졸고, <불성론 연구>, 운주사, 2011, 279쪽.

불교는 존재의 실상을  공이라고 한다. 그럼 지금 여기 있는 너와 나. 주체와 객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공사상에서는 아공 법공이라 해서 자아도 공하고 법도 공하다고 주장한다. 즉 ‘나’라는 자아는 없을 뿐 아니라 그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들 (오온)도 공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단멸론을 말하나? 아니다 불교는 단멸론과 상주론 중 어느 쪽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가르침이다.
공사상을 잘못 이해해서 일체법이 무자성이라는 것을 일체는 무라고 이해해선 안된다. 그렇게 이해하는  惡取空者들이 있다. 이런 잘못된 공관을 극복하고자 나온 사상이 유식사상이다.
유식 사상은 인도의 미륵, 무착(세친의 형) 세친에 의해 수립되었다. 유식에선 중관파에서 연기의 방식으로 설명한 세계를 식으로 설명한다. 식이 무엇인가?

(1) 오온(五蘊)과 식
초기불교에서는 인간을 오온(다섯덩어리-色受想行識) 온(蘊)은 무더기 쌓임 모임이라는 뜻.
으로 이해한다.
 
1) 색(色)-물질-몸-地水火風의 사대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2) 수(受)-느낌으로, 눈 코 귀 혀 몸이라는 다섯 감각기관을 통해 바깥 정보를 수용
    -좋은 느낌이 들면 탐심(貪心)이 생기고, 나쁜 느낌이 들면 분노(瞋心)가 일어난다.
3) 상(想)-지각-어떤 것을 처음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고 느꼈을 때 생성되는 표상작용이나 개념작용으로 지각은 일어나서 한참 머물다가 사라짐.
4) 행(行) –정신의 형성--기억 추리 등 많은 정신작용들로서 이는 마음 깊은 곳에 씨앗형태로 존재하다가 자극받으면 의식상층에 정신형성으로 나타남

5) 식(識)-분별과 판단
 -식은 수상행 3가지 정신작용들의 기저에서 인간이 인식활동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말한다,

**오취온(五取蘊)
--오온을 ‘나’라고 여겨 그것에 집착함에서 고통이 생긴다고 본다. 식에 의해 생겨난 삼독(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우리 마음에 계속 맴돌기에 중생에게는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一切皆苦)  결국 문제는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함에 있다.
-6식(의식,분별식)--7식(마나식,자아의식)--8식(아뢰야식, 저장식, 종자식)
唯識사상은 인식의 대상을 부정하고 오직 식뿐이라는 의미다. 보통 범부는 주관과 객관으로 분열되어 주객이원론적으로 인식한다. 즉 사람들은 대개 사물이 있고 이를 인식하는 마음이 있어 마음이 사물을 인식하여 세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에선 자아와 존재의 모습은 가상적으로 상정된 것이고 이 상정은 식의 변용에 의한 것으로 본다. 바로 식의 변용은 다음 3층 구조로 되어 있다.

(2) 식의 변용

1)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인간이 경험세계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사람이 의식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활동으로 인해 집착이 생긴다. 이 집착은 두루 계산한 것(편계)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일체대상 세계가 있다는 망상이 생긴다.
-마치 일체대상이 자성을 지닌  실체인 듯 생각하고 그에 집착하므로써 번뇌 속에서 산다.

2) 의타기성(依他起性)

연기에 즉하여 본 이치로 허망이 깨칠때 드러난 이치이다. 의타란 자성을 부정하는 것, 곧 독립된 실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깨닫지 못했을 때 일체법에 집착하여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데 (변계소집) 일체법은 다른 것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때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 바다에 파도가 이는 건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파도는 자체의 자성을 지닌 실체가 아니라 바람이 이는 연에 의한 일시적 현상이다.
-우리 세간 현상도 파도 치는 바다와 같다. 일체는
다른 것에 의해 생성된다. 이를 의타기성이라 부른다.

3) 원성실성(圓成實性)

일체의 것의 무자성 공성을 알며 그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되지 않는다. 집착없이 대할 때 진실성이 회복된다. 이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한다.
우리는 내가 있고 타인이 사물이 있다는 것을 대
전제로 일상을 영위한다. 그러나 이는 가상적인 것이며 망상이라는 게 유식의 주장이다. 불교임상심리학 29쪽

가상적으론 있으나 실체로 존재치는 않는다. 그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마음의 작용이 그렇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불교임상심리학 30쪽
 즉 유식(唯識)은 존재하는 것은 오직 식뿐이라는 것이다. 이를 (唯識無境  唯識所變) 곧 오직 식뿐 대상은 없으며 인식작용이 변형되어진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는 존재론적 이해라기보다 세계를 오로지 마음의 존재양식에 의해서 본다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보통 선사들은 “자아는 없다 무아다”라고 말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물으면 침묵하고 좌선하라라고 하며 설명없이 실천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린 무아의 참 의미를 자각하기 위해 다시 물어야 한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유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아와 존재의 상은 가상적으로 상정된 것이며 이러한 상정은 식의 변용에 의존해 있다” 불교임상심리학 34쪽
고.  즉 유식에선  식을 기반으로 현상세계가 성립한다고 본다.
 보통 사람들은 현상세계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우리 마음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상이 고정된 실체라면 우린 모두 대상을 똑같이 인식해야 하지 않나? 그러나 어떤 대상이 모든 이에게 매력적인 존재로 보이는 건 아니다. 이렇듯 대상은 실체로 존재한다기보다 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우린 자기 마음의 활동을 다 의식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의식하지 못하는 마음의 활동이 있다.
무슨 까닭일까? 왜 내 마음의 활동인데 우린 자신의 마음을 의식하지 못할까? 그건 우리의 의식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의식보다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의 활동이 있으나 우리의 의식은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유식학파는 요가수행 통해 일상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마음의 활동을 통찰하여 유식성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마음의 심층인 아뢰야식의 활동이다.
마음의 심층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3) 마음의 심층구조

1) 前5식=인이비설신
 -5식(눈-봄, 귀-들음, 코-냄새 맡음, 혀-맛을 봄, 몸-접촉)

2) 6식-의식(분별식)
생각이나 개념적 사고는 6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개념을 배워가고 그것이 내 안에 축적된다. 그리고 그 개념들은 서로 연결되어 체계화 작업을 해 나간다.
우린 대부분 자기 의식영역 밖에는 의식치 못한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문제는 무의식에서 일어난다. 불교는 이 무의식을 제7식 제8식 9식으로 나누어말했다. 유식의 마나식---융의 개인적 무의식에 해당하고
아라야식은 융의 집단적 무의식에 해당.
 

3) 7식(manas식) <말나식>意-자아의식
7식은 意(末那말나)를 음역한 것으로 “요모조모 생각을 재본다”는 의미이다. 우린 의식세계만으로 일체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무의식에 뭔가 말이나 이미지가 꿈틀거리고 있다.
예) 내가 이것을 저사람에게 주면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니, 오히려 의식수준보다 무의식적 욕망이나 감정이 뒤얽힌 사고가 더욱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대개 오식과 육식을 통해 들어온 것에 대해 자아의식이 작용하면서 좋다 나쁘다라든가,  이 사람은 내 가족이고 저 사람은 아닐까라는 등등의 이원론적 사유가 생기면서 세상을 상대적인 것으로 분열시킨다. 
그러면서 자아의식은 점점 더 고착화되어간다. ..우린 순간순간 변화하는 경험적 연속성의 흐름인 경험적 자아를 변하지 않는 실체적 자아인양 착각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그릇된 견해(아견)을 갖게 된다. 서광, <나를 치유하는 마음 여행>,불광출판사, 2011, 66쪽.
 이렇게 착각으로 만들어낸 자아에 프라이드(아만)를 갖고 자기중심적 집착적 사랑(아애)를 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마나식은 인식주체로서의 자아와 인식대상을 이원적으로 구분하고 주체에 집착함으로써 5식, 제 6식의 작용을 오염시켜버린다. 다시 말해 7식은 5식과 6식의 인식작용에 개입하여 있는 대로의 대상을 감각 지각하지 못하고 왜곡하여 받아들인다. 마나식을 서구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에고에 해당한다. 심리학에서는 심리적 증상을 에고기능의 상실 약화에서 비롯된다고 보므로 약한 자아를 강한 자아로 만드는 걸 심리 치료의 일차 기능으로 본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고통의 근원이 자아의 그릇된 작용에 있다고 보고 자아작용을 멈추는 무아 향한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자아작용을 멈출 수 있나?
 이런 면에서 인간의 모든 문제는 자아의식인 제 7식에서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오까노 모리야(岡野守也),일진역,<불교임상심리학>, 불광, 1992, 62쪽.
 

유식 6송
 번뇌는 결국 我癡 我見 我慢 我愛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할 때도 그 의식 저변에 ‘내’가 했다는 의식이 깔려있다. 나라는 생각이 있어 하기 때문에 좋은 일을 해도 무언가 보답을 바라고 하는 느낌이 있다.
물질적 보답만이 아니라 정신적 보답까지 아니 정신적 보답이 더 큰 문제다. 내가 훌륭한 일을 했다는 성취감과 감사받고 평가받고 사랑받고 나에겐 가치가 있다고 하는 충만감을 느끼고자 함이요 나로서는 대단한 것이라는 자족감을 충족시키고 싶은 것이다.
<섭대승론(세친 역)>에서는 아집이 항상 따라 다니므로 보시 등의 모든 선은 항상 아집에 의해 불순하게 되고 아집에 얽히고 맘을 지적한다.  같은책, 73쪽.

 마나식은 무서울 정도로 뿌리가 깊다. 무의식 내의 자아에 대한 강한 집착은 우리의 의식을 더더욱 고착화시켜버린다.

4. 8식-alaya 식(아라야식)저장식/종자식

6식 7식에 의해 생긴 모든 감각 정보나 업은  8식에 저장된다. 그래서 8식을 종자식이라 한다. 이는 보통 의식하지 않는 가장 심층으로 아라야식이라 한다. 아라야식의 아라야는 藏(감출 장)을 의미한다. 모든 망상과 미혹의 종자뿐 아니라 진리의 종자도 함께 저장해두는 장이라 하여 아라야식이라 한다. <유식30송>의 제2송후반-3송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아뢰야식은 범부의 의식에서는 잘 포착되지 않는 심층식으로 유가행파의 수행자들이 자신의 수행을 통해 그 흐름을 발견했다. 즉  객관세계로 간주되는 현상세계는 마음의 영상 곧 아뢰야식의 轉變결과라는 것이다.

a. <아라야식의 전변>

표층의식은 잠에서 끊어지는 데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이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은 심층에 근본적 식의 흐름 때문이다. 그 흐름의 연속은  8식 때문 이다.
-의식/아라야식 작용에서 생긴 업의 흔적 곧 업력이 종자의 형태로 남는다. 이 종자는 아뢰야식에 남게 된다(현행훈종자) 종자는 찰라생찰라멸 거듭하다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종자생종자) 인연이 닿으면 다시 구체적 모습으로 현실화된다. 그러다가 (종자생현행). 이는 마치 나무에서 종자가 떨어지듯(현행생종자) 그 종자가 땅밑에 있다.(종자생종자) 그러다가 봄이 되면 꽃으로 피어나는 것과 유사하다(종자행종자)
이처럼 종자에서 종자로 바뀜-‘轉’이라 하고 종자에서 현행으로 바뀜-‘變’이라 한다. 이러한
아뢰야식의 轉變은 종자생現行- 現行熏종자 -종자생종자 과정을 거듭한다. 이 전변과정에서 생겨난 종자는 아뢰야식에 훈습하여 또 다른 원인인 종자로 작용하게 된다.

<현행의 의미>

주객이 나눠지지 않은 순수의식을 業相이라 하고 마음 심층의 활동을 아롸야식의 轉變(전변)이라 한다면 전변활동에 의해 아뢰야식은 이원화된다. 즉 주관적 의식인 轉相(見分)과 객관적의식인 現相 (相分)으로 나뉘다. 이처럼 유식의 관점에서 볼 때 주객체는 식의 전변 결과라 할 수 있다.
아라야식에서 객관적 부분을 相分이라 하고 이 상분을 바라보는 주관적 부분을 見分이라 한다.  즉 상분과 견분은 식의 전변 결과 이원화된 객관과 주관, 곧 소연과 능연을 말한다.
따라서 아뢰야식이 현행한다는 것은 아라야식이 견분 상분으로 이원화함을 뜻한다. 이처럼  주객은 아라야식의 전변에 의해 우리눈에 주체 객체로 보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는 식 이외 다름 아니기에 유식무경(唯識無境) 이라 하고 마음이 그런 존재이기에 一切唯心造라 한다.

5) 9식

이처럼 자아나 세계를 아라야식의 종자전변이라고 보는 건 결국 유아론(唯我論)이 아닌가? 그러나 불교는 아라야식의 근본에 하나의 마음이 있다고 본다. 섭론종에선 이를 번뇌없는 제9식(阿末羅識 아말라식)이라 한다.
 마나식이 출세간도라고 하는 수행단계에 도달하면 평등성지라는 지혜로 변화한다. 평등성지의 자비는 마나식의 사랑과 질적으로 다르다. 평등성지가 열리면 사람을 위해서 해도 그 사람은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나이기에 나를 위해 하는 것이 된다. ‘당신이 나고 내가 당신’이므로 해주었다고 해받았다 하는 관념이 없어진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아가페사랑이요 불교의 무주상 보시인 자비이다. 즉 보시하는 자와 보시받는 자 보시되는 물건 이 세요소가 처음부터 공이어야만 진정한 보시이다. 같은책, 77쪽.
 

공적영지-텅비고 고요하여 신령스럽게 되는 것
원효는 이를 일심이라 함(대승기신론소>
모든 차별상이 사라진 공으로서의 마음을 원효는 차별적 다양성을 떠났기에 '일(一)'이라고 하고, 성자신해를 지녔기에 '심(心)'이라고 하여 '일심(一心)'이라고 칭한다
무엇을 일심이라 하는가. 염정의 모든 법은 그 본성이 둘이 아니고 진망의 이문에 다름이 있을 수 없기에[일체의 차별상을 떠났기에] 일(一)이라 이름하며, 이 둘이 없는 것이 모든 법 중의 실로서 허공과 달리 본성이 스스로 신묘하게 알기에(성자신해) 심(心)이라고 이름한다.
이처럼 불교에 있어 공은 추상적 허공,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비어있되 그 자체가 신령한 앎을 지녀 어둡지 않은 허령불매(虛靈不昧)이며, 이 허령불매의 성자신해가 바로 일체 중생의 진면목이고 마음의 본성이다.
이 공적영지의 마음A가 바로 인간 마음의 본성(本性)이고 인간의 본래면목이며. 공적영지는 경험적 차원의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존재, 정신과 물질, 나와 너, 나와 세계의 이분법을 넘어선 절대 평등의 무분별지이다. 능소분별을 넘어선 무분별이고, 이분적 상대성을 넘어선 절대이며, 상대적 차별성을 벗어난 평등인 것이다.
이처럼 9식은 생각 이전의 공적 영지한 마음이며 성이다. 9식은 어떻게 알 수 있나? 말나식의 작용이 멈추어질 때 드러난다. 그럼 어떻게 마나식의 작용을 멈출 수 있나? 탐진치 삼독으로부터 자유로와질 때이다. 불교의 수행이 바로 이  과정이다.
결국 인생 문제의 뿌리는 심층자아식의 경직화(아치 아견 아만 아애-에고이즘)에 있으며 그 경직화의 원인이 언어와 이미지에 의한 심증구조의 뒤엉킴에 있다면 그 엉킴을  푸는 유연화작업도 가능할 것이다. 같은책, 79쪽.


3. 대승기신론과 염정훈습

대승기신론 이전의 대승불교는 반야경 게통에서 발전하는 공사상과 공사상을 계승 비판한 유식사상 그리고 독자적 학파로 성립되지 않았지만 초기불교의 심성본정설로부터 발전해오면서 중요한 사상적 흐름을 형성해온 여래장 사상의 세 갈래로 볼 수 있다. 대승기신론은 이 세 갈래의 흐름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성립된 것이다. 유제동, 하느님과 일심 145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일체의 경험적 인식이 무명훈습으로 일어난 결과라는 것이다.
기신론에서는 마음을 진여와 망심(妄心)으로 설명한다. 대승기신론의 대승은 중생의 마음(중생심)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대승기신론 통석 505
 중생심을 수레에 비유한 것은 ‘모든 부처가 본래 타고 있는 것이며 모든 수행자가 그걸 타고 여래의 땅으로 가기 때문이다.
“중생심은 일체의 경험을 포괄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기신론은 하나인 마음(일심)이 실재(진여)와 현상(생멸)의 두 측면으로 설명한다. 즉 일심법에 의거하면 2문 심진여문과 심생멸문 은정희, <은정희 교수의 대승기신론 강의>, 예문서원, 2008. 55쪽.
이 있다는 것이다.

(1) 심진여문

실재로 번역된 진여는 산스크리트어(타타아타tath&#257;t&#257;)의 의미로 ‘참으로 그러한 것’을 뜻한다. 진여는 오직 하나의 실재 일체의 사물과 현상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본체( 일법계 대총상 법문체一法界大總相法門體)”)라는 것이다.
이렇듯 진여는 모든 걸 포괄하되 현상에서 드러난 마음(상념)과 별개로 있는 것도 아니고 상념(생멸심)과 동일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진여에서 어떻게 상념이 생기는가?

(2) 심생멸문

<기신론>에선 진여에서 상념이 생기는 과정을 설명키 위해 진여의 심리적 인과적 대응물인 여래장(tathagatagarbha)을 상정한다.
“심생멸은 여래장을 근거로 전개되는 일체 정신작용이다. 여래장은 실재와 현상의 두 측면이 결합된 상태로 달리 아뢰야식이라고 불린다.” 즉 여래장을 심리적 측면에서 아뢰야식이라 한다.
(여래장은 여래를 잠재적 상태로 감추고 있음을 나타낸다.)
아라야식은 각(깨달음)과 깨닫지 못함(불각)의 두 측면이 있다. 깨달음의 측면을 본각과 시각으로 구분.
각의-번뇌 망념 떠나 불각이 없는 상태라 이는 여래의 평등법신이니 이 법신에 의해 이름하면 본각이라 한다. 곧 본각은 심성이 불각을 떠난 것을 의미한다,
시각은 심체가 무명의 연을 따라 번뇌망상을 일으키나 본각이 훈습하는 힘에 의해 결국 본각과 같아진다.
시각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깨달은 상태로 나아감을 뜻하여 여기서의 깨달은 상태가 바로 본각이다.이홍우, <대승기신론 통석>, 김영사, 2006.512쪽.

기신론은 깨닫지 못한 마음을 망심 망념 염심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이 상념은 어디서 온 것인가?
기신론에선 상념이 진여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한다. 그래서 상념은 진여와 하나로서 그것과 다르지 않
으며 진여와 상념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以是二門不相離) 같은책, 515쪽.
  원효는 이를 진여문과 생멸문이 둘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은정희 역주 <대승기신론 소 벌기 > 88쪽.

“염정의 모든 법은 그 본성이 둘이 없어 진망의 이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이 다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한 一이라 이름하며, 이 둘이 없는 곳이 모든 법 가운데 실재하는지라 본성이 스스로 신묘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마음이라 이름한 것이다.”  은정희 역주 <대승기신론 소 벌기 > 88쪽.

불교적 사고의 근본 특징에는 반드시 내적 원인 (因)과 외적 계기(緣)이 있다. 번뇌 망상은 무명이 그 원인이 되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렇듯 기신론은 번뇌망상이 생겨나는 과정인 (생멸유전문生滅流轉門)과 진여로 돌아가는 과정(眞如還滅門)을 훈습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3) 염정훈습(染法과 淨法)

인식주체 내에 자각하거나 인식하지 못한 것들도 아뢰야식에 저장됨 이 저장작용을 薰習이라 함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즉각 이루어짐. 훈습된 것 중 기억하는 것도 있으나 기억 못하는 것도 포함.
훈습은 진여와 무명이라는 두 상이한 원천에서 일어난다. 상념으로 흐르는 훈습과 진여로 돌아가는 훈습이 있으니 염법훈습과 정법훈습이 그것이다.

1) 薰習起염법 염법훈습

불각-근본불각-아라야식 내의 근본무명
    지말불각-근본무명에서일어난 일체 번뇌임.
그럼 상념(번뇌망상)의 원인이 되는 무명은 무엇이고 어디서 생기는가? 주석가들은 마음이 실재에 이르지 못해 인식의 주체와 대상의 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홀연히 상념이 일어나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
여기서 ‘홀연히’라는 의미는 시작이 없다(無始)의 뜻으로 해석된다. 즉 無始無明이라는 것이다.  이홍우, <대승기신론 통석>, 김영사, 2006.516쪽.

517 중생은 본래부터 끝없이 계속되는 상념에 얽매어 있고 거기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이런 뜻에서 무시무명이라 한다.
무명에 시작이 없다는 건 무명이 상념의 원인이 된다는 말에 이미 함의되어 있다. 상념의 계기는 상념의 대상인 망경계이며 망경계는 상념이 이미 일어난 상태에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즉 무명은 상념의 이전에 발동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념과 더불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에는 이미 상념이 있다는 것이다.
근본무명이 상념의 원인(因)으로서 진여에 훈습하고 이 훈습으로 말미암아 망심이 생기고, 망심이 다시 무명에 훈습함으로써 번뇌망상이 생긴다. 여기서 불각념(깨닫지 못한 마음이 일어나 망경계가 나타나고 망경계가 상념의 계기가 되어 망심에 훈습한다. 이 과정을 통해 마음에 집착이 생기고 온갖 의도와 행위를 일으켜 고통을 당한다.

2) 정법훈습

진여와 깨끗한 마음이 무명을 훈습한다. 이 훈습이 인연이 되어 망심으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을 멀리하고 열반을 희구하게 만든다.
망심의 성향이 인연이 되어 진여에 훈습한다. 오랜 훈습 결과 마침내 무명이 사라지고 무명이 사라짐에 따라 상념이 일지 않으며 상념이 일지 않음으로써 그 대상 또한 사라진다.이홍우, <대승기신론 통석>, 김영사, 2006.522쪽.
 
이처럼 기신론에서는 아라야식에 의해 염법과 정법으로 생멸연기함을 설하고 있다. 이는 마치 옷에 향으로 훈습하면 향이 옷에 배듯 선악의 말 행동 뜻에 일어나는 선악 생각들이 일어나는 그대로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어떤 인상이나 세력을 자기 심체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십우도의 10도, 동체대비- 자리리타)
**십우도에서 심우로 시작해서 입전수수로 끝난다. 심우는 자신이 마음 밖에서 구할 것이 없음을 깨닫는 시작이고 입전수수는 다른 이를 깨우치는 시작이다.
무주상 보시-무얼 해 줄 때 우린 기대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선생은 학생에게 학생은 선생님께...
 어떤 행위를 할 때 내가 무얼 했다 내가 보시했어 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건 보시가 아니다. 기대없이 보시할 수 있는 건 동체대비에서 나온다. 내 것을 너에게 준다고 할 때는 자리리타의 마음이 사라진다.

4. 불성

(1) 불성 사상의 연원

초기불교부터 불성이라는 용어를 쓴 건 아니지만 그 의미는 이미 초기불교 때부터 있었으니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