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씨튼연구원은 영성의 토착화와 종교간의 학문적 대화가 목적입니다.
종교 명상

2004.7.31 제 1 강의 -불교명상의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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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0-10-2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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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7.31 제1강의 -불교명상의 개관-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한다.”
여기 있는 우리들은 옷깃만 스치는 정도의 인연이 아니라 같은 영성을 갖고 평생을 살아가는 삶의 동반자들이니 얼마나 깊은 인연들인가?

나에게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큰 두 물줄기와 같은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 두 물줄기가 광활한 바다 속에서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지닌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바라보는 저의 입장은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의 신앙관에 영향을 받았다.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를 축적된 전통과 인격적 신앙의 범주로 나눔

축적적 전통-경전 교리 신학적 체계, 도덕적 규범, 신화을 말한다.
그러나 각 전통은 열거한 이런 것들에 머물지 않고 이것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인격적 신앙이다.

-여기서 스미스가 말한 신앙은 faith이지 belief가 아니다.
 belief와 faith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belief--각 종교전통에서 말하는 신앙고백, 예) 사도신경, 삼보(불법승)
faith-belief를 통해 드러난 초월의 세계이다.

예>  도겐선사
-스미스가 말한 초월의 세계를 사셨던 선사
중세 일본인 가마꾸라시대의 불교 안에서 왜곡된 belief의 측면을 faith의 측면에서 바로잡고자 노력했던 선사.

<불교에 대한 왜곡된 이해>

1. 불교는 서구에서 말하는 의미의 무신론이 아니다.
무신론이란 개념은 서구에서 형성된 것이다.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했듯이 하느님을 부정함으로 존재의 기반을 상실해 버린 자들이 바로 무신론자들이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무신론' 하면 회의주의, 비관론, 무엇보다도 인생의 궁극적 의미 추구를 포기한 허무주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2. 불교를 무신론이라고 보는 맥락과 불교를 비관주의나 허무주의로 보는 측면이 이런 면에서 연관성을 지닌다.

불교를 비관주의로 보는 자들은 불교가 인생을 苦로 보고 무상하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불교가 인생을 苦로 보고 무상하다고 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불교는 인생이 무상하고 괴롭다 해도 이를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낙관주의이다.)

-불교는 이 세계가 혼돈과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있고 궁극적으로 의미가 있어 해탈이 가능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 허무주의나 비관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진리에 따라 의미있게 살고자 하며 이 진리를 구원의 메시지로 전파하고자 하는 종교이다.

3. 불교는 자력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부처님이 깨달은 우주와 인생의 법도인 다르마에 의존하는 종교이지 자기 자신에 의지하는 종교가 아니다.
다시 말해 진리의 힘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지 나 자신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나’라는 존재는 허망하고 실체없다고 본다. 그런 자신에 의해 어떻게 구원될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또한 불교의 정토종이란 종파는 아미타불을 믿으면 서방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아미타불에 의지함으로써 서방정토에서 다음 생을 살고자 하는 신앙이다. 이것이야 말로 타력신앙이 아니고 무엇인가?

<부처님의 생애> (BC463- BC383) 80세를 사심

1. 본명-고타마 싯타르타
2. 인도 북부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족이라는 부족국가의 왕자로 태어났다.
3. 18세에 결혼하시고 라훌라라는 한 아들이 있었다.
4. 생노병상에 대한 의문을 안고 29세에 출가하셨다. 

5. 그는 출가하여 먼저 당시 인도의 힌두교 스승을 찾아가 요가를 배웠고 요가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선정(삼매)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그분은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으므로 요가를 버리고 산림에 들어가 5동료와 함께 고행수행을 했다.
- 그는 이 고행수행을 6년간 지속했다. 피골이 상접한 붓다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열심히 고행을 했는지 알수 있다. 

6. 결국 붓다는 고행이 무익함을 깨닫고 이를 그만두었다.
그는 자기와 부왕을 따라서 농경축제로 외출해서 나무 밑에서 명상에 잠겼던 것이 생각났다. 그 안락한 좌선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비밀이 있지 않나 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행한 몸을 씻고 스자타가 준 우유죽을 먹고 원기를 회복하여 보리수에서 단좌명상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35세 12월8일 새벽 고타마는 깨달음을 얻었다.

7 깨달음을 연 붓다는 5동료에게 베나레스 녹야원에서 먼저 가르쳤다.
8. 그후 45년간 인도각지에 설법여행을 하면서 많은 제자를 얻었다.
9 쿠시나라에서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명상을 통해 붓다가 발견한 진리란 무엇인가?
우선 그 진리는 그의 가르침에서 드러난다. 붓다께서 45년간 가르친 그 가르침의 핵심이 바로 四聖諦이다. 
사성제란 풀이하면 4가지 성스런 진리라는 뜻이다. 무엇이 성스런 진리인가?

1. 苦
부처님은 고통을 삼라만상이 지닌 본질적인 측면으로 보셨다.
부처님은 고를 8가지로 말씀하신다.
나고 죽고 병들고 죽는것 -4苦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구하지만 얻지 못한 것,
오온에 대한 집착---4苦
**불교에서는 사람을 다섯 요소(몸, 감각 지각 행위 인식)로 되어 있다고 본다.
生이란 5요소가 결합된 것이고 죽음이란 5요소가 흩어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이 자신에 집착함으로 고통을 얻게 된다.

-앞에서 말한 7가지 苦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苦라면 8번째 苦는 우리의 존재가 지닌 苦이다.
부처님은 바로 인간 실존이 지닌 8번째 苦에 집중하신다.

2. 集(고의 원인)

그럼 苦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두 번째 거룩한 진리는 바로 고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보통 불교에서는 苦의 원인은 탐욕에 대한 집착에 있다고 말한다.

-건강 지적 탐닉, 영적 탐닉, 인간에 대한 집착 성공 명예 재물 권력 개인주의적인 모든 것 이기적인 모든 것

-우리의 욕망은 끝이 없고 늘 목마름을 느낀다. 하나를 성취하면 또 다른 것을 원한다.
우리가 집착의 끈을 놓지 않는 이상 늘 목마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욕망에 사고잡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3. 滅
 고통의 끝을 불교에서는 니르바나(열반)이라고 한다.
불교는 힌두교의 윤회사상과 업보사상에 영향을 받아 윤회를 말한다.
즉 인생은 1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집착의사슬이 끝나지 않는 한 계속된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즉 (선업을 지었는가 악업을 지었는가에 따라 인간 동식물 천상의 신으로 환생한다.
-집착의 불이 꺼지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자들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니르바나를 갈망한다.
이와같이 윤회가 끝난 상태를 니르바나라 한다.
 윤회의 끝은 번뇌집착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열반에 들려면 구체적으로 번뇌집착을 끊어버리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 거룩한 진리인 道이다.

4. 道 (열반에 이르는 방법)
집착을 끊어버리는 방법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부처님은 道를 8가지로 말씀하신다.

팔정도는 불교수행의 3가지 핵심인 戒定慧로 요약할 수 있다. 三學이란 계율지킴(우리식으로 수도생활을 함에 필요한 모든 규율들-도덕규범) 定(명상, 기도생활) 慧는 계와 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말한다.
**Meditation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묵상이 아니라 관상 즉 contemplation에 해당된다.


戒-正語Right Speech,  正業  Right Action, 正命Right Livelihood
定-正勤 正定 正念
慧-正見 正思惟

1. 正念(Right Mindfulness)
정념은 우리가 앞으로 한 불교명상의 핵심이다.

 念이라는 한자의 위는 今으로 지금이란 뜻이고 아래는 心으로 마음을 의미,
다시 말해 正念은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명상의 핵심이다.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매순간을 깨어 살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항상 깨어 있어라’의 의미는 정념의 의미와 통한다.
-우리의 생각은 과거에 있거나 혹 미래에 있는 경우가 많다.

2. 正定, Right Concentration
정념과 함께 불교명상의 핵심이다.
正定수행은 어느 한 가지에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이다.
이 수행을 통해 지금 여기(Now, Here)에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3. <正勤>Right Diligence
정근은 올바른 노력, 정진이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 명상을 얻지만 문제는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습관의 힘에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평화가 지속성을 갖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명상의 지속성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명상할 때 평화는 지속성을 지니게 된다.

이  正念(Right Mindfulness), 正定, Right Concentration 正勤>Right Diligence가 불교명상의 핵심이다.

4. 正見(Right View)
5. 正思(올바른 생각,Right Thinking)

-이 두가지가 바로 불교에서 추구하는 지혜(wisdom)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럼 무엇이 正見이고 正思인가?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깨달으셨다고 하시는 그 진리는 무엇인가?
불교경전은 그것이 緣起라고 말한다.
연기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호인연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緣起>
불교경전인 중아함경에서는 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 저것이 저러하므로 이것이 이러하다”

즉 모든 존재는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틱낫한은 연기를 interbeing이라고 해석한다.

예) 나무는 물 흙 광물 햇빛에 의해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나무라는 존재는 나무 아닌 모든 요소에 의해 존재한다.
나무 아닌 모든 요소를 제거해 버린다면 나무는 존재할 수 없다. 나무는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다.
--종이는 나무없이 불가능하다. 나무는 앞서 말한 요소 없이는 불가능하다.
--내안의 심장이 멈추면 죽는다.
그러나 내 안의 심장은 내 몸밖의 심장과 둘이 아니다.
무엇이 몸밖의 심장인가? 태양 공기 나무 흙 등...

-내 몸안의 심장과 내 몸밖의 심장이 둘이 아님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연기의 깨달음이다.

<연기와 사랑>

 연기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상호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진리이다.
다시 말해 존재하는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연기에 대한 깨달음이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이다. 이 지혜로부터 불교의 자비가 나왔다.
따라서 불교의 지혜와 자비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실존적으로 상호 깊은 연관속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우리는 너를 사랑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를 사랑하는 것임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정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이다.
사랑은 관계를 떠나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이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준행하라”고 하신 마더씨튼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그리스도교적 방식은 추상적인 논리의 추론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낸 예수님께 집중해야 한다.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25, 40)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불교의 연관성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뜻을 준행하는 정도는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

-고린도 전서 12, 21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우리의 몸에 두셨습니다. 모든 지체가 다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몸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는 것입니다.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삼라만상이 바로 한 몸이라는 사실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 동식물 모두를 포함한 삼라만상이 한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중심적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해온 경향이 있어왔다. 이것이 오늘날 생태학적 관점에서 그리스도교가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 요인이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불교에서 배워야 할 점은 바로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삼라만상이 실존적으로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는 진리이다.

-이 곳에 머물면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내 몸과 마음이 쉴 수 있었다. 자연이 내게 쉼과 평온함을 주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불교의 연기는 종교간 대화의 주요과제 중 하나라고 본다.

 

<공 emptiness>
공은 연기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은 無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다. 공은 무가 아니다.
공은 유와 무라는 이원론적 개념을 뛰어넘어 있는 진리이다.
공은 무엇이 비었다는 것인가?
독립된 존재가 비었다는 것이다. 즉 독립된 존재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상호 공존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같이 모든 존재가 독립된 것이 아니라는 표현을 공이라고 한 것이다.
공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의미와도 통한다.

<無我>

무아란 자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전통적으로 자아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한 것으로 이해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부처님 자신은 경전 어느 곳에서도 ‘자아가 없다’ 라고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다만 사람을 구성하는 오온(다섯요소의 덩어리) 각각이 자아가 아니라는  非我(anatman) 을 말씀하셨다. an은 ‘없다’가 아니라 ‘아니다’라는 부정사이다.

-인간이 오온 덩어리로만 되어 있고 이것이 흩어지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많지만 전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말씁ㅁ하신 무아는 결코 관념적인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도겐선사는 “불법을 배우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며 자기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 자기를 잊는 것이 바로 무아이다.

-바오로사도는 말한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다.”
자기를 잊고 비울 때 그래서 무아가 될 때 바오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

-부처님은 4가지 성스런 진리에서 고를 없애는 방법으로 8가지 길을 제시하셨던 것이다.
이 8가지는 서로 상호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어느 한 가지를 빼더라도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다시 말해 계율( precepts), 명상(Meditation)을 통해 지혜(wisdom)을 얻게 된다. 이 3가지를 삼학이라 한다.

-수행은 도덕적 삶에서 출발한다. 재가자들은 최소한 5계, 사미승은 10계, 비구승은 250계, 비구니승은 348계를 지켜야 한다.
여성차별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 인도사회에서 여성에게 출가를 허락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다음 시간부터 함께 살펴볼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정도에 해당되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노래 배울 것
*다음 시간에 올 때 방석 갖고 올 것.
























제2강의

**상좌불교의 명상**
부처님께서 직접 행하신 수행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의 수행을 가장 잘 보존해서 전승 발전시켰다고 보는 것이 Theravada Buddhism이다.
- Theravada Buddhism은 오늘날 스리랑카 미얀마 베트남 불교를 말한다.
- Theravada Buddhism 수행에서 대표적인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위빠사나-(vi-꿰뚫다,  passan&#257;-passati(보다)의 명사형으로 위빠사나는 ‘꿰뚫어 본다’는 의미) 무엇을?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것이다 .

-꿰뚫어 볼 대상으로 4가지 (몸 느낌 마음의 여러 상태 법)을 든다. 이 각각에 대한 수행방법은 상세히 경전에 나온다.

-이 중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몸이다.

(1) 몸의 중요성

①여기서 말하는 몸은 육체와 정신으로 이분화된 육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동양에서 몸이라고 할 때는 정신을 포함하고 있다.

② 서구의 근대철학은 인간의 이성(정신)을 중시하고 육체를 그 하위에 두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서구철학은 이성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말하기 시작했다.

③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의지’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나약한지에 대해 우린 삶 안에서 많이 경험해 왔지 않는가?

④ 우리의 나쁜 습관을 고치기 위해 많은 성찰과 결심을 해왔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무의식관이나 융의 집단적 무의식이 증명하듯 우리의 습관(성향)은 이성이나 의지만으로 다스릴 수 없다.
그것은 습관의 뿌리가 몸 전체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단 한번의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후에도 수행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같이 습성의 뿌리가 깊은 이유는 우리의 욕망이 육체와 긴밀히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에 우리가 지은 업이 몸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양의 명상(힌두교 요가, 불교명상 도교의 명상)은 몸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사실 예수님도 몸을 중시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뭅니다. (요한 6, 56)
이것은 단수한 상징적 행위가 아니다. 예수께서 밀떡을 자신의 몸으로 취하심으로써 당신의 몸을 우주와 깊은 연관성 속에 두신 것이다.
하나의 밀떡 속에는 태양, 밀, 물 땅 사람들의 손길 즉 우주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매일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우주를 먹는 것이며 우주와 하나되는 신비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같이 동양의 명상에선 몸의 수행을 중시한다. 몸을 수행하는 것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방법이 바로 호흡명상이다.
 
1)호흡명상

-인류의 위대한 문화에서 호흡을 생명으로 보아왔다.
그래서 ‘호흡을 느낀다’는 것은 곧 생명을 느끼는 것이다.

-동양에서 말하는 호흡명상은 단전호흡과 깊은 연관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단전이란 그 지점이 배꼽에서 3, 4센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그 곳을 생명의 정수요 에너지의 바다라고 부른다.
즉 동양명상에서 단전은 몸의 중심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일본의 수행전통에선 “생명과 에너지가 단전에서 솟아난다”고 가르쳐왔다.
단전호흡에선 “입으로 쉬지 말고 코로 쉬고 숨을 단전까지 내려 보내고, 아랫배에 힘을 주어 길게 내쉬어라”고 가르친다.

-호흡 즉 숨은 그리스도교에서도 중요하다.
창세기의 창조설화에는 감동적인 얘기가 나오지 않는가?

“하느님이 당신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고 아직 생기(life giving breath)가 없던 사람의 형태에 하느님이 직접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창세기 2, 7)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쉬는 숨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불어넣어주신 하느님의 숨이다.

-호흡명상이란 하느님의 숨을 의식함이며 이것이 곧 성령을 의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틱낫한 스님은 말씀하신다.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신학을 거치는 것보다 성령을 통하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우리가 성령과 접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살아계신 실재로 접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숨을 내 쉬시며 말씀하시길 “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2)
지금까지 호흡(숨)을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숨은 하느님이 불어넣어주신 생기이며 성령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호흡명상을 한다는 것은 호흡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호흡을 깊이 의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알아차림’은 곧 Mindfulness와 통하는 표현이다.
즉 마음을 다해 호흡을 알아차리고 호흡에 마음을 다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숨을 깊이 의식함을 통해서 ‘지금 여기’에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많은 경우 과거나 미래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끊임없이 과거나 미래로 도망쳐 버린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지금 여기’라는 현재를 충실히 살지 못한다.
 
*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부처님, 부처님과 제자들은 무슨 수행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앉고 걷고 먹는다. 그렇지만 부처님 누구나 앉고 걷고 먹지 않습니까?
우리는 앉을 때 우리는 우리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걸을 때 우리가 걷고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먹을 때 우리는 먹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와같이 마음을 다해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야말로 호흡명상이 추구하려는 것이다.

예> 7월11일 일요일복음- 착한 사마리아사람

3사람이 등장한다.(사제 레위사람 사마리아인)
사제는 미사, 레위사람도 무언가로 바빴다. 그들의 마음은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그 현실에 있지 않았고  자기 일과 미래에 가 있었다.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만이 지금 여기를 인식했다. 착한 사마리아사람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신 메시지는 ‘바로 지금 여기’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마음을 다하기 위해선 정념의 힘을 키워야 한다.
정념의 힘을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사제나 레위사람처럼 ‘길들여진 습관’대로 살게 된다.

-습관의 힘이란 우리 안에 형성된 정서프로그램을 말한다.
우리의 정서프로그램은 너무 빨리 작동하여 우리를 지배해 버린다.

-우리가 습관의 힘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정념의 힘을 기르는 길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호흡명상이다.

-호흡은 단순히 살기위해 숨쉬는 생명연장의 차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숨을 쉼으로써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숨을 들이쉴 때 내 주변에 있는 나무들과 풀들이 내 품는 산소를 들여 마신다.
그 나무는 우리가 내품는 이산화탄소를 들여 마신다.
그 나무가 자라기 위해 햇빛 비 새소리 구름... 이렇게 우리의 숨은 이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호흡의 각성은 그리스도교 전통에도 나온다.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인 필로칼리아에서는 다만 호흡에 맞추어 화살기도를 드리라고 나온다.
이 화살기도는 “호흡을 통해 들이마신 공기를 모두 심장에 들어가게 한 다음 그대로 있으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기도하시오.  그만 두지 말고 계속 하시오.

**호흡명상**

1) 호흡명상은 좌선과 함께 한다. 그래서 먼저 좌선하는 자세부터 그림을 통해 설명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