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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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명상

'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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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14-01-24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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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열반을 살다

(본고는 운주사에서 출간된 <불교와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만나다, 최현민 저> 제6강 ‘하느님나라와 열반’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일본 조동종의 창시자인 도겐(道元)의 정법안장正法眼藏 중에 「유시有時」권이 있습니다. 유

시란 도겐의 독자적인 표현으로 ‘존재시간’을 의미합니다. 즉 존재를 떠난 시간은 없으며 시간

을 떠난 존재 또한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시간이란 존재에 즉해서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과거나 미래는 관념적 시간일 뿐, 실재 시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는 ‘지

금 여기’에 있으며 바로 그 존재와 더불어 있는 존재시간만이 참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겐은 이를 유시현성有時現成, 금현성今現成, 유시이금有時而今이라고 합니다.1)


정법안장 「유시有時」에 보면 “시간 속에 있는 존재는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그만

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즉 “땔감은 땔감의 법위法位가 있고, 재는 재의 법위가

있다”는 겁니다.2) 우리는 보통 시간을 인과관계로 보기 때문에 “땔감이 변해 재가 된다”고 생

각합니다. 땔감과 재의 관계에 연속성이 있다면 재는 다시 땔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

나 재가 다시 땔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양자 간에 전후관계가 있긴 하지만 연결의 흔적은 없

습니다. 그래서 도겐은 “땔감은 땔감의 때가 있고, 재는 재의 때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땔감은 땔감의 법위가 있고, 재는 재의 법위가 있듯이 모든 존재에는 각각의 법위가 있

습니다. 이런 점에서 어떤 존재든 어느 한 순간에도 같은 존재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마치

영화가 우리 눈에는 연속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각각 다른 필름의 연속이듯, 존재도 전前존

재와 후後존재 간에 간극이 있습니다. 봄은 봄이고 여름은 여름이지, 봄이 여름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이러한 존재시간(有時)에서 우리는 ‘지금 여기’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존재시간에

깨어 산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불교 명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념의 ‘념念’은 지금(今) 여기에 마음(心)을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해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온갖 생

각과 상념에 빠져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는 자신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몸은 여기에 있어도 마음은 과거나 미래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지나가

고 아직 오지 않은 허상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삶을 허비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요?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은 어떤 수행을 하십니까?” “우리는 앉거

나 걷거나 먹습니다.” “그건 누구나 다 하는 것이 아닙니까?” “누구나 다 하는 것 같지만, 앉

을 때 앉아 있음을 알아차리고, 걸을 때 걷고 있음을, 먹을 때 먹고 있음을 알아차리진 못합

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수행’과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행위’ 간에 차이가 있다면 붓다의

수행에서는 걷거나, 앉거나, 서거나, 눕는 것 그 자체에 마음을 다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게 되고 그것을 통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