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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그리스도교 영성을 통한 생태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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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2011.9.3 서강대종교연구소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것임
불교와 그리스도교 영성을 통한 생태적 성찰
최현민 (씨튼연구원장)
들어가면서.
2007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세계 경제포럼 연차총회(WEF)에서 모든 참석자들에게 "향후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은 무엇이라고 보는가?"라는 질문이 주어졌을 때 기후변화라고 답한 이가 38%, 다국적 세계질서가 32.9%로 나왔다. 또 "이 중 가장 준비가 안 된 요소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는 기후변화(55.1%)와 심화되는 불평등(12.2%)를 들었다. 위 설문조사에서 현재 인류가 직면한 위기의 핵심을 생태문제와 사회의 불평등문제라고 보았지만, 이 두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제에 대한 다른 관점일 뿐이다. 오늘날 부익부 빈익빈의 지구적 경제양극화는 곧 생태양극화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북반구의 부유한 산업국가들은 자신들의 소비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자원과 에너지를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사오는 반면, 남반구의 개발도상국들은 먹고 살기 위해 가진 것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자연'을 수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생태파괴는 물론 세계양극화현상은 더욱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태위기가 전지구적 문제로 부상되면서 생태의식도 증대되고 있으나 생태문제는 갈수록 확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자본주의와 관련하여 생태적 성찰을 하고자 한다.
종래에는 생태위기의 원인을 인간중심주의적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오면서 생태중심주의적 가치지향을 말해왔다. 그러나 생태위기를 책임질 주체문제가 대두되면서 사회생태학자들-특히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 1921-2006)-은 휴머니즘을 다시 옹호해왔다. 생태파괴의 원인이론들에서는 생태위기의 원인은 단순히 '인간중심'에 있다고 보기보다, 복합적이고 다요소적인 요인들로 인해 발생되었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다. 드 타비니어(J. De Tavernier)는 생태위기가 산업혁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필자 역시 현대 생태위기는 무엇보다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산업혁명과 그로 인해 발전된 시장경제 체제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는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충격이 신석기혁명의 그것보다 결코 작지 않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거대한 변환』에서 인류학과 경제사학의 연구업적을 동원하여, 미개경제와 고대경제 조직은 산업혁명 이후에 발생한 시장경제를 대비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시장경제가 다른 분야를 경제영역에 종속시켜버렸음을 지적한다. 즉 시장경제 이전인 고대경제 시기에는 경제가 다른 사회제도(정치 종교 사회문화)에 종속되어 있었으나 시장경제 체제로 바뀌면서 경제가 그 외 다른 사회제도-정치 종교를 포함하여- 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시장경제는 인간 자연 사회 민주주의 공공성 생명을 형체도 없이 짓이겨져 상품으로 전락시켜 버릴 만큼 총체적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래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난 가장 커다란 문제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바로 전 지구적 생태문제인 것이다. 그럼 먼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어떻게 생태문제를 야기 시켜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생태위기의 원인인 자본주의 시장경제
1) 과학기술의 발달과 거대화문제
필립 암스트롱(Philip Armstrong)은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에서 1973년 선진 자본주의국들의 생산량은 1950년의 그것보다 거의 두 배가 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생산의 급성장은 기업 간 경쟁을 더욱 부추겼고 기업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낡은 설비와 기술을 폐기하고 새로운 설비와 신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쟁으로 인해 엄청난 기술혁신이 이루어지면서 고효율의 생산시스템 곧 표준화와 이동조립을 특징으로 한 테일러-포드 시스템이 자리잡게 되었다. ‘과학적 관리법(scientific management) ’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스템은 작업능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시간연구와 동작연구를 기초로 노동의 표준량을 정하고 그에 근거하여 차별적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노동통제방법이다. 즉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는 인간노동을 단순한 기계적 동작으로 치환하여 표준화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는 대신 인간노동을 파편화시키고 철저히 기계에 종속시키는 생산관리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로써 기계와 인간의 노동 사이의 관계가 뒤바뀌게 되었다. 종래에는 인간이 생산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지녔는데 반해, 자동화와 분업화로 이루어진 이 시스템의 도입으로 노동자의 숙련을 쓸모없게 되었고 노동자는 단지 숙련기계의 ‘노동’을 보조하는 역할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즉 경제적 과정을 조직하는 원리는 기계의 합리성과 효율성의 극대화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인간과 자연은 부수적 투입요소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대량 생산된 상품은 대량소비를 기다리게 되면서 상품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각종 마케팅 기법과 판매망이 필요해졌다. 즉 대량생산이 대량소비로 이어지기 위한 대량판매 시스템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는 광고 혁명을 가져왔고, 광고는 상품을 소개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불필요한 소비를 조장하여 ‘소비사회’를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욕망, 기호(광고), 상품의 연쇄반응은 소비의 욕구를 끊임없이 생산하게 된 것이다.
슈마허는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오류 중 하나는 '생산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신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신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대량생산으로 인해 모든 것이 풍족해졌고 소유함으로써 행복해졌다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생산문제는 양적 도약인 대량생산과 이를 뒷받침해준 과학기술발달로 인해 오히려 그 심각성이 더욱 드러나고 말았다. 슈마허는 인간과 기계를 다시 본래의 위치로 되돌려 놓으려면 과학과 기술의 근본적인 재편성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즉 비인간적 기술이 되어버린 대량생산기술로부터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인 적정기술 곧 '중간기술'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지닌 기술이란 '대량생산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생산'기술을 의미한다. 슈마허가 중간기술 도입을 말한 것은 이를 통해 작은 것, 단순함, 자본의 저렴화, 기술적 비폭력이라는 의식적 작업이 가능하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슈마허의 주장이 보다 설득력을 가지려면 기존의 자본주의가 지향해온 '가치관'에 변화가 오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세계적인 경기 침체기인 1930년에 미래의 경제적 가능성을 예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모든 사람이 풍족해질 시대가 그리 멀지 않았다. 그 떄가 오면 다시 수단보다 목적을 높이 평가하고, 유용성보다 선(The Good)을 선호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 우리는 상당기간 탐욕과 고리대금 그리고 경계심을 신으로 받들어야 한다." 케인즈가 이 말을 한지 80년이 지나 그가 예견한 대로 경제적으로 풍족한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과연 그의 말대로 목적과 수단이, 선과 탐욕이 각기 제자리로 되돌아갔는가? 케인즈의 말대로 근대경제를 이끌어온 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자극한 '경쟁'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경쟁이 경제 발전의 주축이었을까? 이에 대해 현대경제학자들 중에는 경제를 이끌어온 것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는 반론을 제시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2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국가성장을 국민총생산(GNP)과 연간생산율로 측정하고 있다. 따라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국민총생산을 높이고자 분투노력해오고 있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 사회가 성장 중독증에 걸려버리고 만 것은 소유적 가치를 우선시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산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신념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국내총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해 ‘되돌릴 수 없는’ 지구총생산의 감소를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토마스 베리(Thomas Barry, 1914-2009)는 우리의 소비형태가 지구의 지속가능한 생산성 범위를 넘어설 때 우리는 지구공동체를 파멸로 몰고 갈 것임을 경고한 바 있다. 우리는 이제 지속적인 경제발전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허구적인지를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지속적 경제발전의 비현실성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하려면 일단 지구상의 자원이 무한해야 한다. 1972년에 「성장의 한계」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로마클럽 보고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제한으로 경제성장을 추진한다면 자원고갈과 함께 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올 것임을 경고한 바 있다. 같은 해에 중동발 오일쇼크가 전세계를 강타했는데 이는 석유고갈에 대한 두려움을 안겨주었고 이후 전세계는 석유확보를 위한 준전시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정된 자원을 지닌 지구에서 지속적 발전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경제성장은 멈추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경제 성장과 함께 생태를 보존하겠다는 취지 하에 '녹색성장'이라는 타이틀로 정책을 펼치고 있다. 2009년 1월 한국 현정부가 발표한 녹색뉴딜사업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정부는 이 계획을 통해 9개 핵심사업과 27개 연계사업을 대상으로 2012년까지 총 50조를 투입하여 96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내겠다고 하지만 내년까지 40조원이 들어갈 핵심 사업비의 절반을 이미 4대강 사업에 쏟아 부은 상태이다. 정부는 이 사업이 홍수를 막고 물을 깨끗하게 하며 물 부족을 해결할 세 가지 목적으로 강을 정비하는 공사라고 한다. 4대강 정비의 핵심내용은 강바닥의 준설과 수중 보(堡)의 건설이다. 그러나 보의 건설로 물이 갇히면 오히려 홍수의 위험을 증대시키고 수질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반론이 나왔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생태보존과 경제성장은 양립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성장 중시자들은 환경 친화적인 기술과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끌어들이려 하지만, 4대강 사업은 생태보존을 산업적 측면에서 저울질하는 한계를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환상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속성장은 지구 자연의 한계를 드러내고 생태파괴를 가져올 뿐 아니라, 사회 불평등 문제마저 야기하고 있다. 시장경제에서는 전체 부의 증가만을 중시하지 부와 수입의 분배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점점 심화될 수밖에 없다. 또한 시장경제에서는 개인 이익의 극대화가 인간행복을 결정하기 때문에, 시장자유(투자해서 돈 버는 자유)를 곧 인간의 자유와 동일하다고 본다. 그러나 거대한 시장경제 체제 안에서 지역농부들은 스스로 농업방식을 결정할 자유를 박탈해 버린 지 오래다. 그들은 시장경제가 요구하는 것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시장경제는 초국적 기업의 팽창으로 소규모 지역 생산자들은 도산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시장경제 성장의 허구 속에서 사회 불평등의 문제는 한 사회의 불평등문제를 넘어, 나라 간의 문제로 확산되어 갔다. 예를 들어 미국은 지구온난화를 일으키는 가장 큰 주범이지만, 가장 큰 피해를 받는 나라는 해수면이 낮은 제3세계국가이다. 이와 같이 지속적 경제발전은 지구적 차원의 생태정의 문제까지 양산시키고 있기에 지구적 환경회의의 핵심의제도 빈곤문제의 해결이 우선시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생태정의는 사회정의와 맞물려 있어 생태정의 없이는 사회정의도 실현될 수 없으며 사회정의가 배제된 상태에서도 생태정의도 존재할 수 없다.
이상에서 우리는 지속성장이 가져다주는 지구자원의 한계성과 생태파괴문제 및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지속적 경제성장 발전이 생태파괴만이 아니라 인간성마저도 파괴시켜가고 있다는데 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3) 소비문화로 인한 인간성 파괴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라다크에서 살면서 서구 소비문화로 인해 붕괴되어간 라다크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라다크의 경우 자기정체성을 찾고 있는 청소년들은 소비문화에 취약하다. 소비문화는 그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한다. 그들은 라다크인처럼 생기고 라다크인처럼 먹고 입는 것에 대해 열등감을 느낀다. 그들도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고 콜라는 마시고 싶어 한다." 라다크는 티벳불교 문화의 역사를 지닌 민족이다. 이처럼 불교적 가치 안에 행복하게 살아온 그들이 서구소비문화가 들어온 이후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이들뿐만이 아니라 티베트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티베트인들은 지난 40년 넘게 중국 군사적 점령통치 하에 있으면서도 티베트 문화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지난 10년간 소비문화에 노출되었던 그들은 지금 자신의 문화가 뿌리 채 훼손되고 있다고 말한다. 40년 정치억압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던 공동체와 전통문화가 10년간 소비주의 문화의 압력 때문에 송두리 채 붕괴되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소비문화의 파괴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이들 문화를 뿌리 채 흔들어버린 것일까? 가난해도 행복했던 라다크인들이 서구문화를 접하면서 자신의 전통과 생활방식이 부끄럽다는 의식이 번져갔던 것이다. 서구의 소비문화는 그들에게 엄청난 문화적 열등감을 주었고 이것이 그들에게 소비문화에 대한 욕구를 갖게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등감 곧 상대적 빈곤감은 젊은이일수록 더 컸다. 헬레나는 그들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다시 자기문화의 소중함을 되찾는 것이라고 본다. 그녀는 젊은이들에게 소비문화에 속하는 것이 결코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어하며 그 일부가 되고 싶어한다. 좋은 옷을 입고 보기좋은 모양새를 찾는 것이 그들에게 소속감을 줄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부러움과 경쟁심 불안감을 갖게 할 뿐이다. 우리는 그들이 진정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그 안에서 생활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실제로 라다크인들은 세계가 자기문화에서 배울게 많다는 사실을 재인식하면서 다시 자기정체성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어떤 일이 힘들더라도 그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면 그것을 수행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문화적 가치를 지켜가고 그 안에서 의미를 되찾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라다크 젊은이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슈마허는 현대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문제를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지적하기를 영국경찰이 집계한 기소대상 범죄가 12년간 40만 건에서 120만 건으로 세배 증가했고, 연령별로는 14살에서 21살까지가 최고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현대의 10대 청년들이 범죄와 반항 도피 정신파탄 등의 증세에 심각하게 노출되어있는 것은 현 자본주의 사회가 조장해온 경쟁의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올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학생들 중 4명이 잇따라 자살을 택했다. 전문가들은 이들의 자살원인으로 고등학교 때까지 항상 성적이 우수했던 학생들이 카이스트 입학 후 남들보다 뒤처지면서 느끼게 되는 심리적 충격과 상대적 박탈감, 그리고 공부에만 몰두하던 학생들의 정서적 나약함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요인만이 아니라 ‘징벌적’ 등록금제와 전공과목에 대한 전면영어강의 등 카이스트의 과도한 경쟁구조도 그들이 자살을 택했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한국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라고 보도하면서 그 자살의 원인으로 과도한 경쟁심을 들었다. 이 잡지에서는 경쟁심은 한국이 꾸준히 경제 성장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지만 성공을 향한 끊임없는 압박이 결국 자살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통해 풍요와 편리함을 얻고자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생태파괴만이 아니라 인간성마저 파괴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네 삶의 자리가 얼마나 피폐해지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우리가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환상에서 깨어나려면 가치관의 전환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시금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요청되고 있다. 그럼 먼저 자본주의를 이끌어온 인간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2. 자본주의의 인간관
1) 호모 이코노미쿠스와 그 허구성
현 자본주의의 이론적 근거가 되어온 신고전주의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경제적 인간 곧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규정한다. 이 인간관에서는 인간을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본다. 즉 모든 인간의 행위는 결국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신고전학파 이론의 창시자인 프랜시스 에지워스(Francis Edgeworth, 1845-1926)는 "경제학의 첫 번째 원리는 모든 경제주체는 이기심에 근거해서만 행동한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논리는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가 말한 『국부론』의 다음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 제조업자들의 박애심 덕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돈벌이에 대한 관심(이기심) 덕분”이다. 이와 같이 신고전주의 경제학에서 제시한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관은 '더 빠른 성장이 더 많은 행복을 제공할 수 있다'는 현대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걸맞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인간관에 입각하여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끌어왔고 암암리에 사람들은 이 인간상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온 것이다. 흥미롭게도 신고전주의적 인간관은 현대 사회 생물학자들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미국의 동물학자 에드워드 O. 윌슨(Edward O. Wilson)이 쓴『사회생물학(1975)』 과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 유전자(1976)』은 인간의 본성 문제와 관련하여 현대 서구의 자연과학을 대표하는 책이다. 여기서는 모든 생명체의 존재 이유를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 최대한 많이 증식하는데 있다고 본다. 즉 이것이 바로 유전자의 목표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전자는 지극히 이기적이어서 자기에게 유용할 때에만 협력하며, 생존 경쟁을 위해서만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적 유전자에 입각한 사회생물학적 인간관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인간관을 뒷받침해주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그 이후 여러 분야에서 일어난 인간본성과 관련한 연구들은 이들의 이론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신경생물학자 요아힘 바우어(Joachim Bauer)는 가장 최근에 얻게 된 신경학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인간성의 원칙이 '협력'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출산과 함께 엄마의 체내에서는 옥시토신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급증하는데 이는 아기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신뢰의 원천이 되며, 산모가 느끼는 충만함과 행복감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관계 속에서도 이 물질의 분비가 촉진되거나 감소되는 사실을 확인했다. 즉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 존경, 배려, 사랑을 받을 때 이 물질이 많이 분비되며, 공포감이나 증오심을 느낄 때에는 그 분비가 위축된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서 그는 인간에겐 인정·존경·배려·사랑을 추구하는 뚜렷한 정향이 존재하며, 이런 요소들이 인간의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부여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는 이타적 행동조차 유전자의 위장된 이기심이라고 간주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론에 맞서는 주장이다.
바우어의 견해는 인간본성을 '공정과 정의에 바탕한 이타성'이라고 본 새뮤엘 볼스(Samuel Bowles)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볼스는 1990년대 들어 경제학계에서 펼쳐진 인간행위 실험들과 인간본성에 대한 그 자신의 연구에 근거하여 '협동'이 현대 인류 경제에 중심이 되어왔음을 주장한다. 즉 그는 주류 경제학을 움직이게 한 동력인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전제 자체가 틀렸으며, 인류의 살림살이를 이끌어온 것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기반한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는 것이다. 과연 볼스가 말한 것처럼 협동을 현대 경제학의 중심이라면 이는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2) 협동을 중심으로 한 인간본성
볼스는 묻는다. 만일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기만 하다면 인간의 이타적 행위는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왜 사람들은 헌혈을 하고 자원봉사를 하며 막대한 기부금을 내놓고 자신과 무관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일까? 도킨스는 인간의 이타적 행위도 또한 이기심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도킨스가 말한 것처럼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 타인과 공동체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우리 몸에 새겨진 유전자의 명령때문일까? 호모 이코노미쿠스적 인간관의 관점에서는 이를 자신의 심리적 만족감을 얻기 위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자신의 심리적 만족감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말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다시 왜 타인의 행복에서 심리적 만족감을 얻는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 왜 누구나 자기 이익을 위해 살고 합리적으로 산다고 하는데, 어떤 이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몸에 불을 지르는가 하면, 타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지를 물어야 한다.
자신에게 이득이 돌아오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거나, 공평성 내지 형평성을 행동과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행동하는 이유는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실제로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타적 행위들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에서 말하듯이 인간본성을 이기적으로 본다면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경제학에서 인간본성과 관련하여 행해온 실험 중 최후통첩 게임이 있다. 예를 들어 갑에게 1만원을 주면서 을과 나눠 갖되, 갑의 제안을 을이 거부하면 둘 다 한 푼도 갖지 못하도록 했다고 가정해보자. 경제학이 말하는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면, 을은 갑이 단돈 1원이라도 주면 받는 게 이익이다. 1원이라도 생기면 그만큼 이득이고,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실험해본 결과 을은 갑이 평균 30% 이하를 제안할 경우 이를 거부했다. 갑은 평균 37%를 을에게 제안했으며, 절반을 제안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나? 사람들은 이득 여부를 떠나 공정하지 않거나 정의롭지 않은 경우를 거부하거나 피한다는 것이다.
이번엔 을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전제 아래, 배분 비율을 두 가지(10%와 50%)로 한정했다(독재자게임). 여기서도 갑은 50% 쪽을 선택한 경우가 압도적 다수(76%)로 나왔다. 즉 아무리 인간이 우월적 지위에 있어서도 정의나 공정성의 잣대는 변하지 않음이 이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기존경제학에서 말하는 경쟁의 논리보다 정의 공평성의 논리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게임들 이외에 다른 게임들에서도 그 결과는 일관되게 나타났고, 결국 인간은 ‘호혜적 이타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상의 실험결과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이끌어온 주축이 '경쟁'보다 '협동'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준다.『이타적 인간의 출현』에서 최정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원활히 작동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타적 인간과 호혜적 인간의 존재'라고 말한다. 즉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시장상황에서 호혜적 인간의 존재는 시장거래가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강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 경제학이 설정했던 ‘인간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가설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준다. 즉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인간상은 허상이며 따라서 인간본성을 이기적으로 본 기존의 시장 근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볼스는 말한다. “인간 본성의 새로운 발견은 민주주의나 평등주의 정책들이 정치적으로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는 근거를 제공한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라는 관점이 아니라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는 인간 본성에 기댄 공공정책이 펼쳐질 때,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뿌리 깊은 불평등과 모순이 점차 해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생태문제는 사회 불평등문제와 맞물려 있다. 따라서 생태문제를 풀어가려면 사회 불평등문제를 함께 풀어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협력'이 필요하다. 어떻게 이 인간적 동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그러려면 이타적 인간본성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최정규는 『이타적 인간의 출현』에서 이타적 인간이 어떻게 이기적 인간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인류역사를 살펴볼 때 이타적 특성이 진화해온 과정에 '집단선택'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즉 집단 간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이타적인 사람들이 자기를 희생하면서 싸움으로써 이타적인 사람들이 많은 집단이 그만큼 유리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렵이나 채취에 있어 그 성공여부는 참가자들이 얼마나 이타적으로 협조하느냐에 달려있다. 현생인류가 마지막 빙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수만년에 걸친 혹독한 환경과 짐승습격에서 사람들을 지켜가는 이타적 협조행위가 필요했으리라 본다. 이렇듯 진화의 과정상 이타적 특성을 지닌 집단이 선택되었다고 보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개인선택에 있어서는 이타적 전략이 이기적 전략에 비해 진화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타적 성향을 지닌 개인들은 집단 내에서 점차 사라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선택과정과 집단선택과정이 공존할 경우, 집단선택과정의 속도가 개인선택과정의 속도보다 느리기 때문에, 어떻게 개인선택과정의 속도를 낮추고 집단선택과정의 효과를 크게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는 경쟁을 부추겨온 자본주의 가치관 안에서 어떻게 '이타적 전략'을 강화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연관성이 있다.
최정규는 이를 강화할 수 있는 것으로 '법 규칙 관습 등의 제도화'를 든다. 즉 제도의 존재가 개인선택과정의 속도를 늦추고 집단선택과정의 효과를 증폭시켜 사회의 이타적 행동의 진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득을 평등하게 재분배하는 정책을 펼친다면, 사회 내 개인들 간의 소득격차를 줄임으로써 집단 내 개인선택의 압력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집단 내 선택압력이 줄어든다는 것은 이타적 행위 전략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 내에서 사라지는 속도를 줄여준다는 의미가 된다.
예를 들어 인류가 수렵채취생활을 할 때는 자원의 공동소유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때에는 자원의 공동소유 특히 식량공유는 아주 강력한 소득 재분배의 수단이 되었다. 누군가 이러한 제도를 깨고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할 때, 이를 견제하기 위한 또 다른 사회적 합의로서의 제도를 마련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개인 선택의 압력을 줄이고 집단선택의 효과가 커질 수 있도록 강력한 평등주의적 제재장치를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회제도가 구체적으로 정책상 반영된다면 사회 불평등문제가 그만큼 해소될 가능성이 있으리라 본다. 여기서 필자는 이 문제를 더 깊이 연구하는 것을 사회학자들의 몫으로 돌리고, 개인의 인식과 가치관 전환에 초점을 맞추어 종교적 접근을 해보고자 한다.
린 화이트(Lynn White)는 말하기를 "인간본성과 사명에 대한 이해, 특별히 종교적 이해가 주위 환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 큰 역할을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에서 생태 문제의 뿌리를 그리스도교 안에서 찾으면서 동시에 그 치유도 종교적이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한스큉도 『세계윤리구상』에서 인류의 미래를 위한 우리의 전 지구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우리에게 지금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세계도덕이며 이것 없이는 인류의 생존은 불가능함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세계도덕은 윤리적 요구에 대한 무조건성(Unbedingtheit)과 보편성(Universalitat)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종교에 기반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필자는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에 기초하여, 종교적 관점에서 생태문제에 대한 성찰을 심화시켜보려 한다.
3. 그리스도교의 신관과 인간관의 생태적 성찰
1) 그리스도교 신관의 생태적 성찰
토마스 베리는 지구의 생존문제를 하나의 윤리적 차원뿐만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존재론적 차원에서 보고자 한다. 즉 우리가 겪는 생태위기는 인간과 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토마스는 개인 영혼의 문제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 시대의 긴박한 문제를 소홀히 해온 그리스도교에 성찰을 촉구해왔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인간 구원에 집중해온 것은 그리스도교의 신관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보아왔는데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은 곧 그리스도교 신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래 그리스도교에서는 초월적 신관을 강조해왔고 이러한 초월적 신관에서 초월적 인간관이 나왔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의 존재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인격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신에게 인격(persona-탈이란 뜻) 곧 사람의 탈을 씌운 것이다. 인간이 그 신의 형상이라는 자기이해에서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이해하는 의인신론적(擬人神論)적인 사유가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신의 형상이라는 것과 신이 인간의 형상이라는 것은 이해의 양면이다. 그만큼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중심주의적이 됨으로써 신도 인간의 형상으로 유추하고 자연도 정복과 이용의 대상으로 보게 된 것이다.
린 화이트가 그리스도교를 생태위기의 뿌리로 본 것도 초월적 신관에 근거한 초월적 인간관에 대한 비판이었다. 고든 카우프만(Gordon Kaufman)은 생태문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생태적 자료를 발견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그리스도교 신관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렇듯이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초월적 신관에서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인간 이해에 오해가 발생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초월적 신관이 지닌 문제점이 대두되면서 현대 신학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논의들이 일어나고 있다. 에코페미니즘 학자인 로즈메리 류터(Rosemary Ruether)는 종래의 그리스도교가 지닌 초월적이며 가부장적 신관을 극복하고 만물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의 내재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단지 초월적 (남성)신을 내재적 (여성)신으로 대체하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신 문제’가 해결될 수 없으며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내재해 있는 가부장적 지배전통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는 『가이아와 하느님』을 통해 유다 그리스도교 전통의 초월적 유일신론과 에코페미니즘의 내재적 신성(가이아)를 역동적으로 통합하여 내재적 초월적 하느님을 구성하고자 했다.
토마스 베리도 피조물과 분리된 초월적 하느님에 대한 의식이 자연세계의 신성함에 대한 우리의 느낌을 약화시켰고 우리를 지구와의 교류를 끊어버리는 구체적인 해악을 가져왔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요한의 우주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우주론적 신학을 펼쳤으며 이러한 그의 신학은 '만물에는 자성(自性)이 있다'는 아시아적 영성과의 만남도 가능함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그리스도교의 신관에 대한 성찰은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 대해서도 생태적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2) 그리스도교 인간관의 생태적 성찰
그리스도교의 초월적 신관에서 그리스도교의 인간관 즉 하느님 모상성이 초월적 의미로 해석되어왔다면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성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 레오나르도 보프(1938-)는 “인간에게 부과된 책임성은 세상에 대한 인간적 자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 이전의 것이고 피조물적 존재로서 인간 안에 새겨져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부여된 '책임성'은 인간이 창조 때부터 '본래성' 안에 내재되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의 모상성은 본래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책임성' 이외에 다름이 아니다. 즉 이는 인간의 청지기(stewardship)라는 직분이 인간이 다른 생명체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며, 다만 하느님이 돌보신 일을 협조하라고 주어진 소명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상성에 대한 재해석과 함께 우리가 소홀히 여겨온 인간의 또 다른 면인 '인간의 피조성'을 보다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창세기 2장 7절은 '흙(먼지)로 인간을 빚으시다'고 하여 인간은 땅(먼지)로부터 온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땅에서 나서 다시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이 여타 피조물과 '공동의 피조성'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흙(먼지)의 존재라는 사실을 보다 깊이 자각하기 위해 우리는 아시아의 영성을 배울 필요가 있다. 특히 불교적 영성은 우리 자신이 만물과 얼마나 깊은 상호연관성을 지니고 있는지 자각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이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이 지닌 양면성 곧 하느님 모상성과 인간의 피조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협력자(co-creator)'로서 소명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은 하느님이 세상을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진행의 상태로 창조하셨음을 의미한다. 즉 모든 피조물은 완전을 향한 진행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수십 억년동안 지구상에서 일어난 진화의 과정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현대 인간은 오존층을 변화시키고 수많은 생물종을 멸종시키면서 이 혹성의 화학적 성질과 생물학적 체계, 심지어 이 혹성의 지질까지 바꾸어 놓았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에게 부여된 청지기성에 대해 다시금 숙고해보도록 촉구하고 있다.
하느님의 창조계획은 예수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실현으로 드러났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책임을 진 자들이다. 예수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루가12, 33)고 가르치셨다. 하느님 나라,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 회복 외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청지기 직분은 어그러져버린 이 세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실제로 청지기의 직분을 구현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라다크나 티베트의 실례는 이를 잘 보여주지 않는가?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저 단순히 '믿고' 희생하고 극기하라는 식의 가르침으로는 약하다.
참으로 세속적 가치를 상대화할 수 있는 믿음과 세속적 가치 위에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놓을 수 있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예수가 제시한 가치에 참된 행복이 있음을 깨닫지 않고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다. 다시 말해 마음이 가난한 자가 진정 행복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지 않고는 예수가 제시한 가치를 살아내기가 무척 어렵다. 가난, 그것은 자본주의적 가치관에서 볼 때 모멸감과 불행을 안겨다주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런 점에서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현대인에게 더 이상 의미를 발생시키지 못하는 고어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나 예수가 말한 가난은 탐욕에서 자유로워진 자가 지닐 수 있는 '마음의 가난'을 의미한다. 예수의 가치 곧 마음의 가난을 통해 얻는 자유를 자신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살려면 먼저 자본주의적 가치를 상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앞서 우리는 자본주의 가치관 중심에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음을 살펴보았고,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제시한 인간론이 지닌 허구성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이는 진정한 인간의 행복은 무엇을 '소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로 사느냐에 달렸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사실에 대한 자각이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이 가난한 자가 지닌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의 방향성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가 제시한 마음의 가난을 되찾는 길은 무엇보다 탐욕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가능해질 수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2009년 코펜하겐 유엔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에 보낸 담화에서 창조질서 보전을 위해 우리에게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검소한 생활양식'과 '가난한 이들과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 있는 생활양식'이라고 강조하신 바 있다. 탐욕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먼저 삶의 태도가 단순하고 소박해질 수밖에 없다. '소박한 삶의 태도'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덕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4. 불교적 인간관에 비춘 생태적 성찰
1) 불교적 존재이해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상호 불가분의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연기(緣起)의 실상을 통해 인간 존재를 이해한다. 즉 불교에서는 인간을 정보(正報), 자연을 의보(依報)로 보며, 이 양자 간에 의정불이(依正不二),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불가분의 관계성이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인간의 몸이 자연의 몸이 둘이 아니라는 의정불이 사상은 연기적 세계관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생명이 삼라만상의 생명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곧 삼라만상의 안녕이 곧 나의 안녕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교는 초기부터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자비인 동체대비(同體大悲)에 대해 말해왔고 이는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 와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동체자비와 관련된 유명한 구절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