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씨튼연구원은 영성의 토착화와 종교간의 학문적 대화가 목적입니다.
생태 연구

고엔트로피사회에서 저엔트로피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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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4-05-1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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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엔트로피 사회에서 저엔트로피 사회로

                                             

                                                                                                                최현민 (씨튼연구원장)



1. 현대사회와 생태위기


우리는 지난 한달 가까운 시간 세월호 참사의 슬픔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체 가슴 먹먹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눈 뜨고 300명의 아이들이 바닷물 속에서  수장되는 과정을 그 대량학살의 현장을 생중계로 지켜봐야 했다. 세계 사고사에서 유례 없는, 끔찍한 비극이 온 나라를 비탄에 잠기게 했고 많은 이들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 우린  그저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으로 끝나선 안된다. 아이들의 희생을 통해 이 사회가. 우리 자신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이 사회는 생명보다 돈이 더 소중한 사회,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버렸다.—면피시스템만 남은 사회-잘못이나 책임 따위를 면하여 피하려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질 희생양을 찾고 있다. 희생양을 잡아 제단에 올려놓고 모든 책임을 묻고 끝내고 싶어 한다.

1993년의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이후 20년 세월 동안 수십건의 크고 작은 안전사고를 겪었다. 그럼에도 어째서 유사한 인재형 사고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가? 놀라운 것은 그 ‘반복성’이다. 같은 사실을 20년 동안 반복 지적해오면서도 어째서 우리는 20년 동안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는가? 이 반복성은 그 자체로 기이하고 놀라운 것이다. 세월호 사건 수습 과정에는 이 놀라운 반복의 능력 그 자체를 문제 삼는 절차가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는다면 사건사고 재발의 근본적 가능성은 차단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는 문제 해결의 단서를 찾으려는 사회적 정치적 의지가 사실상 마비되어 있다.

 이 마비는 무엇이 근원적인 문제인지를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강력한 사회적 무의식과 깊은 연관이 있다. 지금 내 살기 바쁜데...라고 하며 남을 생각할 여유가 없이 살아가고 있음도 그러한 사회적 무의식을 낳게 만든 요인이다.  이런 무의식은 ‘생각하는 사회’를 불가능하게 하며 사회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지적 정신적 에너지를 침묵시킨다. 말하자면 그것은 ‘생각이 없는 사회’를 유지시키는 강력한 힘의 소스다. 우리가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무참한 사고의 반복을 차단하려는 노력을 진지하게 기울이고자 한다면, 무엇이 그런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가라는 문제에 깊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린 알고 있다. 세월호 사건은 이번만 일어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사회의 모든 체계에서 매번 똑같은 문제 상황에 직면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왜? 낡은 페러다임과 매뉴얼로 대처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세월호는 지금 우리의 현주소이다.

지금 한국사회 아니 전지구는 신자유주의를 하나의 종교로 신봉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뭐냐? 시장을 경제적 주체로 삼은 이데올로기다. 경제를 시장체제 원리에 맡기면 시장의 자율적 규제기능을 통해 경제적 효율성이 최대화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시장경제 논리 배후에 있는 시장의 자연적 합리성에 맡기면 모든 것이 제대로 해결되리라는 시장만능주의를 신봉하는 하나의 종교다. 시장이 주체가 되는 이 사회질서에선 그 안에서 발생될 사회적 불평등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사유에선 사회정의가 자연히 부정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시장이 우상화되고 시장이 신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 사회는 소수에 의한 부의 독점으로 가난한 이들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고 불평등이 심화되며 인류 다수를 절대적 빈곤으로 몰아갈 뿐 아니라 생태계를 파괴시키며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등 삶의 질은 떨어지면서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이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공기업의 민영화 중산층 붕괴 빈부의 양극화 일용직 비정규직 노동자 급증 청년 실업자 증가 신용불량자 증가 생계형 범죄 증가되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로 인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하는 생존사회가 되어버렸다. 이로써 한국 사회 공동체는 해체된지 오래다. 모든 이가 자기부터 생존하려는 생존사회가 되어버린 이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이니까...라고 한숨짓는다. 심지어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1976)』에서 인간의 본성은 유전자부터 이기적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유전자가 이기적이어서 자기에게 유용할 때에만 협력하며, 생존 경쟁을 위해서만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적 유전자에 입각한 사회생물학적 인간관이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인간관을 뒷받침해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바로 오늘의 생태위기를 가져온 것이다.

하루에 100가지 종류의 동식물이 멸종해가고 2만헥타르(6050만평)의 사막, 8600만톤의 토양침식을 만들어내고 1억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 35억년 이어져온 지구의 창조 진화과정이 멸종으로 인해 급속히 끝나가고 있다. 생태시스템이 안정성을 지니려면 다양성을 갖추어야 한다. 생물종의 멸종은 생물종의 다양성이 감소됨으로써 결국 생태시스템을 급격히 불안정한 상태가 되어감을 의미한다.

그 지질학적 위기를 가져온 주범으로 인간이 사용한 화석연료를 든다. 화석연료는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를 배출하여 대기조성을 변화시키고 이로 인해 온실효과가 커짐으로써 기후변화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온난화가 심한 지역은 적도가 아니라 극지방이다. 극지방의 온도상승은 영구 동토층에 수백만 년 동안 갇혀있던 메탄가스가 배출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온실가스로 메탄이 이산화탄소보다 24배나 강력하다 온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 그 결과 메탄 배출은 더 가속화 될 것이다. 한번 악순환이 가속화되면 아무리 에너지 사용에 변화를 준다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 된다. 북반구의 평균기온이 다음 세기에 3-10도 상승한다.

우린 이미 생태위기의 위험순위에 대해 많이 들어왔다.

예) 2007년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에서 앞으로 세계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기후변화가 38%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왔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다룬 <6도악몽>에 보면 지구의 기온이 6도 상승하면 수많은 생물종이 대량 멸종하고 결국 지구최후의 날이 올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생태 문제는 전지구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우리 각자의 문제이기도 하다. 생태운동가들은 말한다. 생태문제에 대해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내가 무심코 한 행동 하나가 우주 전체에 파급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생태문제는 내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생태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


--교회는 오래전부터 생태위기에 관심을 보여 왔다.

-1972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국제연합인간환경회의로부터 2002년 요한네스버그에서 지속가능한 개발 위한 국제 연합 세계정상회의에 이르기까지.

--1972년 스톡홀름에서 국제연합 인간 환경회의가 열렸을 때 요한 바오로 6세는 환경문제에 관심을 표명했다. 이것이 교회가 보여준 생태문제에 대한 최초의 관심이다. 이후 보다  구체적인 관심표명은 요한 바오로 2세에게서 이뤄졌다. 생태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교회입장 표명으로 요한 바오로 2세의 <세계 평화의 날> 담화를 들 수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 담화의 제5항에서 환경위기의 핵심은 심각한 도덕적 위기에서 비롯된다고 설파하셨다. 다시 말해 생태위기의 실상은 외적으로 드러난 파괴만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의 위기에서 야기된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생태위기라는 현실 앞에서 우리 자신의 내면에 대해  심각하게 성찰하도록 촉구하신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레오 13세가 1892년 발표한 회칙 「새로운 사태 1892」 반포 100주년을 기념하여 <백주년>을  발표하셨다. 레오 교황은 과학과 합류한 경제분야에서 생산구조의 새로운 형태로 자본과 노동의 문제를 새로운 사태의 하나로 들고 있다. 성 요한 바오로2세는 <백주년>에서 레오13세께서 분석한 새로운 사태가 현실화되었음을 재천명하면서 현대사회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성찰을 촉구했는데 그 중 하나가 생태문제이다. 그는 자연환경의 무모한 파괴원인은 인간학적 오류에서 찾는다. 인간은 하느님의 협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대신, 부당하게 하느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고 자연을 학대해왔다는 것이다.


3.  세계관의 변화에 따른 진보사상의 출현


1) 무엇이 진보인가?


대부분의 현대인은 옛날보다 지금이 더 발전했고 진보했다고 생각한다. 기술옹호론자들은 인간이 점점 더 적은 것으로 점점더 많은 것을 한다는 생각을 신봉한다. 기술혁신이 효율성향상을 가져왔다는 건 이론의 여지가 없다. -더빠른 비행기와 자동차를 만들기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는 건 효율성 향상을 위해 연구개발에 막대한 에너지가 투입된다는 것이다. 그결과 미국엔 단 하나의 상업적 항공기제작사-보잉-만 남았다. 더 기발한 자동차개발을 위해 드는 노력과 에너지는 전체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있다.

여기서 우린 과연 무엇이 진보인가? 우리는 지금 뭔가 결핍 속에서 살고 있고 능력에 비해 충분히 잘 지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결핍은 물질적 충족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는 생각을 주입해왔다. 즉 우린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히 인간은 더 만족스럽게 하리라고 믿어온 것이다. 물론 물질이 더 풍요로워졌고 그로 인해 편리해지고 안락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다. 상실된 것 중 가장 큰 것은 인간(생명)을 경제적 가치(돈) 아래 두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느덧 우리 삶의 첫 번째 순위가 되어버린 경제가치가 모든 걸 좌지우지하고 있음을 우린 세월호참사를 통해 다시금 재차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거기선 인간‘생명’을 우선시하지 않았다.

생명의 가치를 경제적 가치보다 하위권에 놓은 가치관이 바로 생태위기를 가져온 것이다. 인간생명의 가치가  이렇게 땅에 떨어진 마당에 자연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자원이나 경제적 가치로만 바라보는 사유로부터 자연을 자연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생태위기를 극복하려면 죽은 물질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와지지 않으면 안된다. -자연은 그저 죽은 물질로 바라보는-사유체계로는 결코 생태위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현대 진보사상은 고대부터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고대인은 역사는 점점 쇠퇴해간다고 보았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는 인류의 역사를 다섯단계로 나눈다. 황금시대 은시대 청동시대 영웅시대 철의 시대가 그것이다. 그 중 중요한 것은 황금시대이다. 고대인들은 역사가 최초의 완벽한 상태인 황금시대로부터 조금씩 쇠퇴해진다는 역사관을 지녔고 그래서 가능한 이 쇠락해지는 상태를 최소한 늦추는 일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역사관이 중세로 건너오면서 변화되었다. 즉 중세를 지배해온 그리스도교적 역사관은 역사를 시작과 과정 종말로 생각했다. 신이 인간의 삶에 관여한다고 보았기에 역사를 만드는 건 신이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즉 인간의 모든 행동 사건의 목적은 신의 계획 실현에 봉사하는 목적과 연관지어졌다. 이 중세적 삶에서 역사의 틀을 유지시켜주는 건 책임과 의무였으며, 인간의 목표는 뭔가를 성취하는데 있다기보다 구원을 얻는 데 있었다. 그 구원은 내세지향적인 것이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그리스도교의 내세지향적 구원 약속은 지상천국의 약속으로 바뀌었다. 지상에서의 천국을 꿈꾸던 이들이 내놓은 것이 바로 근대 진보사상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 진보사상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2) 기계론적 세계관과 근대 진보사상


1750년 자크 튀르고(소르본의 역사학교수)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관처럼 역사가 지속적으로 쇠락한다거나 중세처럼 신의 목적대로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역사는 일직선으로 진행하며 각 단계는 전단계보다 진보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이 현대 진보적 세계관이 나오게 된 모태이다. 이 진보사상은 기계론적 세계관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나오는데 기여한 이가 바로 수학자 테카르트이다. 그는 “수학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 중 가장 강력한 지식획득의 수단이라고 확신한다. 수학이야말로 모든 것의 원천이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혼돈과 쇠락과정으로 역사를 파악하는 그리스적 세계관은 수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보았다. 또한 데카르트는 신을 은퇴시키고 그 자리에 인간을 앉혔다. 즉 인간이 세계의 진리를 알아내고 그 주인이 되리라는 신념을 심어준 것이다. 그러자 뉴턴이 나타나 기계적 운동을 설명할 수학적 방법론을 찾아냈다.

 뉴턴은 우주가 움직이는 원리를 세가지 법칙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자연 세계는 신의 의지가 계속 투영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에 따라 구현된 불변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뉴턴은 우주를 하나의 기계로 보고, 이 기계를 움직이는 최초의 원동력을 신으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신의 역할은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에 한정되며, 한번 작동한 이 기계는 일정한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로 보았다.

아담 스미스(1723-90) 역시 기계론적 세계관에 도취되어 경제이론을 펼쳤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개념을 처음 경제학에 도입했다. 그는 개인이 시장원리에 따라 영리를 추구할 때면 늘 이 손이 개입하여 개인영리와 함께 공공의 이익도 증진되도록 조종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개인이 자신의 영리만 추구해도 이 손에 이끌려 공공의 이익을 자신도 모르게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본투자 고용 자원의 활용 상품의 생산이 효율적으로 분배된다고 보았고, 그래서 더 많은 물질적 부가 축적될수록 세계는 더욱 질서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바로 여기에 진보사상이 지닌 맹점이 숨어있다. 우리가 기술발전을 통해 진보하고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기에 빠른 속도로 고도의 기술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생태학자 뒤보는 말한다. “우리는 기술적 발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데 익숙해졌다. -그것의 목표가 아무리 사소하고 그 장기적 효과가 해로울지라도... 이것이 바로 한국사회의 경제발전을 가져왔다고 본다. 이렇듯 기술적 진보개념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가장 깊은 생각  속에 뿌리를 내렸다.


현대에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체계의 질병은 과거보다 더 빠르게 증가 확산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 기술과 결부된 위험에 대해 말하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컴퓨터에 의한 급속한 기술변화는 기술화된 사회 속에 커다란 스트레스와 정신적 불안을 가져왔다. 오늘날 기술관련 스트레스에서 오는 정신적 질환들을 “테크로 스트레스”라 한다. 이 증상은 긴장 편집증 과잉흥분 정신신체적 두통 피로 심리적 마비 자기비하 고도의 불안등이다.

그러나 이 기계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진보사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여실히 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진보사상이 말하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것이 환상임을 알려면 무엇이 이 세상의 실상인지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엔트로피법칙은 우리에게 그 실상의 일면을 말해주고 있다.


4. 엔트로피 법칙


엔트로피란 “계의 무질서도”로 정의된다. 일상언어에서 엔트로피는 사용하지 않는다. 대개 책에서 ‘오염’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어 나온다.

열역학은 150여년의 역사를 거쳤다. 열역학적 비가역성은 자연의 모든 과정에 관여한다. 그래서 생물학 지질학 경제 화학 할 것없이....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은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 획득가능한 상태에서 획득불가능한 상태로, 질서에서 무질서상태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열역학은 열과 열기관에 대한 연구에서 나왔기에 일반적 관심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 법칙은 자연의 제1법칙 제2법칙으로 인정해야 할 시기가 왔다.



열역학 제1법칙은 우주 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하고 창조될 수도 파괴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즉 에너진 창조되는게 아니라 다른 상태로 바뀔 뿐이다. 석탄을 태우면 전후의 에너지 총량은 같으나 아황산가스나 가타 기체로 바뀌어 대기중으로 흩어져 버린다 이 과정에서 사라지는 에너지는 없지만 석탄 한 조각을 다시 태워 같은 일을 할 수는 없다. 이렇게 볼 때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며(제1법칙) 엔트로피 총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함을 알 수 있다. (제2법칙)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유용한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고 일정 에너지가 무용 에너지로 전환된다는 뜻한다. 결국 무용에너지가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오염도가 높아짐을 의미한다. 열역학 제2법칙이 의미하는 건 우주의 모든 것이 무질서한 혼돈과 낭비상태로 나아가며 이를 거꾸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과 기술 발달로 인해 질서있는 세계를 창조되리라는 가설은 안 맞은 말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역사는 하나의 진보 과정으로 나아가는게 아니다.


1) 시간과 엔트로피 법칙


고전 물리학 곧 기계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시간은 과거 미래 양방향으로 갈 수 있다.

예)  나아아가라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찍은 필름이 있다. 이를 거꾸로 돌린다고 치자 그래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은 비가역적이다. 즉 시간은 한 방향 곧 앞으로만 흘러간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는 집중된 형태에서 분산된 형태-뜨거운 물을 상온에 두면 시간이 흐를수록 차가워진다-로, 질서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나아간다.

이처럼 엔트로피 법칙은 우리에게 시간의 방향을 알려주지만 속도를 알려주진 못한다. 엔트로피 과정은 시계처럼 진행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속도를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땐 빨리, 어떤 때는 느리게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이것은 우리가 엔트로피 과정이 발생하는 속도를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조절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엔트로피 속도를 가속화시킬 수도, 늦출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에너지를 소비하느냐 아니면 절약하느냐에 따라 엔트로피 속도를 늦추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 소비를 줄이면 쓰레기가 줄어들고 그만큼 엔트로피 속도를 늦출 수 있다.


2) 생명과 엔트로피법칙


석탄도 타고 나면 하얀 재로 변하듯 인간도 늙고 죽어간다. 우리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변해가는 것이 바로 제2법칙의 전개과정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음식을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얻고 난후 나머지는 밖으로 배출한다.

풀-메뚜기 개구리 송어 인간으로 이어지는 먹이사슬의 예를 들어보자.

제2법칙에 따라 먹이사슬 진행시 유용에너지는 무용에너지로 전환된다. 그래서 먹이사슬의 각 단계마다 에너지 손실이 발생한다. 먹이를 삼키는 과정에서 에너지 80-90%가 손실되어 열상태로 전환된다. 결국 먹은 에너지 중 10-20%만이 살로 변해서 다음 포식자의 에너지원이 되는 것이다. 즉 먹이사슬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에너지 손실이 많아진다.

 1사람이 1년 사는데 송어 300마리 송어는 개구리 9만 마리 개구리는 2700만 마리 메뚜기를, 메뚜기는 1천톤의 풀이 필요하다. 사람이 1년간 생명을 유지하려면 2700만 메뚜기나 1천톤의 풀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렇듯 모든 생명체는 주변에 더 큰 무질서를 창조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해간다. 생명체가 많아지고 인구수가 증가할수록 우린 더 많은 에너지원이 필요하게 된다. 한정된 자원을 지닌 이 지구에서 증가하는 생명체들이 함께 살아가려면 에너지의 흐름을 극소화하는 방향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다른 많은 생물들처럼 멸종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3) 역사와 엔트로피법칙


엔트로피 법칙은 역사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은 수렵채취시기를 거쳐 농경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이것이 발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나 실은 점차 사냥감과 식용식물이 줄어들고 새로운 사냥터도 사라지면서 재래식 수렵생활이 비경제적이 되자 농경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농경생활은 기존의 원천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이는 인류의 역사 전체가 2법칙의 반영임을 보여준다.

엔트로피 과정은 항상 극대점을 향해가며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이러한 한계에 부딪혔을 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축적된 엔트로피로 인해 사회가 질적 변화를 꾀하게 되는 것이 바로 역사의 분수령이다.

(수도회의 역사를 보더라도 엔트로피법칙은 적용된다. 어떤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수도회 규칙의 변화-예)  은둔수도회에서 활동수도회로 정주의 의미변화, 생태적 관점에서 우리는 또다른 변화가 필요한 시기다)

사회의 엔트로피 총량이 커지면 새로운 방향으로 에너지원의 이동이 일어나고 거기서 새로운 방식의 기술이 태어난다.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사회 경제 정치체제가 형성되는 것이다.

 뉴턴 추종자들이 생각한 진보적 역사는 기술 과학의 발전과 맞물려 있다. 그들은 기술이나 과학발전이 비효율적 인간의 힘을 효율적 도구의 힘으로 대치해 인간의 짐을 덜고 부를 생산한다고 주장하고 이것을 역사의 진보과정이라고 본다. 이러한 진보사상에는 기술발달을 통해 더 큰 질서를 가져온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기술발전이 가져올 생태계의 무질서에 대해선 간과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점점 더 무질서한 상태가 되어감을 의미한다. 즉 기술이 발달할수록 에너지 변환 과정도 빨라져 그만큼 유용한 에너지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무질서는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기술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질수록 에너지 소비량도 많아진다. 그래서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사회는 점점 와해되어가고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문제는 커지며 엔트로피는 증가하고 무질서는 늘어나게 될 수 밖에 없다. 이렇듯 기술이 우릴 환경의존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진보’라는 개념이 기계론적 세계관과 손을 잡게 된 건,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을 발견하고 나서다. 원래 에너지 근원은 태양에너지이었는데 사람들은 그 에너지 근원인 태양을 대신할 에너지를 찾았다. 그게 바로 석탄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인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이다.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을 손에 넣자 인간은 더 이상 자연에 기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마음대로 세계질서를 재편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마구 재생 불가능 에너지를 소비해왔고 이제 그 에너지원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엔트로피 법칙은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세계에 더 많은 기술을 도입할수록 자연에 더 많은 힘을 가할수록 우리는 환경에 더 많은 무질서를 발생시키고 인류에 다양한 문제를 만들어낸다.

지금 우리의 뇌는 고엔트로피 상태에 있다. 비일관적이고 조화되지 않고 부정확한 메시지들이 정신을 마비시키는 속도로 뇌를 폭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술적 진보덕택에 무질서한 메시지들이 점점 더 어린 나이에 뇌에 들어오고 혼란과 엔트로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열역학법칙을 이용하여 우린 실천적 삶의 영성을 도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엔트로피를 통해 우리의 영성의 공통 기반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4) 고엔트로피 사회에서 저엔트로피 사회로


재생불가능한 자원의 고갈로 인해 이제 더 이상 기존의 고에너지 산업구조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해 나가고자 많은 이들이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을 찾고자 혈안이 되고 있다. 이러한 에너지 발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의 인식전환이 아닌가 싶다.

사실 엔트로피법칙에 따른 실태를 알면 고엔트로피 사회 속에서 살아온 우리에겐 절망의 느낌이 올라온다. 그러나 절망은 고엔트로피사회를 그대로 유지하려 하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다. 만일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면 우린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고엔트로피 사회에서 저엔트로피 사회로의 나아가는 길이다.



        고엔트로피사회

      저엔트로피사회

경제목표

에너지를 많이 써서 생산성을 높이고 경제성장하는 것

에너지 흐름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는 것-호혜경제시스템의 활성화—가사돌봄 상호부조 두레같은 협동조합, 생태공동체 자급자족 공동체.

노동의 의미

대량생산의 목적은 대량소비이고 노동은 이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생산과정 전 단계에 걸쳐 인간의 노동을 없애고 기계를 통한 자동화를 도입함으로써 인간을 기계의 한 부속품으로 여긴다. 그래서 노동이 지닌 초월적 의미를 상실해 버려 노동은 그저 짐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뿐.

노동이야말로 의식계몽상태에 도달하는 필수 요소라고 본다.

 노동은 수면 명상 놀이처럼 삶의 균형에 필요한 활동으로 여긴다


소비의 의미

소비는 미덕

 –소비하면 할수록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 소비증가에 따라 그만큼 에너지가 소비되고 무질서가 가속화되어감은 생각지 않는다.

윤리적 소비 장려

-소비가 바뀌면 생산이 바뀐다. 즉 생산률을 줄이는 건 소비자인 우리에게 달렸다. 내가 어떤 걸 사느냐에 따라 그 물건의 생산여부가 결정된다. 이것이 윤리적 소비다.

소비는 더 이상 인간존재의 목표가 될수 없음을 자각하여 물질적 소비를 줄이고 소욕지족 검약한 삶을 지향한다.

인생의 궁극목표

에너지 사용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만들어내고 이로써 모든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지상천국을 건설하고자 한다.

물질적 욕구 충족이 아니라 우주 전체와 하나됨을 추구.

 존재하는 모든 걸 통합하는 절대적 원리와 하나가 됨을 지향.

우주와의 관계회복. 이는 한마디로 “그것은 당신이다.(tat tvam asi)



열역학법칙에서 실천적 삶의 철학을 도출할 수 있다.


**고혈압 진단받았을 때


-고엔트로피적 처방- 계속 동일한 삶의 방식으로 살면서 약을 통해 높은 혈압을 조절하는 것. 제2법칙은 의약 처방을 비롯한 모든 과정이 엔트로피를 증가시킴을 말해준다. 즉 부수효과가 산출된다고. 투약에 의해 다른 의학적 상태가 진전되고 그 무질서를 개선키 위해 또 다른 의학적 개입이 필요. 보건에 대한 고엔트로피적 접근방식은 온갖 종류의 생의학적 처방을 개발하는 것이다.

-저엔트로피적 처방-소금섭취 줄이기, 적절한 식이요법, 체중감량, 적절한 운동 등으로 문제를 자연적으로 제거하려 노력. 약에 의존해서 생겨나는 부수위험이 없다. 열역학은 오직 필요할 때만 약을 쓰라.

-저엔트로피 방식은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한 습관을 조장하는 것. “한번의 예방이 두변의 치료보다 낫다”-매일 규칙적 세끼 식사. 흡연금지 매일 8시간 잠, 규칙적 운동 하루 1-2잔이상 술 안 마시기

-변형과정이 가장 적게 거친 음식을 먹는다-냉동식품이나 통조림은 적게

고기를 적게 먹으면 전체 엔트로피 산출에 더 적게 기여한다. 예)쇠고기 1칼로리 에너지산출위해 식물에너지 약 22칼로리 필요


5. 저엔트로피 사회에 필요한 영성


1) 노동의 의미 회복


  현대에 들어 자본주의 산업경제가 지향해온 대량생산 경제체제로 인해 기계와 인간의 노동 사이의 주객 관계가 뒤바뀌었다. 종래에는 인간이 생산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지녔는데 반해, 자동화와 분업화의 기계 시스템에선 노동자는 단지 숙련기계의 ‘노동’을 보조하는 역할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인간에게 노동은 생계수단의 의미로 전락해버렸다. 

이와 같이 인간이 생산시스템의 부수적 투입요소로 전락해버린 사태를 레오 13세 교황님은 ‘새로운 사태’로 보신 것이다. 새로운 사태란 인간의 노동이 기계의 수단으로 전락함으로써 인간의 삶 또한 존재의 목적론적 삶에서 소유의 삶으로 변화되고 말았음을 말한다. 레오13세는 <새로운 사태>에서 노동이 지닌 신성성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의 문제의식은 성 요한 바오로 2세에게로 이어졌다.

그분은  <노동하는 인간(1981 9 14)> 제 25항에서 노동의 의미에 대해 인간이 하는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일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가르치신 바 있다. 즉 하느님은 우리가 하는 노동을 통해 지금도 창조활동을 계속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창조가 이제 인간의 노동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비록 하찮은 것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활동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의 비유에서 그 의미를 엿볼수 있다. (마태 25, 26-28) 예수께선 이 비유에서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은 사람 곧 자신의 재능을 숨겨두는 사람을 호되게 질타하신다.(달란트를 활용하지 않는 종에게 가진 것마저 빼앗아 쫓아버리라고 하심.)

 - 그것은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통해 하는 노동은 단지 자신의 풍요에 머무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일의 연장선 상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노동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창조사업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노동의 심원한 동기가 있다. 또한 인간은 노동의 수고를 통해 매일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하느님 아들의 구원사업에도 동참한다. 즉 인간 노동에 수반되는 노고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러 오신 일(요 17 4)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구속정신으로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활의 서광은 노동의 수고를 통해 인간과 세계에 참여하는 새 하늘, 새 땅(1베 3 13)을 선포함에서 비롯된다. 노고를 거치지 않곤 새 하늘 새 땅에 참여할 수 없다.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는 노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남은 십자가를 채움으로써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수도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생겨나는 미세한 균열들은 바로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알게 모르게 현대 세속적인 문제가 우리 수도공동체 안에도 들어와 있다. 우린 우리가 하는 사도직활동을 수도생활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진 않은가? 

이 문제들에 대해 “기도하고 일하고 독서하라”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가르침에 비추어 성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성규48장 24절 “매일의 육체 노동에 대하여” 참조).

“자신의 손으로 노동함으로써 생활할 때 비로소 참다운 수도승들이 되기 때문이다.”(성규 48, 8)


2) 생물권 의식 회복


a) 그리스도교의 인간이해


생태위기를 극복함에 있어 무엇보다 필요한 건 인식의 전환이다. 앞서 생태위기는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비롯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 안에서 인간 역시 각각 독립된 존재인 개체적 존재로 이해해왔다. 그래서 개인이 강조되고 개인과 개인 사이의 경쟁을 통해 사회가 발전해 나간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현 자본주의의 이론적 근거가 되어 온 신고전주의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경제적 인간, 곧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규정한다. 이 인간관에서는 인간을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본다. 즉 모든 인간의 행위는 결국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창세기에서는 인간의 정체성을 두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 사제계 문헌인 창세기 1장 26-27절에선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야훼계 문헌인 창2장에선 인간이 흙으로 빚어진 존재로 그리고 있다. 즉 그리스도교적 인간 이해에 있어 인간은 신의 모상이면서 동시에 먼지의 존재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인간을 자연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존재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린 인간의 정체성을 하느님의 모상 쪽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주 망각해왔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표현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인간이 하느님의 협력자로서 세상을 돌봐야 할 책임성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의미이지, 세상의 지배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측면은 청지기-인간의 책임성-라는 표상에서 잘 드러난다.

청지기란 창조된 세상을 가꾸고 돌봐야 할 책임성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청지기 직분은 일그러진 모든 관계를 새로이 회복하는 것 외에 다름 아니다.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는 “인간에게 부과된 책임성을 인간의 자유 이전의 것으로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인간 안에 새겨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책임성은 인간이 창조 때부터 부여받은 인간 본연의 정체성이며 그래서 인간은 창조때부터 책임성을 부여받은 청지기라는 것이다. 청지기라는 정체성과 자연의 일부라는 우리의 또 다른 정체성은 생태위기를 극복할 주체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지구신학적 생태영성을 말한 토마스 베리(1914-2009)는 지질학적으로 우린 지금 6500만년간 계속되어온 신생대의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를 생태대라고 표현한다. 즉 생태대란 모든 생명체가 상호공생관계를 유지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시대를 의미한다. 생태대의 가능성 여부는 우리 손안에 달려 있다. 우리가 무얼 선택하느냐에....토마스 베리는 생태대라는 새 시대가 열리려면 정치 경제 대학 종교에서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우리의 영성이 우주의 신성한 차원으로 다시 회복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주적 차원의 영성이란 다름 아닌 인간이 다른 생물과 함께 공유하는 이 생물권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독립된 개체로서의 존재를 강조해온 근대로부터 관계적 의식 곧 생물권 의식의 회복이 그것이다. 생물권적 의식을 잘 보여주는 사유가 바로 불교의 인간 존재 이해방식이다.


b) 불교의 인간 이해


불교의 인간 존재 이해는 연기緣起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붓다는 인간사의 근본 문제의 원인을 무지와 무명無明에 있다고 보았다. 진리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무명은 다름 아닌 ‘나를 독립된 자아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나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세상만물과 깊이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육안으로는 독립된 하나의 개체처럼 보이지만 이는 다만 우리의 육안을 통해 그렇게 비춰진 것일 뿐, 존재의 실상은 오온의 결합이다.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생각할 때  우리는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고정시킨 채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이 존재의 실상을 누구보다 깊이 자각하셨고 그 깨달음을 연기로 표현하셨다.

우리가 한 순간도 다른 존재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며,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생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첫걸음이다. 이를 모르는 것이 바로 ‘생태적 무명’이다. 곧 생태적 무명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을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여기는 데에서 비롯된다.

생태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신토불이身土不二 또는 의정불이依正不二로 표현하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나의 생명이 삼라만상의 생명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나의 존재가 자연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이 바로 ‘생물권적 의식’이다.

다행히 지금 지구에 사는 이들은 인터넷 등의 메스 미디어를 통해 거의 동시간대에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로서 공감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형성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를 재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알 수 있다. 지진이나 태풍이 일어난 곳에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생물권의식이야말로 우리의 본능에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보편적 공감적 유대관계를 다지기 위한 노력은 기후변화와 대량 살상무기의 증식이라는 형태로 무섭게 속도를 올리고 있는 엔트로피라는 괴물과 충돌하고 있다는 것도 잊어선 안된다. 따라서 우리의 본래성 안에 내재된 공감의식을 키워가야 한다. 그것은 사회적 힘이 분열로 동요하는 결정적 순간에 공감의식은 종종 무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지구촌의 붕괴여부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


6. 결론


우리가 처한 생태위기는 다름아닌 잘못된 가치관과 세계관-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을 자연과 동떨어진 생명체로 보는 것과 다른 하나는 생명체는 결핍 속에서 살고 있고 그 결핍을 더 많은 재산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현대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우린 그저 물건을 사는 소비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새로 만든 물건을 판매할까에 급급한 기업인들 중심의 경제체제에선 자연은 말할 것도 없고 생명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지 오래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린 신자유주의 속으로 빨려들어가 살아가고 있다. 우린 이 뒤바뀐 인식을 다시 제자리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기계론적 세계관에 의한 진보사상의 허구성에 대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저엔트로피 사회가 되려면 우린 뒤바뀐 가치들-인간과 기계의 주객전도, 자연의 물상화-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생태위기의 현실은 우리에게 세계관의 변화, 인간성의 회복과 실천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우리 자신이 엔트로피가 일어나는 속도를 가속화하거나 늦출 수 있음에 대해서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능한 에너지를 적게 쓴다면 엔트로피과정을 늦추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베네딕도 성인이 지향하신 새것과 옛것을 골라낼 줄 아는 분별의 덕, 내적 통찰력이 (64, 9)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오늘날 베네딕도 성인이 사셨다면 생태적으로 사는 삶의 방식에 대한 식별을 강조하셨으리라 생각한다. 질병도 생태계 조화에 필요한 부분으로 본 세균학자 르네 뒤보는  베네딕토 성인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생태영성을 적극적으로 살아간 인물로 꼽는다. 즉 그는 <안에 계신 하느님 A God Within> 2장에서 지구신학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베네딕토 성인이며 그는 청지기의 책임을 통해 인간조건을 충실하게 이행했다고 평가했다. 우린 베네딕토 성인이 남긴 규칙서를 통해 구체적으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어떻게 조화로운 공생관계를 이룰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된다.


<문제제기>


1.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는 저엔트로피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나와 공동체는 구체적으로 삶에서 무엇을 식별하고 변화를 위해 나아가야 하는가?

2. 우리를 포함하여 이 사회 구성원의 의식을 생물권 의식(공감의식)을 강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