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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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연구

삼대 서원의 생태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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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14-05-1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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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서원의 생태적 의의

                                                                                                                                최현민(씨튼연구원장)


1. 생태적 청빈


앞서 우린 생태위기 상황 속에 놓인 현대사회의 기계론적 가치관에 대해 그리고 저엔트로피 사회로 나아감에 있어 생물권적 의식상태가 필요함에  대해 함께 살펴보았다. 이에 바탕하여 이 시간엔 우리가 서원한 3대서원을 생태적 관점에서 성찰해보려 한다. 먼저 청빈서원부터 살펴보자.

현대수도자들에게 가장 도전으로 다가오는 건 무엇인가. 그건 바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물질적 안락과 편리함에 젖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가진 것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우리의 마음도 늘어나는 물건들에로 시간과 정력을 뺴앗기게 되진 않나? 스마트폰 컴퓨터 인터넷 검색 등. 우리가 하루 24시간 중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인터넷 검색 등에 쓰는 시간은 얼마나 되나? 이렇듯 소유물이 늘어날 때 시간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마저도 빼앗기게 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많이 가져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선전한다. 소유하는 것들이 많아짐으로써 우리 삶은 그만큼 안락해지고 편안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유물의 양을 행복의 척도인양 여긴다.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적 가치관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행복관은 어떤가?

 우린 혹 청빈서원은 극기와 희생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진 않은가? 만일 청빈한 삶을 단지 극기와 희생의 삶이라고만 여긴다면, 그것은 청빈을 소극적으로 정의한 것이 아닐까?

수도자인 우리가 세상적 행복을 버리고 다만 희생하고  극기하기 위해 수도생활을 하고 있나? 우리 역시 행복해지기 위해 수도생활을 하고있지 않는가?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방향이 다를 뿐이다. 우린 결코 소유함에서가 아니라 존재함에서  행복을 찾는다.

 우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제로 믿고 따르라고 집을 나선 이들이다. 사막으로 나선 안토니오 성인처럼 우린 행복이 소유함에 있는게 아니라 존재함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우린 청빈서원의 의미를 바로 그 존재적 행복에서 찾아야 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함인가?


1) 존재의 근원에 대한 자각


자본주의적 인간관은 우리가 마치 독립적으로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율적 존재인양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독립된 개체끼리 경쟁을 하도록 자극해왔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인간관이 결코 인간의 본래성일 수 없다. 그리스도교에선 인간의 본래성을 어떻게 보나?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그 본래성 곧 하느님의 본성을 부여받았다. 하느님의 본성이란 다름 아닌 관계성이다. 하느님도 삼위로서 서로 호혜적 관계성을 지니셨다. 그래서 인간은 단독자로서 존재할 수 없고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 속에서 삶이 가능하다. 이는 사람이 상호호혜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세상은 우릴 끊임없이 경쟁 속으로 몰고 가서 우리의 본래성으로부터 역행하도록 자극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의 방향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려면 인간의 본래성 즉 호혜적 존재성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벌, 나방, 벌새, 박쥐는 꽃에서 식욕을 채우는 동안 꽃들에게는 교차 수정을 해준다. 동물은 과일을 먹고 난후 풍부한 거름으로 소화되지 않은 씨를 배설한다. 이로서 씨는 자유롭게 다른 곳으로 수송된다. 새 한 마리가 열매를 쪼개 식사를 즐긴 다음 날아가 버리면 먹다 남은 것을 좋아하는 다른 종류의 새가 와서 그것을 깨끗하게 치운다. 심지어 동물의 배설물도 그렇다. 썩은 고기를 먹는  동물은 번개같이 와서 동물의 배설물을 처리한다. 이렇듯 창조물들은 그들의 삶의 매 순간마다 협력하는 교감을 나눈다.

이렇듯 자연계에서의 존재함은 다른 존재와 호혜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렇듯 존재의 근원에는 상호의존성이 자리하고 있다. 자연의 모든 생명체 중 상호의존적 관계에서 제외된 생명체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자연계에는 이 호혜적 관계를 통해 서로 나눔으로써 낭비가 없는 것이다. 초목 혹은 나무는 엄청난 양의 씨를 만들어 내는데 반해, 실제 종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씨는 상대적으로 매우 소량이다. 그래서 우린 그 엄청난 양을 낭비라고 보기 쉽다. 그러나 사실 낭비되는 씨는 없다. 씨는 썩어 땅을 기름지게 하거나 동물 혹은 새들의 먹이가 되고 그런 후 배설물이 되어 땅을 기름지게 만든다. 재순환 혹은 퇴비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은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그 상호 호혜적 관계를 통해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는 검약의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자연계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서약한 청빈서원을 되돌아보게 된다.

과연 우린 수도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필요를 보고 민감하게 대처하며 서로에게 상호호혜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일을 협력하면 시간적 낭비와 에너지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자신이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관계적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청빈서원을 지키는데 있어 가장 근본이 된다고 본다. 만일 우리 공동체에서 상호호혜적 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 오늘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막기 위해선 경쟁이 아닌 협력의 경제 시스템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호혜경제시스템이야말로 에너지 흐름을 가능한 한 최소화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호혜경제시스템의 활성화하려면 상호부조, 두레같은 협동조합을 활성화해야 한다. 생태공동체도 그 중 하나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공동체에서 하고 있거나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2) 소욕지족


세계 영성가들은 한 목소리로 “비울수록 충만해지고 적게 가질수록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영적으로) “더 많이 가진 자 일수록  더 적게 소유한다.

간디-“문명의 본질은 욕구를 증가시키는데 있는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를 포기하는데 있다. 우리가 찬양할 건 절제 단순함 자발적 가난 한계의 인정”이라고 말한바 있다.

<바가바드기타>에는 “물질에 대해 생각하면 인간은 거기에 집착한다. 집착에서 갈망이 생기고 갈망에서 분노가 태어난다. 분노로부터 상상이 생기고 망상은 기억을 지워버린다. 기억을 잃으면 분별력이 없고 분별력이 없어지면 파멸한다. 이렇듯이 세계 위대한 스승은 모두 저엔트로피사회에 내재하는 가치를 칭송했다.

소욕지족(少欲知足)할 줄 아는 지혜, 거기에 행복의 비결이 숨어있다고 말이다.

소욕지족이란 아무 것도 지닌 바 없는 무소유 상태가 아니라 최소한의 것을 갖고도 거기에 만족할 줄 아는 상태를 말한다.


베네딕도 성인은 성규 33장에서 개인 사유권을 금지하고 “이를 악습으로 규정하면서 수도원에서 뿌리채 뽑아야 한다”(33.1)고 강하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철저하게 개인 소유를 금지한 건 탐욕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건 탐욕이 다른 악을 불러일으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선 탐진치(貪瞋痴)라 하여 탐욕이 三毒중 하나다.)

또 베네딕도 성인은 성규  34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적게 필요한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상심하지 말 것이다. 반대로 많이 필요한 사람은 자신의 약함 때문에 겸손해야 하며 자기가 받은 자비로 인해 교만해져선 안된다.” 이렇듯 각자의 필요함에 따라 융통성있게 소유를 조정하시는데 여기선 영적 성숙함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적게 필요를 느끼는 사람은 그만큼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인데 비해 많이 필요를 느끼는 사람은 영적으로 연약한 사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인은 적게 소유하고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참된 수도자의 모습임을 말해주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다. 소욕지족이 그것이다. 어떻게 내면의 만족을 얻을수 있나?

- “마음을 닦기를 원하는 자들은 밖에서 찾지 말라” (願諸修道之人 切莫外求) (지눌의 『수심결(修心訣)』)

-불가에선 지혜를 '깨달음'으로 표현한다. 지혜를 얻으려면 탐욕의 허망함을 깊이 앎으로써 탐욕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와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깊이 알 때 삶이 바뀌고 우리의 삶이 바꿔야 세상이 바뀐다.

우리는 세상이 바뀌기를  요구하지만, 정작 바뀌어야 할 세상이 바로 우리자신이다.


 "영성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작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게 된다. 영성이 낮으면 많이 가져야만 만족한다. 아니, 영성이 낮으면 많이 가져도 만족할 줄 모른다. 인간에게 '만족함'이 중요한데, 이는 소유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건 바로 '영성'을 통해 가능해진다. 작은 것으로도 크게 살 수 있는 길, 그것이 바로 영성의 길이다. 석가모니께서는 밥을 얻어먹고 맨발로 돌아다니면서도 불만이나 공허함이 없었다. 어떻게 이 작은 것들로 만족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깨달은 지혜가 깊었기 때문이다."

 (2009년도 씨튼 연구원 종교대화 11월 강좌에서 하신 서종범 스님의 말씀)


-『화엄경』「십지품」에서는 깊이 알기 위해 심심력(深心力)과 승심력(勝心力)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준다.

심심력으로 자기 본래성을 깊이 자각하고 우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깊이 알고, 승심력을 갖고 자본주의적 가치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나가는 것이 생태위기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동체의 부유함

성인은 성규33장에서 개인소유의 포기를 강조함에 비해 34장에선 저마다 필요한대로 나누어도 좋다고 하여 각 사람의 필요의 차이를 인정한다. 여기서 성인은 무엇보다 예루살렘 초기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고 공동소유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될 것은 개인의 청빈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청빈문제다. 사실 부유한 공동체의 가난한 수도승이야말로 오늘날 수도공동체의 외적 비대화를 초래한 공동소유의 한계가 아닌가 싶다. 부유한 공동체의 가난한 개인도, 가난한 공동체의 부유한 개인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적 청빈에 대한 성찰 또한 필요하리라 본다.


<문제>


1. 우리가 상호호혜적 관계를 지니고 살아가는데 장애되는 건 무엇인가?

2. 내가 소욕지족하며 살아가는데 장애되는 건 무엇인가?


2. 생태적 순명


보통 순명하면 원장에게 하는 상하적 순명을 떠올린다. 그런데 오늘날 순명서원의 측면에서 중시되는 건 상하복종보다는 서로간의 순명이다. 베네딕도 성인도 규칙서 5장에선 수직적 차원에서의 순명을 말하지만 규칙서 71장에서는 수평적 차원에서의 순명을 말씀하신다.

“모든 이는 순종의 미덕을 아빠스에게 드러낼 뿐 아니라 형제들끼리도 서로 순종해야 한다”(71, 1)

성인이 상호순명을 강조한 건 불순종이 가져올 해악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일이 잘못되었을 때 ‘지체없이 그 자리에서 보속하라’고 하셨다. 더 악화되기 전에 슬픔과 용서의 제스처를 신속히 하지 않으면  균열과 상처가 커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서로 간의 순종이라는 도전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나? 사실 공동체 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 중 서로간의 순명 부분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서로간의 순명이 싶지 않은 이유는?

경청하기를 힘들어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성인도 규칙서의 머리말에서 성인은 “아들아 스승의 계명을 들어라 마음의 귀를 기울려 경청하여라.”고 하셨다.  현대에는 자기표현은 잘 하지만 남을 경청하는 데에는 서툴다고들 한다. 듣는게 어려운 건 들으려면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다른 이의 생각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함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많은 것을 (정화)할 수 있다. 즉 내 마음 속에 불복종 지배욕 아집 등이 경청을 통한 순종으로 인해 정화된다. 이렇듯 순명은 내 마음에 있는 나의 아집 뿐 아니라 나의 순명을 통해 타인의 마음도 정화시켜준다. 상호순명을 통한 정화와 관련하여 자연계의 한 예를 들어보겠다.

많은 물고기들이 체외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는데 이들은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이 기생충들은 물고기의 눈과 코, 비늘 밑, 혈액이 많은 아가미와 입속 피막 등에서 산다.

그럼 물고기들은 어떻게 기생충을 박멸할 수 있나?

물고기들(숙주 물고기)이 기생충을 통제하는 방법은 클리닝 스테이션(cleaning station)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클리닝 스테이션에서는 기생충을 잡아먹어 주는 청소물고기나 청소새우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는 바다 공동체의 중요한 관계성 중의 하나이다. 청소받는 물고기들은 청소하는 물고기가 아가미 심지어 입에 들어가 먹이를 찾도록 놔둔다. 청소하는 동물은 기생하는 것을 잡아 먹고 그 주인이 되는 물고기는 기생충을 방지하게 되고 더 환해지고 깨끗해진다. 어떤 관찰자는 하루에 300마리의 물고기에 이런 방식의 서비스를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24)

예) 악어와 악어새라는 물새의 공생--악어가 주동이를 벌리면 악어새가 입속으로 들어가 입안청소를 하고 기생충을 제거해준다.

 청소행위는 서로 생존하려고 싸우는 현상의 정반대 현상으로 자연 속의 상호협력 행위이다. 이 공생행위가 일반인과 과학계 양쪽 모두에게 감동적인 자연의 신비로 받아들여져 화제가 되었다. 이와 같이 “청소 공생”의 예는 상호순명을 통해 우리가 내적인 비움을 통해 영적으로 정화되는 과정과 흡사하다. 순명은 내적으로 청소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서로 간의 순명은 다름아닌 같은 방향을 지향하는 이들간의 상호 협력이라는 말을 바꿔볼 수 있다. 현대사회는 경쟁의 논리를 부축여 왔다.

피터파커는 경쟁이란 경쟁은 개인의 이득위해 개인들이 벌이는 제로섬게임이며 관계의 그물망을 용해시키는 산이라고 말한 바 있다. 경쟁의 논리는 인간은 개인으로 바라보는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공동체에 이런 경쟁의 분위기가 있다면 그건 공동체를 와해시켜버리는 요인이 될 것이다. 함께 더불어 가야 하는 공동체 안에는 당연히 갈등이 있다. 갈등이 있는 게 자연스럽다. 문제는 이 갈등을 어떻게 공동체를 살리는데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문제제기>


우리 공동체에서 상호순명과 관련한 갈등이 있을 때 어떻게 해결하나?


3. 생태적 정결


1) 동체대비(同體大悲)사상


오래 전 천성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지율스님의 단식투쟁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 적이 있다. 그 당시 스님은 “굴삭기가 천성산 꼭대기에서 산을 무너뜨릴 때 마치 산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고” 그때 스님은 산에게 자신이 구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 후 스님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투를 하며 천성산을 살리기 위해 단식했다.

이러한 지율스님의 단식투쟁은 “자연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는,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불교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동체대비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신토불이라 함은 자연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우리 몸이 자연의 몸과 둘이 아니라는 신토불이 사상은 붓다의 깨달음인 연기의 다른 표현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의 자비는 존재의 실상인 연기에 대한 자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연기적 존재이기에 자연의 아픔을 보고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가 상호 연관된 하나임을 말하는 연기의 실상은 나의 존재가 다른 모든 존재와 동체(同體)임을 자각케 한다. 곧 자아가 자연에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아의 확장을 통해 나의 생명이 삼라만상의 생명줄과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에서 자비행이 나온다 이것을 동체대비라 할 수 있다. 스님들이 출가를 통해 추구하는 삶은 다름 아닌 자리리타 즉 동체대비의 실천에 있다. 십우도는 이를 잘 보여준다. 소로 상징되는 자기본래성을 찾는데서 시작하여 자비행을 배푸는데에서 완성됨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출가행은 위로는 깨달음, 아래로는 자비행(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지향한다. 이러한 불교의 출가의 의미를 가톨릭 수도자들이 정결서원과 비교해보자.


2) 출가와 정결서원


불교의 自利利他를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선 어떻게 말할 수 있나? 불가에서 自利가 연기라는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데 있다면, 그리스도교에서의 존재의 실상이란 인간은 근원적으로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의 본성인 삼위의 관계적 존재성을 닮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가은 본래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온 존재이기에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찾는다.

군중 숲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진정한 의미의 고독을 갈망한다. 우리 인간은 본래부터 하느님께로부터 왔기에 하느님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고독이 필요한 것이다 기도는 바로 그 고독을 살게 만든다. 그 고독 속에서 삶의 에너지를 생산해내고 살아가게 만든다.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야말로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인 自利에 해당된다. 이러한 하느님과의 일치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은 누구보다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매일의 복음의 성찰, 일기, 명상과 기도를 통한 정진이 없이는 어렵다. 이것이 수련기에 끝나는 것도, 종신서원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평생 걸리는 일이다. 하느님과의 일치없이 수도자로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누구보다 우리 자신은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삶은 다양한 인간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살지만 우리의 자아는 내면의 신비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떠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만 의미를 찾는다면 우린 서서히 시들게 되고 말 것이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자각이 自利라면 利他는 이웃사랑에 해당된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을 재촉하고 이웃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촉구한다. 이 양자의 역동성이 우리의 정결서원이 지닌 신비다.

생태위기와 관련하여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벌새이야기를 통해 결론지어보려 한다.

화염에 싸인 거대한 숲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무시무시한 불길이 급속히 번지며 탔다. 모든 동물들이 두려워서 도망쳤다. 코끼리와 호랑이, 비버와 곰 모두가 달렸고 위로는 새들이 겁에 질려 날아 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숲 언저리로 모여들어서는 보았다.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모여 있었다. 몸은 대체로 작으며, 가장 작은 것은 몸길이 약 5cm, 체중 1.8g으로 새들 중 제일 작은 Ducductium 이라는 작은 벌새였다. 그는 숲을 포기하지 않았다. Ducductium는 재빨리 개울로 날아가서는 물 한 방울 부리에 물었다. Ducductium는 다시 날아와서 불 위로 물을 떨어뜨렸다. 다시 그녀는 개울로 가서 또 다른 물 방물을 옮기기를 계속하였다. 다른 동물들은 Ducductium의 작은 몸집이 거대한 불길에 맞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겁이 났다. 그들은 그 작은 벌새에게 소리쳐서 연기와 열기가 위험하다고 경고 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불이 너무 너무 뜨거운데, 토끼는 흐느꼈다. 연기가 너무 많아, 늑대가 소리 질렀다. 내 날개가 다 타 버릴거야, 내 부리는 너무 작아, 부엉이가 울었다. 그러나 그 작은 벌새는 고집했다. 그녀는 날아가서 더 많은 물을 길러와서 타고 있는 숲에 연이어 떨어뜨렸다. 마침내 큰 곰이 말했다. Ducductium야, 너 뭐하고 있니?  Ducductium는 멈추지 않고, 모든 동물들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어.”

--나 하나가 하는 작은 행동으로 세상이 바뀌나? -나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세상을 바꾼다. --나비효과.(북경에서 날개짓한 나비의 날개짓이 한달후 뉴욕에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

 

<토론주제>

1. 나에게 있어 정결서원은 하느님 체험에 기반하고 있나?

2. 나는 하느님 체험에서 나온 사랑의 힘으로 사도직 활동을 하는가?(나의 믿음은 나의 역사(사도직 현장)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구현되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