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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의 신현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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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3. 龍樹의 身現佛性에 대한 도겐의 해석
1) (1) 除我慢의 의미
도겐은 「佛性」권 전체의 4분의 1을 龍樹의 身現圓月相에 할애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다루고 있는 내용이 용수의 空사상이 아니라 그의 좌선에서 드러난 身現圓月相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흔히 용수는 중관사상을 확립한 불교학자로 알려졌고 따라서 용수에 대한 연구 역시 그의 공사상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도겐은 龍樹를 불교교학자로서가 아니라 釋尊에게서 전수되어온 불법의 14대째 계승자로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도겐은 공사상을 확립한 학자로서가 아니라 좌선하는 수행자로서의 용수를 부각시키고 있다.
즉 도겐은 용수를 공사상을 사상적으로 드러낸 학자로서가 아니라 좌선을 통해 드러낸 선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이로서 도겐이 자신이 전하고자 한 것이 좌선을 통해서 드러나는 正法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앞서 도겐에게 있어 불법전수는 다름 아닌 只管打坐를 통해서 이루어짐에 대해 살펴보았다. 도겐은 龍樹의 身現圓月相을 자신이 정법안장으로서의 좌선과 연관지어 해석하고자 한다.
이 때 尊者는 말했다.
尊者; 너가 불성을 보고자 한다면 我慢을 제거해야 한다.
衆會; 불성은 큽니까? 작습니까?
尊者; 불성은 크지도 작지도 않고, 넓지도 좁지도 않으며, 행복도 보 복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不死不生이다.
(그들은 이것을 듣고 모두 마음을 바꾸었다. 尊者는 앉아있는 채 自 在身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滿月輪과 같았다. 一切衆會는 다만 法 音을 들었지만 스승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회중 안에 있던 長者의 아들인 伽那提婆가 會衆들에게 말했다.)
提婆; 이 모습을 아는가 모르는가.
衆會; 지금 우리는 눈으로 아직 보지 못했고 귀로 듣지 못했습니다. 마음으로도 알지 못했고 몸으로 머물지 못했습니다.
提婆; 尊者는 불성상을 드러내어서 우리에게 보인 것이다. 어떻게 이 를 알 수 있는가 하면 그 相이 滿月과 같기 때문이다. 불성의 뜻은 확연히 허공과 같이 밝다(廓然虛明).
사람들이 불성에 대해 물었을 때 용수는 무엇보다 “불성을 보려면 我慢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겐은 “見佛性의 見은 除我慢을 의미한다”라고 말함으로써 見(佛)性의 의미를 재해석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도겐은 見性을 ‘(佛)性을 본다’는것이나 ‘성품 자체를 깨닫는다’는 의미보다는 我慢에서 벗어남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도겐의 이러한 해석은 그의 수증관의 핵심을 드러내주므로 이 문제를 보다 심도깊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도겐은 『정법안장수문기』에서 배움의 길에 들어서려는 자가 지녀야 할 첫째 마음은 我見을 버리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我見을 버린다는 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아무리 故人의 語錄이나 그 逸話의 底邊까지 잘 알고
철석같이 좌선을 해도 我見을 버리지 않으면 천만번 태어나도 佛祖의 道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불교의 진리를 깨달아도 자아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참된 佛法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이 말하려는 除我慢의 의미는 단순히 佛道에 들어선 초보자에게 권고하는 차원이 아니다. 즉 除我慢의 의미는 용수의 깨달음에 대한 도겐의 해석이다. 다시 말해 도겐은 見佛性한 용수의 경지를 除我慢으로 해석한 것이다. 용수의 신현원월상은 이러한 깨달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용수의 신현원월상이 그가 깨달은 체험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용수의 깨달음을 하나의 신비로운 경지로 드러낸 것이 아니라 我慢이 사라진 상태로 표현하고 있다. 我慢이 제거되었다함은 ‘나’라는 주체에 대한 집착인 我執에서 자유로와진 상태를 의미한다. 깨침을 하나의 ‘체험’으로 볼 때 거기에는 ‘깨달은 나’라는 ‘주체’가 남아 있다. 즉 아직 我執이 남아 있어 ‘깨친 나’에 대한 또 다른 집착이 생길 위험이 있다. 도겐이 깨침을 체험의 세계로 봄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이러한 我執에 대한 경계라고 본다.
중국선종에서 깨침의 체험을 중시해온 것에 대해서도 도겐은 경계해왔다. 그것은 바로 그 체험 안에 ‘깨쳤다는 주체’가 아직 남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도겐의 깨침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我執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는 도겐의 「現成公案」에 잘 드러나 있다.
佛道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 자기를 잊는다는 것은 萬法에 證驗되는 것이다.
佛道를 배운다는 것은 깨달음의 체험을 얻기 위해 경전이나 교리를 배우거나 수행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자기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실현해가는 것이 아니라 我執을 버리고 자기를 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기를 잊는다는 것은 萬法에 證驗되는 것이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자기를 잊는 길은 자기가 주체가 되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萬法에 의해 證驗되는 것을 의미한다. 「現成公案」에 보면 “자기를 움직여 자기 활동으로 萬法을 修證하는 것이 미궁이고, 萬法에 나아가 자기를 修證하는 것이 깨침(證)”이라고 한다. 즉 자기가 중심이 되어 행하는 모든 활동이 미궁이라는 것이다. 반면 자신의 신심을 탈락하고 자기와 만법의 상호 연관성을 자각하여 萬法에 의해 자기를 修證해 감이 참된 깨침이라는 것이다.
도겐은『學道用心集』에서 “내가 능히 법을 움직일 때 나는 강해지고 法은 약해진다. 法이 들어와서 나를 움직일 때 법은 강해지고, 나는 약해진다. 佛法은 바로 이 두 구절에 있다. 지금 참선을 배우는 자는 이를 전수하여 참된 길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現成公案」에서 도겐이 말한 ‘자기와 萬法의 관계’를 좀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내가 법을 움직이는 ‘我轉法의 길’이 아니라, 법이 나를 움직이는 ‘法轉我의 길’로 나아감이 참된 깨침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 法轉我는 我執에서 자유로와지고 자신의 신심이 탈락될 때 가능하다. 신심이 탈락되면 깨달음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깨달았다는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곧 깨달았다는 인식 안에는 아직 ‘내가’ 남아 있다. 다시 말해 깨달은 주체인 ‘내가’ 남아있는 것이다. 그 인식마저 사라진 세계가 곧 도겐이 말하려는 신심탈락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佛이 되었을 때에는 자신이 佛이 되었다는 의식은 필요치 않다. 오히려 그러한 의식에서 자유롭기에 佛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도겐의 견해에서 우리는 도겐이 미궁과 깨달음의 문제를 만법과 자기와의 관계에 대한 존재방식으로 풀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도겐에게 있어 깨달음은 자기가 주체가 아니라 만법에 의해 자기가 움직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도겐은 자기가 주체가 되어 만법에로 나아감에서, 만법에 나아가 자기를 수증하는 것으로의 방향전환을 미궁에서 깨달음에로 나아감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방향전환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자기중심에서 만법중심에로 전향될 수 있는가? 『學道用心集』에 의하면 法轉我에로의 전환은 參禪學道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如淨이 『寶慶記』에서 “참선은 신심탈락이며 신심탈락은 좌선”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행의 통로를 통해 법을 이해하는 자세에 서면, 法은 강하게 드러나고 나는 비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겐은 자기를 잊는 구체적인 수행실천을 통해 我轉法에서 法轉我에로의 역전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萬法에 의해 자기가 움직여질 때 우리는 전우주와 하나가 되고, 거기에서 자기와 타자의 구별은 사라진다. 도겐은 에고이즘(我見, 我慢, 我愛)의 자기극복과 자기부정 없이는 결코 불성의 現成을 체득할 수 없음을 『정법안장』 곳곳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我執으로부터 자유로와짐이 바로 도겐이 말한 身心脫落이다. 다시 말해 身心脫落에서의 身心은 주체적인 자아를 의미한다. 我慢에 차있는 주체적인 자아를 탈락하는 것이 곧 ‘자기를 잊는 것’이다. 도겐은 이러한 견해로 身現圓月相의 의미를 설하고 있다.
2) (2) 身現佛性
도겐은 용수가 몸으로 드러낸 圓月相이야말로 (無相三昧의 상태인) 제불의 몸을드러낸 것이라고 본다(身現圓月相 以表諸佛體). 즉 그것은 相에 얽매여 있는 상태에서 벗어난 無相三昧를 표현한 것이며 용수는 좌선을 통해 무상삼매를 보여준 원월상이라는 것이다. 도겐은 이를 실제로 알아본 자는 용수의 제자 중 提婆 밖에 없음에 주목한다. 이와 같이 提婆만이 身現圓月相의 의미를 자각했음을 강조함으로써 正法은 이를 알아본 자에게만 전수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伽那提婆尊者는 말하자면 龍樹尊者가 몸에 圓月相을 드러낸 것을 會衆에게 전하여 말했다. “이 尊者가 바로 佛性相을 드러내 우리에게 보인 것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無相三昧로 마치 그 형이 滿月과 같기 때문이다. 불성의 뜻은 확연히 허공같이 밝은 것이다. 지금 천상인간계, 대우주(大千法界)에 유포된 불법을 보고 들은 고금의 인간들 중에, 누가 身現相을 불성이라고 말한 자가 있는가?” 大千界에는 단 提婆尊者 한 사람만이 이를 알아보았다. 다른 이들은 불성이 眼見耳聞心識에 드러나지 않는다고만 말했다. 〔그들은〕 몸으로 드러남이 佛性임을 알지 못하고 道取하지 못했던 것이다. 祖師가 이를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눈과 귀가 막혀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이다. 좌선을 통해 체득하지 않았기에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無相三昧의 形이 마치 滿月같이 됨을 보고 예배해도 다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道元의 『정법안장』 중 「密語」권이 있다. 보통 密語는 선사들이 던지는 알 수 없는 말들이라고 생각한다. 世尊께서 가섭에게 전한 點華瞬目도 이러한 의미의 密語라는 것이다. 즉 언어로 전해질 수 없는 것을 點華瞬目으로 전한 것이라고 해석해왔다. 그러나 도겐은 이런 생각을 하는 자들은 佛道를 모르는 자라고 말한다. 도겐은 密語의 ‘密’을 ‘親密의 道理’로 해석한다. ‘친밀’의 의미에 대해서 도겐은 『정법안장』「見佛」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때 석가모니불은 靈鷲山에 계셨다. 그래서 藥王菩薩은 대중을 향해 말했다. ”만일 法師와 ‘親近’하게 되면 보살의 길은 그대로 손에 들어올 것이다. 또 이 法嗣를 따라서 배우면 셀 수 없는 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친밀’과 유사한 ‘친근’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法嗣에게 ‘親近’하다”는 것을 도겐은 慧可가 8년간 달마에게 배운 것에 비유한다. 혜가는 달마와 ‘親近’해진후 그의 골수를 얻을 수 있었다. 南嶽懷讓이 15년간 혜능에게 배운 것도 이와 유사하다.
이렇게 볼 때 친근이란 표현은 제자가 스승의 골수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도겐에 있어 密語는 師資 간에 전수되어온 正法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즉密語는 비밀스런 언어가 아니라 ‘親密’의 언어이다.
도겐은 이러한 해석을 통해 종래 密語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밀어를 해석하고 있다. 흔히 선종은 언어를 떠난 不立文字라고 한다.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드러나는 세계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도겐은 그 한계성을 뛰어넘는 세계를 다시금 언어를 통해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사상이 지닌 독특함을 만나게 된다.
도겐에게 있어 密語는 결코 감추어지고 비밀스런 무엇이 아니다. 모든 것은 감추어짐없이 다 드러나 있다. 곧 모든 것은 감추임없이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 ‘徧界不曾藏’이다. 도겐이 종종 사용하는 ‘편계불증장’라는 표현은 이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교의 진리를 다가서지 못함은 그 세계가 密語의 세계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 세계와 ‘친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밀하게 살지 않았기에 이미 드러나 있는 것을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世尊이 靈山에서 무수한 사람들 앞에 꽃을 들고 말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것은 그 의미가 비밀스런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드러나 있지만 그들이 붓다와 친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섭은 붓다가 든 꽃의 의미를 알아보았다. 가섭이 世尊의 密語를 깨달았듯이, 提婆도 龍樹의 身現圓月相의 의미를 알아본 것이다. 즉 세존이 가섭에게 전해준 그 ‘密語’가 꽃을 듬으로 드러났다면 용수는 身現圓月相이라는 좌선의 모습에서 드러난 것이다. 이를 알아본 자는 세존 때 가섭뿐이었듯이, 용수 때에도 提婆 한 사람 뿐이었다. 佛法은 이렇게 師資를 통해 正傳되어온 것이다.
도겐은 宋에 머물 때 龍樹의 滿月相과 관련된 독특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그가 阿育王山의 廣利禪寺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 사찰의 벽에는 석존을 비롯한 인도 중국인 조사들의 畵像이 그려져 있었다. 그 때 도겐은 33인의 조사중 제14대 조사인 龍樹尊者를 그린 그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龍樹身現圓月相’이라는 제목이 붙혀진 그림에는 圓月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도겐은 阿育王寺를 두 번이나 방문한 경험이 있었다. 貞應2年(1223) 가을에 이 그림을 보았을 때는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寶慶元年(1225) 4월말 다시 찾아갔을 때에는 그 그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안내하던 (西蜀으로부터 온 成柱라는) 知客과 함께 복도를 거닐다가 그에게 물어보았다.
이것이 무슨 變相입니까.”〔라고 도겐이 묻자〕 知客은 “龍樹의 身現圓月相입니다”라고 답했다...... 이렇게 말한 그의 얼굴에는 眞面目이 드러나지 않았으며 〔대답하는〕목소리에도 살아있는 기세가 없었다. 나(도겐)는 “확실히 이것은 하나의 그림의 떡과 유사하군요”라고 말했다. 그 때 知客은 크게 웃었지만 그 웃음 안에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곧 知客과 나는 舍利殿 및 6곳을 보는 동안 거듭 이 문제를 물어 보았으나 그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도겐이 첫 번째 阿育王山을 방문했을 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림을 두 번째 방문시 깊은 관심을 갖고 집요하게 물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에 대해 학자들은 첫 번째 방문과 두 번째 방문 사이에 도겐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라고 본다.
도겐의 깨침은 보통 그가 遊行한 뒤 如淨에게 가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때가 1225년이므로 두 번째 阿育王山을 방문한 후의 일이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할 때 도겐이 阿育王山을 다시 방문했을 때 龍樹의 身現圓月相에 대해 가진 깊은 인상은 그의 깨침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은 도겐이 龍樹의 身現圓月相을 좌선을 통한 身心脫落과 연관지어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겐은 經師나 論師들이 용수의 말을 오해하고 있다고 보았다. 용수에 관해 알려져 왔던 설화는 다만 붓으로 法座相 위에 (마치 거울과 같이 된) 一輪相을 그려 이를 龍樹의 身現圓月相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도겐은 수백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대송국의 누구 하나 이 그림 안에 담겨진 의미를 알아보거나 이해하는 자가 없음을 한탄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正法인 좌선을 사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데 대한 도겐의 한탄이다.
밝은 달은 어둡게 되었고 滿月은 부서졌다. 이 옛 것을 배우지 않고 옛 것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배움의 길에 들어선 자는〕古佛 新佛을 만나서 참된 身現으로 드러난 그림의 떡을 기뻐하지 않으면 안된다. 알아야 한다. 身現圓月相의 相을 그린다는 것은 法座 위에서 身現相해야 한다. 揚眉瞬目 그것이 端直되어야 한다. 皮肉骨髓 정법안장 반드시 兀坐(只管打坐)해야 한다. 破顔微笑로 전해야 한다. 作佛作祖이기 때문이다.
阿育王山의 知客처럼 圓月相의 의미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마치 그림의 떡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도겐은 용수의 원월상은 그저 단순한 그림으로 보지 않고 좌선을 통해 드러난 三昧의 境地를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도겐은 자신이 그 지객처럼 많은 사람들이 용수의 신현원월상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여기서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후대에 용수를 중관철학을 확립한 사상가로 보지 그를 선수행을 한 선사라는 사실을 간과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용수의 원월상은 悉有佛性과 無佛性 그리고 無常佛性을 통해 드러난 도겐의 佛性觀의 의미를 확연히 드러내 주고 있다.
이 그림이 아직 月相이 되지 않은 것은 形이 없고 說法이 없고 聲色이 없고 用辯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身現을 구하고자 한다면 圓月相을 그려야만 한다. 圓月相을 그리려면 滿月相을 그려야 한다. 身現圓月相이 되기 때문이다. ......身現을 그리지 않고 圓月을 그리지 않고 滿月相을 그리지 않으면 諸佛體를 그리지 않고 以表로 구체화하지 않고, 說法을 그리지 않고 어리석게 畵餠 한장을 그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같이 그리지 않으면 충족할 수 없을 것이다. 달은 원형이 되고 원형은 身現이 된다. 원을 배우는 것은 한 장의 錢과 같음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圓相이〕 한 개의 떡과 비슷한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圓相은〕身相圓月身이며 滿月形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一杖의 錢, 그림의 떡 한 장을 그린다고 해도 圓으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도겐은 실유불성이나 무불성, 무상불성을 통해 常으로서의 불성을 비판하고 무상불성을 말한 것은 불성이 修證의 세계, 곧 지관타좌의 세계에서 비로소 現成함을 말하고자 함이다. 도겐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석존으로부터 正傳되어온 佛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도겐은 실유불성, 무불성, 무상불성을 통해 그것은 다름아닌 지관타좌임을 말하고 있다. ‘좌선’이야말로 正法이라는 도겐의 자각은 불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좌선이 정법’이라는 도겐의 표현 속에는 수행이 곧 證의 세계일뿐 아니라 수행을 떠나 證을 말할 수 없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다시 말해 證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가 우리가 수행하는 그 자리에 현현하고 있다. 그 자리는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발버둥치는 그 나를 내려놓을 때 곧 나를 잊을 떄 드러난다. 그 자리가 바로 앉을 뿐의 자세이다. 깨닫겠다고 안간힘을 쓰며 바둥대는 그 자신이 사라질 때 안락의 법문에 들어설 수 있다. 여기서 간화선과 도겐선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간화선은 아직 깨닫고자 하는 주체인 내가 남아있다면, 도겐선은 그 나를 잊는 것이 지관타좌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기도방식으로 말한다면 간화선은 능동적 기도인데 반해, 도겐선은 수동적 기도인 관상기도에 해당된다. 능동적 기도는 내가 무얼 하고자 하는 기도인데 반해 수동적 기도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자 함을 멈춘 기도이다. 이를 불성과 연관지어 설명하자면 불성이 常으로 우리 안에 내재해 있음을 자각한 것을 깨달음(證)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도겐이 불성은 ‘常’이 아니라 ‘無常’의 세계에서 드러난다.
또한 무상으로서의 불성은 지관타좌의 세계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도겐의 관점을 제대로 이해할 때 왜 도겐이 좌선을 正傳佛法으로 보았는지에 대한 그의 시각이 제대로 이해될 것이다.
도겐의 메시지는 龍樹의 圓月相을 통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도겐은 이를 통해 용수가 전한 불법이 다름아닌 좌선을 통해 드러난 삼매임을 밝히고자 한다. 그 삼매의 경지는 다름아닌 我慢으로부터 자유로와진 상태이다. 我慢으로부터의 해방은 도겐이 가르친 신심탈락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도겐에게 있어 신심을 탈락시킨다는 것은 我執으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 따라서 지관타좌를 통한 신심탈락은 곧 용수가 좌선을 통해 드러낸 신현원월상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도겐은 용수의 원월상을 통해 지금까지 살펴본 불성의 의미를 지관타좌를 통한 신심탈락과 연결지어 해석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고자 한 佛性觀이요 수증관인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불성」권을 통해 드러난 도겐의 수증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실제로 도겐의 수증관이 지닌 독특성은 그의 초기작품에서부터 드러나고는 있으나 후기에 가서 더욱 그의 독창적인 색채가 두드러짐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귀국 후 갖게 된 문제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당시 일본에 팽배하던 임제종 선풍 속에서 도겐이 더욱 강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도겐은 1940년 이래로 자신의 수증관을 부각시키기 위해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쳤다. 그럼 1940년 이후 도겐의 저술에서 드러난 후기 도겐사상의 독특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