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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일본 그리스도교- 1. 일본그리스도교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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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일본 그리스도교
1. 일본그리스도교의 전래
일본 그리스도교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자. 어떻게 그리스도교가 일본에 들어왔는가. 1543년 처음 일본에 서양 상선이 들어왔을 때부터 서구와 접촉이 있었다. 그 후 1549년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들어왔는데 거점으로 삼은 장소가 나가사키이다. 오늘날도 나가사키 주민의 90퍼센트가 그리스도교인인 것은 그만큼 나가사키가 가톨릭 선교의 중심역할을 해왔음을 입증해준다. 곧 나가사키는 일본 그리스도교의 뿌리가 생긴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10년경 포르투갈은 강한 해군력을 가졌고 항해술도 발달해서 인도, 동남아시아를 자신들의 무역항으로 넓혀갔다. 특히 향료무역을 독점했는데 인도의 고아를 근거지로 했다. 여기서부터 아시아로 진출하기위해서 중국 광동성의 마카오에 무역기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동양진출 무역거점이 되었다. 단순히 무역거점으로만 끝난 게 아니라 선교사들의 선교거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포르투갈 상선은 마카오에 근거지를 두고 겨울에는 중국의 비단, 명주, 금을 사다가 여름에 나가사키에 두 배로 팔고 나가사키에서는 은을 사다가 마카오에서 팔았다고 한다. 그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였기에 서양의 대포, 화약 같은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서양의 선진무기를 사들이기 위해서 포르투갈의 무역을 활발히 진행해온 것이다.
이런 무역의 왕래를 틈타 일본으로 들어온 이들이 선교사들이다. 프란시스 하비에르(1506년~1552년)는 일본에 처음 들어온 가톨릭 사제다. 그분은 예수회에서 최초로 동양에 진출한 선교사로 처음에는 인도에 선교를 나갔다. 1541년에 인도 고아에서 8년 정도 활동하다가 폴 야지로라는 일본인을 만났다. 그는 가고시마에서 무역을 하던 상인으로 살인죄를 짓고 외국으로 도망온 사람이었다. 그는 하비에르를 만나 그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하비에르가 일본 선교의 뜻을 밝히자 그와 함께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들은 1549년 큐슈,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하비에르가 당시 예수회 본부와 주고받은 서신이 남아 있어서 그의 일본 선교활동에 대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편지에서 일본 선사와 토론한 내용을 적었는데 다음과 같다. ‘당신은 왜 일본에 왔소?’, ‘일본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왔소.’, ‘영혼이 무엇이오?’ ‘인간의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불멸합니다. 그래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사명을 갖고 왔습니다.’
여기서 하비에르가 가르치고자 한 것은 두 가지인데 그것은 일본 불교나 신도에 없는 유일신 신앙과 영혼불멸설이다.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그의 가르침은 일본사람들에게 상당히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신도에선 죽음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고 두려워하는데 그리스도교는 달랐고 또 그리스도교의 만민평등설 역시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다 평등하다’라는 주장이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에도시대에서는 신선하게 여겨졌으이라 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는데 그 중 사무라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하비에르는 야마구치라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야마구치 영주를 찾아갔다. 영주는 하비에르에게 당시 쓰지 않던 대도사라는 절을 주어 거기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하비에르가 일본에 체류했던 기간은 2년 3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세례받은 사람은 2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비에르에게 있어 문제는 하느님 개념을 설명하는 일이었다. 그는 처음에 신도의 신 중에서 다이니치라는 천조대신의 이름을 따서 유일신 신앙을 설명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혼돈을 줄까봐 라틴어 데우스라는 단어로 바꾸어 쓰기 시작했다. 27개월간을 일본에 머물면서 영혼불멸설, 만민평등설을 가르친 하비에르는 야마구치 등 일본 지식인들과 대화를 하다 가 동아시아의 중심이 일본이 아니라 중국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중국을 먼저 그리스도교화하면 일본도 자연히 그리스도화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즉 일본이라는 좁은 땅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보다 더 넓은 중국에 가서 선교한 후 일본은 그 다음에 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그는 중국을 향해 떠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중국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열병 때문에 중간에 사망하고 만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뒤를 이어서 일본에 선교를 한 예수회 사제는 발리냐노이다.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1579년 일본으로 건너와 1582년까지 3년 정도 머물렀다. 일본에서 예수회가 선교에 성공한 이유는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 정책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를 전혀 모르는 곳에 가서 막무가내로 그리스도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에 적응해서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연구한 것이 예수회 선교의 비결이다. 당시 일본에 선교하는 수도회도 예수회 외에 도미니크회나 파리외방선교회가 있었다. 선교 정책은 ‘일본문화에 적응한다’라는 적응주의였다. 그는 선교사들의 위치를 선사들의 기준에 맞추어서 복장도 선사들 복장을 따라 했고 선사들처럼 사마라는 호칭을 썼으며 사회적으로도 선사들과 같은 대우를 받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발리냐노의 업적 중 하나는 1582년에 로마에 소년사절단을 보낸 일이다. 그는 일본 소년들이 직접 유럽 문명과 그의 배후에 있는 그리스도교 전통을 직접 몸으로 체험할 기회를 주었다. 그는 이들이 좋은 선교사가 되어 일본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일꾼들이 되리라 내다본 것이다. 곧 유럽 선교사가 일본에 와서 그리스도교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직접 그리스도교를 펼칠 수 있게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발리냐노는 소년 사절단과 함께 유럽으로 갔다가 8년 후인 1590년에 돌아오려고 하니까 그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후였다. 곧 1587년에 추방령이 내렸기 때문에 발리냐노는 선교사 자격으로 들어올 수가 없어서 인도총독사절이라는 자격을 갖고 사절단을 데리고 일본에 다시 들어왔다.
발리냐노가 이룬 큰 업적 중 하나는 많은 상류층과 지식인을 선교시킴으로써 그들을 통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펼친 것이다. 그는 또한 신학교를 설립해서 일본인 사제를 양성했다. 그래서 신도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게 되었다. 1579년에 10만 명, 1587년에는 20만 명으로 신자 수가 불어났는데 그 중에는 농민이나 도시 유랑민이 많았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빈민들에게 만민평등설이 들어 가면서 저변의 신자층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가 퍼져나가는 상황에 위험을 느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158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리스도교 금지령을 내린 후 모든 선교사들을 일본에서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침묵’이라는 소설도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일본에 정착하고 신도 수가 증가하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당시 4만 명, 5만 명에 해당되는 신자들이 순교 당했건만 하느님은 이러한 상황에서 왜 침묵하시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엔도 슈사쿠라는 일본의 대표적인 가톨릭 작가는 <침묵>과 함께 1996년에는 <깊은 강>이라는 소설도 남겼는데 이 책들은 일본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