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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세이전의 히브리종교
기원전 200-년 경 사막에 살던 셈족은 돌무더기와 돌기둥에 대한 신앙을 지님.
돌은 사막에 사는 이에게 경계표시로 중시됨.
돌무더기나 돌기둥 있는 곳에는 종교의식이나 희생제의가 치루어졌는데 그것은 그 돌들이 원래 특별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기 때문
또한 사막에 사는 이에게 우물 샘 개울 역시 성스럽게 생각
상록수를 포함한 모든 나무 역시 종교적 힘을 지녔다고 생각. 숲은 성스러운 장소가 됨.
셈족들은 탁월한 힘이나 역동성을 지닌 많은 신적 존재를 공통으로 부르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단수는 엘, 엘로아 복수는 엘림, 엘로힘으로 표기
이는 초자연적 존재나 신격을 의미
(하느님과 연관된 것에 ‘엘’이 붙는다. 엘이 야훼로 바뀐 것은 모세에 와서 됨)
이 용어는 후에 유일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
(그것은 여러 신은 결국 유일하고 참된 신이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고 보았기 때문)
셈족들이 사용한 신의 명칭은 이외에도 주인의 의미인 아도니스와 아도니, 왕의 의미인 말락이나 몰록(히브리어로 멜렉---아비멜렉)이 있다.
여기서 히브리인들의 신인관계는 주인 왕의 의미로 비유됨을 알 수 있다.
즉 왕과 신하의 관계, 나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여기서 모든 신이 모든 부족에게 아버지와 주인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 관계는 선택된 관계라고 그들은 생각---선민사상으로 발전.
* 아브라함의 신앙
아브라함의 조상도 같은 셈족으로 사막에서 이동생활을 함.
아브라함의 부족은 한동안 바빌로니아의 우르도시근처에 살았는데 아브라함도 거기서 태어났다고 한다. 족장의 통솔하에 팔레스틴으로 이주
아브라함은 개인의 종교 체험을 바탕으로 유일한 수호신을 신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신봉한 신은 엘-샤다이( 바위나 산의 엘)이었다고 한다.
예) 출애급6,3 아브라함 이삭 야급은 신을 엘샤다이라 불렀고 야훼이름을 몰랐다.
엘-샤다이가 아브함에게 아들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명령했을 때 그는 이 명령을 그대로 따르고자 했으나 신이 양을 주어 양을 대신 바치게 되었다.
(창22-이는 고대 인신공의 관습이 동물공의로 대체되는 과정 반영)
그 후 신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아브라함은 이를 믿고 가나안땅으로 가서 거기서 정착.
아브라함 죽은 후 이삭 야곱이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 부족을 이끔. 그러나 극심한 기근으로 비옥한 고센땅이 있는 이집트근방으로 다시 이주함(요셉이야기)
<아브라함>
19세기 독일의 성서학자들이 구약의 모세오경에는 4가지 상이한 자료가 있다는 것을 판별하는 비판적 방법을 개발했다. 그 자료가 J(야웨), E(엘로힘:Elohim),신명기 기자(D), 제사장파(P )이다.
J 기자는 야웨가 하늘과 땅의 유일한 창조주인지 분명히 말하지 않고 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인간과 신 사이의 분명한 구분에 대한 J기자의 인식이다. 인간 adam은 그가 섬기는 신과 같은 신성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땅(adamah)에 속한 존재다.
아브라함의 신은 가나안의 최고신 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신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엘 샤다이(산악의 신)라 소개하는데 이는 엘의 전통적 칭호중 하나다. 아브라함의 신 엘은 굉장히 부드러운 신으로 아브라함에게 친구처럼 찾아오고 심지어 인간의 형체를 취하기도 한다. 현현이란 이런 형태의 신성출현은 고대이교세계에서 상당히 흔한 일이었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믿음은 결코 추상적인 아니라 실용적인 것이다. 야곱은 엘이 특별한 보호를 해 준다면 그 대가로 엘을 엘로힘(사람에게 신이 의미할수 있는 모든 것을 상징하는 말)으로 곧 유일하게 섬기는 신으로 모시겠다는 일종의 협상을 벌인 것이다. 신에 대한 이스라엘인의 믿음은 실용적이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엘을 신뢰한 것은 엘이 그들을 위해 힘써주었기 때문이다. 엘은 철학적 추상이 아닌 것이다. 고대세계에서 마나는 삶의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이 마나를 제대로 전할수 있다면 신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셈이었다. 이런 실용주의는 신의 역사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사람들이 어떤 특정 신관념을 계속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유용하기 때문이지 그것이 과학적 혹은 철학적으로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다. 49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이라 일컫는 것은 신의 약속이 불합리하게 보일지라도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신은 고대신과 달리 인간의 곤경에 동참하지 않았고 인간들에게 에너지를 주입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대에는 첫아이는 신의 자손이라 여겼다. 그래서 아이를 갖게 되면 신의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므로 다시 충전시키기 위해 첫아이를 신께 바쳤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이사악을 원치 않았다.)
2. 모세와 야훼와의 계약
유대인들이 야훼신앙을 갖게 된 것은 모세에서 비롯
모세는 강력한 신에 대한 개인적 체험을 했다.
그는 야훼라는 신이 산기슭에 살고 불과 연기 속에서 나타나긴 했지만 그 신이 자연신이 아님은 분명하다고 체험.
모세 역시 야훼의 성격을 완전히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그는 체험을 통해 하나의 사명을 자각
그것은 백성을 원하는 신과 신을 원하는 백성사이에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장소인 시나이로 가지 위해 자기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사명만을 알고 있었다.
모세가 이렇게 이스라엘인의 지도자가 된 것은 그의 신체험사건에서 시작
* 모세의 지도력은 이집트에서보타 시나이(호렙)산 아래서 절정에 달함.
모세는 시나이산에 이르러 야훼라는 신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중개자 역할을 수행했다.
거기서 맺은 계약이 10계명
---야훼신과의 계약을 통해 모세는 자기 민족의 종교신앙 내용을 수정하고 이스라엘인에게는 오직 이스라엘의 역사와 삶을 지배하는 유일신만이 있다는 신앙을 확립.
*이스라엘인이 이동을 계속하려 했을 때 문제가 한 가지 발생
야훼와 소통하기 위한 중개수단을 무엇으로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신을 만났는데 시나이산을 뒤고 하고 이동하면 어디서 야훼를 만날 수 있나?
이 문제는 신과 백성이 만나는 장소로 이동식 신전을 만드는 것으로 해결
신전 안에 계약조항이 새긴 돌판을 보관
--이것이 후기 히브리 역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법궤이다.
그 후 이스라엘인들은 이를 기념하는 축제 유월절과 안식일 습관을 통해 이를 이어옴
3. 야훼와 바알신
모세의 지도력은 이스라엘 종교를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모세당시나 그 후에도 아스라엘인들은 다신론적인 신앙에 얼마간 탐닉하기도 했다.
그것은 유일신 신앙이 단순히 신학상으로만 한 신이 존재함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과 실천에 대한 요구가 따르기 때문.
모세 당시 이스라엘인들이 이를 실천치 못해 시나이산 아래서 일어난 아론의 배교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모세가 40주야를 시나이산에 있을 때 그들이 난폭해짐
**가나안 정착과정은 오랜 동안에 걸쳐 진행
출애급 후 40년 방랑하던 히브리인들은 여호수아의 지휘아래 요르단강을 건너 여리고 점령한 후 중부 팔레스틴 장악. 유다와 스므온지파는 남부장악 다른 지파는 가나안 북쪽으로 전쟁없이 이주
--이와같이 전쟁, 추방, 타협 등의 온갖 방법을 통해 마침내 가나안 땅을 점령.
--히브리인은 하비루(이전에 이집트에 들어가지 않은 히브리인)과 가나안 선주민들과 함께 하나의 국가관념을 형성
--블레셋의 끊임없는 위협(기원전 1150부터 계속됨)속에서 사무엘과 사울의 영도아래 전투 사울은 길보아산 전투에서 전사 그의 계승자인 다윗이 블레셋을 격퇴하고 기원전 1020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 곳을 수도로 정함.
그리고 법궤를 보관할 사원을 만들기 계획하고 이를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실현케 함
*가나안 선주민들은 농경생활을 영위했으므로 자연종교를 숭배. 그들이 숭배한 신은 농경신 곧 바알신이었다. (토지의 소유자를 의미)
엘은 바알보다 지위는 높으나 활동은 별로 하지 않으나 바알은 지위는 낮으나 직접 농경에 관여.
(바알신앙은 자연현상 속에서 신의 행위를 찾는다.
즉 곡물의 성장 적당한 비 강력한 태양 과일의 성장 자연의 파괴력을 통해 바알신은 자신을 드러냄)
히브리농부들은 야훼신앙을 포기하진 않았으나, 바알에게 첫 수확물과 감사제물을 바쳤고 선주민 축제에도 참가.
이스라엘인들은 바알신과 야훼 신앙 사이의 갈등,
야훼신앙은 바알신앙을 포괄하지 못하고 오히려 바알신앙에 흡수되는 듯했다.
이러한 바알신 신앙에 대항하여 나온 자들이 예언자들이다.
4. 예언자의 항변과 개혁
1) 엘리야와 엘리사
엘리야는 아합왕이 통치하는 북왕국에서 나타났는데 왕비 이세벨이 바알신앙을 퍼트리고자 하자 엘리야는 야훼신앙을 강력히 주장
이세벨이 나봇을 돌로 쳐죽이고 아합에게 그의 포도밭을 차지하려 하자 엘리야는 포도밭에 있는 왕앞에 나타나 베옷 걸치고 단식하라고 야훼이름으로 저주
* 가르멜산 위에서 바알과 야훼의 대결--이는 종교기록 중 가장 극적인 장면중 하나
여기서 엘리야는 야훼가 진정한 신이고 바알은 거짓된 신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엘리야는 바알신앙을 영원히 근절시키고자 하는데 실패했다.
그것은 왕실의 반대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백성의 신앙을 전반적으로 고치기가 어려웠다.
그가 갑자기 죽자 제자 엘리사가 뒤이어 개혁운동을 계속했는데 그는 예후를 통해 정치종교개혁을 전격적으로 감행했다. 이것이 히브리역사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었다.
예후는 왕가를 몰살하고 바알신앙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팔레스틴에서 야훼의 우월성이 확립되긴 했다.
그러나 바알신앙은 이들에 의해 타격을 받았으나, 완전히 일소되지는 않고 다시 회복.
그 후에 나온 자가 아모스이다.
2) 아모스
예언기록을 남긴 최초의 예언자
그는 예루살렘 남쪽국경 지대에 태어나 거기서 양치고 돌무화과 가꾸던 사람
비교전 타지방에 비해 바알신앙으로의 전환양상이 적었다.
그러나 그가 북쪽으로 여행했을 때 그곳은 종교적 도덕적으로 무질서한 상황
그는 북왕국에 도래할 운명에 대한 계시를 받게 됨
그래서 그는 남쪽 유다에 살았지만 북왕국에 가서 그들의 멸망에 대한 예언활동을 했다.
그는 야훼의 영향력이 우주에까지 확산됨을 예언.
(비 안 내리고 전염병 돌리고 지진 등, 성좌를 만들고 밤낮을 바꿈)
즉 야훼는 우주의 창조자이며 지배자라는 새로운 신관념을 상정
3) 호세야
아모스와 동시대인인 호세아는 사랑의 신을 예언
북쪽에 태어났으므로 그 사회 상황에 익숙
그는 야훼가 자신의 백성이 저지른 불충에 고심하며 그들이 죄를 뉘우치면 용서해 주겠다는의지를 보임
어떤 상황에서도 야훼께 충성하고 용서를 빌면 희망은 여전히 있다고 주장
4) 이사야
남왕국 예언자, 기원전 742년 우찌야왕의 통치가 끝날 무렵에 약 40년간 활동
그는 아모스처럼 야훼를 단호한 정의의 신으로 보면서 호세아처럼 연민과 사랑이 있음도 보았다.
그는 심판날에 권선징악이 내려질 것이며 그 후 황금의 새 시대가 도래하리라고 주장
이사야는 신과 인간의 차이 즉 철저한 분리 타자성을 의미했다. 시나이산에 나타난 야웨의 현현은 인간과 신적 세계 사이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간극을 강조했다. 이사야는 오토가 말한 황홀과 두려움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그 누멘적 감정을 경험했다.
야웨와의 경험은 우파니샤드와 달리 한 인격과의 만남이다. 즉 무시무시한 타자성에도 불구하고 야웨는 말을 건네고 이사야는 대답할 수 있었다. 우파니샤드의 현인에서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대화를 나눈다거나 만난다는 생각은 신을 지나치게 의인화시키는 부적절한 것이다. 89
이스라엘의 신은 신화나 제의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실제사건들 속에 자신을 나타냄으로서 자신을 이방신들로부터 구별했다.91
야웨는 더 이상 백성들의 축제 신년의식 순례들을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한다.
바로 이 점이 이사야의 청중을 경악하게 했다. 중동에선 제의적 축제가 종교의 본질이다 이방종교는 고갈된 에너지를 갱신하기 위해 이런 제사에 의존했고 신들의 위엄은 부분적으로 그들 신전의 웅장함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야웨는 그런 것들이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제의 준수하는 일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느꼈다.
이스라엘인은 그들 종교의 내면적 의미를 발견해야만 한다.
야웨는 희생보다 인자함을 더 원한다.
(5) 예레미야
1) 시대적 배경
그는 사제 가문 출신으로 기원전 600년경인 20대 초반부터 활동
그가 활동한 시기는 앗시리아 왕국의 쇠퇴 후 동방의 바빌론이 위협을 가해왔고, 바빌론과 이집트 전쟁 중에서 유다는 국제적 전쟁터가 되었던 시기였다.
이와같이 예레미야는 유다가 혼란에 빠진 시기였고 유다 역사 중 가장 어렵고 험난한 시기에 활동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전해야 할 말이 유대인들에게 먹혀들어가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선지
자가 되는 것을 싫어했고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을 저주해야 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예언활동을 시작했다.
2) 예레미야서의 구성
--1-25장...이 부분은 주로 예언자의 신탁으로 구성--가장 중요한 부분
--26-45장....1) 심판과 희망의 예언(26-35장)
2) 예레미야의 수난(36-45장)
--46-51장--여러 민족에 대한 신탁
--52장--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것
- BC 599년 여호아킴이 반란을 일으키자 BC 598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공격
이에 여호아킴이 죽고 그의 아들인 여호야킨이 왕위에 앉음.
유대인들은 느부갓네살에게 바치던 공물을 중단하고 이로 인해 바빌론 군대는 유다로 공격해 들어오고 말았다.
-예레미야는 ‘항복은 생명의 길이나 저항은 죽음의 길이다.’(21, 8-9)라고 주장
- BC 609년 므기또 전투에서 요시야 사망,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 시작.
- BC 605년 가르그미스 전투
에집트와 바빌론의 대전투에서 이집트와 완패하고, 바빌론이 승리하자 팔레스 타인은 바빌론 지배가 됨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불태움
3)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불태움
예레미야는 소명받은 후 23년 동안 선포한 신탁을 그의 비서 바룩에게 두루마리에 받아 적게 했다.(45장)
야훼께서 유다를 벌하기 위해 바빌론이 침공하리라는 예레미야의 경고는 대역죄로 들렸다.
여호야킴은 그가 설교한 두루마리를 태워버렸다.
(당시 남유다는 요시야-여호아하즈-여호야킴으로 계승)
예레미야가 아무리 멸망을 예언해도 왕이나 백성은 믿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백성의 치유할수 없는 병 때문에 번민했다. (완고하고 반항적인 마음(5, 23)
“만물 중에 가장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마음이니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17, 9)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돌아오길 거부했다.
예레미야는 야훼의 마음을 옹기장이 집에서 받은 신탁으로 묘사
“옹기장이가 진흙을 잘못 빚어져 제대로 안되면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빚듯이 이스라엘 운명도 그리 될 것이다”
그는 유대들은 앞으로 70년간 종살이 하리라고 예언했다. (에레 25장 1,11)
4) 바빌론의 멍에를 메어라(에레 27, 6-8)
-당시 거짓 예언자들은 바빌론이 멸망하고 포로들이 2년 안에 돌아올 것이라 말함.
그러나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자에 대항하여 -그는 바빌론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어리석다고 예언하면서 바빌론의 멍에를 매고 섬기라고 촉구(에레28, 1-17)
이 예언을 들은 여호야킴왕을 그 두루마기를 찢고 불살라 버렸으며 유다인들도 자기말을 듣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대중의 적이요 왕에 대한 반역자로 취급되어 한 때 은둔생활을 한 것 같다.
11 18 -12, 6 죽을 자리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6, 20, 15-18 내가 태어난 날은 저주받아라
--인간 예레미야와 예언자로서의 직무 사이에 놓인 갈등
그는 천성이 조용하고 감상적인 사람, 그래서 태어나기 전부터 위탁된 자기 임무를 듣고 오싹했다.
그가 전할 메시지는 백성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모든 사람과 등을 져야할 입장이기 때문..
--그는 온땅이 시비와 싸움을 걸어올 사람(15, 10)으로 배척받을 운명을 타고나 항상 적들에게 싸여 있었고 주님의 손에 잡힌 몸이었기 때문.
그처럼 심한 고통을 받은 예언자는 별로 없다.
그도 예루살렘 포위되자 항복하였고 결국 느부갓네살은 왕과 왕족 지도급 인사들 기술자들을 포로로 데리고 갔다.
-유다인들은 끝내 바빌론에 굴복할 것을 거절했고 여호야킨 뒤에 왕이 된 시드키야는 바빌론에 반란을 일으켜 결국 죽게 되었다.
시드키야는 비밀리에 에레미야를 불러 (38, 14-28) 물어보았으나 그 결과는 그대로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빌론 군대가 처들어와 성전을 파괴하고 도시에 불을 지르고 많은 사람을 잡아갔다.
시드키야의 최후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시드키야는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가려다 예리고 들판에서 잡혀 느부갓네살에게 끌려갔다. 느부갓네살은 시드키야가 보는 앞에서 왕자를 죽이고 그의 눈을 뺀 다음 쇠사슬에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그는 이 사건을 야훼의 뜻으로 해석해서 바빌론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유다는 여전히 독립을 이루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은 채 이 목적을 위해 바빌론에 대한 항거를 지지하는 이웃 나라들로부터 사절단을 받아들렸다. (27, 2-3)
- 이 일들이 쓸모없음을 안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뜻에 의해 유다 뿐 아니라 이웃민족까지도 느부갓네살이 지배하게 될 것임을 즉각 선언했다(27,6-8)
유다백성은 그렇게 하기는 고사하고 멀지 않아 에집트가 도와주러 오리라 희망을 걸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아는 다음과 같이 비난 (예레 2, 36-37)
결국 유다는 바빌론에 반기를 듬으로써 느부갓네살 군대가 예루살렘 함락(기원전 586)되고 수많은 포로들이 바빌론으로 잡혀갔다.
“나는 이 모든 땅들을 나의 종인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 손에 넘겨주었다....어느 민족이건 그를 섬기지 않으면....나는 그 민족을 칼 기근 흑사병으로 벌하리라”
-거짓 예언자들은 그 전에도 늘상 백성들에게 허무맹랑한 낙관주의를 불어넣었듯이 이번에도 유배가 2년 이내에 끝날 것이라 선언(28, 1-2)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빌론에게 굴복하는 것이 그분이 뜻이며 그렇게 하는 것만이 이 나라와 백성을 멸망에서 구하는 길이다(38, 17-18)라고 선포했다.
그는 신이 이스라엘을 벌주기 위해 바빌로니아를 도구로 쓸 것이며 이제 이스라엘이야말로 징벌을 받을 차례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선민이 승리하리라는 교리를 거꾸로 해석하는 것이 되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인에게 신화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것을 에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예레미야가 유배자들에게 바빌론에 정착하여 그 곳에 가정을 꾸미라고 한 것은 그의 신관이 보편적 신관-즉 그가 하느님을 보편적으로 인식-을 가졌기 때문
-당시 사람들은 야훼를 다른 나라에 대해 관심도 영향력도 없는 신으로 여겼으나 예레미야는 야훼가 바빌론에도 현존하고 계심을 감지하고 있었다. (29, 11-12)
-바빌론에 대해 주권을 행사하는 것도 야훼이시고 바빌론이 번영해야 한다는 것
유배자들이 바빌론의 번영에 함께 기여해야 한다는 것도 그분의 뜻이다.(29, 7)
그러나 그는 완전한 염세주의자는 아니었고 희망의 여지도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련주기 위해 바빌론을 도구로 사용한 후에 바빌론도 멸망시킬 것이며 그 후 유다 이스라엘 백성은 방랑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
(즉 야훼는 자신의 백성에게 적당한 시련을 준 다음 그들과 새 계약을 체결할 것이라고 함)
이 새 계약은 야훼와 속죄한 개인 사이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함.
이와 같이 예레미야는 야훼와 각 개인과의 계약관계를 강조.
(6) 바빌론 유배
유다의 왕 여호아킴은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바치는 조공을 중지하고 이집트에 군사원조를 청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느부갓네살왕은 이를 알아차리고 유다의 반란을 종식시키고자 전쟁을 일으켰다.
3개월 전투에서 여호아킴은 항복했고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아낸 뒤 많은 유력자 군인 대장장이들을 바빌론으로 잡아감
그 후 다시 반란이 일어남으로써 기원전 587(586)년 예루살렘은 점령당하고 국가는 파멸지경에 이름
(학자들은 기원전 587(586)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살아남은 사람을 지칭할 때 히브리인대신 유대인이란 명칭 사용)
기원전 587년 참상을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의 생활은 전반적으로 붕괴되었다.
느부갓네살 군대는 유다를 도살장으로 만들고 유다의 중심지역의 모든 성읍은 철저히 붕괴되고 대부분 오랜 세월 재건될 수 없게 파괴됨.
바빌론에서 살던 유다인은 유다의 정치 종교 지도층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숫자적으론 소수였으나 이스라엘 신앙에 새 방향을 설정하고 이스라엘 장래를 설계하게 될 사람들이었다 .
느부갓네살은 바빌론의 유대인에게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
비옥한 땅이어서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전통적 문화생활도 보장받음.
이런 가운데 반유대주의가 생겼고 유대인은 오랫동안 반유대주의에 시달렸다.
** 시나고그의 출현
성전을 빼앗겼으므로 먼저 하느님 숭배의 새 형태가 필요
그들은 성소나 제단을 갖고 있지 않아 성전 대신 포로기간엔 종교학교인 회당(시나고그)가 등장.
야훼 신앙자들은 희생제물 바칠 예루살렘에 갈 수 없었으므로 안식일 집회를 관습화하고 나중에 바리새인에 의해 시나고그로 정형화됨
더불어 전승의 문자화에도 주력
-그들은 참담한 시련 속에서 이를 초극해 가면서 유대교를 탄생했던 것이다.
야훼신앙이 소멸될 것같은 상황에서 그들은 오히려 야훼신앙에서 희망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야훼는 이스라엘인에게 유일한 신이 되었고 초월적 신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에제키엘과 제2이사야가 출현
(7) 에제키엘
-제관가문의 에제키엘은 여호야긴왕과 함께 첫 번째 포로로 잡혀서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의 지도급 인사 가운데 하나다(에제 1,2)
그는 바빌론 유배시기의 신명기 학파의 지도자 위치에 있었다.
-597년 사로잡혀온 많은 유다인들은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바빌론에서 대단히 숙련된 工人이었기 때문
-그는 597년 바빌론으로 잡혀갔으며 그로부터 3년후 예언자의 소명을 받았다.
-그가 본 현시에는 하나의 손이 두루마리를 들고 펼쳐 보인다.
이 두루마리는 예언자가 백성들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이다.
그는 그 두루마리가 꿀처럼 달았다 (2, 9-10, 3,1-3)고 한다.
두루마리에 적혀있던 내용은 재앙과 슬픔과 통곡의 말(울부짖으며 엮어대는 상여소리 2, 9-10)였다.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에게 멸망하리라는 것은 하느님의 명령이고 바빌론에 대한 반란은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이 에제키엘의 확신이었다. (에제17, 20)
당시까지는 유배온 것에 대해 민족 전체의 죄과에 의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공동체가 지은 죄 때문에 각 개인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하느님의 불의’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무리 하느님 계명에 따라 살겠다고 해도 조상의 죄결과를 유산으로 물려받게 되므로 야훼는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불평
유배자들은 전통 근본교의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야훼께 대한 믿음 자체를 내던져 버린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에제키엘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며 그는 여기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죄가 의로운 자식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각 개인의 죄는 각 개인이 그 죄과를 받아야 한다는 개인의 의무를 강조.
이와같이 그가 개인의 의무를 강조함은 신명기 율법에 제기된 개인의 책임 강조와 깊은 관련.
그러나 에제키엘은 개인의 자유, 개인 책임의 원칙을 너무 강조하여 극단적 개인 중심 교의로 빠지게 되었다.
이와같이 에제키엘 사상에 다소 문제가 있어 보여도 유배자들이 절망 속에서 거의 삶을 부정하기에 이른 때에 그들 개인에게 자신의 신앙을 회복하도록 해 준 것은 명백한 그의 공적이다.
*희망의 메시지
-에제키엘은 멸망의 메시지를 전하다가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33, 21)과 함께 희망의 소리로 바뀐다.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야훼가 전쟁에서 패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새로운 상황에서 백성들이 극도의 절망과 양심의 가책에 젖어있을 때여서 그의 메시지는 희망의 메시지로 바뀌었다.
--마른 뼈들의 골짜기(37장)에 대한 유명한 현시
죽음의 골짜기에 내린 그는 “이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는 야훼의 명령에 따라 뼈들에게 예언을 한다.
그러자 갑자기 뼈들이 살의 옷을 입고 하느님의 영으로부터 생기를 얻어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이 뼈들은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을 상징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죽었으며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뼈는 말라버렸고 우리의 희망은 사라졌나이다”는 울부짖음이 일어난다.
**삶을 읽는 열쇄
삶이란 고정되거나 정체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이 변화의 사이클을 타고 이를 읽을 줄 아는 이, 에제키엘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주역은 변화의 철학이다.
**산지박괘(山地剝卦)
주역의 산지박괘(山地剝卦)는 단 1개의 양효가 남아 있는 형상입니다.
박(剝)은 빼앗긴다는 뜻입니다.
음적양박(陰積陽剝)의 상태, 즉 절망이 쌓이고 쌓인 가운데 오직 실낱같이 가느다란 단 하나의 희망이 남아 있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효사에는 1개 남아 있는 양효를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석과(碩果)는 씨과실입니다.
석(碩)이라는 것은 크다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씨라는 뜻도 있습니다.
'씨 과실'은 불식(不食), 먹지 않는다. 또는 먹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낙엽이 진 늦가을 찬서리 내릴 때 감나무 끝가지에 남겨놓은 큰 감을 기억하실 줄 믿습니다. '씨 과실'입니다. 씨과실은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먹히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혹독한 시련에도 최후의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터득한 조상들의 믿음입니다.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로 풀이할 수 있는 이 말은 <주역>의 64괘 중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는 박괘(剝卦)에 나온다.
박괘는 세상이 온통 악으로 넘치고 단 한 개의 양효(선)만 남아있는 상태인데, 그 한 개의 양효마저 언제 음효(악)로 전락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말한다. 흔히 다섯 마리의 고기가 꿰미에 매달려 있는 고단한 형국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 박괘는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임을 함축하고 있다.
--허위의식을 떨쳐내고 자신을 직면하기
감나무는 모든 잎을 떨구고 한겨울 삭풍을 견디며 봄을 키워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입니다.가을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서듯이 허위의식을 떨어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목처럼 우리 삶의 실상을 인식하게 되면 희망을 싹을 어떻게 틔워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떨어진 잎사귀가 뿌리의 거름이 되듯 절망은 희망의 싹을 틔우는 밑거름이 된다.
"석과불식,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다"
--당시 바빌론에 군사적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나 유배자들을 술렁이게 했는데 그들은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용기를 얻어 유다로 곧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에제키엘은 그런 계획이 무용지물임을 선언
*마음의 변화에 대한 요청
이스라엘이 계약의 백성이 되려면 야훼께서 그 인간성 안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할 것이라 말한다.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주리니 그리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내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하게 되리라
너희는 내가 너희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면서 나의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너희는 하느님이 될 것이다“ (에제 36, 26-28 11, 19-20)
*하느님과의 영원한 계약(37, 26-27)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소리에 복종할 마음을 갖게 될 것이고 하느님과 백성은 영원한 계약의 관계가 될 것이다.
(8) 제2이사야
A. 배경
--그의 일생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그의 작품이 예루살렘의 이사야(1이사야)와 함께 엮어져 있으므로 제2이사야라 부른다.
그가 활동하던 540년경은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이 죽고(기원전 605-562) 난 후 암살과 음모가 연이어 일어나 7년동안 세 번이나 왕이 바뀌었다.
그후 페르샤에 고래스왕(550-530)이 등장했는데 그는 바빌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되었다.
그는 바빌로니아왕과는 달리 포로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귀양살이하는 사람들을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주선해 주기까지 했다.
제2이사야는 고레스의 전투와 승리를 실제로 묘사하고 있다.(41, 2-3, 25)
--이와같은 시대적 배경을 지닌 제2이사야가 직무 맡게 된 시기는 바빌론 유배자들의 세대가 바뀌었을 때였다.
바빌론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라난 유다인들은 그 곳의 위압적인 신들에게 매력을 느껴 마음속에 동요가 일고 있었다.
더욱이 바빌론 주민 가운데 그리스인 리디이아니 에집트인 페르샤인까지도 포함되어 있어 우주의 본질 우주의 궁극 원인들에 관해 이해를 달리하는 견해가 있었다.
바빌론 원주민들은 천체를 꽤 조직적 방법으로 연구했으며 그 결과 과학적 점성학이 발전할 기틀을 마련해 놓았다.
그리스인들은 우주질서를 세우고 존속시킨 힘에 대해 탁구해 왔으며 페르샤인들에게 조로아스터가 그의 아후라 마쯔다아신에 관해 놀라운 주장을 선언한지 얼마되지 않은 터였다.
바빌론은 이런 다양한 주장이 범람한 중심 도시였으므로 히브리인들은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을 어떤 방식으로 인식해야 할지 당황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히브리인들은 바빌로니아인들의 신화의 의식에 접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왜 제2이사야가 그토록 야훼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주장했는지 설명해 준다.
B. 야훼의 왕권
-2이사야는 바빌론에 살던 히브리인들에게 세상에 군림하는 야훼의 왕권을 묘사하고자 했다.
-제2이사야서 시작은 야훼의 천상회의가 열리는 것
고대 관점에서 인간운명에 영향을 주는 결정은 천상회의에서 만들어짐
에누마 엘리쉬에 의하면 신들의 회의에서 마르둑에게 최고 권위를 부여하고 그가 왕이 되셨다고 외친다.
이러한 바빌론 신화와 의식에 친숙했던 제2이사야도 온 세상에 군림하는 야훼의 왕권을 유사하게 묘사
*하느님왕국 도래--이스라엘 유배는 끝났다고 선언,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귀양살이에서 고향땅으로 가는 왕처럼 야훼를 묘사(이사40,3)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C. 유일신 신앙에 대한 재해석
--제2이사야의 주요관심은 바빌론 유배에서 유대인이 겪었던 시련과 악의 문제였다.
그는 히브리인들이 겪은 시련은 “야훼의 계획 속에 있는 세계 구원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즉 야훼는 한 민족만 구원하지 않고 전 인류 구원하고자 함
--그는 야훼의 행동영역이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 범우주적임을 말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창조에 대해 강조했다.
-“내가 세상을 만들었으며 또한 그 위의 인간을 창조했도다”(45, 12)
“이는 하늘을 창조하신 이 바로 그 천주께서 땅을 조성하시고 그를 만드시고 ...나는 야훼요다른 이는 없도다.(이사 45 18)
이스라엘에 창조관이 형성된 것은 바빌론 유배 때 였다.
그들은 바빌론에서 있을 때 바빌론의 신년 축제때 읊는 에누마 엘리쉬를 들었다.
그것은 마르둑의 승리로 세운 질서를 매년 의식을 통해 재수립하고자 함이다.
마르둑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한 설화를 들으면서 자신들의 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선 문헌학적으로 야훼가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로 기술되지 않았다.
그들의 부족신으로 섬겨오던 신, 자기 조상들과 계약을 맺은 신으로 섬겨오던 신앙에서
그들은 보다 넓은 우주관 곧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는 신으로 재해석하기에 이른 것이다.
에누마 엘리쉬가 마르둑 신의 창조행위를 찬미 했거니와, 그 다양한 주민 분포로 인해 바빌론에는 그 밖에도 여러 창조에 관한 견해들이 있었다.
2이사야는 야훼야말로 세상과 세망의 주민을 창조한 분임을 강조하면서 그분의 신적 속성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음을 말한다.(40, 13-14) (41, 6-7. 44, 13-17)
그는 야훼께서 “나 이외에 신이 있느냐” (44,8)고 결정적인 물음을 던지신다고 말한다.
그분은 과거의 하느님이면서 현재 미래의 하느님이시다.
“내가 하느님이니 또한 그 때부터 나는 그이노라(43, 13)
내가 그이니 나는 처음이며 또한 마지막 이노라(48, 12)
-야훼만이 신이라고 단언함에 있어 제2이사야는 유일신 사상의 교의를 구체적으로 내세운 최초의 히브리 작가이다.
-그는 예언자 중 가장 장엄한 표현으로 모든 민족은 물론 역사 및 창조 일체를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주권을 선언했다.
그에 와서 유대교의 유일신은 신학적 이론적으로 완성된 형태를 지니기 시작했다.
즉 그에 와서 야훼 개념이 넓어져 야훼는 제한 조건없는 유일신이 된다.
그는 유대인의 시련을 세계사 속에서 이해했다.
야훼의 행동영역은 전세계이며 범우주적인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유대민족주의라는 한정을 넘어 야훼신앙의 보편성 주장
D. 악도 하느님의 주권 아래
--그는 하느님의 주권이 자연과 역사 전체를 지배한다고 주장해온 그는 악이 존재하는 상황도 하느님 주권 아래 있다고 보았다.
“나는 빛을 형성하고 어두움을 창조한다.
내가 복을 만들고 화를 창조한다.
내가 이 모든 것을 행하는 주님이다“ (45, 7)
이는 이스라엘인에게 폭탄선언이었다.
그들은 악을 야훼와 연결시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2이사야는 야훼를 우주의 유일한 궁극원으로 생각했으므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뿐 아니라 세상을 멸망시킨 파괴자를 창조하시고 산과 언덕을 황폐케 한 분도 야훼라고 보았다.
-모든 힘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는데 그 중 어떤 힘은 자연 또는 인간을 통해 악을 유발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발전하며 그 중 악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공존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E. 야훼의 종 --주님의 종-대속사상
--제2이사야는 야훼께서 유대인을 다시 예루살렘에서 살게 하고 그 곳을 중심으로 세계구원을 실현시킬 것이라 주장.
이는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바빌론 정복 후 유대인을 해방시킴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라 예언했는데 적중
-그는 야훼가 자신의 의미를 모든 인류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중계자인 종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
그 종이 바로 이스라엘이며 따라서 유대인은 선택된 민족이라고 봄
유대인은 여기서 선택된 민족이나 이는 빛의 담지자로 봉사하라고 선택된 것이지 무조건의 은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를 인식치 못 했기에 고통을 통해 속죄해야만 했다.
그러나 고통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고통을 통해 유대인은 정화되었고 모든 민족은 고통받는 종의 신음을 듣게 된 것이다.
여기서 유명한 종의 노래가 나온 것임
종의 노래는 그대로 초기 그리스도교에 영향을 줌
--그리스도인은 제2이사야가 예언한 그 종이 바로 예수라고 확신
--이사53, 10에 종이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비유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11절) 쇡죄와 의화를 가져오리라고한다.
즉 종은 단순한 속죄염소가 아니라 이를 통해 온 민족들이 이 행위로 종이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희생제사가 되어야 제사의 힘이 있음을 보여준다.
F. 창조주와 속량주 (창조와 구원의 일치)
창조와 속량은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에게 야훼의 왕권이 나타나는 두 양상이다.
제2이사야는 하느님이 창조주이면서도 동시에 구원자인 주님이라는 신념에 근거해서 선포
(이사40, 28-29)
--그에게 있어 다가오는 구원은 새로운 시작이고 새로운 창조이다.
즉 창조는 단순한 과거의 사실만이 아니다.(이사51, 9-11)
--창조와 구원을 하나로 해석하는 제2이사야의 사상은 오늘날의 창조영성과 같은 맥락
**오늘날 그리스도교신학은 원죄사상에 기초한 타락속량영성에서 벗어나 원복(원축복)을 출발점으로 하는 창조중심 영성으로 회복해 나가고자 한다. 이에 기초를 놓은 자가 메튜폭스이다.
**종전의 원죄사상에 기초한 타락속량영성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다.
만물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고 보존되므로 하느님과 만물은 질적 차이가 있다.
신은 절대타자이며 형이상학적 존재이다. 이와같이 창조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하느님을 보여주고, 구원은 죄에 물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야훼의 종의 대속이 필요한 것으로 해석해왔다.
이와같은 해석은 창조와 구원을 이원화시키는 해석방법이다.
오늘날의 창조영성은 창조와 구원을 하나로 보는 것이다.
**초월적 신관이 지닌 문제점
이러한 초월적 신관의 근원지는 희랍철학이다.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는 영육이원론적 사고를 했다.
즉 신과 인간(자연)을 대립, 창조주와 피조물, 주체와 객체, 차안과 피안의 이원론적 사고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아래에서 그리스도교는 신의 초월성을 강조했고 인간은 감히 하느님 가까이 갈 수 없는 존재로 여김
이와같이 신을 저 너머의 존재, 이데아의 세계에 사는 실재로 유형화시킴으로 초월적 신관을 확립했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초월성으로 인해 하느님은 절대타자의 존재가 되어 세상고통과 방황 몰락에 무관하고 무반응하신 초월자로 생각
서구의 많은 이들은 이와 같은 초월적 신관을 지닌 그리스도교의 신을 떠나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초월성을 세상과 인간과 무관하신 분으로 이해함은 왜곡된 해석이다.
진정한 의미의 하느님의 초월성은 하느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먼저 뻗치셨다는 하느님 구원의 선재성, 우선성을 의미한다.
본래 하느님의 구원의 선재성이 지닌 의미를 하느님의 초월성 개념이 경직화되어 하느님과 세계를 분리시켜 하느님이 세계와 아무런 유기적 관계가 없는 양 왜곡되이 해석해 왔다.
즉 이러한 초월적 신관은 하느님을 초월적 군주로서 자리매김 한 것이다.
(9) 유대교의 출현
1) 유대교의 유래
-유대교는 구약성서의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구약성서 계시를 해석하는 특정방식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유대민족의 생활방식이다.
유대교나 유대인이라는 명칭 (히브리어로 예후디)은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8)과 그 이후에 생겨났다 .
그들은 자치권을 빼앗겨 유대민족이 디아스포라(흩어짐)의 상태로 흩어지는 일이 없었다면 유대교는 없었을 것이다.
유대교의 외적 체제만이 아니라 내적 구조도 바빌론 포로에서 비롯되었다.
포로상태의 처절한 외적 상황과 달리 당시 에제키엘과 제2이사야의 예언을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로 택함 받은 선택자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유대교의 발전은 이 예언이 유대백성에게 심어준 구원에 대한 소망에 큰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고레스왕은 바빌론을 정복하여 그곳을 새 수도로 정하고 거대한 영토통치.
그는 포로민들의 환심도 얻고 이집트에 가까운 변경에 완충국을 만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
그는 유다지역을 페르시아 지방주로 관할 통치하고 그 지방주의 이름을 예후드, 그 곳 사람들을 예후디라 불렀다.
---이와같이 유대교는 유다지역이 페르시아 통치를 받게 되는 시대에 시작되었다.
물론 고대 이스라엘과 같은 선조인 아브라함 야곱 예언자들의 전통을 형성하고 있지만, 바빌로니아 유배 이전과 이후로 분기 즉 유대교는 바빌론에서 돌아와 새로 성전 개축하고 사회질서를 재정비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2) 포로민의 귀환
BC 586년에 발생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해 신앙의 위기가 도래했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은 정복자의 신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정복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죄로 인해 벌을 받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기원전 539년 근동 아시아 패권은 바빌론에서 페르시아로 넘어가면서 그들은 귀환하게 되었다.
페르시아 고레스는 기원전 539년 바빌론으로 진격하여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런데 고레스는 바빌론과 달리 유화정책 관용정책을 펼쳤다.
고레스는 타민족들이 제국의 체제 안에서 가능한 한 문화적 자체를 향유하도록 개방정책을 견지했다.
이러한 정책 하에 유대인을 팔레스티나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여 많은 유대인이 돌아오게 되었다 .
귀환은 스룹바벨(다윗왕의 후손 여호아킴의 손자)와 여호수아(레위족의 후손인 사제)라는 두명의 지도자에 의해 수행
예언자들의 예고가 역사적 사건으로 확증된 것이다.
그들은 고통과 죄값으로 속죄를 하면 하느님께서 다시 한번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시리라 기대해 왔기 때문이었다.
3) 성전건축과 새 공동체 형성
돌아와서 처음 한 일은 황폐한 사원에 제단을 재건하고 희생제물을 바치는 일이다.
(공동생활의 중심지가 됨) 그러나 곧 어려움에 봉착
귀환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참된 이스라엘이고 남은 자들은 같은 유대인이긴 해도 정통파라고 할 수 없는 부정한 자들로 보았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귀환인들에게 경제적 혜택이 주어지지 않음 (이미 현지민들이 기득권 소유)
--귀환인들은 신명기를 통해 예루살렘과 율법을 이상화시키고 있으나 그들에게 현지 유다인들은 타락한 생활을 함 (이민족과 통혼)
--서기전 586년 바빌론으로 강제이주한 사람들은 왕족 사제 관리를 포함한 지배층과 전문직종에 종사하던 사람들, 군인들이었으며 유다에 남았던 자들은 무지하고 가난한 자들이었다.
돌아온 이들은 조상들의 주거지와 토지를 찾으려 했으나 남아있던 자들이 그 토지의 사용권리를 주장하면서 갈등
--남아있던 자들은 성전 제의에 대한 이해가 없었으며 모세오결의 율법에 관해서도 무지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의 백성(암 하아레쯔)라 불렀다.
서기전 5세기전반에 돌아온 자와 땅의 백성간의 갈등
--서로 간의 긴장상태로 사원재건은 15년간 중단
4) 에즈라와 느헤미야
--그 후 예언자 하개와 즈가리야가 사원재건사업 단행했다.
그러나 그들이 고대한 상황의 변화는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인들이 야훼신앙이 쇠퇴했기 때문이다.
--느혜미야와 에즈라가 아르닥사싸왕의 재가 얻어 예루살렘의 성벽재건과 정신적 개혁을 담당할 특별 감독관으로 임명되어 귀환 후 성공적으로 지도력 발휘.
기원전 428년을 전후하여 느헤미야에 이어 제관이요 율사인 에즈라가 아르닥사싸 1세의 명으로 모세의 법전을 갖고 유대로 와서 초막절을 맞아 본격적으로 율법을 가르쳤다.
유대인들은 에즈라의 가르침에 감읍하여 율법을 곧이 곧대로 지키기로 맹세했다.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갖고 온 모세의 법전이 정확히 어떤 책인지 계속 논란되고 있으나 모세5경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국가는 아니었지만 바로 모세의 법전을 생활신조로 삼은 율법공동체로 다시 태어났다.
제2성전시대초기(BC 450) 사제이자 율법학자인 에즈라가 바벨론에서 팔레스티나로 돌아오는 길에 율법과 예언과 설화가 적힌 옛 두루마리를 집성한 토라를 갖고 왔다.
에즈라는 백성들이 모인 예루살렘 앞 광장에서 토라를 읽어주었다.
** 에즈라가 백성들에게 읽어준 율법의 책은 무엇? 그것은 바로 모세오경 자체라고 봄.
따라서 에즈라의 큰 공헌은 모세오경을 유다인들의 신앙과 생활에 가장 권위있는 정경으로 만들어 주었다는데 있다.
유대인들은 그 이후 이 토라를 국민생활의 기반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변화하는 일상생활에 율법을 적용시키기 위해선 正傳으로 인정된 성서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법에 관한 구전전통과 해설과 가르침들 및 성서 주석들이 필요했다.
성문화된 토라를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시대가 열렸고, 그 후 유대교의 역사는 토라의 해석과 계속되는 시대에 토라가 주는 메시지의 역사가 되었다.
유대인의 역사에서 다음으로 큰 사건은 AD 70년경에 있었던 제2성전의 붕괴였다.
토라의 가르침과 구전된 해석전통의 상속인이자 옛 예언자의 계승자인 랍비들은 유대민족이 하느님께 버림 받은 것이 아니라 한번 더 매를 맞을 뿐이며 이스라엘 하느님은 유대민족에 의해 여전히 섬겨질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 사건은 유대인의 삶에 중요한 종교개혁을 초래했다.
그 개혁은 팔레스티나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기록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탈무드는 옛 구전을 기초로 팔레스티나와 바빌로니아의 랍비들이 만든 유대적 율법과 지식과 신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마침내 AD 5세기와 6세기에 편집되었다.
모든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지킬 수 있는 율법의 견지에서 유대인이 됨에 대해 정의했다.
유대인은 어디를 가든지 기도하고 토라를 공부하며 계명을 지키고 인애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성직자들은 필요치 않고 오직 학자들만 필요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절대지배권을 가진 하나의 국가 낯선 정부의 법에 따르면서도 자신들의 토라도 실천하며 사는 다른 민족속의 하나의 종교적 민족을 형성했다.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버림으로써 성전제사가 아주 사라진 다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율법공동체로 존속할 수 있었다.
에즈라야말로 유대교를 제건한 장본인이므로 그를 제2의 모세로 일컫기까지 한다.
<선민사상>
에즈라의 명에 따라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조리 내쫓음으로써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는 다른 선민으로 자처했다. 이스라엘 선민이 보기에 이방인들은 죄인들이다. 이때부터 선민이 만민을 적대시하고 만민이 선민을 적대시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5) 율법중심의 공동체 형성
에즈라는 이스라엘을 율법중심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국가제도 성전제도 등 모든 제도가 없어졌음에도 이스라엘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율법중심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율법은 모세5경을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규범들을 가리킨다. 이 규범들은 바빌론 유배이전의 것들이 많았던 까닭에 유배이후 시대에 새롭게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옛 규범들을 시대에 맞게 풀이했다. 이렇게 해서 미드라쉬 문헌(성경주석)이 생겨났다. 율법체제가 확립됨과 아울러 예언자들이 차츰 사라진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6) 사제계급의 형성
에즈라의 노력으로 사제들에게 특권을 인정하는 새 신정국가가 출현
‘에즈라 시기에 햇곡식 십일조 희생제물 지정 축제를 강조
종교적 도덕적 생활을 강조하는 이스라엘 종교라는 전래의 신앙이 확립됨
여기서 핵심은 모세의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것
에즈라는 이방의 여자들을 내쫒고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윤리적 금욕생활을 강조
점차 율법이 규정한 삶의 방식이 스며 들어 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철저해짐.
-대의회 현자들
돌아온 사제들 지식층의 현자들은 종교제의를 재정비하고 모세오경에 기초한 사회질서 세우려 노력. 120명으로 모인 모임을 대의회라 불렀다.
서기전 5세기 전반에 유대교의 종교적 체계가 형성되고 이로부터 700년 지난 서기 220년에 축적된 많은 상례와 규범들이 <미쉬나>로 결실을 보았다.
-미쉬나에 편집된 <선조들의 어록>은 현자들이 이스라엘 전승을 어어 전하는 정통성을 말한다.
** “모세는 토라를 시나이산에서 받았고 여호수아에게 그는 장로에게, 장로들은 예언자들에게 그들은 대의회 의원에게 넘겨주었다.”
--예루살렘 사원의 대사제는 가장 지고한 종교인이 되었고, 그 밑에 사원의 종교의식 주제하는 사제들, 그리고 사원재산 관리하는 레위인, 랍비의 전신인 율법학자들이 있었다.
율법학자 중 설교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랍비나 스승으로 불리워지게 됨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에게서 토라를 받을 때 기록된 것 (모세오경)만 받지 않고 그곳에서 40일 동안 공부한 것을 말로 전해줬다는 것이다.
미쉬나에 들어있는 책(아보트(선조들의 어록) 1장1절에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토라를 받아 여호수아에게 여호수아는 장로들 장로들은 예언자들 예언자들은 대의회 의원에게 넘겨줬다고 함.
즉 대의회 의원은 랍비 이전시대 사람들로 랍비는 이들로부터 토라를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받았다는 것
7) 랍비의 형성
기원전 2세기경에 형성된 랍비들이 현자들을 계승한다.
--경전에 대한 전문적 설명
당시에 히브리어는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주로 사용되던 아람어라는 방언 때문에 점차 밀려나고 있었기에 일반백성들은 전문가의 도움없이 경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랍비의 경전에 대한 전문적인 설명이 부각되었다.
--랍비의 두 번째 역할은 종교의 지방 분산화를 촉진하고 기원전 621년 요시아왕의 개혁이후 불가능해졌던 지방에서의 종교생활을 가능하게 한 점이다.
그래서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던 예언의 시대는 끝나고 문자화된 경전을 통해 야웨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빌로니아와 예루살렘에서 사제와 율법학자들은 경전 편찬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8) 모세오경의 형성
그들은 J E D P전승으로 모세오경을 완성했는데 이 4전승은 고대로부터 나란히 생겨났다.
a) Y(Yahwist) BC10세기
다윗왕이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었을 때 그 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전에 구전으로 내려온 내용들을 자신들의 신앙고백적인 입장에서 편집해 놓은 것이다. (창세기 출애급 모세오경)
b) D(Deuteronomist)신명기 학파
모세오경중 신명기에 입각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조명한 학파이다. 바빌론 유배시 50년간 자기 민족의 역사를 반성하면서 참회 속에서 쓴 역사서이다. (tsaudrl 일부 여호수아 사무엘상하 열왕기 상하) 하느님의 명령과 뜻에 순종하면 은총을 받을수 있으나 어기면 벌을 받는다. 그러나 회개하면 다시 은총을 받을수 있다.
c) Prist학파
사제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자들로 세계 창조-가나안 정복까지 역대기상하를 저술하였다.
<p기자의 신개념>
사람들은 신의 임재의 잔광만을 볼수 있을 뿐이라는 것으로 P기자는 그것을 야웨의 영광 또는 신의 실재의 현현하심이라고 불렀다. 중요한 점은 그것과 신 자체와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은 영광을 발하여 참기 어려운 광채를 발했기에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수 없었다.
p기자의 가장 유명한 공헌은 창세기 첫장의 창조기사인데 이는 에누마엘리쉬에 기초한 것이다. 창세기는 태초의 심연(티아마트가 부패된 공간)을 메운 물로 시작되는데 야웨는 이로부터 하늘과 땅을 만든다. 그러나 창세기엔 신들의 전쟁이나 얌 로단 라합과의 투쟁은 나타나지 않는다. 점진적인 유출을 통해 만물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야웨의 뜻에 따라 만물의 질서가 완성된다. 실제로 분리의 개념은 p기자의 신학에 있어 결정적이다.
새 예루살렘성전은 p기자의 유대교에서 중심이 되었다. 신전을 짓는 일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들의 창조력에 참여하게 하도록 신을 모방하는 행위의 일종이었다. 그 건축구조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원형의 복제였다. 124 성전건축의 각 단계에서 모세는 창조의 6일동안 야웨가 하신것과 같이 모든 작업을 보고 그 백성을 축복했다고 적혀있다. 125
p기자는 안식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곧 신을 모방하는 행위와 신의 세계창조에 대한 기념의 의미였다. 유대인은 안식일의 휴식을 준수하면서 신이 태초에 홀로 준행한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안식일은 신적 삶을 살고자 하는 상징적 시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