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씨튼연구원은 영성의 토착화와 종교간의 학문적 대화가 목적입니다.
그리스도교 연구

신들의 역사1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0-10-25 14:40

본문

고대메소포타미아세계의 특징


이라크인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에는 기원전 4000년부터 수메르인이 거주하기 시작 우르 에레크 키쉬 등의 도시를 세운 수메르인은 설형문자를 만들었고 지구라트라는 신전을 건설했으며 법률 문학 신화를 창출했다. 그들은 그후 셈족계열의 아카드인에게 침략당했는데 그들은 수메르인의 언어와 문화를 계승했다. 그후 기원전 2000년경에 아모리인이 수메르 아카드문명을 정복하고 바빌론을 그들의 수도로 삼았다. 기원전 1500년에에 아시리아인이 아쉬르에 정착한 후 기원전 800년에 바빌론까지 점령했다. 이러한 바빌로니아전통이 가나안의 신화와 종교에 영향을 미쳤다.


바빌로니아인도 자신의 문화적 성취를 그들의 신화적 조상에게 삶의 방식을 계시한 신들의 은공으로 돌렸다. 바빌론 자체가 천국의 모습을 나타내며 각 신전은 천상궁전의 복제라 여김 신성한 세계와의 이런 연결성은 해마다 신년제를 통해 결국 되다 기원전 1700년에 제정됨 니산달 (4월)에 바빌론에서 경축한 제의에선 왕의 즉위식이 엄숙히 거행되었다. 즉 정치적 안정성은 신들이 베푸는 통치에 참가할때만 계속되리라 믿었다.


그들은 축제 4일째 신들을 찬양하는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를 낭송했다. 이는 태초에 신들이 거룩한 무형질의 질퍽한 황무지로부터 둘씩 출현했다고 말한다. 역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개념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신이나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신성한 원물질은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


태초의 황무지로부터 세 신, 압수 그의 아내 티아마트 그리고 혼돈의 자궁인 멈무이다.  압수와 티아마트는 혼돈 심연 끝없는 나락으로 번역된다. 이 세 신으로부터 일련의 신이 유출이라고 알려진 과정을 통해 출현하게 된다. 라무 하함 안쉐르 키샤르 아누(하늘) 에아(땅)이 나타나면서 진화과정이 완결된 것처럼 보였다. 이때 땅신인 에아는 마르둑(태양신)아들을 낳았다. 신들의 대집회에서 마르둑은 신들의 통치자가 되는 조건으로 티아마트와 싸울 것으 약속한다. 마침내 티아마트를 죽인후 마르둑은 티아마트의 거대한 시체를 딛고 서서 새로운 세계창조를 결심한다. 티아마트의 시체를 두동강내어 둥근  하늘과 인간세계를 만들고 다음으로 법령을 제정한다. 그러나 승리는 완벽하지 않아 질서는 매년 특별의식을 통해 재수립되어야 했다. 따라서 신들은 새로운 세계의 중심인 바빌론에 모여 천상의 제의를 집전할수 있는 신전을 건축했다. 그 결과가 마르둑에게 바치는 지구라트로서 지상의 신전이면서 무한한 천국의 상징이었다.


이상에서 본 에누마엘리쉬는 그들의 창조적 계획이 신들로부터 힘을 나누어 가질때에만 지속할수 있으리라는 신앙을 표출하고 있다. 이 신화는 바빌론이야말로 거룩한 장소로서 세계중심이며 신들의 고향이라는 확신을 보여주는데 이는 모든 고대종교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람들이 거룩한 힘과 접촉을 경험할수 있는 거룩한 도성이야말로 모든 존재와 위력의 근원이라는 개념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모두에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다.


마르둑은 뒤늦게 인간을 창조했다. 그는 킹구(티아마트의 백치 남편으로 압수가 패한 후 그녀가 다시 만듬)을 잡아 살해한 후 그 신성한 피와 먼지를 섞어 최초의 인간을 만들었다. 여기서 인간은 창조의 최고 완성품이 아니라 신들 가운데 가장 어리석고 바보같은 신에게서 유래되었다고 말하는 인류근원에 관한 이 신화적 설명에는 유머가 숨어있다.


즉 최초의 인간은 신의 실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비록 제한적이나마 신적인 본성을 공유한다. 인간과 신들 사이에 간극은 없다. 자연세계와 인간 그리고 신자신도 모두 같은 본성을 공유하고 동일한 신적 실체에서 유래된 것이다. 신들은 인류로부터 차단되어 분리된 별도의 존재론적 영역에 거하지 않았고 신성은 본질적으로 인성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들의 특별한 계시 또는 신성한 법을 천상에거 지상으로 내려보낼 필요가 없었다. 신들과 인간은 똑같은 곤경에 직면하기도 하는데 그들 간의 차이점이란 단지 신들이 더욱 위력있고 불멸하다는 것뿐이었다.


<아브라함>


19세기 독일의 성서학자들이 구약의 모세오경에는 4가지 상이한 자료가 있다는 것을 판별하는 비판적 방법을 개발했다. 그 자료가 J(야웨), E(엘로힘:Elohim),신명기 기자(D), 제사장파(P )이다.


J 기자는 야웨가 하늘과 땅의 유일한 창조주인지 분명히 말하지 않고 있다. 주목할ㄹ만한 사실은 인간과 신 사이의 분명한 구분에 대한 J기자의 인식이다. 인간 adam은 그가 섬기는 신과 같은 신성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땅(adamah)에 속한 존재다.


아브라함의 신은 가나안의 최고신 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신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엘 샤다이(산악의 신)라 소개하는데 이는 엘의 전통적 칭호중 하나다. 아브라함의 신 엘은 굉장히 부드러운 신으로 아브라함에게 친구처럼 찾아오고  심지어 인간의 형체를 취하기도 한다. 현현이란 이런 형태의 신성출현은 고대이교세계에서 상당히 흔한 일이었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믿음은 결코 추상적인 아니라 실용적인 것이다. 야곱은 엘이 특별한 보호를 해 준다면 그 대가로 엘을 엘로힘(사람에게 신이 의미할수 있는 모든 것을 상징하는 말)으로 곧 유일하게 섬기는 신으로 모시겠다는 일종의 협상을 벌인 것이다. 신에 대한 이스라엘인의 믿음은 실용적이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엘을 신뢰한 것은 엘이 그들을 위해 힘써주었기 때문이다. 엘은 철학적 추상이 아닌 것이다. 고대세계에서 마나는 삶의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이 마나를 제대로 전할수 있다면 신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셈이었다. 이런 실용주의는 신의 역사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사람들이 어떤 특정 신관념을 계속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유용하기 때문이지 그것이 과학적 혹은 철학적으로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다. 49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이라 일컫는 것은 신의 약속이 불합리하게 보일지라도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신은 고대신과 달리 인간의 곤경에 동참하지 않았고 인간들에게 에너지를 주입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대에는 첫아이는 신의 자손이라 여겼다. 그래서 아이를 갖게 되면 신의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므로 다시 충전시키기 위해 첫아이를 신께 바쳤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이사악을 원치 않았다.)


<출애급>


출애급의 신은 잔인하고 편파적이고 살인적이며 심하게 편협한 성격이어서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도 동정하지 않는 단적으로 부족적인 신이다. 53


 선택된 백성과 신의 선택의 신화는 신명기기자에서 시작하여 오늘날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근본주의자에 이르기까지 편협하고 부족주의적 신학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한편 신명기 기자는 나약하고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계신 신에 대한 해석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출애급사건은 야훼를 확실히 이스라엘의 신으로 만들었으며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웨야말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사랑했던 그 엘과 동일한 신이라고 확신시킬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56


야훼는 나는 내가 의지하는 바대로의 내가 될 것이다를 주장하는 무조건적 신이다. 그는 자신이 택한 그대로 할 것이며 인간에게 아무런 보장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단지 자기백성의 역사에 개입하리라는 것만 약속했다. 출애굽 신화는 가장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미래를 향한 희망을 가질수 있음을 증명하는 신화다.


고대천신이 인간관심사를 돌보기에 멀리있는 듯하기에 바알 마르둑 대지의 여신은 인간과 친근하도록 개념화되었는데 이제 야웨는 다시 인간과 신의 간극을 벌려놓은 것이다.57


<야훼와 모세와 계약>


계약개념이 말해주는 바는 이스라엘인이 아직 유일신만을 섬기는 유일신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즉 어느 신과의 계약이란 다신교적 상황 아래서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랑엘인들은 시나이산의 신인 야웨가 유일한 신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이 계약을 통해 다른 모든 신을 거부하고 오직 야웨만을 경배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모세오경을 통해 유일신론을 말하는 단 한 문장도 찾기 어렵다. 십계명에도 다른 신들의 존재를 당연시하고 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그러나 성서는 사람들이 언약에 충실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솔로몬왕은 다윗왕이 여부스족으로부터 빼앗은 도시 예루살렘에 야웨를 위해 가나안 신들의 신전과 흡사한 성전을 건설했다. 솔로몬왕자신도 대단한 종교혼합주의자였다. 그는 각자 자신들의 신들을 섬기던 이방인 후궁을 거느렸고 이웃 나라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62


야웨종교가 이방종교에 흡수될 위험은 언제나 존재했고 특히 기원전 9세기후반에 이런 위험이 급증했다. 기원전 869년 아합이 북이스라엘왕국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아내 이세벨은 두로와 시돈왕의 딸로 이교도였고 나라를 바알과 아세라종교로 개종시키기를 원했다. 그녀가 데려온 바알사제는 북왕국 이스라엘인중 추종자들을 얻었다. 아합 통치 말기에 전국에 심한 가뭄이 닥쳤을 때 엘리야와 바알사제간의 대결에서 엘리야가 승리했다. 그러나  그는 관대한 승리자가 아니었다.63 그는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두 살육한 것이다. 이와같이 야웨신앙은 다른 종교를 격렬히 탄압하고 거부할 것을 요구했다.64


기원전 800년에서 200년 사이는 기축시대라고 명명된 시대이다. 문명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조했다. 모든 주요문명은 평행을 이루며 발달했는데 이때 상인계급이 출현하여 왕사제 신전 왕궁으로부터 시장으로 권력이 이동하고 있었다. 신이라는 개념은 당시의 다른 우대한 종교적 성찰과 더불어 상업주의 정신의 시장경제상황아래에 발달된 것이었다. 기축시대에 일어난 새로운 발전 가운데 두가지를 검토하자.


<베다종교에서의 변화-외향적 제사의식에서 내향적 요가>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 인도대륙의 사화적 경제적 조건의 변화로 인해 베다종교는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개인의 운명은 자신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개념인 카르마사상에 다시 관심을 가져 인간의 무책임한 행위를 신에게 전가하는 것에 대해 망설이게 되었다. 점차 신들은 유일한 초월적 실재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종교가 희생제사의식에 집착한 반면 요가에 대해 다시 일기 시작한 관심은 더 이상 외향적인 것에 치중한 종교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68


인도에서 신들보다 더 월등하다고 간주된 종교지도자들로 신들은 대체되었다. 힌두교와 바교는 신존재를 부정치 않았고 사람들이 신들을 경배하는 것을 금하지도 않았다. 대신 힌두교도와 불교도는 신들을 초월하여 넘어서는 새로운 방법을 추구했다.


베다종교에서 희생제의를 통해 경험하는 신성한 힘을 브라흐만이라 불렀다. 희생제의가 곧 전체 우주를 축소한 소우주라고 여겼기 때문에 브라흐만은 점차 모든 사물을 지탱하는 힘을 의미하게 되었다. 새겨난 모든 것은 브라흐만의 표현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신적인 힘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여 우리를 유지시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브라흐만을 알수 없었을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각 개인안에 있는 영원한 원칙을 아트만이라 불렀다. 전우주가 자신의 자아로서 지니고 있는 이 제일 본질 이것이 바로 실재이며 이것이 곧 자아다. 70


<붓다>


붓다는 인간의 언어가 사고와 이성의 범위 너머에 있는 실재를 다루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곧 선한 삶이다. 만약 선한 삶을 살수 있다면 불교도는 그들이 논리적 방법으로 이 진리를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붓다의 다르마가 진리라는 사실을 발견할수 있을 것이다. 붓다의 제자들은 선한 삶의 실천을 통해 열반을 볼수 있게 될 것이므로 곧 열반이 실재하는지를 알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을 신적 세계가 정적이고 변화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신성한 것이 완전히 정적이라는 이미지는 계시의 신과는 전형 공통점이 없을지라도 유대교 기도교인 무슬림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계시의 신은 끊임없이 활동적이고 혁신적이며 성서에선느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면서 대홍수로 인류를 멸절시키도록 마음을 바꾸기도 한 존재이다.78


아리스토텔레스는 위계의 정점에 부동의 동자가 있다고 보고 이를 신과 동일시 했다. 즉 이 신은 순수한 존재이고 영원하고 부동이며 영적인 존재였다. 82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세상을 감독하거나 지도하지 않으며 우리 삶에 아무 변화도 주지 않는다. 즉 플라톤의 형상이라는 순수세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인간삶에 별 영향울 줄수 없었다.


이상에서의 기축시대의 새로운 세계관으로 인해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초월적 요소를 포함한다는 일반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형성될 당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하고자 자신들의 전통을 발전시켰으며 그것은 마침내 야웨가 유일한 신이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2.유일신


1) 이사야


이사야는 신과 인간의 차이 즉 철저한 분리 타자성을 의미했다. 시나이산 에 나타난 야웨의 현현은 인간과신적 세계 사이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간극을 강조했다. 이사야는 오토가 말한 황홀과 두려움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그 누멘적 감정을 경험했다.


야웨와의 경험은 우파니샤드와 달리 한 인격과의 만남이다. 즉 무시무시한 타자성에도 불구하고 야웨는 말을 건네고 이사야는 대답할 수 있었다. 우파니샤드의 현인에서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대화를 나눈다거나 만난다는 생각은 신을 지나치게 의인화시키는 부적절한 것이다. 89


이스라엘의 신은 신화나 제의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실제사건들 속에 자신을 나타냄으로서 자신을 이방신들로부터 구별했다.91


야웨는 더 이상 백성들의 축제 신년의식 순례들을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한다. 바로 이 점이 이사야의 청중을 경악하게 했다. 중동에선 제의적 축제가 종교의 본질이다 이방종교는 고갈된 에너지를 갱신하기 위해 이런 제사에 의존했고 신들의 위엄은 부분적으로 그들신전의 웅장함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야웨는 그런 것들이 완전히 무의마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사야는 제의준수하는 일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느꼈다. 이스라엘인은 그들 종교의 내면적 의미를 발견해야만 한다. 야웨는 희생보다 인자함을 더 원한다.


<아모스>


붓다처럼 열반이라는 무아의 소멸에 몰입한 것이 아니라 야웨가 그의 자아를 점거하고 그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이끈 것이었다. 아모스는 사회정의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초의 선지자였다.


<호세아>


아모스가 사회적 악을 공격한 것에 비해 호세아는 이스라엘 종교에 내면성이 결여된 것에 관심을 가졌다. 즉 신에 대한 지식은 헤세드(사랑)와 연관된 것으로 제의를 외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넘어 야웨를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98


선지자들이 자신의 인간적 감정과 경험을 야웨에게 적용시킴으로써 그들은 중요한 의미에서 그들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신을 창조한 셈이 되었다. 왕족의 일원이었던 이사야는 야웨를 왕으로 보았다. 아모스는 고통당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신의 연민을 야웨에 부여했고 호세아는 아내에게 버림받았으면서도 계속 그녀에게 사랑의 부드러움을 갈급하여 느끼는 남편으로 야웨를 생각했다. 모든 종교는 당연히 신이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는 신인 동형동성론의 요소를 가지고 시작한다.99


예언자들은 이웃신들의 신을 자주 조롱했다. 이러한 이웃신에 대한 배타성은 그 당시에는 전혀 새로운 종교적 태도였다. 이방종교는 본질적으로 관용적인 신앙이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도 신들을 싫어하고 비판할 필요없이 차라리 초월하라고 가르쳤다. 유대교 경전에서 우상숭배라는 새로운 죄 곧 거짓 신들을 섬기는 것은 구토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101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는 우리 하느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분뿐이시다 너의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오늘날 유대인은 여기서의 “우리의 신 야웨는 한분이시고 유일하다”을 유일신론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신명기 기자는 아직 이러한 유일신론적 견해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인 야웨라는 말은 신이 오직 하나뿐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야웨야말로 경배할수 있도록 허락된 유일한 신이라는 뜻이었다. 107


 <선민사상>109


유일신 신앙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세 종교는 모두 그들 역사 발전의 다양한 시기에 비슷한 선택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11-12세기에 십자군은 스스로를 유대인이 상실한 소명을 다시 찾은 새로운 선민이라 부르면서 유대인과 무슬림에 대한 성전을 정당화했다. 갈빈주의적 예정론 신학은 미국인에게 자기나라가 신의 나라라고 믿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예레미야>110


기원전 604년 느부갓네살왕이 즉위하던 해에 예레미야는 이사야의 우상파괴적 견해를 부활시켰다. 이는 선민이 승리하리라는 교리를 머리가 땅에 처박히게 거꾸로 돌려 놓았다. 즉 신이 이스라엘을 벌주기 위해 바빌로니아를 도구로 쓸 것이며 이제 이스라엘이야말로 징벌을 받을 차례라는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70년간 유랑해야 하리라고 예레미야는 예언했다. 이 예언을 들은 여호야킴왕을 그 두루마기를 찢고 불살라 버렸으며 예레미야는 목숨을 잃을까 하여 은둔했다.


그는 선지자가 되는 것을 싫어했고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을 저주해야 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신은 예레미야를 두 가지 상이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모든 달콤한 유혹에 빠지게 만드는 야웨를 향해 심오한 매력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의지에 반하여 자신을 몰아치는 괴력에 의해 유린됨을 느꼈다. 예언자들의 신은 이스라엘인에게 중도의 신화적 사고방식에서 스스로를 단절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갈 것을 종용했다. 예레미야의 고뇌를 통해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충격과 혼란을 의미했는지 볼수 있다.


야웨는 중개인 없이 야웨를 만난다는 것에 공포를 느꼈던 이스라엘인에게 각 세대마다 선지자들을 보내 신과 만나는 공포에서 생기는 충격을 줄이게 할 것이라고 모세를 통해 말하고 있다. 야웨의 종교에는 아직 내재적인 신적 원리인 아트만과 비교할 만한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 야웨는 외부의 초월적인 실재로 경험되었던 탓에 덜 이질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어떻게든 인간화될 필요가 있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이후 예레미야는 종교의 외양적 장식이란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상태의 상징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미래에는 신과 이스라엘의 계약이 아주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114


<에스겔>


에스겔은 야훼에 대한 충격적인 환상을 보았다. 후에 이는 유대교 신비주의자에게 중요한 것이 된다. 에스겔에게 야웨의 한 손이 쭉 뻗치며 쥐고 있던 두루마리책을 펼쳐 보였는데 그 안에는 애곡과 재앙의 말들이 가득했다. 에스겔은 그 두루마리책을 먹어 신의말씀을 소회하고 자신의 일부분으로 마들도록 명령받았다. 115

에스겔의 이상한 경험은 신의 세계가 인간에게 얼마나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 되었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에스켈 자신이 이런 이질감의 징표가 되도록 요구받았다. 에스겔 자신은 야웨의 종교가 의미하는 신과 인간과의 극단적 불연속성이 상징이 되었다. 신에 대해선 아무 것도 당연하게 여겨질수 없고 인간의 정산정 반응은 거부되었다. 이와 달리 이교적 비전은 신들과 자연세계 사이에 존재한다고 여겨진 연속성을 경배했다. 에스겔은 옛 종교로부터 아무런 위안을 얻지 못했으며 그것을 언제나 오물이라 불렸다.


<유대교>


바빌론 유수동안 이방종교의 유혹은 그 매력을 잃어버렸고 마침내 유대교라는 종교가 탄생하였다. 야웨의 주장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어떤 노력도 아직 시도되지 않았다. 새로운 신학이란 이성적으로 증명할수 있어서가 아니라 절망을 방지하고 희망을 고취시킬수 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는 법이다. 낯선 땅에 서럽게 자리잡은 유대인은 야웨에 대한 경배를 계속할수  없다는 사실을  더 이상 낯설고 당황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120


신의 실재는 언어와 개념 저편에 놓여있다. 또 야웨는 그의 백성이 바라는 것처럼 항상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p기자의 신개념>


사람들은 신의 임재의 잔광만을 볼수 있을 뿐이라는 것으로 P기자는 그것을 야웨의 영광 또는 신의 실재의 현현하심이라고 불렀다. 중요한 점은 그것과 신 자체와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은 영광을 발하여 참기 어려운 광채를 발했기에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수 없었다.


p기자의 가장 유명한 공헌은 창세기 첫장의 창조기사인데 이는 에누마엘리쉬에 기초한 것이다. 창세기는 태초의 심연(티아마트가 부패된 공간)을 메운 물로 시작되는데 야웨는 이로부터 하늘과 땅을 만든다. 그러나 창세기엔 신들의 전쟁이나 얌 로단 라합과의 투쟁은 나타나지 않는다. 점진적인 유출을 통해 만물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야웨의 뜻에 따라 만물의 질서가 완성된다. 실제로 분리의 개념은 p기자의 신학에 있어 결정적이다.


새예루살렘성전은 p기자의 유대교에서 중심이 되었다. 신전을 짓는 일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들의 창조력에 참여하게 하도록 신을 모방하는 행위의 일종이었다. 그 건축구조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원형의 복제였다. 124 성전건축의 각 단계에서 모세는 창조의 6일동안 야웨가 하신것과 같이 모든 작업을 보고 그 백성을 축복했다고 적혀있다. 125


p기자는 안식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곧 신을 모방하는 행위와 신의 세계창조에 대한 기념의 의미였다. 유대인은 안식일의 휴식을 준수하면서 신이 태초에 홀로 준행한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안식일은 신적 삶을 살고자 하는 상징적 시도였다. 고대 이방종교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신들의 행위를 모방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반면 야웨종교는 신과 인간세계와의 엄청난 간극을 강조했는데 이제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을 준행함으로써 다시 야웨와 친근해질 것을 권면받았다.


<욥기>


욥기의 저자는 질문할 권리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만으로는 이런 막중한 문제를 해결할수 없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지적인 사변보다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같이 신으로부터 직접 계시가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지혜문학>


철학적 성찰보다 참되게 사는 법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지혜문학은 실용적인 성격이 강했다. 잠언의 저자는 지혜야말로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고안한 총체적 계획이며 신의 첫 번째 창조물이라 주장했다. 야웨의 영광과 마찬가지로 지혜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신의 활동에 대한 상징이다. 유대인은 지고한 신관념을 정립했기 때문에 야웨가 직접 인간일에 개입한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p기자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은 우리가 알수 있는 신과 그에 대한 경험을 신의 실재로부터 분리하기를 원했다. 130


소피아는 인간에게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신 곧 인간이 인식한 신으로 언제나 인간의 인식을 거부하는 신의 충만한 실재와 신비적으로 분리된다고 할수 있다. 우리는 이미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거의 관심갖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개념과 인간의 일에 격정적으로 개입하는 성경의 신개념에 돌이킬수 없는 결정적 차이점이 있음을 보았다. 히브리인은 야웨외 세상 사이에 큰 간극이 있다고 생각한 반면 그리스인은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의 선물이 인간과 신을 가깝게 만든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 신에게 다가갈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신론자들이 그리스 철학에 매료되었을 때에는 언제나 두 전통 사이의 신관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이 나타난다. 이조화를 시도한 자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이다.(기원전 30-기원후 45)


그는 우리가 신에 대해 알수 있는 것이란 단지 신이 존재한다는 것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유대교신앙을 실천한 자로서 신이 자신을 선지자에게 계시했다고 믿었다. 이 두가지가 어떻게 가능할수 있었을까? 필론은 파악불가능한 신의 본질과 신의 능력 또는 에너지 즉 세상에서의 신의 활동과의 사이에 중요한 구별을 세움으로써 설명했다. 근본적으로 이는 P문서와 지혜문학의 저자들의 해결과 비슷한 것으로 우리는 신을 결코 그 자체로 알수 없다는 것이다.132


그는 신으로부터 능력이 유출된다고 보았는데 그 중 두가지 즉 하나는 우주의 질서를 통해 신을 드러내는 왕적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신이 인간에게 수여하는 축복을 통해 드러나는 창조적 능력이다. 왕적 능력과 창조적 능력이라는 두 능력을 수반했던 신 그 자신이라 말했다.유대인은 필론의 신관념이 비정통적이라 보나 기독교인은 그의 생각이 도움을 준다고 본다. 즉 신의 알수 없는 본질과 신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는 능력들간의 구분을 잘 받아들였다.  필론은 인간이 신의 본질 그 자체에 접근할수 없다는 사실과 우리가 획득할수 있는 최상의 진리란 바로 신이 인간의 지성을 완전히 초월한다는 신비적인 인식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탈무드>


예루살렘 함락시 랍비 요하난은 관속에 숨어 예루살렘을 탈출했다. 그는 유대인의 반란에 반대하여 유대인은 국가가 없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마인은 그에게 예루살렘 서쪽 야브네에 바리새파자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했다. 비슷한 공동체들이 팔레스타인과 바빌론에 세워져서 긴말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 공동체는 탄나임이라고 하는 학자들을 배출했는데 그 중 랍비 요하난 아키바 이쉬마엘이 있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그 시대에 맞도록 해석한 구전율법을 성문화한 미쉬나를 편찬했다.


그 다음 아모라임이라는 학자들이 미쉬나에 대한 주석을 시작하여 그것을 집대성하여 탈무드라고 알려진 논설집을 발표했다. 실제로 두 종류의 탈무드가 편찬되었다. 하나는 예루살렘탈무드로 4세기말에 완성되었다. 다른 하나는 바빌론 탈무드로 더 권위있는 것이라고 여겨졌고 5세기말이 되서야 완성되었다.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이 연이어 탈무드에 대한 해석에 대한 주석을 덧붙이며 해석의 전승을 계속되었다. 율법과 계명은 신의 말씀과 새로운 지성소에 대한 끝없는 명상이었다.


야웨는 언제나 저 높이 저 밖에서 인간을 감독하는 초월적 신으로 생각되었는데 이제 랍비들은 야웨를 인간속에 인생의 가장 사소한 분야에도 임재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성전을 잃은 뒤에 그리고 다시 유배경험속에서 유대인은 삶속에서 찾을수 있는 신을 원했다. 139


랍비들은 신에 관한 정식 교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만지고 느낄수 있는 존재로서의 신을 경험했다. 따라서 그들의 영성은 일상적 신비주의라고 표현되었다.


신의 임재를 느끼는 랍비들의 주관적 확신이 분명하여 공식적 객관적 교리는 별 쓸모가 없었다. 신은 각자의 이해력에 걸맞게 스스로를 맞추신 것이다. 어느 랍비가 말했듯이 신은 강제적으로 인간에게 찾아오지 않고 그를 받아들일수 있는 니간의 능력에 걸맞게 찾아오신다. 이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는 신이 결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경험할수 있는 어떤 공식적 교리로 묘사될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신은 근본적으로 주관적인 경험이다. 각 기인은 신의 실재를 자신의 독특한 기질의 필요에 부응해 다양한 방법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성격이 신을 파악하는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선지자들도 각기 다르게 신을 경험했다고 랍비들은 주장했다.


어떤 공식적 교리도 신의 본질적 신비를 제한할수밖에 없다. 랍비들은 신이 절대적으로 이해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유대인은 신의이름을 발음하는것조차 금지했다. 신의 이름은 성서에 YHWH라고 씌어 있지만 성서를 읽을 때 발음할수 없다. 140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초월적이고 이해불가능한 존재가 이세상과 연결될 수 있을까? 랍비들은 이에 관한 그들의 감각을 신은 이 세계의 장소이지만 이 세계는 그의 장소가 아니라 라는 역설로써 표현하였다.  신은 세계에 생명을 주는 동싱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다.


랍비들이 애용한 신의 동의어 중 하나는 쉐키나인데 이 말은 ‘-와 함께 거하다’ 또는 ‘자신의 천막을 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샤칸’에서 나왔다. 이제 성전은 파괴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동행했던 신에 대한 이미지가 신에 대한 새로운 접근 가능성을 시사하게 되었다. 141


이스라엘과 신과의 연결은 너무 강하여 신이 과거에 그들을 구원했을 때 이스라엘인은 신에게 당신은 당신 자신을 구원했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랍비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유대적 방식으로 힌두교인이 아트만이라고 칭하는 자아와 동일화된 신개념을 발달시킨 것이다. 이스라엘인은 랍비들로부터 자신들을 한 몸과 한 영혼으로 뭉쳐진 공동체로 생각하도록 가르침 받았다. 그들 공동체는 내재하는 신을 모시는 새로운 성전이었다. 유배동안 유대인은 주위 세상이 가혹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신이 함께 한다는 생각은 그들이 선한 신에 의해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유대인은 계율을 행하는 것이 자신들을 보호하는 신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믿었다.143


제3장 이방인을 위한 빛


1.바울의 예수관


Q 예수의 성육신교리가 생긴 동기


불교와 힌두교에서도 붓다 또는 힌두교신들처럼 인간의 형태를 하고 나타난 신들에 대한 헌신이 크게 격증했다. 신에 대한 이런 개인적인 헌신을 박티라고 하는데 이는 인격화된 종교를 향한 영원한 인간의 갈망을 표출한다.


붓다가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만 간직하도록 유혹받았으나 고통당하는 인간에 대한 그의 자비심이 그후 40년간 도를 설법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에 리르러서 자신만의 열반을 달성하려 사원에 틀어박혀 있던 붊교승려들은 이런 자비심을 상실했던 것 같다. 그래서기원후 1세기에 붓다의 전례에 따라 스스로의 열반ㅇ르 미루고 대중을 위해 자신을 흐생하는 보살이 등장했다. 붓다와 보살에 대한 이런 헌신 곧 박티가 예수에 대한 기독교인의 헌신과 유사하다는 사실은 쉽게 알수 있다. 같은 시기에 힌두교에선 쉬바와 비쉬누에 초점을 맞춘 박티운동이 분출되어 나왔다.


신들에 대한 대중의 헌신은 우파니샤드의 철학적 근엄함을 압도할 만큼 거센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힌두교도는 유일하고 표현불가능한 실재의 브라흐만 쉬바 비쉬누의 삼위일체설을 발전시킨다.160


박티의 발전은 궁극적인 것과 무엇인가 인격적 관계를 맺으려는 뿌리깊은 대중적 요구에 대한 해답이었다. 불교에서 보살의 이상과 힌두교에서 비쉬누신의 화신개념이 발전된 사실은 모두 절대자가 적어도 인간적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요구를 대변하는 종교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보여준다.


그는 절대로 예수를 신이라 부르지 않았고 유대교적 의미에서 신의 아들이라고만 칭했다. 분명히 바울은 예수가 신의 성육신이라고 믿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예수는 단지 지상에서 신의 활동을 드러내는 신의 능력과 영을 지녔을 뿐이라고 생각되었기에 파악불가능한 신의 본성과 동일시되지 않았다. 바울은 유일신이 예수를 성육신한 존재로 믿을 수 없었기에 인간예수를 말했지만 예수가 보통사람이상의 존재라는 것은 분명히 믿었다. 바울이 예수를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일종의 대기같은 것으로 묘사한 것은 바울의 주관적이고 신비적 경험때문이었다.162


그리스도교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죽었다는 생각은 같은 시기에 인도에서 발생한 보살이라는 이상과 비슷했다. 보살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역시 인간과 절대자 사이의 중보자다. 다른 점은 그리스도가 유일한 중보자라는 사실이고 그가 가져온 구원은 보살의 그것처럼 아직 구현되지 않은 미래의 대망이 아니라 성취된 사실이라는 점이다. 바울은 예수의 자기희생이 유일무이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신의 무궁한 실재전체가 특정한 한 사람 안에서 모두 구현되었음을 시사하는 기독교의 단일성육신 이론은 성숙치 못한 우상숭배로 변질될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는 신의 능력이 자기에게만 임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예수가 새로운 형태의 인간의 첫 번째 예가 되었다고 논한 바울도 위의 생각을 발전시킨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실패한 모든 것을 성취했을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한 모든 인간이 참여하게 될 새 아담이 되었다. 이는 붓다가 절대 즉 공과 하나가 된 이래 인간의 이상은 불성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불교의 믿음과 다르지 않다. 164


바울은 너무 유대교적이어서 그리스도가 제2의 신적 존재로 영원전부터 야웨옆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필립비서 2장의 찬가는 예수는 신과 다른 존재이고 신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은 그를 부활시키고 주님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예수는 스스로 이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이 칭호는 오로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부여받은 것일뿐이다.





바울과 요한이 예수가 일종의 선재적 생명을 가졌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예수가 후대에 나타날 삼위일체설의 의미에서 예수가 제2의 신의 인격이라고 제안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의미한바 예수가 존재의 시간적 개인적 차원을 초월했다는 점이다. 예수가 보여준 능력과 지혜가 신에게서 나온 까닭에 예수는 태초부터 있었던 그 무엇을 나타내 보인 것이라는 의미였다.


이런 생각은 철저히 유대적 문맥에서만 이해될수 있는 내용이었고 그리스적 배경을 지닌 후대 기독교인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다시>


100년이 되어서야 씌어졌으리라 생각되는 사도행전을 보면 초기 기독교인이 아직 유대교적 신개념을 갖고 있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탄나임에게 그랬던 것처럼 성령은 이들 최초의 유대계 기독교인에게도 자신을 드러냈다. 오순절 후 베드로의 설교는 유대교의 절정을 말한다. 그으 ㅣ설교는 최초의 기독교인이 전한 복음의 메시지였다.


4세기말에 이르러 기독교는 여러 지역에서 세력이 강해졌다. 기독교의 뿌리는 야웨를 경외하는 자와 개종자가 많이 모이던 디아스포라의 유대교 시나고그(회당)이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 대성전 몰락후 랍비에 의해 발전된 탈무드를 중심으로 한 유대교를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고 기독교야말로 토라의 위상과 유대교의 보편성에 대한 자신으궁금증을 잘 답해준다고 믿는 이도 있었다. 특히 613개의 계율을 지킬 부담도 없이 새 이스라엘의 정식 회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내에선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겼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더 이상 시나고그의 구성원이 아님을 천명한 후 기독교는 광신자의 종교라고 경멸받았다.


종교는 이념의 문제라기 보다 예배와 제의의 문제였다. 종교는 이데올로기나 의식적으로 채택된 교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감정에 근거한 것이다. 사회의 예배에 참석하는 대부분은 신학적 논쟁에 별 관심이없고 특별한 종교경험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제도화된 이ㅖ배형식이 전통과의 연결고리를 제공하며 안정감을 선사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기독교가 조상의 신앙을 폐기하기 사작한다고 위협을 느꼈다.


<유스티노스>


그는 2세기에 개종한 자로 기독교가 전통과 단절된 것이 아님을 밝히고자 노력했다. 그는 개종전 스토아철학의 소요학파학자에게 사사받은 피타고라스주의자였는데 그런 철학의 주제를 잘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유스티노스는 기독교인은 단순히 플라톤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는 신적인 이성 로고스의 화신으로 로고스가 역사를 통해 세계에서 활약하며 그리스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영감을 주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유슽노스는 기독교적 로고스 이론의 새로운 의미를 설명하진 않았다. 어떻게 인간이 로고스를 성육신한 자가 될 수 있는가 로고스가 성서에서 말하는 말씀과 지혜와 같은 것인가 로고스와 유일신의 관계는 무엇인가 가 그것이다.


<영지주의>


지혜를 얻은 자들인 영지주의자는 신의 셰계에서 인간이 분리되어 있다는 에민한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 대신 신화에 눈을 돌렸다. 그들의 신화는 신과 신적 세계에 대한 무지함이 곧 비탄과 치욕의 근원이 된다는 그들의 경험을 잘 보여준다.


영지주의자들은 모두 그들이 ‘신본체(Godhead)라고 불렀던 전혀 이해불가능한 실재로부터 시작했다. 바실리데스는 태초에 신은 없었고 신본체만이 존재했다고 가르쳤는데 이는 無였다. 이 무는 심연과 침묵속에 홀로 머무는 것에 만족치 않았고 그 자신이 알려지길 원했다. 측량할수 없는 존재심연 속에 내적 혁명이 일어나 고대 이교적 신화에 묘사된 것처럼 일련의 유출이 이루어졌다. 유출의 첫 결과가 신이라는 것이다. 신은 남녀구분을 초월한 존재이지만 영지주의자가 말하는 유출은 에누마엘리쉬와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런 유출은 30번 전개되었을 때 그 과정은 끝이 나고 신적 세계 곧 충만이 완성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


마르키온(100-165)은 유대인의 신은 전쟁을 즐기는 신이고 이 악한 세상을 만든 신이나 예수는 유대교 경전에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다른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제2의 신은 평온하며 온유하며 오직 선하고 탁월한 신이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의 선한 신이 성서의 신보다도 그리스 철학의 신과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지적했다. 이 결함많은 세상과 아무 관련도 없는 평온한 신은 예수그리스도의 신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에 근접해 있다.


<클레멘스>150-215


기독교인이 로마 당국에게 핍박당할 때 그들의 죄명은 무신론자였는데 이는 기독교인의 신관념이 로마인의 정서를 심각하게 침해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들이 전통적 신을 존경치 않는 것을 보면서 로마인들은 그들이 국가를 위태롭게 하고 견고치 못한 사회질서를 전복시킬지 모른다고 염려했다. 기독교는 문명이 달성해온 것을 무시하는 야만적 교리로 보였다.


그러나 2세기 말 교양있는 이방인이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처음 주자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였다. 그는 야웨와 그리스 철학자의 신이 같은 신임을 의심치 않았다. 즉 그의 신은 무감정으로 특징지워진다. 즉 기독교인은 자신안에 새겨진 신의 형상인 내면적 고요함을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클레멘스는 예수가 신이고 고통을 당하고 경배받는 살아있는 신이라느 사실도 믿었다. 예수가 인간의 됨으로써 인간발달의 모든 단계를 성화시켰을며 기독교인을 위한 모델이 되었다.)


격정적이고 상처받기 쉬움이 특징인 예언자들의 신개념과 거의 공통점이 없지만클레멘스의 무감정의교리는 기독교적 신관념의 주요근간이 되었다. 그리스 세계의 사람들은 감정과 가변성의 혼동을 극복하고 초인적 평온함의 달성을 갈구했던 까닭에 신의 개념에 대한 그 본연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상이 성행한 것이다.

 그러나 클레멘스신학은 다음의 문제에 답변치 않았다. 어떻게 한 인간이 로고스가 될 수 있는가 예수가 신임은 무엇을 의미하나 로고스는 신의 아들과 같은 것인가 기독교인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가 신적 존재였다고 믿었고 오직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할수 있는가


<오리게네스>


그는 클레멘스의 제자로 교리문답 학교에서 클레멘스가 가르치던 자리를 물려받았다. 젊은 오리게네스는 순교야말로 천국에 이르는길이라 확신했다. 그는 기독교인의 삶이란 세상과 등지는 것이라 믿었으나 후에 이런 입장을 버리고 일종의 기독교적 플라톤주의을 발전시켰다. 신과 세계사이의 심연을 보는 대신 그는 신과 세상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신학을 발전시키게 된다. 그의 신학엔 빛 낙천주의 기쁨의 영성이 담겨있다. 기독교인은 한걸음씩 존재의 사슬을 밟고 올라 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9세기 오리게네스 사상일부가 이단으로 정죄받는다. 그것은 그와 클레멘스는 신이 이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했다고 믿지 않았다. 또 그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믿지 않고 인간자력으로 신에게 비상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와 클레멘스가 기독교적 플라톤주의를 가르치고 활동하던 시기엔 아직 공식적 기독교교리는 존재치 않았다.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인지 어떻게 인간이 신성을 가졌는지 알지 못했다. 4 5세기투쟁후 처음으로 정통신앙의 정의가 나왔다.


<사벨리우스>


그는 삼위는 배우가 쓴 탈 가면에 비견할수 있다고 제안했다. 유일신이 세상과 관계하기 위해 다른 탈을 걸친다는 것이다.


<파우로스>


260년에서 272년까지 안디옥의 사제였던 사모사타의 파우로스는 예수가 단지 인간이었을 뿐이며 신의 말씀과 지혜가 성전에 거하듯 예수 안에 거했으리라 제안했다. 


<플로티노스>


플라티노스는 플라톤의 사상에 기초하여 자아에 대한 이해를 달성하는 쳬계를 도출했다. 그는 인간은 다양한 현상을 통합하여 어떤 질서있는 전체를 획득하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통합을 지향하는 본능은 우리 정신이 작용하는 기본법칙이자 보편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반영한다고 그는 믿었다. 185


그는 원초적 통일상태에 있는 궁극적 실재를 一者라고 불렀다. 일자는 존재하는 어떤 사물도 아니면서도 모든 것 곧 만물이자 무다라고 했다. 이 생각이 신개념의 역사에서 일관된 주제이다. 플로티노스는 일자가 모든 인간적 범주를 초월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누마엘리쉬에서 한쌍이 신이 다른 신으로부터 생기면 더욱 완전해지고 효울적으로 변한 유출개념과는 달리 플로티노스의 도식은 열등한 유출개념을 말하고 있다. 즉 모든 존재는 일자의 원천에서 멀어지면 그만큼 점점 약화되는 것이다.


플로티누스의 일자에서 나온 최초의 두유출은 신적인 것으로 간주했는데 이는 그들이 우리에게 신적 삶을 가르쳐주고 그것에 참여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일자와 더불어 이 둘은 일종의 신성3부제를 형성했는데 이는 기독교에서 후에 최종적으로 확정된 삼위일체의 교리와 흡사한 것이었다. 최초의 유출인 지성 곧 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세계에 해당하는 것은 이는 연구나 추론에서 얻어진 지식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것이다. 지성으로부터 유출된 영혼 곧 프쉬케는 완전함에서 조금 더 멀어진 것이다. 플로티노스가 일자 지성 영혼의 삼두체제를 저편에 있는 신으로 생각치 않았다는 점을 상기하자.


유출이라는 외향적 흐름은 일자에게 돌아가려는 운동에 의해 저지된다. 우리의 지성이 겪는 수고와 갈등과 다양성으로 인한 불만족으로 미루어 알수 있듯이 모든 존재는 일자와의 결함을 갈망하고 일자에 돌아가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일자는 비인격적이며 성별도 없으나 지성은 남성형이고 영혼은 여성형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적 균형과 조화라는 고대의 이교의 비전을 보존하려는 프로로니톤스의 의도를 엿볼수 있다. 일자는 성서의 신과 달리 인간을 만나려 나타나거나 인간을 고향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일자는 인간을 그리워하거나 인간을 사랑하거나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의 영혼은 일자에 대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의 철학은 논리적 전개라기 보다 영성적 추구하고 할수 있다. 이 신을 찾는 것은 지식도  사유작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지식을 능가하는 현존에 의해 이루어진다.)


**


비인격적이고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면서도 인간에게 고유한 계몽이라는 개념은 플로티노스가 공부하러 가기를 원했던 힌두교와 불교의 이상과 유사하다. 즉 피상적차이점에 두드러져 모여도 신재에 관련된 유일신론적 시계관과 다른 세계관 사이에 공통점이 보인다.


절대에 대한 인류의 사유는 매우 유사한 생각과 경험을 공유한 것처럼 보인다. 열반 일자 브라흐만 또는 신이라고 불린 이 궁극적 실재 앞에서 느끼는 현존 황홀 또는 공포의 감정은 인류가 끊임없이 추구한 정신과 인식의 상태였다.


제4장 삼위일체 기독교의 신


1.아리우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예수를 강력한 신 또는 충만한 신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는 성부가 성자인 자신보다 우월함을 지적한 예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예수가 본질상 신이라 믿는 것은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성부 성자의 관계의 논쟁으로 콘스탄니누스황제가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아리우스 알렉산드로스 아타나시우스 모두 오리게네스가 가르쳤던 플라톤의 철학적 신이해에 반대해 신이무로부터 만물을 창조했다는 성서적 신관을 지지했다. 무로부터의 창조신앙도 사실은 성서의 창세기에 나타나 있지 않다.


4세기경에 기독교인은 영지주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즉 세계는 본질적으로 취약하고 불완전하고 광대한 균열에 의해 신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세계관이다. 그들은 우주가 본래 취약하고 그 존재와 생명이 완전히 신에게 의존한다는 영지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새로운 교리를 탄생시켰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력으로 신에게 접근할수 없으며 오직 신만이 인간을 무로부터 창조하고 나아가 영원한 구원의 상태로 인도할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신앙이었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로고스라 기술하고 로고스는 신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그가 본질적으로 신은 아니며 다만 신에 의해 신적 지위로 격상된 존재라고 주장했다. 198


기독교인이 신적 존재로 다가가는 길은 신에 대한 완벽한 복종의 모범을 보여준 그리스도의 삶을 명상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함으로써 신의 완전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 예수에 대한 아리우스의 주된 견해이다.


2. 아타나시우스


인간이 파멸을 면할수 있는 길은 신의 로고스를 통해 신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만일 로고스 자신이 피조물이라면 그는 인간을 멸망에서 건져낼수 없을 것이다.


<서구 기독교와 동방기독교>


서구-케리그마를 강조한 언어지향적 종교로 발전


동방-모든 신학적 작업을 일종의 묵시적 아포파시스적 측면에서 수행하고자 노력 .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말한 것처럼 모든 신개념을 신의 실체를 드러낼수 없는 그림자 즉 우상으로 보았다. 기독교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살며 모든 신개념을 멀리하고 어떤 개념에도 얽매이지 않는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모세의 생애>에서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진리의 불가해성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에 놓여있다고 표현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구름에 싸여 신의 임재를 느낀 것처럼 인간 스스로 신이해의 불가능을 자각할 때만 신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서방기독교인은 동방인이 사용한 테오리아(관조)를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삼위일체 교리이해에 어려움을 겪었다.


<카파도키안신학자>-성령에 관한 교리


이들은 신의 본질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하는 대신 신의 표현형태에 대한 인간 경험으로부터 신이해의 문제를 다루었다.


<아우구스티누스>


그는 열광적인 플라톤주의자로서 신플라톤철학자인 플로티노스에 매료되었다. 그는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며 지내던 중 메소포타니마계통의 영지주의 마니교로 개종했으나 그것의 우주론에 불만을 느껴 그것을 버렸다. 그리고 그는 본래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를 신성모독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의 가르침을 통해 기독교가 플라톤철학에 대립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고 성육신과 같은 여러 기독교 교리를 인정하게 되었다.  215


그의 회심 체험은 회심의 격통이 자라진 후 회심자가 신의 품에 안겨 느끼는 듯한 일종의 심리적 이탈 현상을 수반했다. 그러나 신은 그에게 회심의 아픔 뿐 아니라 기쁨도 주었다. 회심체험후 그는 티베르강변 오스티아에서 모친 모니카와 함께 무아적 희열을 체험했다.


그는 신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확신했다. 이는 고백록 제10장 메로리아에서 논하고 있다. 메모리아는 단순한 회상보다 더 복잡하고 광범위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마음의 명상적 침잠과 같은 무의식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 모두를 포괄한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 정신의 전영역을 뜻하는 말이었다. 217


그에게 신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인간자아의 심연 속에 거하는 영적 존재였다. 개인적 종교체험을 신학적 글에 담지 않은 동방 신학자와 달리 그는 개인적 종교체험에서 출발해 그의 신학사상을 발전시켰다. 인간정신에 대한 그의 관심은 5세기초에 쓴 <삼위일체에 관하여>에서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에 인간정신의 심연에 삼위일체적 요소가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각 개인이 체험하는 진리발견의 순간에 대한 탐구로부터 그의 신학체계를 전개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실재를 과연 사랑할수 있는가에 대해 그는 플라톤 철학에 근거해 설명했다. 인간정신안에 삼위일체적 요소가 존재한다. 나아가 인간은 늘 자신의 원형을 동경하는 존재이기에 그 동경에 근거한 사랑의 불씨를 통해 스스로의 내면안에 거한 신을 추구한다. 219


그는 인간의 영혼안에 지식 자기인식 사랑에 상응하는 기억 이해 의지 세 가지 속성이 지재한다고 보았다. 삼위일체처럼 이 세 정신속성이 분리된 정신세계를 구성하지 않고 서로 관통하면서 하나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본질적 통일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인간정신 속의 삼위일체가 신의 현존을 포함하는 동시에 신을 지향하는 일종의 반사형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과 신 사이의 헤아릴 수 없는 거리를 인간의 노력만으로 건널수 없는데 어떻게 인간이 거울에 반사된 표상의 한계를 넙어 신에게 직접 도달할수 있는가 그는 성육신한 말씁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신의 은총으로써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로마제국의 몰락은 그의 원죄에 관한 교리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원죄교리의 기본 요지는 아담의 원죄가 색욕에 의해 더렵혀진 성행위를 통해 모든 인류 후손에게 이러진다는 것이었다. 색욕은 신보다는 인간에게서 쾌락을 추구하려는 비이성적 욕망으로서 인간의이성이 격정에 사로잡혀 신은 완전히 잊혀지고 인간끼리만 쾌감을 나누는 방탕의 절정인 성행위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런 원죄신학은 유대교도 동방도 무슬림도 없고 다만 서방 기독교에만 있는데 그것은 냉혹한 모습의 신을 강조한 테르툴리누스에 의해 처음제시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확고한 신학적 체계를 갖추어 서구인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다.


즉 그의 원죄론은 서구에 성이해의 격하 특히 여성에 대한 억압적 이해로 드러났다. 본래 기독교는 여성을 긍정적으로 생각한 종교였으나 그를 통해 서구문화에 여성 혐오의 뿌리가 생겼다.


<디오니시우스>


로마황데 유스티니아누스가 529년 로마제국내 아테네의 고대 그리스 철학서원을 폐쇄했다. 이 곳에서 신비주의적 논문4편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사도 바울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한 디오뉘시우스에 의해 씌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6세기경 익명을 원한 그리스계 기독교인에 의해 씌어진 것이었다. 이것은 신플라톤철학을 기도교화하고 그리스 철학의 신과 유대교 및 기독교 성성의 신을 조화롭게 결합시킨 그리스계 기독교인의 업적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명료하고 인식가능한 복음으로서의 케리스마와 초언어적이고 신비직 복음으로서의 도그마를 구분했다. 케리그마는 진리에 관한 철학적 논증이며 명료화된 진리이나, 도그마는 감추어진 신의 신비를 암시함으로써 초보 입문자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뜻하는 입신 수련을 요구한다. 즉 도그마는 입신수련을 통해 신과 인간 영혼 사이의 합일을 가능케한다. 226


그는 신이 케리그마적 명칭을 통해 신적 모습의 일부를 드러내지만 계시를 통해 드러난 케리그마적 명칭이 신의 본질자체를 뜻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이 신을 참으로 이해하기 원하면 케리그마적 속성과 명칭을 먼저 부정해야 한다.그는 깨달음과 무지를 동시에 포용하는 역설을 통해서만 신적 세계의 본질에 접근할수 있다는 것이다. 228


인간의 사유를 금한 무아적 체험이 가능한 것은 인간노력에 부응해 산 정상으로 내려온 신의 임재때문이라고 보았다.229


그는 신이 초월적 한계를 넘어 스스로를 낮춰 피조물세계에 임재해 인간과 무아적 합일을 이룬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이러한 디오니시우스의 역설적 신학은 동방신학의 모범이 되었다. 그들은 신학의 암묵성과 역설성을 참 기독교신학의 근거로 간주했다.


<막스무스>


동방교회의 예수이해는 비잔틴 신학의 창시자인 막스무스의  성육신교리에 의해 대표된다. 그의 교리는 서방의 성육신교리보다 불교의 견성에 가깝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본성을 자각할 때 신과 합일될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의 신성화도 신의 은총을 인간이 구현하는 인간됨의 완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안셀무스>


서방에서는 동방과 달리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인간의 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의 구원계획을 새로이 바로 잡기 위한 것이다. 이는 인간의 죄의 대가가 신이지 인간인 존재에 의해 치러지기를 원하는 신에 의해 요구된 것으로 이것이 예수를 통해서 성취될 구원의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희생제불로 바쳐진 신의 아들의 죽음ㅇ르 통해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