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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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연구

어머니이신 하느님 -엔도슈사쿠의 깊은 강을 통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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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1-01-31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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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이신 하느님

                                      -예수는 어떻게 제자들에 의해 그리스도가 되셨나?   

                                                      엔도의 <깊은 강>를 통하여

     

                                                                                                            청담동성당 강의 (2018. 11.22)


 깊은 강은 엔도의 마지막 작품이자 사상의 깊이가 가장 잘 녹아있는 소설로 평가받는다.

그는 자신의 관에 침묵과 깊은 강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깊은 강은 인도의 갠지스강을 의미한다. 인도인에게 있어 갠지스강은 어머니 신을 의미한다.

앤도는 모든 것을 품어주는 갠지스강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려 했다. 바로 그 하느님은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이다. 그럼 깊은 강의 등장인물을 통해 엔도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언지 살펴보자.


 1.  깊은 강의 등장인물들


<깊은 강>은 무거운 과거의 짐을 안고 인도로 모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아내를 잃고 나서야 아내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이소베'

-어리석을 정도로 고지식하고 순수한 가톨릭 신자 '오쓰',

-그와 그의 종교적 신념을 조롱하고 파괴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미쓰코'

-구관조가 자신의 죽음을 대신 가져갔다고 믿는 동화 작가 '누마다'

-태평양 전쟁 때 미얀마에서 동료의 인육을 먹어야 했던 처참한 상황의 기억에 괴로워하는 '기구치’


이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인도로 여행을 간다. 과연 그들이 인도를 찾아 온 이유는 무엇일까?


 1)이소베


이소베는 노년의 셀러리맨이다. 어느 날 35년간 동행해준 아내가 암선고 받고 3 4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다. 아내는 반드시 다시 태어날 때니 이 세계 어딘가 자신을 찾아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엔도 슈사쿠의 연구, 233

 


**"환생을 믿으시나요, 힌두교도처럼?"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죽기 전까지는 그런 사후의 일 따윈 전혀 무관심했지요.

죽음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허나 집사람이 숨을 거두기 전날 했던 말 한마디가…마음의 실에 딱 걸려 떨어지지 않습니다. 삶의 방식을 정했어요. 바보에요.

나도. 인생에는 알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이소베가 몸을 일으킨 뒤에도 그네는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저 홀로 흔들렸다. 마치 그의 아내가 죽고서도 그 말이 남편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듯이 우리들 인생에서는 무엇인가 끝났어됴, 모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 우리 인생에서 이제 끝났구나 싶어도 아직 끝나지 않은 무엇이 남아 있다.

-이소베는 다시 태어날 자신을 찾아달라고 호소하던 아내를 통해 전생의 문제를 맞닥뜨린

후 환생한 아내 찾으러 인도 여행을 하게 된다. -갠지스강변 도시 바라나시에서 그는 전생이 일본인이었다는 소녀를 만나길 기대했으나 찾지 못하고 거리 거닐다 강변에 걸터앉아 강을 바라본다. 결국 아내의 환생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하고 결국 애절히 아내를 그리워하며 삶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 엔도 슈사쿠의 연구, 233


곧 그는 인도에서 자기 마음속에 아내와 지낸 세월 자신이 아내와 얼마나 깊은 결속을 했는지 느

끼게 된다. 결국 그는 인도에서 아내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아내가 자신의 삶에 남긴 흔적들 그건 바로 사랑의 흔적이었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는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던 그가 인도에서 비로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마치 예수가 죽고 나서 그의 제자들은 비로소 자신의 마음에 예수가 깊이 새겨져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발견햇듯이...

그렇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 비로서 사랑을 느낀다. 죽임을 당했던 양파가 제자들의 마음 속에 계속 살게 되면서 전생을 한 것처럼, 이소베는 아내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닫고 아내에 대한 애착을 확인한다. 사랑의 발견을 통해 그녀는 남편의 마음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는 사후에 제자들에 의해 메시야 그리스도로 추앙받게 되었을까?


**손에 든 술병을 강물에 던졌다. 수많은 힌두교도들이, 이 거대한 흐름에 의해 정결해지고 보다 나은 재생으로 이어진다고 믿는 강. 아내도 무언가에 의해 실려 갔을까.


 "여보." 하고 그가 불러 보았다.

 "어디로 간 거야?"

예전에 아내가 살아 있을 때는 이렇듯 생생한 기분으로 아내를 불렀던 적이 없다. 아내가 죽기 까지 그는 대부분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일에 열중하고. 가정은 등한시 했다.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인생이라는 건 우선 일, 열심히 일하는 것이며, 그런 남편의 모습을 여자 또한 좋아하리라 생각해왔다.

그리고 아내가 자신에 대한 애정이 얼마만큼 깃들어 있는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런 안심 속에 그녀와의 유대감이 얼마나 강하게 강하게 깃들여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했다.>

- 이소베는 인도에 와서 자신이 부인을 얼마나 사랑햇는지를 느끼게 된다.

-

 2) 미쓰코


-참된 사랑을 믿지 않던 사람, 그래서 늘 인생의 공허함을 느낌

-남자의 육체적 쾌락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 인도로 옴

-자신이 유혹했던 오츠를 찾아서 인도로...


-병원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중년의 이혼녀이다. 그는 오쓰를 장난 삼아 유혹한 후 그를 버림으로 그의 인생을 왜곡 시킨 경험이 있다. 그 후 결혼에 실패한 후 사랑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기갈에서 비롯된 공허감으로 오오쓰를 찾아 인도로 왔다.

그가 오쓰에게 관심가진 건 그가 믿던 하느님을 놀려보고 싶은 맘 때문이었다.

또 하나는 공허한 삶의 연속에서 무얼 찾던 그가 오쓰에게서 다른 방식의 삶을 느꼈기 때문이다.

248

그녀는 인도여행에서  차문다 여신상 통해 마음의 큰 전환을 맛보게 된다.  병고 고통참으며 시든 유방에서 젖을 짜내 주는 모습은 더 이상 값싼 동정이나 사랑의 흉내는 소용이 없고 진정한 사랑만이 필요한 삶의 현실을 목도

-미스코는 차문다 여신을 통해 참된 사랑의 의미를 재발견한 것이다.

 

<깊은 강>에서 엔도는 힌두교의 여신인 ‘차문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차문다는 무덤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발밑에는 새에게 쪼이거나 작은 늑대 같은 재규어에게 먹히고 있는 인간의 시체가 있어요. 그녀의 젖가슴은 노파처럼 이미 쭈글 쭈글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젖가슴에서 젖을 짜내어 늘어선 아이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녀의 오른발이 문둥병으로 짓물러 있는 것이 보입니다. 복부는 굶어서 움푹 파여 있는데 그곳을 전갈이 물고 있어요. 그녀는 그러한 병고와 고통을 참으면서도 쭈글쭈글 시든 유방에서 젖을 짜내어 인간에게 줍니다.“

그녀는 인도 사람의 모든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인도 사람들이 겪은 병고와 죽음과 굶주림이 이 여신상에 나타나 있다. . 이 여신은 인간이 오랫동안 고통받아 왔던 갖가지 병에 다 걸려 있다. 굶주려 헐떡이면서도 시든 유방에서 젖을 짜내어 인간에게 주고 있다’

  깊은 강 212 -213 차문다여신



--여신 차문다는 인도의 성모마리아라 할 수 있지만 보통 성모상에서 느낄수 있는 우아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늙고 추한데다 고통으로 가득찬 모습에서 고통 받는 인도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병고와 아픔을 견디며 쭈그러든 젖가슴으로 인간에게 젖을 주는 이 여신은 바로 양파의 의미와 중첩 그리고 그 여신은 모든 것을 감싸안은 갠지스강의 이미지와 연동된다.

강은 카스트 제도와 같은 신분경계를 초월하여 모두를 받아들인다.  안영신 경계.. 169



“갠지스강을 볼 때마다 저는 양파를 생각합니다. 갠지스강은 구걸하는 여자도 간디수상도 똑같이 거절없이 한사람 한사람의 재를 삼키고 흘러갑니다. 양파라는 사랑의 강은 아무리 추한 인간도 거절없이 받아들이며 흘러갑니다. 안영신 경계.. 169

 

-갠지스강에서 사제로서 불가촉민들의 시신을 나르던 오쓰를 만난 후 그녀는 갠지스강을 인도인들이 바라보는 시각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오쓰의 삶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어떤 추한 인간도 마다않고 거두는 강. 사랑의 갠지스강을 본 것이다.


 3) 오오쯔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가톨릭 사제의 길을 가고자 했던 ‘오오쯔’라는 신학생이다. 그는 프랑스로 유학가서 신학공부를 하다가 신관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사제서품을 받지 못한 체 고려 대상이 되고 만다.

 그가 가진 신관에 범신론적인 냄새를 많이 풍긴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느님은 당신네들(서구인들)처럼 인간 밖에서 바라보는 게 아닙니다. 사람 안에 있어 사람을 감싸고 나무를 감싸고 풀과 꽃을 감싸는 커다란 생명입니다.”

오오쯔는 신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서구의 그리스도교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서구에서 자연의 생명을 경시하는 것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자연의 커다란 생명이 곧 신인데 자연의 거대한 생명을 경시하는 것을 나는 참을 수가 없다.”


<프랑스 유학-예루살렘- 인도 갠지스강>


사제 서품이 연기되자 오오쓰는 이스라엘에 가서 근신생활을 하다가 인도 갠지스강으로 가게 된다. 오오쯔는 갠지스강 주변에 버려져 있는 시체를 나르는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당신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르셨습니다. 내가 지금 당신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른 예수처럼 시신을 지고 화장터를 오르며 예수를 흉내 낸 오오쯔는 하느님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느님은 존재라기보다는 활동입니다. 양파는 사랑이 활동하는 덩어리입니다. 양파는 버림받은 나를 어느 순간에 다른 장소에서 살게 했습니다.” 오오쯔는 예수를 양파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오오쯔가 좋아했던 미쓰코라는 여학생이 예수라는 이름을 아주 싫어했기에 오오쓰는 예수를 양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오쯔의 이러한 고백 안에도 엔도의 신관이 잘 녹아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구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을 존재로 보지만 엔도는 하느님을 존재라기보다 활동 그 자체로 본다. 양파(예수)는 ‘사랑이 활동하는 덩어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랑이 활동하는 덩어리, 이것이 바로 엔도가 생각하는 하느님이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인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정체성 속에서 자기 나름의 신관을 구축하고자 한다. ‘사랑이 활동하는 덩어리’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251 오쓰는 프랑스 이후 이스라엘의 갈릴리 호수에 갔고 거기서 모성적 세계를 발견

엔도는 갠지스강을 병고와 죽음 굶주림에 시달린 이들에게 어머니로서 다가서는 여신에게 비유한다. 갠지스 강은 산 자도, 죽은 자도 받아들이는 어머니로서의 강이다. 갠지스 강에는 부풀은 개의 사체가 둥둥 떠다니고, 인간의 시체를 태운 재도 거기에 뿌려진다. 그럼에도 힌두교도들은 그 강에 들어가 목욕하고 그 물로 입을 가신다. 보통 사람들은 불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힌두교도에게 갠지스 강은 그 모든 더러움을 정화시켜주는 성스럽고도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곳이다. 이처럼 엔도는 어떤 존재든 모두를 품어주는 갠지스강을 통해 하느님의 이미지를 드러내고자 했다.

인도의 모성적 갠지스강의 관심과 함께 인도의 마더 데레사의 세계로 관심을 심화해간 신앙도정과 그대로 일치한다. 


오쓰의 마지막 말인 “이것으로 ...좋아 나의 인생은 ..이것으로 좋아”에서 우리는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하신 마지막 말을 떠올리게 된다. “다 이루었다.”

(오쓰는 갠지스강에서 무심한 일본 관광객을 대신해 분노한 대중에게 맞아 병원에 실려간다. )


*우리는 여기서 오쓰와 예수의 삶이 지닌 유사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건 바로 약자와의 동반자라는 점이다.

우리는 어디서 예수를 만날 수 있는가?

그분은 약자들과 함께 계신다.


엔도가 <깊은 강>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들은?


 (1) 강의 의미  카오스 제도로 불가촉천민들과 끝없이 가난한 사람들, 죽기 위해 갠지스 강을 찾아가는 사람들, 죽음을 위한 방문이 생의 가장 위대한 목표인 이들이 인도에 있다. 갠지스 강에는 그런 죽음의 행렬과 더 나은 삶으로의 환생의 꿈이 있다.



미쓰코는 다섯 손가락을 단단히 움켜쥐고 화장터 쪽을 바라보며 오쓰의 모습을 찾았다.

 "믿을 수 있는 건, 저마다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아픔을 짊어지고 깊은 강에서 기도하는 이 광경입니다." 하고 미쓰코의 마음의 어조는 어느 틈엔가 기도 풍으로 바뀌었다.


 "그 사람들을 보듬으며 강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강, 인간의 깊은 강의 슬픔, 그 안에 저도 섞여 있습니다."

깊은 강 282 갠지스 강은 썩어 문드러진 손을 내닐어 구걸하던 소녀도 살해당한 간디수상도 똑같이 마다하지 않고 한사람 한사람의 재를 받아 흘려보냅니다.

양파가 말한 사랑의 강은 어떤 추한 인간도 어떤 더러운 인간도 마다하지 않고 거두어 흘려 보냅니다.


--여러 종교가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한 지점으로 가는 여러 길인 셈이다. 같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한 우리들이 서로 다른 길로 가려 한들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깊은 강 290)


 2) 어머니로서의 하느님


소년시절부터 어머니를 통해서 내가 단지 믿을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의 따스함이었다.

어머니와 손을 잡았을 때의 그 따스함, 안아주셨을 때의 체온의 따스함

사랑의 따스함, 형제들에 비해 특히 모자랐던 나를 돌봐 주시던 따스함.

어머니는 나에게 양파란 이 따스함보다 한층 강한 응어리

즉 사랑 그 자체라고 가르쳐주셨다. (깊은 강181)


-사르트르 대성당을 순례했을 때 저 대성당은 그 지방사람들이 땅의 어머니인 지모신을 성모마리아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읽었다. 그 지방 지모신의신앙을 뿌리로 해서 가콜릭을 키워왔다고 생각한다. (깊은 강 186)


-어머니의 강

  어머니의 강은 살 사람도 죽을 사람도 모두 받아들입니다. 성스러움이란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깊은 강 215)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탕자의 아버지손


 3) 사랑으로서의 하느님


 -"당신은 변했군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변한 게 아니라 마술사인 신께서 변하게 만드신 거지요."

 "근데 그 신이라는 말 좀 그만 할래요. 짜증이 나고 실감도 안 나요. 나한테 실체가 없단 말예요. 대학 때부터 외국인 신부들이 쓰던 그 신이라는 단어와는 인연이 멀어요."

 "미안합니다. 그 단어가 싫다면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도 상관없습니다. 토마토건 양파건 다 좋습니다."

 "그럼 당신한테 양파란 뭔가요? 예전에 그저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그랬잖아요. 신은 존재하느냐고 누군가 당신한테 물었을 때."

 "미안합니다. 솔직히 그 무렵은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 나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말해봐요."

 "신은 존재라기 보다 손길입니다. 양파는 사랑을 베푸는 덩어리입니다."


 

이 세상 중심은 사랑으로, 양파는 오랜 역사 속에서 그것만을 우리들 인간에게 보여주엇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세계 속에 무엇보다 결여된 것도 사랑이며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 사랑이며 비웃음 받는 것도 사랑이다. (깊은 강182)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하고 계시나요? 수녀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것뿐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인 걸요 저희들은...그것뿐이라고 했나. 그 사람 뿐이라고 했나.

그 사람이라고 했다면 그건 오오츠의 양파 그것일 게다. 양파는 옛날 죽었지만 다른 인간 안에 환생했다. 이 수녀 안에 환생했고 오오츠 안에 환생했다. (깊은 강327)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도의 성격>


 2) 도의 여성성


6장 도는 신비의 여인(현빈)

계곡의 신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건 신비의 여인

여인의 문은 하늘과 땅의 근원

끊길 듯 하면서도 이어지고 써도 써도 다할 줄 모릅니다.


 6장은 도를 여인으로 상징한다.

여인의 문은 하늘과 땅의 근원이라 했다. 약한 것 같지만 끊어지는 일 없고 쓰면 줄거나 없어질 것 같지만 언제나 이어지고 텅빈 것 같지만 그 속에서 계속 뭔가를 생산해내는 도..는 어머니이다.


노자 6장에서는 도의 속성으로 비움과 함께 여성성을 들고 있다. 노자는 도를 계곡의 신령인 곡신(谷神)에 비유한다. “‘골짜기의 신(谷神)’은 죽지 않으니 이를 현묘한 여성(玄牝)이라 부른다. 현묘한 여성의 문(玄牝之門), 이를 가리켜 하늘과 땅의 뿌리라 한다.”

여기서 계곡의 중앙은 비어 있어서 형태가 없으나 그것으로 산에 가득찬 모든 것에 생명을 줄 수 있다. 곧 곡신이 무한한 생명력을 지녔음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왕필은 풀무 속이 비어 있는 것을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버리고 자연에 따르는 것이라 풀이했다. 풀무와 피리 속이 공허하여 無情 無爲하므로 끝없이 바람과 소리를 낼 수 있듯이 천지사이도 비어있어 자연에 맡김으로써 다함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린 곡신이 영원할수 있음을 비어 있음 때문임을 알 수 있다.(이강수 노자와 장자, 65쪽)

 

 이처럼 생명은 이 빈 계곡에서 나오니 노자는 이를 현빈(玄牝) 곧 신비스런 암컷이라 이름지었다. 현묘한 암컷의 문은 어머니의 음부라는 원초적 이미지를 깔고 있다.


노자는 여성성을 생명력, 평화의 길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살았을 땐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었을 땐 단단하고 뻣뻣해진다. 만물과 초목도 살앗을 땐 부드럽고 연하지만 죽었을 땐 마르고 뻣뻣해진다. 따라서 단단하고 뻣뻣한 것은 죽은 무리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살아있는 무리다.......나무가 뻣뻣하면 부러진다.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놓이게 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위에 있게 된다.” (도덕경 76장)


한번 세운 기준을 무조건 밀고 나가는 ‘뻣뻣함’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부드러움’은 완전히 대조되는 세계를 대변한다. 여기서도 노자는 바람에 휘는 나무와 바람에 꺾여서 쓰러지는 나무의 관찰을 통해 사회의 운영 원리를 도출해내고 있다. 그 결과 아래에 있는 부드러운 여성성의 세상이 위로 올라가고, 위에서 버티던 뻣뻣한 남성의 세상은 아래로 내려나는 역전이 일어난다. 노자는 이런 역전을 “부드러움과 약함이 단단함과 뻣뻣함을 이긴다.(도덕경 36장)”라는 식으로 정식화시키고 있다.


 나아가 노자는 강(强)의 의미마저 뒤집어버린다.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이 강한 것이다.(도덕경 52장)” 즉 부드러움은 더 이상 강함과 반대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드러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강한 것이다. 노자는 부드러움의 힘을 물에서 관찰햇다. 보통 나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강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물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므로 유약한 것이다(도덕경 78장).


하지만 물은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이롭게 하면서도 무엇과도 다투지 않음으로 결국 강한 것이 도니다. 그 무엇도 물과 싸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노자가 여성성에서 찾아낸 생명력과 평화의 길이 노자 전체에서 일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가장 많이 드는 비유는 어머니이다. 노자 52장을 보면 ‘천하에는 시작이 있어서 그 시작을 가히 천하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이미 그 어머니를 얻으면 또 그 아들을 알 수 가 있으니, 이미 그 아들을 알면 다시 그 어머니에게 돌아가서 지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몸이 다해도 위태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도이고, 아들은 세상 만물입니다. 만물을 통해 도를 알고 지키면 장구할 수 잇다는 믿음을 표명하고 있다.

 모자 6장에서는 ‘계곡의 신령합은 죽지 않는다. 그래서 신묘한 암컷이라고 한다. 모든 암컷의 문이 되니 이것을 일러서 하늘과 땅의 뿌리라고 이야기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인간의 경우에는 모성성을 가리킨다면 동물들의 경우 암컷에 해당합니다. 산의 계곡은 쑥 들어가 있어서 산의 신령한 생명력이 모아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령함, 그 비어 있는 생명력 안에서 도의 성품을 보았던 것입니다.


<52장>

“하늘 아래 모든 것은 공통된 시작이 있는데 그 시작이 바로 세상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를 알면 자식을 알 수 있고 자식을 알면 다시 돌아가 어머니를 받들어야 한다.

--노자는 만물에 깃든 이 신비를 어머니라 부르고 이는 태어나고 죽는 모든 것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노자는 자식인 만물을 어머니와 별개로 생각하지 말고 어머니 자체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만물이 어머니에서 비롯된 것이니 다시 돌아가 어머니를 받들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어머니께로 돌아갈수 있을까.

우리의 입을 막고 귀를 덮어라

어머니를 닮은 자기 내면과 시간을 보내고 주변의 존재 속에서 도를 발견함으로써 밝음을 추구하라.


<물> 제 8장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노자 8장에 보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 일을 잘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것을 싫어하고 위로 올라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물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는 곳에 머물 수 있으면 도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 다투지 않는다.

물을 모든 사람들이 꺼려하는 곳에 자리한다.

참으로 물은 도에 가까운 존재이다.


 물 흐르듯 살아라!

천하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柔) 약한(弱) 것이 없으나, 단단하고 강한 것은 공격하는데는 이것을 이길 것이 없다(78장)

- 부드러움=生/단단함= 死


*도교의 도인술은 노자의 사상에 근거.

 부드럽고 약한 것일수록 생명력이 충만.

 도인들은 氣와 血을 잘 통하도록 인도하여, 몸 마음을 유연하게 함. 불로장생하기를 후구

(단단한 것보다 부드러운 것이 오래간다. 柔弱勝剛强. 36장)


→ 노자 66장. “강과 바다가 온갖 시냇물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다.”

<43장>

무는 틈없는 곳으로 들어간다. 가장 부드러운 건 가장 굳은 곳을 뚫고 들어간다.(물의 특성) 이것으로 무위의 유익성을 알 수 있다. 이보다 더 좋은 건 이 세상에 없다.

8장

 上善若水 물같이 되라는 것이다. 물은 생명의 근원

40장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

약함이 도의 쓰임새이다

온 세상모든 것 있음에서 생겨나고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