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씨튼연구원은 영성의 토착화와 종교간의 학문적 대화가 목적입니다.
그리스도교 연구

석존에서 도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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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10-10-25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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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불교>


불교를 배운다는 것, 타종교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축적된 전통만을 배움에 그친다면 그것은 다만 타종교에 대한 지식을 습득함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미나를 통해서  단순히 축적된 전통을 배울 목적으로 모인 것이 아니다. 우린 종교와 종교간의 대화를 전제로 하여 타종교를 배우고자 한다. 대화란 인격과 인격간의 만남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와 불교간의 대화란 엄밀한 의미에서 잘못된 표현이다. 그리스도교신앙을 지닌 한 사람의 크리스찬이 불교신앙을 지닌 한 불자와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미나를 통해 그리스도교신앙을 지닌 한 수도자로서 불교라는 종교전통에서 내가 만난 불자들, 그들의 신앙을 나누고자 하고 그 신앙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나누고자 한다.


1.원시불교-고타마 붓다를 중심으로

2. 중국선불교-초조 달마를 중심으로 한 초기 조사들

3. 일본선불교-도겐

 


1. 고타마 붓다의 명칭


2. 고타마 붓다의 생애


3. 고타마 붓다의 출가수행


1).요가

요가는 바라문의 수행방법으로 요가의 궁극적 목적은 범아일여라고 할 수 있다. 梵은 브라흐만이고 我는 아트만을 의미한다. 즉 우주의 본질인 브라흐만과 자기인 아트만이 본래 하나임을 자각함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요가의 특징은 현세를 苦로 본다는 점이다. 즉 현세는 다만 苦이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다음 세계 즉 내세의 生天上界를 지향하는 것이다.


석존은 그가 체득한 선정요가를 통해 마음의 적정을 얻었으나 이것이 참된 깨달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즉 적정을 유지하는 힘이 결여되면 마음의 적정이 다시 무너져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즉 선정은 마음의 단련방법이긴 하지만 이 방법으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고 고타마는 생각했다. 여기서 붓다가 요가를 버린 것은 그의 사상의 핵심과 직결된다.


-인도전통사상-아트만 인정, 현세부정 -내세중시

-불교-아트만 인정치 않음, (무아), 현세중시


2) 고행수행


석존은 요가를 버리고 산림에 들어가서 독자적으로 수행을 했다. 그것이 고행수행이었다. 그 때 오명의 수행자들도 함께 고행수행을 했다. 그는 이 고행수행을 6년간 지속했다. 피골이 상접한 붓다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열심히 고행을 했는지 알수 있다.  그러나 붓다는 그토록 심한 고행을 했건만 그것으로 인간의 성질을 초극한 완전하고 성스런 知見에 도달치 못했다.


결국 붓다는 고행이 무익함을 깨닫고 이를 그만두었다. 그는 자기와 부왕을 따라서 농경축제로 외출해서 나무 밑에서 명상에 잠겼던 것이 생각났다. 그 안락한 좌선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비밀이 있지 않나 라고 생각했다.그는 고행한 몸을 씻고 스자타가 준 우유죽을 먹고 원기를 회복하여 보리수에서 단좌명상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35세 12월8일 새벽 고타마는 각자로서 자각을 얻었다.


깨달음을 연 붓다는 처음에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설할 마음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깨달음은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며 미묘한 것이고 심원해서 욕망과 탐욕에 쌓인 사람은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성찰하여 설할 마음이 없었다. 이 때 梵天이 세번 거듭 붓다에게 설법을 청함으로 해서 세존은 연민의 정이 일어나서 설법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45년간 인도각지에 설법여행을 하면서 교화활동을 벌이며 많은 제자를 얻었다. 그리고 쿠시나라에서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3) 端坐冥想의 의미


붓다가 요가와 고행을 버리고 단좌명상을 했다는 것, 이것이 불교좌선의 기원이다. 몸을 똑바로 하고 몸을 세워 앉아서 깊이 명상에 잠김, 이것과 바라문의 요가와의 차이는 요가는 梵我一如를 명상하는 것이나, 붓다는 緣에 의한 명상이다.


붓다는 35세에 깨닫고 45년간 인도각지를 돌며 설법여행을 했다. 그 설법에서 사람들에게 설한 실천수행법이 바로 단좌명상이었다. 즉 이 단좌명상은 결코 고행이 아니다. 도겐은 “좌선은 安樂의 法門”(普卷坐禪義)에서 말한다. 붓다는 단좌명상 생활이 가능한 삶의 형태로 제자들에게 출가를 권장했다.


<숫타니파타>


(가장 오래된 원시경전으로 산문이 아닌 운문형식을 띰)

 "在家생활을 고통스럽고 마음에 번민이 많은데 반해, 출가는 넓은 야외와 같다.“라고 한다.

”수행자는 정해진 때에 탁발하고 혼자서 물러나서 나무 그늘 밑에 앉아라“라고 하여 (단좌명상)을 말하고 있다. 이같이 명상은 출가수행자가 해야 할 실천도였으며 이는 동시에 이상적 삶의 방식이었다.


3. 붓다의 깨달음


고타마 붓다는 과연 무엇을 깨달았는가? 대개 12支緣起說이라고 한다.

1) 12지연기설

12개항목이 서로 緣하여 생겨나는 관계를 연기라고 한다. 즉 이는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는 관계 속에서 생성소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연기설의 일반구조는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남으로 해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음으로 해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해서 저것이 멸한다."이다.

붓다는 이 연기설로서 인간의 苦의 원인을 규명한다. 즉 12개요소로 인간존재를 설명하는 것이 12지연기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12지연기설은 무엇인가?


붓다의 명상은 老死로부터 출발한다. 붓다에게 있어 12연기를 관상하는 출발점이 된 것은 인간존재의 老死라는 사실이다. 그럼 붓다는 老死를 어떻게 보았는가? 그는 老死는 無常이고 苦라고 보았다. 즉 老死는 자기의 무상변천이다. 노사가 붓다에게 최대관심사가 된 이유는 그것이 우리자신에 대한 근본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내가 老死로서 무상변천해 간다는 것은 生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태어났기 때문에 죽음이 있는 것이다. 老死는 生에 의해서 생겨난다. 生이라는 것은 有에 의해 있는 것이다.


有(생존)은 取(무엇을 자기 것으로 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는 愛에 연해서 생겨난다. 愛는 渴愛(목마른 사람은 물을 원하는 것같은 강한 충동)를 말한다. 愛는 受에 緣해서 일어난다.


쾌, 불쾌의 감수작용인 受는 觸(감수작용에 의해 접촉이 생겨난다. 마음이 대상과 접촉함) 감각기관인 六入(眼耳鼻舌身意)과 외부접촉에 의해서 일어나며 근본은 名色 즉 身心의 활동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 신심활동은 識에 의해 일어난다. 이같이 우리의 생존(有)는 애착, 집착의 생존이 되어 있음을 붓다는 밝힌 것이다. 의식활동을 지지하는 것이 行(잠재적 형성력) 즉 의지이며, 의지를 지지하는 것이 無明이다


이렇게 볼 때 12연기는 “모든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는 것이다. 분별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실체를 지니고 있는 것같이 보이나, 깨닫게 되면 모든 것은 무명에 의해 드러난 것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같이 무실체성에 대한 자각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상호의존성 즉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상호의존관계를 자각함을 의미한다. 결국 자신이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은 타력에 의한 것 즉 우주 일체의 힘에 의한 것임을 자각한 것이다.


律藏大品의 서두에서 붓다가 12지연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고 나온다.“무명이라는 연으로부터 諸行이 생기고 제행이라는 연으로부터 識(인식작용)이 생기고 識이라는 緣으로부터 名色(명칭과 형태)가 생기고, 名色이라는 緣으로부터 六處(감각기능)이 생기고 거기서 觸(감각기능에 의해 대상과 접촉이 있음)이, 觸에서 受(감수작용)이 受에서 愛(妄執) 受에서 取(집착)이 取에서 有(생존)이, 有에서 生(출생)이 생에 서 노사가 생긴다. 이같이 해서 순수한 苦의 덩어리가 生起한 것이다.


그러나 연기에 의해서 석존의 깨달음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를 소멸시키는 방법을 설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그것이 바로 緣滅의 진리이다.


“무명을 지멸하면 생활작용도 지멸하고, 이를 지멸하면 식별작용이, 이를 지멸하면 명칭과 형태가, 이를 지멸하면 6가지 감각기능이, 이를 지멸하면 대상과의 접촉이, 이를 지멸하면 감수작용이, 이를 지멸하면 망집이, 이를 지멸하면 집착이, 집착이 지멸하면 생존도, 생존이 지멸하면 출생도, 출생이 지멸하면 노사도 지멸한다.”

앞의 것이 順觀이라면 뒤의 것은 逆觀이다. 이상에서 12지연기를 살펴보았지만 원시불전에서 12지연기이외에도 3支(無明, 取, 苦) 4支, 5支, 8支, 9支, 10支가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해서 학자들은 석존이 처음 깨달았을 때 12지연기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이는 후에 정리된 상태이지 깨달음 그 자체는 아니다 라고 한다. 즉 산문의 연기설은 붓다의 사색의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바로 보다 간단한 연기설이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그럼 붓다가 참으로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달마이다


2) 법.


원시불교경전에는 韻文과 散文이 있다. 종래 원시불교연구는 산문중심이었으나 운문이 산문체보다 오래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숫타니파타, 여기에는 12지연기설보다 더 간단한 연기설이 설해져 있다. 그럼 붓다가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고타마의 해탈시기를 그리고 있는 경전<우다아나(즉흥의 시)>남전대장경 권 23, 86-88

일몰시의 시

“달마가 열심히 명상하고 있는 수행자에게 드러났을 때 그의 일체의 의혹은 사라졌다. 이는 그가 연기의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眞夜時의 시

“달마가 열심히 명상하고 있는 수행자에게 드러났을 때 그의 일체의 의혹은 사라졌다. 이는 그가 모든 연의 소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벽의 시

“달마가 열심히 명상하고 있는 수행자에게 드러났을 때 그는 악마의 군대를 부수고 安立하고 있다. 태양이 허공을 비치는 것과 같다.”


여기서 공통으로 나오는 달마가 바로 법이다. 즉 달마가 붓다에게 드러난 것이다. 붓다는 이 법을 존중하고 법을 따라서 80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살았다.


"나는 나보다 그 이상 戒(명상 지혜 해탈)를 몸에 익힌 수행자, 바라문을 보지 못했다. 그를 만났다면 그를 존중하고 의지했을 것이다. 나는 바로  이 법(모든 것을 초월한 영원한 법)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이 법을 존중하고 의지하겠다.“ 즉 붓다는 이미 존재하는 법(달마)에 눈을 뜬 것이다. 붓다 이전부터, 영원이전부터 존재하는 법을 발견한 것이다. 梵天은 붓다가 발견한 법의 진리를 그에게 시준해 주었다.


“과거에 깨달은 사람들 미래에 깨달은 사람들 현재에 깨달은 사람들 모두 바른 법을 존경하고 있었고 또한 존경할 것이다. 이것이 모든 깨달은 사람(佛)의 정함이었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諸佛의 권위는 法(이는 ‘보전하는 것’이란 뜻이며 라틴어의 forma와 어원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한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부처님 혹은 불교의 권위는 이 법을 바탕으로 성립하고 있다. 모든 불은 바른 법(正法)을 존중하고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게 되는데 이것이 제불의 규칙이라고 한다. 근본에 법이 있음으로 해서 佛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이같이 붓다는 법에 좇아서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는 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며 언제나 법을 즐기는 사람인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붓다의 깨달음은 곧 법이며 이것이 12지연기로 정리되어 언어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붓다의 道得)


3) 12지연기와 법


법에 대해서 붓다는 三法印으로 설명한다.


ㄱ. 諸行無常(연기적 표현)-緣起의 특징이 바로 무상

(연기설에 의하면 인간존재의 여러 측면을 가리키고 있는 제법(12지)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필연적 법칙성을 지니고 상호관련 속에서 생멸한다는 것이다.


ㄴ. 諸法無我(법적 표현)-법의 특징이 바로 무아.

(諸法은 어느 것도 독자성을 지니지 못한 조건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아설이다. 무아설의 반대인 常住설을 붓다는 거부한다. 우파니샤드 철학에서의 제1원인이 되는 실재인 凡도, 주체인 我도 부정한다.


ㄷ. 一切皆苦- 일체의 것(존재)는 실체성을 지니지 않은 無我임을 말한 것이 諸法無我라면, 이것이 일체의 존재가 끊임없이 유전해 감을 諸行無常이라고 한다. 그러나 범부는 이것을 모르고 집착함에서 一切皆苦가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법과 연기는 붓다가 깨달은 것에 대한 다른 표현방식이라 할 수 있다.


 연기설은 모든 것이 상의상관관계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연기설은 단순히 인간의 고의 원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바로 상의상관관계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진리이다. 즉 지금 여기에 있는 나라는 존재는 바로 나를 둘러싼 수많은 존재들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연기설이다. 즉 연기설 속에 참된 것은 바로 나라는 실체를 벗어나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간의 상관관계를 깨닫는데 있다.


붓다는 말한다. “나는 이 법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이 법을 존중하고 이 법에 의지하는 것이다.” 즉 붓다는 바로 이 연기법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에 의지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붓다가 말하는 법의 일치는 힌두교의 梵我一如와 같은 일치가 아니라 자타라는 실체를 극복한 초월의 세계를 말한다.


즉 연기법의 깨달음은 바로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와졌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나와 너, 나와 세계라는 벽은 결국 나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붓다는 바로 이 실체성이 없는 것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12지연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 법을 깨달았을 때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나를 포함하여-이 서로 상관관계를 지님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붓다가 설한 연기의 진리는 결국 우리들이 결코 나 혼자서 존재할 수 없는 상의 상관적 존재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내가 내 주변을 지배하는 주체로서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로 인해서 내가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진리이다. 자연은 내가 지배할 상대로서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으로 인해 내 주변의 사람으로 인해 내 존재가 가능함을.


4. 붓다의 설법(八正道)


붓다가 처음으로 설법한 사람은 그와 함께 고행했던 5인이다. 석존이 깨달은 곳에서 그들이 있는 곳까지는 250km떨어져 있었다.(걸어서 약 80일)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그의 첫설법을 한 이유는 그의 가르침의 핵심과 연관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깨달음은 고행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괘락을 통한 것도 아닌 中道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출가한 자는 2개의 극단에 가까이 해선 안된다. 이 두 개란 무엇인가? 애욕을 탐내는 것은 범부의 소행이다.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스스로 고행하는 것은 다만 고행하는 것일뿐이다.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극단을 버리고 中道를 깨달았다. 중도를 깨달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이를 8가지 길로 설명했다. 이것이 팔정도이다. (正의 의미; 如實, 있는 그대로, 妄想을 떠난 것)


팔정도는  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이다. 

正見,-바른 견해, 붓다의 가르침 즉 연기에 대해서 올바로 자각함

正思,-마음과 의지를 바르게 함

(正見을 지니고 바른 마음 바른 결의를 한다는 것은 三毒(貪瞋痴)을 떠남을 의미.

正語,-언어를 바르게,  바른 언어활동

正業,-신체적 행위를 바르게 -도겐은 僧業이라고 함. 매일의 일상생활의 성화

正命,-命은 活命 즉 생활이다. 따라서 正命은 바른생활을 말함

正精進,-바른 노력이 없으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正念-바른 憶念으로 마음속깊이 銘記해서 잊지 않음

正定-마음을 고요히 해서 하나에 집중하는 것, 즉 바른 삼매가 正定이다.(지관타좌)  -----八正道는 곧 八聖道이며, 사람이 되는 길이다.


<결론>


서론에서 우리는 스미스의 신앙을 언급했다. 붓다의 신앙은 법에 대한 신앙이다. 연기법에 대한 신앙, 그것은 집착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가능한 것이다.


붓다는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을 단좌명상을 통해서 얻었고 이를 끊임없이 지속했다. 즉 붓다는 35세 깨닫고 80세까지 45년간 좌선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깨달음은 35세의 끝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깨달음의 삶이었다. 그 삶이 곧 좌선의 삶이고 팔정도의 삶이었다. 일상을 성화하는 삶이었다. 바로 이러한 붓다가 지향했던 삶이 우리 수도자가 지향하고 있는 삶이 아닌가? 우리는 바로 이 지속적인 수행의 삶에로 불리움을 받았고 그것이 종신토록 살도록 서원한 자이다.


그 서원은 종신서원날로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의 삶을 통해서 서원을 살 때 그 의미를 지닌다. 붓다의 가르침 그의 깨달음을 빌려 말하면 그것은 연기를 사는 삶이며 바로 나와 내 주변의 모든 존재가 상의 상관적으로 숨쉬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 영원한 법에 눈을 뜨는 것이다. 그 법안에 우리가 살아있음을 감사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교와 불교간의 대화


緣起와 그리스도교 사랑 (渴愛가 아니다)의 공통점은 관계성이다. 어떤 것도 실체를 지니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호 상관관계 속에서 살고 죽는다는 것이다. 신심탈락을 전제한다. (예수의 철저한 자기 비움-십자가) 7월 30일 복음 빵의 기적 (자기포기 는 관계단절에서 관계를 회복시켜주었다.)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이 경전마다 차이가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확립되지 않음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석존의 깨달음의 내용이 경전마다 달리 전해져 온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시사해 준다. 그것은 불교가 하나의 교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붓다 자신은 자신의 깨달음 내용에 대해서 정식화해서 설하길 원치 않았고, 상대방에 응해서 각 상황에 따라서 달리 설했던 것이다.


즉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서 신조나 교리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라 말한 것이다. 결국 붓다 입멸 후의 제자들은 이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다. 그것이 오늘날 불교논서로 남아있는 것이다.

결국 신이란 어떤 고정된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다. 佛道를 믿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 속에 함께 살아계신 그 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역동적 초월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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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시불교-고타마붓다의 신앙

서론


-윌프레드 켄트웰 스미스의 ‘신앙’관에 기초한 타종교인과의 만남

-다룰 주제-1.원시불교-고타마붓다의 법에 대한 신앙

          2. 중국선불교-初祖 菩提達磨를 중심으로

          3. 일본선불교-道元禪師를 중심으로


1. 고타마 붓다의 명칭


 1) Gotama Buddha- Gotama Siddartha

 2) 釋尊

 3) 釋迦牟尼佛

 4)tathagata-如來


2. 고타마 붓다(BC463-BC383)의 생애


-釋迦族이 살던 가피라밧쯔국의 스쯔도다나(淨飯)왕과 마하부인사이에 長子로 태어나서 16세결혼(아들 라훌라를 낳음)

-29세 당시 沙門(출가수행자)들처럼 출가하여 종교적 수행생활을 함

 1) 요가(Yoga)-梵我一如

 2) 苦行수행

 3) 端坐명상

-35세 成道, 80세 入滅.


3.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


  1) 12支緣起-(老死, 生, 有, 取, 愛, 受, 觸, 六入, 名色 識, 諸行, 無明)

  2) 법(,Dharma)

  3) 12支緣起와 法과의 관계; 三法印-諸行無常, 諸法無我, 一切皆苦.


4.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中道= 八正道

                  (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


5. 결론


45년간의 지속적인 수행생활-좌선의 삶, 八正道의 삶을 통한 일상의 聖化.

  붓다의 緣起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공사상>


空이란 반야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에서 강조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이 말은 자성 실체 본성 자아 등과 같이 인간이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없다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책상을 생각할 때 그 책상의 自性은 없다는 것을 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실제 그 책상은 나무와 못 등이 서로 결합되어 만들어졌을 뿐 그 책상에 사람이 앉게 되면 그때는 의지로 사용되는 것이지 책상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본래 존재에 자성이 없는데 이에 집착함이 바로 미궁의 상태라는 것이다.


반야경의 공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사람이 나가르주나이며 이 나가르주나의 대표적인 저술인 中論을 중심으로 한 사상을 일반적으로 중관사상이라고 한다.



                중국선불교-達磨의 신앙


1. 불교의 분류


1) 小乘과 大乘

- 小乘불교는 붓다입멸후  100년쯤에 불교교단내에 의견이 분열되어 20部派로 분열되었다고 하여 部派佛敎라고도 함.(阿羅漢을 목표)

-대승불교운동; 1.새로운 불타관-불탑신앙

              2. 心性淸淨, 客塵煩惱(모든 衆生의 心性은 본래 깨끗하나,                        먼지같은 번뇌에 의해 더럽혀져 있을 뿐) 모든 중생이 佛                        이 될 수 있음을 암시.(佛을 목표)

              3. 菩薩(boddhi-sattva, 菩提薩陀)信仰

2) 顯敎(드러난 가르침)와 密敎(비밀스런 가르침)

3) 禪(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과 敎學(경전중심)


2. 禪의 語源; 禪은 Dhyana를 音譯한 것. dhya(靜慮)는 "깊이 생각한다, 조용히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어느 한 가지에 늘 마음을 쓰는 상태를 말한다.


3. 達磨의 傳記; - <洛陽伽藍記>, <大乘入道四行論序>

- 달마가 중국에 온 이유; 禪의 궁극적인 본질은 무엇인가?

-大乘壁觀;마음을 담벽과 같이 하는 것.


4. 達磨의 가르침-二入四行說 (제자 曇林의 <略辯大乘入道四行論序>)

  1) 二入-理入; “敎(경전의 가르침)에 따라서 근본을 깨닫고, 모든 중생이 평등한 본성(含生凡聖同一眞性)임을 깊이 믿어 벽과 같이 스스로의 마음을 관하여(壁觀) 자신과 상대가 둘이 아님을 깨닫고 진실의 도리와 冥合한다.

      -行入(報怨行, 隨緣行, 無所求行, 稱法行)

  2)報怨行; 前世의 원한에 보답하는 실천, 시기 질투 오해 등 현재 자신                      이 당하는 모든 것은 과거의 업보의 결과라고 보고 참고 받아들이                면서 인간본래의 道에 힘쓰는 것.

  -隨緣行; 緣에 따른 실천.-모든 것은 緣에 의한 것이므로 집착버림.

  -無所求行; 추구하지 않음을 철저히 함(욕망을 제어하고 少欲함을 실천)

  -稱法行; 법을 믿고 理法에 맞도록 6바라밀을 닦아나가되 이에 머물지 않고                無所得의 철저한 생활을 함. 法에 따라 산다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無功德임을 자각



                          중국선불교-달마를 중심으로


 1. 불교의 분류


(1) 소승과 대승

소승- 部派불교라고도 함.

      붓다 入滅 후 100년 쯤에 불교교단 내에 의견이 분열됨.

      ㄱ)근본분열 -과거의 계율을 고수하는 보수파-전통을 고수- 上座部

              -과거의 계율을 융통적으로 받아들이자- 진보파, 숫자으                    로 우세했기에 大衆部

      ㄴ) 그 후 200년-300년에 걸쳐 지엽적 분파가 발생함.

        枝末분열(叢林部派; 上座 9, 大衆 11으로 분열)-20부파로 분열되었다고 하여 부파불교라고 함.

       

<대승불교운동>


 20부파로 분열된 불교교단은 풍부한 경제적 후원을 받아 승원에 거주하면서 출가 승려중심으로 일반신자와 유리된 체 교리연구에만 몰두하고 재가자들의 종교적 욕구와 필요로부터 유리된 생활을 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재가자들의 종교적 각성으로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난다. 즉 출가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기본으로 교단을 지켜줌에 비해 재가자들은 부처님에 대한 동경으로 그를 초인화 신격화한 종교운동이 발생한 것이다.

 

 <대승불교운동의 특징>


 1. 새로운 불타관- 역사적 석가모니가 신격화됨. 불탑(사리탑)신앙.


 2. 心性淸淨, 客塵 煩惱- 모든 중생의 심성은 본래 깨끗하나, 먼지같은 번뇌에 의해 더럽혀져 있을 뿐이다. 모든 중생이 佛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3. 보살신앙- 대승불교는 “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고 해서 정신적 상징인 여래와 자각수행자로서의 많은 보살을 내었다. 보살은 梵語로 boddhi-sattva라고 音譯하고 중국에선 菩提薩陀라고 한다. 본래 “모든 존재는 심성청정이므로 모두가 佛이 될수 있다”는 교리에서, 보살은 지혜와 덕성, 행동이 탁월하고 현재는 아직 부처가 아니지만 반드시 佛이 됨이 확정된 후보자라고 본다.


 보살은 6바라밀다를 닦는데 이는 自利보다 利他를 강조한다. 이러한 利他를 행하는 보살에게 자비를 청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佛者들의 보살신앙이다.


  *소승불교는 수행을 4단계로 나누어 붓다 이전단계인 아라한을 목표로 함. 1) 預流- 불교의 흐름에 몸을 맡김

 2) 一來- 불교의 포기   

 3) 不換

 4) 阿羅漢

 5) 붓다

* 대승- 부파불교의 4단계는 없고, 佛을 목표로 한다. (불성 즉 자성청정심이 곧 본래불)

     

    * 원시 불교- 붓다당시 불교는 단순하다.-연기, 중도, 팔정도 삼법인

      부파불교-아비달마(붓다의 말을 해석함)-논이 발달

      초기대승불교- 초기붓다로 돌아가려는 운동

      중기대승불교- 다시 아비달마로 돌아감(유식학)

      후기 대승불교- 禪


(2) 顯敎과 密敎

 현교- 드러난 가르침(경전)

 밀교- 비밀스런 가르침


(3) 禪과 敎學

 禪- 不立文字, 敎外別傳 以心傳心,, 直指人心 

 敎學-경전중심

 

  2. 禪의 語源


 禪은 dhyana를 音譯한 것이다. dhya(靜慮)는 "깊이 생각한다, 조용히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어느 한 가지에 늘 마음을 쓰는 상태를 말한다. (스승에게 받은 公案을 끊임없이 생각하듯이) 즉 禪은 한 가지 것에 마음을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볼 때 좌선은 앉는 것에 마음을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3. 禪의 특징


 禪은 인도에서 발생했지만, 禪이 하나의 독자적 종파로서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 와서부터이다. 따라서 우리가 선불교라고 보통 말하는 것은 중국선불교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선불교 역시 중국 선불교가 그대로 들어온 것으로 그리 차이가 없다고 본다. 중국선은 보리달마를 그 初祖로 하고 있다. 본 시간은 보리달마를 중심으로 하여 중국선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4. 달마의 전기


 선종의 초조라고 불리우는 달마는 본래 보리달마로서 이를 약해서 달마라고 부른 것이다.


< 달마가 중국에 온 이유 >


중국은 그 이전에 이미 인도로부터 경전 등을 갖고 와서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불교의 본래 모습 즉 붓다의 가르침은 단지 경전을 통해 언어로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산대로 사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 붓다의 삶을 모방하는데 참된 불법이 있었다. 붓다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단좌 명상이다. 달마가 온 이유는 바로 붓다가 하신 좌선을 가르침에 있었다.


즉 달마를 계기로 하여 경전중심의 불교에서 새로운 실천불교에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달마는 한 권의 경전도 번역하지 않았다. 한번도 강의한 적이 없었던 달마가 후에 중국불교 전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선승으로 이름이 남은 것은 그의 좌선의 삶에 있었다. 그러나  달마가 인도에서 오기 전에 중국에는 習禪者가 많이 있었다. 달마 이전에도 천태지의에 의한 禪定실천이 있었으나, 거기에는 아직 인도적 범아일여적 측면이 남아 있었다. 


달마가 행한 것은 소승적인 좌선관법(부정관), 白骨觀, 念佛觀이 아니라 大乘壁觀을 실행했다는데 있다.

 그럼 구체적으로 大乘壁觀이란? 이것은 단지 벽을 향해서 다만 좌선함의 의미가 아니다. 이는 "마음을 담벽과 같이 하는 것이다" 마음이 담벽과 같이 하는 것은 무엇인가?


5. 달마의 가르침(二入四行說)


1)理入


달마의 직계 제자 曇林이 쓴 <略辯大乘入道四行論序> (T 51. 458b)이다.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달마의 가르침을 살펴보자.

"道에 들어가는 데에는 많은 길이 있더라도 이는 2종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는 理入(入은 불교학 술어로서의 깨달음의 의미)이고 둘째는 行入이다. 理入은 “敎에 따라서 宗을 깨닫고, 含生凡聖이 同一眞性임을 깊이 믿는 것이다. 그 同一眞性이 다만 客塵이 덮혀서 드러나지 못할 뿐이다. 만일 妄을 버리고 眞에 돌아가서 壁觀에 凝住하면 自他凡聖 等一하게 된다. 堅住해서 움직이지 않고 다시 문자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으면 이는 곧 理와 冥府하면 분별이 있음이 사라지고 寂然無爲하게 된다. 이를 理入이라 한다.


여기서의 理는 法이고 緣起를 말한다. 즉 가르침(敎)에 따라서 宗을 깨닫는다. 宗은 바로 凡聖이 同一眞性임을 깊이 믿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眞性(自他를 나누기 이전)상태, 凡聖으로 나누기 이전 상태, 주체와 객체로 구분키 이전 상태, 인간의 분별의식으로 나와 너를 분리시키고 늘 내가 주인이 되어 너를 지배하려는 사람의 망상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이는 사람의 覺知를 초월하는 것이기에 믿을 수 밖에 없다. 그 믿음은 벽관인 좌선을 통해서 분별을 그만 둘 때, 含生凡聖의 同一眞性이 현성하는 것이다.


2) 行入


 行入이란 4行으로서 다른 諸行은 모두 이 行 중에 들어간다. 어떻게 4인가? 첫째, 報怨行, 둘째 隨緣行, 세째 無所求行, 네째 稱法行이다.


ᄀ) 報怨行


前世의 원한에 보답하는 실천이란 수행자가 만일 고통을 만날 때 자신의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예부터 무한한 시간에 걸쳐 本을 버리고, 말을 따랐고, 많은 미궁의 세계에 머물러서 많은 원한과 미움을 일으켰고, 사람을 해롭게 한 것이 한이 없다. 지금 죄를 범하지 않았을 지라도 지금 받은 이 고뇌는 모두 자신의 前世 죄업의 결과이다. 이런 생각을 마음으로부터 일으킬 때 사람은 理에 상응하여 원한을 계기로 하여 도에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원한에 보답하는 실천(報怨行)을 권하는 것이다.


지금 고통을 느끼면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전 내가 전생에 근본을 믿고 세속을 따라 살고 남에게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인내하고 받아야 한다. 달마는 왜 報怨行을 설한 것인가?


동서고금의 탁월한 사람은 한편으로는 성인으로 숭배되나, 다른 편으로는 종교집단이나 권력으로부터 탄압받는다. 달마는 당시의 주의주장을 지닌 종교자로부터 비난과 박해를 받은 것같다.  이런 현실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이 보원행의 가르침으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달마가 제일 처음의 行으로 報怨行을 말한 것은 종교자로서 현세의 고통을 전생의 怨의 보복을 감수인내하는 각오, 이를 수용하는 태도로서 보다 적극적인 수행자의 태도를 보인다.


*이유없는 고통-욥

* 고살라국의 안굴리마나 도적은 붓다에게 귀의해서 깨달음을 열었다. 어느날 그가 탁발을 나갔는데 그 때 그가 도적이었을 때 당했던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서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이 때 붓다는 “인내하고 받아들여라 수행자여 너가 지옥에서 받아야 할 그 業의 과보를 현실에서 받은 것이다” 이같이 業의 과보에 자각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해탈에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ᄂ) 隨緣行


“모든 것은 緣에 의해 생기고 緣이 다하면 멸한다. 따라서 명예를 얻어도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 그것은 緣에 의해 온 것일 뿐, 緣이 다하면 가는 것이다. 중생은 무아이므로 모두 인연의 힘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고락을 받는 것도 모두 緣에 의해 일어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로움이나 명예를 얻어도 그것은 모두 자신의 과거의 숙명적인 원인에 의해 얻은  것이므로 지금 이를 얻지만 인연이 다하면 다시 無로 돌아갈 것이니 기뻐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즉 세속적인 성공이나 실패는 모두 인연에 의한 것이며, 자신의 마음은 무엇도 증감함이 없으므로 기뻐함에 의해 움직이지 말고 다만 道에 머무를 뿐이다. 


 이와같이 달마는 隨緣行을 통해 사람이 집착키 쉬운 我慢과 我愛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말하고 있다. 나에게 어떤 이로움이나 명예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다만 인연에 의해서 주어진 것일 뿐.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영원히 명예가 내게 있으리라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해선 안된다. 緣에 의해 내게 왔고 緣에 의해 나로부터 떠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집착을 버려라.

-사도직 안에서 우리가 집착하는 모든 것들


ᄃ) 無所求行


 “세간 사람들은 미궁해서 어떤 경우에든지 늘 탐욕을 지닌다. 이를 求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智者는 진실을 깨달아서 理로서 세속에 반해서 마음은 無爲에 머무르고 몸은 괘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어느 경전에서 “구하는 곳이 있다면 모두 고통스럽고, 구하는 바가 없게 되면 편안케 된다”라고 한다. 이같이 구하지 않는 것이 바로 진리의 실천이다.


 깨달음이라는 목적 (집착)에서 손을 놓게 되면, 거기서 安樂의 법문에 들어간다. “身心脫落은 곧 구하는 것이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소승에서는 욕망을 제어하고 少欲할 것을 권한다. <佛遺敎經>에서 말하는 “수행자여, 욕망이 많은 사람은 구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고뇌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少欲의 사람은 구하는 것이 없고 욕망이 없으므로 고뇌가 많지 않다. 다만 少欲을 실행하면 마음은 평온하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少欲이라고 한다. 無所求行은 곧 少欲이다. 조금에 만족할 수 있는 것이 少欲이다. 적게 주어져도 그것에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 법을 구하는 자는 무엇도 구하지 않는다.

"佛法을 수행함은 자신때문도 아니고, 입신출세 때문도, 극락왕생 때문도, 초능력을 얻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佛法을 위해 佛法을 닦을 뿐이다. 無所得, 無所悟로 端坐함이 곧 祖道이다.


ᄅ) 稱法行-봉헌


만물이 본래 청정하다는 性淨의 理를 法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모든 현상은 空이므로 거기에는 더러움도 집착도 없고, 이것과 저것의 대립도 없다. 지혜있는 자는 이 진리를 깊게 信解하며 이 법을 칭송하여 행할 것이다. 그래서 육체와 재산을 시주하는 덕을 실천하며, 그것을 아까와하지 않는다. 바치는 자신과 이를 받는 상대와 施物의 삼자가 본래 공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自利이고 利他이며 깨달음의 길을 가는 것이다.


布施行은 나와 타자와의 차별을 떠나기 때문에 無我의 行으로서 베푸는 사물, 베푸는 사람, 베품을 받는 사람의 집착을 떠나는 三空을 구하는 것이다.


施主하는 자는 선행을 한다고 생각하고, 시주받는 자는 굴욕을 느끼고, 물욕에 집착하면 시주는 죄를 남기는 것이 된다.


봉거사-자기 재산을 바다에 버렸다.

무공덕 :무제; 나는 지금까지 사람을 濟度하고 절을 짓고 經을 만들고 像을 만들었다. 이것에 대해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달마; 공덕이 없다.

무제; 왜 공덕이 없습니까?

달마; 이것은 다만 人天의 小果(너가 공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인천의 작은 결과일 뿐) 그림자가 형에 따르는 것과 같아서 공덕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다. 이 무공덕을 통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진실한 공덕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달마는 말한다. "참된 공덕은 세상일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6세기 초 남조에선 양무제가 불교를 치국의 근본으로 삼아 불교를 융성시킴에 전력을 기울렸다. 낙양에 금빛 찬란한 대가람이 세워지고 불교는 상층 서민층까지 깊이 침투했다. 이런 빛나는 시기에 중국에 온 달마는 대가람을 보고 찬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달마는 그런 외면적 빛남에 참 불교의 생명을 보지 못했다.


이 외면적 허구는 권력과 금력의 표상에 불과하며 참 불교는 거기에서 볼 수 없었다. 여기서 달마는 숭산소림사에서 면벽 9년 즉 '응주벽관'을 통한 참불교를 전한 것이다. 즉 참불교는 좌선에 전심해야 하는 것이지 백성의 재산을 착취해서 사탑을 짓는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달마의 理入四行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달마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理入- 모든 존재가 同一眞性

行入- 報怨行-시기 질투 오해 등 현재 자신이 당하는 모든 것에 인내한다.

      隨緣行-모든 것은 緣에 의한 것이므로 집착을 버린다. 명예가 오면 緣이 다하면 간다고 생각

      無所求行-少欲 - <佛遺敎經> "탐욕의 마음이 강한 사람은 이익의 추구가 많기 때문에 고뇌가 많다. 이에 반해 少欲의 사람은 욕망을 제어할 수 있으므로 고통도 적다. 知足할 줄 아는 자는 가난해도 부유하다.

      稱法行-법에 따라 산다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무공덕임을 인정한다.


 *바로 이러한 달마의 가르침은 그 이후의 중국선종사에서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과는 달리, 일상의 삶의 방식으로서의 佛道임을 알수 있다. 즉 달마의 순수한 실천행이 선종사 안에서 변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는 유공덕의 시대이다. "-을 위해서"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계산과 성과, 결과와 수확이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사회 발전과 인간생활 향상에 피할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크게 자신을 잃는 것이 된다.


도겐은 이를 "無所得, 無所悟에 端坐함이 곧 佛道이다"라고 한다. 이같은 무공덕과 무소득의 생명을 지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한한 노력, 무한한 修證, 수행이다. 붓다가 최후에 한 말은 "태만치 말로 정진하라"는 것이었다. 이 간단한 말 속에 인생의 무한한 진리가 들어있다. 도겐은 도를 배우는 자는 내일을 기다려 행도하려 생각치 말고 다만 오늘 이 시간, 日日時時를 정진하도록 힘쓰라.


                道元- 佛道를 사는 역동적 영성


 1. 도겐의 생애 (1200-1253)


1) 어린시절

1202년 2세때 父, 5년후 1207년 母의 죽음으로 세상의 무상을 느껴, 道心을 발하여 12세 출가. (隨聞記 제5)

2) 당시 일본불교상황-天台敎團의 세속화

                    종교개혁운동 -가마꾸라(鎌倉) 新佛敎운동

3) 比叡山에서의 大疑團-“本來本法性 天然自性身”이라면 굳이 發心修行할 필요가 있는가? 이에 답을 얻지 못해 比叡山을 떠남.

4)榮西의 제자인 明全에게 師事했다. 明全은

 明全과 함께 入宋(1223)


입송 후 天童山에 들어갔다. 당시 堂頭和尙은 無際了派였는데 그로부터 3년후에 無際了派가 示寂하자 1225년 26세 때 여정선사가 당두화상을 이어받았다. 이로부터 도겐과 여정과의 인연이 이루어졌다. 도겐이 입송했을 당시의 선종의 세력은 임제종 楊岐派 일색이었다. 도겐은 여정에게 參學한 모습에 대해서 “마침내 太白峰의 여정선사에게 참학하여 일생참학의 大事를 여기서 마칠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도겐은 <정법안장>의 <面授>에서 “1225년 도겐은 처음 선사 천동고불을 묘고대에서분향 예배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천동고불이 처음 도겐을 보았을 때 도겐에게 지수면수하면서 불불조조께서 하신 면수법문은 지금 여기에 현성해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곧 靈山會上의 점화미소이고 달마의 피육골수이며 弘忍의 傳衣이고 洞山의 面授이다. 인 것은 불조께서 행하신 정법안장의 면수로서 우리 집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일로서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견문한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처음 상견에서부터 대단히 의기투합한 바가 있었다.


5) 阿育王山의 典座와의 만남.

6) 正師 如淨과의 만남과 身心脫落의 깨달음.

7) 귀국후의 활동-正法眼藏, 普勸坐禪儀, 弁道話, 永平淸規 저술


2. 도겐의 영성


 1) 붓다 중심의 수행관- 參入, 參學

 2) 只管打坐(다만 오로지 앉는다, 成佛을 하나의 목적으로 하여 좌선하는 것이 아니라 좌선함 그 자체가 바로 成佛, 즉 佛로서 좌선함)

    公案禪(좌선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과 비교

    *藥山의 非思量(생각하는 것을 초월하는 것)

 3) 作佛과 坐禪(南嶽과 馬祖의 기와와 거울 비유)

 4) 일상의 聖化영성-洗面, 洗淨

 5) 唯佛如佛; 오로지 佛로서 佛과 함께

            溪聲山色의 無情說法

      관계성                좌선                  일상성화

붓다  연기      무아      단좌명상                八正道

달마  理入                벽관(무공덕의 수행)      四行

도겐  유불여불  신심탈락  지관타좌                洗面, 洗淨


    道元- 佛道를 사는 역동적 영성

 

1. 도겐의 생애 (1200-1253)


1) 출가이전

1202년 2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후 5년 1207년 어머니가 사망 이같이 어릴 때 부모의 사망이 그에게 세상의 무상을 느끼게 했고, 道心을 발하게 했다. (隨聞記 제5)

2) 당시 일본불교상황-天台敎團의 세속화

                    종교개혁운동 -가마꾸라 신불교 운동

3) 비예산에서의 大疑團-비예산을 떠남

4)榮西의 제자인 明全에게 사사, 明全과 함께 入宋(1223)

5) 阿育王山의 典座와의 만남

6) 正師 如淨과의 만남과 身心脫落의 깨달음

7) 귀국후의 활동-正法眼藏 저술


2. 도겐의 영성


 1) 붓다 중심의 수행관


도겐이 추구한 삶은 전적인 붓다의 모방에 있다. 그가 그토록 추구하고 강조했던 只管打坐, 그것은 바로 붓다가 걸었던 삶이기 때문이다. 붓다가 산 것같이 사는 것, 그것이 도겐이 지향한 세계이며 그의 영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붓다가 깨달은 佛法, 붓다가 행한 佛道에 붓다가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겐이 추구했던 길이고 그가 걷고 우리에게 가르친 핵심이다.


그가 <정법안장>에서 자주 사용한 용어는 參入(몸으로 참여해서 佛道에 들어감) 參學(몸으로 배움)은 바로 佛과 함께 佛道에 들어가고 佛과 함께 佛道를 배움을 의미한다. 이러한 도겐의 추구는 당시 일본 가마꾸라 불교 상황을 볼 때 특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시는 각 종파의 창립자를 강조하는 시기(정토법연, 정토진종-신란,)였기 때문에 붓다가 자칫 그 모습을 감추게 될 위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도겐은 佛祖의 大道라는 말을 쓰고 있다. 도겐은 종파의식이 없었고 이를 강하게 부정한다. 이는 그의 스승인 如淨으로부터 배운다. 如淨은 당시 禪宗을 5종으로 나누어 말함을 비판했다.

"대송국에서 참된 불법이 융성했을 때 5종의 이름이 없었다. 5종의 이름이 생긴 것은 불법이 쇠퇴하였기 때문이다." <佛道>

이러한 如淨의 가르침을 따른 도겐 역시 선종이 아닌 佛佛祖祖正傳의 大道를 추구했다. 大道의 大는 보편적이라는 의미 즉 도겐이 추구한 것은 그 자신이 만든 도그마가 아니다. 佛佛祖祖로 正傳되어온 佛法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6불-석가불-28대달마-23대 如淨으로 이어지는 正傳의 佛의 佛法

 (佛-깨달은 자, 祖師- 禪宗에서의 스승)


2) 只管打坐


只管打坐는 '다만 오로지 앉는다'는 것이다. 즉 좌선 그 자체를 행한다는 것이다. 只管打坐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도겐이전에도 선종에선 좌선이 있지 않았는가? 이것과 도겐이 주장하는 只管打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선 도겐의 지관타좌를 보기 전에 그 이전의 좌선의 의미부터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전의 좌선은 깨달음이라는 목적을 갖고 거기서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좌선이었다. 公案禪은 公案을 세워두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좌선을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도겐의 지관타좌는 좌선 그 자체가 목적이다. 즉 깨달음이 먼 미래의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가 앉는 것,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인 것이다. 즉 지금 내가 여기 佛로서 앉는 것이다. 석존이 하신 좌선, 달마가 하신 좌선을 나의 좌선으로 행하는 것, 이것이 도겐의 지관타좌이다.


<藥山의 非思量>


승; 스님은 다만 오로지 앉아만 계시는데,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兀兀地思量什麽); 兀兀은 不動의 형태로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같이 산과 같이 앉아 있는 것. 그것이 도겐이 말한 좌선이다.

藥山; 생각이 미치지 않는 곳을 생각하고 있다.(思量箇의 不思量低)

승; 생각이 미치지 않는 곳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不思量低 如何思量)

藥山;생각하는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非思量)


생각을 초월한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관타좌란 成佛을 하나의 목적으로 하여 좌선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成佛이 목적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좌선을 하는가? 도겐에게 있어 좌선은 목적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좌선함 그 자체가 바로 성불인 것이다. 즉 佛로서 좌선하는 것이다. 佛이 되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좌선함 그 자체가 이미 또 하나의 佛인 것이다.


이러한 좌선은 목적의식에 오염되지 않았기에 不染汚의 修라고 한다. 미래라는 목표를 두고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 (바로 이 자리)를 나의 전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목적을 미래에 두고 시선을 미래에 두고 살아갈 때 우리는 결코 이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지금 여기일 뿐’ 영원한 현재의 지속함이 있을 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것, 그것이 결코 참된 현재일수는 없다. 곧 지관타좌는 바로 ‘지금 여기’를 전부로 사는 지혜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현재를 사는 영성인 것이다.


3) 作佛과 좌선(南嶽과 馬祖의 기와와 거울얘기)

南嶽懷讓(677-744)와 江西의 大寂(마조도일)선사의 대화 <좌선잠>

南嶽; 너는 좌선해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江西; 佛이 되는 것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남악이 하나의 기와를 갖고 돌위를 문지른다)

江西; 지금 무엇을 하십니까?

南嶽; 닦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江西; 기와를 닦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南嶽; 좌선해서 어떻게 作佛할 수 있는가?


수백년간 사람들은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해 왔다. 좌선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이미 주어져 있다. (佛性) 좌선은 다만 번뇌로 덮힌 것을 벗겨내는 것일뿐이다. 이러한 해석에선 좌선은 다만 번뇌를 벗겨내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나 도겐은 이러한 전통적 해석을 거부한다. 도겐은 기와를 닦는 것 즉 좌선함 그 자체가 바로 作佛이라는 것이다. 즉 도겐은 종래의 해석처럼 깨달음이 이미 주어져 있고 거기에 번뇌가 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좌선은 번뇌를 벗기는 수단이 아니라) 좌선을 하는 그 자체가 바로 깨달음이며 성불이라는 것이다. (佛道 때문에 佛道를 수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좌선을 함’은 바로 우리가 ‘坐佛로서 하는 행위’인 것이다. 즉 좌선을 배움은 坐佛을 배우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서 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도겐의 영성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모든 행위를 성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행위는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며 전부’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일상 행위 그 하나하나가 도겐에게 있어선 佛로서 하는 행위가 된다.


4.) 일상의 聖化영성


ㄱ) 洗面, 洗淨

도겐의 <정법안장>중에는 <세면>과 <세정>이 있다. 세면은 얼굴씻는 법, 세정은 화장실 사용하는 법을 말한다. 도겐은 이것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다. <세면>에선 입, 눈, 혀, 요지사용법, 얼굴씻는 법까지.

<세정>에선 화장실 사용하는 법으로 대소변 씻는법(이 권의 70-80%)  옷벗는 방법, 손씻는 통사용법, 용변후 종이로 세정하는 작법 등.


도겐은 왜 이토록 세심성에 걸린 사람마냥 일일이 이것을 설명하고 있는가? 그는 바로 우리의 일상의 하나하나를 행함 그 자체가 불국토를 사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도겐은 이러한 작법을 실행하는 것이 바로 불국토를 씻고 장엄하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교적 용어로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를, 지금 내가 얼굴을 씻는 그 행위를 통해” “내가 화장실을 가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겐의 佛道이며 佛法에 대한 신앙인 것이다. 이것이 그가 그토록 지관타좌를 주장한 이유인 것이다.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사는 것이다. ‘지금 여기를 佛로서 그리스도로서’ ‘一擧手 一投足’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도겐이 붓다로부터 배운 것이고 달마선사로부터 모든 佛祖로부터 배운 것이다. 붓다의 八正道, 달마의 理入四行의 실천이 그리고 도겐의 지관타좌, 세면, 세정은 여기서 일맥상통한다.


5) 唯佛如佛


내가 어떻게 佛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도겐의 가르침은 너무 이상적인 것이 아닌가? 현실의 나와는 너무 거리가 먼 얘기가 아닌가? 도겐은 위에서 말한 佛道의 삶이 고타마 붓다에게 가능했고, 모든 佛祖에게 가능했듯이 나에게 가능함을 굳게 믿을 때 비로소 이렇게 살수 있음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내가 佛로서 살고자 함은 나 혼자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 진리라고 말한 것은 바로 연기이다. 상호상관 속에서 우리의 생명이 가능하다. 도겐은 이를 唯佛如佛이라고 표현한다. 오로지 佛로서 佛과 함께.


즉 도겐은 모든 존재가 상호상관속에서 살아감은 唯佛如佛적인 共在, 교제를 통해서 존재의 진리를 살아간다고 말한다.


<溪聲山色>의 無情說法


蘇東坡居士가 상념선사에게 無情說法에 관해 물었을 때, 居士는 선사가 해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날 계곡소리를 들었을 때, 마치 그 소리는 파도소리가 높이 하늘을 때리듯 분명히 거사의 귀를 때렸다는 것이다. 즉 계곡의 소리, 산의 색깔을 듣고 봄으로서 그 자연(無情)의 설법을 들은 것이다. 

바로 계곡소리가 거사의 잠들어 있는 상태를 깨웠던 것이다. 이에 거사는 다음의 시를 읊었다.


“계곡의 소리가 바로 佛의 설법


산의 모습(色)이 그대로 佛의 淸淨身

夜來들은 84000偈

어떻게 해서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가?“


여기서 도겐은 정법안장 <溪聲山色>에서 무정설법을 말한다. 蘇東坡居士가 廬山에서 계곡의 물소리를 듣고 깨달은 것에서 부쳐진 이름이다. 즉 계곡소리, 산의 색깔을 듣고 봄으로서 그 자연(無情)이 설법함을 듣는 것이다. 즉 溪聲山色이 곧 佛道의 現身설법이라고 본다.


*이것은 山水를 단지 하나의 객체로 보는 것에서 벗어남에서 가능한 세계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신심탈락을 통해서 본래의 산을 봄.

*大地有情 同時成道는 단순히 자연과의 共生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大地有情 同時成道가 가능하기 위해선 우리가 身心脫落치 않으면 안된다. 즉 동시성도가 불가능한 것은 우리가 자아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겐은 자아집착으로 인해 지은 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라옵건데, 저의 과거의 惡業이 무거워서 佛道를 방해한 인연이 왔다고 할지라도 佛道를 얻은 諸佛, 諸祖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宿業으로부터 해탈케 하시고, 불도수행을 방해하는 것을 없애게 하소서. 불법의 공덕이 무한한 세계에 충만히 퍼져있는 그 자비심을 저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소서.”


3. 결론


 1) 붓다가 깨달은 진리의 세계가 바로 緣起의 세계이다. 연기의 세계란 바로 관계성의 세계 즉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성의 세계가 달마에선 理入으로 표현되었고, 도겐에게는 唯佛如佛(계성산색의 무정설법)을 통해 표현되었다.


2) 그리고 그 초월의 세계를 드러냄은 좌선을 통해서 붓다-단좌명상, 달마-벽관, 도겐의 지관타좌

3) 일상의 성화

붓다-八正道, 달마-四行, 도겐-세면, 세정

생태 모든 존재 사이의 상호의존성은 모든 존재의 비실체성(五蘊;색수상행식)에 대한 자각     

      1.관계성  2.        3. 좌선                      일상성화

붓다  연기      무아    단좌명상                    八正道

달마  理入              벽관(무공덕의 수행)        四行

도겐  유불여불  신심탈락 지관타좌                  洗面, 洗淨

 

1)불교의 진리와 그리스도교의 진리

도겐의 신앙은 불로서 불과 함께 살아감을 참으로 믿는 것

佛道를 살아가는 역동적인 신앙-唯佛如佛

하느님은 멀리 천상에 계셔 우리를 감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살아계신 분-또 하나의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