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씨튼연구원은 영성의 토착화와 종교간의 학문적 대화가 목적입니다.
교토학파 연구

니시타니사상, 그 허무와 초탈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0-10-25 14:42

본문

< 니시타니사상, 허무와 그 초탈>


서론


1. 니시타니의 생애

 1) 대학시절까지

 2) 선체험과 그 이후의 니시타니 사상


2. 니시타니의 문제의식

 1) 현대라는 시대적 상황

 2) 허무주의

 3) 허무주의의 원인-

    ㄱ) 인격중심 및 자기중심 ㄴ) 원죄와 근본무명의 문제  ㄷ) 근현대과학관의 문제점


3. 허무의 해결책

1)니체의 그리스도교 비판

2)니체의 허무주의 극복

3)니체의 허무주의 극복의 한계


4. 공의 입장에서의 해결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각자의 교의를 극복하고 공의 입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1) 대의단으로서의 니힐리즘

2) 공의 입장


5. 공의 입장에서 본 그리스도교

 1) 비신화화-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

 2) 엑카르트-절대무로서의 신

 3) 성서해석- 요한복음(사랑에 대한 해석)


6. 空의 입장에서 본 禪

 1) 己事究明으로서의 禪 2) 滋味로서의 니힐리즘

3) 非機體로서의 空 4) 事事無碍로서의 空

5) 構想力  6) 서양철학의 知의 한계  7) 般若智 

모든 종파를 포괄하는 입장에서의 선(불교에선 선이 하나의 종파이지만 니시타니에 있어 선은 모든 종파 위에 있다.)


7. 니시타니의 공사상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에 지닌 의의

1) 현대라는 시대적 상황

2) 종교의 비신화화

3) 佛向上의 입장

4) 니시타니의 공사상의 의의


8. 니시타니의 사상이 지닌 한계 -니시타니는 세계를 허무주의라는 하나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공의 입장을 내세운다. 우에다는 니시타니가 아무리 동서양의 공통분모로 공의 입장을 내세울지라도 동서양의 전통적 이질성이 문제로서 남는다고 말한다. 우에다는 여기서 니시다 사상이 지닌 의의를 찾는다.


니시타니가 내세운 공의 입장으로 현대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그의 사상 안에 내포된 한계점은 무엇인가?


-철학으로서의 한계( 종교로서 실천적인 면의 제시가 없다, 공의 입장이 끝에 가서 시적인 면으로 흘러가 버린 점,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 부족- 너를 철저히 너로 보지 않고 이를 무아의 경지에서 볼 때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서론


내가 니시타니의 사상에 관심을 지닌 것은 그가 지닌 문제의식이 나 자신의 문제의식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나는 악의 문제에 관심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악은 도덕적인 선악의 차원의 악이 아니라 종교적 차원인 근원적인 악의 문제이다. 바오로의 고백, 신란의 고백에서 드러나듯이 인간 안에 드리워진 모순의 문제이다.


 니시타니에게 있어 한 개인안에 존재하는 악의 모순 즉 근원악의 문제는 결국 자기중심성, 인격중심성이라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중심성, 인격중심성은 허무주의를 가져왔다.


여기서 그는 인격성이라는 개념을 재평가할 필요성을 인지했다. 여기서 그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의 개념을 다시 검토한다. 즉 기독교에서의 인격신이라고 할 때 그 개념안에는 온전히 자신을 비워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사랑하는 하느님의 완전성을 새롭게 본 것이다. 즉 인간중심적 신이 아니라, 만상을 무차별적으로 사랑하는 신의 모습이다. 이러한 신을 그는 단순히 인격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비인격적 인격신이라고 불렀다.


니시타니는 이러한 비인격적 인격신을 엑카르트의 신성의 무개념에서 발견한다. 즉 니시타니는 비인격적 인격성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존재로부터의 무의 방향이 저 탈자 속에서 무로부터 존재로의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니시타니는 이를 ‘하느님의 근저는 나의 근거이고 나의 근거는 하나님의 근저이다’고 진술한 엨카르트에 의해 인지한다.


니시타니는 이 문제를 공의 입장에서 초탈한다. 그의 공의 입장은 즉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공마저도 비우는 참다운 공의 입장이다. 즉 니시타니는 전통적인 종교철학의 입장이 무너지고 인간존재들 속에 내재한 것이 돌파된 그 장소에 초점을 맞춘다. 그 장소가 바로 공이다.  니시타니는 과거의 종교철학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구조도 깨부순다. 이런 이유에서 그의 공의 입장은 단지 불교학자들에 의해 설명된 불교의 공이 아니다. 즉 기독교와 다른 한 종교에서 바로보는 불교적 개념의 공이 아니다. 그는 세계종교의 새로운 구축과 발전의 가능성으로 공의 입장을 말한다.  즉 그는 종교의 보편적인 원천을 탐구하려고 노력한다.(선과 종교철학 146)





그리스도교인인 나는 불자인 니시타니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교는 어떤 것인가? 그는 자신이 말한 공의 입장을 통해 그리스도교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는가?


나는 불교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더 확실히 분명해질 수 있다고 본다. 나의 문제의식은 여기에 있다. 즉 니시타니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교의 모습과 그의 공의 입장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더 분명히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와 아가폐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가 그렇게 본 가장 큰 원인은 그리스도교의 인격개념이  인간중심적인 개념인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즉 인격개념이 자아개념과 동일하게 사용됨에서 문제의식을 지닌다.


즉 인간과 신과의 인격적 관계를 자아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즉 신의 자기비움은 인격개념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넘어선 즉 초인격적 면으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이해하는 인격개념이 인간중심적 개념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신의 사랑을 말할 때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한다. 즉 자아의 죽음이다. 예수가 자아의 죽음을 통한 드러낸 신의 사랑에 대해서 니시타니는 간과한 것은 아닌가?)


그럼 니시타니가 본 그리스도교는 어떤 것인가?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의 사랑 즉 아가페는 인격적인 관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라고 본다. 즉 아가페는 신이 자기를 온전히 내어놓음으로서 이루어진 사랑이므로 인격을 넘어선 비인격적 인격의 관계나 인격적으로 비인격적인 관계라고 부른다. 그는 인격의 본래의 의미가 이것에 가깝다고 본다. 그는  이 비인격적 인격의 관계를 자신의 공의 입장을 통해서 설명한다. 


니시타니가 현대에 등장하는 여러 문제가 서양이라는 틀 안에서 생겨난 것이고 여러 면에서 기독교와 결합되어 있다고 본 것은 올바른 지적이다.


니시타니는 기독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방안은 기독교의 원초로 돌아감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스도교는 불교에서 무엇을 배울수 있는가? 필자는 불교 중에서도 니시타니의 선이해를 중심으로 불교로부터 배워야 할 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니시타니는 현대세계의 비종교적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고자 했는가?


2. 니시타니의 사상은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옳은가?


3.니시타니도 다른 교또학파의 신이해처럼 신을 실체로서 이해하는가? 인격성과 비인격성의 가역성의 문제.

종교간의 문제를 다룰 때에 중요한 것은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의 입장이 분명한 것이 필요하다. 어설픈 이해는 어설픈 대화의 수준에 머물기 때문이다. 중간지점에 선 상태에서 대화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양종교의 비교연구에 앞서 니시타니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니시타니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공의 입장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그는 불교의 입장이다. 그러나 단지 불교적 용어만을 사용했다고 불교적 표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에 담긴 내용이 불교의 그것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니시타니의 불교적 표현은 불교사에 누적되어온 사상 체계로 설명되어 지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니시타니의 공에 대한 사사무애적 해석은 종밀의 화엄선과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   

 

(니시타니를 비판하는 사람 중에서 그가 불교에도 없고 그리스도교에도 없는 보다 큰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기본입장은 그가 말했듯이 공의 입장이며 선적인 해석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선종사에서 그의 사상과 유사한 종밀과 지눌의 사상과 연결지을 수 있다. )


3. 니시타니의 그리스도교 사상에 대한 이해는? 그리고 불교와의 관계를 어떻게 연결시키고자 하는가? (엑카르트의 신성개념을 통해서 공과 연결시키고자 한다.)


니시타니 사상은 양종교의 통일점을 찾고자 함에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양종교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한계가 있다. 이 점에서 모더니즘(공통점 추구)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상이점추구)가 있다고 본다. 니시타니는 선을 통해 양종교가 추구해야 할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 모색의 길을 통해 다시 양종교전통이 지니고 있는 그 자리로 돌아가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사상이 철학적인 측면에 머무는 한계임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물론 니시타니가 제시한 선의 길이 양종교의 만남의 장이 될 가능성은 있으나 종교는 철학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으로 인간의 삶 구석구석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될 때만이 그 생명을 지닌다. 그 선의 장, 니시타니가 말한 공의 장이 종교의 장에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십우도에서 공을 깨달은 자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길은 무엇인가? 구체적인 실천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1. 니시타니의 생애


1)대학시절까지


니시타니(1900-1990)는 明治32년 2월27일, 石川縣 鳳至郡 宇出津町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진종, 모친은 일련종이었다. 동경에서 산 그는 明治45년(1912)早稱田中學敎에 입학했다. 二年生(15세)일 때 부친이 결핵으로 46세에 돌아가셨다. 그것과 연관되어 여러 심각한 문제를 느끼게 되었고 상급으로 올라가면서 애독한 潄石의 책과 (스즈끼의 책)이 그에게 禪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처음 禪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그것에 막연하게 관심을 지니게 된 것은 중학교 상급시절부터 교교에 일었던 夏目漱石의 책....그의 문학과 논평이 내게 선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킽 것은 나자신의 심저에 큰 문제를 품고 있었던 것 때문이었다” (선의 입장 서문X1-6-7)


이것이 그가 니시다에게 철학을 배우기 이전에 지닌 禪에 대한 관심이다. 그는 14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자신도 고교수험 당일, 고열이 있어서 입학할 수가 없었다. 北海島에서 轉地療養을 하고 다음 해 제일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중학교에서부터 고교상급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심각하게 다가온 문제는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도 결핵을 경험함으로써 죽음의 문제였다. 그것이 늘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아서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성서와 그 외의 종교책을 읽게 되었다. “2, 3권의 불교책과 니체의 <찌라투스트라>를 읽은 것도 같은 의미에서였다”라고 그는 자신의 청년시대의 회고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결정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은 고교학교 일년이 끝나갈 무렵에 니시다 기따로의 <사색과 경험>을 읽은 일이었다. 그는 그 책을 읽고 “자신의 혼의 내면으로부터 나온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인간으로서의 니시타니선생> 1X15-16)


그후 그는 생애의 방향으로서 철학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철학을 하겠다는 결단은 일종의 회심을 의미했다. 그 결단과 함께 마음이 열려 새로운 생으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동시에 그때까지의 고민도 허무적인 기분과 절망도 사라지고 고요하고 청청한 기분이 되었다. 여기서 비로서 나는 살아갈 힘을 얻고, 살아갈 기쁨을 느꼈다. 교또대학에 들어가게 위해서 東京을 떠날 때에는 마음의 밑에서부터 강건한 용기를 지녔다고 그는 회고하고 있다. <나의 청년시대 XX-18)



그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니힐리즘이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허무의 의미는 실존적인 의미로서의 허무이다. 즉 인간실존의 근거에 있는 허무에 대한 자각을 의미한다. 그는 이 허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철학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그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정신상황이 발생하여 그는 10여년간 다음의 문제를 고민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철학의 관념론은 사변적 스페코라틱이라는 입장이지요. 그러나 무엇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어떻게 말한 것, 그렇게 말한 것에 포착되지 않았다는 것이 역시 관한다는 입장이지요, 관한다는 입장..결국 덴켄 데스덴켄스 그런 곳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해도 어딘가 나자신으로서는 만족할 수 없었지요.”(직접경험 48-50)

“자기가 살아가고 있다는 가장 근본적인 곳에는 무언가 투명한 벽이 있습니다. 한계에 부딪친다고 하는 느낌이지요. ”(직접경험 54)


“무엇을 읽어도 마음에 미치지 못하고 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자기분열의 느낌이 점점 깊어지면서 배년 가까이 그것을 고민했다. 그것은 내가 하고 있는 학문이 철학과 같은, 모든 것을 극도에 원리화해서 생각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떤 학문에도 그것이 모든 인간의 존재의 한해서 그 밑에 그런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문이라든가 지식이라든가 지성이라는 것보다 한발 깊이있는 것의 문제를 여기서 본 것이다.” <學과 無學XX1 168-9>


즉 그는 교단에 서서 철학을 강의하고 여러 철학자의 사상을 연구하고 있면서 자신 안에 큰 공허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그 공허감을 “수득한 그의 사상이 모두 본래의 의미에서 자신의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하는 느낌”도 “자신의 발이 지상에 붙어있지 않았다는 느낌도 또 ”자신의 발아래가 이상한 공허가 있다”고 말할만한 상황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 이상한 공허의 상황은 그가 지녔던  살아가는 의미의 상실이라는 문제가 철학적 허무의 문제로서 현재화된 것이다.


그런 사태 안에서 그가 지닌 의문은 존재하는 것의 사실성으로서 실재성은 知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고, 철학이 ‘신화적 표상의 세계로부터 세계에로의’ 그래서 ‘자기에로의’ 새로운 자각으로서 성립하려면 철학적 관상과 철학적 실존이 하나인 입장 위에서 성립되어야 하지 않는가 라는 것이었다. 그는 철학적 허무의 상황을 벗어나서 리얼한 세계에로 나가는 길은 선 외에는 없다고 느꼈다. 결국 니시타니는 철학이 지닌 한계성 아니 학문 자체가 지닌 한계성을 깨닫게 되면서 ‘철학이후’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가 말한 철학 이후의 길이란 어떤 길인가? 그는 이를 선에서 발견한다.


그가 참선을 시작한 것은 32세말엽(1933 12월)경이다. “생각을 멈추고 다만 앉는다”고 하는 참선의 생활을 비롯해서 “脚下의 공허라고 한 위기도 탈각할 수 있었다”고 그는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소위 철학을 버리고 종교의 입장에 선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 선은 실재적 사실에 직접한 行이라는 입장에서 己事究明임과 동시에 그 사실구명 안의 理智가 실재의 실재적인 理의 자기화로서 스스로를 전개해서 그런 知의 철학으로써 개시된 것이다. 니시타니는 이와같은 원초적인 출발지에 선 것이다. 그 이후 그는 앉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앉는다는 것으로써 곧 그의 철학적 사색은 본질적으로 行과 결부된 사색적 行이 된 것이다.


“자신이 살아간다는 곳의 근본적인 곳에서의 문제라는 것, 결국 선에 가서 앉아있는 것뿐이 된 것이지요.” (직접경험 59)


우리는 니시타니는 선체험이 그에게 준 의미에 대해서 다음의 그의 글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는 선록을 읽을 때의 독자의 마음에 대해서 서술한다. “문자와 언어는 가면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며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선 안된다. 그 안에 움직이고 있는 살아있는 것을 직접 보지 않으면 안된다. 문자와 언어가 지배하는 영역을 돌파해서 그 안에 길을 열고 그것에 의해서 선록을 읽어야 한다.” (1974, 11, 289-290) 이와같이 철학의 언어의 세계로서는 건널수 없는, 직접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세계가 있음을 니시타니는 자신의 선체험을 통해서 경험한 것이다 .


2) 선체험과 그 이후의 니시타니 사상


니시타니에 있어 철학이전으로부터 철학에로, 철학으로부터 철학이후로의 길은 동시에 철학이후인 선의 길의 입장으로부터 철학을 통해서 철학이전의 장으로 간 길이며 그 사이에 철학이라는 활동이 매개적인 역할을 한 형이다.


그는 “철학이전과 철학이후를 양날개로 한 철학하는 길로서 열려져 유지되어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理智이전의 개개의 사실세계와 理智이후의 行적 세계를 양날개로 하여 양 세계의 안과 밖에 서서 양세계를 매개하는 철학의 입장이란 어떤 것인가 그 문제를 해명하는 열쇄는 그의 着地라는 경험의 사실이며 그가 그 경험을 자각한 것이다. 그 자각화가 명확한 형으로 된 것은 그의 최초의 책 <근원적 주체성의 철학> 서언에 있다. 그는 10년간의 모색의 시기를 돌아보며 자신의 사색의 입장을 탈저의 자각의 입장으로 드러낸다.


<여기서부터 대승선 746 10쪽> 스스로의 사색적 행에 의해 공의 입장에 도달한 그는 자신의 공의 입장이 이지의 자각으로서 철학의 입장에서 이를 검증하고 (반야와 이성)  그 입장이 철학이전의 情意의 세계를 매개하여 구명한 것을 자기검증하고 있다. (공과 즉) 그 최후의 논문<공과 즉>에서 그가 말한 철학이전과 철학이후를 매개한 철학의 활동은 크게 一巡하여 철학의 길로서의 그의 인생의 길이 확실히 되었다. 그 논문에서 그는 철학이전(정. 의)와 철학과 철학이후(종교)라는 3개의 입장의 입체적 구조연관이 다음과 같이 밝혀지고 있다.


 “모든 것은 전체로서 하나의 연관성 안에 있으며 만물, 만상, 만법이라고 말해진 세계를 구성한다. 그 연관은 복잡해서 살아있는 연관이라고 불리워질 수밖에 없으나 그 구조의 골격을 一卽多, 多卽一의 형식으로 생각하면 그 연관의 양극에는 한 면에서 多이면서 一이고, 다른 면에서는 一이면서 多가 문제가 된다.


多이면서 一은 세계의 개방 즉 일물도 없이 절대적으로 열린 완전한 허공이며, 一이면서 多는 각각의 것이 현실의 사실로서 완전히 다른 것인 환순의 상이다. 절대적인 一과 절대적인 多는 虛로서 다른 면에선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그러나 一은 만상이 현성하는 만상의 장의 개장으로서, 多는 그 전체가 세계를 의미하는 세계의 구조로서 절대적 모순인 양극은 모순인 채 만물, 만사가 현혹하는 세계 즉 절대적 事의 세계를 현성한다. 일즉다, 다즉일로 규정된 회호적 구체적 세계의 연관 즉 연관의 길로서 이법을 포함한 세계(이사무애법계)가 성립한다.


그러나 그 양극은 존재론적으로는 사사무애법계로서 이사무애법계로서의 현실의 세계를 세계로서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론과 인식론이 지닌 이법의 궁극적인 곳에서 이사무애법계가 스스로 밖으로 나와서 스스로의 근저를 없애고 그 자신에로 돌아간 곳, 즉 이사무애법계의 탈자적 자각의 곳, 그것이 사사무애법계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니시타니의 생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필자가 이 논문을 통해 니시타니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니시타니의 사상을 통해 그리스도교가 다시금 숙고해야 할 문제에 관한 것이다. 그럼 니시타니가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나가는데 동기가 되었던 문제의식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2. 니시타니의 문제의식


1) 현대라는 시대적 상황


니시타니의 문제의식은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에서 출발한다. 그 시대적 상황이란 종래의 종교가 이제는 그 설 자리를 잃고 사람들은 종교로부터 멀어져 간 상황이다. 이러한 비종교적 시대상황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면서 니시타니는 종교의 본질을 밝히고자 시도한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그가 문제삼은 현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파악함은 필수적인 작업이다.


근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대사회의 발전은 종교이외의 힘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본다. 과학의 진보, 특히 넓은 의미에서 세속화라는 현대의 문제와 결부해서 보면 기술문명, 경제 정치의 발전이라는 것도 있고, 정신면에서 보면 교육 철학 윤리가 모두 뿌리로 한 곳의 휴머니즘-넓은 의미에서 인간주의-라는 것이 특히 강하게 움직여 왔다. 즉 현대는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이 그 중심이 되어 있다. 계몽주의, 17, 8세기의 계몽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그러한 것이 종교와의 관계로부터 보면 반종교적인 유물론, 무신론이다. 회의론자, 유물론자, 理神論의 합리주의의 운동, 그것은 종교의 지배로부터 탈각한 것, 르네상스 이래의 운동이 특히 크게 전개되어 있다는 느낌이 있다. 교육도 그렇고 윤리의 사고방식 중에 보편인간적인 사고방식이 나온다. 넓은 의미에서 현대의 학문은 종교로부터 독립해야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학문이다.


현대에는 종교에 대한 반종교로서 또 종교에 전혀 무관심한 분위기가 현대사회 즉 사회의 실제생활 및 우리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다. 이 상황이 현재의 문제성을 잉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 과학이 특히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어서 인간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와의 대화는 이러한 반종교적인 세계관을 안고 있는 현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대라는 시대를 살펴볼 때 복잡한 문제가 얼키고 설켜 있어 어디서부터 그 실마리를 찾아서 풀어나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어지러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그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눈덩이처럼 커져만 간다. 이런 상황 속에서 종교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무력한 체 그대로 현대 속에 부초처럼 떠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무력해 보이는 종교, 종교가 현대에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현대가 지닌 문제를 정확히 보고 이를 제대로 진단하고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현대라는 상황 속에서 소위 세계종교라고 하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이 필연성이 부상된다고 본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인간의 마음이다. 마음을 드려다 볼 수 있는 거울로서 종교가 그 구실을 제대로 해야 함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이러한 현대를 문제의식의 핵심에 두고 사상을 전개시킨 사람이 바로 니시타니이다. 필자는 니시타니가 어떻게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지 본 논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특별히 니시타니가 제시하고 있는 공의 입장이 불교에게 있어선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제시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어떻게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니시타니에 있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의 필요성은 바로 현대라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종교에 무관심하고 과학우위주의에 선 현대, 이 세속화된 현대라는 문제의식이 바로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공통으로 지녀야 할 문제라는 점이다. 즉 양 종교는 현대라는 같은 문제의식을 지닌 세계종교로서 만남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공통의 문제가 열져져 있는 장이 현대인 것이다.


<근대일본의 허무적 상황>


니시타니는 근대일본의 허무적 상황에 있어서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하는 것은 현재의 우리에게는 근원적인 어떤 정신적 기반도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서양에는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철학으로부터 전통적인 신앙과 윤리와 사상이 있고 그것이 정신사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인에겐 그것이 없다. 과거에는 불교와 유교가 기반이 되었지만, 그것은 이미 힘을 잃었다. 따라서 일본인의 정신적 근저에는 완전한 공백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일본의 역사이래 유례없는 현상이다.


명치중기까지에는 고도로 발단된 전통으로서의 정신적 기반이 일본인의 마음의 안에 남아 있었다. 그 당시의 일본인에게는 정신적 실체가 있었다. 그들이 서양의 문물을 빠르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인 의미로서의 정신적 실체의 힘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화가 이루어지면서 그 후의 세대부터는 정신적 핵심이 점차 상실되었으며, 현재에는 우리의 근저에는 큰 공백을 남아 있다. 니시타니는 문제의 심각성은 그 공백이 결코 투쟁에 의한 공백, 생에서 나온 허무가 아니라 전통의 단절에 의해 자연히 발생한 공허라는 점이라고 본다.177 


니시타니는 현대의 위기는 위기를 위기로서 자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든다.  따라서 현재 우리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위기를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즉 근대일본은 정신적 기반에 공백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이와같이 니시타니는 허무를 근대 일본의 정신사의 안에서 파악하고 있다. 이 점에서 니시타니는 근대일본의 본질적인 허무와 유럽의 니힐리즘과는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고 본다. 즉 유럽문화의 위기는 근대일본에서도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181


<허무의 의미>


1)윤회- 무한한 유한성


니시타니가 말한 허무는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는 불교의 윤회의 의미를 허무의 근원으로 보았다. 즉 윤회의 의미는 인간존재의 유한성의 본질 혹은 그 실상 요켄데 참다운 유한성으로서 무한한 유한성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252)


인생의 허무의 근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의 본질상이 일체개고라는 것이다. 바닥없는 생사의 고해속에 부침하고 있다는 존재의 자각이 허무의 자각이다. 또 인간의 유한성의 무한성, 즉 무한하게 유한적이다는 사실이 허무의 근원이다. 즉 허무의 근원은 무명이다. 어떻게 하면 이 유한성의 무한성을 벗어날 수 있는가? 이러한 유한성의 무한함은 실존적으로만 알 수 있다. 실존의 길에서 한 발 떨어지면 허무는 완전히 실재가 없는 혹은 전혀 무의미한 관념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허무의 자각은 허무의 실존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 (종교란 ...252)


2) 무명


세계와의 무한한 연관성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자기 중심성 즉 자기 집착의 뿌리를 지니고 살아간다. 니시타니는 이 무한한 자기중심성을 끝없는 시간 속에서 무한한 자기 충동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의 무명이라고 본다. (종교란 345) 자기중심에 집착되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업이고 우리 삶의 진상이다. 니시타니는 이 업이 죄, 특히 원죄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무언가에 집착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감은 우리의 깊은 원죄요, 무명인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니시타니는 여기서 우리가 공의 장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당위성을 말해준다. 공의 입장이야말로 자기 중심성을 벗어난 무아, 신심탈락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공의 입장에서는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유위가 아니라, 무위 즉 유희의 성격을 띠게 된다. 즉 공의 입장에서도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유위로서가 아니라 무위로서 하는 것이다. 무위로서의 삶은 곧 자기가 진정 주인이 되는 삶이다. 그래서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것이다.


공의 장에서는 바로 나의 현존재는 이웃 또는 다른 사물에 대해서 부채를 진다는 말이다. 즉 나의 근본으로 돌아감은 결국 자기 중심을 벗어남을 의미한다고 앞서 말했다. 즉 탈자적이 된 채 존재하는 나의 존재의 존재함은 바로 모든 타존재의 덕택이다. 즉 모든 존재덕분에 지금 여기 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시타니는 모든 타존재의 부채가 바로 나의 본질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너때문에 나의 존재가 가능함을 자각하게 될 때, 우리는 자기중심성으로부터 타자중심성으로 될 수밖에 없다.


나의 존재와 너의 존재는 회호적 상입관계에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본질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와같이 나의 존재가 타자중심성이 되어 살아감은 바로 나의 현존재의 본질을 사는 것이다. 여기서의 타자중심성은 유위로서의 타자중심성 즉 나를 위해 너에게 희생한다는 의미에서의 타자중심성이 아니라 바로 무위로서, 즉 타자중심성이 바로 나의 본질을 사는 것이라는 자각으로서의 삶인 것이다. 니시타니는 타자중심성이야말로 진정한 자기중심성이라고 말한다. (종교란 362) 즉 공의 장에서의 자기중심성은 곧 타자중심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공의 장에서 성기한 현존재는 無我이며 自他不二인 것이다.(종교란 364) 진정한 자기중심성이란 자기의 절대부정을 통해서 자기가 절대중심이 되는 것을 말한다. 365


우리는 자신의 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일상의 업과 허무의 장에서 공의 장으로 전환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절대적으로 자기를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


임제선사는 말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며 권속을 만나서는 권속을 죽여라. 그러면 비로소 해탈을 얻으리라 ”


절대적으로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바로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거기에서 자기와 타자와의 차별과 상대의 장을 돌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업의 장에서 공의 장으로 건너갈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말한 심신탈락이 참선이라고 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즉 우리가 자기중심성으로서의 무명을 깨고 自他不二의 본래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좌선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다음을 물어야 한다. 그럼 공의 장에서 역사는 어떻게 해석되는가?


니시타니는 공의 장에서 매순간은 바닥에 뿌리내린 유한성이면서 그 바닥에 뿌리내린 영원성이라고 본다. 즉 공의 장에서의 역사적 시간은 매순간이 엄숙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종교란 377)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타자중심으로 살아가는 그 역사의 시간들은 그 순간순간이 리얼라이즈하다는 것이다.


니시타니는 공의 장에서만 인류를 괴롭히는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린 묻지 않을 수 없다. 공의 깨닫음을 추구하는 불교는 과연 현실의 문제에 얼마만큼 타자중심적으로 대해 왔는가 소극적이지는 않았는가. 깨달음을 추구한다고 하여 거기에 집착하여(공에 집착함, 공에 집착하면 약도 없다) 즉 가장 고질병인 자기 중심적이 되어 버릴 위험이 불가 안에 있는 것은 아닌가?


2)허무주의


앞서 우리는 니시타니의 문제의식이 현대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출발했음을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 니시타니는 현대를 어떤 측면에서 보고 있는가?  그것이 바로 허무주의이다. 그가 철학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도 그 자신의 실존적인 허무의 체험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철학의 길에서 다시 선체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도 궁극적으로 허무를 해결하고자 하는 그의 문제의식 떄문이다.


니시다의 절대무 철학에선 아직 니체의 니힐리즘과 그와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의식을 볼 수 없다. 이에 반해 니시타니에게 있어 니힐리즘은 그의 사상의 기반을 형성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니시타니는 니시다에서 해명되지 못한 니힐리즘의 문제를 해명하는 길을 자신의 사상의 기틀로 삼았던 것이다.


니시타니는 자신이 느꼈던 허무가 니체의 그것과 무언가 일치되는 것이 있다고 느꼈다. (선과 현대세계413) 그는 자신의 청년시대를 되돌아보면서 죽음의 문제가 자신의 마음에 늘 남아있다고 고백한다. 즉 그의 허무의 심연은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상황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 전반에 흐르고 있는 허무주의라는 문제의식은 죽음이라는 자신의 실존적 한계상황의 문제뿐 아니라, 현대문명의 본질적인 특징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현대문명의 근저에는 허무주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현대의 니힐리즘은 현대의 인간이 스스로의 마음을 둘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안심입명하는 방법을 찾지 못한데 있다.”(“현대문명과 선” 저작집 11, 161-2) 

인류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초월적인 것과의 관계를 보유해왔다. 자연현상 안에서 경외할만한 혹은 초월적인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과의 근원적인 리얼한 관계 안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초월적인 것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관계도,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도 성립되었다. 그러나 근세이래 자연적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일변했다. 즉 인류는 더 이상 초월적인 것과의 관계 안에서 자연을 바라본다거나 인간관계를 이루지 않게 되었다.


니시타니의 개인적 경험으로써 니힐리즘은 그의 철학적 사유에서 기술문명의 시대에 살아가는 인간존재의 모든 문제를 포괄한 큰 문제로 드러난다. 아르키시즘의 문제, 도덕적 퇴폐의 문제, 과학적 세계상과 과학적 합리성의 문제, 테그놀로직의 위험과 인간의 기계화의 문제가 모두 복면한 허무주의 문제라는 것이다.(대승선 746 대봉현 48쪽) 그럼 허무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3)허무주의의 원인


ㄱ) 인격중심 및 자기중심


니시타니에 있어 니힐리즘과의 대결은 공의 사상을 밝히는 도정에서 그리스도교를 비판함으로써 출발한다. 구체적으로 그는 그리스도교의 어떤 점을 비판하고 있는가? 어떤 점에서 니시타니는 허무주의와 그리스도교와의 연관성을 보고 있는가? 니시타니는 서구 사상의 기반인 그리스도교의 인격적 개념이 허무주의를 낳은 기틀이 되었다고 본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교의 인격 개념이 내포한 자기중심성이 문제의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니시타니는 니체가 기독교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 측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허무주의의 궁극적인 원인을 그리스도교의 인격개념에서 찾고자 했다. 신의 인격성의 이면에 비정한 무차별이 있어 자연계의 법칙이 신에 속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신은 절대존재가 아니며 신이 아니지 않는가 라는 점에 니시타니는 의문을 가졌다. 따라서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인격의 개념을 재검토했다. 그는 <<종교란 무엇인가>>에서 종래의 인격에 관한 일반적인 사고를 비판하고 있다. (종교, 79쪽) 그의 비판의 핵심은 인격개념이 인간중심으로 성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자기나 자아는 자기중심적이고 자아중심적인 견지로 전개되어 왔는데, 인격개념도 이런 자아를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에서 인격은 인간자신으로부터 사유되고 통찰되어 왔다. 말하자면 인간중심적인 인격관이었다. 데카르트에서 볼 수 있듯이 자아도 자아 자신으로부터 자아중심적인 견지에서 보여지며 인격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스 169) 


즉 그는 서구의 인격이라는 개념을 자아라는 개념과 동일개념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 인격중심은 자아 중심을 의미한다. 이렇게 인격을 자아로 해석한다면 인격적 관계는 자아 중심적 관계를 뜻한다는 것이다.


인격 개념을 자아중심적인 개념으로 볼 때 하느님을 인격적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니시타니는 본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아중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시타니는 하느님의 사랑의 완전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부터 인격 개념에 대한 재검토를 하고자 한다.


그는 마태5: 43-48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여라”와 마태5:48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하느님의 사랑의 원친평등의 사랑, 적까지도 사랑하라는 무차별의 사랑에서 그리스도교의 인격적 하느님의 개념을 재고해 보고자 한다. 니시타니는 선인도, 악인도 평등하게 포용하는 신의 완전성은 신 자신 속에 이미 자기를 비운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즉 예수의 경우는 원래 신의 모습에서 하인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자기를 비운데 비해(예수는 단순히 신이 인간의 모습을 취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사랑의 실현 드러남 그자체) 신의 경우는 처음부터 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의 경우는 자기를 비운다는 것이 본래의 본성인데 반해, 예수의 경우는 그것이 성취된 업이라는 것이다. 즉 니시타니는 신의 완전성이 예수를 통해 드러난 것보다 더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결국 니시타니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자기비움의 활동이라기보다 존재의 완전한 형태 바로 신의 완전성이며 신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니시타니는 사랑의 작용이 인격적인 성격을 갖는데 비해, 신의 완전성은 한층 근원적인 것의 구현 또는 모방에서 비로소 성립된다고 본다. 그는 사랑의 작용이 인격적인 성격을 갖는데 비해, 신의 완전성이나 완전성의 구현으로서의 사랑은 인격적이라기보다는 한층 근원적인 것의 구현 즉 ‘인격적인 비인격성’이라는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니시타니는 하느님을 ‘비인격적 인격’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는 바로 이 비인격적 인격이야말로 참된 인격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비인격이라는 개념은 인격의 반어로서 사용되었다기보다 우주의 창조력으로 사용되거나(한스, 오늘날 세계에 있어서의 신의 게노시스와 불교의 공154) 혹은 비인격성이 무아라는 성격을 지녔다고 본다.


그러나 니시타니의 인격개념에 대해서 한스 반델펠스는 그의 해석에는 서양의 전통적인 인격관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한스는 니시타니가 삼위일체론의 입장으로부터 인격개념의 역사가 형성된 측면 및 그 결과 인격 안에는 개체성보다도 관계성이  강조된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니시타니에게는 전통적인 교회신학 즉 교부신학과 중세 가톨릭 신학과의 근본적인 대결이 결여되어 있음도 지적했다. 그 결과 니시타니는 부정신학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전통의 정통적인 면에 대해서는 -예를 들면 중세 전성기의 신학자들에게는 명백했던 부정신학-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유비의 사상에 관해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보다 커다란 비유사성이 확립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이 비유사성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앞에서 말한 유사성도 확립될 수 없을 것이다. ”(한스 185)


한스가 지적한 것처럼 니시타니의 그리스도교적 인격개념의 이해에 부족함이 있음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니시타니가 지적한 인간중심적인 인격개념이 그리스도교내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니시타니를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은 우리의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에서부터의 방향전환이라는 측면이다. 니시타니는 이를 하이테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빌려온 <세계내 존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니시타니는 인간의 참된 자아, 참된 인격은 인간중심의 사고를 벗어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은 단순히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모든 중생의 부류에 속하는 존재 즉 인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난 ‘세계내 존재’라는 자각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세계내 존재’로 볼 때 인간이 자기 중심성을 초월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종교 255)  니시타니는 전통적 사유의 인간중심성에서 우리 시대가 당면한 위험성을 보고 있다.


“지금까지의 여러 종교는 지나치게 인간 본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신의 관심이 인류에게만 향해 있는 것으로 여겼다. 즉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인간 자신의 요구나 목적에 대한 대응으로서만 생각해 온 것이다. ”

그는 세계내존재를 불교용어인 중생이라는 의미에서 해석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은 인간존재의 궁극에서는 단순히 인간적이 아니다. 온갖 다른 형상까지도 포괄한 의미로서 모든 중생의 부류에 속한다. ”


니시타니가 중생에 대한 그의 이해를 이끌어 내었던 직접적인 맥락은 도겐으로부터이다. 즉 그에게 있어 중생은 죽음과 삶이 교차되는 세계, 즉 윤회의 세계에 있는 생명 있는 것의 모든 영역을 의미한다. 인간을 존재자의 모든 영역과 결합시키는 공통의 차원은 인간도 생사에 있어서 일체의 존재자와 공통적인 생멸성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한스220)


188 자기가 세계의 중심으로 화한 자기내 폐쇄성을 동반하는 업의 입장에서의 자기 중심성과는 달리 공의 입장에 선 자기 중심성은 자기와 타자가 상호투입하는 무아적인 자기 중심성이다. 따라서 거기에서는 자기 중심성과 타자 중심성이 역동적으로 하나이다.


즉 공의 입장에서의 한다는 행위는 무위 곧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유희라고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한다는 끝없는 부과이지만 그것은 이미 외부에서부터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내면의 밑 없는 깊이에서부터 자각된 사명이다. 그것은 부채가 없는 부채이다.


공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인격으로서 자기 목적에서 벗어나 자기가 다른 모든 것의 수단이라는 입장으로의 전적인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적으로 인격들끼리의 회호적 관계뿐 아니라 자기와 일체의 사물들 사이의 회호적 관계까지도 본다.


이 곳에서는 자기의 목적을 자기 속에서가 아니라 만물 속에서 본다고 하는 절대적인 자기 부정과 자기 속에서가 아니라 만물 가운데서 본래적인 자기의 주체를 본다고 하는 절대적인 자기 긍정이 하나가 된다. 그것이 공의 입장에서 가능하게 된다.


인간이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의식의 과정을 니시타니는 ‘무지의 지’라고 부른다.


“그것은 의식이나 분별적 지성, 직관적 지성의 입장을 깨뜨린다. 즉 사물을 객관적으로 알며 자기까지도 역시 자기라는 사물로서 객관적으로 알며 자기까지도 역시 자기라는 사물로서 객관적으로 안다는 주관의 입장을 깨뜨린다. 이 不知는 절대적으로 비대상적인 자체로서의 자기이다. 그 알지 못하는 곳에서 성립하는 자각은 역시 하나의 무지의 지이다”(종교 173 )(한스 224)


이상에서 니시타니가 본 그리스도교의 인격개념이 지닌 한계를 살펴보았다. 니시타니는 그 한계의 해결책으로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와 도겐의 ‘중생’개념을 언급했고, 궁극적으로 공의 입장을 통해서 인간중심을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ㄴ) 원죄와 근본무명의 문제


“ 우리들이 ‘있다’와 ‘한다’는 행위의 근저에.....무한한 충동이 자각된다. 그 충동의 원천인 근본에는 소위 무한한 자기내폐쇄성, 자기 중심성....이 잠재해 있다. 이 같은 근원적인 자기내폐쇄성...을 옛 사람들은 무명내지는 근본무명이라고 불렀다.(종교란 338)


인간은 이 무명에서 부단히 자기 근본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자기 그 자체의 근본에 돌아가지 못하고 끝없이 시간 속에서 유전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시간 곧 업에서의 인간의 진상이라는 것이다. (선과 종교철학 186) 니시타니는 이 업의 입장이 근대의 계몽주의의 삶의 방식과 본질적인 공통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근세의 계몽주의에서는 인간은 신적인 세계질서에서 해방되어 인간중심주의적이 되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의지에 의해 세워진 처음과 나중을 잃어버려서 결국 처음도 끝도 없는 무목적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니시타니는 허무의 근원이 바로 자기 중심성에 있다고 본다. 여기서 말한 자기중심성은 참된 자기가 없는 자기중심성, 즉 참된 자기 아닌 자기 중심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안에 폐쇄적으로 모아가면서, 자신을 시작도 끝도 없이 생성전화시키는 근원적인 힘을 말한다.


보통 악과 죄는 의식의 장에서 문제가 된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악이라는 것을 범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자기와 악이 둘로 나누어 있어서 자기라는 뿌리가 있고, 악은 거기에서 뻗어나온 줄기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기와 악을 둘로 나누어 보는 것은 자신도, 악도 의식의 장에서 표상을 통해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과 죄가 실재적인 존재로서 리얼하게 현전할 때, 그것은 의식적인 장을 초월하게 된다. (종교50) 이와 같이 의식의 장을 초월해서 만나는 악이 바로 근원악, 원죄이며 근본무명인 것이다.


즉 근원악은 자기존재의 근저에 여실히 현전하는 하나의 실재라는 것이다. 니시타니는 근원악이 다른 곳으로부터 자기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근저에 존재하는 현저한 리얼리티라고 본다. 이러한 근원악은 단순히 자기의식에만 고립한 자아에 내재하는 악이 아니라, (종교52)자기와 사물 일체, 인류 전체의 근저에 잠재하는 악이며 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전체의 근저에 잠재한 악이 자기의 주체적 근저에 큰 리얼리티로서 현전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시이래의 업이라든가, 무명 그리고 기독교의 원죄 관념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니시타니는 말한다. 이와 같이 니시타니는 단순히 상대악의 차원, 善의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보다 더 근원성을 지닌 인간실존 자체 안에 드리워진 실재로서 원죄를 해석하고 있다.


근원악은 우리가 악에 대하여 자기 존재의 근저에까지 그 근원을 찾아들어갈 때 자각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시간 속의 영원한 단자라고 말하는 그 순간 속에서, 악은 자기존재의 근저에 있는 리얼리티로서 자각된다. 그것은 주체 자체의 근저에 현전하기 때문에 자기가 범한 악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라는 입장에서는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자아로서는 근원악이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 존재의 근저에 리얼하게, 여실하게 현전하고 있는 근원적인 악은 어떻게 자각될 수 있는가?


니시타니는 我意가 지배하는 자아의 입장을 自愛라고 부른다. 자애의 구조에는 두 개의 계기의 상입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의식에 있어 정립된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원자연적인 충동 혹은 욕망이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충동과 욕망은 동물이 지닌 자연적 본성에 속한다. 따라서 자연적 욕망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자애는 자기가 자기만을 사랑하는 일종의 고양된 對自性이지만, 원자연적 욕망이나 자아 그 자체에는 이런 의미의 고양된 대자성이 없다. 즉 자아 그 자체는 선과 악에 대해서 무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악이 自愛 안에서 서로 상입되고 일체가 될 때 相依해서 서로를 질적으로 변화시킨다. 충동과 욕망은 자아 안에서 我意로 변하고, 自意로 변한 자연적 生이 다시 자아 안에 작용해서 자애적인 자아로 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자연성과 자아가 상입하여 자연적 생이 자아 안에서 분열하여 활동함으로써 我意에 의해 활동하는 자아, 즉 자애적 자아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것이 일종의 고양된 대자성이라고 니시타니는 말한다. 자기를 의식한 자기는 그 위에서 다시 자기를 재의식하는 것이다. 그때 자기는 자기만의 것을 생각하는 자기가 된다. 거기에서는 자연적 경향성은 자아 안에서 고양되어 의욕이 되고, 자아의 중심을 지배함으로써 의욕으로서의 我意가 된다. 그래서 자아는 我意에 지배됨으로써 스스로의 경향성에서 벗어나 자연성에 떨어진다. 여기서 자연에 떨어진다는 것은 거짓방향으로 고양된 對自性으로써의 인간의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물론 자아와 감성도 <순수이성비판>에서와 같은 인식론적인 견지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실천이성비판>과 <종교론>에서와 같이 실천적 견지로부터이다. 실체로서 표상된 자아와 감성의 영역에 속한 자연적 생의 상입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구상력의 활동이 있다.


 오성과 감성을 매개하는 제3의 힘으로서의 구상력은 형상을 생산하거나, 재생산하는 능력이다. 예로 들면 자신이 재능있는 인간, 사랑할만한 선량한 인물로서, 혹은 무능하고 열악한 인물로서 생각될 경우, 그런 인간적 형상과 함께 자기가 자기자신에 현전하는 것이 바로 구상력의 활동인 것이다. 근본적으로 보면 자기가 그같이 여러 형상으로 표상된다는 근저에는 자기가 실체적인 有로서 표상됨을 의미한다. 자애적 자기는 단순한 실체로서의 자기가 아니라 실체적인 유로서의 자기를 사랑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자기를 말한다. 자애적 자기는 근원적 활동력인 구상력을 근본으로 지니고 있다.  여기서 구상력은 자기를 밝힌다는 반성의 방향과는 반대로, 자기를 닫는 어두운 힘이 된다.


하나의 실체로서의 자아의 표상과 자연적 생으로서의 경향성이 상입해서, 자애의 입장이 성립된다. 자연적인 경향성이 我意가 되고, 자아가 자기중심적인 주체성이 되는 데에는 근원적인 어두운 구상력의 활동이 있다. 그런 상입이 구상력을 통해서 성립된다해도 구상력은 단지 매개적인 활동을 할 뿐이다. 구상력의 매개를 통해서 자아라는 실체의 표상과 자연적 생과의 역동적인 통일이 이루어지는 통일의 근거는 근원적 의욕이다. 따라서 근본적 구상력의 활동은 근원적 의욕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와 존재의 본질을 형성하는 자기의식은 어두운 근원적 의욕이 자기 안에서 분열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즉 근원적 의욕이 자각적, 대자적이 되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자아는 그런 운동의 구극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중도적 단계이다. 그것은 마치 강물이 무수한 소용돌이를 형성하고, 그 소용돌이가 어느 정도 고정되고 정형화되어 정체성을 드러냄과 같다. 근원적 의욕은 어떤 틀 안에도 속박될 수 없으며 어떤 형식 안에도 한정될 수 없다. 그것은 틀없는 입장, 형식없는 입장이다.


근원적 의욕에 있어서 의욕은 의식적인 의지작용으로써 의식의 모든 분야에서 활동한다. 어두운 의욕은 밝음과 대립되며 대립을 통해 어둠으로 자각되며, 참으로 어두운 것으로서 의식의 세계 근저에 머물게 된다. 자아의 세계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빛과 어둠과의 이원적 대립의 세계이며, 어둔 카오스가 밝은 지성을 그 밑으로부터 지닌 세계이다.


자애에 있어서 경향성이 자아 안에서 我意가 되고, 자아는 자연성에 떨어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지금 경향성을 勢位的으로 높여지는 것과 동시에 자아를 끌어내리는 힘이 근원적 의욕의 반작용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칸트가 ‘질서의 역도’라고 부른 것이다. 이런 질서의 역도에 대한 자애에 대한 부정으로서 성립한 것이 실천이성과 그 도덕성의 입장이다.


실천이성의 도덕성의 입장은 자애의 입장을 부정한 것이지만, 그것을 그 근저에까지 부정하지는 못한다. 즉 我意의 뿌리를 끊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그 뿌리인 어두운 근원적 의욕은 끝까지 남아서 실천이성에 대해서도 반작용을 계속한다. 양심이 자기 義認에 있어서 바리사이적인 위선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실천이성을 끌어 올린 근원적 의욕의 반작용인 것이다. 그 이성의 자기모순에 대해 근원적 의욕의 강도와 뿌리 깊음이 노정됨과 같이 그 의욕이 근저적으로 자아의 자각에 올라온 것이다. 자아는 자아로서의 성립 그 자체의 근저에 이성을 등진 근원적 의욕을 자각한다.


그 근원적 의욕은 자아이전 자아의 근저에서 움직이는 의욕이다. 의식적 자아에 선 의미로 예지적인 차원인 의욕이며 자아의 밖으로부터가 아닌 자아의 내면에서 발동한 의욕이다. 그것은 주체 안에 주체이전적이 되므로 주체자신의 의욕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가 악의 성향에 대한 주체적 근거로 하나의 의지적 행으로 생각한 근원악은 이런 것이다.


自愛를 참으로 극복하는 일은 신앙보다 절대무로 넘어간 종교의 입장으로써 절대부정의 철저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아의 입장에 대한 절대부정적 초월의 입장이 자기의 근저에 주체적으로 자각되어온다는 것뿐이다. 그것에 의해서 자애의 입장은 파괴되며, 근원적 의욕의 반작용인 구상력도 끊을 수 있다는 것이다.


自愛를 극복한다는 것은 자애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개의 계기(즉 경향성과 자아의 표상)의 끈을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실체적 有로서의 자아의 표상과 자아 안에서 我意로 화한 자연적 경향성이라는 두 개의 상입이 풀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흡사 유기체의 해체에 비교할 수 있는 자애적 자기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자애적 자기는 자아 안에 놓인 어둔 근원적 의욕이 투입으로 그것으로 인해서 어둔 의욕은 자기중심적으로 현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애의 입장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자기를 실체적인 유로서 표상한 자아의 입장을 주체적으로 초월한다(?)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


즉 근본적 구상력에 의해 자연적 경향성이 자아 안에 고양된 我意가 되고, 근원적 의욕이 자아 안에 투입되어 자아가 의욕의 역동적 중심으로서 자기중심이 되며, 거기에서 고양된 대자성이 성립한다고 하는 그 전기구가 파괴되는 것이다. 그 의미에서 자아의 내면으로부터 자아를 몰아세운 근원적 의욕 자아에 있어 살아있다고 하는 의욕은 절대적으로 부정된다. 그것이 자연적인 죽음, 이성의 근본적인 죽음이다. 자연적인 죽음은 우리의 유한한 생사적인 존재 위에 나타난 하나의 현상이며, 하나의 물리적인 자연현상이지만, 자아의 절대부정으로서의 大死는 생사적 존재근원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절대무는 우리 존재의 근원에 잠재된 어두운 원리로서, 어둔 근원적 의욕에 대한 부정이다. 의욕의 부정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소극적 허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정이면서 긍정인 절대부정이며, 절대무에 대한 근원적 의욕은 我意의 원리로서는 부정되므로 절대무의 현성으로서 절대긍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절대긍정은 이런 자아의 입장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며, 다시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입장까지도 부정한 입장이다. 그것이 참된 절대부정으로 이것은 절대긍정과 하나이다. 근원적 의욕은 종교적 생에 있어 긍정될 수 있다. 절대적 부정이 곧 긍정이므로 非란 집착을 없앤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절대적 자유까지도 의미한다.


일체 속박의 근원인 근원적 의욕은 절대무에 있어 집착의 입장을 끊은 근원적 자유로서 나타난다. 불의 꺼짐과 같은 숙멸은 동시에 청풍이라고 할 수 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잠다는 것이 종교적 의의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이런 입장에서 가능하다. 일체의 집착의 근원인 我의 어둔 근저인 의욕은 무아의 주체성에 의해 무화됨에 의해서 의욕으로서 절대긍정으로 돌아간다.


자연적인 생은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