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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 만물의 변화와 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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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종교대화강좌
주역읽기(2) - 만물의 변화와 그 관계
최현민
지난 시간에 했던 주역 부분을 복습 겸, 새로 오신 분들을 위해서 설명 드린 다음에 오늘 강좌 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역(周易)이라 하면 주나라의 역(易)이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역(易)하면 바꾼다,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역이라는 의미 자체가 벌써 변화에 관련된 책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주역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눠서 말할 수 있는데요. 공자라는 한 인물, 중국 사상가 중에서 중심에 서 있는 분을 꼽으라면 공자를 들 수 있습니다. 시대 별로 그래서 공자 이전과 공자 이후로 구분해서 주역에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공자 이전 2500년 전에 쓰여진 책은주역 중에서도 역경에 해당됩니다. 공자 이후 2500년, 그것은 이제 역경에 대한 해석을 단 역전의 시대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역경은 구체적으로 점서입니다. 주역은 점을 치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미래의 길흉이 어떻게 이루어질 지를 점을 통해서 미리 내다보는 그런 점서입니다. 역경이라는 것은 8괘, 64괘, 괘사, 효사. 8괘는 소성괘라고 하고, 64괘는 대성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림을 보시면 태극이 있고, 음과 양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사상으로 나누어지죠. 사상이 다시 나뉘어져서 8개의 괘가 되는데, 이 팔괘가 소성괘입니다. 팔괘 두 개가 겹쳐서 64괘 대성괘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각각의 괘에 대한 해석을 괘사라고 합니다. 건괘를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고, 곤괘를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를 써놓았고, 또 각각의 효(爻)에 대한 의미를 서술해놓은 것을 효사라고 합니다. 이렇게 소성괘와 대성괘, 괘사, 효사를 다 합쳐서 풀이해놓은 것을 역경이라고 부릅니다.
역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하나의 괘에 대한 철학적인 해석이 붙여진 것입니다. 진시황 때, 분서갱유라고 해서 유교와 관련된 모든 책들을 다 불태워서 없애버렸는데, 주역은 당시 유교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라 남을 수 있었고, 유일하게 남게된 책입니다. 이 주역에 대해서 유학자들이 해석을 달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역전이 됩니다.
역전은 10개로 구성되어 있고, 십익(十翼)이라고 부릅니다. 역경에 달려있는 날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역전 10개는 단전 상하, 상전 상하, 계사전 상하, 문언전, 설괘전, 서괘전, 잡괘전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주역의 구성은 이렇게 되어있고, 오늘 우리가 할 것은 주역의 독법입니다.
주역 사상을 한 마디로 뭐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면, 계사전에 나와있듯이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고 주역 사상을 핵심을 말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궁극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궁극, 정점에 이르게 되면 변합니다. 주역은 항상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변화하지 않으려고 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음에도 그 조짐을 무시해버리고 밀고 나가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개인의 삶에서도, 공동체의 삶에서도 어떤 기미를 읽어내는 것, 그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궁극에 달하게 되면 변해야하고, 변화하게 되면 통한다. 통한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역은 그래서 이 관계, 나와 너와의 관계, 옆에 있는 것, 각각의 효와 효의 관계가 아주 중요해요.
예를 들어 위(位)를 통해 본 주역의 관계론을 봅시다. 위(位)라는 것은 자리를 의미합니다. 대성괘 여섯 효에서 양효의 자리가 있고 음효의 자리가 있는데, 양효의 자리라는 것은, 1, 3, 5가 양효이고, 2,4,6이 음효의 자리에요. 이때, 1,3,5 이 자리에 양효가 있게 되면 득위(得位), 제자리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양효의 자리에 음효가 오게 되면 제자리를 얻지 못한 것이므로 실위(失位)라고 합니다. 길흉을 해석할 때, 이 자리 즉, 득위했느냐 실위했느냐에 따라 길흉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제자리가 아닌 데에 자기가 위치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기자신도 어렵고,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도 어렵게 됩니다.
또 다른 관계론은 중(中)과 정(正)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중(中)이라고 하면 대성괘에서 제 2효와 5효를 말합니다. 중(中)에 어떤 효(爻)가 자리하고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중을 얻게 되면 득중(得中)이라고 표현합니다. 중을 얻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두 번째 괘가 음효로 되어있으면 득중이라고 합니다. 다섯 번째 효에 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득중. 주역에서는 가운데가 중요합니다. 정이라는 것은 음의 자리에 음이 있고, 양의 자리에 양이 있을 때를 바를 정을 써서 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중이면서 정일 수 있죠. 중정(中正)은 최고로 좋은, 매우 높은 덕목입니다. 주역에서는 5효가 임금의 자리라고 말하고, 5효에 어떤 것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굉장히 중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또 한 가지 개념은 응(應)에 대한 것입니다. 응(應)이라는 것은 효와 효와 관계를 말합니다. 상응하는 효가 양이거나 음인 경우, 그런데 둘 다 양이거나 음인 경우는 불응(不應)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위하고 응의 차이는 뭘까요? 위는 각 효가 자리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면, 응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응이 훨씬 중요합니다. 응의 관계에 있느냐 아니냐가 길흉을 결정하는 요인이 됩니다. 상응 관계에 있다고 하면 1과 4, 2와 5, 3과 6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이 관계가 정응이냐, 불응이냐. 비(比)라는 것은 이웃하고 있는 효를 말합니다. 이 인접한 효가 같은 효가 아니고 다른 효일 때 좋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위라는 것은 개인적 관점이라면, 응이라는 것은 사회적 차원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은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동양 사상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서양은 각 개체가 중요해요. 그래서 존재론이 발달해있습니다. 서양에서는 각 개체가 어떻게 성숙될지를 중시한다면, 동양에서는 내가 너와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느냐를 중시합니다. 그러나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관계론을 중시해오던 우리의 문화가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실위(失位)도 구(咎, 허물)요, 불응(不應)도 구(咎)이다. 그러나 실위(失位)이더라도 응(應)이면 무구(無咎)이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주역에서는 응을 중시하고, 이는 곧 각각의 개체보다 개체와 개체간의 관계를 더 중시한다는 뜻입니다.
역과 변화
‘주역의 인식체계는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주객이원론적 사유인가?’라는 질문의 표현 자체가 좀 어려운데, ‘그렇지 않다’라는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서구의 사유가 주객이원론적입니다. 가령, 영육이원론 같은 것은 플라톤에서부터 나온 아주 뿌리 깊은 것입니다. 플라토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고, 서구 사유 전체에 영향을 줬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철학 또한 플라톤의 영향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가 동양사상을 배워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것과 내가 태어난 동양 문화권과의 통합이 안 되고, 그러다 보니 이 신앙, 신학이 토착화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동양사상은 나의 신앙을 내 안에서 통합하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공부해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주역의 사유는 주객이원론이 아니라 어떤 것인가? 바로 주객미분(主客未分), 즉 주객이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에코포럼을 다녀왔는데 거기서 지구 법학이라는 말을 쓰더라구요. 법은 인간을 위해서 규정이 되는 것인데, 지구법학이라는 것은 뭘까. 생태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그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는 데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며 법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지구법학을 내놓는 것입니다. 지구 중심의 사유. 법은 인간이 주체가 되고 주체인 인간의 권위, 존업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인데, 지구법학은 주체가 자연이고 지구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간이 아닌 자연을 주체로 세운 것이 의미 있지만, 여전히 자연도 주체라는 의식의 밑바탕에는 주객이원론의 사유가 있는 것이겠죠. 동양사상은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지 않는 인식체계를 갖고 있어요. 인간을 자연과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은 자연의 부분입니다. 자연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자연이 망가지고 있는 것은 내 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자각입니다. 이렇게 변화할 수 없다면 힘든 것입니다. 이런 의식의 전환 어떻게 의식의 전환이 올 수 있는가. 동양사상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동양이 어떻게 자연을 바라보고, 존재를 사유하는 지 이해하게 되면 패러다임이 바뀌게 됩니다. 존재를 바라본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입니다. 올 한해는 패러다임이라는게 큰 작업이에요. 우리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지 않으면 바뀔 수 없습니다. 우리사회의 문제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그 바닥은 다 연결되어 있거든요. 그러나 서구인들은 주객미분이라고 하면 아직 미개한, 인식이 덜 발달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동양은 이런 사유를 하게 되었느냐 하면, 태극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동그란 태극기 닮은 원을) 태극이라고 합니다. 태극이라는 것은 신유학적인 영향을 받아 주역이 해석되는 과정에 나온 개념이에요. “역은 태극이 있다”는 말이 계사전에 나옵니다.
이 문장은 흔히 역에는 태극이 있다고 흔히 해석하게 됩니다. 역이 태극을 함유하고 있다는 표현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태극을 실체개념으로 가져가면 안됩니다. 존재의 근원, 만물을 창조하는 시원, 하느님으로 해석하려는 의견이 있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인격성이나 비인격성을 이야기하기 그 이전입니다. 태는 처음이고 극은 끝입니다. 용마루를 말합니다. 용마루란 지붕이 있으면, 지붕의 맨 위 끝을 말합니다. 집의 가장 높은 곳, 서까래를 지탱해주는 곳입니다. 태극은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화와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체개념이 아닙니다. 신유학자 주돈이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라고 말합니다.
태극은 만물이 생성되는 움직임의 시발이 됩니다. 그것을 여기서는 두 점으로 표현합니다. 하얀점은 음의 정점이고, 검은색은 양의 정점입니다. 이것이 만물의 생성을 불러일으키는 에너지원인 것입니다. 주역의 만물 생성원리에 대한 설명이 오늘날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를 설명하는 현대과학의 설명과 맞아 떨어집니다. 오늘날 현대과학은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주출현 이론으로 정착되어있는 것은 빅뱅이론입니다. 우주가 137억 년 전에 혼돈의 상태에 있다가 갑자기 에너지 응축되고 자유 에너지가 0가 되는 상태에서 폭발하고, 거기서 팽창하는 게 우주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움직임, 그것이 어떻게 있었나. 인간의 인식체계를 뛰어넘는 시간에 순식간에 빅뱅이 일어났다고 봅니다. 계사전 하권 1장에 “천하의 움직임은 一로 곧다(天下之動 貞夫一者也)"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1이 태극을 의미합니다. 태극은 동적, 움직임과 고요함을 주재하는 데, 움직임의 원리가 양을 낳고, 태극의 정의 원리가 음을 낳고. 갈마들어서(감응했다) 음양이 응하여 만물을 낳았다. 우주 만물이 음양의 감응 과정을 통해서 생겨났다는 것, 이게 주역에서 만물의 생성을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만물은 이렇게 음양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계속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생생변화라고 합니다. 다시 음양으로 정립되고 그래서 음 혹은 양이라는 것은 홀로 생기지 않고 음에서 양으로 양에서 음으로 계속 변화되는 과정. 그래서 존재는 어떤 것은 실체로 존재하지 아니하고 계속 변화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도 가만히 있는 것은 없어요. 지금 이순간 우리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변화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집착할 것이 없게 되어요. 집착은 없어질 것에 대한 집착입니다.
만물의 생성과 만물의 변화는 응양의 감응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이 주역에서 말하는 한 가지이고, 두 번째는 때와 위치에 따른 변화입니다. 아까 설명했던 위(位) 즉, 각 효가 어디 위치하는가에 따라 괘사와 효사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시간, 때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언제 어느 때에 그 자리에 있는가가 매우 중요합니자. 주역에서는 자기동일성을 주장하는 실체가 아니고 끊임없이 자기 갱신을 이루어가는 과정적인 존재를 말합니다. 현대철학에서 새롭게 나온 철학체계가 과정철학입니다. 화이트헤드의 이 과정철학을 신학에서 받아들이면서 과정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체계가 등장했는데, 하느님도 과정안에 계시고 인간도 과정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창조하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이 바로 주역사상과 만나는 것이죠.
위치는 효의 자리이고, 때라는 것은 하늘의 때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주역에서 왜 하늘을 중시하는가 하면 주역 자체가 주나라의 역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라는 상제를 중시하는데, 주나라는 천을 중시합니다.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가 서면서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명에 의해서. 주나라의 천명에 의해서, 하늘의 뜻에 의해서라고 말합니다. 주역을 보면 하늘의 뜻을 받들어서 제때 일을 하고 제때에 행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역에서는 양효와 음효 두 효를 강유(剛柔)라고도 부르는데, 계사전(역전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계사전입니다.)에서는 “강유는 서로 추이하여 변화가 생긴다.(서로 섞이고 변화하고 번갈아 사용하는 등 절제한다.”라고 나옵니다. 변화 때와 시공 때와 위치에 따른 변화와 모든 변화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는 그런 변화를 두 괘를 예를 들어서 여러분께 설명해드리려고 합니다.
11괘를 보시기 바랍니다. 읽을 때는 상괘부터 읽습니다. 11괘에서 상괘는 지(地), 하괘는 천(天), 그래서 읽을 때 지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태는 이 괘의 이름입니다. 11괘는 지천태괘입니다. 바로 옆에 있는 12괘는 순서가 뒤바뀌어 천지비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괘를 가지고 설명을 드려보려 합니다. 어떤 게 더 좋은 괘일까요? 11괘 지천태괘는 64괘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괘라고 이야기합니다. 왜일까요? 양효는 위로 올라가려는 속성이 있어요. 음효는 아래로 내려가려는 속성이 있고요. 그러니 이것과 이것은 만납니다. 만나는 것이 중요해요. 반대로 12괘는 만나지 않기 때문에 안 좋은 괘입니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 있는 천지비괘는 주역에서 가장 나쁜 괘이다. 이름 그대로 비(否)는 소통되지 않아 막힌 괘이다. 천지가 교제하지 못하니 만물이 통하지 않고 상하가 교화하지 못하여 천하에 나라가 없다. 내괘는 음이고 외괘는 양이다. 이것은 내심은 유악하면서 겉으로는 강강함을 가장하는 것이다. 권력의 핵심은 소인들 차지가 되고 군자는 변두리로 밀려난다. 그리하여 소인의 도는 장성하고 군자의 도는 소멸한다.” 역전의 해석인데요, 내괘는 하괘를 말합니다. 하괘는 음이잖아요. 외괘는 천으로 되어있죠 그러니 양입니다. 음은 여성이고 양은 남성입니다. 내심은 유약하고 겉으로는 강강함을 가장하는 괘는 좋지 않은 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천태괘는 어느 순간 변화해야 하는 시점을 갖고 있는 반면에 천지비괘는 아니죠. 그렇다고 해서 천지비괘가 나온다고 해서 망한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나서서 무엇을 할 때가 아니고 기다리면 나중에 때가 온다고 받아들여야 한느 것입니다. 길흉은 늘 변화속에 있는 것이지요. “태괘는 先吉後凶으로 전반에는 순조롭고 상승하다가 후반에는 쇠락할 수 있으며 비괘는 先凶後吉로 전반엔 고난의 시기나 후반엔 극복할 수 있다.”
응(應)이란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답함, 관계입니다. 감(感)이란 움직임이며 느낌을 잡는 것, 기미를 알아차리는 것으로 아주 중요합니다. 만물은 서로 감응합니다. 의식이 있는 것 사이 뿐 아니라 의식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시인들은 얼마나 자연과 감응합니까. 그러니 발견해내잖아요 아름다운 시들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지요. 의식이 있는 존재끼리의 감응, 그것을 넘어서서 의식이 없는 존재끼리의 감응도 있다는 것입니다. 선사는 산이 걷는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 선사의 눈에는 산이 걷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겠죠. 눈부신 자연의 모습을 보면서 산이 걷는다. 중국사람들이 특히 산에 대해서 우주의 현상으로 산을 바라봅니다.
31괘, 함괘를 보면 택산함이라고 나와있습니다. 택은 연못입니다. 택산함괘는 ‘산과 못이 길을 통하는’ 것입니다. 산이라는 것은 일종의 대륙의 상징입니다. 택은 대양이지요. 산괘는 유약함을, 못괘는 굳셈을 나타내는데 유약함과 굳센 기가 서로 통하고 감응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변화의 목적인 생생(生生)
변화가 된다는 것은 뭔가 목적이 있겠죠. 주역은 만물이 변화한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하는데 그 변화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그 목적은 생생함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사전에 보면 “천지의 큰 덕을 생이라 일컫는다(天地之大德曰生)”고 나와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나아간다고 할 때, 생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생명이라고 하면 각 개체들의 생명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표현이 있습니다. 서울대 장회익 물리학과 교수가 처음 쓴 표현인데,
온생명(global life)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개체들의 생명을 가리키기 위해 낱생명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장회익의 관점은 생명이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낱생명의 관점에서는 생명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현상이란 결국 신진대사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끊임없는 남음과 모자람의 비평형의 상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족하니까 흡수해야하고 끊임없는 신진대사과정이 일어나는 것이죠. 한 생명체 안에서도 비평형의 상태가 이루어지지만 온생명체 전체 안에서도 이러한 현상 비평형상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역의 관점에서 보면 음양의 감응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낱생명을 보게 되면 태어났다가 죽게되는 것이죠. 누구나 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주역에서는 생과 생 사이에는 죽음이 깃들어있는데, 생사를 거듭하지만 사는 사로 끝나지 않고 다른 생명체의 삶을 살리는 것에 기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주역의 생명관이라는 것은 낱생명이 아니라 온생명인 것이죠. 온생명 전체로 보면 낱생명은 생사를 반복하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생명체 전체로 바라보게 되면 다시 나는 다른형태로 생을 시작할 수 있고 살아갈 수 잇는 그런 것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주역의 맨 마지막 괘인 64괘를 보겠습니다. 화수미제로 되어있습니다. 바로 앞 63괘도 같이 보면 기제라는 말과 미제 라는 말이 나오는데, 건널 제 자입니다. 기제는 이미 건너갔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역은 다 이루어진 63괘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괘가 또 있는걸까요. 64괘를 보면 미제입니다. 이게 주역의 핵심이에요. 주역이 왜 64괘가 거꾸로 되지 않고 63이 기제이고 64가 미제이냐. 이것이 주역의 핵심을 이야기는 것입니다. 화수미제괘를보면 한자가 불이 위에 있고 밑에 있죠 그래서 아직 타지 않고 미완성으로 남아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괘사입니다. 64괘에 대한 괘사는 ‘미제괘는 형통하다.’입니다. 원래 양효여야 하는 5효게 음효가 자리하는데 왜 형통하다고 할까요? 주역 전체를 읽어보면 이것이 무슨 말인 지알 수 있습니다. 주역을 단층적으로, 개체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중층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마지막 괘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양은 굳셈을 의미하고 음은 유악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약함이 굳셈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주역이 갖고 있는 의미들은 굉장한 차이를 보입니다.
단전에서는 어린 여우 사례가 나옵니다. “어린 여우가 강을 다 건넜을 즈음 꼬리를 적신다. 이로울 바가 없다.” 이게 재밌는 해석이에요. 여우가 강을 다 건넜고 안심했는데 아차하는 순간 꼬랑지의 꼬리가 물에 젖어버려요. 그걸 상상하면 됩니다. 마지막 순간에 꼬리를 적시는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하시죠. 우리 삶의 자리 안에 드리운 실수들. 사실 우리 삶이 실수의 연속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실수했고 이렇게 좌절하지 않고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거에요. 왜냐, 삶이라는 것은 완성되는데 있는게 아니에요. 삶의 자리에서 완성으로 끝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우리의 스승인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지의 생생을 본받는 방법(法天地生生)
생생을 본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째는 지기(知幾)이고, 두 번째는 비움입니다. 지기(知幾)란 기미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계사전 상 10장에 보면, “역은 성인이 그 심오한 이치를 끝까지 구명하여 미미한 기미를 연구한 것이다. 오직 심오하기 때문에 능히 천하만민의 뜻을 통할 수 있고 기미를 연구하기 때문에 천하의 모든 일을 능히 성취할 수 있다.오직 신묘하기 때문에 빨리 나아가지 않아도 만사가 속성하고 일부러 행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다르게 된다.” 주역은 기미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어떤 조짐이 보일 때, 그걸 무시해 버리면 우리 삶에 어둠이 찾아옵니다. 기미를 예민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기미를 무시해서 얼마나 많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지, 세월호 2주기를 곧 맞이하는데요, 기미를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죠. 모든 것을 무시했고, 다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다 죽게 만들었죠. 기미를 놓치게 되면 우리 삶의 자리에 어떤 현실이 다가오는지 모르게 됩니다. 이처럼 군자는 성인은 기미를 제대로 알아차리는 사람입니다. 기미는 아주 미묘한 것이죠. 눈빛 하나에서 기미가 읽혀지는 것이죠. 공동체 안에서 예민성을 가질 때. 사랑하는 사람은 금방 그걸 알잖아요. 우리가 사랑을 놓치면 기미를 놓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공자께서는 기미를 앎이 정말 신묘하도다. 군자는 윗사람을 교제할 때 아첨하는 일이 없고 아랫사람과 교제할 때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으니 일의 기미를 아는 바도다.” 군자는 기미를 알고 행동하는 사람이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군자가 덕을 닦음에 있어서 때를 맞추는 것을 시중(時中)이라고 합니다. 주역에서 때를 굉장히 중요시하는데, 때의 중을 맞추는 것입니다. 유교 사상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시중입니다.
정이의 <역정전>에 보면 51번째 진괘의 다섯 번째 효에 대해 이런 뜻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대개 중하면 바름을 위반하지 않지만 바르다고 해서 반드시 중한 건 아니다. 천하의 이치 중 중보다 더 좋은 건 없으니 … 때에 따라 변화에 응할 수 있는 건 중을 유지하는 것에 달려 있다.” 옳음이 때에 맞지 않으면 그것은 옳음이 아닙니다.
“연구함은 살핌과 같고 幾(기미읽음)는 미미함이다. 심오한 이치를 끝까지 구명함은 지극한 정밀함이요 기미를 연구함은 지극한 변화다" 심오한 이치를 끝까지 구명하는 것은 정적인 것이라면 미미한 기미를 연구하는 것은 동적인 일입니다. 주역은 동적인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기미를 잘 알아차릴 수 있을까. 주역에서는 ‘내가 나 자신을 비울 때 기미를 읽어낼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내가 나로 가득 차있으면 기미가 안보여요. 내 뜻만을 계속 주장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에 기미가 안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역에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역의 핵심입니다. 오늘 기억하실 것은 두 가지, 기미를 아는 것과 기미를 알기위해서는 나 자신을 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비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주역의 산지박괘(山地剝卦)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23괘에 해당되는 것인데요,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의 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剝)은 빼앗길 박 자에요. 세상이 온통 음으로 가득 차있고 하나의 양효만 남아있는 상태, 절체절명의 상황, 언제 끝장날지 모르는 상황, 절망의 상황, 그것이 산지박괘입니다. 이 산지박괘에서 절망을 희망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 뭘까요. 돌아가신 신윤복 교수님의 <강의>라는 책에 산지박괘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있습니다. 그 분은 그것을 주역에 나오는 해석을 나름으로 재해석해서 붙인것인데 거기보면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석과불식은 늦가을에 하나만 남기는 먹지 않는 과실이 있잖아요. 그게 씨과실이에요. 먹지 않는 과실. 하나만 남겨놓는. 희망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하고 있는데, 저도 그 분의 해석을 읽으면서 깊이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24괘를 보시겠어요? 지뢰복괘는 완전히 반대인데, 여기서 복(復)은 되돌아올 복이에요. 절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넘어서서 되돌아온다는 거예요. 절망의 상태에서 손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시간을 인내롭게 견디어내면 다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게 주역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