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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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대사상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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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10-10-2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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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퇴 무덤을 통해 본 한대 내세관>>


                M.P.S. Han cilization of China, 41-60쪽



                                                                최 현 민 

   

한대의 내세관은 발굴된 무덤의 여러 부장품 및 장식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한대의 내세에  대한 믿음은 마왕퇴 무덤에서 드러난 관의 그림과 기에서 잘 볼 수 있다. 거기에는 死者가 내세로 가는 여행, 불멸을 위한 혼의 비상이 잘 드러나 있다. 산 자는 두 종류의 혼을 갖고 있으니 3혼과 7혼이 그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이 혼이 분리되어 3혼은 불멸의 거주지인 천계로 여행을 시작하고, 7혼은 무덤에 머물다가 귀신이 되어 황천으로 내려간다. 7혼의 운명은 전통에 따라 다르나 충분한 공물을 제공함으로써 가능한 오래 몸 속에 남아 있도록 한다. 이 공물이 부장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묘에 나타난 그림은 지하세계(아래에 2마리의 큰 물고기로 표현), 지상세계, 천상세계의 3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기에 2마리의 용이 비상하는 모습이 있는데 이는 死者가 불멸을 위해 비상함을 상징한다.


한대에는 서왕모가 사는 동해의 3산과 같이 곤륜산도 불멸의 산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관에 묘사된 산은 대개 서왕모가 사는 곤륜산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그럼 여기서 묘사한 곤륜산은 진정 死者의 혼의 비상을 묘사함인가? 전한 초기와 말기 사이는 불멸과 관련한 개념이 발전된 시기가 아니다. 따라서 이를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마왕퇴의 무덤과 깃발은 완전히 분리해서 볼 수는 없다.


전국시기의 長沙에서 발견된 2개의 기는 단순한 모양으로 불멸을 위해 사자가 비상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산동지역의 9번무덤에서 발견된 기 역시 비상을 주제삼고 있는데 이 기는 한무제 시기의 것으로 마왕퇴의 기보다 후대의 것이다. 마왕퇴의 것과의 차이점은 死者의 비상 후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현실세계의 생활모습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즉 사후의 세계를 현세세계의 복제로 생각한 것이다. 마왕퇴의 기와 비교할 때 이는 신화적 요소가 현실적 장면으로 묘사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한대 사람들이 사후의 삶을 현실의 삶의 연결으로 생각함을 알 수 있다. 불멸에 대한 소망, 불멸의 천국(곤륜산)으로 혼이 비상한다는 믿음은 한대의 주요테마이다. 무덤에서의 비상 그 자체는 무제시기에 이미 묘사되었다. 


결국 한대의 생명관은 사후의 세계를 현실의 세계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대의 종교관이 현실을 중시하는 유교와 육체의 불멸을 추구한 도교사상이 함께 공존하여 당시의 사람들의 내세관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한대의 무덤에 나타난 내세관>>


            Wang, Han Cilization, 175-183, 206-213쪽.


                                                  최 현 민


한대의 관료인이나 대지주에 널리 퍼진 장례의식의 중심사상 중의 하나는 死者를 산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취급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덤의 형태나 구조를 실제의 집을 모방하여 만들었고 내세까지의 삶을 연장할 수 있도록 여러 종류의 부장품을 넣었는데 음식, 옷, 청동, 칠기, 도자기류가 그것이다.


동한 말기의 공직자와 장군의 무덤은 그들이 누린 부와 권력의 정도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즉 그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만족할 수 있도록 그 안에 함께 매장한 것이다. 한대에는 화폐사용이 중요했으므로 무덤에도 돈을 매장했는데 그 양은 부를 상징했다. 또한 책을 넣기도 했으니 발굴된 것을 보면 노자, 역경, 전국책, 시경, 소자병법, 안자춘추 등이 있다.


동한 시기무덤엔 무덤보존단지가 있는데 이것의 기능은 남아있는 가족의 안정과 死者의 무덤의 안정을 보장하며 천사의 이름으로 死者의 죄를 사하고 死者를 위해 축복을 비는 것이다.  동한 말에 도교가 대중화되었으므로 이 단지는 아마 도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당시 이것의 사용은 매우 보편적이었고 관료들의 무덤에서도 볼 수 있다.


한대이전에 부부합장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고대문헌에서는 볼 수 없다. 서한 중기이후에는 부부합장이 보편화되고 서한말기와 동한에는 하나의 법칙이 되었다. 그 외에 여러 세대를 같이 매장하는 가족묘도 있다.


왕릉은 다른 귀족들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한대에는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무덤을 짓기 시작했는데 무덤건축에 쓰인 비용은 대략 국가수입의 1/3로 추정한다.


한대 당시 농민들은 파산하여 노예로 전락하고 죄수노동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경제릉 주변에서 발굴된 10만의 무덤에는 한사람 혹은 많은 사람이 함께 묻혀 있고 그들의 목과 발에는 쇠고랑이 차여 있는 것으로 보아 죄수 노동자임을 알 수 있다. 양릉 건축에 종사한 사람에겐 대사를 주거나 죽음을 면하게 해준다는 기록으로 보아 양릉건축에 지수 노동자를 쓴 것을 알 수 있다.


낙양지역에서 발굴된 500개 무덤은 96%는 남자이고 4%는 여자이며 대부분의 묘에는 부장품이 없고 단지 죄수의 이름, 죄수가 속한 단체이름, 죽은 날짜, 죄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 죄수들은 감옥에서 낙양에 와서 중노동에 참여하여 노동과 극빈한 조건으로 죽게 된 사람들이다. 이는 한대의 부자들과 빈자 사이의 대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빈자들의 무덤은 낮고 극히 단순하여 당시의 황제,귀족, 관료, 대지주들의 무덤과 크게 대조를 이룸을 알 수 있다. 





            개혁의 시기 (86 B.C-A.D 23)


                                                                최 현 민


한무제 말에 와서 그간의 전쟁으로 백성들의 고통과 피해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昭帝(86-74 BC)와 宣帝(73-49 BC) 때 이를 극복할 방안을 간구했다.


BC 86년에 지방에 위원회가 파견되어 백성의 어려움을 시찰하고 다음에 구호활동을 펴나갔으며 BC 81년에는 60명의 유학자들이 각처에서 모여와 백성의 상태를 토로하고 구제책을 의논했다. 공직자들과 유학자 사이의 토론 주제는 소금, 철, 술의 국가 전매사업와 궁전의 과다한 비용, 외교정책의 방향 및 정책의 목표와 그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국가는 전쟁에 의한 국고충당을 위해 소금, 철, 술을 전매했는데 이것이 백성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자 유학자들은 국가를 대상으로 염철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 국가는 鹽鐵은 전매하되, 술의 전매는 풀어 주었다.


  또한 유학자들은 무제의 독점통제 및 정부간섭을 반대하고 덕치정치를 요구했다. 법치주의에서 나온 형벌은 天의 원리에 부적합하므로 도덕성 회복이 필요하며 따라서 과거시험제도에 의해 도덕성을 지닌 관료를 뽑도록 요구했다.


1. 영토확장의 결과


한무제는 한 초부터 골치거리였던 흉노문제를 해결하고자 계속 흉노를 공격하여 결국 흉노의 항복을 받고 조공제도를 확립했다. BC 1세기에 실시된 조공제도는 20세기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는 중국이 지닌 외국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조공제도는 天子가 군주의 위치에서 속국을 대하는 태도로써 무제는 흉노의 渾邪王을 제후로 책봉하고, 매년 새해에 궁전으로 초대했는데 이 때 흉노에서 조공을 갖고 왔다. 속국은 침입을 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중국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속국은 자기네가 바치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선물을 받음으로 조공제도를 통해 실제로 경제적인 이익을 보았다. 실제로 한나라가 흉노관계를 위해 사용한 비용은 군사비를 빼고도 세금의 7%에 해당되었다.


 중국은 조공제도를 통해 흉노를 완전히 정복하고자 했다. 흉노의 정복과 평화의 보장인 조공제도는 궁에 불모를 통해 상징화되었다. 속국의 왕은 그의 아들을 불모로 중국에 보내 중국의 권위와 문화를 배우게 했다. 이러한 조공을 통한 양국관계는 양국 간의 정치, 군사, 경제적인 균형을 주었는데 이는 양쪽의 환경의 변화로 인해 늘 평화의 위협을 받았다. 조공제도는 유교의 정치적 이상으로 중국은 이를 통해 인접국에 대해 문화적,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했으며 많은 속국이 중국을 공경함은 제왕의 덕과 중국의 문화적 우월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중국이 이 제도를 유지할만큼 강할 때에만 가능하므로 중국의 세력의 약화로 점차 이 제도도 약화되었다.


BC 1세기말에 흉노는 한나라에 보다 많은 선물을 요구했다. Noin Ula무덤은 흉노가 조공제도에서 받은 것들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무덤 구조 및 그 안의 장식품은 모두 중국에서 온 것들인데 흉노는 단순히 물건만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중국의 기술자들까지도 요구하고 중국의 기술로 무덤을 꾸몄음을 알 수 있다.


2. 비단길


BC 53년 남흉노와의 조공제도에 들어서면서 한나라는 비단길을 통해 서구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궁전은 흉노에 비단을 선물로 보냈는데 이때 사용한 비단길을 통해 로마에도 비단을 수출하고 그 길로 말, 옷, 장식품 및 시리아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유리구슬도 수입했다. 그러나 수입한 양은 한대의 비단 수출에 비하면 작은 양이었다. 비단길은 BC 1세기에 중국과 서구의 무역로로 가장 중요했으며 해로는 한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AD1-2세기에 가서야 비로소 국제적 해상무역이 번성했다.


 3. BC 1세기의 유학과 경전 연구


宣帝 때는 경전연구의 황금기로 12학파를 대표한 12학자들이 태학에서 오경을 가르쳤다. 孔安國은 今文으로 서경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고문편집에 참여하여 유학파의 벽을 무너뜨렸다.


BC 53-51에 춘추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이 논쟁을 통해 유교 경전의 공식적 해석이 나와 태학에서 가르치는 정통이론이 되었다. 成帝(32-37 BC)때 왕립도서관의 목록을 수집했는데 이는 유향(79-8 BC)의 책임하에 이루어졌고 그의 사후에 아들 유흠이 이를 계승했는데 이 목록은 반고의 한서(예문지)에 수록되어 있다.


BC 1세기말까지의 사상은 동중서의 금문학에 남아있다. 신비주의와 우주론에 기초한 사상으로 당시에 참위설이 발전했는데 이는 역경과 경전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 보충한다고 주장한다. 즉 음양오행설을 기초로 하여 역사, 신화, 숫자  등을 고찰하는 것이다.


1)점술


모든 것은 天地人 안에서 움직이고 변화한다. 별의 운동은 天道로서 이는 地道와 人道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 중 하나만 잘못되어도 다른 2개가 영향을 받는다. 이는 일종의 생명력을 지닌 마력적인 힘이다. 다시 말해 天의 변화는 지상의 삶에 징조를 야기시키므로 天에 나쁜 징조가 생길 때에는 지상에 다가올 위험을 경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天子인 왕에게 그 징조의 책임을 물었다. 이러한 天의 변화에 대한 해석이 학파마다 다르기도 하는데 이런 징조들은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예를 들면 BC 1세기에 정방이 元帝에게 凶兆를 고하여 결국 죽임을 당한 일이 있었다.)


2) 종교와 궁정생활의 개혁


宣帝가 유교경전 연구를 권장함으로써 국가공직자들에게도 유교사상의 영향이 점차 커졌다. BC 81년에 있었던 염철논쟁은 이미 유학자들의 힘을 보여주는 예라 볼 수 있다. 元帝(48-33 BC)는 유학자들의 충고로 여러 경제개혁을 실시하였는데 예를 들면 산동지방의 비단공장을 감축하고, 궁녀와 악사의 수를 줄이고, 궁전 수도 줄였다. 몇 공원은 국민에게 주었고 음식, 마굿간의 비용을 절약했다. 제왕과 왕녀의 사당에 매일 음식을 헌납했고 1년에 30번 정한 달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음식비가 엄청나므로 종교의례를 간소화했다. 즉 조상 사당을 폐쇄하고 황제, 황후 각각의 사당을 지어 매해 30번 제사를 하던 것을 현 재임왕의 조상 5대로 제한했다. 또 BC 70년에는 궁중의 연회를 간소화했고 BC 48년에는 이를 폐지시켰다.


3)장례의식


 당시 학자들의 개혁에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무덤의 장식, 장식품들로써 이는 당시의 대중적 신앙을 잘 보여준다. 무덤 장식의 주요주제는 죽은 이가 불멸의 세계로 비상한다는 것인데 실제의 관심사는 비상보다는 시신을 잘 보호함에 있었는데 이는 다음 세계에서도 생을 즐기고자 하는 면을 다분히 드러났다. 어떤 무덤에서는 유교덕목을 묘사하기도 했으며, 무덤입구에 마귀를 쫓아내는 힘을 지닌 짐승들( 용, 호랑이, 불사조, 수사슴)을 새겨놓기도 했다. BC 1년에는 이런 신적인 상징물들이 일반화되어 무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서왕모는 불멸을 가져오며 우주질서를 관장한다고 믿어 무덤에 묘사하기도 했다.


전한말 유교사상이 점차 퍼지면서 이와 관련된 역사적 장면 및 영웅초상화와 성인을 그리기도 했다.


4. 위기 안에서 사회의 긴장


1) 외척에 의한 정치


 元帝 때 와서 외척의 세력이 커졌는데 元帝의 황후이면서 成帝의 어머니인 왕태후는 약화된 중앙세력에 직면해서 실권을 지닌 외척으로 BC 54-AD 13년 84세로 죽을 때까지 60년간 실권을 잡았다. 왕망은 成帝의 모친의 조카로써 哀帝와 平帝가 죽고 난 후 왕위를 계승했다.


2) 부자들의 사치와 농민들의 가난


한대의 가장 뚜렷한 사회분열은 대지주와 농민 사이의 빈부격차이다. 이 시기의 사회적 특성은 지배층이 경제력을 독점했다는 것이다. 국가는 대지주들의 개인소유지가 많아지자 이를 통제하고자 했으나 실제로 통제역할을 할 국가관료들이 대부분 대지주들이었으므로 통제할 수 없었다.


농사는 대부분 노동자와 소작민 및 노예에 의존하는데, BC 1년에 중국에 국가 및 개인소유 노예는  백만명으로 전인구의 1%였다. 이들은 죄수들과 경제 파산자들로 그 중 죄수들은 국가소유 노예로, 경제적 파탄에 의해 몸값으로 팔려온 사람은 개인 소유의 노예가 되었다.


개인이 소유한 노예가 증가함은 빈자는 더 극빈하고 부자는 너무 부유한 그 시대의 한 징표를 나타내는 것이다. 유학자들은 사치, 소비, 과시의 문화 속에서 도덕질서를 회복시키기가 어려웠다. 成帝 제임동안에는 여러 재앙이 계속 일어났는데 이는 국가차원에서 볼 때 치명적인 것으로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불만과 불안이 조성되었다.


BC 3년에는 심한 가뭄이 있었는데 산동지역에서 일종의 메시야 운동이 일어났다. 수천명이 수도에 도착한 뒤 제단을 세워 희생제물을 바치고 서왕모에게 노래와 춤으로 기도를 했는데 이 운동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메시야 운동으로 간주된다. (왕조의 멸망은 오행설과 함께 참위설이 결합되어 예견되었다.)


이때 왕태후의 조카인 왕망이 일어났다. 그는 哀帝가 죽자 태후에 의해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9살에 즉위된 平帝의 이름으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AD 5년 平帝가 죽자, 왕망은 어린아이인 태자의 섭정정치를 했고 그후 AD 9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이상으로 周公을 채택하여 그처럼 행동했고 동시에 자신의 권위를 고전에서 빌려오고자 했으므로 周代제도를 복귀시켰다.


왕망은 열렬한 유학자였고 궁정사람들과는 달리 검소한 생활을 했다. 왕망은 古文학자인 유흠(BC32 -AD23)의 신임을 얻었는데 유흠은 周代의 전통을 존중했으며 금문학파가 지닌 참위적 성격 즉 신비적인 이론, 위서의 사용 , 예언과 신성을 목적으로 고전을 조작하는 금문학파를 비판했다. 유향과 유흠은 한대가 火의 덕이라고 보고, 왕망은 土로서 火 다음에 일어난다고 보았다.  AD 5년에 平帝가 죽자 사람들은 火氣가 꺼졌다고 보고 土氣가 그 다음에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왕망은 土氣를 가졌으므로 대부분의 유학자은 그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에 찬동했다.

 

5. 왕망의 치세 (AD 9-23)


1) 화폐개혁


왕망은 AD 9,10,14년에 화폐개혁을 실시했는데 이 개혁은 단순히 새로운 화폐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의 금속의 무게가 그 가치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기에) 화폐의 가치를 절하시켰다. 그는 위조지폐를 지닌 자나 구화폐를 지닌 자는 죽이거나 추방을 했다. 또한 금화를 국유화시킴으로 귀족들은 자신의 금을 현화폐로 교환했다. 이상의 화폐개혁은 귀족, 상인들에게 치명적이었다.


 2)농지개혁


AD 9년에 많은 소작인들은 국가에 세금을 낼 수 없게 되자 왕망은 개인의 토지소유를 제한하고 토지를 국유화시켰다. 토지거래를 억제하고 가족수를 기준으로 각 농민에게 할당된 토지를 제공하는 토지소유 제한책을 세웠다. (8가족에 1스퀘어씩 주고 수확량의 1/10은 국가에 헌납하도록 했다. 이러한 토지분배정책은 이는 좁은 지역에선 가능하나 면적이 넓은 지역에서는 토지의 질도 달라서 똑같은 분배가 불가능했다.


3)노예제도 폐지


왕망은 사유노예들을 자유롭게 해줌으로써 노예제도를 폐지시켰으나 사실 농지개혁이 3년후 폐지되자 각 개인은 다시 땅을 판매하고 노예를 소유할 방법을 발견했다. 그래서 왕망은 AD 17년에 개인이 노예를 소유하는데 현금 3600의 세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4) 전매


AD 9년경 왕망의 경제정책은 전매정책을 중심한 통제경제였다. 유학자들은 국가전매를 반대하자 왕망은 ‘통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6개의 통제물품을 만들었는데 그 중 다섯은 소금, 철, 술, 화폐주조, 名山과 大澤에서 나오는 생산품였다. 5번째 통제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고기잡이, 사냥, 과수원, 누에고치-은 빼앗지 않았지만 문제는 이것을 하기 위해선 세금을 내어야 했으므로 가난한 이에게 세금이 가중된 결과가 되었다.

 여섯째 통제는 가격파동을 막기 위해 창고를 설치하는 것이다. BC 54년 宣帝때 창고를 지어서 곡류가 쌀 때 사들여서 값이 올랐을 때 농민에게 팔았다. 이는 BC 44년에 폐지되었는데 왕망이 이를 재건하여 6대도시의 시장가격을 조절하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실패하여 백성의 생활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5)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개혁가이면서 기회주의자인 왕망의 개혁과 그의 몰락의 원인


그의 임기는 짧았고(15년) 그의 급진적 활동은 비효과적이었다. 왕망의 찬탈은 전한말 드러난 여러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궁전파괴, 씨족간의 투쟁, 귀족에게 부의 치중, 귀족들의 사치스런 삶이 그것이다.


왕망은 유학자이면서 동시에 점술가 불멸추구자였다. 그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는데 그 당시에 자연재해가 일어났다. AD 11년에 황하강 뚝의 재해가 일어났는데 이 재해는 같은 지역에서 BC 132년과 A2-6년에도 둑이 무너져 홍수가 났던 곳이었다. 이 재해로 산동을 포함하여 5지방에 피해가 났다. AD 70년, AD 18년 이후 산동성에 이재민 반란이 일어났고 赤眉賊(눈썹을 붉게 물들인 비적들)이 들고 일어나 AD 22년에는 赤眉賊이 정부군과 싸워 승리했으며 남양지역에서는 귀족들의 새로운 반란도 일어났다. 결국 왕망은 농민과 귀족의 반란으로 죽임을 당했고 그의 죽음으로 그의 왕조는 붕괴되고 유씨에게로 왕권이 되돌아가게 되었다.


200년 간의 전한시기가 큰 투쟁없이 왕망에게 왕위를 내어줌은 무제에 의해 유교가 국교로 정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오행참위설이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었기에 그대로 수용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前漢의 經說이 지닌 특색이라면 五行災異說로써 왕의 정치가 왕의 뜻에 합치하는가 여부는 하늘이 내리는 재앙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왕망이 왕위에 오를 때에도 그리고 그의 왕권이 위태롭게 될 때에도 자연의 이상현상은 곧 왕위교체를 야기시켰다. 이는 人道가 늘 天道에 순응해야 한다는 중국인의 기본신앙이 잘 드러난 경우라 할수 있다.                       

           


    애평시기의 참위설과 그 사상적 의의


                                                                    최 현 민

 

참위설이 범람한 시기는 전한말의 애제, 평제(BC 6-AD 5)때로써 그 당시는 금문경학이 정치사상의 통치역할을 했다. 참위는 한대 정치 종교 문화(災異, 感應,  命, 경학적 발전 및 천문지리. 자연지식) 모든 면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왕망이 임금될 때 그리고 반왕망세력도 참위를 이용했으니 이와 같이 한말에 참위사상이 범람함은 금문학 내의 신학적 요소가 발전한 결과이다.


중국 역사상 人事와 현실을 중시하는 유교의 종교적 관점은 피안세계에 대한 신앙과는 서로 모순이 된다. 그러나 참위사상 안에서 유학은 祖俗적 신학 형식으로 변화되어 일종의 정식 종교로 변할 가능성을 갖게 되었으니 예를 들면 僞書 에서 공자를 신으로 설명함이 그것이다.


참위는 經書를 신격화하지만 경서적 내용, 성격, 작용은 그대로 두었다. (삼강을 그대로 선양함) 참위적 제도는 상호대립되는 세력과 집단을 포괄한다. 그 중 하나는 학술수양의 경학학자인데 예를 들어 신론의 有無라는 신학적 내용의 상호모순되는 부분이 같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자연지식과 미신과의 모순, 정통경학의 윤리강상과 야심을 지닌 자가 사회혼란을 조작하는 모순, 이러한 모순이 참위가 장구한 지배사상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참위사상은 동한시기에 종교적 발전을 가져오는데 기여했으며 경학학술과 철학사상의 발전, 경학과 과학적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 또 참위는 중국학술과 철학사상에 있어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僞書 중에 나오는 元氣는 자연우주생성의 기본개념이며 자연물질적 기원으로 神靈의 근거이다. 이와같이 원기개념은 참위와 관련된 우주철학적 주요관념인 것이다. 이 원기는 이미 물질적 특성과 정신적 특성을 갖추고 있음으로써 일체현상적 통일의 기초가 된다. 역경<건착도>에서는 팔괘가 우주생성도식인데 팔괘의 氣는 氣的 음양, 剛柔적 대립성질을 지닌다. <건착도>를 보면 역은 2개계통이 있으니 하나는 천지를 형성하고 그 기상을 변화하며, 다른 하나는 만물생장수장적 계통이다.


<건착도>에서는 “성인은 음양으로 인해 천지를 세운다. 그러므로 음양은 성쇄가 있고 人道는 득실이 있으므로 성인은 그 상으로 인해 그 변화에 따라 괘를 세운다는 것이다. 역의 괘상의 변화 및 길흉화복은 음양성쇄와 人道적 득실에 완전히 근거한다.


<<건착도>>를 보면 팔괘가 體가 된다는 새로운 개념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팔괘는 부호이지 실제나 실물이 아니므로 소위 팔괘가 體라는 것은 인류도덕이나 천지운행의 규율변화를 결정하며 실제상 추상적 팔괘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유형적이고 느끼고 볼 수 있는 구체적 사물의 본원이며 근거라는 것이다.


참위사상은 그 특성 안에 모순을 안고 있다. 한면에서는 신학유심중심주의이며 다른 면에서는 우주생성 도식적 발전이다. 또 한면에서는 천인감응으로 가득찼고 한편으로는 八卦爲體적 사상인 철학적 생성론, 본체론이나 음양상수학으로 발전했다. 한면에서는 八卦의 기원이나 문자방면에 새로운 연구가 이루어진 반면 한면은 정치상 각종세력의 句心斗角에 반영되기도 했으니 참위표현을 빌려 정치적 야심을 펼쳤다. 한편에서는 미신적 형식하에 한말의 진실한 사회모순과 진보적 사회이상을 방영하기도 했고 일면 공자를 신격화하고 한면으로는 신학형식하에서 三綱五常을 강조하고 세속적 윤리를 강화하기도 했다. 이러한 참위사상은 서한 이전 금문경학사상의 발전적 산물이다.































                        불멸의 추구


       

                                                                                                                                    최 현 민

   

불멸에 대한 추구는 후한 시기에 살아 있었다. 이는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 중 부적과 거울에 새겨진 소원에서 잘 볼 수 있으며 불멸과 관련된 전기와 회화적 표현에도 드러난다. 또한 그림과 문학은 불멸에 대한 묘사(깃을 지닌 몸과 팔에 단 날개, 구름 속으로 날고 신의 땅으로 여행하는 것)로 가득찼다. 도교는 사회 모든 계층에 퍼지면서 그 신봉자들에게 도덕적 가치, 정신적 금욕주의, 건강법의 형태, 약, 연금술 등에 기초한 구원종교로서 알려졌다. 도교가 제공한 불멸은 삶을 연장하려는 약, 체조방법, 식이요법을 통해 육체의 불멸이 얻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수행자는 술, 고기, 곡류를 억제해야 하고 태식호흡 등의 호흡조절을 위한 수행을 통해 몸의 전부분이 점차 빛과 순수한 숨으로 대치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방법의 결과 정화되고 변형됨으로써 몸이 빛나게 되고 불멸로 이끌어진다. 이는 명상도 수반하는데 수행자들은 소우주인 몸 안의 신들에 집중하는데 이런 방법으로 그는 신들을 보존하며 이 신들이 몸을 떠남이 곧 죽음을 의미했다. 수행자는 내관수행을 통해 순수한 삶을 살고 선행을 하고자 했으니 이는 불멸을 얻는데 필수적이다. 불멸을 얻은 수행자는 그가 죽더라도 죽은 몸은 실제 몸이 아니고 그의 몸은 불멸의 세계에서 산다.


무덤의 부장품에서 나온 거울은 당시 사람들의 불멸에 대한 신앙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거울의 사방에는 동물들 즉 왼쪽에는 용, 오른쪽에는 호랑이 그리고 거북이가 음으로, 뱀이 양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동물들이 모든 불행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 줌으로써 편안함을 주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외에 주왕조의 창시자의 아버지인 Wen왕의 전설을 통해서 불멸을 묘사하기도 했다.


바깥쪽에는 여러 소원들을 새겨 놓았는데 침입자를 정복하고 나라가 화평하며 곡식이 풍성하고 부모님께서 장수하시고 천제께 감사를 드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거울의 정확한 위치에 그려진 음양오행을 설명함은 예언적인 힘을 지닌다. 이것은 악마를 격퇴하고 행복과 번영, 장수의 원천이 되며 완전하고 복이 충만한 세계를 묘사한다. 이를 통해 자식의 효성이 드러나고 후손이 보장된다는 이중의 위안을 받게 된다. 무덤에 나타난 부장품들을 통해 당시의 도덕과 우주적 믿음 및 불멸에 대한 한대인들의 열망을 짐작할 수 있다.


                           

                불멸의 추구 (Wu Hung 108-141, 218-230)

                                     

                                                              최  현  민


서한시기에 서왕모는 서방세계와 관련되어 불멸의 약을 통제한다고 생각되었다 서한말 그녀는 종교적 숭배대상이 되었고 동한시기에 서왕모는 여성의 우주적 원리인 ‘음’으로 드러났다. 2세기에 그녀는 곤륜산 설화와 통합되어 최고신에 위치하게 되었고 이것이 당시의 예술에 반영되어 나타났다. 점차 그녀의 위치가 상승됨에 따라 그녀가 사는 서방세계는 다른 근거에서 나온 많은 그림과 상징들과 결부되어 드러났다. 서한말에 서왕모는 초월적 존재로 부상되면서 실제로 조직화된 종교의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AD 1세기에는 서왕모상은 당시의 그림의 중심을 차지했고 양쪽에는 수행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 상이 정형화된 표준그림이다. 동한시대의 서왕모의 이런 모습은 인도불교 예술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AD 1세기에 한나라는 서왕모는 부처와 같이 서방세계에서 온 신으로 여기고 그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겼다.


무량사조각에는 한대의 우주관이 잘 나타나 있다. 천장의 천상적 징조와 벽의 사람 모습은 동과 서로 된 2개의 박공의 조각인 수평적 구조가 조화를 이룬 것이다. 여기서의 동서는 천국에 대한 한계점이다. 우주의 수평적 구조는 현재의 삶 그 자체보다 내세와 먼저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사고의 구조로 이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중국에서 우주에 대해 표현한 최초의 그림은 마왕퇴 제1무덤의 깃발인데 이는 天人地의 세계가 결합해 있다. 무량사의 조각은 중국예술사에서 남아있는 우주적 표현 중 2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이는 마왕퇴 깃발처럼 영혼에 대한 깊은 신앙과 결합되어 있다.


유교적 예술은 불교나 도교에 비해 드물다. 무량사는 한유학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한유학 예술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한유학 예술의 특징은 자체생성으로 묘사된 우주관을 묘사하고 있다. 즉 이는 외부의 창조자나 궁극적 원인에 의해서 우주가 생성됨을 부정함을 의미한다. 즉 이는 우주 그 자체내에 내부적인 질서에 의해 우주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기체적 우주관이 한대 우주관의 핵심이다. 天조차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사에 대한 응답으로서 운행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상호관계는 우주의 내부적이고 유동적인 활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는 우주관의 이콘예술에서 한유학 예술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우주는 자체생성되며 모든 것은 내부적으로 일어나며 이는 물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이라는 우주관과 함께 동중서는 상보적인 우주관을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은 상보적이다.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고, 왼쪽이 있으면 오른쪽이, 음양,부부, 군신, 부자 등 상보적이 아닌 것이 없다. 이러한 모든 관계는 음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런 상보관계도 무량사조각에 잘 나타나 있다.


이상에서 본 한대 예술작품에 드러난 한대의 우주관은 외부의 원인자,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고 우주 그 자체 내에 모든 것이(심지어 신까지) 생성되는 유기체적 우주관이 잘 드러나 있다.




              왕부의 <<잠부론>>

                                              최  현  민


 왕부는 東漢 和帝와 安帝시기부터 桓帝 靈帝시기를 살았던 사람이다. 이 때는 세족 문벌이 관료 대지주가 되고 工商세력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지녔고 외척, 환관들이 서로 권력투쟁을 하여 정치가 부패했으며 天災가 생기면서 많은 농민이 파산을 당한 상태였다. 왕부는 이런 시대적 상황 하에서 <<潛夫論>>을 저술하여 나름대로 당시 사회, 정치위기의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했다. 이 책에서 왕부는 서민지주와 평민의 정서와 바램을 반영하고 있다. 왕부는 여기서 공자와 유가적 경전을 따른다고 하나, 실제로는 道, 儒, 法家를 종합하고 있다.


1. 崇本抑末과 官位,귀족에 대한 비판


왕부 당시 사회상황은 파산된 많은 농민들이 유랑민 생활을 했고 상공업 세력은 기형적으로 발전했다. 농민들의 파산은 사회의 빈곤과 불안의 근원이 되었으며 반란위기의 조짐을 보였다. 그래서 왕부는 本(농업)은 숭상하고, 末(상공업)의 발전은 제한해야 한다는 崇本抑末사상을 펼쳤다. 그의 崇本抑末 사상은 동한 이래의 사회모순을 반영하고 있으며 계급의 한계와 그 시대특징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러나 왕부의 개혁사상은 유랑민의 토지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대토지소유제의 발전을 막을 수 없었으며 浮游인구와 崇本抑末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왕부는 族性제도와 爵位高低로 인재를 뽑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어질고 우매함은 마음에 있지 귀천에 있지 않다. 믿고 속임(信斯)은 성품에 있지, 친하고 소원함(親疏)에 있지 않다”고 하여 특권에 대해서 반대하고 서민지주와 평민의 바램이 정치에 반영되어 백성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촉구했다.


2. 德化 및 ‘選으로써 本을 삼고자 함’이라는 개혁적 주장


정치적 암흑시기 및 사회적인 위기가 심각한 상황 하에서 왕부는 정치개혁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관리들의 부패로 국가정치가 위기에 직면하게 되어 현인을 선택하여 채용함으로써 관료정치를 정돈 개선하고 폐정을 혁신하고자 했다. 이렇게 조정의 기강과 관료정치를 정돈하고자 한 그는 君權을 강화하는 運用法, 術, 勢를 강조했다. 


왕부는 韓非의 법가사상을 계승하여 왕권을 維護하고 외척, 환관, 세족지주의 정치세력을 배격하고자 했다. 다만 왕부와 한비가 서로 같지 않는 것은 그는 儒, 道敎의 사상을 흡수한 점이다. 임금은 道德仁義를 행하고 법령을 順行하며, 理로써 백성을 다스려야 함을 강조했다. 왕부는 백성은 국가의 기초이고 임금은 백성의 통치자이며 신하는 다스림의 材라 하여 君, 臣, 民 3者의 관계를 설명했다.

 

3. 도덕을 천인감응신학의 계기로 삼다.


왕부는 <<노자>>의 道를 수용하여 道를 氣의 기원으로 본다. 즉 氣는 도덕에 종속되어 그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천과 인이 서로 감응하여 기가 통하며 이 氣는 다시 도덕에서부터 결정되는데 이는 도덕적 사람이 주동적 지위를 갖게 됨을 의미한다. 왕부는 이러한 도덕설을 이용하여 천인감응신학을 만들었다. 天은 陽이고 땅은 陰이며 人은 中和이니 三才가 각각 다른 직무가 있어 서로 의지함으로써 각각 그 도를 따라 氣가 和하여 균형을 이루고, 道나 道德이 돌아서 음양을 조화롭게 하고 德氣가 조화롭게 됨으로써 民心이 된다는 것이다.

왕부는 도덕으로써 德化的 개혁주장을 했고 이를 천인 감응신학이론의 기초로 삼았다.


이것은 서한 말년의 劉向의 ‘行德’신학사상과 매우 유사하나 여기에 哲理와 唯心主義가 첨부된 것이다. 왕부는 음양을 조화롭게 하고 天心에 순응해야 함을 강조한다. 天은 백성으로 心을 삼으니 백성이 편안한 즉 天心이 順應하고 백성이 고통스러운 즉 天心이 逆行한다. 이는 왕부의 德化와 以選爲本사상이 결국 天心으로 귀결됨을 의미한다. 


또한 왕부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했다. “천지개벽시에 神民이 있었고 民神은  精氣가 통한다.” 귀신이 모든 精氣에 의탁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전국시기이후 전통관념이 되었다. 그러나 왕부는 말하기를, 聖人은 귀신을 경외하되 卜巫는 자주하지 말고 멀리 해야 한다고 했다. 즉 왕부는 巫覡祝請을 보조적인 것으로 보면서 덕이 없으면 안된다고 하여 덕을 강조한 것이다. 왕부는 사람의 길흉화복이 자기행위에 있으나 천명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즉 모든 사람의 길흉은 自己行爲가 主가 되어 天命에 의해 결정되니 行은 자기의 質이고, 命은 天의 다스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왕부는 行爲를 主로 삼음으로써 수신하여 행동을 신중히 함으로써 복을 받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사람이 능히 복에 이르지 못함은 命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왕부는 도덕을 천인 신학체계 안에 넣음으로써 천인신학에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


4. 性, 骨相과 學,行 및 그 실제적 인식방법


왕부는 人性에는 상중하 3품이 있다고 한다. 위의 지식층과 아래의 우매한 백성은 적고 중간층이 많으니 이 中庸의 사람이 德化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왕부의 성삼품설은 德化의 정치를 강조함과 일치하며 그 이론적 기초가 된다. 그는 과거의 성선, 성악과 선악혼용설의 여러 관점을 종합했으며, 당시 계급모순과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을 인성론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왕부는 왕충의 骨相說을 계승하여 한 사람의 몸에 오행, 팔괘의 氣가 갖추어 있으니 이것이 骨相이 되며 이 性命의 氣가 貴賤의 表가 된다고 본다.


통치자가 德化를 실행하면 德氣가 백성의 胎氣에 영향을 주어 백성의 胎에 中和가 포함되어 태어날 때 인의의 마음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惡政도 백성의 形體에 영향을 줌으로써 많은 性惡의 사람이 생긴다고 본다. 왕부의 골상설과 그의 덕화개혁정치 성삼품설, 모두는 관련이 있어 서로 통하며 모두 사회위기적 요망을 표현하고 있다. 왕부는 선천적 골상을 인정하나, 후천적 人事를 강조함으로써 왕충보다 진일보했음을 알 수 있다. 왕부는 후천적 학문과 中庸의 性이 德化의 관점에서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 때문에 그는 聖典, 聖心을 동시에 강조한 것이다.

 

       

      <<백호통>>과 양한신학, 경학적 사상방식


                                                              최  현  민


 동한초 참위가 발전함에 따라 고문경학은 흥기하여 정치사상과 학술영역에 그 복잡한 모순이 드러났다. 이를 해결키 위해 章帝4년에 임금은 揚終의 건의를 받아들여 백호통회의를 개최했다. 그 목적은 章句의 번잡함을 해결하여 經義的 문제를 통일하고자 함이다. 경학은 서한 이래로 200년간 발전하여 금문경학이 대표적 관방경학이 되어 계속 번쇄를 향해 달렸다. 금문경학내에는 참위사상도 함께 들어 있었는데 참위는 양방면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한 면은 신학이고 다른 면은 삼강 오상 천문 지리적 설명과 해석의 일반경학적 내용이지만 참위의 주요 경향은 신학이다.


<<백호통>>은 고문경학에 상당한 영향을 받아 참위적 신학설교를 없앴다. 예를 들면 참위에서는 고대제왕이나 공자와 같은 성인을 신격화했으나 백호통에서는 이들이 백성을 이롭게 하고 문화발전을 가져온 왕이거나 성인은 다만 학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또한 참위에선 五經도 신화하였으나 <<백호통>>에선 오경은 공자가 책정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전통적 유가와 고문학적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백호통>>에서는 사회, 예의, 풍습, 국가제도, 윤리도덕와 관련된 43개의 명사를 해석했는데 이는 제도적 법전식의 규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 것을 모은 것이다. 예를 들어 封禪은 봉건사회에선 가장 중요한 제천대전인데 <<벡호통>>에선 다만 封禪적 역사와 의의에 대해 이론적 설명을 하고 그 의식과 전례 등은 규정하지 않는다. 이와같이 <<백호통>>에선 참위적 신학방면이 극히 약화되었다.


<<백호통>>의 43조명사 해석의 기본내용은 봉건등급제도의 규정에 관한 것이며 그 목적은 삼강오상의 종법통치 및 군주의 전통통치 복무를 강화하려는 것이다. 삼강 중 부모관계는 기본상 宗法문제로 부권을 강조하였고 군권과 부모를 서로 결합시켜 君夫大義로 보았다.


<<백호통>>의 43조명사에는 철학의 뜻을 지닌 명사-天地, 五行, 사람, 性情가 있다. 여기서 보면 <<백호통>>은 기본적으로 동중서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호통>>은 동중서의 천관을 따라 도덕적 천을 강조했으며 본질상 신령의 天의 변형이라고 보았다. <<백호통>>에선 五行을 도덕관계로 해석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동중서 이래로 금문학이 오행사상과 관련있음을 계승한 것이다. <백호통>의 인간관에 있어서도 동중서의 천인합일과 천인동류 사상을 따른다. <백호통>에선 인간의 생명은 형체와 정신이 서로 합한 것으로 형체는 기로 구성되어 있고 정신은 기의 작용이라고 본다. 또한 사람은 性情을 품고 태어나는데 性은 陽的인 요소로 인자로운 것이며 情은 음적인 요소로 탐욕적인 것이다.


백호관 회의 이후로도 고문과 금문의 투쟁이 다시 격렬해진 점으로 보아 백호관 회의는 통일 학술사상의 회의로는 실패했으나 그 이후 통일경학적 노력이 계속 있었다. 한대말년에 이르러 금고문학 토쟁이 그쳐서 통일적 경학이 출현했다. 금문학, 고문학, 참위의 융합은 정현의 經의 주석에서 실현되었다. 이러한 통일적 경학 출현시기에 왕부, 최식 등의 샤회비판사조가 흥기하고 새로운 사상이 출현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중국철학은 위진현학의 새로운 단계로서 본체론으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엄준의 사변철학


              -축서개 양한사상사 200-223쪽-

             

                                                      최  현  민


엄준은 노장사상, 무위적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고, 동시에 유가, 법가사상을 종합하여 독특한 사상체계를 형성했다. 그는 봉건농민의 불만스런 현실 및 무력으로 반항하는 현실의 사상을 반영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玄德, 玄敎라 칭했으며 엄준의 道, 玄적 사변철학은 양웅의 玄玄에 영향을 주었으며 위진현학 사상의 연원이 됨으로써 중국철학 사상의 중요한 중간단계가 되었다.


엄준은 도를 단순히 虛, 無라고 보지 않고 虛之虛, 無之無라 하였는데 이는 도의 초월, 차별, 모순적 절대경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도를 시공을 초월하여 不爲, 不宰하는 不存이라고 한다. 이러한 도의 虛와 무의 속성, 有는 무에서 나온다는 그의 사상은 노장과 비교할 때 커다란 발전이 있다. 위진현학 특히 何晏, 왕필의 無的 貴無論은 엄준과 <역위>의 사변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엄준은 도를 논함에 있어 氣의 이론을 흡수하여 形은 氣에 의해서, 기는 和에 의해서, 和는 神明에 의해서, 신명은 도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도덕은 천지만물의 宗祖이고 물질적 氣는 도로부터 나온 것이다. 엄준도 천인감응을 논하면서 천인이 모두 氣體로 이루어져 상호감응한다고 본다.


엄준의 인생철학은 貴身 즉 자아를 보존함이다. 이는 한초에 사람은 귀하다는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귀한 몸이니 정신과 性命을 보존해야 한다. 도덕이 바로 保身이다. 도를 존중하고 덕을 귀하게 여김이 바로 몸을 귀하게 여기는 保身으로 이것이 엄준의 인생철학의 핵심이다. 엄준은 또한 名勢, 欲得이 정신을 산란하게 한다고 보고 외물이 어지럽히지 않는 곳에서 정신은 자연히 안정,화평한 상태가 된다고 한다.


엄준은 사람은 영아에 비교했는데 赤子는 일종의 童蒙으로 무식하고 유약하나 실제로는 총명하고 堅强하다는 것이다. 이는 농민의 낙후되고 우매한 심리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은둔생활을 강조하여 일체의 사려를 끊고 사회적 어지러움을 끊어 절대정신적 자유를 획득하고자 했다. 그래서 엄준은 왕도 道, 無爲로 백성을 다스려야지, 有爲로 하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말한 무위적 정치는 곧 자연으로 돌아감을 의미했다. 


엄준은 사람이 본래 태어날 때부터 分을 갖고 태어난다고 본다. 사람의 활동은 分을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分은 도덕이 사람에게 부여한 性命이라고 본다.


엄준의 사회 정치사상은 貴身, 爲我的 사상의 기초위에 있다. 그의 分사상은 도가의 무위, 무욕사상을 기초로 하며 유가 正命사상과 법가의 法術을 종합한 것이다.


엄준은 無智, 無欲, 赤子의 마음을 강조했다. 그는 지혜가 일체 유해한 근원이라고 본다. 지혜는 얻을 수 없고 오직 적자만이 이를 체현할 수 있다. 엄준은 말하길 재화와 학문, 양자의 긴장관계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혼탁한 것이다. 그는 守一이 진정한 지혜라고 본다.


엄준의 體玄守一의 인식론과 爲反守和의 방법론과  도의 본체론, 保身存神의 인생철학, 無爲, 守分적 정치철학이 모두 일치한다. 엄준은 그의 철학을 玄敎라고 개괄하고 絶言, 體玄을 강조했다.




                 

    <<도덕지귀>>의 자연사상과 사회정치사상


                                                                최  현  민



 서한이 사회모순과 부패로 인해 붕괴에 직면한 시기에 노자사상이 다시 중시되어 이를 통해 현실을 비판했다. <<도덕지귀>>는 이런 사회적 정황하에서 생겨났다. <<지귀>>를 쓴 엄준은 반인문주의 사상을 계승하고 儒家가 禮治와 知를 숭상함을 비판했으며 노자의 자연사상을 본체론적 사변으로 삼았다.


<<지귀>>에 나오는 道는 철학적 최고 범주이나 도의 근본속성과 규정은 자연이라고 본다. 도는 일체사물과 현상적 최후의 근거이며 원인이 되므로 곧 자연이라는 것이다. 즉 도의 유일한 원칙이 바로 자연이며 이를 天心, 天意, 自然自守라고도 한다.


<<지귀>>의 자연개념에는 다음의 3가지 상호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만물은 自形, 自成, 自生, 自災하며 우주 만물 밖에 따로 주재자가 있지 않다. 우주 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며 만물의 性은 각기 分度가 있으며 조화의 마음을 갖는다. 자연은 만물의 존재, 생장, 변화의 원인이며 규율이고 근거이며 역량이다. 따라서 <<지귀>>는 한대 천인감응신학에 대해 강렬한 비판을 했다.


<지귀>는 도 즉 자연적 사상에 관해 실제상 한대의 생성론적 모식을 돌파했고 본체론적 영역에 진입했다. 도는 不生,不化이며 만물은 스스로 운동하고 분화, 成形되어 자기적 품덕과 특성을 갖춘다. <지귀>에는 도덕에서 神明이, 신명에서 和가, 화에서 形이, 형에서 氣가 나왔다고 본다. 엄준은 氣가 만물의 시원이며 神明과 太和는 만물의 宗祖로 본다. 그러나 엄준에게 있어 본체론은 다만 하나의 도식 중의 새로운 요소이지 주도적 지위를 점유하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지귀>>의 자연사상은 위진현학에서 크게 발전했지만 위진현학에서의 도는 본체론적 사변이나 <<지귀>>는 경험사실적이며 귀납유추적이다.


<<지귀>>의 사회정치사상의 특징은 유교와 도교를 모두 배척하면서 동시에 유교와 도교를 종합, 융합하고 있다. <<지귀>>는 덕의 세상에 이르른 歌頌이므로 한면으로는 이상사회를 추구하면서 한면은 현실사회를 항의한 것이다. <<지귀>>는 한대통치집단의 정치에 대해 철저한 비판을 했다. <<지귀>>는 한면은 한대전기의 황노 刑名을 숭상하고, 다른 면은 유가적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인, 의 임금의 통치를 전면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그러나 엄준은 禮敎적 통치를 완전히 허무한 것이라고 보아 유가의 禮治적 허위를 반대했다. 엄준이 인의의 왕을 긍정한 이유는 개혁정치적 희망과 현실에 대한 강한 비평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