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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대화가 나아갈 방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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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1.♡.172.206) DATE :
14-01-24 10:32 READ :
1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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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대화가 나아갈 방향.pdf (327.0K), Down : 8, 2014-01-24 10:32:17 | |
종교 대화가 나아갈 방향
(본고는 운주사에서 출간된 <불교와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만나다, 최현민 저> 제1강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종래에 이루어진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전개되어야 할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는 어떤 방향을 지녀야 할지, 이는 앞으로 우리 각자가 계속 지니고 가야 할 물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까지의 고찰을 바탕으로 앞으로 종교 대화를 할 때 고려해야 할 점과 방향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종교의 보편성과 특수성
앞서 신 중심적 다원주의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지금까지 종교 대화는 주로 종교적 보편성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를 상정하고 대화해온 신 중심적 다원주의는, 각 신앙인들이 각기 다양한 길을 선택해서 살아가지만 결국은 같은 정상에 다다른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나 불교의 ‘공空’마저도 포괄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진 더 큰 차원의 실재를 상정합니다. 이와 같이 다원주의자들이 세운 제3의 궁극적인 실재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 가정된 실재는 과연 삼라만상의 생사 문제를 모두 설명해낼 수 있을까요?
이 물음과 관련하여 원효 스님의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에 나오는 “환호환幻虎還 탄환사呑幻師”라는 비유가 떠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환사幻師는 마술사를 말하고 환호幻虎는 바로 그 마술사가 만든 허깨비 호랑이를 의미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마술사는 결국 자신의 환술에 의해 만들어진 호랑이에 의해 도리어 삼켜져버리고 맙니다. 이 이야기는 자기가 만들어낸 관념이나 교리에 의해 도리어 자신이 먹히고 만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를 관념으로 규정지으려는 순간, 우리는 환호에게 잡아먹히고 맙니다. 종교 대화 담론을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이러한 환사와 환호가 발견됩니다. 종교들의 특수성을 교묘히 제거한 뒤에 등가가치들만을 골라 하나의 UN종교를 만들려는 종교 다원주의자들의 시도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이러한 믿음의 허상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사유의 놀이를 할 위험이 있습니다. 신앙은 어떤 허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의 울부짖음과 기쁨, 탄식, 환희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하며 치유하고 구원하는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허깨비 호랑이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이 점이야말로 종교 대화를 해나감에 있어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허깨비 호랑이에 빠지지 않고 이를 초월하여 종교 대화를 계속 해나갈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고 성찰해가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종교 대화를 함에 있어 보편성의 문제와 더불어 다시금 심사숙고해야 할 것은 각 종교의 특수성과 고유성의 문제입니다. 하나의 정상을 상정하고 이를 지향하는 종교의 보편성 추구는 자칫 각 종교가 지닌 특수성과 고유성을 무시해버리거나 약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두 종교의 신앙을 동시에 갖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제가 불교를 공부하고 불교적 사유나 명상 수행을 해도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렇듯 한 종교에 속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종교 전통 안에서 전수되어온 구원의 메시지를 갖고 그 신앙 공동체 안에서 살아감을 뜻합니다. 이런 점에서 종교 대화를 할 때 각 종교의 특수성과 고유성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고 봅니다. 저는 바로 이 점이 종교 대화를 하는 이들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이웃 종교의 고유성을 통해 새로운 면을 배우게 되는 계기도 된다고 봅니다. 아니, 바로 그러한 고유성과 특수성이야말로 이웃 종교와 대화해야 할 이유를 제공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 예수의 유일성과 보편성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를 통해서 궁극적인 구원이 선취되었다고 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의 길을 예수라는 한 존재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그리스도교의 구원사적 해석 방법에서 예수의 유일성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의 보편사적 해석학의 관점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보편사적 해석학의 관점이란 과거와 현재의 지평을 아직 끝나지 않는 역사, 곧 미래로 개방되어 있는 역사 전체의 구도 속에서 인간과 세계,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현실성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역사와 사실을 현대적 실존 속으로 융해시키고자 한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학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가다머가 말한 지평융해의 개념을 도입하여 실존론적 이해를 넘어 역사의 이해를 통해 서로 다른 지평을 융해함으로써 현실성에 이르고자 합니다.
판넨베르크는 볼트만과 가다머의 영향을 받아 과거와 현재의 지평, 그리고 미래의 지평을 포괄하는 보편사적 지평에서 신학하기를 시도합니다. 그는 보편사적 해석학의 사고 안에서 과거와 현재의 지평이 미래의 지평에서 통전화되기에, 종말의 전망이야말로 역사의 의미를 온전히 밝혀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입장은 과거의 역사가 오늘의 역사를, 오늘의 역사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변증법적 역사철학의 관점이 아니라 종말이 오늘의 역사를 결정한다는 종말론적 역사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종말론적 역사관 속에서 예수라는 존재가 그리스도교에 주는 의미를 조명코자 합니다. 저는 여기서 그리스도교 교회 공동체가 2000년의 역사 안에서 끝까지 지켜온 예수의 유일성에 대해 다시금 묻게 됩니다. 예수의 유일성이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배타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구체적인 역사의 장에서 드러난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어느 것과 비교될 수 없는 유일한 관계 맺음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요.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유일성’을 끝까지 지켜온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그 유일성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탄생되었고 존속해온 것이라고요 그리스도인은 다름 아닌 예수가 하느님과 맺는 ‘유일한’ 관계성을 통해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깨닫고 예수가 ‘압바’라고 부른 바로 그 하느님을 자신의 압바로 고백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의 유일성은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해 당신을 탈은폐하셨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탈은폐’라 함은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 안에, 아니 삼라만상 안에 숨어 계심을 전제한 표현입니다. 그 숨어 계신 하느님께서 인류의 역사 안에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인간으로 사셨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야말로 바로 하느님의 자기계시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를 완전히 알아듣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누군지 물었을 때 그분은 ‘나는 나다(I AM)’, 곧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존재 자체라는 것입니다. 존재자가 어떻게 존재 자체를 알 수 있겠습니까? 알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 존재 자체이신 분이 스스로 당신 자신을 열어 보여주시는 길뿐이지요.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의 자기계시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자기계시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구약성경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예수는 구약성경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은 예수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을 확연히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며,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예수의 유일성은 바로 하느님의 자기계시가 결정적으로 각인된 역사적 현상을 예수로 보는 데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2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알아듣고자 애써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역사 안에서 탄생했고,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또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살아 있는 신앙인들의 순례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를 간과한 채 종교 대화의 담론을 한다는 건 그리스도교와의 대화라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 중심적 다원주의 담론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또한 역사를 간과한 또 한 무리가 바로 성령 지상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입니다. 소위 광신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지난 2천 년 동안 어떻게 성령과 하느님을 이해해 왔는지 그 과정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개인이 경험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광신자들이 말하는 예수의 유일성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이어져온 예수의 유일성의 본 의미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러한 이들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적대적 배타성으로 보여지곤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앞으로 강의를 통해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다만 각 종교가 지닌 고유성과 특수성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일 또한 보편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와 함께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고자 합니다. 그건 바로 각 종교의 고유성을 통해 세상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삼라만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길이 우리에게 열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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