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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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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원시불교-고타마 붓다를 중심으로-
들어가면서
타종교를 이해하는 기본노선은 스미스의 견해를 따른다. 스미스는 종교를 축적된 전통과 신앙으로 본다. 축적된 전통은 각 종교마다 차이가 있고 한 종교 안에서도 시대 장소에 따라 다른 형태를 취한다. 예를 들면 인도불교는 시대적으로 볼 때 근본불교, 부파불교, 초기대승불교, 중기대승불교 후기대승불교로 나눌수 있고, 지역에 따라서 인도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 일본불교로 나눌 수 있다. 스미스는 종교의 중요성을 신앙에 있다고 본다. 신앙은 초월의 세계를 사는 것을 말한다. 즉 우리가 타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축적된 전통 즉 경전이나 교리 의례 전통-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축적된 전통을 자기의 신앙으로 지니고 살아가는 신앙인을 이해할 떄 비로소 우리는 타종교를 이해하는 것이 된다고 볼수 있다. 이것을 스미스는 종교사의 인격화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타종교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타종교의 축적된 전통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전통을 자기신앙으로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의 신앙을 배우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런 신앙의 관점에서 불교게의 대표적 3분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불교를 배운다는 것, 타종교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축적된 전통만을 배움에 그친다면 그것은 다만 타종교에 대한 지식을 습득함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미나를 통해서 단순히 축적된 전통을 배울 목적으로 모인 것이 아니다. 우린 종교와 종교간의 대화를 전제로 하여 타종교를 배우고자 한다. 대화란 인격과 인격간의 만남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와 불교간의 대화란 엄밀한 의미에서 잘못된 표현이다. 그리스도교신앙을 지닌 한 사람의 크리스찬이 불교신앙을 지닌 한 불자와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미나를 통해 그리스도교신앙을 지닌 한 수도자로서 불교라는 종교전통에서 내가 만난 불자들, 그들의 신앙을 나누고자 하고 그 신앙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나누고자 한다.
1. 고타마 붓다의 출가수행
1).요가
요가는 바라문의 수행방법으로 요가의 궁극적 목적은 범아일여라고 할 수 있다. 梵은 브라흐만이고 我는 아트만을 의미한다. 즉 우주의 본질인 브라흐만과 자기인 아트만이 본래 하나임을 자각함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요가의 특징은 현세를 苦로 본다는 점이다. 즉 현세는 다만 苦이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다음 세계 즉 내세의 生天上界를 지향하는 것이다.
석존은 그가 체득한 선정요가를 통해 마음의 적정을 얻었으나 이것이 참된 깨달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즉 적정을 유지하는 힘이 결여되면 마음의 적정이 다시 무너져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즉 선정은 마음의 단련방법이긴 하지만 이 방법으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고 고타마는 생각했다. 여기서 붓다가 요가를 버린 것은 그의 사상의 핵심과 직결된다.
-인도전통사상-아트만 인정, 현세부정 -내세중시
-불교-아트만 인정치 않음, (무아), 현세중시
2) 고행수행
석존은 요가를 버리고 산림에 들어가서 독자적으로 수행을 했다. 그것이 고행수행이었다. 그 때 오명의 수행자들도 함께 고행수행을 했다. 그는 이 고행수행을 6년간 지속했다. 피골이 상접한 붓다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열심히 고행을 했는지 알수 있다. 그러나 붓다는 그토록 심한 고행을 했건만 그것으로 인간의 성질을 초극한 완전하고 성스런 知見에 도달치 못했다.
결국 붓다는 고행이 무익함을 깨닫고 이를 그만두었다. 그는 자기와 부왕을 따라서 농경축제로 외출해서 나무 밑에서 명상에 잠겼던 것이 생각났다. 그 안락한 좌선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비밀이 있지 않나 라고 생각했다.그는 고행한 몸을 씻고 스자타가 준 우유죽을 먹고 원기를 회복하여 보리수에서 단좌명상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35세 12월8일 새벽 고타마는 각자로서 자각을 얻었다.
깨달음을 연 붓다는 처음에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설할 마음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깨달음은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며 미묘한 것이고 심원해서 욕망과 탐욕에 쌓인 사람은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성찰하여 설할 마음이 없었다. 이 때 梵天이 세번 거듭 붓다에게 설법을 청함으로 해서 세존은 연민의 정이 일어나서 설법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45년간 인도각지에 설법여행을 하면서 교화활동을 벌이며 많은 제자를 얻었다. 그리고 쿠시나라에서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3) 端坐冥想의 의미
붓다가 요가와 고행을 버리고 단좌명상을 했다는 것, 이것이 불교좌선의 기원이다. 몸을 똑바로 하고 몸을 세워 앉아서 깊이 명상에 잠김, 이것과 바라문의 요가와의 차이는 요가는 梵我一如를 명상하는 것이나, 붓다는 緣에 의한 명상이다.
붓다는 35세에 깨닫고 45년간 인도각지를 돌며 설법여행을 했다. 그 설법에서 사람들에게 설한 실천수행법이 바로 단좌명상이었다. 즉 이 단좌명상은 결코 고행이 아니다. 도겐은 “좌선은 安樂의 法門”(普卷坐禪義)에서 말한다. 붓다는 단좌명상 생활이 가능한 삶의 형태로 제자들에게 출가를 권장했다.
<숫타니파타>
(가장 오래된 원시경전으로 산문이 아닌 운문형식을 띰)
"在家생활을 고통스럽고 마음에 번민이 많은데 반해, 출가는 넓은 야외와 같다.“라고 한다.
”수행자는 정해진 때에 탁발하고 혼자서 물러나서 나무 그늘 밑에 앉아라“라고 하여 (단좌명상)을 말하고 있다. 이같이 명상은 출가수행자가 해야 할 실천도였으며 이는 동시에 이상적 삶의 방식이었다.
2. 붓다의 깨달음
고타마 붓다는 과연 무엇을 깨달았는가? 대개 12支緣起說이라고 한다.
1) 12지연기설
12개항목이 서로 緣하여 생겨나는 관계를 연기라고 한다. 즉 이는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는 관계 속에서 생성소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연기설의 일반구조는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남으로 해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음으로 해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해서 저것이 멸한다."이다.
붓다는 이 연기설로서 인간의 苦의 원인을 규명한다. 즉 12개요소로 인간존재를 설명하는 것이 12지연기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12지연기설은 무엇인가?
붓다의 명상은 老死로부터 출발한다. 붓다에게 있어 12연기를 관상하는 출발점이 된 것은 인간존재의 老死라는 사실이다. 그럼 붓다는 老死를 어떻게 보았는가? 그는 老死는 無常이고 苦라고 보았다. 즉 老死는 자기의 무상변천이다. 노사가 붓다에게 최대관심사가 된 이유는 그것이 우리자신에 대한 근본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내가 老死로서 무상변천해 간다는 것은 生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태어났기 때문에 죽음이 있는 것이다. 老死는 生에 의해서 생겨난다. 生이라는 것은 有에 의해 있는 것이다.
有(생존)은 取(무엇을 자기 것으로 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는 愛에 연해서 생겨난다. 愛는 渴愛(목마른 사람은 물을 원하는 것같은 강한 충동)를 말한다. 愛는 受에 緣해서 일어난다.
쾌, 불쾌의 감수작용인 受는 觸(감수작용에 의해 접촉이 생겨난다. 마음이 대상과 접촉함) 감각기관인 六入(眼耳鼻舌身意)과 외부접촉에 의해서 일어나며 근본은 名色 즉 身心의 활동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 신심활동은 識에 의해 일어난다. 이같이 우리의 생존(有)는 애착, 집착의 생존이 되어 있음을 붓다는 밝힌 것이다. 의식활동을 지지하는 것이 行(잠재적 형성력) 즉 의지이며, 의지를 지지하는 것이 無明이다.
이렇게 볼 때 12연기는 “모든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는 것이다. 분별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실체를 지니고 있는 것같이 보이나, 깨닫게 되면 모든 것은 무명에 의해 드러난 것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같이 무실체성에 대한 자각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상호의존성 즉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상호의존관계를 자각함을 의미한다. 결국 자신이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은 타력에 의한 것 즉 우주 일체의 힘에 의한 것임을 자각한 것이다.
律藏大品의 서두에서 붓다가 12지연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고 나온다.“무명이라는 연으로부터 諸行이 생기고 제행이라는 연으로부터 識(인식작용)이 생기고 識이라는 緣으로부터 名色(명칭과 형태)가 생기고, 名色이라는 緣으로부터 六處(감각기능)이 생기고 거기서 觸(감각기능에 의해 대상과 접촉이 있음)이, 觸에서 受(감수작용)이 受에서 愛(妄執) 受에서 取(집착)이 取에서 有(생존)이, 有에서 生(출생)이 생에 서 노사가 생긴다. 이같이 해서 순수한 苦의 덩어리가 生起한 것이다.
그러나 연기에 의해서 석존의 깨달음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를 소멸시키는 방법을 설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그것이 바로 緣滅의 진리이다.
“무명을 지멸하면 생활작용도 지멸하고, 이를 지멸하면 식별작용이, 이를 지멸하면 명칭과 형태가, 이를 지멸하면 6가지 감각기능이, 이를 지멸하면 대상과의 접촉이, 이를 지멸하면 감수작용이, 이를 지멸하면 망집이, 이를 지멸하면 집착이, 집착이 지멸하면 생존도, 생존이 지멸하면 출생도, 출생이 지멸하면 노사도 지멸한다.”
앞의 것이 順觀이라면 뒤의 것은 逆觀이다. 이상에서 12지연기를 살펴보았지만 원시불전에서 12지연기이외에도 3支(無明, 取, 苦) 4支, 5支, 8支, 9支, 10支가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해서 학자들은 석존이 처음 깨달았을 때 12지연기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이는 후에 정리된 상태이지 깨달음 그 자체는 아니다 라고 한다. 즉 산문의 연기설은 붓다의 사색의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바로 보다 간단한 연기설이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그럼 붓다가 참으로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달마이다.
2) 법.
원시불교경전에는 韻文과 散文이 있다. 종래 원시불교연구는 산문중심이었으나 운문이 산문체보다 오래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숫타니파타, 여기에는 12지연기설보다 더 간단한 연기설이 설해져 있다. 그럼 붓다가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고타마의 해탈시기를 그리고 있는 경전<우다아나(즉흥의 시)>남전대장경 권 23, 86-88
일몰시의 시
“달마가 열심히 명상하고 있는 수행자에게 드러났을 때 그의 일체의 의혹은 사라졌다. 이는 그가 연기의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眞夜時의 시
“달마가 열심히 명상하고 있는 수행자에게 드러났을 때 그의 일체의 의혹은 사라졌다. 이는 그가 모든 연의 소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벽의 시
“달마가 열심히 명상하고 있는 수행자에게 드러났을 때 그는 악마의 군대를 부수고 安立하고 있다. 태양이 허공을 비치는 것과 같다.”
여기서 공통으로 나오는 달마가 바로 법이다. 즉 달마가 붓다에게 드러난 것이다. 붓다는 이 법을 존중하고 법을 따라서 80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살았다.
"나는 나보다 그 이상 戒(명상 지혜 해탈)를 몸에 익힌 수행자, 바라문을 보지 못했다. 그를 만났다면 그를 존중하고 의지했을 것이다. 나는 바로 이 법(모든 것을 초월한 영원한 법)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이 법을 존중하고 의지하겠다.“ 즉 붓다는 이미 존재하는 법(달마)에 눈을 뜬 것이다. 붓다 이전부터, 영원이전부터 존재하는 법을 발견한 것이다. 梵天은 붓다가 발견한 법의 진리를 그에게 시준해 주었다.
“과거에 깨달은 사람들 미래에 깨달은 사람들 현재에 깨달은 사람들 모두 바른 법을 존경하고 있었고 또한 존경할 것이다. 이것이 모든 깨달은 사람(佛)의 정함이었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諸佛의 권위는 法(이는 ‘보전하는 것’이란 뜻이며 라틴어의 forma와 어원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한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부처님 혹은 불교의 권위는 이 법을 바탕으로 성립하고 있다. 모든 불은 바른 법(正法)을 존중하고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게 되는데 이것이 제불의 규칙이라고 한다. 근본에 법이 있음으로 해서 佛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이같이 붓다는 법에 좇아서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는 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며 언제나 법을 즐기는 사람인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붓다의 깨달음은 곧 법이며 이것이 12지연기로 정리되어 언어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붓다의 道得)
3) 12지연기와 법
법에 대해서 붓다는 三法印으로 설명한다.
ㄱ. 諸行無常(연기적 표현)-緣起의 특징이 바로 무상
(연기설에 의하면 인간존재의 여러 측면을 가리키고 있는 제법(12지)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필연적 법칙성을 지니고 상호관련 속에서 생멸한다는 것이다.
ㄴ. 諸法無我(법적 표현)-법의 특징이 바로 무아.
(諸法은 어느 것도 독자성을 지니지 못한 조건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아설이다. 무아설의 반대인 常住설을 붓다는 거부한다. 우파니샤드 철학에서의 제1원인이 되는 실재인 凡도, 주체인 我도 부정한다.
ㄷ. 一切皆苦- 일체의 것(존재)는 실체성을 지니지 않은 無我임을 말한 것이 諸法無我라면, 이것이 일체의 존재가 끊임없이 유전해 감을 諸行無常이라고 한다. 그러나 범부는 이것을 모르고 집착함에서 一切皆苦가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법과 연기는 붓다가 깨달은 것에 대한 다른 표현방식이라 할 수 있다.
연기설은 모든 것이 상의상관관계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연기설은 단순히 인간의 고의 원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바로 상의상관관계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진리이다. 즉 지금 여기에 있는 나라는 존재는 바로 나를 둘러싼 수많은 존재들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연기설이다. 즉 연기설 속에 참된 것은 바로 나라는 실체를 벗어나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간의 상관관계를 깨닫는데 있다.
붓다는 말한다. “나는 이 법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이 법을 존중하고 이 법에 의지하는 것이다.” 즉 붓다는 바로 이 연기법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에 의지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붓다가 말하는 법의 일치는 힌두교의 梵我一如와 같은 일치가 아니라 자타라는 실체를 극복한 초월의 세계를 말한다.
즉 연기법의 깨달음은 바로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와졌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나와 너, 나와 세계라는 벽은 결국 나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붓다는 바로 이 실체성이 없는 것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12지연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 법을 깨달았을 때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나를 포함하여-이 서로 상관관계를 지님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붓다가 설한 연기의 진리는 결국 우리들이 결코 나 혼자서 존재할 수 없는 상의 상관적 존재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내가 내 주변을 지배하는 주체로서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로 인해서 내가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진리이다. 자연은 내가 지배할 상대로서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으로 인해 내 주변의 사람으로 인해 내 존재가 가능함을.
4) 붓다의 설법(八正道)
붓다가 처음으로 설법한 사람은 그와 함께 고행했던 5인이다. 석존이 깨달은 곳에서 그들이 있는 곳까지는 250km떨어져 있었다.(걸어서 약 80일)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그의 첫설법을 한 이유는 그의 가르침의 핵심과 연관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깨달음은 고행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괘락을 통한 것도 아닌 中道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출가한 자는 2개의 극단에 가까이 해선 안된다. 이 두 개란 무엇인가? 애욕을 탐내는 것은 범부의 소행이다.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스스로 고행하는 것은 다만 고행하는 것일뿐이다.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극단을 버리고 中道를 깨달았다. 중도를 깨달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이를 8가지 길로 설명했다. 이것이 팔정도이다. (正의 의미; 如實, 있는 그대로, 妄想을 떠난 것)
팔정도는 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이다.
正見,-바른 견해, 붓다의 가르침 즉 연기에 대해서 올바로 자각함
正思,-마음과 의지를 바르게 함
(正見을 지니고 바른 마음 바른 결의를 한다는 것은 三毒(貪瞋痴)을 떠남을 의미.
正語,-언어를 바르게, 바른 언어활동
正業,-신체적 행위를 바르게 -도겐은 僧業이라고 함. 매일의 일상생활의 성화
正命,-命은 活命 즉 생활이다. 따라서 正命은 바른생활을 말함
正精進,-바른 노력이 없으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正念-바른 憶念으로 마음속깊이 銘記해서 잊지 않음
正定-마음을 고요히 해서 하나에 집중하는 것, 즉 바른 삼매가 正定이다.(지관타좌) -----八正道는 곧 八聖道이며, 사람이 되는 길이다.
<결론>
서론에서 우리는 스미스의 신앙을 언급했다. 붓다의 신앙은 법에 대한 신앙이다. 연기법에 대한 신앙, 그것은 집착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가능한 것이다.
붓다는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을 단좌명상을 통해서 얻었고 이를 끊임없이 지속했다. 즉 붓다는 35세 깨닫고 80세까지 45년간 좌선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깨달음은 35세의 끝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깨달음의 삶이었다. 그 삶이 곧 좌선의 삶이고 팔정도의 삶이었다. 일상을 성화하는 삶이었다. 바로 이러한 붓다가 지향했던 삶이 우리 수도자가 지향하고 있는 삶이 아닌가? 우리는 바로 이 지속적인 수행의 삶에로 불리움을 받았고 그것이 종신토록 살도록 서원한 자이다. 그 서원은 종신서원날로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의 삶을 통해서 서원을 살 때 그 의미를 지닌다. 붓다의 가르침 그의 깨달음을 빌려 말하면 그것은 연기를 사는 삶이며 바로 나와 내 주변의 모든 존재가 상의 상관적으로 숨쉬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 영원한 법에 눈을 뜨는 것이다. 그 법안에 우리가 살아있음을 감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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