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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7.31 제 1 강의 -불교명상의 개관-
 WRITER: 관리자  (118.♡.103.201) DATE : 10-10-25 10:47 READ : 2055
   2004. 7.31 제1강의-불교명상의 개관-.pdf (346.4K), Down : 24, 2011-06-01 10:46:21
2004. 7.31 제1강의 -불교명상의 개관-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한다.”
여기 있는 우리들은 옷깃만 스치는 정도의 인연이 아니라 같은 영성을 갖고 평생을 살아가는 삶의 동반자들이니 얼마나 깊은 인연들인가?

나에게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큰 두 물줄기와 같은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 두 물줄기가 광활한 바다 속에서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지닌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바라보는 저의 입장은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의 신앙관에 영향을 받았다.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종교를 축적된 전통과 인격적 신앙의 범주로 나눔

축적적 전통-경전 교리 신학적 체계, 도덕적 규범, 신화을 말한다.
그러나 각 전통은 열거한 이런 것들에 머물지 않고 이것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인격적 신앙이다.

-여기서 스미스가 말한 신앙은 faith이지 belief가 아니다.
 belief와 faith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belief--각 종교전통에서 말하는 신앙고백, 예) 사도신경, 삼보(불법승)
faith-belief를 통해 드러난 초월의 세계이다.

예>  도겐선사
-스미스가 말한 초월의 세계를 사셨던 선사
중세 일본인 가마꾸라시대의 불교 안에서 왜곡된 belief의 측면을 faith의 측면에서 바로잡고자 노력했던 선사.

<불교에 대한 왜곡된 이해>

1. 불교는 서구에서 말하는 의미의 무신론이 아니다.
무신론이란 개념은 서구에서 형성된 것이다.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했듯이 하느님을 부정함으로 존재의 기반을 상실해 버린 자들이 바로 무신론자들이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무신론' 하면 회의주의, 비관론, 무엇보다도 인생의 궁극적 의미 추구를 포기한 허무주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2. 불교를 무신론이라고 보는 맥락과 불교를 비관주의나 허무주의로 보는 측면이 이런 면에서 연관성을 지닌다.

불교를 비관주의로 보는 자들은 불교가 인생을 苦로 보고 무상하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불교가 인생을 苦로 보고 무상하다고 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불교는 인생이 무상하고 괴롭다 해도 이를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낙관주의이다.)

-불교는 이 세계가 혼돈과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있고 궁극적으로 의미가 있어 해탈이 가능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 허무주의나 비관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진리에 따라 의미있게 살고자 하며 이 진리를 구원의 메시지로 전파하고자 하는 종교이다.

3. 불교는 자력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부처님이 깨달은 우주와 인생의 법도인 다르마에 의존하는 종교이지 자기 자신에 의지하는 종교가 아니다.
다시 말해 진리의 힘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지 나 자신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나’라는 존재는 허망하고 실체없다고 본다. 그런 자신에 의해 어떻게 구원될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또한 불교의 정토종이란 종파는 아미타불을 믿으면 서방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아미타불에 의지함으로써 서방정토에서 다음 생을 살고자 하는 신앙이다. 이것이야 말로 타력신앙이 아니고 무엇인가?

<부처님의 생애> (BC463- BC383) 80세를 사심

1. 본명-고타마 싯타르타
2. 인도 북부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족이라는 부족국가의 왕자로 태어났다.
3. 18세에 결혼하시고 라훌라라는 한 아들이 있었다.
4. 생노병상에 대한 의문을 안고 29세에 출가하셨다. 

5. 그는 출가하여 먼저 당시 인도의 힌두교 스승을 찾아가 요가를 배웠고 요가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선정(삼매)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그분은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으므로 요가를 버리고 산림에 들어가 5동료와 함께 고행수행을 했다.
- 그는 이 고행수행을 6년간 지속했다. 피골이 상접한 붓다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열심히 고행을 했는지 알수 있다. 

6. 결국 붓다는 고행이 무익함을 깨닫고 이를 그만두었다.
그는 자기와 부왕을 따라서 농경축제로 외출해서 나무 밑에서 명상에 잠겼던 것이 생각났다. 그 안락한 좌선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비밀이 있지 않나 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행한 몸을 씻고 스자타가 준 우유죽을 먹고 원기를 회복하여 보리수에서 단좌명상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35세 12월8일 새벽 고타마는 깨달음을 얻었다.

7 깨달음을 연 붓다는 5동료에게 베나레스 녹야원에서 먼저 가르쳤다.
8. 그후 45년간 인도각지에 설법여행을 하면서 많은 제자를 얻었다.
9 쿠시나라에서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명상을 통해 붓다가 발견한 진리란 무엇인가?
우선 그 진리는 그의 가르침에서 드러난다. 붓다께서 45년간 가르친 그 가르침의 핵심이 바로 四聖諦이다. 
사성제란 풀이하면 4가지 성스런 진리라는 뜻이다. 무엇이 성스런 진리인가?

1. 苦
부처님은 고통을 삼라만상이 지닌 본질적인 측면으로 보셨다.
부처님은 고를 8가지로 말씀하신다.
나고 죽고 병들고 죽는것 -4苦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구하지만 얻지 못한 것,
오온에 대한 집착---4苦
**불교에서는 사람을 다섯 요소(몸, 감각 지각 행위 인식)로 되어 있다고 본다.
生이란 5요소가 결합된 것이고 죽음이란 5요소가 흩어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이 자신에 집착함으로 고통을 얻게 된다.

-앞에서 말한 7가지 苦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苦라면 8번째 苦는 우리의 존재가 지닌 苦이다.
부처님은 바로 인간 실존이 지닌 8번째 苦에 집중하신다.

2. 集(고의 원인)

그럼 苦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두 번째 거룩한 진리는 바로 고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보통 불교에서는 苦의 원인은 탐욕에 대한 집착에 있다고 말한다.

-건강 지적 탐닉, 영적 탐닉, 인간에 대한 집착 성공 명예 재물 권력 개인주의적인 모든 것 이기적인 모든 것

-우리의 욕망은 끝이 없고 늘 목마름을 느낀다. 하나를 성취하면 또 다른 것을 원한다.
우리가 집착의 끈을 놓지 않는 이상 늘 목마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욕망에 사고잡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3. 滅
 고통의 끝을 불교에서는 니르바나(열반)이라고 한다.
불교는 힌두교의 윤회사상과 업보사상에 영향을 받아 윤회를 말한다.
즉 인생은 1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집착의사슬이 끝나지 않는 한 계속된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즉 (선업을 지었는가 악업을 지었는가에 따라 인간 동식물 천상의 신으로 환생한다.
-집착의 불이 꺼지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자들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니르바나를 갈망한다.
이와같이 윤회가 끝난 상태를 니르바나라 한다.
 윤회의 끝은 번뇌집착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열반에 들려면 구체적으로 번뇌집착을 끊어버리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 거룩한 진리인 道이다.

4. 道 (열반에 이르는 방법)
집착을 끊어버리는 방법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부처님은 道를 8가지로 말씀하신다.

팔정도는 불교수행의 3가지 핵심인 戒定慧로 요약할 수 있다. 三學이란 계율지킴(우리식으로 수도생활을 함에 필요한 모든 규율들-도덕규범) 定(명상, 기도생활) 慧는 계와 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말한다.
**Meditation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묵상이 아니라 관상 즉 contemplation에 해당된다.


戒-正語Right Speech,  正業  Right Action, 正命Right Livelihood
定-正勤 正定 正念
慧-正見 正思惟

1. 正念(Right Mindfulness)
정념은 우리가 앞으로 한 불교명상의 핵심이다.

 念이라는 한자의 위는 今으로 지금이란 뜻이고 아래는 心으로 마음을 의미,
다시 말해 正念은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명상의 핵심이다.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매순간을 깨어 살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항상 깨어 있어라’의 의미는 정념의 의미와 통한다.
-우리의 생각은 과거에 있거나 혹 미래에 있는 경우가 많다.

2. 正定, Right Concentration
정념과 함께 불교명상의 핵심이다.
正定수행은 어느 한 가지에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이다.
이 수행을 통해 지금 여기(Now, Here)에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3. <正勤>Right Diligence
정근은 올바른 노력, 정진이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 명상을 얻지만 문제는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습관의 힘에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평화가 지속성을 갖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명상의 지속성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명상할 때 평화는 지속성을 지니게 된다.

이  正念(Right Mindfulness), 正定, Right Concentration 正勤>Right Diligence가 불교명상의 핵심이다.

4. 正見(Right View)
5. 正思(올바른 생각,Right Thinking)

-이 두가지가 바로 불교에서 추구하는 지혜(wisdom)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럼 무엇이 正見이고 正思인가?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깨달으셨다고 하시는 그 진리는 무엇인가?
불교경전은 그것이 緣起라고 말한다.
연기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호인연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緣起>
불교경전인 중아함경에서는 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 저것이 저러하므로 이것이 이러하다”

즉 모든 존재는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틱낫한은 연기를 interbeing이라고 해석한다.

예) 나무는 물 흙 광물 햇빛에 의해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나무라는 존재는 나무 아닌 모든 요소에 의해 존재한다.
나무 아닌 모든 요소를 제거해 버린다면 나무는 존재할 수 없다. 나무는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다.
--종이는 나무없이 불가능하다. 나무는 앞서 말한 요소 없이는 불가능하다.
--내안의 심장이 멈추면 죽는다.
그러나 내 안의 심장은 내 몸밖의 심장과 둘이 아니다.
무엇이 몸밖의 심장인가? 태양 공기 나무 흙 등...

-내 몸안의 심장과 내 몸밖의 심장이 둘이 아님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연기의 깨달음이다.

<연기와 사랑>

 연기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상호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진리이다.
다시 말해 존재하는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연기에 대한 깨달음이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이다. 이 지혜로부터 불교의 자비가 나왔다.
따라서 불교의 지혜와 자비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실존적으로 상호 깊은 연관속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우리는 너를 사랑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를 사랑하는 것임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정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이다.
사랑은 관계를 떠나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이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준행하라”고 하신 마더씨튼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그리스도교적 방식은 추상적인 논리의 추론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낸 예수님께 집중해야 한다.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25, 40)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불교의 연관성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뜻을 준행하는 정도는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

-고린도 전서 12, 21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우리의 몸에 두셨습니다. 모든 지체가 다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몸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는 것입니다.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삼라만상이 바로 한 몸이라는 사실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 동식물 모두를 포함한 삼라만상이 한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중심적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해온 경향이 있어왔다. 이것이 오늘날 생태학적 관점에서 그리스도교가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 요인이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불교에서 배워야 할 점은 바로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삼라만상이 실존적으로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는 진리이다.

-이 곳에 머물면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내 몸과 마음이 쉴 수 있었다. 자연이 내게 쉼과 평온함을 주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불교의 연기는 종교간 대화의 주요과제 중 하나라고 본다.

 

<공 emptiness>
공은 연기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은 無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다. 공은 무가 아니다.
공은 유와 무라는 이원론적 개념을 뛰어넘어 있는 진리이다.
공은 무엇이 비었다는 것인가?
독립된 존재가 비었다는 것이다. 즉 독립된 존재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상호 공존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같이 모든 존재가 독립된 것이 아니라는 표현을 공이라고 한 것이다.
공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의미와도 통한다.

<無我>

무아란 자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전통적으로 자아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한 것으로 이해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부처님 자신은 경전 어느 곳에서도 ‘자아가 없다’ 라고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다만 사람을 구성하는 오온(다섯요소의 덩어리) 각각이 자아가 아니라는  非我(anatman) 을 말씀하셨다. an은 ‘없다’가 아니라 ‘아니다’라는 부정사이다.

-인간이 오온 덩어리로만 되어 있고 이것이 흩어지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많지만 전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말씁ㅁ하신 무아는 결코 관념적인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도겐선사는 “불법을 배우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며 자기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 자기를 잊는 것이 바로 무아이다.

-바오로사도는 말한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다.”
자기를 잊고 비울 때 그래서 무아가 될 때 바오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

-부처님은 4가지 성스런 진리에서 고를 없애는 방법으로 8가지 길을 제시하셨던 것이다.
이 8가지는 서로 상호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어느 한 가지를 빼더라도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다시 말해 계율( precepts), 명상(Meditation)을 통해 지혜(wisdom)을 얻게 된다. 이 3가지를 삼학이라 한다.

-수행은 도덕적 삶에서 출발한다. 재가자들은 최소한 5계, 사미승은 10계, 비구승은 250계, 비구니승은 348계를 지켜야 한다.
여성차별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 인도사회에서 여성에게 출가를 허락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다음 시간부터 함께 살펴볼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정도에 해당되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노래 배울 것
*다음 시간에 올 때 방석 갖고 올 것.
























제2강의

**상좌불교의 명상**
부처님께서 직접 행하신 수행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의 수행을 가장 잘 보존해서 전승 발전시켰다고 보는 것이 Theravada Buddhism이다.
- Theravada Buddhism은 오늘날 스리랑카 미얀마 베트남 불교를 말한다.
- Theravada Buddhism 수행에서 대표적인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위빠사나-(vi-꿰뚫다,  passan&#257;-passati(보다)의 명사형으로 위빠사나는 ‘꿰뚫어 본다’는 의미) 무엇을?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것이다 .

-꿰뚫어 볼 대상으로 4가지 (몸 느낌 마음의 여러 상태 법)을 든다. 이 각각에 대한 수행방법은 상세히 경전에 나온다.

-이 중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몸이다.

(1) 몸의 중요성

①여기서 말하는 몸은 육체와 정신으로 이분화된 육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동양에서 몸이라고 할 때는 정신을 포함하고 있다.

② 서구의 근대철학은 인간의 이성(정신)을 중시하고 육체를 그 하위에 두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서구철학은 이성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말하기 시작했다.

③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의지’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나약한지에 대해 우린 삶 안에서 많이 경험해 왔지 않는가?

④ 우리의 나쁜 습관을 고치기 위해 많은 성찰과 결심을 해왔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무의식관이나 융의 집단적 무의식이 증명하듯 우리의 습관(성향)은 이성이나 의지만으로 다스릴 수 없다.
그것은 습관의 뿌리가 몸 전체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단 한번의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후에도 수행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같이 습성의 뿌리가 깊은 이유는 우리의 욕망이 육체와 긴밀히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에 우리가 지은 업이 몸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양의 명상(힌두교 요가, 불교명상 도교의 명상)은 몸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사실 예수님도 몸을 중시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뭅니다. (요한 6, 56)
이것은 단수한 상징적 행위가 아니다. 예수께서 밀떡을 자신의 몸으로 취하심으로써 당신의 몸을 우주와 깊은 연관성 속에 두신 것이다.
하나의 밀떡 속에는 태양, 밀, 물 땅 사람들의 손길 즉 우주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매일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우주를 먹는 것이며 우주와 하나되는 신비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같이 동양의 명상에선 몸의 수행을 중시한다. 몸을 수행하는 것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방법이 바로 호흡명상이다.
 
1)호흡명상

-인류의 위대한 문화에서 호흡을 생명으로 보아왔다.
그래서 ‘호흡을 느낀다’는 것은 곧 생명을 느끼는 것이다.

-동양에서 말하는 호흡명상은 단전호흡과 깊은 연관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단전이란 그 지점이 배꼽에서 3, 4센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그 곳을 생명의 정수요 에너지의 바다라고 부른다.
즉 동양명상에서 단전은 몸의 중심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일본의 수행전통에선 “생명과 에너지가 단전에서 솟아난다”고 가르쳐왔다.
단전호흡에선 “입으로 쉬지 말고 코로 쉬고 숨을 단전까지 내려 보내고, 아랫배에 힘을 주어 길게 내쉬어라”고 가르친다.

-호흡 즉 숨은 그리스도교에서도 중요하다.
창세기의 창조설화에는 감동적인 얘기가 나오지 않는가?

“하느님이 당신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고 아직 생기(life giving breath)가 없던 사람의 형태에 하느님이 직접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창세기 2, 7)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쉬는 숨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불어넣어주신 하느님의 숨이다.

-호흡명상이란 하느님의 숨을 의식함이며 이것이 곧 성령을 의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틱낫한 스님은 말씀하신다.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신학을 거치는 것보다 성령을 통하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우리가 성령과 접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살아계신 실재로 접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숨을 내 쉬시며 말씀하시길 “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2)
지금까지 호흡(숨)을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숨은 하느님이 불어넣어주신 생기이며 성령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호흡명상을 한다는 것은 호흡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호흡을 깊이 의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알아차림’은 곧 Mindfulness와 통하는 표현이다.
즉 마음을 다해 호흡을 알아차리고 호흡에 마음을 다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숨을 깊이 의식함을 통해서 ‘지금 여기’에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많은 경우 과거나 미래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끊임없이 과거나 미래로 도망쳐 버린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지금 여기’라는 현재를 충실히 살지 못한다.
 
*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부처님, 부처님과 제자들은 무슨 수행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앉고 걷고 먹는다. 그렇지만 부처님 누구나 앉고 걷고 먹지 않습니까?
우리는 앉을 때 우리는 우리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걸을 때 우리가 걷고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먹을 때 우리는 먹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와같이 마음을 다해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야말로 호흡명상이 추구하려는 것이다.

예> 7월11일 일요일복음- 착한 사마리아사람

3사람이 등장한다.(사제 레위사람 사마리아인)
사제는 미사, 레위사람도 무언가로 바빴다. 그들의 마음은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그 현실에 있지 않았고  자기 일과 미래에 가 있었다.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만이 지금 여기를 인식했다. 착한 사마리아사람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신 메시지는 ‘바로 지금 여기’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마음을 다하기 위해선 정념의 힘을 키워야 한다.
정념의 힘을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사제나 레위사람처럼 ‘길들여진 습관’대로 살게 된다.

-습관의 힘이란 우리 안에 형성된 정서프로그램을 말한다.
우리의 정서프로그램은 너무 빨리 작동하여 우리를 지배해 버린다.

-우리가 습관의 힘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정념의 힘을 기르는 길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호흡명상이다.

-호흡은 단순히 살기위해 숨쉬는 생명연장의 차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숨을 쉼으로써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숨을 들이쉴 때 내 주변에 있는 나무들과 풀들이 내 품는 산소를 들여 마신다.
그 나무는 우리가 내품는 이산화탄소를 들여 마신다.
그 나무가 자라기 위해 햇빛 비 새소리 구름... 이렇게 우리의 숨은 이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호흡의 각성은 그리스도교 전통에도 나온다.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인 필로칼리아에서는 다만 호흡에 맞추어 화살기도를 드리라고 나온다.
이 화살기도는 “호흡을 통해 들이마신 공기를 모두 심장에 들어가게 한 다음 그대로 있으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기도하시오.  그만 두지 말고 계속 하시오.

**호흡명상**

1) 호흡명상은 좌선과 함께 한다. 그래서 먼저 좌선하는 자세부터 그림을 통해 설명하겠다.
① 명상에 있어 자세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강조!!!!
 *가부좌는 깊은 호흡명상을 하는데 가장 좋은 자세라고 했다.(요가참선에서는 결가부좌를 lotus position이라고 한다.)
 그림에 나와 있는 어떤 자세를 취해도 좋으나 여기에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등을 똑바로 세운다는 것이다. (straighten the back)

-부처님께서 하신 명상을 단좌명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등을 세우고 앉아서 하는 명상이다.
-등을 세우게 되면 호흡이 자동적으로 복식호흡이 되고 느려진다.
-눈은 감거나 반만 뜨거나 한다.
-손은 양 손바닥을 위로 보고 엄지 손가락을 가볍게 붙혀 단전 앞에 놓는다.

**나의 경험
-일본 나고야 니소도사찰에서 5일간 비구니스님들과 함께 한 intensive retreat
그리고 함께 기도할 때 집단적인 에너지가 수행을 더욱 깊게 해준다.

2)명상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걱정이나 사고를 내려놓는다.

-예수께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내일은 그 나름대로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그날의 괴로움으로 족합니다.”(마태 6, 34)

물론 걱정을 떨쳐버린다는 것이 쉽진 않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걱정거리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걱정거리에 집착할 뿐 아니라 거기에 익숙해져 있다.

-은경축 금경축미사복음-마리아 마르타가 등장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마르타 넌 많은 것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

3) 좌선하여 호흡명상시 많은 생각이나 사고가 일어날 것이다.
이 때 애써 사고를 멈추려 하지마라
그저 내가 지금 딴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후 호흡으로 돌아가면 된다.
(향심기도의 거룩한 단어와 유사)

4) 복식호흡
 
-숨을 들이쉴 때 배가 나오고 내쉴 때 배가 들어간다.(활을 생각하면 됨)
-깊은 숨을 쉬도록 하되 인위적으로 쉬지 말고 자연스럽게 숨을 쉬라
*
<숨을 의식하는 방법>
①수식관-들이쉬며 하나 내쉬며 둘 이렇게 열까지 셈, 세면서 마음을 호흡에만 집중
② 배의 움직임에 집중-마하시 위빠사나 수행
처음엔 두손을 배에 대고 그 움직임을 느낀다.
(숨을 들이쉴 때 배가 나오고 내쉴 때 배가 들어감을 인식)

③ 어구를 이용
-숨을 들이쉴 때 들이쉼을 알아차려라. (Breathing in, I know I am breathing in.)
-숨을 내쉴 때 들이쉼을 알아차려라. (Breathing out, I know I am breathing out.)
-in out을 마음 속으로  내되이어라. 10번 반복

④ deep, slow
-숨을 들이쉴 때 가능한 깊이 들이쉬라. (Breathing in, my breath grows deep.)
-숨을 내쉴 때 가능한 천천히 내쉬라. (Breathing out, my breath grows slowly.)
-deep, slow라고 10번 반복
사실 복식호흡을 하게 되면 자연히 숨을 깊이 쉬게 되고 천천히 쉬게 된다.

⑤ calm, ease
 Breathing in I feel calm. 숨을 들이쉬며 나는 평안합니다.
Breathing out,  I feel ease.

-우리가 숨을 깊이 들이쉴 때 마음이 자연히 고요해지고 평온해진다.
--calm, ease, calm, ease

⑥ smile, release
Breathing in, I smile.
Breathing out, I release.
숨을 내쉬며 나는 미소짓습니다.
-마음을 다해 미소지으면 얼굴에 있는 수백개의 근육이 이완(relaxe)된다.
그 미소가 전몸에 퍼져 온 몸의 전 긴장을 풀어준다.

⑦ present moment, wonderful moment
Dwelling in the present moment, - present moment
I know it is a wonderful moment - wonderful moment

 ............노래.............

-호흡명상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사는 방법을 배울 때 우린 우주 안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며 이슬처럼 맑아지고 산처럼 단단해지며 땅처럼 든든해질 수 있다.
-바로 우리의 본래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린 자주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호흡명상을 통해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감정을 떠나 보낼 수 있다면 우린 늘 항상 여기에 있게 된다. 산처럼 단단히 땅처럼 든든하게 (I am solid as a moutain, I am firm as the earth)

우리가 감정에 사로잡힐 때 우린 매우 불안하고 나약해진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강한 감정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들이 절망 두려움 화로 인해 고통당할 때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끝내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삶을 끝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에 자살이 많이 늘고 있다)
그러나 호흡명상과 좌선명상을 배울 수 있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흘려보내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위빠사나수행

① 호흡을 알아차리기 위해 수를 세거나 어떤 어휘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린다.


② 수행 도중 떠오르는 생각 알아차리기
그런데 숨을 알아차림을 놓칠 때가 있다. 바로 사고가 들어온 것이다.
그럴 때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후 다시 호흡으로 돌아간다.

③ 몸의 느낌을 알아차림
-한 자세로 오래 수행하면 피곤하고 뻣뻣함을 느끼게 된다. 이 때 피곤함,  뻣뻣함하고 알아차린다.
-가려움이 생기면 가려움하고 알아차린다. 알아차린 후 가려움이 사라지면 다시 배의 움직임으로 돌아온다. 긁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마음을 알아차리고 긁는다.

④ 장애를 알아차림
게으름 피우고 싶은 생각이 일어날 때 ‘게으름’하고 알아차린다.
이 수행법이 올바른지,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회의적인 의심이 생길 때 의심을 알아차린다.
수행의 좋은 결실을 원하면 ‘원함’이라고 알아차린다.
수행에 진전이 없고 후회에 빠지면 ‘후회’라고 알아차린다.
수행이 향상되어 행복한 느낌을 맛볼 때는 ‘행복’하고 알아차린다.

⑤ 이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생겨났다가 사라짐을 깨닫게 된다.
수행이 계속되면 모든 것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런 인식이 분명해지면 모든 것은 사라지며,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실상인 무상이고 무아이다.
이 무상함을 깊이 자각하게 될 때 시간이란 바로 지금 찰라 찰라 뿐임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지금 이순간 뿐이다.


<깨어있는 걸음(行禪)>

-우리에게 걷는다는 것은 단지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이동하는 수단일 뿐,
걷더라도 다만 목적지를 향해서 갈 뿐 걷기 위해 걷지 않는다.
다시 말해 걷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걷기선은 “바로 걷기 위해 걷는 수행이다.”

또한 우리는 걷는 동안도 수많은 생각을 한다.
가서 해야 할 일이나 그 이전에 있었던 일, 즉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며 걷는다.
걷는다는 그 자체에 대해선 안중에도 없다.
틱낫한은 이것이야말로 ‘커다란 상실’이라고 말한다.
틱낫한은 우리의 걸음이 세상에 많은 근심과 슬픔의 발자국을 만든다고 말한다.
우리가 한 걸음을 평화롭게 내딛을 수 있다면 두 걸음 세 걸음을 그렇게 걸을 수 있다. 이렇게 걸음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행선이다.

-우리가 걷는다는 자체에 마음을 다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깨어있는 걸음이다.
-이와같은 걷기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므로 우린 순간 순간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나 지금 도착했네”(I am arrived I am home In the Now In the here)

호흡명상이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라면, 행선은 걷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모든 명상은 다름아닌 도착하는 명상이다. 지금 도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도착할 수 없을지 모른다. 

땅을 짓밟듯이 걷지 말고 나의 발이 땅에 입맞추듯이 걸으라.
마음을 걸음걸음에 집중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자유인으로 걸어라,

<행선방법>

-행선은 실내나 실외 어디서나 가능하다.

-실내에서 할 때에는 한 스탶에 들숨, 다음 스탶에 날숨으로 한다. 
 보통 때보다 조금 느리게 걸으면서 숨쉬기와 발걸음을 조화시킨다.
-실외에선 실내보다 조금 더 빠르게 할 수 있다. 이 때 수를 셀 수도 있고(counting), using a word, a phrase 를 사용할 수 있다.

a. 위빠사나 수행에선 왼발들 때 왼발, 오른발 들 때 오른발을 알아차림
어느 정도 지난 후에는 듦, 나아감, 놓음의 세 단계로 걸음을 알아차린다.
b. 호흡명상과 함께 할 때 한 걸음에 in, 다음 걸음에 out
c. counting 가능---1부터 10까지 세고 다시 10부터 1로 셈
d. 들이쉬며 ‘도착했네’
  (I am arrived I am home In the Now In the here )

e. 예수 나와 함께 ( Lord Jesus be with me), 붓다 나와 함께(Buddha  be with me)

**이와같이 호흡명상이나 걷기선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을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힘을 길러준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모든 행위들이 명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우리가 차를 마시면서도 차명상, 세수하면서도 세수명상이요, 운전명상이요, 먹기명상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이와같이 지금 여기를 사는 법을 배울 때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무엇을 하기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지금 여기가 깨달음의 자리이지 여기를 떠나 다른 미래에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호흡명상을 통해 우리가 키워야 할 mindfulness는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어사는 방법이 된다. 













Ⅲ. 大乘佛敎의 수행방법-看話禪

지금까지 상좌불교의 명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대승불교는 시대적으로 상좌불교 이후에 발전된 불교이다.
마하야나 불교는 그 이전의 불교가 자기 자신의 깨달음만을 강조해 왔음을 비판하면서 나온 불교이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여러 차례 모여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글로서 남기는 작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서로 간의 해석 차이로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부처님의 계율을 당시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자는 이들이 많았다.
바로 이들이 대승불교형성의 기반이 된 자들이다.

이들은 출자가뿐만 아니라 재가자들의 구원의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지녔던 것이다.
붓다는 고통받는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오신 존재로 숭배하기 시작했다. 즉 부처님은 영원한 진리인 법신이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고 본다. (化身)
報身은 중생구원을 위해 여러 형태로 드러낸 보살을 말한다.
보살은 대중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성불(부처됨)을 보류한 이들이다.
불교사찰에 가면 많은 보살상이 있다.
(관세음보살(10개의 머리, 천개의 손) 대세지보살, 보현 문수 지장)
그럼 이러한 대승불교의 명상방법은 어떠한가?
대승불교의 명상은 화두를 써서 명상하는 것을 말한다.

1. 話頭
-화두는 다른 말로 公案이라고 한다.
-공안의 본래 의미는 관공서의 공문서(법령)을 의미함.
공문서는 반드시 준수해야 할 절대성을 지닌다.
공안 역시 공문서처럼 깨침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절대성을 부여.
공안이란 우리의 지성이나 이성으로도 결코 풀 수 없는 것이다.
-화두는 개념적 사고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 화두의 종류
-문헌에 오른 것만 1700개
<공안의 예> 당신이 태어나기 전 당신의 본래얼굴은 무엇인가?
-우리는 손뼉칠 때의 소리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한쪽 손의 소리는 어떠한가?
-한 중이 동산에게 물었다.부처란 무엇입니까 삼베 세근
-한 중이 조주에게 물었다. 달마가 중국으로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뜰앞의 잣나무

-<俱胝竪指>
구지스님이 天龍스님의 지도하에 깨친 후 사람이 찾아와 선의 묘체를 물어도 다만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며 모든 질문에 답할 뿐이었다. 그 스님 밑에 수행하던 동자 하나가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이 없는 사이에 사람이 와 스님이 어떤 설법을 하는지 묻자 동자는 스님의 흉내를 내어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그 후 구지스님이 이 얘기를 듣고 동자를 불러 자조지종을 듣고는 동자가 손가락을 하나 들었을 때 그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
동자가 아픔을 못 이겨 울부짖으며 달아날 때 스님이 동자를 불렀다. 동자가 돌아보자 스님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그 순간 동자는 홀연히 깨쳤다.

<해석>
구지는 손가락을 들어 보임으로써 자신의 본래면목을 드러낸 것이다.
질문한 사람이 볼 줄 아는 눈을 갖고 있다면 이런 뜻밖의 행위에 구지의 본래면목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자의 행위는 흉내일 뿐이다.
그러나 동자는 자기 손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통해 그의 몸과 마음이 고통 자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이 어떤 일에 완전히 몰입할 때 그 사람의 본래면목이 드러난다. 구지스님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안에서 밖으로 쪼는 것이 줄, 암탉이 밖에서 쪼는 것이 啄이 동시에 일어난다. 몸 전체로 서로 통한 것이다.

- 無字話頭
무자화두는 趙州(778-897)의 문답을 기원으로 함. (狗子無佛性)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왜 없다고 했을까?
-그러나 조주가 학인과 나눈 문답 자체에 간화선에서 말하는 식의 화두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조주의 無字를 간화선의 관점에서 접근한 최초의 선사는 五祖 法演(1024-1104)이다. 이 법맥에서 園悟의 뒤를 이은 자가 바로 大慧宗杲인 것이다. (대혜가 제시한 간화선의 화두는 무자화두 뿐이다.)

5. 화두참구

1) 활구참구와 사구참구
* 活句참선-활구란 선지식으로부터 공안을 받아 이론을 사용치 않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것이다. 이 의심을 관조해 감으로써 더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 속이 가득차고 온 세상이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의식적으로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된다. (밥먹을 때나 화장실 갈 때나 차 탈 때, 잠잘 때, 꿈 속에서도.........)
* 死句참선- 죽어있는 글귀를 쓰는 참선으로 공안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 분석 종합 비교적용해 보는 것,

2) 화두를 듬.
화두를 ‘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빈틈이나 끊어짐없이 계속 화두를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대혜는 말하기를
 
“차 마시거나 밥 먹는 동안, 기쁠 때나 노여울 때, 벗과 대화를 나눌 때,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누워 있거나 그 어느 경우이건 잠시도 화두를 놓쳐선 안됩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없다”는 화두를 놓치지 말고 어느 때나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빈틈이나 끊어짐이 있었다는 것은 화두를 놓쳤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다시 번뇌망상(사고)의 경지에 다시 빠졌음을 말한다.

- 이와같이 사고를 막기 위해서 선에선 화두를 끊임없이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고를 방지할수 있는 길은 그것이 발생했을 때 곧바로 화두를 듬으로써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항상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한시도 화두를 놓치지 않고 든다’는 것과 통한다.

-이와같이 ‘끊임없이 화두를 든다’는 것은 일정하게 화두를 공부하는 시간과 공간을 정해놓고 완전히 일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수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정시간 정해두고 선을 하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일상생활에서도 화두를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팔정도의 Right diligence에 해당

3) 大疑團 (커다란 의심 덩어리)
-화두는 사유세계로 풀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의 커다란 의심 덩어리라 할 수 있다.
-많은 화두가 있지만 이것 저것 바꾸어가며 수행하기 보다 하나의 화두를 계속 든다. 즉 하나의 화두를 타파하면 다른 화두가 다 해결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같이 선에서 ‘화두를 의심하라’라고 강조하는 것은 화두는 논리적으로 풀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깨달음의 세계는 논리와 이성 개념의 세계를 초월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4) 깨달음
-이와같이 간화선은 화두를 타파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見性成佛).
그럼 과연 선을 통해 추구하는 깨달음의 세계란 무엇인가?
깨달음은 어떤 황홀한 경지나 신비체험과 같이 생각해선 안된다.
다시 말해 불교의 깨달음은 결코 황홀경(엑스타시)나 신비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실상을 자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연기에 대한 깨달음이요, 공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와같이 종전에 깨닫지 못했던 존재의 실상에 대한 눈뜨임은 바로 완전한 의식전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5. 깨달음과 메타노이아

-불교의 깨달음과 비교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표현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회개라고 본다.

- 구약성서에서는 회개를 죄로부터 벗어나는 改心으로 주로 말해왔다.
이와같이 회개를 죄와의 연관성 속에서만 보는 관점 때문에 회개는 도덕적 의미를 지닌 용어로 인식되어 버렸다.

-그러나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말씀하신 “때가 차서 하느님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 14-15)”에 나오는 회개는 “죄를 뉘우쳐라”라는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쓰신  '메타노이아'는 어원적으로 볼 때, 희랍어 metanois(변화한다)의 명사형이다. 그 의미는 영어의 repentance 같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다짐 이상의 의미이다.
즉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이루어지는 의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는 ‘범한 죄의 통회’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실존의 근원인 하느님께 우리 전 존재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앞서 깨달음은 완전한인식의 전환이라고 했다.
종전에 지녔던 인식체계로부터 완전히 전환된 새로운 인식이다. 회개 또한 우리의 실존을 하느님을 향해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한스 큉은 회개를 "인간의 사고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나의 이기주의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방향을 돌린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전 인격으로 철저한 의식적 재구성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한스 큉은 우리의 사람됨 전체가 궁극적으로 변화된 메타노이아 체험이야말로 그리스도교에서 중심적으로 중요한 것 (central importance)라고 보았다.

<하느님나라와 니르바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 나라와 비교할 수 있는 불교적 표현은 니르바나이다.
니르바나는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거짓자아로부터 자유로와짐으로써 모든 이기적인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린 상태,
 이와같이 무아의 상태에서 베푸는 사랑의 자비가 지배하는 세계가 바로 니르바나이며 하느님 나라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는 바로이러한 하느님나라를 지향하기 위한 회개이다.
-따라서 회개란 우리의 전존재의 방향을 하느님께 돌림을 의미한다.

<의식변화의 차원에서 지속적인 수행으로 나아감>

이같은 회개는 단 한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갑작스런 체험이 아니라 거듭 체험되어져야 할 신앙이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이다. 단 한번의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수행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우리의 무의식 안에 있는 습관의 기운(습기) 때문이라고 본다.
습기란 우리 안에 형성되어온 정서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향심기도)

-무의식의 정화과정을 통해 하느님을 향한 지속적인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깨달음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회개에 대해 살펴보았다.

<간화선의 명상방법>
1. 믿음
불교는 믿음를 중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선사들은 한결같이 큰 믿음을 지니라고 말한다. 무엇에 대한 믿음인가?
다르마에 대한 믿음이며 동시에 불성(Buddha nature)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스도식으로 표현하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며 우리자신의 본래성 즉 하느님의 모상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가 불교로부터 배운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바로 불성에 대한 믿음과 비견할 수 있는 하느님의 모상에 대한 믿음이다.)

-여기선 불성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불교경전인 열반경에 보면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불성이란 우리의 본래성이 부처님의 성품이라는 것이다. 본래 부처님의 성품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불성과 비교할수 있는 그리스도교적 표현은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했다.
즉 우리 자신의 본래성이 하느님을 닮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전통신앙은 너무 오랫동안 원죄 신앙에 치우쳐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죄에 대한 회개만을 강조해 왔다.
우리의 본래성을 잊고 살아온 것이다. 우린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 안에는 신성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원복사상(original grace)-창조신앙에 대한 깊은 관심은 이에 대한 반영이다.
-이제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회복해야한다.
 
-왜 이토록 믿음이 없는가? 라는 예수님의 한탄을 상기하자.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며 동시에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리의 본래성에 대한 믿음이다.

**토마스머튼의 <칠층산>에 나오는 머튼과 친구 밥 랙스와 대화
랙스 ; 자넨 무엇이 되고 싶은가?
머튼 : 잘 모르겠네. 그저 괜찮은 가톨릭 신자?
랙스 ; 괜찮은 가톨릭 신자라니. 성인이 되고 싶다고 말해야지
머튼 : 내가 어떻게?
랙스 ; 그렇게 원함으로써
머튼 ; 난 성인이 될 수 없네  될 수 없어
랙스 ; 성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렇게 되길 원하는 걸세 자네가 동의하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이 애초에 창조하시고자 했던 모습으로 자네를 바꾸어 놓을 거라는 사실을 믿지 않나? 자네는 그렇게 되길 믿기만 하면 돼

-이 대화는 토마스머튼의 삶을 바꿔놓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토마스머튼은 말하길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악의나 게으름) 죄 때문이 아니라 무지함과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토마스키딩 신부님은 “인간과 의사소통할 수있는 가장 높은 사람의 기능은 바로 믿음”이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을 통해서만 하느님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느님께 동의함으로써
하느님은 오직 하나의 조건 하에서 자신을 전달하신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동의이다.

-우리의 마음밭은 본래 좋은 땅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부족과 무지, 왜곡된 이해로 인해 형성된 정서프로그램으로 인해 가시덤불이 되었고 돌밭이 되었다.
좋은 땅이란 바로 우리의 본래성을 회복하는데 있고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다.

-지금까지 선을 하는데 있어 믿음이 필요하고 그 믿음이 바로 불성에 대한 믿음이며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모상에 대한 믿음임을 살펴보았다.   

2. 화두선택
1) 무자화두-불교에선 무자화두(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를 든다고했다.
(스승에 따라 제자의 근기에 맞는 화두를 선택해서 주기로 한다.)


<무자화두를 드는 방법>
① 숨을 깊이 마시며 무, 내쉬며 무
② 익숙해지면 들이마시고 내쉴 때 한번만 무
③ 두 번 들이마시고 내쉴 때 무
④ 후에 무 한번 하고 그 속에 있을 수 있다면 무를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3. 그리스도인의 공안
1) 예수
-이 한 마디 안에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비가 함축되어 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의 본래성에 대한 믿음에로의 회귀는 바로 예수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야말로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삶이 말해주고 있다.
예수는 자기로부터 해방된 삶, 곧 무아적 삶을 사신 분이다. 자기로부터 해방되었기에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활짝 열린 삶을 살 수 있었던 분이다.
 
2) 예수 이외에 십자가, 하느님,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이 택한 화두를 하나의 의심덩어리로 삼는다.
3) 방법은 무자화두와 같다.

앞서 살펴본 상좌불교의 명상은 우리 자신의 모든 움직임 느낌 마음에 집중하는데 있음을 배웠다.
이에 반해 대승불교의 명상은 화두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화두 역시 1700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문제전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화두”라고 볼 때 양 명상은 통하는 면이 있다.
다시 말해 화두선이건 위빠사나선이건 자기 몸과 마음의 문제를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명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상좌불교의 호흡명상을 통해 궁극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존재의 무상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존재가 상호연관되어 있다는 연기와 일맥상통한다.
대승불교의 선 또한 커다란 의심 덩어리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분별지를 초월하여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는 세계인 무분별지의 세계를 만난다.
즉 인식의 큰 전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얻게 되는 지혜 역시 삼라만상의 진리인 연기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러한 연기에 대한 깨달음은 단순한 지혜가 아니라 자비로 연결되어 있다.
십우도의 8도를 통해 이룬 공의 세계는 10도의 자비행을 통해 완성된다.
이런 점에서 불교가 말한 궁극적인 깨달음의 세계인 연기는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만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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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행수행-지식선(호흡차단), 단식수행

 2) 올바른 집중, 한 가지 대상을 향하는 마음을 기르는 것 하나의 대상을 골라 단단히 붇들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정정을 통해 한 가지에 집중할 때 우리는 주어진 매순간을 철저히 살아갈 수 있다.

 3) 한 선승은 인간을 세부류로 나눈다. 머리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런 자는 자기가 쓰러질 때까지 머리를 계속 부풀린다. 거꾸로 세운 피라미드는 곧 쓰러진다. 둘째는 가슴에 가치를 두는 자로 군인형으로 겉보기엔 절도있고 훈련이 잘된듯 하나 실은 쉽게 굴복한다. 복부나 배꼽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힘차다.

 4) 살아있는 붓다 살아있는 그리스도6-7

 5) 필로칼리아(Philokalia)란 삶과 진리 계시의 초월적 근원으로 이해되는 "아름다운 것", "고귀한 것", "탁월한 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이 사랑을 통해서 지성은 정화되고 조명되고 완전해진다.
[필로칼리아]는 4세기부터 1000여년 동안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으로서 성경 다음으로 귀중히 여기고 있다. 이 책은 시간의 미로를 통과해 가는 여정, 즉 삶에 있어서 광야와 허무를 통과해 가는 사랑과 지식의 고요한 길(헤시키아; hesychia)이다. 이는 영적인 길을 계시해 주며 그 길을 따르도록 유도하는 적극적인 요인이다.
필로칼리아에 수록된 본문들은 관상생활 실천의 길잡이가 된다. 성 니코디모스가 표현한 것처럼, "내면의 기도를 배우는 신비한 학교"로 세례를 받을 때 영적으로 성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그렇게 신화(theosis)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엡 4:13)하게 하는 장소이다.
필로칼리아는 정교회 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 전통의 영적 가르침에 있어서 중요한 보고로서, 이 책은 총 4권 중 제 2권이다.

 6) 선과 성서, 102

 7) 예수는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심을 현존하는 예수님을 의식함.

 8) 선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간화선이고 다른 하나는 묵조선이다. 간화선은 화두를 써서 명상하는 것이며 묵조선은 화두를 쓰지않고 명상하는 것이다.

 9) 간화선에서 말하는 見性成佛에서의 성품을 우리 안에 내재한 어떤 영원한 무엇으로 착각해선 안된다. 불교의 기본진리는 무아이고 무상이다. 불성 또한 무아와 무상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무아는 나라는 존재가 나아닌 존재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한다. 我나 무아를 대립적 개념으로 생각해선 안된다. 無我건 我이건 그 개념의 틀에 사로잡혀선 안된다. 무아란 바로 삼라만상이 연기법 아래 있음을 말하는 또다시 표현일 뿐이다.

 10) 토마스 머튼, 삶과 거룩함, 3쪽

 11) 하느님과의 친밀 120

 12) 예수님은 부처님처럼 인간을 고립된 실체적 존재로 보지 않고 관계적 존재 즉 하느님과 동료 인간에게 열린 관계적 존재로 파악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닫힌 고립된 존재 자기중심적 존재 자기 자신에 갇힌 존재야말로 비참한 죄의 삶이다. 죄인이란 자기 안으로 굽은 자기 안에 갇힌 인간이라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마르틴 루터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