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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일본불교 4. 무로마치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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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22.♡.9.79) DATE :
14-06-30 14:16 RE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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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일본불교 4. 무로마치불교.pdf (203.9K), Down : 48, 2014-06-30 14:16:22 | |
4. 무로마치 불교
가마쿠라 시대 다음은 남북조시대(1333‐1392)이고 이어서 무로마치 시대 (1392‐1477)이다. 남북조 시대부터 살펴보자. 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고 고다이고 천황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천황체제는 짧은 시간에 다시 붕괴되었고 3년 후인 1336년에 다시 무사들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막부를 중심으로 한 권력 체계에 익숙해져 있던 무사들이 천황 중심 체제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는 데 앞장섰던 아시카가 다카우치라는 사무라이가 있었다. 그가 다시 무사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켜 천황이 있는 교토를 침공하자 천황은 교토에서 밀려나 교토 남쪽에 있는 요시노라는 곳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그 곳이 남쪽이기 때문에 남조가 되었다. 한편 다카우치는 1336년에 교토에 고묘천황을 세우고 자신이 실권을 쥐었다. 그것이 북조였다. 이렇게 짧은 기간 남북조 시대가 있었고 남조가 멸망하고 북조가 남북을 통일하여 막부가 다시 열렸다. 1392년에 다카우치에 의해 남북이 합일되면서 무로마치막부가 세워졌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는 1392년부터 1447년까지 이어졌다. 일본 역사 안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때를 전국 시대라 하는데 전국시대 전에 오닌의 난(1467‐1477)이 일어났다.
오닌의 난 당시 장군들의 권력 분쟁에 따른 내란으로 지방 제후인 다이묘들이 동서로 대립해서 싸웠다. 오닌의 난이 일어나면서 전국적으로 혼란기에 들어갔다. 소영주였던 다이묘들의 세력이 점점 커졌는데 이들은 독자적인 봉건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오닌의 난 이후 전국시대로 돌입하게 되는데 장군, 제후들이 실권을 빼앗기고 다이묘들이 실권을 쥐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내란을 일으키는 혼란한 시기가 온 것이다.
무로마치 시대 막바지에 일어났고 이 난이 끝나가면서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일본은 1467년부터 100년 동안 계속 전쟁에 휩싸였던 것이다. 당시 막부에서 지방관 역할을 했던 슈고 다이묘들이 정치지배자로 등장하면서 각 지역마다 독립국가를 형성했다. 정치적 지배자이자 영토 지주가 된 슈고 다이묘들에 의해 전쟁의 연속이었던 시대가 바로 전국시대이다. 이 상황 안에서 불교는 어떻게 변했을까?
전국 시대와 무로마치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 사회는 하극상‐ 실력이 있으면 하급자라도 상급자를 밀어낼 수 있는 현상‐이 생겼는데 종교계 안에도 이러한 현상이 벌어졌다. 당시 가마쿠라 불교의 주종관계가 다 무너지고 대혼란의 시기를 겪으면서 쇼군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패권 다툼이 계속되었는데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일본 전국이 통일되었다.
무로마치 시대, 전국 시대에 불교는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가? 이 시대는 새로운 불교 형태가 등장하지 않았고 가마쿠라 불교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정토진종과 니치렌종이 제일 영향력이 있었다. 물론 선종도 농촌에 열심히 포교하고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선종보다는 정토진종과 니치렌종이 영향력이 있었다.
정토진종은 어떻게 세력 확장에 성공했을까? 정토진종은 신란이 결혼을 함으로써 세습적으로 전수되었다. 신란의 딸인 가쿠신니는 오오타니라는 곳에 신란의 사당을 세우고 혼간지(本願寺)라고 이름붙였다. 본원사, 일본 말로 혼간지(本願寺)는 아미타불이 내세운 본원에 입각한 신앙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다. 이렇게 오오타니에 있는 혼간지를 중심으로 혈통을 잇는 사찰만이 신란의 가르침을 올바로 계승한다 라는 혼간지파가 생겨나면서 세력을 키워갔다. 혼간지 8대 법주인 렌뇨()는 혼간지의 세력을 크게 키운 사람이다.
다른 사원들과의 마찰이 심한 상황에서 렌뇨는 잇코잇키를 지시했다. 정토진종을 다른 말로 일향종(一向宗)이라고도 하는데 정토진종이 일으킨 잇코잇키는 농민반란이다. 이때 일어났던 내란을 잇키라고 하는데 땅과 관련된 잇키를 쯔찌잇키라고 하는데 이때 많이 일어났다.
쯔찌잇키는 농민들이 다이묘들과 연합해서 장군들인 슈고다이묘의 지배에 대항하는 반란이다. 땅이 있고 실력만 있으면 하급자들이 상급자들의 세력에 도전할 수 있게 됨으로써 종전의 권력체계가 무너지고 사회적인 대변동이 일어났다. 이것을 하극상이라고 한다. 쯔찌잇키와 같은 내란을 통해 일어난 것이 하극상이다. 아래 있는 사람들이 올라서서 권력을 뒤집어엎는 현상이었다.
쯔찌잇키와 달리 잇코잇키는 정토진종 신도들인 농민들 반란이다. 전국시대에 들어가면서 이러한 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렌뇨가 처음에 잇꼬잇키를 시작한 것이었지만 잇꼬잇키에 의해 혼간지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영주, 무사들과 마찰이 심해졌다. 사실 그렇게 세력이 커질 수 있었던 것은 농민들이 절대타력 신앙을 갖고 있어서 아미타불신앙을 지니면 정토로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의 힘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면서 단기간에 강력한 세력집단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렌뇨는 농민 신도와 봉건 지주들 간의 마찰이 일어나면서 중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왕법위본(王法爲本)을 주장하면서 농민봉기를 잠재우려 했지만 실패하고 반란은 계속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에 모든 하극상의 움직임을 장악하고 민중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전국을 통일시켰다.
1) 오산문화
무로마치(1392~1447) 불교는 가마쿠라 불교의 연장선에 있으며 가마쿠라 불교로부터 큰 사상적인 변화는 없었고 세력확장에 더 힘을 쏟았다. 당대 무로마치 막부와 결탁해 중심세력이 된 것은 임제종이었다. 도겐을 창시자로 한 조동종은 스승의 유언대로 산에 들어가서 세상을 등졌기 때문에 당대 정치세력과 결탁될 수 없었다. 당시 임제종 선승들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면서 중국 남송의 선종 관사 제도를 도입하게 되었다. 이를 오산십찰제산 제도라고 하는데 임제종의 중국 승려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오산제도는 오산십찰제도를 줄인 것으로 전국에 5개의 대표적인 사찰을 선정하고 그 밑에 10개씩의 사찰을 두는 것이다. 오산십찰 제도는 세 단계로 나뉘는데 다섯 개의 중심 사찰을 만들고 중심 사찰 아래 열 개의 사찰을 둔다. 이 밑에 다시 나머지 여러 개의 사찰을 둔다. 권력적으로 통제가 쉽게 하기 위한 제도라고 볼 수 있다.
무로마치 막부는 이 제도를 받아들여 가마쿠라에 오산 사찰을 세웠는데 무로마치 시대의 중심은 교토였기 때문에 가마쿠라에도 오산을 만들고 교토에도 오산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사찰 이름을 들면 가마쿠라에는 건장사, 교토는 천룡사가 있었다.
당대 사찰은 수행사찰이라기보다 국가에 소속된 관사였다. 이렇듯 불교는 정치 세력과 결탁하면 종교의 순수성이 떨어지고 세속화되어가는 현상이 빚어진다. 오산제도가 교토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면서 임제종은 선사들을 거점으로 오산문화를 만들어갔다. 이를 다섯 사찰의 이름을 따서 오산문화라고 하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일본의 선문화를 오산문화라고 한다.
오산문학에 대해 들어본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여기에 해당하는 오산 승들이 일본문화에 기여한 바가 아주 크다. 그것을 오산문화라고 한다. 일본의 선종은 차, 정원 같은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산문학도 있고 복판인쇄가 발달해서 출판업이 성행했으며 오산 선승들 중에서는 화가도 많았고 학자도 많이 나왔다고 한다. 오산선승들을 통해서 주자학이 들어왔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중국 선승들이 남송의 주자학을 들여와서 일본에 퍼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전수받은 주자학은 에도시대의 유교로 연결되었다.
일본에는 선이 일상생활에 뿌리깊게 퍼져있다. 다도나 문학, 일상 에티켓, 인생 지향하는 바가 선에서 비롯된 것이 많은데 오산문화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무로마치 선불교는 일본인의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오산문화를 형성하는 데에는 승려들이 큰 기여를 했다. 문학의 경우 오산 승려들이 지은 한시가 많이 성행하여 오산문학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었다.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오산문학의 출판업도 번성하게 되었고 승려들은 또 수묵화도 많이 그렸다. 그러나 에도 시대에 가면 불교가 쇠퇴하고 유교가 중심사상으로 떠오르는데 재미있는 것은 오산의 선승들이 그것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오산의 선승들이 주자학을 가져오면서 이것이 에도 시대 사상의 중심이 된 것이다.
2) 무소오 소세끼
무로마치 시대에 기억해야 할 오산 선승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무소오 소세끼(1279‐1351)를 들 수 있다. 그는 처음부터 임제종 선승은 아니었다. 그도 18세에 도다이지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진언종 승려로 출가했다. 진언종과 천태종을 공부했으나 만족할 수 없었다. 진언종, 천태종 불전을 두루 공부하다가 당시 스승이 죽음에 임박하면서 부린 추태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경전에 정통한 스승마저도 아직 성불하지 못했음을 보면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성불할 수 없구나 하며 자신의 공부를 의심하게 되고, 진언종 안에서 학문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한계를 느껴 스무 살에 새로운 길을 가고자 100일 참회기도를 했다.
그는 100일이 되기 사흘 전에 황홀경을 체험했는데 꿈에서 아주 깊은 산 속에 있는 장엄한 사찰을 보았다. 그 사찰의 이름을 가지고 그의 이름도 지었는데 사찰의 이름은 고산석두였다. 무소오는 석두라는 사찰에서 달마대사의 상을 보았다. 달마는 인도에서 중국에 선을 알린 선사였기에 그는 자신이 갈 길은 선종이라는 확신을 갖고 선종으로 개종했다. 이름을 소오세끼라고 하고 꿈에서 봤다는 뜻으로 무소오를 앞에 붙였다. 그는 이렇게 1924년에 선종으로 전향해서 31세에 깨달음을 얻었다.
득도한 다음에 자만심이 생겼던 것 같은데 그러다 한번은 방에 들어가려 하는 순간에 발을 헛딛어 넘어지게 되었고 그 순간 깨달음이 왔다고 한다. 깨달은 후 37세부터 50세까지 13년동안 산에 들어가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용산암이라는 사찰에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51세인 1325년에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세상에 나와서 많은 일을 하면서 이름이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1325년에 고다이고 천황은 무소오의 높은 경지에 탄복해서 그를 오산 위의 남선사()라는 최고사찰의 주지 자리를 맡겼다.
그때부터 무소오는 적극적인 교화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사실 무소오는 남북조 시대로부터 무로마치 전국 시대까지 살았는데 정권을 잡았던 모든 이가 무소오의 제자가 되어 7조의 스승이 되었다. 그를 주지로 앉힌 고다이고 천황은 남북조 시대 남조의 천황이었는데 남조가 북조에 의해 멸망하면서 고다이고 천황 다음에 고묘천황이 집권했다. 무소오는 일종의 관료인 관승으로 고묘 천황 밑에서도 일했다. 일본 역사 안에서는 지조없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했다고 무소오소세끼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소오소세끼가 양쪽에서 관승으로 활동했던 것은 불교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적대관계에 있던 원수들을 화합시키는 의미였다. 양쪽에서 다 불교의 불법을 펼치고자 해서 그러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그의 저술 안에 쓰여 있다.
그가 죽고 나서도 정권을 잡았던 사람이 무소오의 제자로 남았다는 것은 그의 사상적 깊이가 남달랐음을 말해준다. 무소오는 일본 천황으로부터 국사라는 호를 받았지만 그의 사상은 사후에 굉장한 비판을 받았다. 에도시대의 유학자들은 무소오가 북조에 협조를 했다가 북조가 멸망하자 무로마치 막부에 붙었다면서 그가 권력에 빌붙었던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유학자들도 무소오가 의리를 배반했다고 비판했다. 종전의 주인을 버리고 새로운 주인을 찾는 것이 정의적인 측면에서 의리를 저버리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적대관계에 있었던 세력들을 무소오가 화합하려고 했다는 식으로 정반대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원한을 부처님의 자비로 화합하려고 했던 그의 뛰어난 경지 덕분에 많은 실권자들이 그에게 귀의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오늘날 무소오의 사상은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무소오소세끼는 일본의 전통 사원의 정원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만든 정원 중에 유명한 것으로는 텐유지 정원이 있다. 텐유지는 사실 고다이고 천황의 천도를 위해 만든 사찰이다. 나중에 교토에 가게 되면 금각사, 은각사에 가도 정원을 볼 수 있다. 금각사는 금칠이 되어 있어서 햇빛을 받으면 무척 아름답고 호수에 비친 모습도 아름답다. 반면 은각사는 매우 소박한 절이다. 대조적이다. 류한지라는 곳도 유명하고…
무소오소세끼의 사상은 특별한 것이 없었지만 관승으로서의 역할을 통해 ‘참 수행자는 원수를 용서하고 원수들 간에 화합을 시킬 수 있어야 한다 ‘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오늘날은 정치적 의리보다도 인명을 중시하는 참 자비의 실천가로서 무소오소세끼를 보기도 한다. 또 독특한 점은 아까 말했듯이 은둔자로서의 생활과 세간에서의 생활을 동시에 살면서 양쪽 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양쪽의 삶이 불이‐둘이 아니다 라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3) 잇코잇키와 호케(법화)잇키
남북조시대, 무로마치시대를 거쳐 전국시대까지 굉장히 불안한 시대였다. 1467년부터‐1477년까지 있었던 오닌의 난은 당시 장군들의 권력 분쟁에 따른 내란으로 지방 제후인 다이묘들이 동서로 대립해서 싸웠다. 오닌의 난이 일어나면서 전국적으로 혼란기를 맞게 되었다. 소영주였던 다이묘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게 되었는데 이들은 농지를 갖고 있으면서 독자적인 봉건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오닌의 난 이후 전국시대로 돌입하게 되는데 장군, 제후들이 실권을 빼앗기고 다이묘들이 실권을 쥐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내란을 일으키는 혼란한 시기가 온 것이다. 이때 일어났던 내란들을 잇키라고 한다. 땅에 대한 잇키를 쯔찌잇키라 하는데 이 때 많이 일어났다. 쯔찌잇키는 농민들이 소영주인 다이묘들과 연합해서 장군들인 슈고다이묘의 지배에 대항하는 반란이다. 땅이 있고 실력만 있으면 하급자들이 상급자들의 세력에 도전할 수 있게 됨으로써 종전의 권력체계가 무너지고 사회적인 대변동이 일어났다.
쯔찌잇키와 같은 내란을 통해 일어난 것을 하극상이라고 한다. 아래 있는 사람들이 올라서서 권력을 뒤집어엎는 현상이었다. 전국시대에 모든 하극상의 움직임을 통일시킨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히데요시 또한 서민 출신으로 하극상을 없애고 민중을 무력화시켜 전국을 통일시켰다.
당대 불교 중에 정토진종은 세력이 가장 커진 종파였다. 신란이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의 딸이 대를 잇게 되었다. 히가시야마에 신란의 사당을 지었는데 그것을 혼간지(本願寺)라고 한다. 아미타불의 본원에 대한 신앙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정토진종은 이후 히가시 혼간지, 니시 혼간지 이렇게 동서로 분열되었다. 혼간지의 대를 잇는 사람을 법주라고 하는데 8대 법주가 렌뇨(1415‐1499)라는 사람이었다. 렌뇨에 와서 혼간지의 세력이 급격히 확장되었다.
이때 일어난 잇키가 잇코잇키이다. 잇코잇키는 렌뇨를 중심으로 해서 정토진종 안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다. 정토진종을 아미타불만을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一向宗이라고도 한다. 가가 지방에 있던 영주들과 니치렌종의 승려와 신도 간의 싸움이었다. 아까 말했던 잇키는 농민들과 소영주들이 결탁해서 일으킨 난이었지만 잇코잇키는 정토진종의 신도들과 승려들이 결탁해서 일으킨 봉기이다. 그들이 더 세력이 강했던 이유는 신앙이 있어서였다. 내세지향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내란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잇코잇키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연결되면서 퍼져나갔다. 처음에 잇코잇키는 작은 곳에서 시작했다. 가가지방에서 정토진종의 선교를 막자 렌뇨가 당시 가가지방의 신도들과 승려들과 함께 잇키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너무 세력이 강해져 버렸고 잇키는 전국에 퍼져버렸다. 정토진종의 확산을 막으려다가 정토진종이 확장되는 역할을 해버렸다. 이 사건을 기반으로 삼아서 정토진종은 일본 전체에 퍼져나갔다. 사상적인 발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 자체 신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결과를 맞았다.
잇코잇키는 1488‐1580년까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이것이 진압된 것은 1570년 이후였다. 오사카 이시야마 혼간지의 11대 법주 겐뇨가 오다 노부나가와 대결하면서 결국 혼간지 쪽이 열세에 몰리고 1580년에 화의가 맺어지면서 잇코잇키는 군사력을 상실했다. 정토진종의 혼간지 파가 도쿠가와 시대를 거쳐 에도시대로 넘어가면서 두 파로 갈라져 히가시 혼간지와 니시 혼간지로 나뉘었다. 본래 정토진종의 본산지는 니시 혼간지이다. 히가시 파는 어떻게 생겼을까? 11대 법주인 겐뇨의 셋째 아들이 본산을 맡게 되었다. 겐뇨의 장남이 에도막부를 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일본의 역사가 좀 복잡하다. 무로마치 시대가 지나서 전국 시대가 되어서 혼란기를 경험하고 그 다음에 모모야마 시대를 맞는다. 그 다음이 에도시대인데 에도시대를 연 다이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에도 시대를 도쿠가와의 이름을 따서 도쿠가와 시대라고도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를 계승한 사람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겐뇨의 장남에게 땅을 줘서 그곳에 혼간지를 세우게 했는데 그것이 히가시 혼간지이다. 결국 혼간지는 히가시 혼간지와 니시혼간지로 갈라졌다. 에도시대에 분열된 정토진종은 오늘날까지 니시 혼간지파와 히가시 혼간지파로 나뉜다. 정토진종은 이때부터 많은 신도 수를 지닌 종파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제일 큰 종파로 자리잡고 있다. 무로마치 시대의 정토진종과 더불어 크게 교단을 확장했던 또 하나의 종파는 니치렌종이다. 니치렌종은 정토교가 사후 극락, 정토 왕생을 주요한 교의로 삼았다면 니치렌종은 현세에 가치를 두고 현세 개혁을 주장하는 성격이 강했다. 정치사회의 모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실천적 자세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 때문인지 니치렌종의 신도들은 많은 이들이 상인 계급이었다. 특히 교토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 많았다. 무로마치 시대에 니치렌종을 확장시켰던 대표적인 인물이 닛신이다. 그는 니치렌과 성격이 매우 비슷해서 무척 과격하고 정토종에 대한 심한 발언도 서슴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과격한 발언을 해서 탄압을 많이 받았는데 포교 활동에 굉장히 열심이었다. 그 덕분에 오닌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토 상인 과반수 이상이 니치렌종 신자가 되었다.
닛신(1407‐1488)은 조사인 니치렌을 모방해서 당시 장군이 아시카가 요시노리였는데 그에게 직언을 했다. 장군 저택에 초대받아 가서 ‘일본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은 장군이 법화경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법화신앙을 가져야 이 세상에 평정이 온다’ 라고 말한 것이다. 닛신이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자 이시카가는 닛신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침묵>이라는 소설에도 잘 나와있지만 일본 사람들은 탄압할 때 좀 지독한 면이 있다. 펄펄 끓는 냄비를 닛신의 머리에 뒤집어 씌었다고 한다. 그래서 닛신의 별명이 냄비관을 뒤집어쓴 스님이었다. 그렇게 강한 탄압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닛신의 신앙심은 너무도 강했기 때문에 교토의 상인들에게 현세의 이익 추구, 부와 연결되는 현세관을 많이 퍼뜨려서 교토 상인들이 니치렌종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잇코잇키와 비슷한 세력도 형성되었다. 호케잇키(법화일규)가 일어났다.
호케잇키는 정토진종에서 일어난 잇코잇키와 유사한 형태로 니치렌종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다. 정토진종이 농민들이 주 신도층이었고 니치렌종은 교토의 상인들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정토진종과 니치렌종은 한쪽은 내세 지향, 다른쪽은 현세 지향적 구원관을 지님으로써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호케잇키는 교토를 천대종 등의 구불교세력과 잇코잇키로부터 수호하면서 확대되어갔다. 그러다가 1536년 히에이잔에서 6만여명의 승병대군이 니치렌종 본산 21개의 사찰를 파괴하고 호케잇키를 진압했다. 이것이 바로 천문법화의 난이다. 이 난으로 인해 패한 교토의 니치렌종은 본거를 사카이로 옮기고 전국시대말기부터 부흥을 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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